부승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와 오미연을 번갈아 보더니 온몸으로 싸늘한 냉기를 뿜어냈다.“두 분 취미가 독특하네요. 무려 전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말다툼하며 싸울 수 있죠? 정녕 솔선수범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회사가 장난 같습니까?”직원들은 황급히 목을 움츠리고 몰래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오미연이 당당하게 말했다.“대표님, 전 한창 일하고 있었는데 온 전무가 갑자기 찾아와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심지어 다짜고짜 손찌검까지 하고, 이런 사람이 어찌 브랜드 디렉터로서 자격이 있겠어요?”부승민의 시선이 온하랑에게 머물렀고, 어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사과해.”온하랑은 심호흡하더니 양옆에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오 전무가 먼저 사과하면 저도 할게요.”무려 한 기업의 전무가 사내에서 손찌검했는데 잘못한 걸 뻔히 알면서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니?결과를 감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상대방이 먼저 사과하는 것이었다.오미연은 억울한 얼굴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대표님, 제가 대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온하랑이 반박하려는 찰나 부승민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사과해!”단호한 목소리는 거절 따위 허락하지 않았다.온하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쌀쌀맞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눈가가 시큰했다.이제 진실이 무엇인지조차 묻지 않는 건가?부승민의 목젖이 꿀렁거렸다.“다시 한번 말한다. 사과해.”온하랑의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내 부루퉁한 얼굴로 오미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오 전무, 미안해.”오미연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다음엔 국물도 없을 줄 알아.”“다만 왜 모델을 바꿨는지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온하랑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오미연은 피식 웃으며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당연히 대표님의 지시 아니겠어?”온하랑은 깜짝 놀라며 당황한 표정으로 부승민을 바라봤다.부승민은 부인하지 않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차오르는 씁쓸함을 애써 억눌렀다.“하지만 추서윤의 이미지는 우리 제품 콘셉트와 어울리지 않아요.”추서윤은 해외 활동을 이어가면서 대부분 시크하고 도도한 스타일을 고수했다.“그건 네 사정이고 내 알 바 아니야.”부승민이 말했다.“너라면 잘 해내리라 믿어. 이번 광고가 서윤에게 아주 중요하니까 네가 모든 과정을 책임졌으면 좋겠어.”온하랑은 온몸이 무기력하며 얼굴이 점점 굳어졌는데 대체 무슨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자기 첫사랑을 현 와이프에게 맡기는 잔인한 짓을 하다니?정녕 그녀가 슬픔과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감정 없는 사람인 줄 아는 건가?“알았어요, 최선을 다할게요.”온하랑은 목구멍에 생선 가시라도 걸린 듯 따끔거렸고,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화장실.온하랑은 계속해서 헛구역질만 했을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내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배 속의 아이를 달래주었다.벽 거울 속 여자의 얼굴은 창백하고 눈시울이 빨갰다.그녀는 찬물로 연거푸 세수했다.‘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추서윤을 광고 모델로 내세우는 것쯤이야, 광고 촬영부터 송출까지 담당하는 건 늘 해오던 일인지라 문제없을 거로 확신했다.온하랑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그녀는 어떤 난관에 봉착하든 꿋꿋이 버텨내리라 다짐했었다.하늘에서 지켜보는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아이를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그녀는 사무실에 돌아가 임리안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하며 사과했다. 그리고 현재 추진 중인 디자이너 향수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써주겠다며, 앞으로 괜찮은 광고 건이 있으면 임리안을 최우선 순위로 고려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홍유라는 비로소 한발 물러섰다.전화를 끊고 나서 온하랑은 비서에게 추서윤의 자세한 자료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고, 같은 부서 직원들끼리 긴급회의를 열었다.온종일
3년 전, 부승민은 추서윤을 본가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아무리 멀리 떨어졌다고 해도 매일 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물론 이유는 단지 가끔 찾아오는 부승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그날 비록 그녀의 바람대로 마주쳤지만, 추서윤이 여자 친구라며 가족에게 소개하는 부승민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심지어 정원에서 서로 포옹하고 키스하는 두 사람을 발견하지 않았는가?그녀는 앞으로 평생 멀리서만 부승민을 지켜봐야만 하나 싶었다.부승민과 결혼하는 날까지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물론 꿈이라면 언젠간 깨어나기 마련이다.추서윤이 바로 그녀의 단잠을 깨운 장본인이었다.온하랑은 심장이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꼈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랜만이에요. 서윤 씨는 더 예뻐졌네요.”이제 와서 ‘둘째 새언니’라는 호칭은 죽어도 부르지 못할 것이다.추서윤이 생긋 웃었다.“고마워, 너도 예뻐졌네. 참, L.X 친필 사인 음반은 마음에 들어? 네가 예전에 L.X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마침 해외 활동하다가 알게 된 친구거든. 이번에 귀국하기 전에 사인받으면서 특별히 네 이름까지 적어달라고 부탁했어.”온하랑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침착하고 여유 넘치기로 소문난 그녀인데 순간 혼란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마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음거리 신세로 전락한 광대처럼 느껴졌다.이내 멍하니 부승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애원하듯 바라보았다.부승민이 추서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자신이 챙긴 선물이라고, 그가 특별히 부탁한 것이라고 말해주길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그러나 부승민은 무심하게 쳐다보며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했다.“왜? 서윤이가 준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온하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한참 후,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고 무덤덤하게 말했다.“회포는 나중에 풀고 다들 오전부터 기다렸는데 얼른 앉아서 본론부터 얘기
이제 BX 그룹 직원뿐만 아니라 추서윤의 스텝까지 안색이 변했다. 그중 한 사람이 테이블 아래로 몰래 안수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하지만 안수빈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매니저님의 뜻은 회장님께서 옛정 따위 안중에도 없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건가요?”온하랑이 차분하게 되물었다.순간, 안수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그런 뜻은 아닙니다.”이때, 문이 열리면서 부승민과 추서윤이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부승민은 잘생기고 명문가 출신에 추서윤은 예쁘고 이미 인정받은 배우로서 둘의 만남은 뭇사람의 부러움을 사기 충분했다.프로젝트 매니저가 온하랑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대표님과 추서윤 씨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요? 이제 BX 그룹의 안주인이 곧 생기는 건가요?”온하랑은 따끔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내더니 일어나 두 사람을 자리에 안내하려고 했다.“대표님, 와주셔서 고마워요. 자, 여기 앉으세요. 서윤아, 너도 이리 와서 앉아.”안수빈이 온하랑을 앞질러 말하면서 부승민의 옆자리에 추서윤을 앉혔다.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서 둘을 맞이했다.“다들 앉으시죠.”부승민의 말의 끝나기 무섭게 모두 다시 착석했다.그런대로 화기애애한 시간이 이어졌고, 조금 전 어색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수빈과 다른 사람들이 대화 주제를 찾아서 리드했고, 이따금 부승민과 추서윤에게 질문도 했다.부승민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가끔 허를 찌르는 대답을 했다.그에 비해 유난히 조용한 사람이 있었으나 부승민과 추서윤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이런저런 말이 오가다 안수빈은 추서윤의 앞접시를 보며 잔소리했다.“서윤아, 음식 조절하는 거 잊지 마.”연예인은 몸매 관리에 엄격했다.“알았어...”추서윤은 입을 삐죽 내밀며 삼겹살을 부승민의 앞접시에 놓았다.“승민아, 나 다 못 먹겠어. 네가 먹어줘.”앞에 마침 매운맛 육수와 기본 육수가 있는데, 이는 매운맛 육수에서 건져낸 삼겹살인지라
“아니.”부승민은 의자에 기대앉아 눈썹을 문질렀다. 그는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가자.”집에 돌아오니 도우미들이 이미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간단하게 저녁 밥을 먹은 뒤 부승민은 서재로 가서 또 일을 했다.온하랑은 거실에 앉아서 드라마를 보았다. 따뜻한 물 한 컵을 받고 약상자에서 약을 꺼내 함께 넘겼다.“무슨 약 먹은 거야? 어디 안 좋아?”뒤에서 갑자기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가슴이 철렁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요즘 소화가 잘 안돼서.”부승민은 걸어와서 물 한 컵을 부었다.“병원에는 가 봤어?”그는 오늘 점심 식사에서 따뜻한 음식만 먹겠다고 했던 온하랑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응, 가 봤어.”“그럼 됐어. 이제부터 건강 잘 챙겨.”그의 관심 어린 말에 온하랑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 서글펐다.이른 아침, 온하랑은 핸드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그녀는 졸린 두 눈을 겨우 뜨고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 전무님, 일이 터졌습니다. 지금 실시간 검색어 확인 부탁드립니다.”온하랑이 물었다.“무슨 일인데요?”한편으로 재빠르게 태블릿으로 각 포털 사이트의 뉴스피드를 확인했다.“부 대표님과 추서윤 씨의 사진이 찍혔습니다.”비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온하랑도 기사를 클릭했다.비서는 온하랑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온 전무님, 어떻게 처리할까요?”“먼저 추서윤 씨 소속사에 연락해서 대응하지 말라고 하세요. 내가 회사에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요.”실시간 검색에 두 사람이 함께 레스토랑에 출입하는 사진이 찍혔다. 각 사이트에서 모두 화제가 되었다.두 회사에서 레스토랑에 출입하는 사진을 동시에 올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을 홍보하면 된다.“알겠습니다.”비서가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온하랑이 말했다.“잠깐만요. 어제 다 같이 찍은 사진 핸
부승민은 BX 그룹의 대표로서 전에도 여러 번 경제 뉴스에 얼굴을 보였었다. 잘생긴 외모와 큰 키, 그리고 대단한 집안까지, 거기에 스캔들도 별로 없어서 그를 좋아하는 팬들까지 있었다. 팬들은 그의 태생이 소설 남자 주인공이라고 말했다.추서윤은 예쁘고 해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 성공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모든 면에서 잘 어울렸다. 언론플레이까지 더 해져 네티즌들은 두 사람을 축복했다. 두 커플을 응원하는 팬까지 생겼다. 그들은 부승민과 추서윤 커플의 별명을 ‘윤민커플’이라고 지었다.짧은 시간 내에 팬은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글을 잘 쓰는 팬들은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를 썼고, 미술을 전공한 팬들은 두 사람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전에 추서윤이 출연한 드라마의 장면과 부승민이 경제 뉴스에 나온 장면을 편집해 짧은 영상도 만들었다.온하랑은 팬카페에 들어가서 팬들이 닉네임을 바꾼 것도 보았다. 「오늘 부승민과 추서윤은 결혼했나요?」팬들은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달콤한 시간을 포착하려고 했다.그들은 추서윤이 출국한 뒤 부승민은 계속 솔로였고 어떠한 스캔들도 없이 추성윤이 귀국하기를 기다렸다고 생각했다.정말 완벽한 커플이다!그러나 온하랑에게 이런 말들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목이 꽉 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분명 그녀가 부승민의 부인이다.부승민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녀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었다.온하랑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을 끄고 대표 사무실로 향했다.그녀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크했다.“들어오세요.”안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문을 열고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서 진지하게 말했다.“부 대표님, 오늘 스캔들에 대한 홍보팀의 대처가 부적절했다고 생각됩니다.”부승민을 차가운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말해 봐, 어떤 게 부적절했다는 거지? 뭐가 부적절한데?”“이
침묵이 흘렀다.한참 지난 뒤 부승민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너무 조급했어. 미안해...”미안해...허.결혼 3년 만에 그가 남긴 건 미안하다는 세 글자뿐이었다.“내가 미안해. 원하는 거 있으면 내가 다 보상해 줄게. 하지만 이 일은 서윤이와는 상관없어. 서윤이는 내가 결혼한 것도 몰라. 그러니까 서윤이는 건드리지 마.”온하랑은 쓴웃음을 지었다.이게 바로 그녀의 남편 부승민이었다.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추서윤을 위해 그녀를 협박했다.온하랑은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더 이상 부승민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마음대로 생각해요.”그녀는 성큼성큼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연약하고 처량한 뒷모습.부승민은 온하랑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부승민은 번호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승민아, 스캔들 너도 봤지? 미안해. 내가 좀 더 조심했으면 찍히지 않았을 텐데.”핸드폰에서 추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승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네 탓 아니야. 내가 이미 처리했어. 너한테는 피해 안 갈 거야.”“정말? 고마워 승민아. 진짜 너밖에 없어.”추서윤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안수빈은 감탄했다.“진짜 이런 방법이 통하는구나. 근데 무서운 건 저러다 온하랑이 같이 죽자고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 어떻게 해?”추서윤은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며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걔는 그렇게 못해.”여자의 직감이 가장 예리하다.3년 전 추서윤은 은연중에 온하랑이 부승민을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온하랑은 잘 숨겼지만 추서윤은 눈치채고 있었다. 부승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온하랑은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요즘 그녀와 부승민이 함께 있을 때 그가 좀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종종 그녀 앞에서 집중을 못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두 사람을 이혼시켜야 했다.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온하랑은 이혼 합의서를 꺼내 앞에 놓고 한참 동안
본가에 도착하니 도우미가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할머님께서는 지금 주방에서 요리 중이세요. 먼저 앉아 계세요.”말을 마친 뒤 도우미는 두 사람에게 티와 과일을 가져다주었다. 부씨 가문의 안주인인 김정숙은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반평생을 재벌 집 사모님으로 축복받은 인생을 살았지만, 여전히 평범한 가정의 할머니처럼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하고 직접 음식을 하는 걸 즐겼다. 가끔은 뜨개질로 목도리를 떠주는 것도 좋아하셨다.부씨 가문의 후대들은 암암리에 서로 권력 다툼을 벌였지만 김정숙은 모두가 존경했다.온하랑은 신발을 벗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할아버님은요?”도우미는 위층을 가리키며 말했다.“쉬고 계세요. 요즘 할아버님의 정신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세요.”온하랑과 부승민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부씨 가문의 사업은 할아버지의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나 할아버지의 손에서 사업이 발전하고 규모가 커졌다. 젊으셨을 때 일하시느라 몸을 혹사하셨는데 나이가 드시니 이제야 건강에 무리가 왔다. 간이식까지 받으시고 계속 거부반응을 억제하는 약을 드셔야 했다.“임 원장님은 뭐라고 하세요?”부승민이 물었다.임 원장은 현대병원의 병원장이자 할아버님의 개인 주치의이다.“임 원장님도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부승민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주방으로 가서 김정숙을 도와주려고 했다.“하랑아, 밖에서 쉬고 있어. 안 도와줘도 돼. 나 혼자서도 거뜬하다.”김정숙은 도우려는 온하랑에게 쉬라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할머님, 거실에 앉아서 할 일도 없는데요. 도와드리고 싶어요.”김정숙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왜 할 일이 없어? 앉아서 승민이 하고 얘기라도 나누고 있어.”아무 말도 없는 온하랑을 보고 김정숙은 또 말했다.“승민이 하고 싸웠니? 뉴스라면 나도 봤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승민이 단단히 혼낼 테니.”“할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와 승민 씨 사이의 일은 저희가 잘 처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