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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차오르는 씁쓸함을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추서윤의 이미지는 우리 제품 콘셉트와 어울리지 않아요.”

추서윤은 해외 활동을 이어가면서 대부분 시크하고 도도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그건 네 사정이고 내 알 바 아니야.”

부승민이 말했다.

“너라면 잘 해내리라 믿어. 이번 광고가 서윤에게 아주 중요하니까 네가 모든 과정을 책임졌으면 좋겠어.”

온하랑은 온몸이 무기력하며 얼굴이 점점 굳어졌는데 대체 무슨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자기 첫사랑을 현 와이프에게 맡기는 잔인한 짓을 하다니?

정녕 그녀가 슬픔과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감정 없는 사람인 줄 아는 건가?

“알았어요, 최선을 다할게요.”

온하랑은 목구멍에 생선 가시라도 걸린 듯 따끔거렸고,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

화장실.

온하랑은 계속해서 헛구역질만 했을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내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배 속의 아이를 달래주었다.

벽 거울 속 여자의 얼굴은 창백하고 눈시울이 빨갰다.

그녀는 찬물로 연거푸 세수했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추서윤을 광고 모델로 내세우는 것쯤이야, 광고 촬영부터 송출까지 담당하는 건 늘 해오던 일인지라 문제없을 거로 확신했다.

온하랑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그녀는 어떤 난관에 봉착하든 꿋꿋이 버텨내리라 다짐했었다.

하늘에서 지켜보는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아이를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사무실에 돌아가 임리안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하며 사과했다. 그리고 현재 추진 중인 디자이너 향수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써주겠다며, 앞으로 괜찮은 광고 건이 있으면 임리안을 최우선 순위로 고려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홍유라는 비로소 한발 물러섰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온하랑은 비서에게 추서윤의 자세한 자료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고, 같은 부서 직원들끼리 긴급회의를 열었다.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보낸 덕분에 겨우 3가지 기획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비서를 불러 추서윤의 매니저에게 연락해 광고 건으로 대면 미팅을 진행하자고 약속을 잡으라고 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댄 온하랑은 미간을 문질렀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옆에 있는 이혼 협의서를 집어 들고 대충 훑기 시작했다.

부승민은 역시나 씀씀이가 컸다. 이혼 합의금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챙겨주었다.

별장 2채, 고급 승용차 2대, 그리고 현금 40억.

‘참 통이 크네.’

온하랑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그녀가 서둘러 회의실에 향하자 운영팀 전무, 프로젝트 매니저, 수석 디자이너 등 임직원도 잇달아 도착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추서윤과 스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온하랑이 비서에게 말했다.

“추서윤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빨리 오라고 재촉해 봐요.”

곧이어 비서가 다가왔다.

“전무님, 얘기했는데 금방 오신대요.”

결국 오전 내내 기다리다가 운영팀 전무를 포함한 몇몇 직원들은 불만이 이미 극에 달했다.

온하랑은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

“추서윤 매니저 연락처 좀 보내줘요.”

비서가 대답하려는 찰나 입구에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났다.

“추서윤 씨, 대표님?”

“대표님은 어쩐 일이십니까?”

직원들이 서둘러 마중 나갔다.

맨 앞에 선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추서윤과 부승민이었다.

추서윤은 노란색 롱 원피스를 입고 부승민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반면, 딱 떨어진 슈트 차림의 부승민은 훤칠한 몸매를 뽐냈는데, 바로 그녀가 아침에 골라서 침대에 올려 둔 그 옷이었다.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직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이내 무언가를 눈치챈 듯싶었다.

그동안 최고의 여배우인 추서윤이 대표님의 첫사랑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이제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둘은 천생연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하랑은 심장이 콕콕 쑤시는 느낌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 앞으로 다가갔다.

“대표님, 추서윤 씨, 안녕하세요. 먼 걸음 하셨으니 얼른 시작할까요?”

부승민은 이혼 후에도 온하랑을 여동생으로 대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온하랑은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추서윤과 서로 아끼며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정녕 아무렇지 않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이혼하고 나면 그녀는 멀리 도망갈 생각뿐이었다.

온하랑을 발견한 추서윤은 조금 놀란 듯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하랑아! 너도 있었어?”

온하랑은 추서윤의 손을 내려다보니 스리슬쩍 빼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추서윤은 마치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말을 이어갔다.

“3년 만에 봤더니 아주 서먹서먹해졌네. 그때 네가 대학교 다닐 때 날 둘째 새언니라고 부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사람들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온하랑이 대표님의 여동생인지라 추서윤과도 아는 사이처럼 보이는데, 조만간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온하랑은 추서윤과 경쟁했을 때 평생 패배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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