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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결혼이 헛된 망상이었을까
그와의 결혼이 헛된 망상이었을까
작가: 라오

제1화 갖고 노는 여자, 미련 따위 없어

남자들은 28살이 넘으면 다들 그쪽으로 욕구가 강렬한 걸까?

오늘 밤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송재이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됐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설영준을 잘 알기에 가느다란 손으로 그의 척추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서툰 솜씨로 더듬거리며 끝내 그의 성감대를 찾았고 설영준의 무거운 신음과 함께 뜨거웠던 섹스도 마침내 끝났다.

“나 다음 달이면 25살이야.”

송재이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속옷과 원피스를 주워서 하나씩 챙겨입기 시작했다. 뒤에 달린 지퍼가 손이 닿지 않아 고개 돌려 침대 머리맡에 기댄 설영준을 힐긋 쳐다봤는데 그는 한창 담배에 불을 지피고 뽀얀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송재이는 우아한 자태로 자리에 앉아 긴 머리를 쓸어넘기고 새하얀 등을 훤히 드러냈다.

설영준의 눈빛이 그녀의 몸에서 맴돌았다.

잠시 후 그나마 신사답게 담배를 지그시 물고 몸을 일으키며 제법 자연스럽게 그녀의 지퍼를 올려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공기 속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나도 이젠 어린 나이가 아니야. 나만의 가정을 차리고 싶어.”

그녀가 답했다.

설영준은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

“우리가 처음 섹스할 때 내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었나 봐?”

“안 잊었어.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했잖아.”

송재이는 치맛자락을 꽉 잡고는 애써 담담한 척 웃어 보였다.

“사실 이 3년 동안 너에게 무척 고마웠어. 내가 가장 힘들 때 나 대신 중병에 걸린 우리 엄마를 위해 신장을 찾아주고 병원비도 대줬잖아. 비록 살려내진 못했지만...”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목소리가 슬픔에 잠겼다.

6개월 전, 그녀는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면서 설영준과 이별할 결심을 했지만 마음속에 줄곧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그가 조건이 비슷한 집안의 주현아 씨와 함께 반지를 고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완전히 단념했다.

애초에 송재이가 설영준과의 이런 관계를 시작하기로 했을 때 두 사람 다 솔로였다. 설영준은 의젓했고 그녀는 돈이 시급했기에 곧바로 이런 관계가 시작됐다.

하지만 인제 그녀는 설영준과 주현아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없고 더는 그의 옆에서 시간을 끌고 싶지도 않았다.

설영준은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또 더 피우려고 담뱃갑을 집어 들었는데 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살짝 짜증 난 듯 침대에서 내려왔다.

“도영이 이젠 안 가르치겠다고 사모님께 말씀드렸어. 앞으로 더는 너희 집에 올 일은 없어.”

송재이는 설영준의 남동생 설도영의 피아노 선생님이다. 이렇게 되니 그녀는 수당이 높은 아르바이트까지 하나 잃은 셈이다.

“알았어. 결혼할 때 꼭 알려.”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설영준은 훤칠한 체구에 흰색 잠옷 가운을 입고 머리가 살짝 부스스했다. 평상시의 날카롭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공격적인 포스가 조금 줄어들었다.

송재이는 그의 성격상 절대 안 잡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막상 떠나려 하니 심장이 여전히 쿡 찌르듯 아팠다.

그녀는 어느 한순간 마음 약해질 것 같았지만 뇌리에 문득 설영준이 주현아에게 반지를 끼워주던 장면이 스쳐 지났다.

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옆방에 가서 일찌감치 정리한 캐리어를 챙기고 자리를 떠났다.

침실 밖의 대문이 닫히는 순간 설영준은 남은 반 토막의 담배를 재떨이에 지졌다.

처음부터 갖고 노는 여자일 뿐, 딱히 미련을 둘만 한 건 없었다.

...

유은정은 전화기 너머로 송재이가 장하다고 연신 칭찬했다. 그토록 좋아하면서도 바로 마음을 접다니. 송재이는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날, 커피숍.

송재이는 바람 쐬러 약속 장소에 나왔는데 유은정은 온데간데없고 훤칠한 키에 꽤 잘생긴 젊은 남자가 나와 있었다.

상대는 예의 바르게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지민건이에요, 오늘 그쪽이랑 선보러 나왔어요.”

송재이는 한참 넋 놓고 있다가 절친에게 낚인 걸 알아채고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편 그녀도 독신으로 늙을 생각은 없으니 기왕 이렇게 만난 김에 얘기를 잘 나눠보기로 했다.

전에 다른 사람들한테서 수많은 엉뚱한 소개팅 에피소드를 들었던지라 처음엔 살짝 걱정했는데 그 마음이 금세 가셨다. 지민건은 사실 매너도 좋고 대화도 잘하며 제법 분수를 지켰다.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 반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자 지민건의 눈가에 애절한 기운이 스쳤다.

그는 말을 머뭇거렸다. 아마도 그녀를 위로할 말을 생각하는 듯싶었는데 결국 제 앞에 놓인 새 티라미수 케이크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송재이는 그의 서툰 동작에 웃음이 새어 나왔고 분위기도 전보다 조금 나아졌다.

이때 문득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렸는데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다.

송재이는 이런 전화를 거의 안 받지만 세 번 꺼버리자 상대가 끈질기게 세 번 더 전화했다. 그녀는 결국 참다못해 전화를 받았다.

“바로 이 남자랑 결혼한다는 거야?”

상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송재이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꽉 잡고 본능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뒤쪽 사선 방향의 창가에 앉은 설영준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감전된 것처럼 허리를 곧게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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