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건 그와 주현아가 곧 결혼할 사이라는 걸 묵인한 셈이다.그들과 같은 상류층 사람들은 결혼과 연애에 관해서 자신만의 기준과 계획이 다 있다. 송재이는 이 점을 매우 잘 안다.그럼에도 직접 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미묘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그녀가 아무 말 없자 설영준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는데 이번에 송재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옆으로 피했다.“주현아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송재이는 다시 한번 고개 들어 여전히 눈물을 머금고 있었지만 말투는 좀 전보다 단호하고 강인했다.“설영준 대표님, 난 어릴 때부터 엄한 가정에서 자라서 누군가의 내연녀로 살 순 없어. 그런 여자를 원하는 거라면 사람 잘못 찾았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설영준이 차마 입밖에 내뱉지 못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부었다.그는 지금 송재이의 몸에 대해 조금 관심이 남아 있다. 그가 완전히 질리기 전까지 송재이는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지내야 한다.이게 바로 그와 함께한 대가이다.전에는 그의 ‘스폰’이 필요했다. 엄마의 병을 치료해야 하니까. 다만 이젠 유일한 아픔인 엄마가 없으니 송재이는 더는 저 자신을 속상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평소에 고양이처럼 얌전하던 그녀가 대뜸 발톱을 드러내자 설영준은 마냥 흥미진진할 따름이었다.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진한 미소를 보이더니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았다.“내연녀는 하기 싫고 떳떳하게 여자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지민건의 여자친구?”그는 또다시 송재이를 비꼬았다. 결국 골랐다는 게 고작 그런 쓰레기냐고 비아냥댔다.송재이는 그런 설영준이 너무 이상했다. 이번엔 그녀도 발끈한 게 아니라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내 눈엔 너나 그 인간이나 다 거기서 거기야. 아무도 선택 안 해.”그녀는 화난 기색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여자는 다양한 남자를 만나보는 것도 일종의 성장 경험이야. 너희들을 떠난 건 내게 해탈이지. 난 아직 젊고 예뻐. 성격도 나쁘지 않고. 이런 내가 나한테 꼭 어울리는 진짜 인연을 못 찾을까
이때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액정에 ‘현아’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설영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영준 씨, 이달 26일에 내 외조카 생일이야. 걔 데리고 나가서 생일파티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영준 씨도 같이 갈래?”설영준은 휴대폰을 꽉 잡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더니 감미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 같이 가.”...송재이는 돌아와서 지민건에 관한 일을 모조리 유은정에게 알려주었다.깜짝 놀란 유은정은 반나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이토록 겉과 속이 다른 남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전화기 너머로 유은정은 연신 송재이에게 사과했다.지민건과 유은정의 아빠는 함께 골프 치는 사이였고 유은정이 아빠 따라 골프 치러 갔을 때 그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본인에게 오래 사귄 약혼자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그녀가 먼저 지민건에게 대시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기왕 인연이 닿지 않은 김에 절친을 소개해주었는데 이런 사람이었다니. 유은정은 지민건에게 씌웠던 필터가 와장창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취지는 좋았으나 일을 망쳤으니 유은정은 송재이에게 훠궈를 한 끼 사주기로 했다.훠궈를 먹을 때 송재이는 유은정의 약지 손가락에 낀 블링블링한 반지를 보았다.유은정은 배시시 웃으며 연말에 약혼자와 결혼한다고 했다.둘은 이것저것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유독 설영준만은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송재이가 한때 이 남자를 얼마나 많이 좋아했는지 유은정은 누구보다 잘 안다.이제 겨우 내려놓기로 마음먹었으니 앞으로 최대한 더는 엮이지 말기를 바랐다.하지만 왜 항상 빗나가는 걸까....이날 송재이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막 마치고 대기실에 돌아왔는데 다들 수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삿대질을 해댔다.“몰라뵀네요. 평상시에는 마냥 얌전하기만 하더니 뒤에서는 내연녀인 걸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애인 노릇이나 하고 있어요?”“이래서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니까요. 이렇게 발랑 까진 사람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평소 송재이와 친한 첼리스트 서유리가
“다들 서서 뭐해? 연습은 안 하고 여기서 농땡이 부리는 거야?”뭇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송재이, 연지수, 두 사람은 나 따라와.”사무실.“지금처럼 부정적인 여론이 증폭하면 오케스트라 명성에도 영향을 미쳐.”단장이 말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재이는 이참에 한동안 쉬는 건 어때? 모레 있을 공연은 안 나와도 돼. 네 포지션은 지수를 대타로 내보낼 생각이야!”이건 뭐 하찮은 송재이로 소중한 연지수를 지키는 셈일까?!“그렇지만 저는 이미 한 달이나 준비했어요...”송재이는 꿋꿋하게 쟁취해보려고 애를 썼다.“쉬어 그냥!”단장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송재이에게 이토록 엄한 말투로 말해본 적이 있었던가?원래 올해 수석 피아니스트가 되는 건 거의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일인데 이 사달이 벌어지니 연지수에게 자리를 빼앗길 뿐더러 승진의 기회도 아득히 멀어졌다.오랜 시간 노력해온 수고가 이젠 가망이 없는 수포가 되어버렸다.그녀는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사무실을 나섰다.빠른 걸음으로 연습실 복도를 스쳐 지나갈 때 창밖의 불빛이 새어 들어와 그녀를 환하게 비췄다. 송재이는 마치 열대 우림에서 금방 나온 듯 온몸에 피곤함과 허탈함이 담겨 있었다.연지수는 대놓고 깨고소한 표정을 짓더니 의기양양하게 송재이를 또 한 번 쳐다봤다.송재이는 정말 내키지 않았다!오케스트라 수석이 되는 건 그녀의 꿈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때 엄마와 했던 약속이기도 하다.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녀는 이대로 죽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송재이는 일단 게시판에 올라온 글과 야릇한 사진까지 전부 누가 업로드한 것인지 조사에 나섰다.사진 속에서 송재이만 얼굴이 공개되고 상대방은 완벽하게 가려졌다.‘왜 나만 당해?!’그녀는 휴대폰을 꺼내서 설영준에게 카톡을 보냈다.[영준 씨.]그런데 문자의 왼쪽에 빨간 느낌표가 떠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짤막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설영준이 그녀를 차단하다니?!송재이는 한참 넋 놓
“네가 수작 부린 거지? 설영준 대표랑 계약까지 마쳤는데 갑자기 변동이 생겼다면서 프로젝트 취소했어. 이거 너 때문이지?!”송재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나서야 앞에 선 남자가 똑똑히 보였다.그는 바로 지민건이다!지민건은 그녀의 반항도 무릅쓰고 뒤에 있는 벽으로 몰아붙였다.송재이는 질식할 것만 같고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지만 지민건의 주절거리는 말속에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다 알아챘다.이 사건은 설영준과 연관이 있다. 바로 그가 지민건의 이익에 손해를 입혔다!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지민건이 한눈판 사이에 잽싸게 발로 걷어찼다.중요 부위를 걷어차인 지민건은 고통이 몰려와 낯빛이 사색이 되었고 곧바로 손을 놓아주었다.점잖았던 이미지가 철저하게 무너졌다.그의 험상궂은 몰골을 다 지켜봐 왔지만 지금 이 순간 또다시 끔찍해질 따름이었다.“나 보복당했어. 다 너 때문이야!”송재이는 잠시 넋 놓고 있다가 그의 이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보복을 당했다라...설마?그녀는 지민건을 쳐다보며 미간을 구겼다.“그 사진들 네가 올린 거야?”순간 지민건은 시선을 피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설영준과 협력하는 그 중요한 시기에 이런 게시글을 올린다고?”지민건도 참 어리석지. 스스로 총구에 달려들다니!송재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진 속 설영준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녀 본인만 떡하니 공개됐다.그러니까 지민건은 오직 그녀를 겨냥해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그날 밤 룸에서 송재이가 그의 체면을 짓밟았다고 이렇게 나왔다.지민건은 사소한 원한도 다 갚는 인간이구나!다만 사태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설영준은 얼굴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의 반응은 단호할 따름이었다. 버럭 화를 내더니 이젠 아예 지민건의 연락조차 안 받는다.답답하고 울분이 치솟던 지민건은 어디에 풀지 몰라 서성거리다가 오늘 송재이를 찾아와 다짜고짜 울분을 토하고 있다!“생각보다 대단한데? 진짜 설영준이랑 엮여있네?”경멸과 야유로
눈앞에 나타난 여자는 케이크를 손에 들고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옆에 있는 슈트 차림의 남자는 훤칠한 키에 잘 생기고 고귀한 기운을 내뿜었다.두 사람은 키 차이나 외모, 기질 전부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마지막으로 설영준을 본지가 벌써 보름 전이다.송재이는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연우는 두 사람을 보더니 잔뜩 흥분하며 의자에서 뛰어내려 슬리퍼를 챙겨 신고 쪼르르 달려갔다.아이는 주현아의 허리를 꼭 안았다.연우는 말을 못 해서 작은 얼굴을 주현아의 손바닥에 비벼댔다.주현아는 한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늘은 우리 연우 생일이지.”“다들 왔네?”민효연이 아래층의 인기척 소리를 듣더니 숄을 걸치고 천천히 2층에서 내려왔다.그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민효연의 시선 속에서 주현아의 미소가 살짝 굳었고 등골도 뻣뻣해졌지만 여전히 남자의 팔짱을 꼭 꼈다.“엄마, 제 약혼자 영준 씨가... 엄마 보러 왔어요.”“영준이 오랜만이네.”민효연은 매우 우아하고 이 나이에도 포스가 차 넘친다. 그녀는 설영준의 앞에 서서 고귀한 자태로 인사를 건넸다.설영준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고요?”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간단하게 근황을 얘기했다. 민효연이 선을 넘지 않게 일상적인 질문을 했고 설영준도 예의 바르게 일일이 대답했다.두 사람은 연우를 데리고 이미 예약한 레스토랑에 가서 생일을 함께 보낼 예정이었다.민효연은 이혼한 이후로 수년간 칩거했다. 그녀는 떠들썩한 걸 싫어해 두 사람의 초대를 완곡하게 거절했다.주현아는 스스럼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송재이와 마주한 순간 눈가에 복잡미묘한 기운이 감돌았다.송재이도 대뜸 얼굴이 빨개졌다!주현아는 분명 그녀를 알아봤을 것이다.전에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에서 남자의 얼굴이 가려졌지만 그들이 탄 차가 검은색 벤틀리였기에 지인들은 설영준의 차라는 걸 바로 알아본다!이제 막 잠잠해졌는데 또
민효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또 한참 쳐다보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사진에 관한 일은 모두가 약속한 듯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하지만 송재이는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주현아나 민효연이나 다들 그녀를 문란하고 천박한 년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한편 그들은 설영준에 대해 이런 편견이 없다.남자는 당연히 풍류가 넘치고 기개가 있지만 여자는 음탕하고 천박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다!이 사회가 원래 여자에 대한 편견이 많고 많은 법이다.송재이는 이런 불공평함을 바꿀 수 없으니 그저 묵묵히 참고 살아야 했다.그녀는 참 운이 안 따라주는 사람이다.분명 설영준을 피하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또다시 이 악순환에 휘말려 들었다.민효연이 제 딸의 약혼자와 불분명한 관계를 이어가는 과외교사를 바로 해고할 줄 알았는데 송재이는 의외로 그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연우의 생일이 지난 후 송재이는 더 이상 민효연의 집에서 주현아를 보지 못했다.그때 눈치챘다. 민효연과 주현아는 모녀 사이지만 둘은 썩 친해 보이지 않았다....송재이는 설영준의 집에서 3년 동안 설도영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떠나 그녀는 이 아이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고 설영준의 집을 떠난 이후로 이 아이와 따로 더 연락한 적도 없었다.문득 걸려온 설도영의 전화에 송재이는 마냥 놀라울 따름이었다.그래도 결국 전화를 받았다.“선생님, 저 친구랑 싸워서 지금 병원에 있어요...”설도영이 말을 더듬거렸다.전화기 너머로 아이는 가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가족들한테 감히 알릴 용기가 없어요. 선생님이 이리로 와주실 수 없나요? 감사의 뜻으로 제가 나중에 밥 한 끼 사드릴게요.”“...”송재이는 말문이 막혔다.거절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병원에 도착해보니 설도영이 말한 ‘싸움’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이건 다툰 게 아니라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설도영에게 맞은 격이다.인상 속 설도영은 점잖은 중학생이라 전
방금 병실에 들어가 아이의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깁스를 한 모습이 마냥 처참할 따름이었다.송재이가 설도영을 데리고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했음에도 상대방 부모는 대노하며 모진 욕설을 퍼부었다.처음 겪는 광경에 송재이도 당황스러워 얼굴이 빨개졌다.나중에 설도영이 듣다못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반박에 나섰다.“이봐요, 그러게 누가 댁 아드님 할 짓 없이 딴 여자애 나시 끈 잡아당겨서 망가뜨리래요? 본인이 더러운 행패를 부렸으니 얻어맞아도 싸요! 기왕 때리는 김에 확 죽여버릴 걸 그랬어요!!”사춘기 남자애들은 이성의 끈을 놓으면 걷잡을 수 없이 미쳐가는 법이다. 송재이는 설도영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어린놈의 자식이 뭘 이렇게 기고만장해? 우리 아들 털끝 하나 건드린 것까지 싹 다 돌려받을 거야!”상대가 펄쩍 뛰며 쏘아붙였다.“너 딱 기다려. 반드시 고소한다 내가!”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복도의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잘됐네요. 우리도 마침 법적 절차를 밟을 생각이었는데, 하실 말씀 있으시면 여기 있는 박 변호사님께 직접 얘기하세요.”순간 송재이는 심장이 철렁거렸다.설도영도 고개 돌려 큰소리로 외쳤다.“형!”송재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문 쪽을 바라봤다.슈트 차림의 설영준은 창밖의 은은한 햇빛이 쏟아지자 조각 같은 얼굴이 유난히 더 빛났다.그의 준수한 외모는 뭇사람들 중에서 확연히 돋보이는 외모이고 송재이가 수년간 봐온 젊은 남자 중에 금욕의 매력을 내뿜는 아찔한 남자였다.고작 며칠을 못 봤을 뿐인데 지금 또다시 한없이 낯선 느낌이 든다.친형이 오자 설도영도 좀 전보다 목소리에 힘이 났다.설영준은 그를 힐긋 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설도영, 넌 돌아가서 얘기해!”이 한마디에 아이는 또다시 주눅이 들었다.설영준의 뒤에는 정장 차림의 키 큰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박윤찬은 여기서 송재이를 보니 살짝 의외라는 듯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지금 급선무는 설도영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박윤찬은 마른기침을 두어
병원을 나선 송재이는 속이 울렁거려 너무 괴로웠다.그녀는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토하기 시작했다.다 토한 후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 한 병 사서 길옆에 선 채로 한 모금씩 들이켰다.이때 누군가가 갑자기 어깨를 툭 내리쳤고 화들짝 놀란 송재이는 하마터면 생수병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다행히 설영준이 재빨리 생수병 밑굽을 받아들었는데 물이 튀기며 그의 옷소매를 다 적셨다.설영준은 눈썹을 찌푸리고 송재이를 쳐다봤다.“귀신 봤어?”송재이는 가슴 찔린 듯 입을 닦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길거리에 설영준과 단독으로 서 있으려니 그녀는 저절로 스트레스가 쌓였다.설영준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뭘 보는 거야?”“여기 카메라 있어? 누가 또 몰래 촬영하는 거 아니지?”“왜 이렇게 경계하는데?”설영준은 그녀의 잔뜩 긴장한 모습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았다.송재이는 시선을 올리고 정색하며 그에게 말했다.“당신은 약혼녀 이외의 여자랑 엮이면 풍류가 넘친다는 말을 듣지만 난 아니야. 파렴치하게 내연녀 노릇이나 한다고 손가락질해.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결백함을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영준 씨가 내 생각 좀 해서 거리를 유지해줬으면 좋겠어.”송재이는 뭐가 이렇게 급해서 다음 연애 상대를 만나려고 안달인 걸까? 설영준이 그녀의 앞길을 막기라도 할까 봐?설영준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고고한 기품은 늘 완벽 그 자체였다.길을 지나가던 젊은 여자들도 저도 몰래 뒤돌아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우와, 너무 잘생겼어. 혹시 연예인 아님?”당장 뛰쳐 가서 포옹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 지경이었다.유독 송재이만 그를 멀리 피하고 싶어 한다.이 남자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과 한없이 짙은 눈빛은 얼른 외면하고 싶었다.“너한테 덤터기 씌운 일은 이미 다 해결했잖아. 뭘 더 걱정하는 거야?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데?”말을 마친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송재이는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액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