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저편에서 심전웅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내가 언제 몸을 팔라고 했어. 네 능력이 부족해 프로젝트를 망쳤으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마!”심지안은 이마를 찌푸렸다.“전 그런 적 없어요. 그 사람이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제 몸에 손을 댔다고요...”“넌 무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준비해왔던 프로젝트를 망쳐버렸어. 네 무책임한 행동이 회사에 얼마나 큰 손실을 빚었는지 알기나 해?”“저 때문이 아니라고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못 믿으시겠다면 조사해보세요. 주차장에 CCTV도 있을 테니까요.”“쓸데없는 말 그만해. 듣고 싶지 않으니까. 회사의 손실을 책임지거나, 우 대표의 용서를 받고 다시 계약을 체결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골라. 이건 내가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야!”그 말을 끝으로 심전웅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귓가엔 무정하기 그지없는 뚜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심지안은 정신을 잃기라도 한 듯 처량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에 쓰여진 「아빠」 두 글자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등 뒤의 차량이 귀를 찢을 듯한 경적 소리를 낸 다음에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리를 내어주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안함을 전했다.그때 손남영의 차도 주차장에서 나왔다. 그는 한눈에 교차로 중앙에 서 있는 심지안을 발견하고는 백미러로 시선을 돌렸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성연신 또한 심지안이 서 있는 방향에 눈길을 고정하고 있었다. 손남영이 물었다.“가는 길에 태워줄까요?”성연신은 습관적으로 차 창문을 열고는 서늘한 바람을 맞이했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한 순간, 마침 그를 발견한 심지안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성연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어 여자의 얼굴을 뒤덮었던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찬란한 미소만 그 자리를 채웠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신이 씨!”“풉!”손남영은 깜짝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웃음을 터뜨렸다.신이 씨? 너무나도... 다정한 호칭이다!성연신이 얼굴을 굳히며
심지안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며칠간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하며 참고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해외에서 몸이 망가질 정도로 일에 심신을 다 바쳤다. 하지만 그 결과 남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것도 모자라 이젠 밥도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충 옷을 걸친 다음 택시를 타고 심씨 가문 계열사 난진 그룹으로 향했다.그녀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마침 회의를 마친 사람들이 회의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심연아는 심전웅의 등 뒤에서 일에 대한 궁금증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심전웅은 자애로운 얼굴로 대답해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보기 좋은 다정한 부녀의 모습이었다.심전웅은 지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토록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심지안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서러움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심연아가 앞에 서 있는 심지안을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환히 웃으며 말했다.“지안아, 드디어 돌아왔구나. 요즘 어디에 갔었던 거야?”심지안은 가식적인 그녀의 표정을 힐끗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심전웅에게 물었다.“왜 3개월 동안 저한테 월급을 주지 않은 거예요?”심지안의 질문에 심전웅의 얼굴이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180도 바뀌었다. 그는 심지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이유를 묻기 전에 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부터 생각해.”심지안이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다 얘기했잖아요. 오늘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건 제 탓이 아니라고요. 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전 어제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고 숙지했어요. 업무적으론 절대 착오가 없었어요. 상대방이 절 존중하지 않아 일이 틀어진 거예요.”그녀는 어제 링거를 맞으면서도 늦은 밤까지 자료를 읽었다. 일에 있어선 항상 누구보다도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그녀였으니 말이다.“네가 무슨 낯으로 어젯
그 말을 들은 심연아의 얼굴에 은밀한 흥분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심지안을 막아섰다.“지안아, 그런 충동적인 말은 하면 안 돼. 이곳은 네 집인데 그만두고 어디에 간다는 거야? 나한테 돈이 있으니까 퇴근하면 너한테 보내줄게. 그것으로 월급을 받았다고 생각해. 응?”“쟤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마! 나가고 싶으면 빨리 꺼져! 짜증 나게 눈앞에서 아른거리지 말고!”심지안이 절대 우 대표에게 사과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하고 나자 더더욱 화가 치솟아 오른 심전웅은 경비원을 부른 뒤 심연아의 팔목을 잡고 씩씩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얼마 후 경비원이 달려와 나가지 않으면 끌고서라도 내보낼 기세로 심지안의 몸을 잡았다.“내 몸에 손대지 마. 나 혼자 나갈 수 있어!”그녀는 깊게 호흡하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한 걸음을 내디디며 밖으로 나갔다.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회사 문을 나서자마자 심연아를 찾아온 강우석과 마주쳤다.심지안의 어두운 얼굴을 본 강우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녀에게 충고랍시고 말했다.“너와 연아는 가문에서의 지위가 하늘과 땅 차이잖아. 넌 아저씨의 말에 군소리 없이 따라야지 맞서선 안 돼. 남자는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여자를 좋아하잖아. 그런데 넌 쓸데없이 너무 꼿꼿해.”심지안은 외모도 출중하고 능력도 있지만 집안의 도움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반평생을 노력해도 이렇다 할 집 한 채조차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가난함이라면 치를 떠는 강우석은 항상 부와 권세를 움켜주기를 갈망했다. 하여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줄 뒷배를 얻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였다.“얘기 다 끝났어?”심지안은 강우석 이 쓰레기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꺼져.”“너!”강우석은 냉정한 그녀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난 진심으로 널 돕고 싶어서 한 말인데 태도가 왜 그래?”“내가 언제 너한테 도와달라고 했어? 오지랖 부리지 마.”말을
진유진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이제 없어. 너한테 알맞은 자리 하나가 있었는데 하필 오늘 직원을 구했거든. 하지만 보광 그룹 본부가 국내에 들어왔잖아. 우리 회사 근처에 있어. 나 며칠 전 인터넷에서 그 회사가 프랑스어 번역관을 구한다는 공고를 봤어. 너 프랑스어 잘하잖아, 자격증도 있고. 분명 그곳에 취직할 수 있을 거야. 한 번 도전해보지 않을래?”심지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몇 년 전 바닥을 쳤다가 기사회생한 보광 그룹을 말하는 거야?”“맞아. 거기야!”그녀는 손가락으로 북쪽 고층건물을 가리켰다.“저기야, 가깝지? 월급도 꽤 높은 걸로 알고 있어. 네가 저기에 출근하면 우리 매일 함께 퇴근하면서 술 한잔해도 되겠네!”심지안이 진유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시의 중심에 자리한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에 금색으로 새겨진 ‘보광 그룹’ 네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5년 전 보광 그룹은 투자 실패로 인해 파산에 이르기 직전까지 몰락했다. 그 후 돌연 미스터리한 누군가가 보광 그룹을 맡았지만 워낙 명성이 없었던 사람인지라 업계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다들 그 어리석은 애송이 놈이 회사를 완전히 말아먹을 거라고 혀를 찼었다.하지만 1년 후, 그 사람은 전세를 뒤집어 사업상의 모든 문제를 깔끔히 해결한 뒤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로 인해 금융 천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그녀는 그토록 능력 있는 리더 밑에서 일하게 된다면 분명 난진 그룹에서보다 훨씬 더 큰 발전을 이룩할 거라 생각했다.하지만...심지안이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내 전공은 금융 쪽이 아니잖아. 들어갈 수 있을까?”“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심지안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카드 잔액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집에 돌아가 이력서를 제출해야겠어.”심지안은 진유진과 함께 저녁밥을 먹은 뒤 버스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가니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레이색 잠옷을 입은 성연신이 밥상에 앉아 우아한 자
성연신의 옆모습은 준수하면서도 차가움이 묻어났다.“아니요.”“아...”심지안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여기고는 그 일에 더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몸이 다 드러나는 옷밖에 없어요?”성연신이 돌연 퉁명스럽게 물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종아리까지 오는 길이의 치마를 내려다보았다.“이게 뭐가 짧아요?”“목 쪽.”심지안은 어이가 없었다.“... 쇄골만 나왔을 뿐인데...”강우석의 삼촌은 그와 여덟 살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보수적일 줄이야.“지금은 괜찮아요. 하지만 엎드리면?”성연신이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심지안은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 그 문소리의 내막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쑥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엎드려도 제 방에서 엎드린 거잖아요... 설마 불순한 의도로 절 훔쳐보기라도 한 거예요?”성연신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덤덤히 말했다.“미안해요. 난 D컵 정도는 돼야 좋아하거든요.”그 말인즉슨 심지안은 그의 눈에 차지도 않는다는 얘기였다.순간 심지안은 얼굴은 물론이고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몹쓸 남자가 지금 그녀의 가슴이 작다고 비웃는 건가?말문이 막힌 심지안은 일그러진 얼굴로 도도하고도 우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는 성연신을 쳐다보았다. 장인이 조각한 듯한 그의 얼굴은 마치 하느님이 빚어낸 가장 완벽한 예술작품 같았다.그녀는 그가 독한 혀를 갖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뻔뻔스럽기까지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그녀가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다음 날 아침.심지안이 한창 꿈나라에 빠져있을 때 보광 그룹 인사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심지안 씨, 안녕하세요. 오늘 오후 면접 보러 오실 수 있으세요? 괜찮다면 면접 약관을 메일로 보내드릴게요.”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벌떡 차리고 대답했다.“시간 돼요! 반드시 제시간에 도착할게요. 그럼 오후에 봬요.”심지안은
면접을 보기 전에 먼저 필기시험을 봐야 했다.필기시험은 그녀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시험지를 바치고 연설아의 옆을 지나가던 그녀는 연설아가 아직도 시험지의 대부분 문제를 답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조급한 기색이라곤 없이 방금 한 네일을 감상하고 있었다.심지안은 왠지 이번 면접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기시험 결과 그녀는 합격하지 못했고 거의 최저점을 맞았다.“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낮은 점수를 받았을 리가 없어!”심지안은 면접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시험지를 공개하고 틀린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시기 바랍니다.”중간에 앉은 면접관 연봉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면접관마다 합격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같은 건 하나 있어요. 과정이 어떻든 점수가 낮으면 불합격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 당장 보광 그룹에서 나가요. 다른 면접자들의 귀한 시간을 뺏지 말고요.”“전 단지 공정과 공평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다른 면접자들의 시간이 귀한 건 맞지만 저의 시간도 함부로 낭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심지안은 허리를 곧게 펴고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옆에 있던 면접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다들 그녀가 왜 이토록 과하게 흥분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연설아는 입이 귀에 걸린 채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다렸고 동영상을 촬영하여 심연아에게 보내려고 했다.심지안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연설아의 짓이라는 걸 알아챘다. 심지안을 내쫓은 면접관과 그녀에게 점수를 준 면접관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만약 면접관이 그녀가 받아들일 만 한 이유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줬더라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에서 2년을 살았고 프랑스어 C2 등급까지 땄다.보광 그룹에 인재가 많아 면접까지 통과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최저점을 줬다는 건 그야말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연설아가 중간에서 음모를 꾀하는
오늘 인사팀에 면접이 있다던 일이 떠올랐다. 정욱은 불합격한 면접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력서를 버리려는데 성연신이 그를 불렀다.“잠깐.”익숙한 이름을 들은 성연신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이력서를 보았다.상업 빌딩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단독 사무실, 인사팀 매니저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면접자들의 정보 자료를 대표 사무실의 비서 실장에게 건넸다.정욱은 자료를 받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인사팀 매니저는 까치발까지 하며 들여다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섰다.“심지안 씨에 대해 좀 알아봐.”성연신이 싸늘한 얼굴로 분부했다.“네, 지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일 처리가 빠른 정욱은 십 분도 채 안 되어 심지안의 정보를 찾아냈다.“대표님, 심지안이라는 사람 정말 있더라고요. 그런데 1차에서 떨어졌어요.”성연신은 길고 말끔한 손가락으로 잔뜩 구겨졌던 이력서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이분 경력으로는 1차에서 떨어질 리가 없겠는데.”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정욱이 이력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프랑스어 C2 등급이면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리가 없어요.”프랑스어 C2 등급을 딴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30대지만 심지안은 기껏해야 24살 정도 돼 보였다. 그녀처럼 젊고 유능한 인재야말로 보광 그룹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성연신은 손가락으로 리듬 있게 테이블을 톡톡 치며 뭔가 고뇌에 빠진 듯했다.‘이 세상에 정말 이런 우연이 있다고?’어떤 사람은 평생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데 그와 심지안은 안 지 나흘 만에 부부가 되었고 심지어 그녀가 보광 그룹에 면접까지 보러 왔다. 정말 아무런 목적도 없단 말인가?정욱은 성연신의 옆에서 수년간 일해왔지만 여전히 그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대표님, 한번 자세히 알아볼까요?”“응.”성연신은 깍지를 낀 손을 가슴 앞에 내려놓고는 잠깐 멈칫했다.“그리고 면접에 왜 불합격했는지도 알아봐.”...오후 4시, 정
하지만 프랑스어 C2 등급을 취득하고 게다가 젊고 스트레스 관리도 잘하는 사람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금 젊은이들은 쩍하면 일을 그만뒀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다.‘대표님께서 인재를 아끼시는 거겠지?’연봉기는 해고 통보를 받던 그때 한창 사무실에서 유유자적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인사팀 매니저가 해고 통지서를 그의 앞에 내려놓는 순간 그는 한참 동안 넋을 놓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지금 장난해요? 내가 보광 그룹에서 15년이나 일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잘라도 돼요?”인사팀 매니저와 연봉기는 지금까지 줄곧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사팀 매니저가 우쭐거리며 말했다.“그건 내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대표님의 뜻입니다.”대표라는 소리에 연봉기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졌다.“자르는 건 되지만 나한테 해고 이유와 배상을 줘야 할 겁니다.”“배상 같은 건 없어요.”인사팀 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이유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많은 일에는 이유가 없죠. 예를 들어 오늘 연봉기 씨가 프랑스어 C2 등급인 면접자한테 아무 이유 없이 최저점을 준 것처럼 말이에요.”연봉기는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 계집애한테 든든한 배후가 있었으니 그렇게 나댔지.’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기 전 인사팀 매니저는 문득 뭔가 떠오른 척하며 말했다.“아 참, 조카분한테도 내일 회사로 출근할 필요 없다고 전해줘요.”연설아는 한창 내일 입사 첫날에 입을 옷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예쁜 옷들을 전부 꺼내 입고 거울에 비춰보았다. 이것저것 입어 보던 그때 연봉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작은아버지는 보광 그룹의 원로급인데 어떻게 해고당할 수 있어요? 나랑 걔는 그냥 보통 친구예요. 걔 집안도 아무 배경이 없다고요. 정말이에요,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한테 거짓말한 거 없어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여보세요? 작은아버지, 끊지 말아요!”연설아가 다급하게 뭐라 얘기하려 했지만 연봉기는 가차 없이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