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가 덤덤히 말했다.“기성은, 눈앞의 것보단 먼 미래의 이익이 더 중요한 거야. 지금 이 결정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야.”“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까 내 지시대로 해.”전연우가 서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그의 앞으로 밀었다.“네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이겁니까?”봉투를 열어본 기성은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회사 설립 신청서요?”전연우가 말했다.“맞아. 남천이 내 손에 있으면 언젠가는 망가지고 말아. 누군가 날 대신해 해줬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야. 넌 해고된 남천 그룹 직원을 다시 모아.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돌아오길 원하는 직원한테는 원래 월급의 20퍼센트를 인상해줘.”기성은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하지만 자금은 어떻게 해결합니까?”“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네.”전연우는 이미 황준엽의 손에서 제2의 남천을 일으킬 자금을 확보했다.예전 전연우는 확실히 걱정했었다. 남천이 그의 손에서 무너진다면 장소월은 목숨을 걸고 그에게 맞설 테니 말이다. 전연우도 그녀에게 강제적인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다.이제 그의 목표는 명확하다. 어떤 일은 그가 직접 할 필요가 없다.기성은은 서재에서 나간 뒤 복도에서 장소월과 마주쳤다.장소월은 그를 무시해버린 채 물 한 잔을 들고 안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장해진이 잠들자 그녀는 옆에 앉아 중풍 환자를 간호하는 법에 대한 서적을 읽었다.그의 현재 상태로 보아 빠른 시일 내에 파리에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그녀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대로 방치하고 떠난다면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유일한 피붙이인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만약 장해진마저 떠난다면 그녀는 정말 엄마, 아빠가 없는 고아가 된다.허이준은 교수님으로부터 그녀의 귀국 사실을 들었다. 그는 장소월에게 장해진과 비슷한 환자를 치료하는 한의사를 알고 있으니 연락을 해보라는 문자를 보냈다.장소월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고마워. 수고해줘.」「고맙
강혁은 수술을 마치고 의식을 되찾은 뒤 곧바로 강씨 저택에 옮겨졌다.아이는 깨어나자마자 울며불며 엄마를 찾아댔다. 태어났을 때부터 김남주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도우미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다. 약은 물론이고 먹은 음식물까지 모두 토해냈고 어느 날 밤엔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이 일을 알게 된 노부인은 강영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남주를 데려왔다.그제야 아이는 안정을 되찾았다.강씨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이가 괴로워하니, 노부인이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의사가 집에 와 살펴보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저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 울어 입안에 염증이 생겨 피가 난 탓에 피를 토했다고 오해한 것이다.아이의 회복능력은 아주 빨랐다. 며칠이 지나니 침대에서도 내려올 수 있었다. 김남주도 최근 며칠 동안은 편안히 강씨 저택에서 아이를 보살폈다.강혁은 잔뜩 신나 거실에서 비행기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었고 김남주는 약 그릇을 든 채 그의 엉덩이를 따라다니고 있었다.도우미가 과일을 썰어놓은 접시를 들고 소파로 다가왔다. 그때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발견했고 언뜻 보니 아직 통화 중이었다. 도우미가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주웠을 땐 이미 전화가 꺼져 있었다. 하지만 도우미는 상대방의 이름을 보았다.“도련님, 핸드폰이 떨어졌어요. 제가 보니...”“아!”김남주가 소리를 지르며 도우미의 말을 끊어버렸다.강영수는 바닥에 넘어진 강혁을 살피고 있었다. 김남주는 아이를 안고 잔소리를 했다.“엄마가 말했잖아. 바닥이 미끄러우니 뛰지 말라고.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치면 어쩌려고.”“어디 봐. 아픈 곳 없어?”김남주는 넘어지는 바람에 벌겋게 부어오른 강혁의 손바닥을 호호 불어주었다.“혁이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요.”그가 배시시 웃으며 강영수에게로 달려가 무릎에 앉았다.“아빠, 뭘 보시는 거예요?”강영수는 조금 전 도우미가 주워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듯했다.그때 오부연이 들어왔다
그들 사이의 일은 이제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만약 강영수가 장소월을 선택한다면, 두 사람 사이의 아이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만약 아이를 선택한다면, 장소월이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감남주는 당연히 장소월이 자발적으로 물러서기를 원했다. 강영수와 장소월 사이에 아무리 깊은 감정이 있다고 해도, 그녀가 낳은 아이보다 못할 것이다.강영수가 다시 전화를 걸자, 통화는 이내 연결되었다.하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영수야? 무슨 일 있어?”장소월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낌새가 없었고, 강영수는 그제야 머뭇거리며 떠보듯 입을 열었다.“방금 실수로 너한테 전화를 걸었어...”“알아. 그런데 아무 소리도 안 나서 그냥 끊었어. 안 그래도 너한테 다시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나 서울로 돌아왔어. 아버지가 아프셔서, 내가 집에서 며칠 돌봐야 할 것 같아. 미안해, 너한테 미리 얘기 못했어!”강영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내가 지금 너한테 갈게. 아버님 많이 아프셔? 내가 의사 불러줄게.”장소월은 덤덤하게 말했다.“아직은 잘 몰라. 이미 한의사 불렀어, 내일 오기로 했으니까 괜찮아. 나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그래, 내일 봐.”휴대폰 속에서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장소월은 비로소 대답했다.“응.”그녀는 전화를 끊었다.장소월은 하루 종일 장해진의 곁을 지키며,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보살폈다. 오늘 방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의 옷장 서랍 아래에서 사진첩을 발견했다.그녀가 사진첩을 열어보니 낯이 익지만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전부 자애로운 면상을 가졌지만, 사실 모두 한때 조직원이었던 지하 세계 거물들이었다. 평소에 외톨이처럼 보이던 장해진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두툼한 사진첩 속에서 어머니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장소월은 조금 실망했다.이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소월 아가씨... 저녁 식사 하세요.”장소월은 차가운 눈빛으로 오 아주머니를
“윤서 넌 일단 나가 있어.”장소월도 차갑게 입을 열었다.“모두 나가세요. 아버지 휴식하셔야 하니 여기서 방해하지 마세요.”장소월은 몸을 돌려 외면했고, 그들의 연기를 지켜볼 기분도 아니었다.“소월 아가씨!”오 아주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애틋한 눈빛에는 슬픔이 잠겼다. 마치 장소월이 그녀에게 잘못하여, 자신이 악랄한 악당으로 변한 듯이 말이다.“나가요!”장소월은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아 돌아섰다.백윤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아주머니, 일단 나가세요.”오 아주머니는 백윤서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갔고, 전연우가 문을 닫았다. 백윤서는 장소월과 오 아주머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줄곧 가족처럼 서로 의지하던 두 사람은 이제 원수에 가까웠다.“오빠, 두 사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백윤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남자는 차갑고 음산한 눈빛으로 오 아주머니를 주시했다.“앞으로 제 허락 없이 함부로 소월이 찾아오지 마세요. 이 집안에 계속 남고 싶다면 아주머니가 해야 할 일만 하세요.”오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도련님, 전 남은 평생 소월 아가씨에게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장씨 가문에 남을 거예요.”백윤서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아주머니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오빠, 소월이랑 아주머니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오 아주머니가 입원해서부터 백윤서는 이상함을 느꼈다. 오 아주머니가 그렇게 오랫동안 입원해있으면서 장소월은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고, 그날 병원 복도에서도 장소월은 차가운 눈빛으로 아주머니를 외면하고 떠났다.“윤서야, 이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시간이 늦었어. 내가 아파트로 데려다줄게.”“나 안 가요. 오빠가 여기 있으면 나도 여기 있을래요. 오빠... 나 혼자 두지 마요.”백윤서는 가련한 얼굴로 전연우의 팔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단호한 전연우였다.“지금 상황에서 네가 여기
장소월은 그의 손을 뿌리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시종일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볼 일이 남았어?”“장씨 가문에는 하인이 많아. 너만 아버지를 돌봐줄 수 있는 건 아니야.”“맞아, 모두 네 사람이잖아. 아버지가 왜 이렇게 됐는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 이 상황에서 내가 널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장소월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이번에 아버지가 버틸 수 있든 없든 간에,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할 거야. 아무도 너랑 장씨 가문 안 뺏어, 곧 네 것이 되겠지.”장소월은 힘껏 그의 손에서 벗어났고, 돌아보지도 않고 장해진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 발짝 들어서자 장소월의 허리춤에 그의 손이 나타났다.손에 들고 있던 물건은 모두 땅에 떨어졌고, 전연우는 그녀를 메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전연우의 동작은 거칠었고 또 신속했다.“그러니 이제 소월이는 오빠 말 더 잘 들어야겠지?”장소월은 그에 의해 벽에 밀쳐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맹수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남자의 몸에서는 강한 호르몬 냄새가 났다. 장소월은 뜨거운 불길이 자신을 태우려고 에워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전연우의 입술이 다가오자, 장소월은 고개를 홱 돌렸다.“너 미워하게 만들지 마.”“오빠가 동생 몸을 탐했다는 소문이 나면 서울에서 계속 얼굴 들고 살 수 있겠어?”“난 영수의 여자라는 거 잊지 마.”전연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이제 오빠를 협박할 줄도 아네?”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는 파도가 일렁였다.“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그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장소월은 언제나 기가 죽었고, 목소리도 떨렸다.남자는 그녀의 턱을 치켜올리더니,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소월이는 아직 오빠를 몰라.”그는 갑자기 포악해지더니,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조르고 눈빛도 무서워졌다.“난 내가
다가오는 여자를 거절하지 않는 전연우가, 장소월의 몸에 손대기 전에 얼마나 많은 여자와 침대에 올랐는지는 모르는 일이다.그런 전연우을 하찮게 여기면서, 장소월은 자기 자신도 더럽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애초에 모르는 사이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아래층에서도 인기척이 들렸어. 연우 또 소월이 괴롭히는 거야?”강만옥의 하늘하늘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려 퍼졌다.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전혀 놀란 기색 없이 웃으며 전연우 곁으로 걸어갔다.“왜 어린 애를 이 지경까지 몰아세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찾아오지.”남자를 바라보는 강만옥의 눈빛에는 애틋함과 끈적함이 가득했다. 바보라도 둘 사이에 은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나가! 미안하지만 여기는 내 방이야.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든 이 방에서 나가줘.”장소월은 손에 있던 커터칼을 내려놓았지만 하얀 목에는 안타깝게도 상처가 났고, 피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눈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이미 극도로 뒤틀린 관계들은 불분명하고 서로 얽혀 있었다. 이 집은 이미 썩어빠진 늪지였다. 모두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늪지.“소월아, 이 칼 함부로 갖고 놀면 안 돼. 그러다 다치면 어떡해?”강만옥은 일부러 그녀를 자극하려는 듯,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두 사람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가. 이 방에서 둘이 뭘 하든 마음대로 해.”두 사람만 보지 않을 수 있다면, 장소월은 어디에 있든 상관없었다.장소월이 전연우의 곁을 지날 때, 남자가 손을 뻗어 잡으려 하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칼로 방어했다. 장소월이 진짜 자신을 공격할 거라 예상하지 못한 전연우는 손등을 긁히고 말았다.장소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진짜 내 몸에 손대면 죽여버리겠다는 눈빛이었다.전연우는 눈빛이 차가워졌고, 이미 멀리 도망친 장소월을 보며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그리고, 강만옥의 뺨을 짝 때렸다!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장소월은 아침 8시 30분에 일어났고, 경호원들은 밖에서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거실에서 하인은 이미 아침 식사를 마쳤다. 장소월이 현관에 들어갔을 때, 위층에서 쨍그랑하고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전연우는 소파에 앉아 경제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거기 서, 아침 먹고 올라가.”부엌에서 바삐 돌아치던 오 아주머니도 장소월이 온 것을 눈치챘다. 식탁의 음식들은 확실히 풍부했다. 모두 장소월이 전에 즐겨 먹던 음식들이었다.“고맙지만, 난 이미 옆집에서 국수 먹고 왔어.”탁하는 소리와 함께, 전연우는 신문을 덮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강한 기세를 풍기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앞으로 저녁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장소월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복도의 손잡이를 잡고 걸어 올라가더니 다시 멈춰 서서 말했다.“앞으로 음식은 제가 직접 할 테니 따로 준비하지 말아 주세요. 음식에 더러운 약이라도 있을까 봐 무서워요.”쨍그랑, 주방에서 식판을 준비하던 오귀화는 실수로 손에 쥔 물건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30분 후, 예약한 한의사가 제시간에 별장에 도착했다.장소월은 전화를 받고 직접 내려갔다.상대방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80대 노인이었다. 손에 의료 상자를 들고 있었고, 장소월이 손을 내밀어 받으려 하자, 노인은 거절했다.“이 약상자는 십 킬로가 넘어요. 젊은 아가씨가 들기 어려워요. 어서 환자분에게 안내해주시죠.”“네.”장소월은 의사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의사가 장해진에게 진맥을 보고, 또 침을 놓아주니, 손발 경련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선생님, 아버지 어떠세요? 언제쯤 좋아지실까요?”“기혈이 약하고, 간과 신장도 많이 쇠약해요. 이건 평소 식습관 때문이에요. 게다가 경맥폐색 증상도 있어 방금 침을 놓았어요. 제 처방에 따라 약을 마시는 것 외에, 따로 제가 혈자리 지도를 드리죠. 환자의 몇몇 혈자리를
장소월은 의사가 알려준 대로 뒤뜰에서 한 시간 넘게 약을 달이느라 바빴다.이때, 하인이 다가왔다.“아가씨, 저희가 할게요. 이런 일은 아랫것들이 해야죠, 어떻게 아가씨가 직접 나서요?”“전 괜찮으니까, 다들 가서 일 보세요.”또다른 하인이 다가오더니 장소월에게 말했다.“아가씨, 강 대표님 오셨습니다. 도련님께서 맞이하고 계세요.”“알겠어요. 바로 갈게요.”약을 다 달인 후, 장소월은 약을 들고 아래층이 아닌 위층으로 향했다. 하인을 불러 강영수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방 탁자 위에는 그들이 약혼할 때 찍은 사진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의 이젤은 흰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원래 강영수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날 약혼연회에 강영수가 없어서 장소월은 도로 가져왔다.강영수는 그녀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소월을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장소월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여자의 체향을 맡았다.“미안해, 회사에 일이 있어서 너한테 못 갔어. 이번에는 언제 돌아갈 거야? 내가 곁에 있어 줄게.”장소월은 몸을 돌려 그의 품에서 나오더니,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앞으로 파리 못 갈 것 같아. 아버지가 아프셔서 집에서 돌봐야 해. 의사 선생님이 3개월 안에 회복하실 거라 그랬어.”강영수는 미간을 찌푸렸다.“장씨 가문에 하인이 이렇게 많은데, 네가 왜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해? 그림 배우는 건 네가 늘 꿈꾸던 일이잖아? 그래도 걱정된다면 아버님을 병원에 보내고, 강씨 가문 사람들이 돌봐도 돼.”장소월은 조용히 그를 보더니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당황함이 비쳤다.강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 왜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어?”장소월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럼 부탁할게.”“바보야, 우리는 이제 한 가족이야. 나한테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네 아버지는 곧 내 아버지니까, 내가 당연히 돌봐야지.”강영수는 곧 사람을 불러 장해진을 강씨 가문이 투자한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민아는 계속해서 기성은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에게 신이랑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송시아에게 치를 떨었다. 지난번 면북에 갔을 때, 소민아는 송시아가 그곳에서 누리는 권세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심지어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무서운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 폭발 사고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소민아는 답답함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울렁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뒤, 소민아는 차에서 내렸고 송시아도 뒤따라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명세진이 소민아를 맞이했다.“민아야, 이 녀석아, 어디 갔었어? 이랑이는...”소정국은 심장을 움켜쥐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나타난 송시아를 보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소정국이 소민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민아야, 이리 와.”소민아가 그의 말에 따라 걸어가자 명세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예요. 여기엔 당신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당장 나가요.”송시아는 선글라스를 벗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아는 제 여동생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언니로서, 여동생 결혼 준비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물론, 그동안 여동생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혼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결혼 이후 비용까지 모두 책임질게요.”명세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소정국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 송시아는 누가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외부인이었다.모두가 침묵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소민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소민아를 꽉 잡고 있던 명세진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예전엔 당신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신이랑과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마음을 굳혔어요. 신이랑과 이혼할 거예요. 더 이상 당신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소민아와 신이랑이 사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
“민아야, 난 기성은을 제거할 생각은 접었었어. 너 때문에 기성은을 살려두기로 했거든.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영상도 있으니까 봐. 물론 기성은이 죽지 않았을 1퍼 센트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소민아는 마치 얼음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이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분명히 약속했잖아, 꼭 돌아오겠다고. 그런데 왜 송시아의 입에서 폭발로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전화기 너머 송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바닥에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신이랑이 소민아를 찾아왔을 때, 그의 눈에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신이랑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송시아였다.신이랑의 부드럽고 온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신이랑은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검사를 마친 뒤 간호사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아내분께서 임신 6주 차예요. 아마 최근에 좀 피곤해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혈당 증세도 약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으니까 집에 가서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시면 돼요.”신이랑은 아직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는 괜찮나요?”간호사가 말했다. “정확한 상태는 초음파 검사를 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푹 쉬면 돼요. 아이에겐 별문제 없을 거예요.”신이랑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소민아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생체 시계가 작동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보고는 아무 알 없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신이랑은 잡고 있던 소민아의
위층으로 돌아가자, 도우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방은 이미 정리해 두었습니다.”“네.”도우미는 손님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함께 잘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민아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을 보고 입을 열었다.“이랑 씨...” .소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이랑이 말을 가로챘다. “괜찮아요. 난 바닥에서 자면 돼요.”소민아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엔 이랑 씨가 이 방에서 자요. 난 현아 언니 방에서 자면 돼요.”소민아는 침대 옆으로 걸어가 자신이 항상 베고 자던 베개를 들었다. 그녀가 신이랑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입에서 살짝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아 씨... 이제 나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싫은 거예요?”“아니에요, 이랑 씨. 그냥 이랑 씨가 바닥에서 자면 몸에 안 좋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냉기를 쐬면 두통이 재발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신이랑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알잖아요. 난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요. 매일 밤 차가운 바닥에서 자도, 민아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해요.”소민아는 베개를 안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이랑 씨, 저 아직은 적응이 안 돼서 그래요. 시간을 좀 줄 수 있어요?”신이랑은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요.”“고마...워요...”소민아는 어쩌다 보니 신이랑과의 결혼을 결정했고, 어느새 혼인신고까지 마쳤다.기성은과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사람이 그녀 자신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3년...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소민아는 옆방 소현아의 방으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침대 끝에 베개를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방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너무나도
소민아도 고모의 말씀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미 뼈에 사무치게 경험해봤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는 기성은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그와 함께하지 않을 수도 없다.예전 회사에서는 시끄럽게 다투기가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그에게 벌컥 화를 내며 영원히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소리치곤 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이미 자신의 모든 마음과 몸을 그에게 맡겼다는 것을.그와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다. 앞으로 그 어떤 험난한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예전처럼 그의 옆에서 비서로 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지금 생각해보니, 예전엔 가장 싫어했던 일들을 지금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다.기성은 씨,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예요?3년 뒤면 돌아올 거라고 약속했었잖아요. 기성은 씨는 날 속였어요.할 수만 있다면, 당신과 함께 과거로 돌아가 화도 내지 않고 다정히 잘 지내고 싶어요.명세진이 말했다. “요즘 서울은 너무 흉흉해. 앞으로 밖에 나갈 때 조심해야겠어. 하, 현아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 그 바보 같은 놈이 혹시나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소민아는 명세진으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신매매를 하던 암시장 유흥업소 세 곳이 경찰에 발각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대량의 금지된 마약 물품이 발견되었고, 면북으로 팔려갈 뻔한 백여 명의 여자들이 구조되었다고 한다.사진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운전기사는 국경을 넘어 도주하려 했지만, 결국 남운 국경 수비대에 붙잡혔다. 마지막으로 밝혀진 정보로는 약물에 완전히 중독되어 몰래 면북 지대로 넘어갈 계획이었다고 한다.그 아래에는 한 소녀가 길거리에서 납치를 당했는데, 경찰이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장기가 적출된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곧이어 휴대폰에 면북 범죄 조직 사이에서 싸움이 발생했고, 납치된 사람들이 본국으로 송환되고 있
명세진이 말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결혼인데, 결혼식을 안 하다니 말이 안 돼. 남들이 알면 비웃을 거야.”신이랑의 입꼬리가 축 내려앉았다. 그가 확연히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전 뭐든 민아 씨 뜻에 따를 거예요.”“이게...”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명세진 역시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결혼식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양가 식구들이 함께 모이는 식사 자리는 빼놓을 수 없지.”소민아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이미 다음 달로 식사 약속을 잡아놨어요. 그때 아빠 엄마랑 같이 오세요. 그럼 이 일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하죠.”“그래... 너랑 이랑이 둘 다 괜찮으면, 고모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너희 둘이 알아서 결정해.”“참, 민아야, 혹시 현아한테 요즘 전화해 본 적 있어?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매일 집에 전화했을 텐데, 요즘 들어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 게다가...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해 봐도 통화가 안 돼.”소민아가 말했다. “오는 길에 이미 전화해 봤는데 연결이 안 됐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 거예요. 바쁜 일이 있는 거겠죠.”명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위험하지는 않을 테지만, 현아 몸 상태가 걱정돼. 애가 혹시나 병이 더 악화되면 우리까지 못 알아보게 될까 봐.”소민아는 명세진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어떻게든 현아 언니랑 연락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그래, 오늘 쉬는 날이면 여기서 자고 가. 마침 빈방도 있잖아.”소민아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명세진과 함께 뒷마당을 산책했고, 신이랑은 회사에서 돌아온 소정국과 거실에서 장기를 두었다.소민아가 명세진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넌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좋아했잖아?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혹시 다퉜어?”“민아야, 결혼은 평생을 좌우하는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