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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 화 계약 조기 종료

부진석은 하영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허시원은 자신도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눈치껏 엘리베이터 입구에 가서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며 분위기는 어색해져만 갔다. 하영은 이 상황이 불편했다.

“사장님…….”

“이렇게까지 해서 너한테 얻어지는 게 뭐야?”

하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유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겼다.

그리곤 눈에는 조롱을 띈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한 나의 동정?”

하영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사장님,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유준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 작은 하영을 내려다보았다. 조각 같은 얼굴엔 화가 가득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살얼음에 담금질한 칼처럼 차가웠다.

“불쌍한 척 동정표 구걸하는 수단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면 나한테 받은 돈이 부족해서 의사 꼬셔서 어머니 공짜로 치료라도 하려던 셈이었어?”

정유준의 말은 비수와 같이 하영의 가슴을 후벼 팠다.

숨이 멎을 만큼 아팠다.

열이 나서 아픈지,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아픈 척을 한다는 건지?

어제 따뜻했던 그의 행동도 가식이었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눈에 난 그저 오피스 와이프일 뿐 이였나?’

하영은 두 손을 꼭 쥐고 냉정을 유지했다.

곧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사장님은 저에게 어떤 대답을 듣고 싶습니까?”

거리를 두면서도 공적인 비서 스타일의 대답은 정유준의 가슴에 더욱 분노를 자아냈다.

그는 하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깊은 눈동자는 하영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읽으려 무척 노력하는 듯했다.

“돈을 원한다면, 더 줄 수 있어. 하지만 우리 관계가 끝나기 전까지 남자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건…… 그 결과가 어떨지는 알아서 생각하는 게 좋을거야!”

하영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여전히 침착하고 공무적인 비서 스타일의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 계약서에 분명하게 적혀 있잖아요. 사장님 첫사랑이 돌아오면 모든 계약이 종료된다고……. 그럼 저도 다른 남자를 찾을 자유가 있는 거 아닌가요?”

하영의 본래 성격은 이랬다. 웬만해선 정유준에게 반박하거나 그에게 대들지 않았다.

정유준의 눈에 하영은 순종적인 사람이다.

하영이 이렇게 말대꾸하는 것은 지금껏 처음이다.

유준의 커다란 몸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하영의 턱을 치켜들었다.

“강하영, 너 많이 컸네……”

하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껏 여러 해 동안 고분고분 순종했다. 어쩌다 한 번 반항했는데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강하영 입술에 냉소가 떠올랐다.

“사장님,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준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너 지금 계약을 당장 끝내고 싶단 말이야? 강하영, 절대 네 뜻대로 안 될 거야……. 꿈 깨!”

말을 마친 정유준은 손을 거두었다.

그의 눈빛은 분노에서 혐오감으로 변했다. 하영을 세게 밀쳐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벽에 부딪힌 하영은 벽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는데,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하영은 마음을 추스르고 병실로 돌아와 어머니와 몇 시간 정도 함께 있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하영의 집은 오래된 낡은 단지에 있었다. 어머니에게 사준 새 아파트는 아버지가 팔아 빚을 갚았다.

현재는 이 낡고 허름한 20평도 안 되는 임대주택만 남았다.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자,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술병을 보며 맥 빠진 듯 한숨을 쉬었다.

정리를 마친 하영, 컴퓨터 앞에 앉자,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G, 이번에는 작업 속도가 좀 너무 느리네. 우리 사장님, 기다리다 눈 빠지기 일보 직전…… 곧 분노 폭발할지도…….”

[하영: 미안…… 요즘 일이 좀 바빠서…… 30분만 더 기다려 줘…….]

메시지 답장을 보낸 하영은 디자인 도안 작업에 몰두했다.

비서 일 외에 평소에 틈틈이 패션 디자인 스케치를 의뢰를 받아 부수입으로 벌기도 한다.

상대방은 곧 다시 연락을 보내왔다.

[G, 디자인 쪽에 재능 있어. 이쪽 분야로 전향하면 곧 국제적으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어. 뭐 하러 굳이 정 사장 밑에서 일해?]

하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돈을 많이 주잖아…….]

엄마 한 달 병원비만 수천만 원, 아버지 빚 수억 원, 그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스케치 작업을 마친 하영은 서둘러 집을 나서서 회사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가 막 비서실 층에 도착했을 때, 마침 엘리베이터 기다리던 정유준과 양다인을 마주쳤다.

양다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강 비서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하영은 유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양다인에게 대답했다.

“네. 많이 좋아졌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다인은 환하게 웃었다.

“천만에요. 하영 씨가 빨리 건강 회복해야 유준 씨 업무를 분담해 줄 수 있을 텐데…….”

말하면서 양다인은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겨 귓불에 위치한 조그만 한 붉은 반점이 드러났다.

그러고는 곁눈질로 부드럽게 유준을 바라보았다

“유준 씨, 우리 이따 식사 마치고 강 비서님 것도 좀 챙겨오는 거 어때요?”

유준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말이 끝나자, 그는 양다인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눈치 빠른 하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와 두 사람 사이를 스치듯 지나갔다.

사무실에 들어선 그녀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회사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거리낌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하영의 마음은 바늘로 찌르듯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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