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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갑자기 끊긴 전화에 기분이 언짢아진 강한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여자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한서야.”

강한서는 그녀를 덤덤하게 힐끗 보고는 휴대폰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대체 무슨 일로 왔어?”

송민영은 잘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쑥스럽게 말했다.

“요 며칠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디저트 좀 만들어봤거든. 너한테 주려고 가져왔어.”

강한서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작 이것 때문에 왔어?”

순간 마음이 경직된 그녀는 선물 상자를 꽉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아니고... 일도 좀 물어보려고.”

강한서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페이스북은 매니저한테 맡겨. 며칠 후에 섬블 컴퍼니에서 계약건 때문에 올 거야. 그때 다시 홍보하면 돼.”

송민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전에 한성우에게 “정상에서”의 더빙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이나 어필했었지만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해 그 일로 오랜 시간 골머리를 앓았었다.

사실 게임 더빙을 너무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선셋 스타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어서였다.

얼마 전 “비밀의 연인”이 인기리에 방영할 때 그녀는 더빙 때문에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더빙 덕에 그녀의 발연기가 살았다면서 소리를 듣지 않으면 인형극을 보는 것 같다고 그녀를 욕했다.

동시에 선셋 스타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힘들게 촬영한 건 그녀지만 인기를 차지한 건 선셋 스타였다. 이런 상황을 누가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자신의 오리지널 대사도 괜찮다는 걸 증명하기 위하여 그녀는 또 다른 계정에 오리지널 대사 영상을 올렸다. 원래는 다들 그녀를 칭찬할 거라 예상했지만 되레 한바탕 비웃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화 평론가들은 그녀의 연기력이 형편없다면서 다시 한번 선셋 스타를 칭찬했다.

송민영은 너무도 화가 나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이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는데 마침 그때 한성우와 박정문이 “정상에서”의 더빙을 논하는 걸 듣게 되면서 선셋 스타에게 더빙을 맡길 계획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게임 더빙 따위 그녀는 별로 눈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선셋 스타의 앞길을 막을 수만 있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든 빼앗을 생각이었다.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망설이는 척 물었다.

“한 대표님 동의했어? 날 별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던데. 만약 한 대표님이 안 된다면 무리하지 마.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면 어떡해.”

강한서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모든 걸 꿰뚫는 듯한 눈빛에 송민영은 등골이 오싹했다. 강한서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네 매니저 왔어.”

송민영은 정신을 차리고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매니저가 이쪽을 향해 손짓하고 있는 걸 본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원래는 강한서에게 애교를 부리면서 데려다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강한서의 비서 민경하는 이미 차 문을 열고 그녀가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뻔뻔스럽게 계속 남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강한서와 인사를 나눈 뒤, 차에서 내렸고 가기 전 민경하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강한서는 피곤한 듯 눈을 문질렀다.

“집으로 가죠.”

요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유현진이 집을 나간 후부터였다. 그 여자 생각만 하면 그는 마음이 심란했다.

옆에 놓인 텀블러를 열어 물을 한 모금 마시던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뜨거운 물이에요?”

그러자 민경하가 설명했다.

“사모님께서 전에 주신 티백이 다 떨어졌어요. 아직 새로 준비하지 못했거든요. 나중에 사모님께 전화할게요.”

강한서가 잠깐 멈칫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 여자를 찾으면 화를 돋울 소리만 할 게 뻔했다. 그는 또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물을 이십여 년이나 마셨지만 지금처럼 잘 넘어가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뜨거운 물이 원래 이리 삼키기 어려웠나?’

어느새 아름드리 펜션에 도착했다. 강한서가 차에서 내리려 하자 민경하는 잘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대표님, 두 달 전에 예약하셨던 그 가방 도착했어요.”

6억짜리 가방이라... 거의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그의 가치관도 일하는 몇 년 사이 많이 바뀌었다.

“사모님께서 보시면 굉장히 좋아하실 겁니다.”

강한서의 표정이 살짝 풀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

“직접 골랐으니 마음에 안 들 리가 있겠어요?”

민경하는 눈썹만 치켜세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모님이 이 가방을 갖고 싶다고 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저 지난번에 차에서 사모님이 잡지를 뒤지다가 이 가방이 괜찮다고만 했었다. 단지 그 한마디에 강한서는 그날 밤 바로 그에게 가방을 주문하라고 했었다.

국내에 물건이 없어 해외 구매로 구한 바람에 두 달이 지나서야 도착한 것이었다.

“먼저 차에 놓고 있어요.”

강한서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내일 아침 9시에 데리러 오세요.”

이튿날 아침 9시가 좀 넘은 시각, 유현진은 씻고 나오자마자 강한서의 전화를 받았다.

“내려와.”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 강한서는 ‘친절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아래층에서 기다릴게.”

유현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내가 어디 사는지 알아?”

그녀의 질문에 대꾸하기도 귀찮았던 강한서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매번 싸울 때마다 그녀는 호텔 아니면 친구 집에 머물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호텔 방키를 정지했으니 갈 수 있는 데라곤 차미주네 집 말고는 어디 있겠는가?

역시나 그의 예상이 맞았다. 강한서가 길가 옆에 벤츠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는데 유현진이 아파트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조수석으로 돌아가 타려는데 민경하가 차에서 내려 뒷좌석 차 문을 열어주었다.

강한서가 뒷좌석의 한 쪽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강한서와 나란히 앉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민경하에게 조수석 문을 열어달라고 하려던 그때 민경하가 먼저 재촉했다.

“사모님, 얼른 타세요, 얼른. 여기 차 세우면 안 되는 곳이거든요. 이따가 교통경찰이 올지도 몰라요.”

유현진은 하는 수 없이 차에 올라탔다.

아무 말도 섞지 않는 두 사람 때문에 차 안의 분위기가 냉기가 돌 정도로 차가웠다.

강한서 옆에서 오랜 시간 일한 민경하는 눈치가 꽤 빨랐다. 여기까지 사모님을 모시러 온 것도 이상한데 차 안의 분위기마저 심상치 않으니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한바탕 크게 싸웠나 보다.

그는 강한서와 유현진을 번갈아 보고는 마른기침을 했다.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마음에 먼저 화제를 꺼냈다.

“사모님, 작년 추석에 저한테 선물하셨던 그 향주머니 기억나세요? 제가 어머니한테 드렸는데 엄청 좋아하시더라고요. 맨날 베개 옆에 놓고 주무시고 잠도 잘 오신대요. 며칠 전 집에 갔는데 향이 옅어졌다면서 새것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향주머니 어디서 사셨어요? 어머니한테 더 사드리려고요.”

그 말에 유현진이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제가 직접 배합해서 인터넷에 주문 제작한 거라 파는 데 없어요.”

민경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직접 배합하셨다고요? 사모님 그것도 할 줄 아세요?”

강한서가 멈칫하더니 유현진을 빤히 보았다. 유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잘 몰라요. 그냥 취미로 하는 거죠, 뭐. 제가 선물한 향주머니 향료는 구하기 쉬워요. 이따가 만드는 방법을 카톡으로 보내줄게요. 그 방법대로 향로 가게에 가서 배합하면 돼요.”

“고마워요, 사모님.”

“고맙긴요.”

그러고는 카톡을 열어 향주머니를 만드는데 필요한 향료와 배합 비율을 적었다.

그녀는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손가락도 가늘고 길었다. 늘 깨끗한 손톱에는 연핑크 매니큐어를 발랐다. 지금 보니 메이크업도 예전과 달라진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별로 달라진 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요염하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강한서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머물렀다. 오늘 입은 원피스가 타이트한데다가 넥라인이 과감하게 드러나 자꾸만 눈이 갔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옷 없어? 왜 이렇게 입고 다녀?”

유현진은 그를 힐끗 째려보았다.

‘나온 것도 감지덕지해야지, 뭘 따지는 거야!’

유현진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새로 산 거야. 안 예뻐?”

“취향 참 여전하구나.”

강한서의 조롱 섞인 말투에 유현진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그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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