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박한빈에게 자신의 생일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해주었다.차에 올라탄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지니고 다니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검은색과 금색으로 된 라이터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밑부분에 박한빈의 이름이 새겨진 게 전부였다.이 작은 라이터가 결혼 기간 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다.다음 해에는 박한빈이 말도 안 하고 결혼기념일에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성유리는 이런 보여주기식 선물조차도 준비하지 않았었다.올해 역시...박한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라이터를 다시 넣어두고 눈앞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그런데 그때 기사가 갑자기 급정거를 한 탓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치켜뜬 채 기사를 바라봤다.그 눈빛에 기사는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앞에...”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앞을 가로막았던 남자는 어느새 박한빈이 앉아있는 자리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오십은 넘어 보이는 남자는 유난히 짧은 머리에 노란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원래 이런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는 박한빈이었지만 숙자 아주머니가 아침에 한 말이 생각나 이번에는 창문을 내려보았다.“박 대표님이시죠?”“안녕하세요! 역시 대표님 인물 하나는 끝내주시네, 신문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긴 것 같아요!”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는 지석민에도 박한빈은 차분하게 대꾸했다.“누구시죠?”“저요? 저는 서연이, 아니 유리 아빠죠! 제가 금방 금성에 와서 유리부터 만나려고 했는데 사람을 못 찾았거든요. 근데 이렇게 대표님 먼저 만나다니 정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무슨 일이시죠?”“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랫동안 못 봐서 잘 지내나 하고 와 봤는데 이 년... 아, 애가 연락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표님 찾아온 겁니다. 근데 우리 유리는...”“어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박한빈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진짜 이혼하셨어요?”“네.”“아니, 무
식당 앞에 도착한 박한빈은 기사가 말해주어서야 성시원과 대화 중인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성시원은 한눈에 봐도 아주 귀찮아하며 남자를 지나쳐갔지만 지석민은 포기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성시원이 차에 탈 때는 아예 큰 소리로 소리까지 질러댔다.“성 회장님이 동의하지 않으시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박 대표님을 찾아가서 그날 서연이랑 있었던 일을 알려줄 수밖에 없어요.”성유리든 성씨 집안이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자리를 뜨려 했던 박한빈은 지석민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난 뒤 다시 차를 세웠다.“대표님?”서훈의 부름에도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릴 뿐이었다.지석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 매정하게 차에 올라탔던 성시원은 지석민도 같이 차에 태웠다.“대표님, 저분이 말씀하시는 서연이가...”서훈이 움직이지 않는 박한빈을 보며 어렵게 한마디 내뱉었는데 박한빈은 그 말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바로 차에 타버렸다.서훈은 기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 역시 박한빈의 의중은 모르는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따라서 차에 올랐다.저녁에 술을 마신 탓에 박한빈은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았고 조수석에 앉은 서훈은 박한빈이 깨기라도 할까 봐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런데 차가 한창 달리는 와중에 박한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알아봐.”그 말에 놀란 서훈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뭘요?”그에 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성유리 양부.”...한편 낯선 곳에 떨어진 성유리는 지독한 몸살에 걸렸다.전날 밤에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호텔에 들어온 뒤로 성유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성유리가 하루 동안 밖에 나오지 않은 것에 이상함을 느낀 직원과 청소를 위해 문을 두드렸던 아주머니가 아니었으면 성유리는 그 잠에 빠져들어 다시는 눈을 못 뜰 수도 있었다.“여기에 친구나 가족 있어요?”“없어요.”“그럼 직장동료분께라도 연락을 드릴까요?”“괜찮아요.”걱정스레 묻는 직원에 성유리는 해열제를 넘기며 말했다.“그냥
다시 금성에 돌아온 성유리는 성시원이 감시를 붙였는지 안 붙였는지는 몰랐지만 붙여도 상관없었기에 굳이 지석민과의 만남을 피하지는 않았다.기복루, 금성에서 꽤 유명만 식당이며 성유리와 지석민이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성유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있던 지석민은 다리를 꼬고 서빙을 해주는 여직원을 희롱하고 있었다.세상 두려울 게 없는 눈과 더러운 말을 내뱉는 입 앞에서 여직원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며 메뉴판만 꽉 쥐고 있었다.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거긴 하지만 막상 이런 광경을 두 눈에 담으니 성유리는 다시 한번 숨을 참았다.그때 성유리를 본 지석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서연아!”주먹을 꽉 쥔 성유리는 결국 지석민에게로 다가갔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직원은 구세주라도 만난 양 메뉴판을 내려놓고 도망가버렸다.그런 여직원의 다리를 끝까지 보고 있던 지석민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성유리를 보며 이빨을 다 드러내고 웃었다.“오랜만이야 서연아! 넌 어쩜 점점 더 예뻐지니?”말을 하면서 지석민은 성유리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성유리는 그 손을 빠르게 피하고는 차갑게 지석민을 노려봤다.“하하,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그래도 네 아빤데.”“서연아, 내가 그래도 너를 10년이나 키웠는데 어쩜 그리 매정하니. 성씨 집안 아가씨 됐다고 이렇게 나 모른 척하기야?”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지석민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테이블 밑에 놓인 손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역겨운 말에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았다.“너도 알잖아. 내가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또 감옥에서 몇 년 살다 보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어.”“다른 자식도 없고... 내 노후는 네가 보장해줘야지.”지석민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돈 달라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그깟 돈 몇 푼이 뭐라고 그러니? 넌 지금 성씨 집안...”“성시원 찾
그러고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래요. 가서 말해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지석민이 넋이 나가 있는 사이에 밖으로 나갔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석민이 테이블을 '탁' 치며 쫓아나가려고 할 때 한 남자 직원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손님, 계산을 아직 안 하셨어요.”“밥도 안 시켰는데 무슨 계산이야!”“밥은 안 시키셨지만 차를 드셨잖아요. 그건 계산하셔야죠.”직원은 말을 하면서도 지석민을 위아래로 훑었는데 그 눈빛에는 무시가 가득했다.그에 화가 난 지석민이 벌벌 떨며 1억이 들어있는 카드를 던져주려 했는데 그 순간 또 다른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계산하죠.”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지석민이 고개를 돌렸고 마침 직원에게 제 카드를 건네준 성유정이 지석민을 보며 웃고 있었다.“지석민 아저씨 맞으시죠?”“당신은...”“저는 성유리 씨 동생 성유정이에요.”“아 성씨 집안에서 주워왔다는 그 잡종?”성유정을 보며 웃음을 흘린 지석민은 그녀를 훑어보며 물었다.“왜요, 나한테 할 말 있어요?”지석민의 시선이 아주 불쾌했지만 성유정은 그런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웃으며 말했다.“아저씨가 아까 성유리랑 하던 얘기 저도 다 들었어요.”“그래서요?”“돈 필요하시죠?”성유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성유리가 아저씨를 고분고분하게 모실 수 있게 만들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실래요?”...한편 식당에서 나온 성유리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그곳으로부터 멀어져갔다.마치 아주 무시무시한 것에 쫓기듯 한 발걸음이었다.지석민이 더는 저를 해칠 수 없다는 건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저도 이젠 반항할 힘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유리는 두려웠다.어릴 때 나무에 묶인 코끼리처럼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어릴 때의 그 기억이라는 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하도 조급하게 걸은 탓에 차가 지나가는 걸 못 본 성유리는 하마터면 차에 치일뻔하기까지 했다.“야, 너 미쳤어?!”차
조경우와 성유리는 그렇게 프라이빗한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금성에 오랫동안 성유리도 처음 와본 곳이었다. 조경우가 안내하지 않았더라면 금성이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 같았다.금성 시내와 교외의 경계선에 위치한 식당인데 하얀 벽돌에 짙은 녹색의 기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다.식당 내부에는 연꽃이 잔뜩 피어있는 호수와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도 있어 성유리는 이곳이 관광지로 쓰이는 원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식당의 사장은 여자였는데 미모는 그렇게 출중하지 않으나 특유의 분위가 아주 온화했다.조경우가 미리 예약을 해서인지 메뉴를 고르지도 않았기에 여자는 차만 올려주고는 밖으로 나갔다.“여기는 식재료를 다 당일 들어온 걸로 쓰거든요. 그래서 먹고 싶은 건 전날 미리 말해야 되요. 어젠 급해서 제가 혼자 정했는데 괜찮으세요?”성유리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조경우의 얼굴에서는 털끝만큼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에 성유리는 빠르게 대답했다.“괜찮아요.”“이건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특색 차에요. 사장님의 할아버지께서 직접 채집한 찻잎이라 다른 곳에 팔지도 않거든요.”조경우는 친절히 설명하며 차를 따라주었지만 할 말이 있던 성유리는 차 맛을 음미할 겨를이 없어 대충 입만 갖다 댈 뿐이었다.조경우는 곧바로 다른 얘기들을 꺼냈다.영화, 음악, 그리고 음식들까지 꺼내는 얘기마다 조급해하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묻는 조경우에 성유리는 하나하나 다 흥미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다.사실 조경우랑 만나는 게 성유리는 꽤나 즐거웠다.그래서 성유리는 조경우가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게 의아했다.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신분이 남달랐기에 결혼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그때 조경우가 갑자기 건넨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우리 전에 봤었어요.”“2년 전인가 금성대학에 다닐 때 유리 씨가 뮤지컬을 하나 했었죠? 그때 저도 무대 아래에 있었거든요.”“로미오와 줄리엣이요?”“네.”성유리의 질문에 조경우
“박 대표님도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같이 식사하자고 요청이라도 할 걸 그랬네요.”자연스럽게 말을 하며 웃는 조경우는 박한빈 앞에서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악수를 마친 박한빈은 자연스레 조경우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하지만 성유리는 고개만 숙인 채 인사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박한빈도 시선을 거두고 조경우를 보며 말했다.“데이트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만 가볼게요. 두 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네, 그럼 다음에 봬요.”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박한빈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고 조경우는 다시 성유리 앞에 앉았다.“오늘 박한빈도 여기 오는지는 저도 몰랐어요.”“괜찮아요.”혹시 성유리가 불편했을까 봐 해명하는 조경우를 향해 성유리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그러자 조경우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둘 사이에서 먼저 얘기를 시작하는 쪽은 항상 조경우였기에 그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그에 성유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조경우에게 제 뜻을 전하려고 할 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누구야, 서연아!”그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떤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보니 지석민이 이미 성유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옆에까지 와서 웃고 있었다.“밥 먹고 있었어?”“누구시죠?”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조경우가 지석민을 보며 묻자 지석민은 대뜸 조경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조씨 집안 아드님이시죠? 정말 잘 생기셨네요!”“저는 유리 아빠에요, 시골에 있을 때 유리 키워준 양아빠요.”유난히 큰 지석민의 목소리에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난감해진 조경우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유리 씨, 진짜 유리 씨 양 아버님이세요?”“그렇다니까요! 몇 년 동안 외국에 있느라 유리 어떻게 사는지 와보지도 못했는데 둘이 결혼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찾아왔어요! 뭐 비록 이미 한번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번 결혼생활은 잘 보내야죠! 그래서 제가...”“지석민 씨.”그때 성유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지석민의 이름을 불렀
하지만 지석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가늘게 뜬 채로 성유리를 주시하고 있었다.그에 성유리는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왜 말을 못 해요?”“유리 씨.”점점 살얼음판 같아지는 분위기에 조경우가 일어나며 성유리의 손을 잡았지만 성유리는 그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당신이 안 가면 내가 갈게요.”성유리가 뒤돌아 나가려 하자 조경우도 다급히 따라나서려는데 지석민이 또 느긋하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씨 노릇 몇 년 했다고 아주 기세가 장난 아니네.”“그런데 유리야, 사람이 초심을 잃으면 안 되지. 그때 나 아니었으면 넌 진작에 굶어 죽었어. 지금 여기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수도 없었다고!”“근데 네가 지금 나를 내쫓아? 똑똑히 들어. 내가 우리의 부녀간의 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것뿐이야. 그런데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 다 까발릴 거야!”지석민의 말이 끝나자 등을 돌리던 성유리의 행동도 멈췄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지석민은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지석민이 이토록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건 지석민이 쥐고 있는 그 카드가, 그날 일이 성유리는 감히 언급도 하지 못할 일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지석민은 제가 그 일을 들먹이면 성유리가 고개를 숙이고 제 말에 따를 거라 생각했다.그랬는데 지금의 성유리는 지석민을 향해 웃고 있었다.그 웃음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지석민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요? 당신한테 강간당할 뻔한 일이요?”평온하게 말하는 성유리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온 힘을 다해 말아쥔 탓에 손바닥에 닿은 손톱은 부러졌고 그 통증은 손끝에서부터 심장에까지 전해졌다.그 순간 성유리의 가슴도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몇 년간 애써 보듬은 덕분에 새로 돋아난 살들이 다 찢겨버리고 그 옛날의 곪아 터진 상처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성유리의 말에 조경우도 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눈을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았다.사실을 말해도 그 누구도 성유리를 피해자라 생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미 제 친어머니에게도 똑같은 눈빛을 받아본 성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성유리는 조경우를 한번 보고 나서 뒤돌아 밖으로 향했다.“지서연! 성유리! 너 거기 안 서?! 이런 미친년!”등 뒤에서 들려오는 폭언에도 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원래는 아무 택시나 잡아서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식당은 도로와 꽤 거리가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이곳에 오는 사람은 다 돈 좀 있는 집 사람이라 택시를 탈 일이 없다는 걸 생각해냈다.그렇게 텅 빈 거리에 홀로 서 있던 성유리는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손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과 함께 손도 떨려와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는 것도 몇 분이나 걸렸다.그렇게 겨우 잠금을 풀고 핸드폰을 뒤져봤지만 이번에는 택시를 잡는 어플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하얘진 머리 때문에 성유리가 손을 떨고 있을 때 차의 방향지시등이 성유리를 비춰왔다.갑자기 비춰진 강한 불빛에 놀란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있었는데 그때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창문을 내리더니 말했다.“타.”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아까 식당에서 일어난 소동 때문에 박한빈도 제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의 눈에도 드러났을 혐오와 놀라움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쳐있지 않았다.이미 다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박한빈의 시선이 창백해진 성유리의 얼굴에 닿았다.그리고 천천히 핸드폰을 꽉 잡고 있는 성유리의 손에도 닿았다.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으면 새파란 핏줄이 도드라져있었다.그에 보다 못한 박한빈이 차에서 내려서 성유리의 손목을 잡았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차에 태울 때 까지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정말 우연이에요.”구승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고 옆에 있던 사하나는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장성 그룹의 연 대표님 아니세요?”“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사하나 씨.”연정우는 곧 손을 내밀어 사하나와 악수를 나눴다.사하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성유리를 향해 눈으로 무언가를 묻는 듯했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사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이를 향해 물었다.“하늘아, 아저씨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아저씨가 병원에 나 보러 왔었어요.”하늘이는 진지하게 대답하며 덧붙였다.“이모, 아까 분수 보러 간다면서요?”“맞다! 그럼 가자, 분수 보러 가자!”사하나는 곧 하늘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성유리에게 말하며 눈짓을 보냈다.“하늘이랑 분수 보러 갔다 올게요. 두 분이서 편히 얘기하세요.”이 말을 끝으로 사하나는 하늘이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하늘이도 사하나의 행동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두 사람은 성유리가 말릴 틈도 없이 멀리 걸어가 버렸다.혼자 남겨진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연정우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딸이 엄마를 꽤 신경 쓰는 것 같네.”연정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대답했다.“농담하지 마. 아직 세 살도 안 됐는데 뭘 알겠어?”“아이들은 이런 문제에 굉장히 민감해. 방금 날 보고 무슨 질문 했는지 알아?”“무슨 질문 했는데?”“나한테 여자친구 있냐고, 혹시 여기 데이트하러 왔냐고 하더라고.”성유리는 순간 입가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분명 사하나가 하늘이에게 이런 말을 가르쳐 준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자신 몰래 얼마나 많은 장난을 쳤는지 알 수 없었다.“장난으로 한 말일 거야.”성유리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연정우에게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물론 아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지. 근데 그 장난이 생각보다 꽤 적절한 것 같아서.”연정우의 말 속에는 분명한 의미가
아이들의 감정은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이다.누가 잘해주면 그 사람과 친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거리를 둔다.김서영은 언제나 친절한 태도로 하늘이를 대했다.하늘이를 볼 때마다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기에 하늘이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하지만 박한빈은 달랐다.첫 만남부터 하늘이에게 끔찍한 인상을 남겼고 성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는 하늘이를 보며 웃은 적이 없었다.하늘이가 자신을 볼 때마다 박한빈은 항상 굳은 표정이었다.여기에 첫인상의 영향까지 더해져 하늘이가 그를 싫어하는 것도 당연했다.사하나는 정말 오랜만에 하늘이를 만났다. 그래서인지 오늘 두 사람은 유난히 들떠 있었다.식사를 마친 뒤 사하나는 하늘이를 데리고 게임센터로 향했다.사하나는 인형 뽑기 실력이 뛰어났다.두 사람은 가득 인형을 뽑아낸 후 그것들을 상가 입구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하늘이는 이런 일을 무척 좋아했다.하늘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인형을 나누어주는 틈을 타 사하나는 마침내 성유리에게 물을 수 있었다.“요즘 어떻게 지내요?”“뭐가?”“그러니까... 그 집에서 잘 지내고 있냐고요.”“응, 괜찮아. 하늘이도 잘 적응하고 있어.”“그럼... 한빈 씨랑 마주친 적은 없어요?”이 질문에 성유리는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이제 와서 숨길 필요도 없기에 곧 고개를 끄덕였다.“봤어.”“정말요? 언제? 어디서? 어떤 태도였는데요?”사하나는 흥분한 듯 물었다.그러자 성유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왜 그렇게 흥분해?”“나요? 흥분한 거 아닌데요? 나 흥분했어요?”사하나의 말에 웃음이 터질 뻔한 성유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오늘. 그 사람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어머님을 뵈러 왔더라고. 그래서 잠깐 얼굴을 보게 됐어.”“오늘... 잠깐, 방금 뭐라고 했어요?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고요?”“예쁜 여자였는데 이름이 안... 뭐라고 했더라...”“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 자식 여자친구가 있다
이전에 그녀는 꽤 큰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득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하늘이는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처음에 김서영을 마주할 때는 다소 어색해했지만 며칠을 함께 지내다 보니 얼굴에 미소도 점점 늘었다.김서영을 볼 때마다 먼저 ‘할머니’라고 부르며 인사하기도 했다.또한 그녀는 하늘이에게 많은 장난감을 사줬다.하늘이는 모두 감사히 받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여전히 작은 사자 인형이었다.매일 그 인형과 떨어지지 않고 잠잘 때도 꼭 끌어안고 있었다.성유리가 물었다.“그거 예전에 네가 가지고 있던 인형이 아닌 거 알아?”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아요. 전에 것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건 그냥 지금 좋아하는 거예요.”단순한 말이었지만 그 속엔 또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했다.성유리는 순간 그 의미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그 소리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하늘이는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도련님이 누구예요?”성유리가 대답하려던 순간 그가 이미 집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혼자가 아닌 옆에 낯선 여성과 함께 있었다.그날 마트에서 마주쳤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성유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어차피 박한빈의 곁에는 늘 여자가 끊이지 않았으니 말이다.호기심 가득했던 하늘이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얼굴 표정이 굳어지더니 곧바로 성유리의 곁으로 달려와 그녀 뒤로 숨었다.그 순간, 김서영이 계단을 내려왔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어머니.”“안녕하세요, 어머님.”그의 옆에 있던 여성이 다가와 웃으며 인사했다.“저는 안희연이라고 합니다.”“반가워요.”김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어서 와요.”“사실 전부터 뵙고 싶었는데 한빈 씨가 어머님께서 조용한 걸 좋아하신다고 해서 방해가 될까 봐 못 왔어요.”“괜찮아요. 시간 되면 자주 놀러 오세요.”김서영은 이렇게 말하며 잠시
“감사합니다.”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성유리는 주방에서 하늘이를 위해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이 집에는 도우미도 있고 요리사도 있었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하늘이의 음식을 직접 만드는 걸 선호했다.새로운 환경이었지만 하늘이는 적응력이 뛰어나 아침에는 성유리와 함께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식사 때도 얌전히 먹었다.지금은 2층에서 혼자 낮잠을 자고 있었다.하늘이는 내내 조용하고 순종적이었다. 약을 먹을 때조차도 울거나 떼를 쓰는 일이 없었다.김서영은 그런 하늘이를 무척 좋아했지만 혹시 과도한 애정 표현이 하늘이를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그러다 성유리가 잠시 짬을 내어 간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김서영은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순간 멈칫하며 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김서영을 바라보았다. 김서영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그러자 김서영이 대답했다.“하늘이를 정말 잘 키웠구나.”“저는 하늘이의 엄마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성유리가 담담히 말했다.“그리고 하늘이는 제 딸이니까 이런 말씀은 안 하셔도 돼요.”성유리는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를 분명히 선을 그었다.김서영도 성유리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겉으로는 이곳에서 살기로 동의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성유리는 상황을 역이용하려는 것이었다.그녀의 진짜 의도는 분명했다 하늘이가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받도록 하는 동시에 자신과 박한빈 사이의 가능성은 이미 완전히 끝났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김서영은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라도 시도해 봐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뒷마당 과일이 곧 익을 것 같아요.”김서영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하늘이가 케이크 좋아하나? 나중에 과일 따서 케이크를 만들어주면 어떨까?”“하늘이는 케이크를 좋아하지만 망고는 싫어해요.”성유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딸기랑 초콜릿, 단 걸 더 좋아하죠.”“그렇군. 그럼 다음에 내가 사람을 시켜서...”“굳이 그러실
표정이 잠시 굳어지더니 성유리가 이내 말했다.“나... 하지만 하늘아, 너 지금 몸도 안 좋잖아. 우리...”“알아요.”하늘이가 말을 끊었다.“내가 몸이 안 좋으면 엄마가 더 힘들어질 거잖아요.”“그러니까 엄마 걱정 마세요. 그 사람 싫어도 저 얌전히 말을 들을 거예요. 하지만 아빠라고 부르고 싶진 않아요.”하늘이의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하늘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어쨌든 그 사람은 네 아빠야. 네게 생명을 준 사람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없었다면 엄마도 하늘이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아빠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싫어해도 괜찮아. 하지만 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면 안 돼. 알겠니?”...그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하늘이의 상태도 빠르게 회복되었다.거부 반응도 거의 없었고 적혈구 수치도 빠르게 상승해 수술 한 달 후 성유리는 하늘이의 퇴원 수속을 밟았다.하지만 사하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정말 거기로 이사 갈 거예요?”“응.”“왜요? 굳이 거기 갈 필요가 뭐 있어요? 금성에 살고 싶으면 우리 집에 빈집 많으니까 하늘이랑 같이 살면 되잖아요.”성유리가 웃으며 말했다.“언제까지나 네게 의지할 순 없지.”“그게 뭐 어때서요? 언니랑 하늘이 정도야 내가 먹여 살리는 데 문제없어요!”“그래도 안 돼.”성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리고... 이미 약속한 일이기도 하고.”그러자 사하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근데 결국 수술받은 사람도 그 여자가 아니었잖아요. 게다가 그 어르신이 이렇게까지 한 데는 분명 뭔가 속셈이 있을 거예요.”“짐은 다 챙겼니?”사하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사하나는 깜짝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봤다. 마주한 건 환히 웃고 있는 김서영의 얼굴이었다.나이로 따지자면 사하나가 그녀를 어르신이라 부르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김서영의 모습은 그 호칭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최근 몇
그 순간, 성유리는 문득 자신의 엄마가 떠올랐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이식을 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던 엄마가 아니라 지금도 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였다.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엄마가 자신을 구하려고 몸을 던졌을 때, 과연 후폭풍을 생각했을까? 엄마는 그 결과로 지금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지만 만약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선택했을 것 같았다. 지금의 자신처럼. 박한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일 따위는 지금의 성유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체면이나 존엄성, 심지어 목숨마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가 살아남기만 하면 만족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그 이후 박한빈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떠나기 전, 그녀에게 한 장의 종이를 던져줬던 순간만 떠올랐다. 거기엔 박한빈의 서명이 적힌 수술 동의서가 있었다. 도대체 박한빈이 언제 서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 결국 박한빈이 원했던 건 자신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과 간절히 비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일찍 이걸 원한다고 말해줬더라면 이 오랜 갈등은 불필요했을 것이다.하지만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박한빈이 동의서에 서명하자마자 병원 측에서는 즉시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수술 팀은 박한빈이 직접 섭외한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으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수술을 집도하는 주치의는 이 수술이 마치 일반 의사가 감기를 치료하는 정도로 간단한 일이라며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술 전날 밤, 성유리는 잠에 들지 못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반면, 하늘이는 아주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내일은 그냥 조금 길게 자는 날이라고 생각해. 깨어나면 천천히 건강해질 거야. 그러면 하늘이는 다른 건강한 친구들처럼 뛰어다니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게 될 거야.” 그 말이 하늘이에겐 무
“그렇다 해도 지금은 네 말만으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 하지만 만약 내가 이 감정서를 보여주기만 하면 어머니가 서명한 수술 동의서는 바로 무효가 될 거야.”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얼굴에서 띠고 있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노 또는 슬픔, 아니면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나 놀랍다는 감정. 지금 성유리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저 가만히 서서 마치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이 그를 응시했다. “왜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한빈 씨, 당신은 정말 당신의 딸이... 죽는 걸 보고 싶어요?” 이 순간, 어떤 금기 따위도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건 단 하나, 끝없는 혼란뿐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박한빈이 하는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도대체 박한빈이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왜 하늘이에게까지 이런 잔인한 짓을 하려 하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비록 박한빈이 하늘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고 과거 성유리가 한 선택을 증오한다 해도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하늘이는 분명 그를 아빠라고 불러야 할 존재였다. 그런데 박한빈은 그런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일까? “가슴 아파?”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오히려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지난 2년 넘게 나는 매일매일 그렇게 살아왔어. 네가 나를 의심하던 그때도. 내가 아프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난 그 아이가 죽길 바라는 게 아니야. 난 그저... 네가 편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말은 깊은 저주처럼 그녀의 가슴에 뜨거운 쇠붙이로 쓴 낙인처럼 새겨졌다. 결국 성유리는 몰려오는 서러움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재회 후, 처음으로 박한빈 앞에서 흘린 눈물이었다. 곰곰이 떠올려보면 성유
박한빈은 바로 병실 밖에 서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는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차림이었다. 한층 더 마른 듯한 모습에 날카로워진 얼굴선, 그리고 길고 큰 체격이 주는 강렬한 압박감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그런 분위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차분히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박한빈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언제 내 어머니까지 찾아간 거지?”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목소리를 더 낮게 깔며 말했다. “내 어머니가 올해 연세가 얼마인지 알기나 해?” “알아요.” “그런데도 어머니에게 그런 수술을 하게 했다고?” 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하늘이가 몇 살인지도 아세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살 반, 정확히는 29개월하고 7일이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의사 말로는 지금이 치료의 최적 시기라고 하더군요. 박 대표님, 제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전 그저 아이가 천천히...” 성유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원래 그녀는 그런 금기를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일이 막상 자신의 아이에게 닥치자 그녀는 그런 미신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신께 기도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도 못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게 네가 내 어머니를 강제로 수술하게 만든 이유라는 건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성유리는 더 이상 설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수술 동의서는 작성되었고 아무도 박한빈에게 수술을 강요할 수 없듯 그 역시 어머니가 수술을 받지 못하게 막을 권리는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 성유리는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박한빈이 말했다. “만약 내가 동의서
“얼마 전 뉴스에서도 본 것 같아.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고?” 김서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하나 씨는 참 의리 있는 분이고 사씨 가문의 배경도 대단하지만 하늘이는 내 손녀야. 계속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고. 아마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지.” “그리고 수술 후에는 분명 재활과 회복에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금성의 의료 환경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거야.” “내가 사는 집은 너도 와봤잖아. 지금은 나랑 몇몇 가정부들만 있어서 아주 조용해. 걱정하지 마. 한빈이도 그곳에 자주 오지 않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김서영의 말은 느리고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준비한 듯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이유를 풀어내며 성유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성유리는 잠시 김서영을 주시하다가 물었다. “왜죠?” “뭐가?” “왜 저와 제 아이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요?” “아까 말했듯이...” 성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죠. 진짜 이유는... 어머니가 저와 박한빈 씨 사이를 다시 이어보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반박할 수는 없겠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또래 사람들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둘러싸인 모습을 보면 부럽더라고.” “혼자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이가 곁에 있으면 훨씬 활기찰 것 같아.” “그럼 만약...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면요? 수술을 거부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지.”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하늘이는 내 손녀니까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제안일 뿐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준 제안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