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나는 완전히 중매자 역할에 몰두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하늘이와 충분히 놀고 난 사하나는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며 먼저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유리와 하늘이를 집에 데려다주는 일을 자연스럽게 연정우에게 맡겼다.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하나가 하는 행동들은 너무 티가 났기에 성유리의 눈에는 어설퍼 보이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연정우는 그런 사하나를 굳이 들추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게 웃으며 그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심지어는 사하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기까지 했다.사하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연정우를 쳐다보다가 하늘이에게 무슨 말을 몇 마디 더 속삭인 뒤에야 자리를 떴다.그녀가 아이에게 좋은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직감한 성유리는 돌아가는 길 내내 하늘이의 주의를 돌리려 노력했다.하늘이가 사하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잊게 하려는 의도였다.하지만 하늘이는 책임감이 강한 아이였다.결국 돌아가는 길 끝 무렵에 하늘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정우에게 먼저 물었다.“아저씨, 나중에 시간 되면 저랑 같이 놀러 갈 수 있어요?"하늘이는 질문을 매우 직설적으로 던졌고 둥그런 눈으로 연정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아이의 물음에 연정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물론이지."그 답을 듣자마자 하늘이는 기뻐하며 환히 웃었지만 반면에 성유리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마침 그때, 차는 엔절 월드에 도착했다.하늘이는 연정우에게 인사말을 전하며 차에서 내렸다.“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만나요. 저랑 약속했으니까!"“그래. 안녕."연정우는 차에서 내려 잠시 저택을 바라보다가 별다른 말 없이 미소만 지은 채 자리를 떠났고 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시간이 너무 늦지는 않았지만 김서영은 일찍 자는 습관이 있어 저택 안에는 몇몇 하인들만 남아 있었다.성유리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도우미 중 한 명이 다가왔다.“성유리 씨, 저녁 식사는 하셨나요? 준비해 드릴까요?"
성유리는 처음엔 우연히 만났을 뿐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답했다.“걱정해 주시는 거면 고마워요. 하지만 진실이 어떤지는 저랑 하늘이가 잘 알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하늘이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성유리는 끝내 박한빈에게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가 하늘이의 목욕을 도와주던 중, 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아빠는 나를 정말 싫어하는 거야?"“아니야."성유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말투로 하늘이의 말에 반박했다.“그런데 왜 아빠는 나를 볼 때마다 그런 표정을 지어?"하늘이는 말하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입꼬리마저 일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박한빈과 꽤 닮아 있었다.아이의 모습을 발견한 성유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니야. 네가 뭘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빠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그래."“정말? 근데 엄마가 전에 말했잖아. 하늘이는 엄마랑 아빠가 사랑해서 생긴 아이라고. 그럼 이제는 사랑이 없어진 거야?"그 말을 들은 성유리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고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짜던 동작도 뚝 멈췄다.“엄마?"하늘이가 자신을 다시 부르는 소리에 성유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응. 그래.”그러자 하늘이가 성유리에게 다시 물었다.“그럼 엄마는 정우 아저씨를 사랑할 수 있어?"“하늘아, 사랑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성유리가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리고 지금 엄마는 너만 있으면 돼.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하지만 하늘이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런데 엄마, 나는 엄마가 아저씨랑 같이 있으면 좋겠어요.”성유리는 아이의 말을 듣고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건 분명히 사하나 이모가 네게 이상한 말을 한 거지? 그 말 믿지 마. 엄마는...”“아니. 엄마. 그건 내 생각이야.”하늘이의 진지한 대
박한빈은 어젯밤 발코니에서 보았던 하늘이가 연정우와 인사하며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솔직히 그 장면은 너무나도 조화로워 보였고 마치 진짜 가족처럼 느껴졌다.그리고 박한빈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하늘이가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하지만 아이가 한 말은 다름 아닌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박한빈은 차마 하늘이에게 내가 내 집에 왜 있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순진무구한 하늘이의 눈을 마주친 순간 모든 생각을 접었고 짧게 대답해 줬다.“그래.”그의 대답은 단호했지만 하늘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성유리를 찾았다.박한빈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한구석이 무겁고 아픈 감각이 점점 더 선명해질 때쯤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에는 김서영이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박한빈을 발견한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빨리 와서 아침 먹어라.”“괜찮아요."박한빈은 대답하며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저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그래도 아침은 먹고 가야지...”김서영이 박한빈에게 말을 더 붙이려 했지만 박한빈은 이미 집 문을 나섰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하려던 말을 삼키며 식당 쪽을 돌아보았다.성유리와 하늘이는 그곳에 있었다.어젯밤 박한빈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미 지나갔고 오늘 아침 함께 식탁에 앉을 드문 기회조차 그는 놓쳐버렸다.김서영은 속이 상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어 한숨만 내쉬며 식당으로 들어갔다.“한빈이는 먼저 나갔어.”김서영의 말에도 성유리는 고개만 숙인 채 하늘이에게 삶은 달걀 껍질을 까주고 있었다.그녀의 말이 몇 초간 허공을 맴돌았고 성유리는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마치 자신에게 한 말이 맞는지를 묻는 듯했다.그 눈빛을 본 김서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고 그제야 성유리가 어색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그래요?”김서영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그로부터 며칠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을 다시 볼 수 없었다.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도 박한빈이 이곳에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었으니까.그 안희연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사하나가 성유리에게 알려주었다.“전에 인터넷 방송하던 사람이래요. 지금도 스트리머로 활동 중인 것 같고요.”사하나는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눈에 인터넷 방송은 그다지 품격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특히 안염처럼 외모가 괜찮은 여자는 더더욱.사하나는 성유리에게 안희연이 진행했던 방송 영상을 보여주었다.화면 속의 안희연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그게 다예요?"그러자 사하나는 눈을 부릅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무 의견도 없어요?"“내가 무슨 의견을 말해야 되는데?"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음... 예쁘긴 하네.”“그거 다 필터예요! 그리고 얼굴에 화장 얼마나 두껍게 발랐는지 안 보여요?”“그래도 이 업계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그렇긴 해요. 그런데 이번엔 박한빈 씨 취향이 진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수준인 여자랑 만날 수 있죠? 눈이 이렇게 낮아졌나?”성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냥 둘이 좋으면 된 거지. 네가 왜 이렇게 신경 써?"“그냥 보기 불편해서 그래요.”사하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금세 화제를 돌렸다.“언니는요? 요즘 연정우 씨랑 만난 적 있어요?”“아니."“왜요? 그 사람이 언니한테 연락 안 했어요?”“그런 건 아닌데 그냥 내가 만나고 싶지 않아.”“왜요? 저는 연정우 씨 참 괜찮은 사람 같던데. 두 사람 옛날에 결혼까지 거의 갈 뻔했잖아요. 지금 다시 잘될 기회가 생긴 거면 좋은 거 아닌가요?”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좋
성유리는 사하나의 마지막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사실 유효정의 집안이 몰락한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성유리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하늘이가 회전목마에서 내려오자 둘은 함께 그곳을 나왔다.아이는 너무 신나게 놀아 얼굴에 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성유리가 하늘이의 땀을 닦아주기 위해 몸을 숙이려는 순간, 옆에 있던 사하나가 갑자기 손을 뻗어 성유리의 팔을 꽉 잡았다.너무 갑작스러운 사하나의 행동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는 한편 잡혀있는 팔이 너무 아팠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사하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성유리의 손을 잡은 채 앞쪽을 가리켰다.“언니, 저기 빨리 봐요! 저 사람 누구예요?"사하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고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않았다.성유리는 대체 사하나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현재 그들은 쇼핑몰에 있었고 방학 기간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그렇기에 성유리는 사하나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사하나는 그런 성유리가 답답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언니 바로 앞에. 브랜드 매장 들어가려는 여자 말이에요!"성유리는 이날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있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다행히 매장 조명이 밝았고 그 여자의 검은 웨이브 머리가 눈에 띄었기에 뒤늦게 그녀가 누군지 알아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박한빈의 새 여자 친구, 안희연이었다.“봤어. 근데 그래서?"성유리가 물었다.“언니 진짜 둔하네요. 안희연 씨 옆에 있는 남자는 못 보셨어요?”성유리는 안희연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기 때문에 옆에 있는 남자를 볼 여유는 없었다.안희연과 남자는 이미 매장 안으로 들어갔으니 사하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같은 매장으로 향했다.“우리는 왜 들어가?”성유리는 사하나의 의도를 눈치채 재빨리 물었고 사하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당연히 확인해야죠! 둘이 무슨 관계인지 말이
“근데 이모는 왜 웃는 거야?"“갑자기 재밌는 일이 떠올라서 그래.”“맞아. 나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따라 멋쩍게 웃어 보이더니 계속 말했다.“가자. 하늘이, 이모가 집에 데려다줄게."“음...”하늘이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이에게 진짜 이유를 설명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그래서 아이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사하나는 직접 차를 몰아 그들을 엔젤 월드로 데려다주었다.가는 길 내내 사하나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핸들을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금 당장이라도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 호텔에서 불륜을 적발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하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단순히 박한빈 혼자서만 불륜 현장을 적발해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사하나는 이 사실을 모임 사람들에게도 알려 박한빈의 체면이 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제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마.”뒷좌석에서 앉아 있던 성유리가 차분히 말했다.그러자 사하나는 멈칫하며 되물었다.“제가 뭘요?”성유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어쨌든 그건 남의 일이야. 괜히 끼어들지 마.”사하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성유리의 말에 대꾸했다.“그 말이 참 어이없네요. 제가 이 일을 박한빈 씨한테 말하면 그 사람은 저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요. 제가 아니었으면 평생 속고만 살았을 거잖아요.” “하지만 제가 굳이 먼저 말할 필요는 없죠. 지금 사람들 눈에는 박한빈 씨가 완전 호구로 보일 테니까요. 그게 바로 자업자득 아니겠어요?”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이 호구인지 아닌지 그것은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사하나는 혀를 끌끌 차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진짜 자업자득이죠. 지금 박한빈 씨 주변에 있는 여자들 중에 그 사람 돈이나 지위를 노리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솔직히 이 세상엔 언니 같은 사람은 없을...”말을 이어가던 사하나는 갑자기 뚝 멈췄고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
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후,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엔젤 월드를 떠났다.그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그곳에 서 있는 사하나와 딱 마주쳤다.성유리와의 관계 때문에 사하나는 박한빈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비록 사하나가 처한 위치에서는 박한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사하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마음이 없다 못해 겉으로 좋은 척, 마음에 드는 척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사하나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는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 안녕하세요?”박한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그리고는 바로 자신의 차에 오르려고 했다.그러나 사하나가 그를 그냥 보내줄 리 없었다.안희연의 일로 큰 한방을 터뜨리고 싶었던 사하나였지만 생각해 보면 성유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겉으로 보면 사하나와 박한빈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이였다.그가 어떤 일을 당하든 그것은 다 사하나와 무관했다.그러나 만약 사하나가 일을 크게 만들면 박한빈은 분명 성유리와 연결 지어 생각할 것이고 어쩌면 그녀가 성유리를 통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박한빈이 차에 타려는 순간, 사하나는 서둘러 그를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박 대표님, 제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새 여자 친구가 생기셨다면서요? 팬이 많다는 그 인플루언서 맞죠?”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추고 사하나를 뒤돌아보았다.사하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의문과 함께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하려던 말을 멈추지 않았다.“대표님과 안희연 씨 관계는 요즘 어떠신가요?”“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 하세요.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박한빈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며 대답했고 그의 불쾌함은 행동과
그의 행동은 매우 빨랐다.어찌나 빠른지 사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받으려던 순간 손가락이 박한빈의 차 문에 끼일 뻔했다.그러나 박한빈은 사과 한마디 없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지시했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사하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박한빈의 차를 향해 소리쳤다.“박한빈, 너 미쳤어? 감정 조절도 못 하는 미친놈!”“그래! 너 같은 놈이 그런 여자한테 배신당해도 싸지.”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당연히 듣지 않았다.사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후, 박한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안희연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그러자 안희연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박 대표님.”“오늘 성유리를 만났어?”박한빈은 안희연 앞에서 성유리라는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던 터였다.더군다나 그녀가 금성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모습을 감췄던 터라 성유리라는 이름은 안희연에게 낯설게 들렸다.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박한빈과 관련된 여자를 떠올리며 대상을 짚어낸 후 대답했다.“아뇨. 못 만났는데요.”“오늘 백화점에 갔다며?”“네.”“누구랑 같이 갔지?”안희연은 말이 없었다.그러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계속 물었다.“안희연, 우리 계약 관계에 대해서 내가 굳이 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그런 거 아니에요. 박 대표님, 제가 다 설명할게요.”박한빈은 지금 그녀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안희연이 급히 말했다.“그래서 그 성유리라는 분이 박 대표님에게 고자질한 건가요? 그렇다면 박 대표님께 아직 미련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안희연은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남자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난 몇 년간 라이브 방송에서 수많은 남자들을 보아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박한빈의 민감한 포인트를 정확히 짚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그러자 안희연이 계속 말했다.“박 대표님, 그 여자가 뭐라고 말
“저예요.”성유리가 말했다.“알아.”“이우빈 씨 일... 박한빈 씨가 시킨 거예요?”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묻고 있었지만 사실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임을 확신하고 있었다.“응.”박한빈은 그녀의 물음에 조금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맞다는 대답을 내뱉었다.“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여기까지만 하세요. 이우빈 씨 쪽도 박한빈 씨가 손 볼 필요 없어요.”“왜? 이우빈이라는 사람을 동정하는 거야?”박한빈은 성유리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계속 물었다.“일이 생기면 여자를 앞에 내세우는 남자를 동정할 가치가 있나?”성유리는 그의 말속에 담긴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때 상황에서 만약 이우빈 씨가 나서서 저를 보호했다면 일은 더 복잡해졌을 거예요.”“게다가 저랑 그저 동료 사이 일뿐인 이우빈 씨가 굳이 나서서 저를 도울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수수방관했던 사람이 어디 이우빈 씨 한 명인가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래도 뭐가 됐든 해주신 모든 일들은 감사하게 생각할게요. 하지만 다른 일은 이제 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제 드라마고 제 작품이니 계획대로 방영한다면 저야 너무 좋죠. 그러니까 박 대표님께서도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시고 이제 그만 하세요. 저희가 다시 솟아날 구멍을 남겨두세요. 네?”“성유리, 꼭 이런 식으로 말해야겠어?”“그럼 제가 어떻게 할까요? 다시 무릎이라도 꿇을까요?”성유리는 자신의 말에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박한빈이 의아했다.‘곧 다른 말로 반박하겠지.’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바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는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보다 이내 박한빈이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그래서 성유리는 전화를 내려놓고는 하던 일에 몰두했다.하지만 그 순간,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하늘이가 먼저 소리를 듣고 입구로 쪼르르 달려 나갔고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아이는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그 사람은 허리를 굽혀 하늘이의 코를
경운시에 있는 집은 이미 장시간 방치돼 있는 상태였다.성유리가 집에 돌아간 뒤, 며칠 동안 열심히 청소를 했고 그제야 집은 그나마 깨끗하게 치워졌다.집을 청소하는 와중에 하늘이는 마치 바삐 움직이는 한 마리의 꿀벌처럼 성유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도왔다.성유리가 이제 드디어 안정적인 삶을 다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터넷에 갑자기 사과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그 영상은 몇 달 전 성유리와 이우빈의 사이에 대해 해명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영상 속 상대는 사실 그때 자신은 한 번도 직접 성유리가 이우빈에게 대시하거나 일부러 말을 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사실대로 토로했다.그와 동시에 이우빈이 성유리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질투가 나 나쁜 마음을 품고 거짓 소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사람들은 이 일을 거의 다 잊고 있었지만 그래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연예인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넷은 다시 뜨겁게 달궈졌다.게다가 이우빈 또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자신과 성유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문장을 올리는 동시에 몇 달 전 왜 직접 나서서 해명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덧붙였다.회사에서 이우빈에게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해 아무 해명도 하지 못한 사실에 지금 성유리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이우빈이 올린 마지막 문장에는 자신을 몰래 찍는 사생팬들을 나무라는 말이었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이내 성유리는 이우빈 회사 측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죄송해요. 성 선생님. 이번 일은 저희 책임도 있어요. 저희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도 큰 죄죠.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그 팬이라는 사람 저희가 알아서 처리했고 인터넷에 사과 영상도 올리라고 했어요. 경찰도 그 여자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겠다고 약속했고요.”“지금까지 저희가 후기 작업을 거의 다 마쳤어요. 이제 두 달만 있으면 정상적으로 방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성유리 선생님 이름은 꼭 제일 위에 잘 보이는 위치에 적을게요.
마치 자신을 왕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이런 상황이 죽도록 싫었다.한참을 망설이던 성유리는 박한빈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캐리어를 손에 넣으려 했다.박한빈은 멍하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다 성유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손에 들려 있던 캐리어를 꽉 쥐었다.성유리 또한 박한빈의 힘을 느낄 수 있었기에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거 놓으세요.”힘을 세게 쓰고 있는 바람에 박한빈의 팔에는 핏줄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연정우와 자신 사이에서 연정우를 선택한 성유리의 결정이 박한빈은 믿기지 않아 성유리를 쳐다봤다.옆에 있던 김서영은 박한빈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다가가더니 말했다.“유리야, 그래도...”“박한빈 씨, 이 손 놓으라고요.”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을 올려다보며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쳐다보다 문득 어젯밤 안희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녀는 성유리의 심장이 더는 박한빈을 위해 뛰지 않는다는 말을 했었다. 처음에 박한빈은 안희연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성유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보니 안희연이 했던 말이 다 사실 같았다.캐리어를 꽉 쥐고 있던 박한빈은 서서히 손에 힘을 풀었고 성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캐리어를 휙 낚아챘다.이런 상황을 지켜만 보던 연정우는 살짝 미소 지으며 성유리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하늘이를 보며 말했다.“가자. 엄마랑 같이 지하철 타고 갈까?”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잔뜩 신나 하며 폴짝폴짝 뛰었다.“좋아!”성유리는 아이의 순수한 웃음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돌려 김서영과 마지막 인사를 한 뒤, 하늘이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그러나 뒤에 있던 연정우가 서둘러 두 사람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지하철 타고 갈 거야?”“응. 지하철 타고 가면 공항이랑 연결된 길이 있어서 사실 내가 더 편해.”“여기서부터 지하철역까지 가려면 거리가 좀 있을 텐데? 내가 데려다.
연정우가 하늘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성유리는 결국 받아들였다.그러나 반짝이는 보석이 붙어있는 머리 집게가 하늘이의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몇 번 보고 나서는 서랍 안에 넣어버렸다.“이건 안 가지고 갈 거야?”성유리가 묻자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별로 마음에 안 들면 엄마가 이 선물 연정우 아저씨한테 돌려줄까?”“응,”너무도 빠르게 대답하는 하늘이의 모습에 성유리는 의아해졌다.“아저씨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왜 아저씨가 준 선물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야?”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하늘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연정우 아저씨 좋아. 그냥 나한테 준 선물이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야.”성유리가 여전히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하늘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어갔다.“난 인형이 더 좋아. 엄마가 나중에 아저씨한테 말해서 나한테 인형 하나 사달라고 해. 나는 토끼 인형 갖고 싶어.”피와 살이 찢기는 고통을 느끼면서 직접 낳은 아이의 감정을 성유리가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연기하며 자세한 원인은 묻지 않았고 하늘이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원래는 약속한 대로 연정우가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줄 알았지만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도 와 있었다.게다가 박한빈의 신분은 연정우와는 다르지 않는가?아이와 피가 섞인 가족이자 아버지인 박한빈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오더니 성유리와 하늘이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성유리는 생각지 못한 그의 등장에 멍해 있다 정신을 다잡고는 박한빈을 막으려했다.그리고 그 순간, 연정우의 차 또한 두 사람이 머물던 집 밑에 세워졌다.박한빈을 발견한 연정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캐리어를 꼭 잡더니 물었다.“하늘이는요? 아직 안 내려왔습니까?”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연정우의 행동에 박한빈은 자신이 마치 짐을 날라주는 짐꾼이 된 기분이 들었다.아직 아이의 캐리어를 손에 넣지 못한 연정우가 다시 손을 뻗자 박한빈은
안희연은 아주 담담한 말투로 대답하며 두 눈으로는 사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자신의 아이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 같은 안희연의 발언에 사하나는 화가 나 부들부들 떨었다.‘그러니까 박한빈 씨도 이런 식으로 달랬다는 거지?’사하나는 딱 봐도 거짓말인 안희연의 설명을 박한빈이 믿었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만약 박한빈이 안희연을 믿어준 게 사실이라면 사하나는 박한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미친놈이 아니라 바보였나?’성유리는 사하나의 손을 재빨리 잡으며 안희연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그 순간, 안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성유리 씨, 저 할 말 있어요.”“뭐라고요?”사하나가 먼저 고개를 돌려 안희연을 당장이라도 때릴 듯 째려보며 말했다.“지금 본인이 뭐라도 됐다고 착각하시나 본데 당신은 저희랑 대화를 나눌 자격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에요.”“사하나 씨, 저는 성유리 씨랑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그쪽이 아니라.”“저...”사하나는 치가 떨려 당장이라도 다가가 안희연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지만 성유리가 급히 말렸다.그리고는 안희연을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하실 말씀이 뭐죠?” “아, 네. 곧 경운시로 돌아가신다고요?” “네.” “정말 잘됐네요.” 안희연은 더욱 밝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박한빈 씨를 옆에서 잘 챙길 테니까.““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성유리는 아주 차 분한 어조로 대답했다.“두 분이서 만나시든 말든, 누가 누구를 챙기든 저랑은 이제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제가 경운시로 돌아가려는 이유 또한 당신들이랑 상관없고요.”그녀의 대답에 안희연은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성유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하나의 손을 잡고는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사하나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는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맞아요! 제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거라고요. 언니 정말 멋졌어요! 오늘에서야 저는 비로소 알 것
“이제 그만 마셔요. 너무 속상하니까!”성유리가 방에서 나왔을 때, 마침 사하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한 손으로 목을 꽉 잡은 채로 애써 안희연의 목소리를 따라 하고 있었다.원래부터 안희연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하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밥을 같이 먹다 보니 더더욱 안희연이라는 사람이 극도로 싫어졌다.성유리는 사하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먼저 물었다.“안희연 씨가 너한테 무슨 큰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싫어해?”“왜 싫어하냐고요?”그녀의 말에 사하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싫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저 연기하는 꼴 좀 보세요! 게다가 방금도 언니를 막 조롱하려고 했잖아요. 언니는 그저 박한빈 씨 과거 애인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밝히고 비웃은 거잖아요!”“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해요. 과거 일로 말하자면 저도 말할 게 많다고요. 전에도 막 다른 남자랑 쇼핑하고 호텔도 갔잖아요. 박한빈 씨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를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거죠?”“언니, 내 생각엔 박한빈 씨가 일부로 저러는 것 같아요. 언니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저러는 게 분명해요. 그게 아니면 전 이해가 안 돼요. 좀 잇다 돌아가서 그 여자 얼굴 볼 생각만 하면 토 나온다니까요! 근데 언니는 왜 자꾸 저를 쿡쿡 찌르세요?”말문이 한번 트이기 시작한 사하나는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었다.그녀가 말하는 동안 성유리는 몇 번이나 끼어들려고 했지만 기회를 다 놓쳐버렸고 어쩔 수 없이 사하나의 손을 잡거나 쿡쿡 찔러야 했다.그러자 사하나는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을 한 채 미간을 찌푸리며 성유리를 쳐다보았다.성유리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뒤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하나는 순식간에 등골이 싸해졌다.뒤를 천천히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안희연이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전에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거나 욕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사하나는 그런 안희연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안희연 씨 맞으시죠? 전에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모습 본 적 있는 것 같아요.”“아, 그래요?”안희연은 그제야 사하나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이어갔다.“사하나 씨 제 팬이신가 봐요?”‘팬? 누가? 별꼴이야. 정말!’사하나는 속으로 안희연을 몇 번이나 욕했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그러다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을 열었다.“팬은 아니고 그냥 몇 번 본 것뿐이에요. 근데 제가 알기론 남자 친구 있으시지 않았나요? 안희연 씨랑 친구라고 한 것 같은데.”“맞아요. 그렇지만 저희는 이미 헤어졌어요.”안희연은 사하나의 말을 깔끔하게 인정하며 계속 말했다.“이 시대에 연애 좀 하는 것도 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누구나 다 과거는 있는 법이죠. 안 그래요?”안희연은 성유리를 쓱 쳐다보며 이런 말을 했는데 마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유리는 그저 박한빈의 과거일 뿐이라는 말을 전하려는 의도 같았다.그 모습에 겨우 화를 억누르던 사하나가 폭발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표정 관리를 못하던 사하나를 본 연정우는 먼저 술잔을 들며 말을 꺼냈다.“이제 보니 박 대표님이랑 이렇게 같이 식사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기회를 빌어 제가 한 잔 따라드릴까요?”박한빈은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습니다.”두 사람은 그렇게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단번에 마셨다.한잔, 두잔, 세잔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음주에 놀란 사하나가 낮은 소리로 성유리에게 말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혹시 누가 먼저 취하는지 붙어보려는 건가? 연 대표님 주량이 어떻게 돼요?”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뚫어져라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했다.솔직히 말하면 성유리는 지금 두 사람이 이러는 게 너무 싫었다.
“내일 몇 시 비행기예요? 전 내일 바빠서 아마 공항까지는 못 데려다줄 것 같아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도 연정우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녀는 지금 너무나도 티 나게 연정우에게 무언의 암시를 주고 있었다.연정우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사하나의 말에 대답했다.“그래요? 유리야,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몇 시 비행기야?”성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 없어. 우리가 알아서 택시 타고 갈게.”“그래도 내가 데려다줄게. 다음엔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연정우는 성유리를 조금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고 옆에 있던 사하나도 맞장구를 쳐줬다.“연 대표님 말이 맞아요. 성유리 씨? 이번엔 결정을 너무 빨리 내리신 것 같아요. 저희한테 반응할 틈도 안 주시고.”성유리는 두 사람의 말에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그때,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하늘이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 아저씨가 주는 선물이야.”하늘이는 핑크색으로 정교히 포장돼 있는 선물 상자를 보고는 성유리의 눈치를 쓱 살폈다.성유리는 단번에 상자 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로고를 발견했는데 어린아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귀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이 선물을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는 와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사하나가 먼저 뒤돌아 소리가 나는 쪽을 봤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음료를 뱉을 뻔했다.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한빈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던 안희연이었다.꽤 잘나가는 인플루언서인 안희연은 멀리서 봐도 자태가 아름다웠지만 금성에서는 내놓을 정도의 미모가 아니었다.그래서 사하나는 박한빈이 안희연이 바람을 피우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당연히 그녀를 내팽개칠 줄 알았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안희연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박한빈이었다. 그녀는 그의 팔짱을 꽉 끼고 있었는데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차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고 침묵하던 하늘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엄마, 나는 하나 이모랑 더 놀고 싶어.”“응.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약속했어.”“연정우 아저씨도 와?”하늘이가 물었다.아이의 말에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박한빈을 슬쩍 쳐다보았다.다른 이유에서가 아닌 행여나 박한빈이 갑자기 화를 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운전만 했다.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아이는 잔뜩 신나 하며 말했다.“와! 너무 좋아. 난 연정우 아저씨랑 같이 노는 게 제일 행복해.”“왜?”“왜냐하면 정우 아저씨는 잘생겼거든. 그리고 아저씨는 엄마를 잘 보호해 줄 것 같아.”하늘이의 말에 운전만 하던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조롱 섞인 눈빛으로 성유리를 쳐다보았다.성유리는 그의 눈빛을 애써 못 본 체했고 시선을 하늘이에게만 고정했다....성유리는 그날 저녁, 연정우와 밥 약속이 있었다. 필경 전에 갑자기 연정우와의 약속을 취소해 버린 죄가 있으니 말이다.게다가 곧 금성을 떠날 성유리기에 오늘 밤이 아니라면 아마 만날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하늘이까지 데리고 그와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세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저번에 놀이공원을 가려고 한 날에도 성유리는 사실 사하나와 함께 가려고 약속을 한 상태였다.사하나는 성유리가 자신과의 약속을 깨고 박한빈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기도 했다.그녀는 한결같이 성유리가 얼른 박한빈과 하늘이 사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빨리 불필요한 관계를 끊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생물학적인 아버지라는 존재는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성유리가 누누이 말한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말 또한 사하나는 전혀 새겨듣지 않았다.사하나는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