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진이 육현경에게 말을 건넸다.“소이연의 다리가 옆문과 앞좌석에 눌려있고 안전벨트도 잠겨있어 풀 수 없어요.”“그렇군요. 알았어요.”육현경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물었다. “칼이나 단검, 과도를 갖고 있는 분이 있나요?”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사실 다들 구조를 도우려는 생각은 있지만 사고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차 안의 사람이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았고 또 쓸데없는 문제에 휘말리기도 두려웠다.이런 상태에서 육현경이 칼을 요구하자 다들 열정적으로 칼 찾기에 나섰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엄지 두 개 정도 넓이의 과도를 가져왔다. “이걸로 괜찮아요?”“괜찮아요.”육현경은 칼을 들고 다시 차 옆으로 돌아갔다.그는 먼저 소이연의 에어백을 조금 자른 다음 그녀의 안전벨트를 힘껏 자르기 시작했다.안전벨트의 품질이 너무 좋다 보니 육현경의 자르는 동작은 1초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천우진은 그의 손바닥이 붉게 변해가는 상태를 지켜봤다.육현경이 이토록 애쓰는데 그가 소이연을 싫어한다고 하면 천우진은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루카스!”육현경의 귀에 갑자기 임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차 안에서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와 육현경을 따라왔다.그녀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육현경이 유리 조각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창문을 통해 사람을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가 진정하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훤히 볼 수 있었다.육현경은 임아영에게 대응하지 않았다.그는 지금 소이연을 구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찼다.‘소이연을 구해야 해. 그녀는 죽을 수 없어.’육현경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지만 자르는 동작은 멈추지 않고 더욱 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루카스, 구급차가 도착할 거니까 그만해요.” 이 순간, 임아영은 육현경의 손이 다 닳아버린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하지만 육현경은 임아영의 말을
그래서 소이연을 구하기 위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눈에 뵈는 게 없을 수 있을까? 그의 건강도 고려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의 기분도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임아영은 육현경의 옆에서 그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그녀는 문뜩 악독한 생각이 떠올랐다.‘소이연이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참 좋겠다.’그녀가 죽으면 다시는 누구도 임아영과 루카스를 뺏지 않을 것이니.그녀의 눈동자에는 잔인함이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육현경은 차 안으로 들어가 앞좌석을 힘껏 움직여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 순간 좌석만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옆문도 단단히 눌려 있어서 소이연을 구할 수 없었다.육현경은 숨을 길게 들이쉬며 진정했다.자신에게 긴장하고 초조해하지 말고 기필코 소이연을 구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육현경이 차 안에서 조사한 결과, 천우진의 좌석 측에서 소이연의 하반신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우선 우진 씨를 빼낼게요.” 육현경이 결단을 내리고 천우진에게 말했다.“그럽시다.” 천우진은 거부하지 않았고 더 이상 질문도 하지 않았다.루카스가 소이연을 그토록 구하고 싶어 하는데 결코 그가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루카스가 먼저 천우진을 구하고 싶어 한다면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육현경은 천우진의 안전벨트를 자르고 그를 짓누르고 있는 물체에서 그의 몸을 힘껏 빼냈다.천우진은 극심한 고통을 꾹 참았다.다시 자유를 되찾은 순간, 그는 즉시 차에서 나가려고 시도하지 않고 육현경과 함께 계속해서 소이연을 구하는 방법을 고민했다.“소이연은 주로 오른쪽 몸이 심하게 짓눌려 있고 왼쪽 몸에는 어느 정도의 자유 공간이 있어요. 우리는 그녀의 발을 짓누르고 있는 물건들을 오른쪽으로 조금 이동시키면 그녀의 몸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생겨 그녀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좋아요, 제가 협력할게요.” 천우진이 급히 육현경의 제안에 동의했다.육현경도 머리를 끄덕이며 초조한 말투로 말했다. “방금
그녀는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고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갑자기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그 고통은 마음을 후벼파는 것처럼 극심했고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그녀는 고통 속에서 눈을 서서히 떴다.눈앞은 여전히 흐릿했고 그녀는 지금 꿈속에 있는지 아니면 이미 현실로 돌아온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아마도 현실인 것 같았다. 현실이 아니라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었다.하지만 만약 눈 앞의 세계가 현실이라면 어떻게 육현경을 보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고 힘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소이연은 눈에 힘을 줬고 이내 빨간 피가 그의 얼굴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그 촉감은 그녀가 꿈속에서 울 때 흘리던 눈물의 촉감과 똑같았다.“현경 씨...” 소이연이 육현경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갈린 목소리로 겨우 육현경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그녀는 갑자기 예전 일이 생각났다.3년 전.소이연이 그때에도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그때는 심문헌과 함께 있을 때였다.그리고 그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역시 육현경이었다.소이연이 사고를 당했을 때마다 그녀를 구해주러 오늘 사람은 늘 육현경이었다...소이연의 눈앞이 다시 흐릿해졌다. 시야가 너무 흐릿해져서 눈앞의 육현경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육현경은 소이연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육현경”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이유를 알지 못할 아픔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 느낌은 절대 질투가 아니었다.그냥...이상하게도 마음이 자꾸 아팠다.“육현경”이라는 세 글자는 그녀의 앞길을 비춰줄 햇빛과 같았다.육현경이 있기에 소이연도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육현경은 잠깐 동작을 멈추고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이연 씨를 구해줄 테니까 두려워하지 마요.”소이연의 목구멍이 움찔거렸다. 살짝 움직여봤지만 그녀는 목구멍에 심각한 고통을 느꼈다.가볍게 침을 삼키는 것마저도 피비린내를 느낄 수 있었다.“이연 씨, 깨어났나요?
“좋아요.”육현경은 주저하지 않았다.이미 극한의 상태에 도달한 그였지만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내가 나오면 같이 끌고 나와요.”육현경은 자동차 창문으로 기어 들어갔다.임아영은 그 자리에서 루카스가 소이연을 구하는 장면을 빤히 바라보았다.육현경이 나오자 빨간 피로 얼룩진 그가 보였다.그러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나온 후 그는 주위 신경을 쓰지 않고 소이연만 관심했다.그의 상반신은 창문으로 들어가 창문 유리 조각을 막으며 피범벅이 된 소이연을 안아 들고 조심스레 나왔다.그녀의 몸이 조금이라도 부딪히지 않게 조심했다.유리 조각들은 모두 육현경의 몸에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임아영은 눈이 빨개졌다.그녀는 소이연에 대한 루카스의 자상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임아영은 이를 꽉 깨물었다.육현경이 소이연을 안아 들고 조심스레 바닥에 올려놓았다.“조금만 기다려. 천우진을 데리고 나올게.”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부터 교통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해 주위에서 차량이 이동하기 시작했다.멀리서 구급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육현경은 천우진한테 많이 거칠었다.그는 몸을 숙여 천우진을 끌어 당겼다.천우진은 아무 소리 없이 아픔을 견디며 육현경에게 끌려 나왔다.그때, 누군가가 육현경의 옆으로 지나갔다.육현경은 본능적으로 천우진을 잡던 손을 풀고 소이연에게 달려갔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순간 겉옷에서 칼을 꺼내 들어 소이연의 머리로 뻗었다.소이연도 위험을 감지했으나 몸이 상처로 가득해 마비된 채로 움직여 지지 않았다.그녀는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남성이 칼을 들고 자신의 심장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보며 죽는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머릿속에는 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육민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육현경도.그러나 예상했던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눈을 뜬 그녀는 한 손이 남성의 칼을 움켜쥐고 있음을 보았다.칼과 그의 심장의 거리는 1센치도 되지 않았다.육현경의 손은 피로 얼룩졌다.피는 칼을 지나 소이연의 몸으로 떨어졌다.
그는 몸을 일으켜 검은 옷의 남성과 싸우기 시작했다.임아영은 옆에서 놀라 자빠졌다.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루카스는 다시 그에게로 달려갔다.임아영이 그런 그를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남성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고 칼에는 육현경의 피가 가득했다.“육현경, 그만해요!”소이연이 소리를 질렀다.육현경은 맨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남성의 상대가 아니었다.소이연은 남성의 손에 들린 칼이 육현경의 심장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안돼!”소이연은 두려운 얼굴로 소리쳤다.그러나 칼은 육현경의 몸이 아닌 임아영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온 세상이 조용해지는 듯했다.육현경은 믿을 수 없었다.그 칼은 임아영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심장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죽을 수 있었다.남성은 칼로 찌르자마자 인파 속으로 도망갔다.“아영 씨!”육현경이 소리쳤다.소이연은 그런 임아영을 바라보며 얼굴이 창백해졌다.“루, 루카스...”임아영은 약하게 그를 불렀다.“당신, 당신이 괜찮으면... 돼요...”“아영...”임아영은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아영 씨!”소이연은 임아영이 육현경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장면을 바라보았다...육현경은 상처를 많이 입은 것인지 아니면 임아영 때문에 놀란 것인지 그녀를 품에 안고 쓰러졌다.교통 사고를 당하지 않은 두 사람이 도리어 상처를 제일 많이 입었다...구급차가 모든 사람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기사는 현장에서 사망을 선고받았다. 차량은 많이 훼손되어 재사용이 불가능했다.소이연과 천우진도 상처가 많았지만 생명의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대 차량은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사망하고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다.한편 육현경은 혼미 상태로 머리에 큰 상처를 입어 잠시 깨어나지 않는 거라고 의사가 설명했다. 몸에도 외상이 많았다.임아영은 아직 구조 중이었다.그녀는 심장을 찔리지 않았지만 중상을 이결낼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그렇게 이틀이 흘렀다.소이연은 휠체어에 앉던 데로부터 침대를 내려올 수 있게 되었
소이연은 그렇게 많은 말을 했다.눈물도 쉴 새 없이 흘렀다.육민이도 옆에서 보는 게 가슴이 아파왔지만 아빠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엄마도 아빠와의 이별을 견딜 수 없듯이 육민도 마찬가지였다.육민은 묵묵히 자신의 눈물을 훔쳤다.엄마가 이미 상처를 많이 입었기에 더 이상 상처 입는 걸 바라지 않았다.“엄마.”소이연은 육미의 부름에 눈물을 닦았다.“의사가 면회 시간 다 됐대요.”육민의 말에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육현경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녀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떠났다. 누구도 침대 위의 그가 손가락을 떠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그들이 중환자실 밖으로 나오자 천우진이 기다리고 있었다.천우진은 상처가 깊지 않아 휠체어에 탈 필요가 없었지만 여러 군데 상처가 많아 의사는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여긴 왜 온 거예요?”“병실에 가니 없어서 여기 와 봤어요.”“무슨 일 있어요?”“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말을 마치고 천우진은 덧붙였다.“심문헌이 왔어요.”그런 그를 소이연은 바라보았다.“네, 제가 알렸어요.”천우진은 사실대로 말했다.그의 의도는 명확했다.그는 심문헌과 소이연을 다시 이어주고 싶어 했다.임아영이 이번 사고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고 소이연과 루카스가 이와 연관이 있기에 임씨 가문을 건드리게 될 것이다.그래서 천우진은 소이연이 심문헌을 선택하는 게 좋다고 생각되었다.루카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들을 구했다고 해도 루카스는 그녀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되었다.소이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천우진의 생각은 그녀도 이미 했었다.자신을 잘 대해주는 사람을 질책할 이유는 없었다.그들이 함께 병실로 돌아가자 초조하게 소이연을 기다리는 심문헌을 마주했다.교통사고가 났다는 천우진의 메세지를 받은 그는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다.천우진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아무런 매체도 발표하지 않아 내부인들 빼고는 아무도 그들의 상황을 몰랐다.병실 문을 열자
“그럼 됐어요.”심문헌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물었다.“어쩌다가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 왜 이렇게 자주 사고가 나요?”소이연은 자주 교통사고가 난 적이 없다.저번에 교통사고가 난 건 심문헌과 함께였다.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했다.“앉아서 얘기해요.”천우진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기분이 언짢았다.“둘이 같은 차에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왜 당신은 상처가 적어요? 이연 씨를 보호하지 않은 거예요? 오빠 아닌가요?”심문헌은 괜히 모든 기분을 천우진에게 풀었다.“교통사고는 갑자기 일어났어요. 몇초도 안 돼서 아무 정신이 없었어요.”소이연은 천우진을 변호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누구의 보호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내가 차에 있었다면 당신을 보호했을 거예요.”심문헌은 강경하게 대답했다.“우리가 교통사고가 난 적이 없는 것처럼 말하네요.”이번엔 그녀도 심문헌보다 적게 다치지 않았다.“그땐 당신을 사랑하기 전이잖아요.”심문헌은 해명하며 우물쭈물 말했다.“그때 교통사고가 우리를 맺어 준 거죠. 내가 그때부터 당신을 좋아하게...”“그만해요.”소이연은 그의 말을 끊었다.“다른 사람도 있는데 이런 얘기는 하지 말죠.”심문헌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소이연은 못 본 척하며 천우진을 돌아보았다.“이번 교통사고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요?”천우진이 소이연을 찾아온 것도 그녀와 교통사고의 일을 얘기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심문헌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심문헌은 메세지를 받자마자 달려왔을 것이다.소이연에 대한 마음은 정말 대단했다.소이연은 심문헌을 바라보았다.그에게 피할 거냐고 물어보는 것이다.심문헌도 정치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 소이연의 앞에서 멍청한 척 하지만 사실 엄청 세심했다. 그러니 그녀의 뜻을 금방 알아차리고 일어섰다.“괜찮아요. 그와 관련은 없어요.”천우진의 대답에 심문헌은 의구심이 들었다.그뿐만 아니라 소이연도 천우진이 심문헌에 대한 빠른 태도 전환에 놀랐다.그녀가 아직 심문헌과 함께 하지도
시간 차이로 인해 소이연은 이 사건이 임아영과 관련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당신의 말에 동의해요.”“아까 한 말은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천우진의 말에 소이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천우진은 그녀에게 육현경이 반드시 임아영과 결혼할 거라 말한 것이다.그녀는 가슴은 아파왔다. 자신이 이런 날을 맞이하게 될 줄 몰랐다.“임아영이 아니면 한 사람밖에...”천우진은 다시 화제를 돌려 진지하게 말했다.“천씨 가문의 사람이죠.”심문헌은 옆에서 눈을 크게 떴다. 이 둘은 정말 자신을 집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비밀내용을 털어놓았다. 그 모습에 심문헌은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천우진이 좋아졌다.“이 사람이 할아버지를 해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저도 그렇게 생각해요.”소이연의 말에 천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그 사람에 영향을 끼친 건가요?”“할아버지의 유언이 당신과 관련되었나요?”천우진의 추측에 소이연은 가슴이 살짝 떨려왔다.그녀는 꿈에도 천씨 어르신의 유언에 자신의 이름이 등장할 거로 생각지 못했다.천씨 어르신이 자신에게, 더욱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어머니에게 빚을 진 것을 알았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돈을 좀 쥐어주거나 관심을 줄 거라 생각했다.단순히 돈을 쥐여준다면 자신을 죽이러 오지 않을 것 같았다.소이연은 지금 감정이 복잡했다.원래 그녀는 천씨 가문에 대한 감정이 옅었고 더욱 깊게 발전하기 싫었다. 지난 일들은 사람을 더욱 속박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마음이 이미 너무 힘들었기에 더 이상 부담감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제멋대로 할 수 없었다.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워있는 것만 생각하면... 그녀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부담감이 그녀를 짓눌러 숨을 쉬기 어려웠다.“우리가 잘못 생각했어요.”“그 사람의 목표가 할아버지라고 생각해서 할아버지의 주위만 엄밀히 경호했는데 당신이 목표였다니.”천우진의 말은 소이연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그래서 이렇게 큰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예수진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너랑 나랑은 다르지.”“뭐가 다른데?”“난 너 안 좋아하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예수진에 하도경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헤어질 때 준 상처로는 부족했는지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하도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예수진이었다.“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맞지 지수야?”일부러 하지수를 언급했지만 그녀는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고 오히려 송문수가 대답을 가로챘다.“그냥 친구로 지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럴 수도 있지.”하지수는 입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고 예수진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송문수를 노려보며 저 싹수면 이혼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모인다, 다음에 만날 때쯤이면 우리 애도 다 태어났겠어.”“도경아, 오늘은 진짜 취하기 전엔 아무도 집에 보내지 말자.”계지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하자 하도경도 눈치 있게 대꾸했다.“좋아.”어차피 예수진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더 다칠 마음도 없었기에 하도경은 공허한 제 가슴에 술이나 퍼부으려고 맥주를 따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자들 앞에 한 병씩 놓아준 하도경은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우리 여자분들은 물, 우유, 음료수 중에 고르세요.”“전 물 마실게요, 알아서 마실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전 맥주 주세요.”평소엔 술을 즐기지도 않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마실 때만 한 잔씩 같이 마시던 하지수가 갑자기 맥주를 요구하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요즘 송승우 옆에만 있느라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잖아요.”“송승우는 좀 어때?”궁금한 건 못 참는 예수진이었기에 말 나온 김에 하지수를 향해 물었다.“아직도 죽겠다고 난리야?”“아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다 큰 남자가 왜 자기 목숨으로 가족들 협박하는 거야?”처음에는 송승우를 안타까워
그 한 달 동안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부모님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집으로 불러도 송문수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아서 안 온다는 걸 허영지와 송기명은 알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송승우의 회복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송씨 집안 주치의가 매일같이 검사를 진행하며 회복속도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두 달 뒤에 바로 의족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소견도 듣게 되었다.그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내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송승우와의 교제를 약속한 하지수도 매일 그의 옆을 지키며 함께 재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렇게 별장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하지수는 예수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곧 출산하는 데 그러면 산후조리원에 가야 해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니 그전에 한 번 만나서 원 없이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었다.그 말을 들은 하지수는 자신에게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지금 본인의 상태가 우울한 건지는 잘 몰랐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송문수도 가는 거야?”예수진과 밥을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송승우에게 했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송문수와 예수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송문수와 하지수가 따로 만날까 봐 걱정돼서 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하지수는 바로 대답했다.“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그런데 문수 씨가 간다고 해도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요. 송문수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안 볼 순 없어요.”하지수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당황했던 송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속 아프니까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네.”그날 저녁 하지수는 바로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때 집에는 예수진의 가족뿐이었는데 안 본 사이 더 커진 배를 보니 두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
“네.”“회사 일을 이제는 문수가 다 책임지고 있으니까 빨리 가는 것도 맞지, 승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매일 간호할 필요도 없잖아.”하지수를 직접 키워온 허영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서 빈말이지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네.”그런 허영지의 노력을 보아낸 건지 하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 이제 중환자실에서도 나오고 의사 선생님도 별문제 없다고 했으니까 두 분은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하잖아요.”“그래.”송승우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고 또 지금 하지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속내가 너무 눈에 훤해서 허영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우린 그럼 먼저 갈게. 지수야, 승우 잘 부탁해. 네가 고생이 많다.”말이야 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하지수의 발을 여기 묶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네.”하지수 역시 제 시어머니의 의도를 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하지수의 대답을 들은 허영지는 마음이 한결 놓여 송기명을 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송기명은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허영지와 송기명이 나간 병실에는 하지수와 송승우 둘뿐이었다.“과일 좀 먹을래요?”“응, 고마워.”하지수가 먼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며 묻자 송승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배를 집어 든 하지수는 열심히 깎기 시작했는데 송승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지나 껍질을 다 깎아낸 하지수는 배를 작게 썰어 송승우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먹어요.”“넌 안 먹어?”“입맛 없어요.”송승우는 입맛 없다는 하지수에게 굳이 권하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송승우의 모습을 다시 본 하지수는 송승우의 말대로 거기에 자신의 공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송승우의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송문수를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차 문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송문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냥 차에 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가 그를 불러세웠다.“문수 씨.”“장안시로 돌아가면 서울엔 다시 올 거야?”“안 올 것 같아 아마. 송승우도 많이 나았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겠지. 그럼 엄마 아빠가 송승우 집에 데려가서 보살피려 할 텐데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 힘들게.”“그래서 나 혼자 여기 버려두겠다는 거구나.”하지수가 내뱉은 담담한 한마디에 송문수는 심장박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숨을 내쉴 수조차도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그는 이를 악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여전히 침묵만 유지하는 송문수에 마지막 기대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송문수 말대로 자신은 그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 마침 옆에 있었던 여자일 뿐이니,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았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송문수의 마음은 저를 향하지 않으니 하지수는 이제 그와의 사이를 끝내려 했다.“조심히 가.”이렇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으니 하지수는 그거면 된 것 같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저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웃으며 돌아섰다.그 작은 몸통이 외로이 돌아서는 걸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왔다.정말 제가 하지수를 버린 것만 같아서, 또 하지수를 혼자만 남겨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주먹을 꽉 말아쥔 채 온몸을 떨어대던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제 충동을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수에게는 송승우가 있었으니, 그녀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혼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한편 한참을
송승우가 병실을 옮기고 나니 가족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엄마,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저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죠.”“너만 괜찮을 수 있다면 우린 뭐든 다 할 수 있어.”병원 침대에 누운 채 감성 어린 말을 하는 송승우를 향해 허영지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허영지는 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씩씩하게 본인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제가 하루빨리 마음 다잡아서 이제 엄마 아빠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넌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애야, 넌 계속 우리의 자랑이었어.”제 손을 잡은 채 저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엄마를 향해 송승우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말 눈물 나도록 다정한 모자지간이었다.송승우가 병실을 옮긴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온 송문수도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그는 어쩐지 제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한편 허영지와 대화를 나누던 송승우는 하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간호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가며 앞으로는 어떻게 재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묻고 있었다.자신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지수야.”“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뭘.”“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빨리 마음 다잡을 수 있었어. 너 아니었으면 현실을 이렇게 빨리 받아들이진 못했을 거야.”“나 응원해줘서 정말 고마워.”하지수는 결국 그 감사 인사를 받아들인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간호사를 보며 디테일하게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물었다.다들 제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에 송문수는 그만 병실을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 송기명이 그를 불러세웠다.“문수야, 어디 가?”“장안시로 돌아가야죠 이제.”담담히 말하는 송문수에 송기명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지금
허영지의 말에 다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 시선 끝에는 하지수가 서 있었다.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지수야, 여긴 어떻게 왔어?”그런 하지수를 본 허영지는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하지수가 송문수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들었다면 둘 사이에 감정이 있든 없든 마음이 아플 것은 당연지사였기에 허영지는 하지수가 안쓰러웠다.하지수는 굳어버린 고개를 힘겹게 돌리며 허영지를 향해 말했다.“일어나보니까 호텔에 아무도 없어서 왔어요.”눈 떠보니 사라져버린 송문수에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온 거지만 혹시나 송문수가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오지 말라고 말릴까 봐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송문수가 또다시 허영지와 싸울까 봐 말도 없이 온 건데, 오자마자 하지수는 송문수가 내뱉는 차가운 말들을 모조리 들어버린 것이다.저를 물건 취급하며 송승우에게 넘겨주겠다는 송문수의 말에 하지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제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송문수한테 저는 여전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모든 게 다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아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아직도 많이 피곤해서 전 이만 호텔로 돌아가 볼게요.”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병원을 나섰다.자신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는 하지수를 보며 허영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하지수가 친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키워왔던 아이였기에 허영지는 그녀를 친딸 이상으로 아껴주었다.부모도 잃은 아이가 저렇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게 가슴이 아팠지만 허영지는 끝내 송문수 더러 하지수를 위로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허영지는 이번에도 이기적이게 송승우를 위해 송문수를 희생시킨 것이다.송승우가 나을 수만 있다면 송문수와 하지수 사이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송기명은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볼 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