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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신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로 서준혁의 말에 대답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는 뜻이야. 그럴 필요 없으니까.”

서준혁은 펜을 들어 시원시원하게 사인을 했고 이내 서류를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쓸데없는 표정이 전혀 없었다. “그래. 네가 걔한테 설명해 줘.”

신유리는 그의 말에 응답하고는 서류를 들고 사무실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서준혁의 손에 들려 있던 펜이 멈칫했다. 그는 신유리를 불러세웠다.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송지음보고 오라고 해.”

그 말에 신유리의 발걸음이 멈칫했고, 서준혁은 차갑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넌 이제 오지 마.”

서준혁이 송지음한테 무슨 말을 한 건지, 다음날 신유리가 송지음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

서준혁의 팔짱을 끼며 그녀에게 인사하는 송지음의 눈빛에도 어제의 의심이 사라져 있었다.

아직 어려서인지 송지음은 감정이라는 것을 숨길 줄 몰랐다. 마침 동기들끼리 서로 연애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고, 다들 서로를 조금씩 놀리고 있었다.

송지음과 서준혁의 일은 온 회사에 퍼지게 되었다. 신유리가 자리에 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은근히 장난 몇 마디를 던지고 있었다.

어제 서준혁에게서 다짐을 받은 건지, 송지음은 예전처럼 신유리를 피하고 꺼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그 화제를 이어 신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유리 언니, 남자 친구 생긴 거예요?”

그 말에 마우스를 클릭하던 신유리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송지음을 쳐다보았다. “서준혁이 그랬어?”

“아니요.” 송지음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대표님은 언니 사생활이라고 했어요. 근데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송지음의 눈빛은 무척이나 솔직했다. 아무래도 신유리의 몸에 남은 흔적이 사라지진 않았으니까.

신유리는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곧이어 고개를 들어 담담한 눈빛으로 송지음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떠보는 듯한 감정과 긴장감이 역력했다. 혹시라도 자기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듣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신유리는 그녀를 계속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떨어지려던 그때, 신유리는 그제야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응. 남자 친구 생겼어.”

말이 끝나자마자, 대표 사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서준혁이 밖으로 나왔다. 서준혁의 담담한 눈빛이 신유리의 몸에 떨어졌다.

하지만 잠깐의 순간일 뿐이었다. 그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

송지음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걸어가더니 친밀하게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준혁 씨, 내 말이 맞았어요. 유리 언니, 남자 친구 생겼대요.”

서준혁은 고개를 숙이며 그 말에 응답하더니 무심하게 신유리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야?”

신유리의 몸은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악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송지음은 서준혁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며칠 뒤에 열리는 파티, 유리 언니보고 남자 친구 데리고 오라고 하면 안 돼요? 유리 언니처럼 대단한 사람이 어떤 남자랑 만날지 너무 궁금해요.”

그 말에 신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절하려고 입을 열려는 그때, 서준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 나도 신 비서 남자 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네.”

그들은 그녀에게 거절할 기회도 전혀 주지 않았다.

심지어 무슨 파티인지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로 자기 멋대로 결정을 해버렸다.

신유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신을 놓은 탓에 그녀는 오일 탱크에 기름이 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고 경찰이 그녀의 차를 막은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오일 탱크에 기름이 새면 더 이상 운전할 수가 없었다. 정비 업체를 불러 견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택시 잡기 어려운 곳이었다. 길가에서 10분이나 넘게 기다렸는데도 지나가는 차가 없었다.

핸드폰이 곧 꺼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던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서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핸드폰에는 차가운 기계음만 들릴 뿐이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 말에 신유리는 멈칫했다. 그녀는 전화번호를 확인한 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기계음이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신유리는 오기가 생겼는지, 줄줄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를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입력했다. 그녀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만…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GT716 술집 룸.

서준혁은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포도를 까고 있었다. 보라색 껍질이 손끝에 붙어 그의 손가락을 더 길어 보이게 했다.

그는 알맹이를 접시에 놓더니 포크 하나를 송지음 앞으로 밀었다. “이거 먹어.”

그의 행동에 송지음은 투정을 부렸다. “사람도 많은데요…”

서준혁은 손을 닦더니 나른하게 소파에 누웠다. “내가 너한테 까준 거야. 안 뺏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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