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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저녁 9시가 넘도록 강지혁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임유진은 그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하고 마음 졸였지만, 하필이면 지혁한테 핸드폰도 없는지라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아예 집을 나와 동네를 둘러보며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지혁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먼발치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유진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혁아!”

지혁은 멀리에서부터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유진이 앞에 도착했을 때에야 지혁은 유진이 숨을 헐떡이는 건 물론 얼굴도 얼어 벌겋게 물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유진의 눈은 오히려 예쁘게 반짝거렸다.

“돌아와서 다행이다.”

“혹시…… 나 기다렸어?”

지혁은 조심스럽게 물으며 손을 들어 유진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냉기로 보아 유진이 밖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지 짐작이 갔다.

“응.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했어.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유진은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

그런 유진의 눈에서 지혁은 유진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혁이지 GH 그룹 대표 강지혁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 순간 자기의 신분이 밝혀져도 유진이 자기를 이렇게 걱정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단지를 돌리는 게 생각보다 늦게 끝났어. 손 차갑지?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이윽고 싱긋 웃더니 유진의 두 손을 잡은 채로 지난번 유진이 했던 대로 유진의 손을 살살 비벼주기 시작했다.

점점 따뜻해지는 손에 유진의 마음에도 점차 온기가 차올랐다. 분명 추운 날씨임에도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있어서 참 좋아.”

지혁은 유진의 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말 꼭 기억해. 앞으로 절대 후회하면 안 돼.”

“당연하지. 절대 후회하지 않아. 이제 됐어, 나 이제 따뜻하니까 얼른 집에 돌아가자. 저녁 다시 데워줄게.”

당연하다는 듯 대꾸한 유진은 그의 손을 잡고 동네 입구로 들어섰다. 하지만 동네 밖의 구석에 세워진 검은색 차량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 시각, 고이준은 차 안에서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지켜봤다.

‘대표님이…… 저렇게 로맨틱하다고? 어 저거 지금…… 여자의 손을 녹여주는 거 맞나?’

솔직히 그는 지혁이 다른 여자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행동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전 약혼녀였던 진애령한테도 이런 대접은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유진에게 지금 하는 행동은 뭐란 말인가? 그것도 애령을 사고로 죽게 만든 가해자한테!

더욱이 전에 클럽 문 앞에서 술에 취한 유진을 위해 나서던 지혁을 떠올리자 이준은 머리가 복잡했다.

‘대표님 대체 무슨 생각이지? 임유진이 대체 대표님 마음속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거지?’

--

이튿날, 이준이 대표실에서 지혁에게 일정과 업무를 보고할 때 눈은 저도 모르게 지혁의 손을 훔쳐봤다.

지혁의 손은 길고 뼈마디가 뚜렷하지만 남자의 손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심지어 남자인 이준도 그의 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지혁은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며 사람을 죽일 뻔한 적이 있다. 또한 손에 피가 흥건히 묻은 걸 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지만 그런 짓을 하던 손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따뜻하게 해준다니, 그것도 감옥에 갔다 온 여자의 손을 그렇게 보듬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손에 뭐 문제 있어?”

지혁의 말이 귓가에 울리자 이준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닙니다.”

이내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며 청첩장을 지혁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진씨 가문에서 보내온 청첩장입니다. 2주 뒤 진세령 씨와 소민준 씨의 약혼이 있다고 진 회장님께서 보내온 겁니다.”

“약혼?”

지혁은 청첩장을 힐끗 흘겨봤다.

지혁은 당연히 진씨 가문에서 본인에게 이 청첩장을 보내온 의도를 알고 있었다. 진씨 가문의 죽은 큰딸이 자기의 약혼녀인데, 소민준이 바로 그 사고를 냈던 여자와 사귀었던 사이니 그의 태도를 보고 싶은 게 분명하다.

“가보지 뭐.”

지혁의 말에 이준은 얼른 노트에 메모를 해두었다.

그날 오후, 이준은 지혁과 함께 시내에 있는 한 사립 병원에 도착했다. 그 병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보통 재벌가가 아니면 유명 인사들이다.

이준을 병실 밖에 세워둔 지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느릿느릿 들어갔다.

병실 안에 있는 노인은 한때 S 시를 쥐락펴락하며 위세를 떨었던 대단한 인물이다. 하지만 노인의 유일한 아들은 여자 때문에 집을 나가 몇 년 뒤 유골이 되어 어린 아들과 함께 돌아왔다.

지혁은 병상에 누워 있는, 자기가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노인을 지그시 바라봤다. 노인은 환자복을 입은 채로 링거를 맞고 있었다. 점차 쇠약해져 몸은 비쩍 말라 있었다.

“왔구나.”

강문철은 유일한 손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왔어요.”

잇따라 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대화 없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 지나 문철이 오랜 침묵을 깼다.

“비서한테서 들었다. 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이 정략 결혼 관계를 맺었다지?”

문철이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문철의 비서는 매일 중요한 일들을 문철에게 보고하곤 한다.

“2주 뒤래요. 청첩장도 이미 받았고요.”

“갈 테냐?”

“안 갈 이유가 없죠.”

손자의 말에 문철은 지혁을 빤히 바라보더니 한참 뒤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넌 아비를 닮지 않았구나.”

애령이 죽은 이후 3년 동안 여자와 사귀지도 않은 지혁을 보며 문철은 손자마저 아들의 길을 똑같이 걷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더욱이 애령 때문에 소가와 진가의 정략 결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었다.

어찌 됐든 민준의 전 여자친구가 애령을 죽인 가해자이니까.

지혁은 당연히 할아버지가 말한 “닮지 않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네, 전 아버지가 아니니까요. 당연히 다르죠.”

그 말에 문철은 지혁의 손을 덥석 잡으며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에 힘을 주었다.

“오늘 네가 한 말 꼭 기억해 두거라. 영원히 네 아비처럼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애초에 그 애가 내 말만 들었어도 그런 일은…….”

노인의 눈빛은 순간 원망이 서렸다. 이를 갈며 손을 꽉 쥔 탓에 지혁의 팔에 붉은 자국이 늘어났다.

하지만 지혁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비웃음 담긴 미소를 지었다. 지혁은 한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생각도, 더욱이 한 여자 때문에 비굴하게 세상에서 사라질 생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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