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라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심장이 끝없이 깊은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이 목걸이마저 소용이 없어졌어?강하리가 그 정도로 중요해졌다고?“오빠, 진짜 나 버릴 거예요?”눈물 범벅이 된 송유라를 보느라니 구승훈은 저도 모르게 바위에 누워있는 강하리의 모습이 떠올랐다.“나쁜 짓을 저질렀으면 대가는 치러야지. 더 말할 것도 없어.”“오빠! 어렸을 때 했던 약속은 다 잊은 거-.”“그 약속이 네가 저지른 죄까지 덮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송유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룸 안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바라봤다.내막을 조금이나마 알고있는 안현우가 웃음을 지었다.“구승훈, 그만해. 우리 유라 씨 얼굴이 하얘진 거 안 보여?”“유라 씨, 걱정 마요. 구승훈 이 녀석이 유라 씨가 불이익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놈이 아니니까.”룸 안 모두가 한 시름 놓았다는 표정이 되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구승훈의 냉소가 그걸 깨뜨렸다.“야 안현우. 유라 도울 거면 너 혼자 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구승훈, 진심이야?”안현우의 미간이 좁혀졌다.“강하리 때문이야?”강하리가 죽을 뻔한 게 송유라와 관련이 있단 걸 알고있는 안현우였다.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강하리 따위가 송유라와 견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다.구승훈이 대답이 없자 안현우의 표정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강하리한테 마음이 생긴 거야? 사랑하는 마음이?”구승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사랑이고 자시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강하리는 내 여자고, 난 떠나려는 강하리를 잡아야 한다.그저 그게 다였다.“블랙리스트는 풀어줄게. 하지만 너 스스로 의사를 찾아. 난 도울 생각 없으니까.”송유라를 향해 한 마디를 던진 뒤, 구승훈이 일어나 나갔다.룸 안은 다시 괴랄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까드득!송유라가 이를 갈았다.“구승훈 저 녀석, 이번엔 진심인 모양인데.”“닥쳐!”송유라를 돌아보던 안현우에게 꽥 소리지른 송유라.안현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구승훈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그의 인내심은 오직 강하리 한 사람에게만 열려있었다.“손연지, 강하리 친구면 내가 못 건드릴 줄 알아?”구승훈의 주위에 찬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손연지가 흠칫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하지만 이 인간쓰레기 앞에서 고개를 숙이긴 싫었다.“뭐 왜 뭐! 어떻게 건드릴 건데! 유산이라도 시켜 줄라고요? 아님 절벽에서 밀어버릴 건가? 하등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켜놓고 무슨 낯짝으로 자꾸 찾아오는 겁니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상도덕이 있다면, 다 털어내고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원한 맺힌 귀신도 아니고 왜 지긋지긋하게 자꾸 찾아오는 건데! 당장 꺼져요! 훠이훠이!”속사포로 욕을 뱉어내고는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들어갔다.다행히 1층에 머물러있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미친듯이 층수와 닫힘 버튼을 눌렀다.벌렁벌렁 나대는 가슴을 부여안고 집에 도착해 보니 강하리가 수저를 세팅하고 있었다.“뭐냐? 왜 그래? 귀신이라도 쫒아와?”“귀신보다 더 진절머리 나는 그 인간 쓰레기!”“……다음부턴 아예 무시해 버려. 멘탈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아. 그 사람.”“싫은데? 방금도 욕 한 바가지 퍼붓고 올라왔는데?”강하리가 웃으며 ‘소금이라도 들고 다녀야 하나’며 조미료 통을 뒤적이는 손연지를 뜯어말렸다.“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우리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 인간 폭탄은 건드리지 말자. 응?”“이젠 개나 소나 다 건드리네.”인간 폭탄, 아니 구승훈이 얼굴을 구긴 채 차 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다.손연지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며 한참을 서 있다가 차에 올랐다.막 시동을 걸려던 찰나.잠옷에 점퍼만 걸친 채 달려나오는 강하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환하게 웃는 얼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옆머리.너무나도 싱그럽고 활력이 넘치는 모습.구승훈은 잠시 넋을 놓았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사납게 요동쳤다.막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하양아!”구승훈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저만치 주해찬이 걸어오고 있었
주해찬이 멍해졌다가,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상황 상, 강하리가 구승훈을 쳐내려고 급조한 말일 수도 있지만.그래도 뛸 듯이 기뻤다. “진짜? 나야 언제든지 오케이지.”강하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강하리, 방금 뭐라고?”구승훈의 눈가가 삽시간에 붉어졌다. 강하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왜 이러십니까. 제 여자친구 손목 놓으시죠.”주해찬이 구승훈의 손을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없었다.구승훈의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강하리가 주해찬 것이 되었다.누군가에게 떠밀린 게 아닌, 제 발로 걸어서.내 것이었던 강하리가.“나 떠보려고 이러는 거지? 맞지?”내가 정말 송유라를 냅두려는 건지 확인하려고.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를 선택하는가를 시험해 보려고.그런 거라고 말해줘. 제발.“아닌데요. 해찬 선배랑 사귀려고 이러는 건데요.”강하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구승훈이 힘줘 잡은 손목이 아파왔다.“나 연애를 무슨 애들 소꿉놀이 하듯 하는 그런 여자 아니예요.”구승훈이 완전히 마음 접도록 쐐기를 박아두려는 것도 있겠지만.주해찬과 연애를 시작하는 것 역시 오랫동안 고민 끝에 내린 결정.모든 걸 털어내고,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그러려고 노력을 쏟는 중이었고.당당하게 연애를 하고싶은 상대를 꼽으라면 단연 주해찬이 1순위였다.그 말들이 자극이 되었던지 구승훈이 다짜고짜 강하리를 품 속에 당겨 끌어안았다.“너 때문에 송유라까지 버렸는데 이제 와서 말이 바뀐다고?”강하리가 안간힘을 썼지만 도저히 구승훈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내가 강요한 게 아니잖아요! 왜 사람 말을 제멋대로 해석해요?”“아무튼 널 위해서 한 거니까 책임져.” 놓으면 영영 사라질 것처럼 강하리를 있는 힘껏 품 속에 가둔 구승훈.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주먹이 훅 들어왔다.본능적으로 피하다가 구승훈이 강하리를 얼결에 놓았고, 그 틈에 강하리가 빠져나왔다.공격을 날린 이는 주해찬이었다.평소 온화하고 예의바르던 모습은
이렇게 가 버렸다고?주해찬에게 잡혀서?구승훈의 눈에 핏발이 섰다.‘강하리, 정말 나 버린 거야?’엘리베이터 안.문이 닫히자마자 주해찬이 강하리을 잡은 손을 놓았다.“진짜 아닌 거 알아. 하지만 기뻤어. 네 바람막이라도 될 수 있었단 게.”“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강하리가 주해찬을 빤히 올려다보았다.또 한 번 놀라는 주해찬.“정말 선배랑 사귀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디까지 갈 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려고요.”주해찬이 벙찐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것만 같았다.“믿기지 않으면 꼬집어라도 보시든가요. 물론 나 말고 선배 스스로를요.”강하리가 미소를 지었다.“막 그러려던 참이었는데.”강하리의 미소에 주해찬의 입가가 따라 올라갔다.집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본 손연지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강하리에게 ‘어서 해명 좀’을 눈빛으로 마구 쏘아댔다.“내 남자친구 주해찬이야. 선배, 이쪽은 내 절친 손연지예요.”남자친구란 말에 손연지가 울컥하더니 눈시울을 붉혔다.바로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꼭 잡았다.“너무 잘됐다 하리야. 그동안 내가 정말 너 보면서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했던지.”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하는 연지를 보니 강하리도 콧등이 시큰해났다.“이런 날에는 술이지. 잠시만 기다려! 요 앞 편의점 가서 사 올 테니까.”분주히 외출복을 찾는 손연지.“내일 아침 비행기라 오늘은 좀 힘들 것 같고, 설 전에 내가 한 번 살게요.”주해찬이 웃으며 손연지를 말렸다.“진짜요? 그럼 일단 감사합니다.”넙죽 인사를 한 손연지가 갑자기 여우 눈이 되었다.“설날 얘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저 그믐날 내려가거든요. 설 연휴 동안 두 분이 여기서 오붓한 시간 보내기 딱이겠넹.”그러자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진 주해찬.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그렇게 셋이 웃고 떠들며 해피 타임을 보내는 사이.아래 구승훈은 전에 없던 헬타임을 지새고 있었다.심란할 때마다 찾던 담배마저 잊은 채,
디링!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주해찬이 걸어나왔다. 얼굴에는 얼떨떨한 기색이 묻어있었다.방금 전 일어난 일이 환상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강하리 곁에 좀 더 있으면서 현실감을 좀 더 키우고 싶었지만, 손연지의 집이라 외간 남자가 늦게까지 있기엔 적합하지 않았다.현관을 가로질러 아파트를 나오던 주해찬이 우뚝 멈춰섰다.머리와 어깨에 눈을 소복이 뒤집어쓴 채, 정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주해찬을 보는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오, 화살받이 씨 나오셨어요?”싸늘하게 빈정이는 음성.구승훈의 화를 막아줄 화살받이라고 비꼬는 말투.주해찬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다시 환한 웃음을 지었다.“질투는 면상을 일그러뜨리는 법이죠. 지금 참 못나 보이세요, 구 대표님.”구승훈은 대답이 없이 담배갑을 꺼냈다.“한 대 하실?”“저 담배 안 피웁니다. 하양이가 담배 냄새를 싫어하기도 하고요.”정중히 거절하는 주해찬의 말에 구승훈이 픽 웃었다.“첨 듣는 소리네. 내 옆에 있을 땐 싫은 소리 한 번 없던 강하리인데.”“싫다는 말을 안 한다고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더군다나 하양이 호불호도 모르는 구 대표님이 하는 말이라면, 신뢰도가 더 떨어지지 않겠습니까?”구승훈이 말문이 꺽 막혔다. 장미꽃을 싫어한다며 자신을 한심하게 보던 강하리의 눈길이 뇌리를 때렸다.“내가 모르긴 뭘 몰라! 꼭 그쪽은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이봐요. 강하리와 3년을 같이 산 사람은 나라고! 그쪽이 아니라!”일단 정곡을 찔린 티가 안 나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아랑곳 없이 웃기지도 않는단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해찬.그들 둘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있는 주해찬이었다.3년을 같이 산 게 아니라, 강하리가 당신을 3년이나 참아줬던 거겠지.이런 인간과 더 말을 섞어봐야 무쓸모.“그럼 이만.”씩씩대는 구승훈을 지나친 주해찬이 아파트단지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언제 강하리한테 차이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말풍선 옆의 1은 요지부동이었다.구승훈은 핸드폰을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하, 이렇게 쉽사리 놓아주는 게 아니었는데.강하리가 이토록 통제를 벗어날 줄 알았더라면.후회가 밀려들면서 이성이 점차 제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뼛속부터 피어오른 악랄한 기운이 이성을 잠식하기 시작했다.강하리가 단식투쟁을 하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억지로라도 잡아둬야 했었다.강하리의 모든 몸부림을 옥죄어서라도, 철창 속에 가둬서라도 자신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하지만 이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이성이 그를 말렸다.안 된다고. 그러면 강하리를 점점 더 밀어내는 거라고.차에 다시 탄 구승훈이 운전대를 쾅 내리쳤다.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갑자기 핸드폰 액정에 톡 하나가 떴다.강하리인 줄 알고 부리나케 집어든 구승훈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형, 송유라가 자살했어]승재가 보낸 톡이었다.회신을 하기도 전, 안현우의 전화가 들어왔다.“송유라가 너 가자마자 룸 화장실에서 손목 그었어. 지금 명인병원 응급실이야.”“알았어.”짧은 통화를 마쳤고, 구승훈이 명인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응급실 밖에는 룸에 있던 일동과 송동혁, 장진영 내외까지 있었다.장진영은 한바탕 울었던지 눈가가 벌개져 있었고, 송동혁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꾹 닫고 있었다.구승훈이 다가오자 모두가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형, 송유라 위독하대.”승재가 다가왔다.구승훈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이상한 낌새 같은 것도 없었고?”“화장실에 다녀오겠다길래 그러려니 했지. 우리가 따라가 지켜볼 수도 없고.”승재는 약간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듯한 말투였다.자해까지 서슴지 않더니 자업자득이지 뭐, 라고 말하는 듯한.갑자기 장진영이 구승훈 앞에 털썩 꿇어앉았다.“구 대표님, 우리 유라 좀 살려주세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제발……!”그 말에 승재가 눈을 희번덕였다.지금 저걸
장진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보다 못한 안현우가 다가가 장진영을 일으켜 세웠다.“아주머니, 일단 일어나시죠. 승훈이가 나몰라라 하진 않을 겁니다.”구승훈은 눈매를 가늘게 늘어뜨릴 뿐 대답이 없었다.……밤 12시가 훌쩍 넘어서야 응급실에서 실려나온 송유라가 관찰실로 옮겨졌다.모두가 흩어진 후, 승재가 굳은 얼굴로 구승훈에게 다가왔다.“형, 또 송유라 뒤치다꺼리 해 주려는 건 아니겠지?”구승훈은 말 없이 서늘한 눈길로 병상에 누운 창백한 얼굴의 여인을 바라보다가 관찰실을 나섰다.“하리야, 강하리!”작은 목소리로 다급히 속삭이는 손연지의 목소리에 강하리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응? 왜?”손연지가 핸드폰을 넘겨주며 입모양으로 ‘구승훈’을 만들었다.꿀잠 날린 깊은 빡침을 미간에 새기며, 강하리가 핸드폰을 받아들었다.“대표님, 잠 좀 잡시다 예?”“잠시 내려와. 한 가지만 묻자.”통화가 끊겼고, 손연지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뭐래? 말투 되게 수상하던데.”“몰라. 무시해. 자.”강하리가 핸드폰을 손연지에게 돌려주었다.손연지가 하품을 하며 사라진 후, 강하리는 한참을 뒤척였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홀린듯 창가에 다가가 내려다보니 아래에 구승훈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잠시 망설이던 강하리는 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서 아랫층으로 내려갔다.아파트 현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구승훈이 고개를 들었다. 편한 잠옷 차림에 패딩만 걸친 강하리가 눈동자에 맺혔다.순간, 구승훈은 송유라고 뭐고 다 떨쳐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오직 눈 앞의 이 여자가 원한다면.하지만 이내 충동을 억눌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유라였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짧게 끝내요. 용건이 뭐죠?”강하리의 덤덤한 말이 구승훈이 일렁이는 심정을 갈무리했다.“주해찬이랑 헤어질 수 있어?”한 마디 묻고.“잘 생각해보고 대답해.”한 마디를 덧붙였다.“아니요.”1초의 망설임도 없는 강하리의 대답.예상했단 듯, 구승훈의 차가운
강하리의 입매가 굳어졌다. 한 순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한참이 지나셔야 입을 열었다.“’시도’라면, 안 죽었다는 얘기……네요?”“네. 좀 아쉽게도요.”맞장구를 친 승재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말인데, 우리 형이 그걸 보고만 있진 않을 것 같아요. 어쩌면 다시 송유라한테 관심을 줄지도.”그제야 강하리는 어젯밤 구승훈의 뜬금없는 질문의 의미를 알았다.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택지 같은 거였다.자신이 돌아갈 마음이 있으면 약속했던 대로 송유라를 내버려 둘 거고.미련 없이 돌아선다면 다시 송유라를 감쌀 거라는.강하리는 냉소를 지었다.자신의 선택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구승훈이 짐작은 했을 거니까.그 남자는 그저, 자신이 박아주는 쐐기로 결정을 내릴 용기를 얻으려는 거였다.다른 의미로는, 송유라를 감싸줄 빌미를 얻으려는 것.그 뜻을 알아채자, 구승훈에 대한 증오가 더 깊어졌다.무슨 왕이 군림하듯 선택지를 내린 이유가 송유라를 위해서라니.자신과 아기의 목숨까지 노린 여자를.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이 배팅에 내던져진 코인 몇 개가 된 기분이었다.“승재 씨.”강하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송유라의 자살 따윈 결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구승훈의 마음이지.”“뭐, 저랑은 상관 없는 일이지만.”“강 부장!”승재가 답답한듯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지금 형 마음속에는 강 부장이 우세예요. 형에게 조금만 기회를 주면 송유라 따윈 그냥 버릴 거라고요.”“승재 씨.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예?”그 자리에 굳어진 승재를 뒤로 한 채, 강하리가 회사에 들어섰다.입이 떡 벌어진 승재의 사고 회로가 그대로 멈췄다.남자친구?왜? 어떻게?우리 형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강 부장인데?……“부장님, 대표님 호출이에요. 지금 바로 올라오래요.”강하리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안예서가 도도도 달려왔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대표이사 사무실로
손연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노민우를 밀어냈다.“너 진짜 병 있는 거 아니야?”노민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문에 다시 밀어붙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넌 내가 병이 있다는 걸 항상 알고 있었잖아?”손연지는 이를 악물며 갑자기 예전에 노민우가 뻔뻔하게 산부인과를 예약하고 다녔던 일이 떠올랐다.“아쉽네. 그럼 난 상종 안 하는데.”노민우는 혀를 차며 웃었다.“그럼 내가 안 하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손연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너 두세 달 동안 안 했던 거 아니야?”노민우는 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이빨이 아픈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손연지의 두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을 재빨리 손연지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어 작은 전기충격기를 꺼냈다.그 물건을 보고 노민우는 갑자기 머리가 띵 했다.예전에 그가 그녀의 스폰서가 되어주겠다고 했을 때 손연지는 노민우를 오랫동안 무시했다.후에 노민우가 손연지를 찾으러 갔을 때 전기충격기에 다쳤다.그때 아주 중요한 부분을 맞고 두세 달 동안 문제가 생겼었는데 결국은 그의 형이 약을 처방해 주고 나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그 일 때문에 형은 그에게 계속 영양제를 먹으라고 했었다.“너 아직도 이거 갖고 있었어?”손연지는 그를 발로 차며 말했다.“다시 넣어둬.”노민우는 그걸 주머니에 넣으며 말끝을 흐렸다.“잠깐만 얘기 끝내고 돌려줄게.”“얘기할 것도 없어.”노민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조금만 얘기해 얘기 끝내고 손 좀 놔줄게. 그때 넌 날 때리지는 마.”손연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해봐.”노민우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놓아주었지만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손연지는 그의 다리를 차버렸고 노민우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손연지, 약속을 어기는 거야?”“누가 먼저 안 지켰는데?”손연지는 발그레해진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고 노민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 손목을 살펴보며 물었다.“아파?”“당연하지. 네가 바바 안
“강하리, 오늘 웨딩 촬영하는 거 알고 있어?”강하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입고 있던 잠옷을 끌어 올렸다.“잠시 후에 파운데이션으로 가릴 거야.”손연지는 눈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그래.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네.”강하리는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곧 심예진이 도착했다.그녀와 함께 온 사람들은 천아름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온 일행이었다.강하리는 심예진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숙모 왔어요?”심예진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나 부르는 거야?”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심예진은 맑은 눈으로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이모라고 불러. 심준호 오빠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야. 난 심호준 씨를 그냥 오빠라고 생각해.”강하리는 가볍게 웃었을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메이크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강하리는 피부가 좋아서 가볍게 파우더만 발라도 충분했지만 목에 남은 흔적을 가리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천아름은 강하리의 앞에 다가와서 혀를 차며 말했다.“진지하게 남편 바꿀 생각 없어요? 며칠 전엔 손목이더니 오늘은 목이네요. 너 남편 인성이 있긴 있어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옆에서 노연정과 놀고 있던 손연지도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가끔은 하리가 구승훈 씨에게 잡아먹히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예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설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손연지는 한숨을 쉬었다.“사람이 너무 외모에 홀리면 안 돼요. 그 나쁜 남자가 잘생기긴 했지만…”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 쪽에서 느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나보다 잘생기진 않았겠죠?”손연지는 몸을 굳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이미 문 앞에 서 있는 노민우가 있었다.그녀는 멍하니 노민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동자가 흔들렸다.노민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왜? 보고 넋이라도 나간 거야?”그제야 정신이 든 듯 손연지는 시선을 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고 침실을 나섰다.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단순히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들었지만 한 시간 전에 걸려 온 낯선 번호의 부재중 전화가 눈에 들어왔다.강하리는 찌푸린 채 그 번호를 바라보다가 막 화면을 닫으려는 순간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하리 씨,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하지만 구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대표님께서는 며칠 전 결혼 준비로 바쁘다며 모든 치료를 중단하셨습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단계인데 이대로 멈추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발 구 대표님을 설득해 치료를 계속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강하리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손가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메시지에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지만 강하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임희주 외에는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었다.그녀는 잠시 시선을 떨구고 메시지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정말로 모든 치료를 중단한 건가?’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임희주에게 문자를 보냈다.[구승훈 씨가 치료를 중단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임 선생님도 치료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결혼식이 끝난 후 다시 시작해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해요.]임희주의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강하리 씨, 아직 저한테 화가 나신 건가요? 아니면 구 대표님이 치료를 거부하는 게 혹시 당신 때문인가요?]강하리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 버렸고 더 이상 임희주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말한 대로 구승훈을 믿었다.구승훈은 그녀와 노연정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 전체가 유난히 조용했고 창밖에는 정원의 희미한 가로등 몇 개만이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고 그의 눈빛은 깊은 밤보다 더 어두웠다.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구승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형...큰어머님의 집사
“그동안 누가 임희주를 지원했는지 조사해 봐.”준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러나 사무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구승훈이 다시 한마디 했다.“임희주와 여초연 씨의 관계를 확인해 줘.”...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심문석은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결혼식의 모든 과정과 세부 사항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강하리는 처음에는 노인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심문석이 바빠지자 오히려 더 건강해 보였고 그녀는 그가 바쁘게 지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이 시기 구승훈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피곤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강하리는 그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강하리는 옆에 빈 침대에 잠시 눈을 두고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우유 한 잔을 데웠다.서재의 불빛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강하리는 서재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간 강하리는 우유를 책상 위에 놓았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나에게 주는 거야?”구승훈이 그렇게 물었을 때 강하리는 그를 꾸짖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냥 ‘응’하고 대답한 후 그의 옆에 앉았다.“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도와줄 거야?”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 부하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러 온 거야.”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이제는 에비뉴와 정안 모두 강 부장이 최대 주주라서 그런 것들이 다 중요하겠지.”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 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그녀는 금세 서류에 몰입했고 구승훈은 그녀 옆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서재의 불빛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강하리가 앉자 공간 곳곳이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구승훈은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린 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준봉은 그가 곧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심지어 M국으로 떠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30분이 흘러도 구승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준봉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구승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노진우에게 사람을 데리고 곧장 그 장소로 가라고 해. 그가 출발하면 구승재에게 연락해 조용히 그쪽으로 가게 해. 노진우가 움직이는 순간 구승재는 바깥을 봉쇄하도록 해.”준봉은 잠시 말을 잃었다.“대표님, 혹시 함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몸을 기댄 구승훈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그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여초연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그가 아는 여초연이라면 일부러 그를 또 다른 함정으로 유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자신의 흔적을 드러낼 리 없었다.그때 노연정을 납치했던 일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이 몇 년 간 여초연은 분명 자신의 세력을 키워왔을 것이다.그는 여초연을 항상 감시할 사람을 배치해 두었지만 그녀가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초연은 별다른 은폐 없이 M국으로 갔고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한 점은 나문빈이 너무 빨리 그녀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사실이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가장 큰 손실은 단지 노연정을 곁에 두는 시간이 짧았고 그 사이 구승훈과 강하리는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그녀가 계획한 대로 그 약물이 그의 몸에 투여되었다.여초연의 계획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 있었고 그랬다면 지금 이 순간 구승훈과 강하리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초연이 이렇게 허술한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다.게다가...구동근이 했던 말도 마음에 걸렸다.구승훈은 구동근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여초연보다는 그를 조금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한편 M국에서 여초연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집사에게서 휴대폰을 건네
손연지는 강하리와 천아름의 손을 잡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이런 사람들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진짜 역겹다니까요.”천아름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손연지를 따라가며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던졌다.“여씨 가문의 두 분 내 가게에서 당장 꺼져요.”여명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천아름 씨, 미쳤어요? 이런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우리를 쫓아내겠다고요?”천아름은 걸음을 멈추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쫓아내는 게 아니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거죠.”그러고는 매장 직원을 향해 손짓하며 덧붙였다.“앞으로 이 두 사람 내 모든 매장 출입 금지야. 알아들었지?”그러자 강하리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두 분은 심 씨 가문 명의로 된 모든 장소에 출입할 수 없어요.”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한 후 더 이상 그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손연지와 함께 매장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손연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통유리 창에 몸을 기댄 채 안쪽을 몰래 들여다봤다.“하하. 저렇게 분노에 차서 발악하는 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그러더니 갑자기 강하리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하리야,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 울분을 풀지도 못했을 거야. 너 모를 거야 그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쁜이 정말 고마워...”그러자 천아름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저기...나한테는 고맙다는 말 없어요?”손연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고마워요!”천아름은 손연지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웃었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래요? 결혼할래요? 내가 말인데 나랑 같이 지내면 앞으로 주얼리랑 옷은 내가 다 사줄게요.”“콜!”옆에서 듣고 있던 강하리는 입을 삐죽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손연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결국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천아름 씨, 고마워요.”강하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천아름은 손을 휘휘 저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요? 진짜로 고맙다면 당신 남편
여명주가 반박하려는 순간 강하리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작업실의 주인인 천아름이었다.천아름은 짙은 눈동자와 붉은 입술 크고 우아한 웨이브 헤어 거기에 하이힐까지 착용하고 있었다.강하리 옆에 멈춰 선 천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하리 씨, 오랜만이에요.”강하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사실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그때 경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에비뉴를 인수하고 나서야 강하리는 그 두 개의 약혼반지가 사실 천아름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에비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을 뿐이었다.천아름은 조용히 강하리의 손목을 바라보다가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여전히 마음에 드세요?”강하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합니다.”천아름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반지가 예쁜 게 아니라 사실은 당신의 손이 예쁜 거예요. 구승훈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그 순간 손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승훈 씨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하리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어요?”천아름은 손연지를 향해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역시 미녀끼리는 생각도 비슷하네요.”셋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여명주는 그들 사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서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이건 대놓고 날 무시하는 거잖아.’“천아름 씨, 이게 무슨 뜻이죠?”천아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여명주 씨 B시에서는 당신네 가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노민우 씨를 붙잡아다 가문 재정을 끊고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키시지 그러세요? 그런데 왜...”천아름은 옆에 있던 손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쁜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소연지입니다.”“아. 맞아요. 소연지
강하리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은 그 모습을 보며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떠나기 아쉽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노민준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지만 구승훈이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정 안 되겠으면 강하리 씨에게 솔직하게 말해. 그러면 강하리 씨도 기꺼이 너와 함께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계속 숨기기만 하면 강하리 씨도 불편할 거잖아?”구승훈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그는 작업실 안에서 웃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았다.노민준은 더 할 말이 없었고 그때 서야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승훈, 손연지 씨 지금 어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궁금해?”노민우는 급히 두 번 응답했다.“그러면 직접 와서 보면 되잖아?”“손연지 씨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구승훈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그때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왜 안 나갔어?”노민우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그것도 그렇네.”구승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준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희주를 철저히 조사해 줘.]강하리는 마침내 손연지에게 어울리는 주얼리를 골랐다.손연지는 몸에 맞춰보며 환하게 웃었지만 강하리는 그 웃음이 예전처럼 맑고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꼈다.감정의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했고 강하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연지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주얼리를 고른 뒤 강하리는 손연지와 함께 의류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곧 결혼식인데 다른 건 안 고를 거야?”손연지가 물었다.강하리는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구승훈이 몇 벌 주문해 놨고 또 에비뉴에서 우리 결혼식에 맞는 주얼리 세트를 준비해 줬어.”손연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놈의 자본주의.”강하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두 사람은 웃으며 의류
구승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왜 갑자기 왔어?”강하리는 구승훈을 째려보며 말했다.“안 오면 당신이 예쁜 여자랑 데이트하는 거 못 볼 거 아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질투나?”“아니.”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에는 질투의 냄새를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구승훈과 임희주 사이에 아무 일이 있을 거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그저... 다른 여자가 어떤 면에서 그녀의 남편을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잡고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어쩌지? 오늘 밤 당신이 나를 침대에 묶어 두는 건 어때? 복수의 기회를 줄게.”강하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빼냈다.“염치를 좀 챙겨.”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휴대폰이 옷 속에서 가볍게 진동했지만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그저 눈빛이 깊어졌다.마침내 강하리는 차를 개인 작업실 앞에 세웠고 구승훈이 주문한 주얼리를 오늘 착용해 보려고 했다.마침 이틀 후 손연지의 생일이었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휴식 중인 틈을 타 그녀를 불러냈다.강하리가 차에서 내리자 손연지는 작업실의 큰 창문 앞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녀는 강하리를 보고서야 마치 살아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손연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손연지 씨, 이렇게 한가해요?”손연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강하리를 따라 들어가자 직원이 다가왔다.“구승훈 씨, 주문하신 주얼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구승훈은 대답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주얼리는 내 아내에게 전달하세요.”그러고는 강하리를 향해 말했다.“전화 받고 올게. 주얼리 먼저 착용해 보고 안 맞으면 다시 수정해 달라고 하면 돼.”강하리는 그의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은 노민준이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