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팔을 짚고 일어나 침대에 앉아 뒤로 몸을 젖히며 말했다.“여... 여긴 왜 왔어요? 은 아주머니는요?”그녀의 표정에 나타난 경계심, 배척감, 그리고 두려움의 감정은 고스란히 그의 눈에 담겨졌다.“소월아, 너 나랑 눈도 안 마주치고 싶은 거야?”장소월이 긴장한 얼굴로 이불을 꽉 잡은 채 냉담하게 말했다.“연기하지 않아도 돼요. 전연우 씨가 병원에 오지 않았다는 걸 아빠가 아신다고 해도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병원엔 은 아주머니만 있으면 돼요.”하지만 전연우는 그녀의 말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선 뒤 집에서 갖고 온 보온병을 열었다.“오 아주머니가 만든 흑설탕 차를 갖고 왔어. 안엔 방금 데운 계란도 있어.”“난 마시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세요.”말투는 너무나도 차가웠다.전연우는 직접 그릇에 흑설탕 차를 부어 넣고는 숟가락에 한술 떠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 거절은 불허한다는 강렬한 눈빛이었다.“퍽!”“쨍그랑!”그릇은 바닥에 떨어져 몇 바퀴 돌다가 멈추었다.장소월은 그를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이곳엔 보는 눈이 없으니까 연기할 필요 없어요.”예상 밖으로 전연우는 화를 내는 대신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몸에 튕긴 물을 닦아냈다.“성격이 거칠어졌네?”장소월은 생리 탓인지 그를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여 눈을 감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날 괴롭히고 내 몸을 해친 사람에게 예전처럼 웃으며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요? 보기만 해도 증오스럽고 역겨워서 미치겠다고요!”전연우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던져버리고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가 악마같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내 인내심이 남아있을 때 그 성격을 고치는 게 좋을 거야. 증오든 원망이든 다 가슴 깊이 눌러.”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소월아, 왜 아직도 몰라.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는 사탕을 얻지 못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면 내가 널 편하게 만들어줄
전연우는 아마 똑똑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가면을 벗고 진짜 패를 내보였을 때 두 사람은 오늘과 같은 국면을 맞이할 거라는 걸 말이다.그는 그의 일을 하고 장소월은 그녀의 삶을 살면서 서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된다. 언젠가 그가 장씨 가문의 권력을 손에 움켜쥐었을 땐 그녀는 이미 서울을 떠나있을 것이다.“지금 나한테 그런 객기를 부려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야?”전연우가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깨지지 않은 그릇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두 번 말하지 않아. 얼른 돌아와서 누워!”장소월은 문 앞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가냘픈 몸에 불어오니 또다시 아랫배에서 통증이 밀려왔다.바로 그때, 간호사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험악한 분위기를 깨뜨렸다.“왜 침대에서 내려왔어요? 이제 안 아파요? 복도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요. 오빠라는 사람이 동생한테 양보해야죠. 여자는 생리할 때 성격이 예민하고 난폭해진단 말이에요. 얼른 바닥을 치우세요. 잠시 뒤 의사선생님께서 검사하러 오실 거예요. 별문제 없으면 퇴원할 수 있어요.”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알겠어요. 감사합니다.”간호사가 말했다.“어서 돌아가서 누워요. 더 심각해지면 안 되잖아요.”장소월은 밖에서 걸레를 갖고 와 바닥을 깨끗이 닦았다. 이런 일은 전혀 그에게 기대할 수 없다.사실 그녀는 이제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생리 첫날 가장 견디기 어렵다.주치의는 검사를 마친 뒤 전연우를 불렀다.사무실에서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장소월의 CT를 가리키며 말했다.“환자분의 가족이라고 하니까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어제 한 검사에서 환자분의 자궁 기형을 발견했어요. 수술을 통해 원래 정상적인 상태로 돌려놓기엔 이미 늦었어요. 환자분의 자궁 기형은 암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에요. 다행히 일찍 발견했으니 수술로 자궁을 들어낼 수 있지만 조금만 더 늦으면 암세포가 확산 전이될 수 있어요. 그때가 오면 단순히 자궁을 적출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되지
“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집엔 규칙이 많아서 전... 오빠 집보다 불편하잖아요. 그리고 은 아주머니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요즘 저 대부분은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기 때문에 집에선 별로 먹지 않아요.”오 아주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매번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제가 만든 만둣국을 드셨잖아요... 제가 이미 만둣국을 만드는 방법을 은 아주머니에게 알려줬으니까 먹고 싶을 때 해달라고 해요. 배를 곯지 말고.”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 아주머니의 요리 솜씨는 진짜 최고예요! 만둣국은 평생 먹는다고 해도 질리지 않을 거예요.”오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도 참, 말도 예쁘게 하네요.”오 아주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갔고 전연우가 그녀를 도와 퇴원수속을 했다.차 안에서 장소월은 핫팩으로 아랫배를 감싼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절 학교에 데려다주시길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그녀의 말투에서 머나먼 거리감이 느껴졌다.장소월은 한참이 지나서야 전연우는 학교가 아니라 남원 별장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장소월이 미간을 찌푸렸다.“별장에 데려다준다고 해도 혼자 학교로 갈 수 있어요. 그렇게 시간을 낭비할 바엔 차라리 그냥 학교에 내려주는 게 낫지 않겠어요?”“만에 하나 네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힘들어지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나와의 관계를 끊는 건 네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야.”전연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다.“고생을 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에 잘 따르는 게 좋을 거야. 난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거든.”차는 신호등 앞에서 코너를 돌았다.장소월은 핫팩을 끌어안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닫았다.“제 몸 상태에 관한 건 일단 아버지한테 알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서울대에 붙고 나면 스스로 수술을 할 거예요. 그때 제가 직접 아버지한테 말씀드릴게요.”전연우가 대답하지 않자 장소월이 말을 이어갔다.“이번 일은 제가 빚을 하나 진 걸로 할게요!”그녀의 입장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만약 장해
“전연우!”장소월은 분노에 차올라 손을 번쩍 들어 그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예상이라도 한 듯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비아냥거렸다.“내 몸에 손이라도 대려고? 그럼 재미없는데?”장소월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며 그를 쏘아보았다.“난 절대 당신한테 굴복하지 않겠어요. 마음대로 해요. 앞으로 부탁 같은 거 하지 않을 테니까!”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전연우의 목적이 바로 그녀가 장씨 집안에서 무기력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걸 지켜보는 게 아니었던가.그런 그에게 부탁이라는 멍청한 짓을 하다니! 정말 미쳤었다!거실에 들어서니 장해진과 강만옥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아버지, 이모님!”장해진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연우는?”전연우가 말했다.“의부님.”“마침 잘 됐어. 와서 같이 밥 먹자.”“아닙니다. 전 소월이를 데려다주러 왔을 뿐입니다. 이제 회사에 가봐야 합니다. 저녁에 또 회의가 있어서요.”장해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강만옥은 재빨리 휴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장해진이 입술을 닦고는 말했다.“수고했어. 병원에선 뭐래? 또 무슨 병인데?”장소월이 고개를 숙이고 숨 막힐 듯 옥죄어오는 심장을 부여잡고 말했다.“아버지... 전...”“넌 대답할 필요 없으니까 몸이 안 좋으면 올라가서 쉬어.”“네... 알겠습니다. 아버지.”장해진은 늘 그녀에게 이렇듯 냉담했기에 그녀는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이 집안에서 그녀에겐 발언권이 없다.장소월이 계단 입구에 도착했을 때 돌연 등 뒤에서 장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반을 옮겼다면서?”“네.”“이왕 옮긴 거 열심히 해. 미리 다음 반년 동안의 내용을 배워둬.”“알겠어요.”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소파에 누웠다. 마음에 파동이 이니 복부 고통이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손에 쥐고 있던 핫팩도 이제 더는 뜨겁지 않았다. 장소월은 그의 말을 떠올리니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라 핫팩을 홱 던져버리려다가 조심하지 않
장소월은 어젯밤 먹고 남은 물로 약을 삼켰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참고 마실 수밖에 없었다.“전 이미 오빠와 충분히 멀어졌어요.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음 학기엔 학교 기숙사를 신청할게요. 됐어요. 나갈 때 문을 잘 닫아주세요. 전 쉬어야겠어요.”기진맥진한 그녀는 힘없이 말하고는 침대에 축 늘어져 버렸다.보아하니 전연우는 아직 그녀의 몸 상태를 장해진에게 말하지 않은 듯하다. 아니면 이미 아래층으로 끌려가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이제야 사람 노릇을 하는 건가. 장소월은 그가 또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어젯밤 충분히 자지 못한 탓에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묻고 이불을 푹 덮어썼다.보고 싶으면 보라지.전연우는 나무 옷걸이에 걸린 외투 두 개를 발견했다. 다른 옷과 함께 걸려있으니 강한 이질감이 들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남자가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장소월은 전연우가 언제 나갔는지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듣지 못했다.전연우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은경애가 주방에서 나와 물었다.“도련님, 아가씨는 약 드셨어요? 이건 생리통에 아주 효과 좋은 약이에요. 제 며느리도 생리 기간에 꼭 이 약을 먹는다니까요. 도련님은 몰라요. 여자들이 이 시기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말이에요. 이 약은 절대 부작용 같은 거 없을 거예요!”“...”은경애는 대꾸도 하지 않고 차갑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을 삐죽거렸다.“왜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짜증나!”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위층을 쳐다보고는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진짜 나쁜 사람이야...”볼수록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준수하게 생긴 얼굴이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전연우는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아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머지않은 곳을 바라보았다. 장소월...그의 머릿속에 고통 때문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아랫배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장소월의 모습이 떠올랐다
백윤서는 장소월을 불러 오 아주머니가 준 거라면서 약을 한 갑 주었다. 만약 오 아주머니가 직접 준 약이 아니면 장소월도 감히 먹지 못할 것이다.백윤서는 전연우의 사람이니, 대체 무슨 약을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장소월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인시윤과 식당으로 갔다.서문정은 말을 걸기도 전에 장소월이 가버려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소월이 진짜 점점 대단해지는데? 내 성적이 소월이 절반만 해도 아버지가 매일 집에서 나를 나무라지 않을 텐데. 나 같은 딸 때문에 밖에 나가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면서.”백윤서는 눈을 내리뜨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말했다.“그래? 너도 노력만 한다면 소월이처럼 6반에 들어갈 수 있어.”장소월은 평소대로 고건우의 수업을 들으러 갔다. 고건우의 수업은 확실히 훌륭했다. 매 학생의 약점에 따라 학습계획을 세팅해주었다. 하지만 장소월에게 준 문제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어려웠고, 심지어 그녀가 공부한 지식의 범위를 넘어섰다. 지난번에 고건우가 준 연습문제 중, 장소월은 절반만 완성하고 나머지는 다른 과외 서적을 찾아야 했다.훈련동 밑에 도착하자 장소월이 물었다.“요즘 엽준수가 왜 안 보이지?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인시윤은 무심코 대답했다.“몰라, 집에 일이 있겠지? 내 생각에는 아마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을 것 같아.”장소월은 웃으며 말했다.“그냥 물어봤어.”두 사람은 별생각 없이 교실로 들어갔다....어둠이 깔리고 저녁 9시 30분. 거실에는 여전히 불이 커져 있었고, 오 아주머니는 야식을 만들어 백윤서의 방에 가져갔다. 백윤서가 아직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때마침 문이 드르륵 열렸다.“연우 도련님, 또 술자리 가셨어요? 해장국을 준비할까요?”전연우는 온몸에 술 냄새를 풍기며 피곤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괜찮아요.”전연우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보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열 시가 다 되어갔다.“윤서 아직도 안 자요?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자 전연우가 손동작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려던 찰나, 벨 소리가 멈추었다. 전연우의 눈동자가 어두워지더니 끊긴 부재중 번호를 확인한 후, 깊은 눈동자가 더 어두워졌다.경찰서.장소월은 전화를 걸려는 경찰의 전화를 급히 끊었지만, 이미 남자의 휴대폰 벨 소리가 몇 초 울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아저씨, 저랑 제 친구가 장난한 것뿐이에요. 보세요, 저 멀쩡하잖아요.”“늦은 시간인데 학부모까지 부를 필요 있나요...”“장난? 칼로 친구를 찌른 게 장난이라고요?”경찰의 시선은 붕대를 감은 장소월의 손등에 떨어졌다.“누군가 제때 발견하지 않았으면, 학생은 아마 지금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이렇게 큰일인데 당연히 학부모를 불러 학생을 데려가게 해야죠!”“그리고 너희들! 풀어준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들어와?”벽 모퉁이에는 알록달록한 머리색의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중간에 서 있는 가죽옷 세트를 입고 문신을 한 불량소녀는 딱 봐도 사회에서 안 좋은 것들을 많이 배운 모습이었다.이 몇 명은 다름 아닌 장소월이 도원촌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이름이 엽시연이었고 강용과 한 패거리였다.“이번에는 그래도 좋은 일을 했으니, 너희 몇은 먼저 가도 좋아.”녹색 머리와 빨강 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굽혀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앞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착하게 살겠습니다.”“좋은 시민이 되려면, 일단 그 알록달록한 머리부터 어떻게 해 봐. 보기만 해도 정신 사나워.”“하지만 학생은 집에 못 가요. 양쪽 학부모를 다 불러야 해요. 아니면... 계속 경찰서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경찰은 장소월에게 말했다.장소월이 상처를 입었으니, 진짜 따지기 시작하면 엽준수는 감옥에 갈 수도 있다.장소월은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갑자기 밤이 먹고 싶어 줄을 서서 밤을 샀다.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뛰쳐나와 그녀의 목을 조르며 목숨을 앗아가려 했다...나중에 그들 몇 명에게 구조되
엽시연은 사실대로 말했다. 당시 바다에서 장소월을 구해준 사람은 전연우가 아니라 강용이었다.강용이 장소월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장소월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소월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한 것도 강용 때문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장소월도 반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이게 진짜 사실이라면, 강용이 그녀에게 했던 이상한 말들이 전부 맞아떨어진다. 어쩐지...엽시연은 떠나고 장소월과 엽준수만 남았다.한 여경이 감금실에서 나와 장소월을 불러들였다.엽준수는 수갑을 찬 채 장소월의 맞은편에 앉았고, 여경은 엄숙하게 말했다.“말해봐요. 왜 이 학생을 해쳤는지.”“이년, 모두 이년 때문이에요!”엽준수는 갑자기 감정이 격해졌고, 흉악한 표정은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했다.“시끄럽게 굴지 말고 앉으세요!”장소월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엽준수를 보며 살의를 드러냈다.“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트러블도 없었어. 만약 진짜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간 일 때문이라면 그냥 말해. 난 꼭 그 팀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너의 장래는 네 손으로 망친 거야!”“닥쳐! 네가 뭘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갑자기 6반에 오지 않았다면 나도 쫓겨나지 않았을 거야. 원래 이번 장학금만 받으면 우리 엄마는 살 수 있었어! 장학금도, 서울대 진학 자격도 없어졌어, 우리 엄마가 전화를 받고...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바로 사망했다고... 난 임종도 못 지켰어.”차설아는 순간 멍해졌다.“장소월! 이건 모두 너 때문이야! 왜 전학 왔어? 왜 내 모든 걸 빼앗아가려고 해?”“내 인생은 네가 다 망쳤어! 전부 너 때문이라고! 방금 그 친구가 한 말이 맞아, 넌 재앙을 몰고 오는 년이야!”장소월은 마치 온몸의 힘이 다 빠진 듯했다.은경애가 데리러 왔을 때, 장소월은 이미 영혼을 빼앗긴 몸뚱이만 남은 상태였고, 어떻게 경찰서를 떠났는지 그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집에 도착하고, 장해진의 꾸짖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지만, 장소월은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
“머리가 정말 정상은 아니네. 그렇게 심심하면 병원에나 가봐.” 강용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고는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소현아는 슬픈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용, 왜 이 아이를 싫어하는 거야? 규영과 미경은 분명 네가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규영과 미경도 내 좋은 친구 거든. 그 두 사람이 나를 속일 리는 없어.” “강용 너까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나도 필요 없어.” 그때 잠에서 깬 장소월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소현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실은 강용이 부엌으로 들어간 뒤부터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 장소월은 입술을 앙다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소현아에게 다가갔다. “현아야... 무슨 일이야?” 소현아는 장소월의 목소리를 듣고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월아, 강용이 내 배 속에 있는 이 아이 싫대. 이제 나도 싫어. 지워버릴 거야.”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리 와, 우리 이야기 좀 하자.” 강용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정원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현아야, 너 강용 좋아하지?”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소월이 너도 좋아해.” 장소월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아야, 좋아하는 마음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 나랑 너처럼 친구로서 좋아하는 감정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감정도 있어. 그건 평생을 변함없이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현아는 어때? 네 마음은 어느 쪽인 것 같아?” 소현아가 대답했다. “난 강용과 평생 함께 살고 싶어. 현아는 강용을 좋아하지만, 강용은 현아를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도 싫대. 현아는 너무 슬퍼.”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틀림없이 강지훈의 핏줄이다. “그럼 강지훈은? 너 그 사람 좋아하는
소현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간신히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냈다. 평소 까불까불 장난기 많고 히죽거리기만 하던 사람이 예고도 없이 돌연 사납게 돌변한 것이다. 그녀는 두려움에 황급히 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웅크린 채 이불 속에 숨어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강용이 강지훈과 같은 사람일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눈물을 흘릴 때면, 강지훈은 더욱 심하게 그녀를 괴롭히곤 했었다. 강용은 예전 장소월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다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주변 환경에 꽤나 익숙했다. 그는 시장에 가서 신선한 닭, 오리, 생선, 고기 등을 사 왔다. 사막 근처라 물가가 다른 곳보다 훨씬 비쌌다. 특히 물은 가까운 곳에 오아시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강용은 민박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방음 시설이 좋지 않기 때문에 행여 위층에 잠들어 있는 장소월을 깨울까 염려되어 말이다. 집에 들어가 보니 또다시 소현아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소파에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그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강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소현아는 소파에서 내려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가서는 입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속삭였다. 강용은 앞치마를 두르고 능숙한 솜씨로 야채를 씻고 다듬었다. 허리를 굽혀 찬장 아래에 있는 기름을 꺼내려다가 뒤에 있는 여자를 발견한 그가 말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 소현아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세 걸음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확실하게 세어봤어. 지금은 네 걸음이나 떨어져 있어.” 그 말에 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라는 말도 너한테는 과분하네.” 강용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장소월에게 줄 삼계탕을 요리하는 데에 집중했다.소현아는 줄곧 말없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음식이 거의
세 사람은 근처 민박집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장소월은 불안한 마음에 문밖 가게 앞에 서 있는 소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강용, 현아 좀 살펴봐 줘.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강용은 팔짱을 낀 채, 귀찮다는 듯 눈을 까뒤집으며 말했다. “정말 성가시단 말이야. 애초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됐어. 체크인 마치고 현아랑 같이 주변 좀 돌아봐. 나는 먼저 올라가서 쉴게.” “난 너만 신경 쓸 거야. 쟤는 내 알 바 아니야.” “강용, 여기 오기 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잊었어?” “소현아는 지금 임신한 상태라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어. 이왕 데려오겠다고 결정했으면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도 했고. 하지만... 내가 하루 종일 쟤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소현아가 꽃 세 송이를 들고 다가왔다. “소월아, 소월아... 이것 봐, 내가 방금 산 꽃이야. 예쁘지?” 장소월은 꽃을 받아들며 말했다. “예쁘네.” 소현아는 들뜬 얼굴로 강용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강용, 나랑 같이 놀러 가자.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강용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나 바빠. 가고 싶지 않아. 너...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소월에게 일렀다. “소월아, 소월아, 강용이 나한테 화냈어.” 장소월의 입꼬리가 위로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그만해, 애도 아니고. 강용, 잠깐 현아랑 놀아주고 있어. 난 너무 피곤해서 방에 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친 장소월은 바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강용은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에 들고 있던 꽃을 프런트에 올려놓고 말했다. “나도 가서 짐 풀어야겠어.” “강용, 나랑 같이 놀기로 했잖아.” 이곳은 총 3층 건물로, 1층은 거실, 2층은 방, 3층은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침 방도 3개가 구비되어 있고, 빨래를 널 수 있는 베란다도 있어 세 사람이 살기엔 적당한
“누가 쫓아오면 막아요. 남원 별장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해요.” “네, 대표님...” 은경애는 눈치껏 바로 호칭을 바꾸었다. 아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전연우가 확실한데,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한 낯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은경애는 머리가 지끈거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전연우는 방으로 돌아온 뒤, 늘 그랬던 것처럼 바로 금고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금고를 열자 중요한 서류나 돈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금고 비밀번호도 단순하게 그녀의 생일 날짜였다. 그는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밝게 웃고 있는 장소월의 모습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녀를 잃은 고통은 정말이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다 내 잘못이야. 널 혼자 두는 게 아니었어.’‘내 아내, 소월아!’그때 별이가 전연우 옆으로 다가와 사진 속 여자를 보고는 옹알거리며 말했다. “엄마, 엄마...” 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우리 곁으로 데려올 테니까.” 그는 두 번의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생의 전연우이자, 또 현생의 전연우이다. 침실의 모든 것은 결혼식 날 그대로였다. 침대에 깔려있는 신혼 이불, 그리고 액자 안에 담긴 세 사람의 웨딩사진까지... 순백의 웨딩드레스 차림의 장소월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그 순간 미소는 짓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아이를 향한 애틋한 모성애가 가득 담겨 있었다. 과거 그는 너무나도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다시 되돌아갈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바쳐 속죄했다. 결혼식 날 호텔에서 장소월이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그에게 목숨을 부지할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전연우 역시 그녀가 마음이 약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아이는 전연우가 손에 쥐고
강지훈은 지금처럼 사랑에 이성을 잃은 듯한 전연우보다는, 예전의 그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권력을 손에 움켜쥐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자는 절대 감정 따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여자 한 명 때문에 저토록 나약해진 모습이라니.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하고도 눈 깜짝하지 않던 그 냉정함은 어디에 갔단 말인가. 반산 별장. 송시아는 미친 듯이 발광하며 집 안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성은! 빌어먹을, 엄기준! 다 죽여버릴 거야! 모조리 다 죽여버릴 거라고! 감히 나한테 싸움을 걸어? 이까짓 글자 몇 줄로 날 묶어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민아는?” “부대표님, 아가씨와 신이랑 씨가 해외로 떠나신 후 잠시 동안은 추적 가능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현재 그곳 정세가 혼란스러워 저희 세력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최대한 다른 인맥을 동원해 찾고 있습니다.” 송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성은, 넌 면북에 있을 때 죽었어야 했어. 빌어먹을 놈,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미 한 번 죽여봤으니, 두 번 못할 것도 없지!” 송시아는 소민아만 장악하면 기성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계획이었다. 그때, 도우미가 전화를 받고 뛰어와 송시아에게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남원 별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뭐라고?” 짜증스러운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전연우가 그곳에 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설마 기억이 다 돌아온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먹인 약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는데.” “양이 부족했나 보네. 전연우, 내가 평소에 너한테 너무 잘해줬나 봐. 깨어나자마자 그 잡종을 찾아가게 만든 걸 보니.” “지금 장소월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누가 먼저 찾는지 두고 보자고.” 그녀의 잔인함만 탓할 일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미경은 비명을 지르며 허벅지를 붙잡았다. 강지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한 벌이야. 이번엔 다리 하나를 분지르는 것으로 끝내지만,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야!” 미경은 두려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주인님,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지훈은 옆에 있는 천효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아이... 키우고 싶어?” 그는 확실히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후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특히 그 바보 같은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전에 없던 미묘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말이다. 천효연은 교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어차피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한번 키워보죠 뭐.” 강지훈이 말했다. “그럼 소현아를 찾아 데려와.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본가로 돌려보낼 거야.” “네, 주인님.” ... 천하 일성 야간 업소. “당신 여자가 내 애완동물 데려갔어요. 이 빚 어떻게 갚을 거예요?” 전연우는 사진 속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대가로 무기랑 정보 지원해줄게. 대신 찾으면 장소월은 털끝 하나 다치게 해선 안 돼.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와 내 아내로 살게 할 거야.” 사랑에 눈먼 듯한 전연우의 모습에, 강지훈은 핏물처럼 검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당신답지 않은 대답이네요. 오랜 시간 동안 옆에서 지켜봐 왔던 당신은 여자 한 명한테 이렇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전연우는 사진 속 여인을 애처롭게 쓰다듬었다. 어쩐지 예전보다 더욱 야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눈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난 이미 그 사람을 한 번 잃었어. 두
“뭐라고? 소현아가 사라졌다고?” 높은 자리에 앉은 남자가 잠옷 차림으로 다리를 벌린 채 매서운 눈빛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을 위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강지훈은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여자를 힘껏 움켜쥐었다. 천효연은 매혹적인 입술을 다시며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는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입었다. 그녀의 유혹적인 눈동자엔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음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소현아가 그곳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감시하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하는 말이, 소현아가 사라졌다고?” 규영은 두려움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했다. “주인님, 저희가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아가씨께서 성정이 너무 활달하셔서 감당이 어려웠습니다. 당시 저희는 국경 근처 낙일 마을이라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가씨께서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을 때, 저희는 그저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 화장실에 간다고 저희를 속이시고는 몰래 도망치셨습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그 별장에 가보니 아가씨께서 입으셨던 더럽혀진 옷만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 그 별장 주인에게 끌려갔을 겁니다.” 미경은 곧바로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아가씨의 말씀을 되새겨보면, 데려간 사람은 아마 아가씨의 친구분일 겁니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주... 주인님...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엔 반드시 아가씨를 모시고 오겠습니다.”“한 번 더 기회를 줘?” 강지훈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천효연이 두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그의 가슴팍으로 손을 뻗었다. “지훈 씨, 그 바보가 뭐가 좋다고 그래요? 나 하나로 부족해요? 사라졌으면 그냥 내버려 둬요... 그 여자가 북경 감옥에 있을 때 저 너무 불편했어요. 그러니까... 다시 돌아오게 하지 말아요. 네?” 규영과 미경은 서로
“만약 강지훈이 사람을 보내 쫓아온다면, 얼마나 더 숨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강용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같이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내가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거니까.” 그는 손가락을 뻗어 장소월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 “얼른 자. 내가 떠날 방법 생각해 볼게.”“너 먼저 자. 난 좀 더 앉아 있고 싶어.” “같이 있어 줄게.” “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어서 가서 자.” 강용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12시 전에 꼭 방으로 돌아가. 안 그러면 내가 잡으러 올 거야.” “알았어.” 장소월의 얼굴에 오랜만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강용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방에 돌아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누워 음 소거로 PS 게임기를 만지작거렸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고 강용도 졸음이 몰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 반이었다. 한 시간 동안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부르려고 팔을 뻗었다가 내려놓았다. 강용은 사색에 잠겨 있는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수평선에서 오늘을 밝힐 금빛 광선이 솟아올랐다. 또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강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날이 밝았어. 우리 이제 가서 좀 쉬자, 응?” 장소월의 귓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에서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용, 봐봐. 진짜 날이 밝았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낸다면, 그녀의 몸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강용은 몰래 그녀의 물에 수면제를 타 겨우 잠들게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그녀는 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소월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 장소월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강용, 내 옆에 있으면 안 돼. 난 널 위험하게 만들 거야. 그리고 현아까지...” 강용은 그녀의 손에서 하던 일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난 위험 따위 두렵지 않아. 그리고 난 서울로 돌아가도 안전하지 않아. 차라리 너랑 함께 있는 게 나아. 장소월, 나 혼자 남겨지지 않게 해줘.” 그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 강용은 알고 있었다. 장소월에게 있어 강용은 친구 그 이상이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치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강용은 그녀가 분명 마음이 약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눈썹을 찌푸린 채 망설이는 장소월의 모습에 강용은 일부러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가씨, 나 버리지 마, 응?”그렇다. 사람들은 지금 강용과 강영수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면, 틀림없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장소월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다른 방법 생각해 볼게.” “좋아.” 오늘 저녁은 모두 장소월이 요리했고, 강용은 옆에서 야채를 다듬으며 그녀를 도왔다. 소현아가 장소월의 잠옷을 입고 내려왔다. 사이즈가 가장 큰 옷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소현아에게는 빠듯해 보였다. “소월아, 오늘 저녁 메뉴 뭐야?” 밑으로 드러난 배꼽을 본 장소월은 옷을 잡아당겨 주며 말했다. “이거 내 옷 중에 제일 큰 건데.”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밥상을 차리고 있는 강용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혹시 새 옷 있어? 내 옷은 안 맞네.” “당연히 없지. 나중에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할게. 우선은 그냥 입고 있어.” 장소월은 그녀의 동그란 배에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단순히 지방 때문에 나온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현아야... 솔직하게 말해봐. 너 혹시 임신한 거야?” 소현아는 천진난만하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