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은 후 장소월은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깨끗이 닦은 뒤 빠르게 잠자리에 들었다.남자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오고 눈부신 라이트가 번쩍였다. 전연우는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차에서 내려왔다.단숨에 3층까지 올라가 침실 문을 열었다.깊은 잠에 빠졌던 장소월은 침대 한쪽이 꺼져내려 가는 것을 느낀 뒤에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전연우는 외투를 벗고 오늘 갓 갈아놓은 침대 시트에 누워 이불과 장소월을 한 번에 끌어안았다. 그녀 몸에서 풍기는 꽃향기를 맡으니 하루종일 쌓였던 피로가 모두 풀리는 것 같았다.장소월은 잠이 채 깨지 못한 듯 간신히 눈을 뜨고는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이게 무슨 냄새야. 가서 씻고 와.”“그래. 금방 갈게.”장소월은 너무 졸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이 들었다. 전연우는 옆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잠옷 어깨끈을 다시 올려주었다.얼마 후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에 들어갔다.전연우는 샤워를 마친 뒤 머리를 말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전연우는 그녀를 품에 꼭 껴안은 채 잠을 청했다.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고 밤새 하늘을 지켰던 어둠이 빛을 받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바깥엔 서리가 내렸지만, 집안엔 보일러가 틀어져 있어 온도가 적당했다.장소월이 슬리퍼를 신고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도우미들이 이미 아침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메뉴는 잔치 국수였다.최근 장소월은 혼자 집에 있었기에 입는 것과 먹는 것 모두 최대한 간단히 해결했다.예전 거실에 내려와 보면 항상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지만, 요즘은 연속 며칠 동안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전연우는 늦잠을 자는 날이 별로 없다.지금은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전자기기의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전연우는 여전히 원래의 루틴을 지키고 있었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의 신문을 보는 그 루틴 말이다.장소월이 소파 앞 탁자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은 신문 배달 안 왔나 보네요.”그중
“아니요. 그냥 뭘 그릴지 잠시 떠오르지 않은 것뿐이에요.”은경애가 말했다.“아이고. 아가씨, 제가 아가씨랑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요. 아가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제가 훤히 꿰고 있다고요.”“대표님께서 밖에 나가 술과 여자들과 어울릴까 봐 걱정되시는 거죠?”빠직.장소월이 돌연 팔에 힘을 주더니 붓을 두 조각으로 끊어버렸다.“됐어요. 그만 하세요.”늘 온순한 성격이었던 그녀가 갑자기 벌컥 화를 내니 은경애는 화들짝 놀랐다.실은 은경애 같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예전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차츰 무뎌지기 마련이다. 아가씨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많은 증오와 원한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분명 천천히 해소되고 말 것이다.은경애는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평소의 습관, 그리고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아 아가씨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미 대표님을 받아들였다. 대표님은 도련님에게 무뚝뚝하긴 하지만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다.반면 아가씨는 겉으론 친절하게 대하지만, 진정으로 아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은경애는 어쩔 수 없이 별이를 안고 화실에서 나갔다.그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장소월이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서철용이 보내온 문자메시지였다. 천추 산장의 각 비상구 위치와 그녀가 도망칠 때 사용할 이동 노선이 그 내용이었다.[전연우는 영리해서 두 곳에서 동시에 예식장을 준비하고 있어요. 최종적으로 어떤 곳을 선정할지 예측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소월 씨가 도망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겠죠. 내가 두 곳 모두에 사람을 배치해 두었어요. 두 번의 도망칠 기회가 있지만 두 번 다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서... 다른 시간에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장소월은 엄청난 길이의 문자를 보니 긴장감에 가슴이 꽉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그래요.]장소월은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만약 도망치다 실패
사람들은 모두 잃어버린 반지를 찾는 데에 집중하느라 전연우가 들어왔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그렇게 바닥에 엎드려 있으면 감기 걸려.”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전연우가 한 손으로 그녀를 안아 들고 소파에 앉았다.장소월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왜 발걸음 소리도 안 냈어?”전연우가 맨발인 상태의 그녀를 보고는 이마를 찌푸리고 손으로 차가운 발을 감싸주었다.“뭘 찾는 거야?”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전연우는 팔을 휘저어 도우미들을 모두 내보냈다.장소월이 눈을 내리뜨리고 말했다.“미안해. 네가 준 반지 잃어버렸어.”“고작 그것 때문에 이래? 잃어버려도 괜찮아.”그건 자그마치 6조라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자랑하는 반지다. 장소월이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보상이라는 단어조차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현재 그녀의 물건 중 대부분은 전연우가 준 것이다. 그녀에게 모아둔 돈 몇천만 원이 있다 하더라도 전연우의 눈에는 정장 한 벌 못 사는 보잘것없는 푼돈일 뿐이다.장소월은 그의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고 있었다.“정말... 미안해. 하지만... 도저히 보상해줄 방법이 없어.”전연우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한기가 내려앉았다.“나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거 알잖아. 소월아... 우린 부부야. 네가 나한테 해야 하는 말은 미안해가 아니라 사랑해야!”장소월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선택적으로 그의 말을 무시해버리고는 일어섰다.“반지를 어디에 뒀는지 잠시 떠오르지 않는 거야. 더 찾다 보면 어느 날 나타날지도 몰라.”장소월은 뒤돌아 그와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발걸음을 뗀 순간 거친 손 하나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전연우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 결혼식 올리고 난 뒤에 천천히 찾으면 돼. 소월아... 우리한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장소월은 억지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뜨겁게 활활
창밖 화창한 날씨를 보고 있으니 송시아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우리 내기 하나 할래요? 그 결혼식이 순조롭게 진행될지 아닐지?”“그건...”소민아가 말했다.“부대표님,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설마 소...”그녀는 소월 언니라는 네 글자를 마저 내뱉지 않고 이내 말을 바꾸었다.“장소월 아가씨가 도망칠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설마요! 대표님과 사모님 사이 감정이 얼마나 두터운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있어요. 또한... 두 분은 이미 혼인신고까지 하셨는데 이제 와 도망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두 분은 분명 평생 행복하게 사실 거예요.”송시아가 들고 있던 죽을 내려놓았다.“인시윤 씨와 대표님이 어떻게 이혼했는지 잊었어요? 그깟 종이 쪼가리 일뿐인 혼인신고서 찢으면 그만이에요. 대표님이 마음만 먹으면 성세 그룹 안주인 자리는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거든요.”“전연우는 참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하필이면 그 여자를 선택하다니!”장소월과 전연우가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건 하늘이 이미 정해주었다. ‘장소월, 이번 생에도 그 운명과 맞서려 하는 거야?아무리 노력해도 너희 두 사람은 안 돼.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이토록 너여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걸까?저번 생에도 그랬고, 이번 생에도...너희가 결혼한다는 그 2월 14일 네 기일이었잖아!만약 그날 정말 결혼식을 올린다면, 장소월... 넌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지 못할 거야.전연우는 잠시 너와 결혼할 뿐, 결국엔 날 선택할 거야. 널 한번 버린 사람인데 두 번을 못 버리겠어?’소민아는 회사에 돌아온 뒤에도 힘없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코너를 돌다가 기성은의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그녀는 평소처럼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이마를 살짝 만지고는 머리도 들지 않은 채 지나갔다.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앞 똑바로 보고 다녀요.”“네.”기성은의 시선이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머물렀다. 옆에 있던 소피아가 끼어들었다.“매번 송 부대표
기성은이 옆에 있던 컵을 들어 올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디쓴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는 소민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류를 살펴보며 말했다.“... 송시아와 오랜 시간 붙어있더니 다른 사람 생각을 읽을 줄도 알고. 좋아요! 영리해졌네요!”소민아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지금 누굴 조롱하는 거예요! 기성은 씨, 똑똑히 알려줄게요. 당신은 내 상사이긴 하지만 난 전혀 두렵지 않아요. 나한텐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까요.”“오. 사람으로 날 짓누를 줄도 아네요?”“똑같이 월급 받는 처지인데 기 비서님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절 얕잡아 보는 거예요? 전 소나 말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매일 그렇게 못살게 굴면 어떻게 버텨요!”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렸다. 목소리도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만하면 됐어요.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요. 나 바빠요...”“컥컥컥...”기성은이 주먹으로 입을 막고 연속 기침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조금 쉰 것 같았다.소민아는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생각에 잠겼다. ‘저 자식 감기에라도 걸린 건가?됐어. 오지랖 부릴 필요 없어. 저 사람 옆엔 엄연히 비서가 있잖아? 주가은도 있고!’소민아는 진지한 얼굴로 의자를 끌고 기성은의 옆에 가 앉았다.그녀는 송시아가 병원에서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기성은에게 알려주었다.“... 송시아는 왜 결혼식이 정상적으로 진행될지를 걸고 저와 내기를 하자고 했을까요? 설마 자기가 신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아니면 사람을 불러 망쳐놓으려고?”“절대 대표님의 전 부인은 아니어야 할 텐데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겠죠. 인시윤은 지금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으니까 결혼식 현장에 나타날 리는 없어요. 또한... 예식장에 수많은 경호원들을 배치할 예정이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범죄자를 감시하는 줄로 알 거예요.”기성은의 날카로운 눈빛에 소민아는 자신이 말을 잘못한 줄로 여기고 겁먹은 얼굴로 입을 막았다.기성은은 이번엔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을 끊지 않았다. 다만 한
소민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소월 언니...”그녀는 송시아와 기성은과의 대화 내용을 모두 장소월에게 말해주었다.핸드폰 너머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약 30초 뒤, 장소월이 입을 열었다.“민아 씨, 좀 복잡한 일이 있긴 해요.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기면 현아를 찾아가요. 현아는 강지훈 옆에 있으니까 안전할 거예요. 전연우는 극단적인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요. 현아가 강지훈을 시켜 민아 씨를 보호하면 전연우도 어떻게 하지 못할 거예요.”“그러니까... 소월 언니, 정말 떠나시려는 거예요?”장소월은 서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고는 방을 나섰다.“민아 씨, 이번 일은 모르는 게 더 나을 거예요. 민아 씨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민아 씨는 그냥 맡은 일을 성실히 하면 돼요.”몇 분 뒤, 전연우는 어느새 방에서 나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누구랑 통화하는 거야?”핸드폰 너머 소민아는 전연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두말없이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민아 씨야... 결혼식에 관해 상의할 게 있어서 전화했더라고.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했어. 네 목소리가 들리니까 전화 끊은 것 같아.”“넌? 일 다 처리했어?”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내가 맡은 일은 아무런 사고가 생기지 않게 막는 거야. 그날 적잖은 하객들을 맞이해야 할 거야. 우리 사모님이 고생 좀 해야겠어.”전연우는 이번 기회에 그녀가 도망칠 생각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전연우는 서울에서 더 많은 경호원들을 동원해 그녀를 지키려 하고 있다.장소월 또한 전연우의 말뜻을 완전히 알아차렸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날은 절대 평화롭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결혼식 날이 다가올수록 장소월의 마음속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오늘 이 열두 시가 지나면, 내일 결혼식이 시작된다.밤 열두 시.불안감에 휩싸인 사람이 어떻게 그녀뿐이겠는가.서재 안, 농후한 담배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어느새 재떨이엔 담배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촬영 감독들이 모두 도착했다. 장소월은 화장대 앞에 앉아 한 시간이 넘도록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말했다.“사모님, 평소 피부 관리 어떻게 하시길래 이렇게 좋은 거예요?”장소월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 그리고 그 위 생기있게 반짝거리는 빨간 입술... 화려한 웨딩드레스까지 입으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강림한 선녀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성세 그룹 안주인을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결혼식 날이었지만, 장소월은 기대보단 불안함이 훨씬 더 컸다. 그의 웨딩드레스 취향은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비록... 전생엔 결혼식을 끝까지 치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오직 혼인신고서 한 장만이 그녀가 전연우의 와이프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었다.약혼식도 간단한 드레스만 입고 지인 몇 명과 조용히 진행했었다.지금 이 성대한 결혼식에 비교하면, 전생의 모든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몰래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감정 하나 없이 텅 비어있는 눈빛을 보고는 그녀가 결혼식 때문에 긴장하고 있다고 여기며 말했다.“사모님, 긴장되시면 저희랑 얘기 나눠요. 오늘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아세요? 대표님께서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난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장소월이 거울을 보며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이미 내뱉은 말은 엎질러진 물처럼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더는 아무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때 오늘 들러리를 맡은 소현아가 커튼을 열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소월아, 소월아... 어때? 예뻐?”장소월은 거울 속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예뻐. 현아는 뭘 입어도 예쁘지.”소현아는 최근 줄곧 강지훈과 함께 있었다
장소월은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손등에 떨어졌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그림 그리느라 사부님 고생 많이 하셨겠네.”“할아버지께선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고 하셨어. 하지만 이번엔... 나와 할아버지 모두 네가 한 번쯤은 오로지 너 자신만을 위해 살길 바라.”“너한텐 결혼 생활에 속박되는 것보다 넓은 곳에서 자유를 즐기며 사는 게 더 어울려.”“만약 떠나고 싶다면...”장소월이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허이준, 난 이제 못 떠나.”그 말 이후 기나긴 침묵이 내려앉았다.소현아가 먹을 것을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소월아, 소월아... 와봐, 내가 맛있는 거 갖고 왔어.”침대에 널려있는 간식을 보니 장소월은 사색에 잠겼다. 모두 그녀가 예전 좋아하던 것들이었다.“이것들 다 어디에서 가져온 거야?”소현아가 문을 가리켰다.“옆방 네 화실에서 가져왔어. 장롱 안에 간식들이 꽉 차 있던데?”설마 전연우가 그녀를 위해 준비해둔 건가?그런데 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단 말인가?은경애가 소현아의 뒤를 쫓아 들어왔다.“아이고, 세상에. 이 간식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소현아는 감자 칩 한 봉지를 뜯으며 은경애를 노려보았다.“그래도 먹을 건데요? 소월이는 아주머니처럼 깍쟁이가 아니거든요!”“괜찮아요. 먹게 놔둬요.”장소월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현아야, 강지훈... 너한테 잘해줘?”소현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그럭저럭... 나한테 맛있는 걸 줄 때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아.”장소월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아래층에서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은경애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어머, 함이 왔나 보네요.”은경애는 급히 방으로 돌아가 별이를 안았다.마당으로 고급 차량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소민아는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지름길로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 전연우는 정장을 차려입고 평소보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손에 꽃을 든 채 들
“머리가 정말 정상은 아니네. 그렇게 심심하면 병원에나 가봐.” 강용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고는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소현아는 슬픈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용, 왜 이 아이를 싫어하는 거야? 규영과 미경은 분명 네가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규영과 미경도 내 좋은 친구 거든. 그 두 사람이 나를 속일 리는 없어.” “강용 너까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나도 필요 없어.” 그때 잠에서 깬 장소월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소현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실은 강용이 부엌으로 들어간 뒤부터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 장소월은 입술을 앙다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소현아에게 다가갔다. “현아야... 무슨 일이야?” 소현아는 장소월의 목소리를 듣고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월아, 강용이 내 배 속에 있는 이 아이 싫대. 이제 나도 싫어. 지워버릴 거야.”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리 와, 우리 이야기 좀 하자.” 강용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정원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현아야, 너 강용 좋아하지?”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소월이 너도 좋아해.” 장소월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아야, 좋아하는 마음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 나랑 너처럼 친구로서 좋아하는 감정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감정도 있어. 그건 평생을 변함없이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현아는 어때? 네 마음은 어느 쪽인 것 같아?” 소현아가 대답했다. “난 강용과 평생 함께 살고 싶어. 현아는 강용을 좋아하지만, 강용은 현아를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도 싫대. 현아는 너무 슬퍼.”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틀림없이 강지훈의 핏줄이다. “그럼 강지훈은? 너 그 사람 좋아하는
소현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간신히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냈다. 평소 까불까불 장난기 많고 히죽거리기만 하던 사람이 예고도 없이 돌연 사납게 돌변한 것이다. 그녀는 두려움에 황급히 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웅크린 채 이불 속에 숨어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강용이 강지훈과 같은 사람일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눈물을 흘릴 때면, 강지훈은 더욱 심하게 그녀를 괴롭히곤 했었다. 강용은 예전 장소월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다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주변 환경에 꽤나 익숙했다. 그는 시장에 가서 신선한 닭, 오리, 생선, 고기 등을 사 왔다. 사막 근처라 물가가 다른 곳보다 훨씬 비쌌다. 특히 물은 가까운 곳에 오아시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강용은 민박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방음 시설이 좋지 않기 때문에 행여 위층에 잠들어 있는 장소월을 깨울까 염려되어 말이다. 집에 들어가 보니 또다시 소현아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소파에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그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강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소현아는 소파에서 내려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가서는 입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속삭였다. 강용은 앞치마를 두르고 능숙한 솜씨로 야채를 씻고 다듬었다. 허리를 굽혀 찬장 아래에 있는 기름을 꺼내려다가 뒤에 있는 여자를 발견한 그가 말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 소현아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세 걸음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확실하게 세어봤어. 지금은 네 걸음이나 떨어져 있어.” 그 말에 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라는 말도 너한테는 과분하네.” 강용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장소월에게 줄 삼계탕을 요리하는 데에 집중했다.소현아는 줄곧 말없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음식이 거의
세 사람은 근처 민박집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장소월은 불안한 마음에 문밖 가게 앞에 서 있는 소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강용, 현아 좀 살펴봐 줘.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강용은 팔짱을 낀 채, 귀찮다는 듯 눈을 까뒤집으며 말했다. “정말 성가시단 말이야. 애초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됐어. 체크인 마치고 현아랑 같이 주변 좀 돌아봐. 나는 먼저 올라가서 쉴게.” “난 너만 신경 쓸 거야. 쟤는 내 알 바 아니야.” “강용, 여기 오기 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잊었어?” “소현아는 지금 임신한 상태라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어. 이왕 데려오겠다고 결정했으면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도 했고. 하지만... 내가 하루 종일 쟤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소현아가 꽃 세 송이를 들고 다가왔다. “소월아, 소월아... 이것 봐, 내가 방금 산 꽃이야. 예쁘지?” 장소월은 꽃을 받아들며 말했다. “예쁘네.” 소현아는 들뜬 얼굴로 강용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강용, 나랑 같이 놀러 가자.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강용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나 바빠. 가고 싶지 않아. 너...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소월에게 일렀다. “소월아, 소월아, 강용이 나한테 화냈어.” 장소월의 입꼬리가 위로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그만해, 애도 아니고. 강용, 잠깐 현아랑 놀아주고 있어. 난 너무 피곤해서 방에 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친 장소월은 바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강용은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에 들고 있던 꽃을 프런트에 올려놓고 말했다. “나도 가서 짐 풀어야겠어.” “강용, 나랑 같이 놀기로 했잖아.” 이곳은 총 3층 건물로, 1층은 거실, 2층은 방, 3층은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침 방도 3개가 구비되어 있고, 빨래를 널 수 있는 베란다도 있어 세 사람이 살기엔 적당한
“누가 쫓아오면 막아요. 남원 별장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해요.” “네, 대표님...” 은경애는 눈치껏 바로 호칭을 바꾸었다. 아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전연우가 확실한데,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한 낯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은경애는 머리가 지끈거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전연우는 방으로 돌아온 뒤, 늘 그랬던 것처럼 바로 금고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금고를 열자 중요한 서류나 돈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금고 비밀번호도 단순하게 그녀의 생일 날짜였다. 그는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밝게 웃고 있는 장소월의 모습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녀를 잃은 고통은 정말이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다 내 잘못이야. 널 혼자 두는 게 아니었어.’‘내 아내, 소월아!’그때 별이가 전연우 옆으로 다가와 사진 속 여자를 보고는 옹알거리며 말했다. “엄마, 엄마...” 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우리 곁으로 데려올 테니까.” 그는 두 번의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생의 전연우이자, 또 현생의 전연우이다. 침실의 모든 것은 결혼식 날 그대로였다. 침대에 깔려있는 신혼 이불, 그리고 액자 안에 담긴 세 사람의 웨딩사진까지... 순백의 웨딩드레스 차림의 장소월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그 순간 미소는 짓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아이를 향한 애틋한 모성애가 가득 담겨 있었다. 과거 그는 너무나도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다시 되돌아갈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바쳐 속죄했다. 결혼식 날 호텔에서 장소월이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그에게 목숨을 부지할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전연우 역시 그녀가 마음이 약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아이는 전연우가 손에 쥐고
강지훈은 지금처럼 사랑에 이성을 잃은 듯한 전연우보다는, 예전의 그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권력을 손에 움켜쥐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자는 절대 감정 따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여자 한 명 때문에 저토록 나약해진 모습이라니.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하고도 눈 깜짝하지 않던 그 냉정함은 어디에 갔단 말인가. 반산 별장. 송시아는 미친 듯이 발광하며 집 안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성은! 빌어먹을, 엄기준! 다 죽여버릴 거야! 모조리 다 죽여버릴 거라고! 감히 나한테 싸움을 걸어? 이까짓 글자 몇 줄로 날 묶어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민아는?” “부대표님, 아가씨와 신이랑 씨가 해외로 떠나신 후 잠시 동안은 추적 가능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현재 그곳 정세가 혼란스러워 저희 세력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최대한 다른 인맥을 동원해 찾고 있습니다.” 송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성은, 넌 면북에 있을 때 죽었어야 했어. 빌어먹을 놈,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미 한 번 죽여봤으니, 두 번 못할 것도 없지!” 송시아는 소민아만 장악하면 기성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계획이었다. 그때, 도우미가 전화를 받고 뛰어와 송시아에게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남원 별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뭐라고?” 짜증스러운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전연우가 그곳에 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설마 기억이 다 돌아온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먹인 약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는데.” “양이 부족했나 보네. 전연우, 내가 평소에 너한테 너무 잘해줬나 봐. 깨어나자마자 그 잡종을 찾아가게 만든 걸 보니.” “지금 장소월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누가 먼저 찾는지 두고 보자고.” 그녀의 잔인함만 탓할 일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미경은 비명을 지르며 허벅지를 붙잡았다. 강지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한 벌이야. 이번엔 다리 하나를 분지르는 것으로 끝내지만,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야!” 미경은 두려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주인님,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지훈은 옆에 있는 천효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아이... 키우고 싶어?” 그는 확실히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후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특히 그 바보 같은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전에 없던 미묘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말이다. 천효연은 교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어차피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한번 키워보죠 뭐.” 강지훈이 말했다. “그럼 소현아를 찾아 데려와.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본가로 돌려보낼 거야.” “네, 주인님.” ... 천하 일성 야간 업소. “당신 여자가 내 애완동물 데려갔어요. 이 빚 어떻게 갚을 거예요?” 전연우는 사진 속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대가로 무기랑 정보 지원해줄게. 대신 찾으면 장소월은 털끝 하나 다치게 해선 안 돼.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와 내 아내로 살게 할 거야.” 사랑에 눈먼 듯한 전연우의 모습에, 강지훈은 핏물처럼 검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당신답지 않은 대답이네요. 오랜 시간 동안 옆에서 지켜봐 왔던 당신은 여자 한 명한테 이렇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전연우는 사진 속 여인을 애처롭게 쓰다듬었다. 어쩐지 예전보다 더욱 야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눈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난 이미 그 사람을 한 번 잃었어. 두
“뭐라고? 소현아가 사라졌다고?” 높은 자리에 앉은 남자가 잠옷 차림으로 다리를 벌린 채 매서운 눈빛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을 위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강지훈은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여자를 힘껏 움켜쥐었다. 천효연은 매혹적인 입술을 다시며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는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입었다. 그녀의 유혹적인 눈동자엔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음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소현아가 그곳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감시하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하는 말이, 소현아가 사라졌다고?” 규영은 두려움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했다. “주인님, 저희가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아가씨께서 성정이 너무 활달하셔서 감당이 어려웠습니다. 당시 저희는 국경 근처 낙일 마을이라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가씨께서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을 때, 저희는 그저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 화장실에 간다고 저희를 속이시고는 몰래 도망치셨습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그 별장에 가보니 아가씨께서 입으셨던 더럽혀진 옷만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 그 별장 주인에게 끌려갔을 겁니다.” 미경은 곧바로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아가씨의 말씀을 되새겨보면, 데려간 사람은 아마 아가씨의 친구분일 겁니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주... 주인님...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엔 반드시 아가씨를 모시고 오겠습니다.”“한 번 더 기회를 줘?” 강지훈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천효연이 두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그의 가슴팍으로 손을 뻗었다. “지훈 씨, 그 바보가 뭐가 좋다고 그래요? 나 하나로 부족해요? 사라졌으면 그냥 내버려 둬요... 그 여자가 북경 감옥에 있을 때 저 너무 불편했어요. 그러니까... 다시 돌아오게 하지 말아요. 네?” 규영과 미경은 서로
“만약 강지훈이 사람을 보내 쫓아온다면, 얼마나 더 숨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강용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같이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내가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거니까.” 그는 손가락을 뻗어 장소월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 “얼른 자. 내가 떠날 방법 생각해 볼게.”“너 먼저 자. 난 좀 더 앉아 있고 싶어.” “같이 있어 줄게.” “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어서 가서 자.” 강용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12시 전에 꼭 방으로 돌아가. 안 그러면 내가 잡으러 올 거야.” “알았어.” 장소월의 얼굴에 오랜만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강용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방에 돌아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누워 음 소거로 PS 게임기를 만지작거렸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고 강용도 졸음이 몰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 반이었다. 한 시간 동안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부르려고 팔을 뻗었다가 내려놓았다. 강용은 사색에 잠겨 있는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수평선에서 오늘을 밝힐 금빛 광선이 솟아올랐다. 또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강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날이 밝았어. 우리 이제 가서 좀 쉬자, 응?” 장소월의 귓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에서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용, 봐봐. 진짜 날이 밝았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낸다면, 그녀의 몸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강용은 몰래 그녀의 물에 수면제를 타 겨우 잠들게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그녀는 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소월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 장소월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강용, 내 옆에 있으면 안 돼. 난 널 위험하게 만들 거야. 그리고 현아까지...” 강용은 그녀의 손에서 하던 일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난 위험 따위 두렵지 않아. 그리고 난 서울로 돌아가도 안전하지 않아. 차라리 너랑 함께 있는 게 나아. 장소월, 나 혼자 남겨지지 않게 해줘.” 그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 강용은 알고 있었다. 장소월에게 있어 강용은 친구 그 이상이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치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강용은 그녀가 분명 마음이 약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눈썹을 찌푸린 채 망설이는 장소월의 모습에 강용은 일부러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가씨, 나 버리지 마, 응?”그렇다. 사람들은 지금 강용과 강영수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면, 틀림없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장소월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다른 방법 생각해 볼게.” “좋아.” 오늘 저녁은 모두 장소월이 요리했고, 강용은 옆에서 야채를 다듬으며 그녀를 도왔다. 소현아가 장소월의 잠옷을 입고 내려왔다. 사이즈가 가장 큰 옷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소현아에게는 빠듯해 보였다. “소월아, 오늘 저녁 메뉴 뭐야?” 밑으로 드러난 배꼽을 본 장소월은 옷을 잡아당겨 주며 말했다. “이거 내 옷 중에 제일 큰 건데.”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밥상을 차리고 있는 강용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혹시 새 옷 있어? 내 옷은 안 맞네.” “당연히 없지. 나중에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할게. 우선은 그냥 입고 있어.” 장소월은 그녀의 동그란 배에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단순히 지방 때문에 나온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현아야... 솔직하게 말해봐. 너 혹시 임신한 거야?” 소현아는 천진난만하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