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이 진행되고 한 시간 뒤.전연우는 병원에 도착했다. 배은란도 수술실 문밖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전연우가 경직된 얼굴로 배은란에게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왜 불이 난 건데요.”배은란은 서철용이 걱정되어 한참을 운 탓에 눈이 새빨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녀 역시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배은란을 보살피던 도우미가 일어나 자초지종을 한번 말해주었다.전연우의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CCTV 영상 찾아봐. 대체 어떤 사람인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내.”기성은이 머리를 끄덕였다.“네, 대표님.”기성은은 병원 16층 CCTV 영상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 간단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눈만 내놓고 있어 얼굴은 조금도 확인할 수 없었다.경찰서에서는 이 일을 조사한 뒤 대체적인 그녀의 얼굴을 그려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 윤곽으로 조금의 단서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이 응급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을 때, 기성은이 조사 결과를 전연우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조사해보았는데 이 사람은 병원 간호사 명단에 없습니다. 외부 인원이 간호사로 위장해 들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16층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사원증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모두 남자였습니다. 저희가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전연우가 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으로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인시윤은 몇 층에 있어?”“12층입니다.”전연우는 바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갔다.기성은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대표님, 인시윤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하지만 인시윤은 지금 저희들의 감시 아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인시윤은 아닙니다.”전연우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인시윤에 대해 잘 알아?”기성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만일
인시윤은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손으로 전연우의 팔목을 꽉 잡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연우 씨... 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상처 줄 거예요...”“지금 이 몰골이 된 것도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이걸로도 모자라요? 내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망가져야 만족하겠어요?”전연우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간호사들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전연우가 시뻘건 핏줄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널 죽일 수 있나 없나 지켜봐.”전연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움켜잡아 책상에 눌러놓고는 다른 한 손으로 옆에 있던 뜨거운 물을 집어 그녀의 입안에 부어 넣었다.인시윤은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허공에 마구 휘저었다.전연우의 손등에 인시윤의 손톱에 긁힌 자국이 몇 가닥 생겨났다. 하지만 남자의 힘은 점점 더 거세져 갔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인시윤은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치다가 급기야 얼굴이 마비되어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그녀의 숨통이 끊어지려는 순간, 전연우가 그녀를 놓아주었다.인시윤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천천히 바닥에 흘러내려 널브러졌다.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전연우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차갑게 식어버린 주검을 보는 것과도 같이 무심하고 냉정했다.전연우도 손에 화상을 입었다. 손등 피부가 모두 데어 벌겋게 부어오른 것이다.인시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목구멍이 뜨거운 물 때문에 화상을 입어 조금의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지금 이 고통 기억해.”전연우가 정장 호주머니에서 하얀색 손수건을 꺼내 손의 물기를 닦고는 휴지통에 버렸다.전연우가 말했다.“하루 시간 줄 테니까 이번 일을 꾸민 놈들 모조리 찾아서 북경 감옥에 집어넣어.”기성은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저녁 12시, 장소월은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전연우는 그때부터 침대 옆
다만... 오귀화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나 지났다. 아직도 대학생을 후원할 돈이 남아있다니.간호사의 목숨을 살려준 건 오귀화에게 인정을 베푼 것이나 다름없었다.기성은이 말했다.“이번 일은 분명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겁니다. 배후의 그 사람...”그 순간 무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대표님께선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고 계시는 거죠. 설마 송 부대표님인가요?”전연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미심장한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시아는 내가 자신에게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고 저렇게 날뛰는 거야. 급할 필요 없어. 이 빚은 내가 모조리 갚아줄 테니까.”“지금 송시아는 뭐 하고 있어?”기성은이 대답했다.“송 부대표님은 매일 제시간에 출근하고 있습니다. 뒤에선 다른 주주들의 주식을 매입하고 있고요. 현재 송 부대표님을 제외하고 주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곳은 인씨 가문입니다. 만약 인씨 가문과 송시아가 연합한다면 혹시나...”전연우가 담뱃불을 끄고는 말했다.“송시아는 야망이 큰 여자야. 하지만 성세 그룹 전체를 삼키기엔 아직 역부족이지.”“성세 그룹을 손에 넣고 휘두른다고 해도, 그 뿌리까지 건드릴 수는 없어.”“아무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징크스 잘 감시해.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생기면 경찰에 신고해.”기성은이 물었다.“저희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까?”전연우가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말했다.“이번 일에 연루된 사람이 너무 많아. 우리가 직접 처리한다면 껄끄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전연우가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워있는 장소월을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지금 어디에서 일하고 있어?”소민아의 언급에 기성은은 화들짝 놀랐다. 대표님의 입에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니 말이다.“아직 송시아의 옆에 있습니다. 부서 이동을 권했지만 거절하더라고요.”“소민아한테 아무 얘기 안 했지?”“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감시하겠습니다.”전
새벽, 침대에 누워있던 장소월이 돌연 깨어나 연이어 기침했다. 전연우는 곧바로 벨을 눌렀다.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검사를 진행했다.전연우가 걱정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어때요?”의사가 각종 수치를 본 뒤 청진기를 내려놓고는 많이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사모님께선 이미 위험한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며칠 더 입원해 있다가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전연우가 물었다.“그럼 언제 다시 깨어날 수 있는 거예요?”의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사실 지금쯤 깨어나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전 앓았던 병 때문에 그 시간이 조금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현재 검사 결과로 봐선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며칠 더 지나면 아마 깨어나실 겁니다.”전연우는 지금까지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그의 굳은 얼굴에 의사는 더는 말하지 못하고 바로 병실을 떠났다.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장소월이 의식을 되찾았다.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전연우.”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던 전연우가 그 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 여기 있어.”장소월은 손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나 너무 괴로워.”당장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힘없는 목소리였다.“괜찮아. 오빠가 있잖아. 내가 의사 불러올게.”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나 죽을 것 같아.”전연우는 심장에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의식을 잃은 채 몇 년을 누워있는 그녀를 지켜보던 예전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연우는 그녀를 잃을까 봐 너무나도 겁이 났다.전연우가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넘겨주고는 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내가 너 잘못되게 놔두지 않아. 조금 더 자.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장소월은 며칠 동안 줄곧 흐리멍덩한 상태였지만, 자신이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다.“그래.”장소월이 눈을 감자 전연우는 자리에서 일
회의가 끝난 뒤.송시아의 귀에 아직 회의실에 남아있는 임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은 점점 더 회사에 소홀하신 것 같아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비서한테 다 맡기다니요.”“그러니까요.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요.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회사까지 내팽개치고 있어요.”소민아는 최근 며칠 동안 너무 바빠 조금도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었다.송시아를 따라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업무상 배운 것이 꽤나 많았다.저번의 그 교훈을 잊지 않고 술자리에 나갈 때마다 사전에 숙취 해소제를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는 그때처럼 술에 취해선 안 된다.기성은은 연속 며칠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소피아도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소민아가 송시아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송시아가 말했다.“나 바깥에 나갈 거예요. 이제 따라올 필요 없어요.”“네, 부대표님.”“요즘 힘들었죠.”“아니에요, 부대표님. 확실히 많이 배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부대표님 옆에서 잘 해낼 거예요.”송시아는 보라색 정장을 입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소민아를 향해 빙그레 웃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부대표님, 조심히 가세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소민아는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신경을 드디어 조금이나마 풀어놓을 수 있었다.송시아는 사무실에 돌아가 차 키를 챙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지금은 근무 시간이라 주차장엔 거의 사람이 없었다.송시아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고 한 순간, 어둠 속 코너에서 돌연 한 남자가 튀어나와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송시아는 발버둥 치다가 예전 배웠던 호신술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상대방은 그녀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한 듯 가뿐히 공격을 피했다. 송시아는 곧바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약효가 오래 가지 않는 약이라 몇 분 뒤 송시아는 의식을 되찾았다. 손발이 모두
오후 3시, 소민아가 병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천추 산장에서 예식장 준비를 하고 있던 그녀는 송시아가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소민아는 차에서 내린 뒤 송시아의 병실로 향했다. 한 걸음만 더 일찍 들어갔다면 침대에서 날아오는 컵에 가격당했을 것이다. 병실 안에서 분노하는 송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꺼져! 다 꺼져버려! 쓰레기 같은 놈들. 아기 하나 못 지켜? 꺼지라고!”아기? 송 부대표님이 임신했었나?’그럼 누구 아이란 말인가?소민아는 얼마 전 송시아가 왜 입원했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직장 상사의 사적인 일이니 깊게 파고들 수가 없었다.소민아는 문 앞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그래서 최근 헐렁한 옷을 자주 입고, 그녀에게 새콤한 맛의 블루베리를 사 오라고 시켰던 것이다.소민아 역시 송 부대표님이 임신을 한 건 아닌지 의심했었다.그 예측이 정말 맞을 줄이야.절대 대표님의 아이일 리는 없다.소월 언니를 목숨처럼 아끼는 대표님은 결코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소월 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왜 이토록 몸과 마음을 다해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겠는가. 간호사가 의료품을 들고 급히 안에서 나왔다. 소민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고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가 오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닥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송... 부대표님, 괜찮으신 거죠.”소민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송시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같이 분출했던 분노를 감추며 억지웃음을 지었다.“놀랐어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부대표님. 얼굴... 다치셨어요? 무슨 일 있으셨던 거예요? 제가 신고해 드릴까요?”송시아는 입가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왼쪽 다리는 붕대에 감겨 걸려 있었다. 결코 가벼운 상황은 아니었다.오른팔 소매 안으로 커다란 멍이 보이기도 했다.“이
“언니, 우리 곧 괜찮아질 거예요. 언니 몸이 다 나으면 이 돈 다 써서 맛있는 거 사줄게요.”송시아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중요한 클라이언트와의 일이에요. 민아 씨... 약 가져온 다음 컴퓨터도 가져도 줘요.”소민아는 더이상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네, 부대표님. 알겠습니다.”소민아는 송시아에게 약을 가져다준 뒤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다.송시아가 핸드폰 버튼을 누르자 소민아는 순조롭게 송시아 사무실 문을 열었다. 책상에 가보니 확실히 그 위에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컴퓨터 가방을 찾고 전원선을 뽑은 순간, 돌연 화면이 밝아졌다. 컴퓨터 바탕 화면을 본 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 대표님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던 것이다. 그는 창가에 서서 한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어두운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유리 창문에 침대 하나가 비쳐 보였다. 주위 시설들을 보니 서울 고급 호텔 스위트룸인 것 같았다. 침대 위엔 섹시한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가 누워있었는데,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송시아였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손이 덜덜 떨려 마우스까지 떨어뜨렸다. 주우려 허리를 굽힌 순간 반쯤 열린 서랍 안 사진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호기심이 솟구쳐 오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망설여지기도 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큰일을 보고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소민아는 결국 그 사진들을 꺼냈다.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경악과 분노가 차올랐다. 소월 언니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그곳에 있는 모든 사진에 대표님과 송시아가 담겨 있었다.더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사무실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재빨리 사진을 도로 넣어놓고 일어섰다...병원으로 돌아가는 내내 소민아는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가는 도중 죽 한 그릇을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병실 안, 송시아가 바삐 움직이는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져올 때 다른 거 남겨두지 않았죠? 아니면... 사무실에서 내 물건 본 건
송시아는 너무나도 지독한 사람이다. 아니면 그 역시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일적으론 충분히 차분하지만 감정 면에선 조금 강압적이다. 절대 단 한 순간의 배신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만이 적을 마주했을 때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다.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남자에 대한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소민아는 하루종일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장소월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장소월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전화기 너머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소월 언니,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무슨 일 있어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어느 병원에 있어요? 제가 갈게요.”장소월은 고열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가 4시간 전 다행히 열이 내리고 큰 고비를 넘겼다.장소월은 자신을 위해 핸드폰을 들어주고 있는 전연우를 쳐다보았다. 소민아는 전연우에게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덜덜 떠는 소현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장소월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네. 엘리트 개인 병원에 있어요. 오고 싶으면 와요. 운전 조심하고요.”“걱정 마세요, 언니. 저 할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뒤 장소월이 전연우에게 말했다.“민아 씨가 날 보러 올 거래. 네가 여기 있으면 분명 무서워할 거야. 잠깐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와줄 수 있어?”전연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래. 하지만 딱 10분 만이야. 뭐 먹고 싶어?”장소월이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구영관에서 파는 죽 먹고 싶어.”“그래. 기다리고 있어.”전연우는 병실에서 나간 뒤 정장 재킷을 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옆에 서 있는 기성은을 쳐다보았다.“잘 지켜보고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습니다.”소민아는 참 배짱도 크다. 장소월이 말하지 않았다면 대표님이 어떻게 그녀를 병원에 들이는 걸 허락할 수 있
“누가 쫓아오면 막아요. 남원 별장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해요.” “네, 대표님...” 은경애는 눈치껏 바로 호칭을 바꾸었다. 아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전연우가 확실한데,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한 낯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은경애는 머리가 지끈거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전연우는 방으로 돌아온 뒤, 늘 그랬던 것처럼 바로 금고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금고를 열자 중요한 서류나 돈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금고 비밀번호도 단순하게 그녀의 생일 날짜였다. 그는 사진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밝게 웃고 있는 장소월의 모습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녀를 잃은 고통은 정말이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다 내 잘못이야. 널 혼자 두는 게 아니었어.’‘내 아내, 소월아!’그때 별이가 전연우 옆으로 다가와 사진 속 여자를 보고는 옹알거리며 말했다. “엄마, 엄마...” 전연우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우리 곁으로 데려올 테니까.” 그는 두 번의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생의 전연우이자, 또 현생의 전연우이다. 침실의 모든 것은 결혼식 날 그대로였다. 침대에 깔려있는 신혼 이불, 그리고 액자 안에 담긴 세 사람의 웨딩사진까지... 순백의 웨딩드레스 차림의 장소월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그 순간 미소는 짓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아이를 향한 애틋한 모성애가 가득 담겨 있었다. 과거 그는 너무나도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다시 되돌아갈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목숨을 바쳐 속죄했다. 결혼식 날 호텔에서 장소월이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그에게 목숨을 부지할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전연우 역시 그녀가 마음이 약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아이는 전연우가 손에 쥐고
강지훈은 지금처럼 사랑에 이성을 잃은 듯한 전연우보다는, 예전의 그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권력을 손에 움켜쥐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자는 절대 감정 따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여자 한 명 때문에 저토록 나약해진 모습이라니.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하고도 눈 깜짝하지 않던 그 냉정함은 어디에 갔단 말인가. 반산 별장. 송시아는 미친 듯이 발광하며 집 안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성은! 빌어먹을, 엄기준! 다 죽여버릴 거야! 모조리 다 죽여버릴 거라고! 감히 나한테 싸움을 걸어? 이까짓 글자 몇 줄로 날 묶어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민아는?” “부대표님, 아가씨와 신이랑 씨가 해외로 떠나신 후 잠시 동안은 추적 가능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현재 그곳 정세가 혼란스러워 저희 세력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최대한 다른 인맥을 동원해 찾고 있습니다.” 송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성은, 넌 면북에 있을 때 죽었어야 했어. 빌어먹을 놈,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미 한 번 죽여봤으니, 두 번 못할 것도 없지!” 송시아는 소민아만 장악하면 기성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계획이었다. 그때, 도우미가 전화를 받고 뛰어와 송시아에게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남원 별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뭐라고?” 짜증스러운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전연우가 그곳에 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설마 기억이 다 돌아온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먹인 약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는데.” “양이 부족했나 보네. 전연우, 내가 평소에 너한테 너무 잘해줬나 봐. 깨어나자마자 그 잡종을 찾아가게 만든 걸 보니.” “지금 장소월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누가 먼저 찾는지 두고 보자고.” 그녀의 잔인함만 탓할 일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미경은 비명을 지르며 허벅지를 붙잡았다. 강지훈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한 벌이야. 이번엔 다리 하나를 분지르는 것으로 끝내지만,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거야!” 미경은 두려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주인님,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지훈은 옆에 있는 천효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아이... 키우고 싶어?” 그는 확실히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후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특히 그 바보 같은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전에 없던 미묘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말이다. 천효연은 교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어차피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한번 키워보죠 뭐.” 강지훈이 말했다. “그럼 소현아를 찾아 데려와.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본가로 돌려보낼 거야.” “네, 주인님.” ... 천하 일성 야간 업소. “당신 여자가 내 애완동물 데려갔어요. 이 빚 어떻게 갚을 거예요?” 전연우는 사진 속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대가로 무기랑 정보 지원해줄게. 대신 찾으면 장소월은 털끝 하나 다치게 해선 안 돼.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와 내 아내로 살게 할 거야.” 사랑에 눈먼 듯한 전연우의 모습에, 강지훈은 핏물처럼 검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당신답지 않은 대답이네요. 오랜 시간 동안 옆에서 지켜봐 왔던 당신은 여자 한 명한테 이렇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전연우는 사진 속 여인을 애처롭게 쓰다듬었다. 어쩐지 예전보다 더욱 야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눈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난 이미 그 사람을 한 번 잃었어. 두
“뭐라고? 소현아가 사라졌다고?” 높은 자리에 앉은 남자가 잠옷 차림으로 다리를 벌린 채 매서운 눈빛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사람을 위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강지훈은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여자를 힘껏 움켜쥐었다. 천효연은 매혹적인 입술을 다시며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는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입었다. 그녀의 유혹적인 눈동자엔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고는 음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소현아가 그곳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감시하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하는 말이, 소현아가 사라졌다고?” 규영은 두려움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했다. “주인님, 저희가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아가씨께서 성정이 너무 활달하셔서 감당이 어려웠습니다. 당시 저희는 국경 근처 낙일 마을이라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가씨께서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을 때, 저희는 그저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 화장실에 간다고 저희를 속이시고는 몰래 도망치셨습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그 별장에 가보니 아가씨께서 입으셨던 더럽혀진 옷만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 그 별장 주인에게 끌려갔을 겁니다.” 미경은 곧바로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아가씨의 말씀을 되새겨보면, 데려간 사람은 아마 아가씨의 친구분일 겁니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주... 주인님...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엔 반드시 아가씨를 모시고 오겠습니다.”“한 번 더 기회를 줘?” 강지훈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천효연이 두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그의 가슴팍으로 손을 뻗었다. “지훈 씨, 그 바보가 뭐가 좋다고 그래요? 나 하나로 부족해요? 사라졌으면 그냥 내버려 둬요... 그 여자가 북경 감옥에 있을 때 저 너무 불편했어요. 그러니까... 다시 돌아오게 하지 말아요. 네?” 규영과 미경은 서로
“만약 강지훈이 사람을 보내 쫓아온다면, 얼마나 더 숨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강용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같이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내가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거니까.” 그는 손가락을 뻗어 장소월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 “얼른 자. 내가 떠날 방법 생각해 볼게.”“너 먼저 자. 난 좀 더 앉아 있고 싶어.” “같이 있어 줄게.” “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어서 가서 자.” 강용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12시 전에 꼭 방으로 돌아가. 안 그러면 내가 잡으러 올 거야.” “알았어.” 장소월의 얼굴에 오랜만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강용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방에 돌아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누워 음 소거로 PS 게임기를 만지작거렸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고 강용도 졸음이 몰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 반이었다. 한 시간 동안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부르려고 팔을 뻗었다가 내려놓았다. 강용은 사색에 잠겨 있는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수평선에서 오늘을 밝힐 금빛 광선이 솟아올랐다. 또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강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날이 밝았어. 우리 이제 가서 좀 쉬자, 응?” 장소월의 귓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에서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용, 봐봐. 진짜 날이 밝았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낸다면, 그녀의 몸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강용은 몰래 그녀의 물에 수면제를 타 겨우 잠들게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그녀는 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소월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 장소월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강용, 내 옆에 있으면 안 돼. 난 널 위험하게 만들 거야. 그리고 현아까지...” 강용은 그녀의 손에서 하던 일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난 위험 따위 두렵지 않아. 그리고 난 서울로 돌아가도 안전하지 않아. 차라리 너랑 함께 있는 게 나아. 장소월, 나 혼자 남겨지지 않게 해줘.” 그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 강용은 알고 있었다. 장소월에게 있어 강용은 친구 그 이상이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치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강용은 그녀가 분명 마음이 약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눈썹을 찌푸린 채 망설이는 장소월의 모습에 강용은 일부러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가씨, 나 버리지 마, 응?”그렇다. 사람들은 지금 강용과 강영수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면, 틀림없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장소월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다른 방법 생각해 볼게.” “좋아.” 오늘 저녁은 모두 장소월이 요리했고, 강용은 옆에서 야채를 다듬으며 그녀를 도왔다. 소현아가 장소월의 잠옷을 입고 내려왔다. 사이즈가 가장 큰 옷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소현아에게는 빠듯해 보였다. “소월아, 오늘 저녁 메뉴 뭐야?” 밑으로 드러난 배꼽을 본 장소월은 옷을 잡아당겨 주며 말했다. “이거 내 옷 중에 제일 큰 건데.”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밥상을 차리고 있는 강용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혹시 새 옷 있어? 내 옷은 안 맞네.” “당연히 없지. 나중에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할게. 우선은 그냥 입고 있어.” 장소월은 그녀의 동그란 배에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단순히 지방 때문에 나온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현아야... 솔직하게 말해봐. 너 혹시 임신한 거야?” 소현아는 천진난만하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
소현아가 말하는 사람은 아마 유월일 것이다. 혹시 그녀의 존재 때문에 강영수가 무언가를 기억해낸 것일까? 그렇다. 지금 강영수는 유월과 결혼한 상태다. 그녀가 계속 옆에 있는 것은 그들의 관계에 악영향만 끼칠 뿐이다. 집에 도착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현아야, 오늘 밤엔 우선 여기서 자. 옷장 안에 옷도 좀 있으니까 샤워하고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저녁 준비할게.” 소현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장소월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냉장고를 뒤져 재료를 찾고 있을 때, 강용이 들어왔다. “정말 저 바보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야?” “강용, 현아 그렇게 말하지 마. 어렸을 때 병을 앓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잖아.” 강용은 어깨를 위로 쭉 올렸다가 내리며 말했다. “알았어. 네가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감싸는데 내가 어떻게 뭐라 하겠어. 하지만 소현아는 다시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아? 쟤랑 같이 있으면 너무 위험해. 자칫하면 우리 위치가 강지훈에게 노출될 수도 있어!” “너도 알다시피 전연우랑 강지훈은 한통속이나 다름없어. 전연우가 해외에 얼마나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재산 대부분을 해외로 넘긴 상태야. 국내 성세 그룹이 망하더라도 전연우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윗선에서 일찌감치 막지 않았다면, 지금쯤 성세 그룹은 아마 성세 글로벌 그룹이 되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장소월은 채소를 썰다 멈추고 물었다. “그게 뭔데?” “전연우는 이미 회사를 팔아넘겼어!” “무슨 뜻이야?” “몰랐어? 전연우는 아주 오래전에 나라에 회사 지분을 넘겼어. 그래서 송시아가 아무리 서울을 헤집고 다녀도 전연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야. 그리고 전연우가 요구한다면, 언제든 지분과 회사 통제권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한낱 성세 그룹 따위는 해외에 두고 있는 재산의 백 분의 일도 안 돼. 지금까지 해외에서 수도 없이 많은 기업들을 인수했거든. 나중에 집안
장소월은 낙일 마을에 길을 잃은 친구가 있으니, 빨리 와서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친구? 낙일 마을에 그녀의 친구가 있었던가?장소월은 강용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녀가 상황파악도 채 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 뛰어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소월아, 소월아, 소월아... 드디어 찾았어. 너무 좋아!” 익숙한 목소리에 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 “현아?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그 바보 아가씨?”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그 광경이 강용의 눈앞에 펼쳐졌다. “강용...” 소현아는 배시시 웃으며 강용을 향해 뛰어갔다. 반가운 마음에 와락 껴안으려 했지만, 그는 팔을 쭉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밀었다. 소현아는 키가 작은지라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겨우 강용의 옷자락만 잡을 수 있었다. “강용, 너도 보고 싶었어. 한 번 안아보자.” 강용은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난 순결한 몸이라서 말이야. 아무나 만지면 안 돼.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소월아, 얘 왜 그사이에 더 멍청해진 것 같냐?” 장소월은 강용을 노려보며 말했다. “강용, 현아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이어 고개를 돌려 경찰에게 말했다. “현아는 확실히 제 친구 맞아요. 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이제 현아 데려갈게요.” 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소현아는 장소월의 팔짱을 끼고 그녀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소월아... 네 몸에서는 여전히 좋은 향기가 나는구나. 정말 보고 싶었어! 이렇게 멀리까지 놀러 왔으면서 왜 난 안 데리고 온 거야?” “현아야, 말해봐. 여긴 어떻게 왔어? 넌 서울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소현아가 대답했다.“응! 근데 강지훈이 나 바보라고 싫다면서 치료받으라고 여기에 쫓아 보냈어. 날 감시하라고 도우미 두 명까지 보냈고. 나 겨우 도망쳐 나온 거야. 소월아,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 그 사람들한테 다시 잡혀가면 끝이야. 나 밥도 못 먹게 하고, 밤마다 수갑으로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리기까지 한단 말이야.
민선화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들 또한 지금처럼 변한 유월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대문이 굳게 닫혔다. 해이는 문밖에 서서 힘겹게 말했다.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모든 걸 똑똑히 알고 난 뒤 다시 올게. 만약 그 여자와 나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것 또한 너한테 다 얘기할게.” 소현아는 바닥에 떨어진 닭 다리를 주웠다. 방금 전 유월이 던진 의자가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닭 다리를 떨어뜨렸던 것이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떨어진 지 3초 안 지났으니까 먹어도 괜찮아.”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유월은 문을 열었다. 텅 비어버린 마당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갔어... 정말 가버렸어!”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서 있는 유월의 모습에 민선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가 말했다. “유월아, 왜 그래? 유월아...” “유월아, 엄마 무섭게 이러지 마!” “유월아, 제발 말 좀 해 봐!” “언니... 왜 그래요.” 민선화가 유월에게 손을 뻗은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 그녀에게 달려갔다.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비추던 달빛이 사라졌다. 달님은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했고, 짙은 먹물 같은 하늘에는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갔지만, 강영수에게는 절대 잠들지 못할 밤이었다... “오늘 밤엔 일단 여기서 자요. 내가 내일... 장소월 씨한테 데려다줄게요.” “네, 강영수 씨.” 소현아는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 몸을 뉘운 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깊이 잠들었다. 강영수는 문밖에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이 집은 그가 유월과 함께 살려고 지어놓은 신혼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유월을 향한 그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규영과 미경은 밤새도록 낙일 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