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원의 주량은 강지현보다 좋았고 강지현은 정말 취해버렸다.호텔로 도착해서도 강지현은 깨지 않았다.오늘 그녀는 성원에서 회의에 참석하느라 강지현이 정유진을 찾으러 간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가 정유진을 찾아간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을 했다.방안의 등불은 어두웠지만 강지현의 이목구비는 매우 뚜렷했다.조예원은 영원히 강지현을 처음 보았을 때의 장면을 잊지 못했다.그는 인테리어를 마치지 않은 마당에 서있었는데 트렌치코트를 입고 등을 길게 늘어뜨린 채 있었다. 마치 중세 시대에서 걸어 나오는 신사 같았다.잠시 침대 머리맡에 서있다가 그녀는 욕실로 가 샤워를 했다.저번에 그녀는 해도 되냐고 물었다가 무정하게 거절당하고 이번에는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처음에 아예 반응이 없다가 한참 지나서야 강지현이 그녀의 키스에 잠에서 깼다.정신이 말짱해진 것은 아니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깬 것이었다.그는 유진 씨라고 하며 조예원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조예원은 처량하게 웃었지만 마음속으로 조금은 기뻤다.다음날 조예원이 먼저 눈을 떴다. 온몸이 욱신거렸다.강지현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얼굴이 약간 창백해 보였는데 어젯밤 마신 술 때문일 것이다.조예원은 혹시라도 그가 깰까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샤워를 하러 갔다.샤워를 마친 후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었던 강지현의 시선과 부딪혔다.조예원은 나름 침착했고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이 단지 잠깐 멈칫한 것뿐이었다. 그리고서는 쇼파의 옷을 주어서 강지현의 앞에서 하나씩 입었다.그녀가 옷을 다 입고 나서 강지현이 말했다.“나한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알고 있어요.”조예원은 그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의 마음속에는 정유진이 있고 집에서는 명문가의 따님들을 소개해 주죠. 저는 당신의 마음속이든 신변이든 제가 설 자리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잘 알고 있으면 다행이고.”조예원은 핸드폰과 가방을 들고 불편함을 참으며 자리를 떠났다.이날 정유진은 현 변
현 변호사와 대화를 나눈 후 정유진은 약간 혼란스러웠다.그보다 더 어이없었다.그녀는 항상 마음속으로 강지찬이 놓지 않는 한 이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한참 커피숍에 앉아 있는데 강민아의 전화가 걸려 왔다.민아는 그녀의 부모님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방문하고 싶었다.정유진은 감히 그녀를 집으로 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노부부가 친척 집에 잠깐 가있어서 집에 없다는 핑계로 강민아를 막았다.강민아도 요즘 주얼리 쇼의 디자인을 맡을 정도로 바빴다. 정유진과 그녀는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며 전화로 한바탕 토론을 했다.정유진은 쇼 디자인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쇼를 본 적이 있고 다지인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어서 강민아에게 여러 가지 귀중한 조언을 해주었다.통화가 끝나고 3시가 조금 넘었을 때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는데, 낯선 번호였다.정유진이 전화를 받자 저번에 한규진의 생일파티에서 한번 뵌 부 사모님이었다.솔직히 그날 정유진이 알게 된 사람이 너무 많이 어떤 사람들은 미처 연락처도 저장하지 못했다. 부 사모님의 집은 문장사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정유진은 부 사모님이라는 분이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부 사모님이 전화한 목적은 집에 인테리어를 하는 작은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마침 정유진의 인테리어 회사가 생각나서 연우 인테리어와 협력하고 싶다는 것이었다.요즘 정유진은 업계에서 여러 주문을 받으니 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부 사모님은 그녀와 공사장에서 만나서 얘기하고 저녁에 다른 동업자들과 식사를 하자고 요청했다.정유진은 시간을 보고 키키를 불러 함께 갔다.가는 길에 키키는 매우 신나 보였다. 요즘 받는 주문의 질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고 이 프로젝트를 잘 끝낸다면 올해 실적은 반드시 좋을 것이라 했다.목적지는 외곽에 있어 조금 멀었다. 다행히도 아직은 낮이 길어 5시라도 어둡지 않았다.하차 후 키키는 어리둥절했다.“대표님, 저희... 잘못 온 건 아니죠?”눈앞에 실제로 건물이 있긴 했지만 짓다 만 폐건물처
정신을 차린 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귀국한 후로부터 늘 운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단지 이번에는 누가 자신을 아니꼬와하는지 모를 뿐이었다.손이 너무 단단히 묶여 있어서 반나절 동안 풀지 못하고 고군분투하였다.금방 앉았는데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정유진은 눈을 부라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말했다.“또 너야?”전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맞아요. 당신이 아직 명성을 잃지 않고 멀쩡히 있는데 제가 당신을 그렇게 그냥 둘줄 알았어요?”정유진은 콧방귀를 뀌었다.“그 부 부인은 당신이 찾은 거예요?”“좋아, 이번엔 강지찬이 당신을 어떻게 구할지 두고 볼게요.”전태연은 이번 행동에 매우 만족했다.사실 문을 파는 부 부인은 진짜였지만 정유진에게 전화를 건 “부 부인”은 가짜였다.정유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전태연 씨, 이번 사태는 아마 회사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 같네요.”이 일만 말하면 전태연은 화가 났다. 정유진에게 넘겨준 인터넷 라이브 회사는 원래 전태연이 연습을 하기로 한 회사였다. 그런데 회사를 넘겨받지는 못하기는커녕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도 났다.전태연이 불쌍한 척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외국에 처박혀있었을 것이다.전태연은 속으로 정유진이 죽기를 바랐다.“오만하지 마요!”전태연이 악랄하게 말했다.“이번에는 전씨 가문을 통째로 잃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철저히 파멸에 이르도록 할 거예요!”그녀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마치고 다시 방을 나갔다.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이 방의 조명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밖은 매우 조용했다. 마치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한두 번 들리는 것 같은 아주 낯선 고요함이었다.정유진은 그가 지금 외곽이나 시골에 갇혀있다고 의심했다.키키는 어떻게 됐을까. 전태연은 자기를 겨냥하는 것이니 키키는 괜찮겠지?이렇게 생각하니 조여오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놓을 수 있었다.정유진 앞에서 한참 과시하던 전태연은 더욱 화가 났다.옆방에는 고세연이 단아하게 앉아 있었다.전태연은 그녀를 보면
강지현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려던 찰나에 의문의 사진을 받았다.사진 속 정유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묶여있었다.사진에는 주소와 함께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됩니다. 혼자 오세요. 큰 깜짝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강지현은 그 문장을 잠시 생각한 후 문자 메시지의 주소로 곧장 달려갔다.다행히도 밤에는 차가 막히지 않아 9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이곳은 도시의 외곽에 있는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강지현의 차는 한적한 마을로 들어섰는데, 대부분의 집은 어두웠고 마을에는 가로등도 없었다.그는 이 지역에 대해 잘 몰랐다. 아마 이런 마을은 거의 대부분이 철거되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가서 살고 과부와 노인 몇 명만 마을에 남아있을 것이다.차가 마을로 들어선 후, 그는 정유진이 어디 있는지 몰라 속도를 늦췄다.한참을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있던 사람이 손전등을 들고 흔들자 강지현은 차를 돌렸다.차는 한 마당에 섰다. 방안에는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차를 내리자 마당에는 젊은이가 몇 명 서있었다.“강지현?”아까 손전등을 들고 있던 젊은이가 시시한 어조로 물었다.“네.”“핸드폰 꺼내.”강지현은 눈썹을 찌푸렸다.“정유진 씨는 안에 있어요?”“안에 있어. 그녀를 만나려면 쉬워. 핸드폰 꺼내.”강지현은 핸드폰을 상대방에게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그 사람은 핸드폰의 통화기록을 확인했다.“신고 안 했지?”“아니요.”강지현은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거실이었다. 집은 허름했고 소파와 테이블도 너덜너덜했다.강지현은 바로 왼쪽으로 꺾어 옆에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정유진이 손을 묶인 채 침대에 앉아 초조하게 방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여긴 왜 왔어요?”정유진은 깜짝 놀라며 강지현의 뒤를 바라보았다.“혼자 왔어요?”강지현은 급히 달려왔다.“유진 씨, 괜찮아요? 다치지는 않았어요?”정유진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혼자 왔어요? 신고 안 했어요?”강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누군가 저녁밥을 넣어주었다.이미 한밤중이 되어 정유진은 배가 고팠지만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강지현이 도시락을 열어보자 꽤 깔끔하고 냄새도 좋았다.그는 젓가락을 정유진에게 건네며 말했다.“먼저 뭐라도 먹어요.”“걱정 안 돼요?”그가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정유진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강지현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고는 다른 도시락도 열고 슬쩍 웃었다.“뭘 걱정해요? 당신만 괜찮으면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어요.”정유진은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태연이 보낸 음식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 여자는 미쳤다. 그녀가 밥에 무엇을 넣을지 누가 알고?강지현은 그녀의 걱정을 보고 다시 도시락을 닫고 먹지 않았다.밖은 매우 조용했고 강지현이 온 지 꽤 되었지만 전태연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제일 안절부절못하는 전태연은 원래대로라면 와서 한바탕 조롱했을 것이다.강지현은 문을 두드리며 바깥을 향해 외쳤다.“물 있어요?”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잠시 후 누군가가 문틈을 통해 물 두 병을 던졌다.강지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사장 불러와요.”물을 갖다주던 문신남이 웃었다.“우리 사장님이 당신이 오라면 오는 사람이야? 가만히 있어.”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문을 잠갔다.강지현은 정유진에게 물을 한 병 건네며 말했다.“사람이 적지는 않네요. 제가 들어올 때만 해도 대여섯 명은 봤어요. 이 마을에는 사는 사람도 적어서 찾기 힘들었을 거예요.”정유진은 걱정에 가득 찼다.“그들이 키키를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어요.”강지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 싶었지만, 그는 손을 뻗던 도중에 멈췄다.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자연스럽기만 하던 행동마저도 가볍게 할 수가 없었다.정유진의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웠다.강지현은 물을 두 모금 먹고 위로를 했다.“아버님, 어머님도 이쯤이면 당신이 사고가 난 줄 알고 신고를 했을거예요.”정유진이 걱정하는 것
강지현의 상태는 점점 악화하여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눈이 충혈되었다.원래 몸이 좋지 않은데 이렇게 괴롭힘당하니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고 당금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유진 씨, 그들과 얘기해서는 쓸모없어요. 얼른 절 묶어요.”정유진도 같이 다급해졌다.“다칠 거예요.”“전 괜찮아요. 당신이...”강지찬은 몸에서 퍼져 나오는 욕망을 힘겹게 억눌렀다. 그는 호흡마저 뜨겁게 불타는 것만 같았다.“빨리 절 묶어요. 제가 나중에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고 당신을 해칠까 봐 두려워요.”정유진은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문을 세게 두드렸다.“전태연, 회사를 돌려줄게, 강지현은 내보내!”전태연이 웃으며 말했다.“정유진, 무슨 농담이에요. 그딴 회사 하나에 제가 당신에 대한 혐오가 사라지겠어요?”정유진은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했다.“생각 잘하세요. 당신이 지금 건드린 것은 강지찬 한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강지현도 건드렸어요. 당신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이 일이 끝나면 강지찬과 강지현이 당신의 가문에게 어떻게 복수할지는 생각해 줬어요?”전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강지찬의 수단은 이미 맛보았지만, 강지현이라는 남자는 보기에는 순해 보이지만 소리 소문 없이 강지찬 몰래 성원이라는 대기업을 육성해 낸 사람이다. 쉬운 사람은 아닐 것이다.전태연은 은근히 화가 났다. 그래서 고세연이 숨어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구나.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 패를 내어주었다.정유지은 또 얘기를 꺼냈다.“저는 당신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확실히 좋은 의도가 아니라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전태연 씨, 강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전씨 가문인데, 만약 전씨 가문이 강씨 가문을 건드린다면 여전히 예전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세요?”문밖의 전태연은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녀의 발걸음은 서서히 멀어져갔다.사실 전태연은 불려 간 것이었다. 고세연은 마음속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쓰레기 같은 것이라고 백번도 넘게 욕을 했다.
정유진은 밧줄을 든 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십 년?강지현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제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영원히 모를 거예요!”강지현은 흥분하기 시작했다.“그해 학교 축제에서 당신과 함께 춤을 췄던 사람 아직도 기억해요? 저예요! 저라고요!”“그 짧았던 4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그날 지옥에서 저를 구해줬고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게 해줬어요.”“그런데 당신은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한빈 그 쓰레기 새끼가 어떻게 당신과 사귈 자격이 있는 거예요?”“그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강지찬을 만나지도 않았을 거고, 그가 아니었다면 저는 당신과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빗겨나가지 않았겠죠.”정유진은 머릿속이 살짝 혼란스러웠지만 어렴풋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났다.“지현 씨 말은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이미 절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네!”강지현은 갑자기 덮쳐왔다.“유진 씨, 제가 스스로 얼마나 자책하는지 알아요? 그때 왜 제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는지, 왜 가서 물어보지 않았는지, 왜 한빈에게서 당신을 빼앗지 않았는지?”강지현은 정유진을 너무 꼭 잡은 탓에 정유진의 어깨가 조금 아팠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그의 상태가 걱정되었다.“먼저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요...”“진정 못 해요!”강지현의 목소리가 커졌다.“왜 강지찬의 곁으로 돌아가고, 왜 강지찬이랑 자는 거예요? 당신 이혼하려던 거 아니었어요?”이 일은 정유진에게 정말 낯부끄러운 일들이었다.그녀는 강지현의 손을 떼려 했지만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절 밀어내지 마요, 유진 씨. 제발 절 밀어내지 마요!”강지현은 그녀의 목에 키스를 하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그와 잤다는 건 상관없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잘 알아요. 유진 씨, 좋아해요. 제가 이혼 소송 도와드릴게요, 평생 잘해줄게요...”“놔줘요!”정유진은 깜짝 놀랐다. 목에 닿은 뜨거운 키스에 두피가 마비될 정도였다.강지현은 몸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키
강지현이 고통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고 정유진은 만감이 교차했다.유리 조각이 상처에 꽂혀있는 탓에 피가 덜 나긴 했지만, 조각을 빼면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정유진은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먼저 말하지 마요.”그녀는 이런 상태의 강지현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이봐요, 강 대표님이 다쳤어요.”그녀는 문을 세게 두드렸다.“전태연, 정말 사람 죽는 꼴 보고 싶어?”전태연 쪽은 강지현이 자기를 해치면서까지 정유진에게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당신이 저 둘 사이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했잖아요? 이제 어떡해요?”고세연은 이가 갈릴 정도로 화가 났다. 정유진이 대체 뭐가 좋다고 남자들이 그녀에게 그렇게 충성인 걸까?“강지현이 정유진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냥 가야죠.”전태연은 어이가 없어서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네? 그냥 간다고요? 제가 갖은 수를 써서 사람을 잡아 왔는데, 지금 아무 일도 안 일어났고, 저희는 그냥 간다고요?”고세연은 경멸의 눈빛으로 전태연을 흘겨보았다.“의심병이라는 게 뭔지 알아요? 강지찬은 강지현과 정유진의 관계를 의심해서 둘 사이에 계속 모순이 생기는 거예요. 이번엔 정유진을 패가망신으로 몰고 가지는 못하지만, 강지찬이 오면 강지현이 정유진에게 흠뻑 빠진 모습을 보고 또다시 의심병이 도지지 않겠어요?”전태연의 눈이 반짝였다.“맞네요! 서로 물고 뜯게 만드는 게 더 재밌죠!”고세연은 대답조차 하기 귀찮았다.강지찬에 의해 강홍식과 억지로 결혼하게 된 후, 그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경우의 수를 남겨두려고 했다.정유진은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떠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마당 밖에서 자동차 시동 소리가 들려왔다.“그들이 떠난 것 같아요.”정유진은 이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강지현은 매우 허약하게 숨을 헐떡였다.“전태연과 한통속인 그 사람은
현채영이 잠에서 깼을 때 최신애는 점심을 거의 다 먹은 상태였다.“어머니, 점심 먹을 때 부르라니까요. 왜 안 부르셨어요?”최신애는 우아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깼잖아?”“그래도 불렀어야죠. 그러다가 배를 곯으면 유한 씨가 어머님을 나무랄 거예요.”최신애는 테이블을 내리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현채영이 밥 먹으면서 음식 투정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야채가 너무 많네요. 이 음식은 아무 맛이 안 나요.”최신애는 겨우 화를 참았다.“내가 나이가 들어 입맛이 담백해졌어. 못 먹겠으면 이 집에서 꺼져도 돼. 널 불잡을 사람 아무도 없을 테니.”현채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유한 씨가 얘기했잖아요. 저는 짭짤하면서도 단 것을 좋아해요. 탕수육 같은 거 좋아하니까 다음번에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 주세요.”하인은 최신애의 눈치를 살피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현채영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한마디 했다.“왜요? 밥 먹는 것조차 어머님이 허락해야 먹을 수 있는 거예요?”현채영이 젓가락을 두드리는 소리에 최신애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하고 놓았다.“네가 뭔데 감히 내 앞에서 테이블을 내리쳐!”최신애가 격노했다.“현씨 집안이 이 지경으로 전락한 게 다 이유가 있었어. 정말 교양이 하나도 없네!”그 말에도 현채영은 화를 내는 대신 ‘흥’하고 콧방귀만 뀌었다.“최씨 가문 식구들은 교양이 있어서 성격이 이렇게 모났나 봐요. 유일한 친아들마저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너 정말...”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여봐라, 어른은 안중에도 없는 이 여자를 쫓아내라.”“누가 감히 할 수 있는지 나야말로 보고 싶네요.”현채영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어머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걸 힘들어하면 유한 씨도 같이 나간다고 했어요. 집도 이미 다 장만했어요.”“뭐라고?”최신애는 어리둥절해 했다.“너에게 집도 사줬어?
“유희야, 네가 잘못 짚은 거 아니야? 유한이가 현채영에게 점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아.”최신애는 분통을 터뜨렸다.“강지아에게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저게 연기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일부러 강지아를 괴롭혔는데 전혀 반응이 없잖아.”임유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 예상이 맞아요. 현채영은 유한 오빠가 저와 어머니를 상대하기 위해 일부러 데려온 거예요.”“그런데 강지아는 서원준과 사귀고 있잖아.”최신애는 임유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온유한이 강지아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떻게 강지아보다 현채영에게 더 잘할 수 있겠는가?강지아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지켜보기만 한다고?온유한의 성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것은 참지 못할 것이다.“유희야, 일단 허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유한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해. 유한이가 너를 진짜로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한테 화내는 거야. 너는 너무 착해. 현채영 그 여자를 봐, 하루 종일 유한에게 붙어서 별짓을 다 하잖아.”임유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현채영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온유한이 하루 종일 현채영과 붙어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힘들었다.다음 날 아침 현채영은 또 늦게 일어났고 온씨 가족이 식사가 끝난 뒤에야 방에서 나왔다.“아버님, 어머님, 임유희 씨, 굿모닝.”그러더니 온유한의 볼에 입까지 살짝 맞췄다.“유한 씨, 좋은 아침.”온씨 집안사람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임유희는 입에 넣은 밥을 뱉어내고 싶을 정도였다.온유한이 현채영의 손을 잡더니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졸려서 밥 먹기 싫다며? 네 아침은 남겨놨으니 피곤하면 좀 더 자고 일어나서 먹어도 돼.”“출근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꿀을 탄 듯 달콤한 현채영의 목소리에 최신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다.“먹을 거야, 말 거야? 안 먹을 거면 꺼져, 아침부
“쇼핑 더 할 거야?”화령의 두 손에도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맞은편 가게에서 현채영이 치마를 입어보고 있었고 온유한이 그녀의 어깨끈을 고쳐주고 있었다.“이제 가자. 거의 다 샀어.”강지아가 말하는 순간 화령은 무슨 생각이 난 듯 한마디 했다.“곧 금성 씨의 생일이라 선물 좀 사야 할 것 같아. 같이 골라줘.”두 사람은 남성복 가게에 갔다.최금성은 항상 이 브랜드의 옷을 입었기에 가게에도 그의 옷 사이즈가 있었으므로 화령은 스타일만 고르면 되었다.양복과 셔츠 외에 화령은 넥타이도 골랐다. 총 2천만 원이 넘었다.“서 대표에게 뭐 안 사줘도 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는 멍해졌다.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필요 없을걸?”두 사람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강지아도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는 강지아지만 여자친구로서 주는 거라면... 왠지 이상했다.화령은 서원준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사람이 재미있기도 하고 강지아에게 일편단심이었다. 듣는 소문에 의하면 부모님의 인품도 좋다고 했다.“서원준에게 아무거나 하나 골라줘 봐. 요 몇 년 동안 일이 없을 때마다 날아가서 너와 같이 있어 주고 그랬잖아. 알 사람들은 다 알아.”화령의 말은 사실이었다.강지아는 어쩔 수 없이 서원준을 위해 은회색의 패셔너블한 넥타이를 골랐다.“괜찮아?”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는 것이었기에 강지아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잘 어울리겠지?”“당연히 잘 어울리지. 서 대표가 얼마나 스타일리쉬한데. 이런 컬러 잘 어울려.”강지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사기로 결심하고 종업원에게 건넸다.“이거 포장해 주세요.”뒤돌아선 순간 온유한과 현채영이 어느새 가게에 들어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현채영이 온유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유한 씨, 넥타이 사기로 했잖아. 내가 골라줄게.”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며 강지아의 옆을 지나갔다.종업원은 강지아와 화령의 물건을 재빨리 포장했다. 이
“강지아 씨, 이 치마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지아 씨처럼 피부가 뽀얀 사람들만 소화해낼 수 있을 거예요.”종업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평소 이런 색상을 거의 입지 않은 강지아마저도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그래요. 이걸로 살게요.”이때 옆에 있던 임유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치마가 정말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요.”그러자 최신애가 말했다.“그럼 사.”임유희를 본 종업원은 미안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죄송합니다. 이 치마는 저희가 새로 출시한 한정판 신상품이라 사이즈별로 한 벌씩밖에 없어요. 고객님도 S사이즈시죠? S사이즈는 더 없습니다. 대신 다른 스타일로 추천해 드릴게요. 저희 가게에...”“다른 스타일 말고 저걸로 줘.”최신애의 말에 종업원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강지아는 상대하기 귀찮았다. 두 집안이 이미 인연을 끊었기에 굳이 인사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드레스 룸에 가서 다른 치마로 갈아입었다.한편 최신애는 아직도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내가 이 가게 VIP야. 지금 이 치마가 마음에 들어서 입어보겠다고 하잖아.”종업원은 골치가 아팠다.한편 다른 치마로 갈아입고 나온 강지아와 화령은 최신애가 없는 셈 치고 즐겁게 계속 쇼핑을 했다.강지아가 옷을 잔뜩 골라 종업원에게 주며 포장해달라고 했다.최신애는 빨간 치마를 뺏어오기로 마음먹은 듯 종업원이 포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빼앗아서 임유희에게 건넸다.“유희야, 입어 봐.”임유희가 치마를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가려 하자 강지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서 말했다.“이 치마는 제 거예요.”임유희도 물러서지 않았다.“아직 돈을 내지 않았잖아요. 그럼 당연히 강지아 씨의 것이 아니죠.”“내가 먼저 결정한 것이고 이미 사겠다고 얘기도 끝났어요. 대학교수면 누가 먼저인지 기본 도리는 알지 않나요?”“강지아 씨보다 내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단아한 분위기의 임유희에게 빨간 치마가 더 잘 어울린다고?강지아는 피식 웃었다.“본인이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해장국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던 임유희는 외출하려던 온유한과 마주쳤다.“유한 오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는 거예요?”온유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무시해 버렸다.명성 빌딩.늦게 집에 들어온 진수혁은 거실 소파에 검은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불을 켰다.“왜 또 왔어?”자기 집이 아니었기에 진수혁도 함부로 비밀번호를 변경할 수 없었다.하지만 온유한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게다가 온유한은 술까지 마셨다.온유한의 발 옆에는 이미 여러 개의 맥주 캔이 놓여 있었고 손에도 캔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지아의 발목 문신도 그쪽이 지운 거야?”“응.”진수혁이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문신 지울 때 많이 아파?”“어떨 것 같은데?”“지아가 울었어?”“울진 않았어.”온유한이 맥주를 계속 마시자 진수혁도 마시고 싶은 마음에 냉장고를 열었지만 한 캔도 남아 있지 않았다.진수혁이 화가 나서 말했다.“내 싸구려 맥주가 그쪽 같은 부자들이 마신다니 참으로 영광이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가게가 어디야?”“뭐?”진수혁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이 연락처를 교환한 뒤 진수혁은 가게 위치를 온유한에게 보냈다.주소를 확인했음에도 온유한은 집에 가지 않은 채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잠들기 전 진수혁에게 한마디 했다.“내가 여기 있다고 지아에게 말하지 마.”진수혁은 어이가 없었다.재벌가들의 사랑싸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며칠 후 강지아는 서원준과 함께 진수혁을 찾으러 갔다.빨갛게 부어오른 피부가 다 낫자 흉터가 다시 드러났다.서원준은 옆에서 문신을 하는 아가씨가 아파소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는 강지아를 잡고 말했다.“그냥 안 하는 게 어때? 흉터가 크지 않아서 별로 티도 안 나. 진짜로.”진수혁이 서원준을 쳐다보며 말했다.“이분은...”“지아의 남자친구 서원준이에요.”“안녕하세요.”진수혁은 별다른 말 없이 강지아를 향해 물었다.“할 거
현채영의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나서 가버렸고 임유희도 곧장 그녀의 뒤를 따랐다.집안에 들어서기 전, 뒤에 있던 임유희가 불쑥 물었다.“현채영 씨, 유한 오빠 입술에 난 상처... 진짜 현채영 씨가 그런 거예요?”현채영은 걸음을 멈춘 뒤 뒤돌아서 임유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니면 임유희 씨가 그랬겠어요?”임유희의 눈빛은 아주 차분했다.“유한 오빠와 만나는 척하지만 현채영 씨에게서는 한 번도 키스 마크를 본 적이 없어요. 현채영 씨의 향수 냄새는 아주 강하지만 유한 오빠에게서는 한 번도 진한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고요. 늘 은은한 향수 냄새 그대로죠.”현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임유희가 계속 말을 이었다.“오늘 저녁 강씨 가문 생일잔치에 간 거죠? 유한 오빠도 누구를 만나려고 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강지아 씨가 돌아왔나요?”현채영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역시 임유희 씨, 대학 선생님답게 꼼꼼하네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강지아 씨가 온 것은 맞지만 그게 유한 씨와 무슨 상관이죠? 유한 씨는 아이를 보러 간 거예요. 유한 씨가 옛 친구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유희 씨도 잘 알잖아요.”그러자 임유희가 말했다.“그래요? 유한 오빠 입술 상처도 강지아 씨가 낸 거죠?”현채영은 일부러 놀란 척하며 눈을 크게 떴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두 사람 오래전에 헤어졌어요.”임유희가 계속 물었다.“현채영 씨 역할이 뭔가요? 목적이 대체 뭐예요? 돈 때문이에요?”현채영은 박수를 쳤다.“임유희 씨, 상상력 하나만은 정말 탄복할만하네요.”“내가 돈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라면 어머님이 주신 20억 원을 왜 안 받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 목적은 온유한이라는 사람 곁에서 온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런데 임유희 씨는 왜 온씨 가문에 빌붙어 사는 거죠?”임유희가 말했다.“온유한 씨가 좋아서요.”현채영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따지고 보면 임유희 씨도 너무 불쌍해요.
강지아가 서원준과 사귀는 것에 대해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유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온미정은 옆에 있는 온유한을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유한이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정유진의 얼굴에는 근심이 다분했다.“그냥 다들 더 이상 시끄러운 일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이때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뜨거운 그의 손바닥과 달리 강지아의 손은 약간 차가웠다.생일파티에 워낙 일이 많았고 또 강지아도 더 있을 마음이 없었기에 정유진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한 사람이 뒤따라 차를 탔다.익숙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온유한은 동하민이 앞 좌석에 타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강지아에게 다가갔다.“일부러 그런 거야?”강지아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서원준은 몇 년째 나만 기다렸어.”온유한이 가만히 있자 앞 좌석에 있던 동하민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온 선생님, 여자친구도 몇 명씩이나 있는 분이 우리 대표님에게 왜 이러세요?”강지아도 한마디 했다.“이만 내려줘. 오빠 여자친구나 내 남자친구가 보면 안 되지 않을까?”온유한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강지아를 매섭게 쳐다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차에서 내린 뒤 문을 쾅 닫았다.강지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동하민이 말했다.“대표님, 온 선생님,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몰라.”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강지아가 떠나자마자 온유한과 현채영도 자리를 떴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본 최신애와 임유희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더니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유한 오빠가 좀 다친 것 같아요. 어머님, 유희 씨, 신경 쓰지 마세요.”“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천한 년!”최신애가 손을 들어 때리려 하자 온유한이 막아 나섰다.“그만 하세요!”큰소리로 외친 온유한은 기분이 언짢은
목욕 타올을 두르고 있는 강지아는 왠지 낭패한 모습이었다.서원준 얼른 깨끗한 목욕 타올을 가져와 그녀를 감쌌다. 화가 난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일부러 나를 놀래키려고 이러는 거야?”“오버하지 마.”강지아가 웃으며 말하자 서원준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웃긴 뭘 웃어! 웃기 싫으면 웃지 마. 아닌 척하지 마.”온몸이 축축한 것을 보니 문신을 지운 곳에도 물이 닿은 것 같았다.“너 정말, 나 그만 걱정시키면 안 돼?”서원준은 동하민에게 전화를 걸어 약을 사 오라고 했다.강지아는 자신의 발목을 힐끗 본 뒤 한마디 했다.“이왕 젖은 김에 그냥 샤워나 해야겠어.”서원준은 문밖에 서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발목에 물이 많이 닿으면 안 되니까 빨리 씻어.”욕실 문이 닫히는 순간 강지아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다시 옅어졌다.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동하민만 있었다.“대표님, 온 선생님이 왔다면서요?”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안색도 별로 안 좋았다.“내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너와 상관없어.”이런 곳을 워낙 잘 알고 있는 온유한이였기에 강지아를 찾는 것은 매우 쉬웠을 것이다.“서원준은?”“급할 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어요. 절대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강지아가 화장대 앞에 앉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뭘 하길래 말도 안 하고 간 거야?”온유한이 사라진 지 20분이 되었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입술에 상처가 생겼다.그의 입술을 본 현채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사실 현채영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온 부원장이 현채영 씨를 많이 사랑하나 봐요.”“어떤 여자들은 겉으로는 청순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온 부원장이 이런 것을 좋아하네요. 어쩐지 현채영을 자기 여자라고 하더니. 임유희나 강씨 가문 아가씨는 본인 입맛과 안 맞았나 봐요.”그러자 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온유한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예전에 온유한은 항상 속삭이는 말투로 부드럽게 말을 했지만 지금 온유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강지아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싫은 거 아니야. 하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강지아는 익숙한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3년 사이 온유한은 살이 조금 빠진 것 외에 변한 게 없었다.달라진 것을 굳이 짚으라고 하면 기질일 것이다.온유한만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었고 오롯이 차가운 느낌만 들었다.“나와 엮이기 싫어서 문신을 지운 거야?”뻔히 알면서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은 갑자기 손을 뻗더니 강지아의 턱을 잡고 말했다.“문신 지울 때 안 아팠어?”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나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팠어?”강지아의 눈빛이 변했다.온유한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깜짝 놀란 강지아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너무 거친 키스에 강지아는 온몸이 부서질 듯했다.감정이 북받친 키스에 강지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두 사람의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그제야 강지아를 놓아준 온유한은 깨물린 입술에 어느새 피가 나고 있었다.“미쳤어?”강지아는 얼른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뒤 멀찌감치 떨어졌다.온유한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지만 상처가 깊어서 그런지 다시 피가 솟구쳤다. 지금의 온유한은 정말로 점잖은 망나니 같았다.“미쳤냐고?”온유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강지아를 보며 말했다.“전에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뭐.”가슴이 심하게 출렁인 강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싫어. 이러지 마... 싫다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아는 욕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런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더욱 자극이 된 듯 그녀를 쫓아가려 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