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욱은 무심하게 대답했다.“아가씨 구조될 때 내가 말씀드렸어요.”“네, 이분... 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전 먼저 나가볼게요.”왠지 지아는 의사가 마치 도망치듯 문밖으로 빠르게 나가는 것 같았다.강욱은 침착하게 말했다.“아가씨, 먼저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제가 가서 생강차를 가져다드릴게요.”“그래요.”방에 두 사람만 남은 상태에서 지아는 조심스럽게 소망의 옷을 벗겼는데, 이미 또래 아이의 키를 따라잡아 조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손의 작은 상처를 제외하고는 몸도 하얗고 깨끗해서 전효가 잘 돌봐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아는 큰 남자 셔츠로 소망을 감싸고 자신도 옷을 갈아입었다.그녀에게 건네진 옷도 같은 사이즈의 셔츠였는데, 허벅지 밑을 덮을 정도로 아래로 처진 길이가 더 길었다.지아는 서둘러 남자 바지를 입었다. 헐렁했지만 입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몇 분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와요.”강욱은 생강차 외에 몸에 좋은 음식도 몇 가지 들고 왔다.“아가씨, 좀 어때요? 불편한 건 없나요?”지아는 딸과의 상봉으로 감격에 겨워 그제야 추위를 느꼈다.“좀 춥네요.”“추워요?”강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방은 이미 열기가 충분히 틀어져 있었고, 셔츠를 입고도 더위를 느끼는데 그녀는 춥다고?’지아가 추워하는 것을 본 강욱은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생강차를 건넸다.“몸을 따뜻하게 하려면 따뜻한 것을 마셔야죠.”“네.”지아는 단숨에 꿀꺽 삼킨 뒤 강욱이 여전히 젖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왜 아직 옷을 안 갈아입었어요? 감기 걸릴 텐데.”“전 건강해서 감기도 잘 안 걸려요. 일 다 끝나고 갈아입어도 늦지 않아요. 건장한 남자에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지금 상황은 어때요?”지아는 이번에 다른 아이에게 애착을 보였다.강욱이 차분하게 설명했다.“군함과 해적들이 아직 포격을 주고받고 있어 전투가 좀 치열하지만 걱정 말아요. 맹씨 아저씨 선체가 포탄
천천히 얼굴에 붙은 얇은 막을 떼어내자 입체적인 그의 오관이 고스란히 거울에 비쳤다. 몇 달 동안 햇빛을 보지 않은 탓에 원래도 하얀 피부가 핏기가 전혀 없었고, 셔츠 앞섬이 다소 열려 있었다.중세기 뱀파이어처럼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이었다.그는 맨발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열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샤워기의 물이 쏟아지며 검은 액체가 흘러나왔다.그가 다시 걸어 나왔을 때, 그에게서 풍기는 권위적인 기운을 숨길 수 없었다.가면 단추를 채우고 제복을 입은 후 지휘실로 곧장 걸어갔다.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다들 길을 비키며 군인 자세로 똑바로 서서 경례했다.“장관님.”이도윤이 큰 보폭으로 걸어 들어오자 평소 호탕하게 굴던 진봉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장관님, 해적선은 침몰했고 해적들 중 일부는 구명뗏목을 타고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습니다.”“단 한 명도 남기지 마.”“네.”“화물선 상황은 어때?”“저희 형님이 방금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 안전하게 지킬 겁니다.”도윤은 울타리 옆에 있던 작은 꼬맹이를 떠올리며 걱정과 불안이 교차했다.당시 그 상황에서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아의 안위에만 정신이 팔렸었다.아이가 살아있다는 생각에 그는 행복하면서도 다소 긴장했다.조금 전 일부러 떠보았을 때 지아가 그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으려는 걸 보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그런 지아가 자신이 두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놔둘 리 없었다.치열한 전투 끝에 해적들은 모두 생포되거나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고,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했다.맹국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 부처님께 비느라 바빴다. 오늘 정말 운이 좋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목숨은 끝장났을 것이었다.화물 빼앗기는 건 둘째 치고, 해적이 배에 오르면 모두 죽을 운명이었을 테니까!일찍이 배를 운영할 때 해적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악마들의 수법을 겪은 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오늘 운 좋게 군함
도윤이 군함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지아는 고열에 정신이 혼미한 채 온몸이 뜨거우면서도 춥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군의관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관님, 소지아 씨에게 이미 약을 먹였지만, 현재 특별한 상황이라 열이 내리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다행히 군함에는 의료 장비가 가득했고, 도윤은 지아의 곁을 지키며 열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아직 날이 밝지 않아 밖은 여전히 회색빛이 감돌았고, 바다의 포효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도윤은 옷을 덮고 지아 옆에 누워 안쓰러운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그동안 두 사람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도윤은 항상 다른 사람인 척해야 했고, 지아를 똑바로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않아서 그녀의 의심을 여러 번 샀다.다행히도 도윤은 굳건한 멘탈로 잘 숨길 수 있었다.도윤은 손을 뻗어 조용히 잠든 지아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피부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체온은 펄펄 끓고 있었다.솜털처럼 삐쭉 솟은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며 이도윤은 더욱 자책했다.그는 나지막이 속삭였다.“지아야...”지아는 무슨 꿈을 꾸는지 이마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어눌한 말을 내뱉었다.도윤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여기 있으니까.”지아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김민아와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났던 그 해로 돌아갔다.그때 두 사람은 젊고 활기차고 기운이 넘쳤으며, 세계의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다짐했다.그날 밤, 바다는 풍랑과 폭풍우가 몰아쳤고, 호화 유람선은 난파되어 바다에 빠져버렸다.지아는 공포에 질려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바로 그때 하늘에서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내려와 자신의 귓가에 속삭였다.“겁내지 마, 나 여기 있어.”남자의 팔은 강하고 힘차게 자신의 허리를 꽉 움켜잡고 있었다.지아는 당황한 나머지 남자의 목을 껴안고 그와 함께 떠올랐다.분명 낯선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 강한 안정감을 주었다.당시만 해도 순박하고 착했던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가벼운 소리는 도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황급히 지아에게서 떨어진 도윤.‘뭐 하는 거야, 지아가 자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지금 지아가 깨어났다면 아무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도윤은 잘생긴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띤 채 재빨리 문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진봉은 눈을 비볐다.‘착각인가? 왜 그의 얼굴이 빨개진 것 같을까?’“그... 의사가 해열제를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 사모님께 먹이세요.”“그래.”도윤은 조용히 건네받았다.“그 사람 찾았어?”“밤에는 바닷바람이 많이 불어서 드론을 조종할 수 없어요. 아직 행방을 찾지 못했지만, 어린 도련님과 함께라면 멀리 갈 수 없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알았어. 무슨 소식 있으면 알려줘.”“알겠습니다.도윤은 문을 다시 닫고 지아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지아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마에 손을 얹어도 열이 내릴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도윤은 손에 든 해열제를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열제를 먹여야 할까?’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도윤은 약을 으깨서 지아의 입에 조심스럽게 넣어주었다.지아는 처음엔 낯선 이물감에 거부감을 드러내다가 점차 약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마침내 약을 삼킨 것을 확인한 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아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이제 도윤과 지아의 관계는 아는 사이일 뿐 서로 만나고 싶지는 않은 사이였다.다른 방으로 걸어가면서 도윤은 포대기를 두른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지윤의 얼굴에 익숙했던 도윤은 똑같은 그 얼굴을 여자아이가 하고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손가락으로 작고 말랑한 소망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도윤은 혹여 힘으로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다.지아는 깃털처럼 아주 작았다.서서히 작은 속눈썹이 가볍게 떨려오며 도윤이 미처 떠나기도 전에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의아함이 가득한 소망의 눈빛에 도윤이의 마음은 감정에 격렬하게 휘둘리고 있었다.“아가, 그동안 많이 고생 했지?”‘고생?’고생이 뭔지 몰랐던 소망이는 아빠, 오빠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는 것만 알았다.“참, 배 안 고파?”도윤은 서둘러 맛있는 음식과 음료를 가져다주었다.역시나 어린아이였던지라 두 눈이 단번에 반짝거렸다.소망은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찬 식탁을 바라보며 막 밝아지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오빠.”도윤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하지 마. 이미 사람을 보내서 오빠를 데려올 테니 곧 오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얼른 먹어. 오빠가 오면 또 줄게.”소망이는 분명 배가 고팠지만 그렇다고 허겁지겁 먹지 않는 걸 보아 태생적으로 귀티가 났다.외모는 자신과 닮았지만 행동은 엄마의 우아함을 물려받은 듯했다.도윤은 소망을 바라볼수록 마음이 들떴고, 당분간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더라도 아이가 살아있고 옆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음식을 한참 먹던 소망은 남자가 먹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자 살갑게 도윤 앞에 과자를 내밀었다.“삼촌도 먹어요.”그 간단한 행동에도 도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다시 한번 도윤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착하기도 하지.”소망은 삼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싫지는 않았다.도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삼촌 잘생겼다.’이윽고 도윤은 차분하게 생선 가시를 발라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이야기를 들려주며 곧 오빠가 올 거라고 안심시켰다.사탕까지 가져다주는 삼촌을 소망이는 무척 좋아했다.하늘이 밝아지고 바다는 다시 잔잔해졌다.폭우가 그치고 드디어 하늘이 맑아졌다.지아는 열이 내렸다가 오르기를 반복하며 며칠 동안 앓았다.마침내 배가 정박해 한 섬에 멈췄다.더 이상 배가 흔들리지 않자 지아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눈을 뜨자마자 창밖으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지아는 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지
지아는 불안한 얼굴로 급히 손을 뻗어 도윤의 소매를 붙잡았다. “뭐라고요? 누가 어디로 데려갔어요?”“지아 씨, 일단 진정하세요. 천천히 말씀드릴게요.”도윤은 감시카메라 영상을 꺼내 보여주었다.“여기, 이 남자가 데려갔는데 영상 보면 해경이가 원해서 데려간 것 같아요. 아는 남자인 것 같은데.”도윤의 말에 겨우 진정한 지아는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배경이 흐릿했지만, 아이가 원해서 간 게 맞았고 데려간 사람은 전효였다.아이를 데려간 사람이 전효라는 것을 알고 지아는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어쨌든 당시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효는 자신이 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소망을 구하기 위해 뛰어내렸으면 두 아이를 모두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분명 누군가가 아이를 구하러 내려간 것을 보고 몰래 배에 올라탔을 텐데, 끔찍한 결말을 피하고자 소망을 뒤로하고 해경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아이를 찾았지만 곧바로 이별의 아픔을 마주한 지아의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그럼... 그...”도윤은 덧붙였다.“여자애 이름은 소망입니다.”“소망이.”지아는 부드럽게 중얼거렸다.처음엔 많은 이름을 생각하다가 아기를 조산한 탓에 결국 이름을 짓지 못했다.전효가 소망과 해경이라는 좋은 이름을 지어준 줄은 미처 몰랐다.“아이 어디 있어요?”“옆 방에요. 데려다줄게요.”지아는 허약한 몸을 잊은 채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다행히 도윤이 재빨리 잡아줬고, 지아는 그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도윤의 품에 안겼다.머리가 어지러웠던 지아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없었다.“지아 씨,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요. 제가 안아서 데려다줄게요.”지아는 딸을 빨리 보고 싶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알았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몇 달 만에 의식 있는 상태에서 남자와 가장 가깝게 맞닿은 순간이었고, 지아의 눈에 그는 여전히 정직하고 장난기 섞인 임강욱이었다.낯선 남자의 품에 안
소망은 지아를 한 번도 본 적 없어도 타고난 혈연은 끊을 수 없었다.전효가 지아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사진 속 지아는 따뜻한 미소를 지은 채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뼈만 앙상하고 수척했던 지금과는 달랐지만 소망은 그래도 바로 엄마를 알아봤다.지아도 도윤과 같은 반응을 보이면서 눈물을 흘리며 소망을 꼭 껴안았다.재회의 기쁨에 눈물이 났고, 아이를 안으니 지아는 아이를 낳던 날 겪었던 고통이 떠올랐다.평생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이가 이렇게 커서 말랑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나.소망은 의아했다. 며칠 전만 해도 잘생긴 삼촌이 자신을 껴안고 울었는데, 이젠 엄마도 그렇게 운다.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소망은 지아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호호 불었다.“울지 마요.”전에 아플 때마다 전효가 이렇게 불어주면 아이는 울음을 그치곤 했었다.지아는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섬세한 눈망울이 도윤과 쏙 닮았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웠다.“이름이 소망이 맞지?”어린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소망이에요.”전효는 오빠가 타오르는 태양처럼 밝고 찬란하고, 동생은 하얀 달처럼 고결하고 순수하기를 바랐다.지아는 멈췄던 눈물을 다시 흘리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을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눈매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그래, 아주 예쁜 이름이네.”소망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예쁘다면서 우는 걸까?’소망이는 작은 손을 내밀어 지아의 솜털 같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지아는 황급히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엄마가 아파서 머리가 다 빠졌어. 나중에 다시 자랄 거야.”지아는 아이를 다시 품에 안았다.“앞으로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알았지?”소망이 덧붙였다.“오빠.”“그래, 엄마가 오빠를 찾으면 우리 가족 다시 만나게 될 거야.”이 말을 들은 소망이는 웃다가 그날 도윤이 오빠를 찾아주겠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삼촌.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생각에 지아는 아이를 더욱 꽉 잡았다.힘들게 되찾은 아이들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호해야 했다.지아는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이제 그녀가 할 일은 자신의 몸을 잘 돌보고 몰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었다.범인이 잡히지 않는 한 숨어야 했고,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두 아이까지 위험에 처할 것이다.‘하지만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숨어야 하는 걸까?’그녀는 결백한데 왜 아이들은 평생 빛을 보지 못한 채 길거리 쥐새끼처럼 숨어 다녀야 하나.모든 사건의 원흉이 자신의 결혼 생활을 파탄 내고, 가족들을 죽이고, 아이들과 헤어지게 하며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다.강미연의 죽음이 결코 잊히지 않았다.지아는 그 사람을 찾아내서 예전에 당한 고통을 천 배로 갚아주겠다고 다짐했다!도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제가 선을 넘었네요.”지아가 서늘한 기색을 거두었다.“그쪽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에요.”지아는 어떤 설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지내지 않을수록 헤어질 때 덜 슬플 테니까.하지만 가족의 연은 끊을 수 없었다.지아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엄마랑 밥 먹을까?”“좋아요.”아이는 흔쾌히 답했다.지아가 손을 내밀자 소망이는 순순히 지아의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그 순간 지아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차마 힘도 주지 못하고 작고 말랑한 소망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며칠 밤낮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딸을 찾았다.지아가 너무 천천히 걷자 도윤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지아 씨, 제가 도와드리는 게 낫겠어요. 그러다 넘어져요.”지아는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거절하지 않았다.“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별말씀을요.”도윤은 지아의 팔을 잡고 움직일 수 있도록 지지대 역할을 했다.그 순간 지아의 정신은 온통 아이에게 쏠려 있었고, 도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지아가 아이를 바라보는 동안 도윤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비록 서로를
소상현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의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영향을 받아 소지훈 역시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형들보다 뒤처진다는 열등감과 질투심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말이다. 그래서 소지훈은 연예계로 진출했는데, 스타가 되면 가장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뜨거운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 소임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소지훈은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맥 하나 없는 상태에서 연예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임호는 그런 소지훈을 위해 아무 말 없이 훌륭한 매니저를 은밀히 붙여 소지훈이 어떤 부당한 대우나 불합리한 관행에 휘말리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했다.게다가 소지훈이 직설적인 성격 탓에 적을 많이 만들어도, 그때마다 소임호가 뒤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소임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지훈에게 맞춤형 성공 전략을 만들어 주었으며, 소지훈이 맡을 작품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고르기도 했다.그 결과, 소지훈은 단번에 톱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스캔들 하나 없이 꾸준히 높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상현 부자의 성공 뒤에는 늘 소임호가 있었다. 하지만 소상현 가족과 달리, 소영수의 셋째 아들인 소재호 일가는 예술을 사랑하며 재산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소영수의 넷째 아들인 소윤성은 심예지와 파혼한 뒤 소씨 가문을 떠나 해외로 가서 조용히 지냈다. 즉, 이 집안은 소임호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이었다!소영수가 소임호를 특별히 아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제멋대로인 다른 아들들에 비해 소임호야말로 소씨 가문을 이끌 적임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임호가 소씨 가문을 위해 조용히 헌신해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위기가 닥쳤을 때 소상현은 소임호를 도울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아들들을 짓누르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부장
어릴 때부터 소상현은 모든 면에서 소임호보다 못했고, 태어난 그날부터 소임호의 후광 아래 살았다. 소상현이 소임호를 향해 품은 원망과 분노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비즈니스계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소임호 대신 자신에게 붙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수도 없이 해 왔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소임호도 별 거 아니었을 거야.’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소상현의 마음은 크게 들떴다. 비록 자신의 능력이 소임호를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신분만큼은 소임호보다 우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장경이 이곳에 나타나자, 소상현은 자랑스러웠던 신분마저 산산이 무너지는 듯했다.소상현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이미 주위 사람들은 전부 부장경과 소임호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소상현 부자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장경은 지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다른 식으로 입을 열었다.“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부장경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특수한 신분인 탓에 직접 오시지 못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핏줄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형님의 동생입니다.”“아버지, 아버지...”소임호의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사실 소임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의식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면서도 ‘아버지는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임호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다 소영수를 만난 뒤에는 그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말해주었고, 실제로 소영수는 소임호를 친아들처럼 다정히 대했다. 물론 소임호는 소영수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실을 밝히지 않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게다가 소영수는 친아들 이상으로 소임호를 아껴 주었기에, 소임호는 그저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가 먼저
부장경은 국내에서 먼 길을 달려왔는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씨 가문에 대한 몇몇 영상과 사진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었다.부장경은 소씨 가문 사람들과는 달랐다.비록 부장경도 소임호의 이복형제이지만, 부장경은 오래전부터 부남진이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평생의 후회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만약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아들이나 딸을 남겨줬다면, 부남진의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부장경은 지난 삶을 미셸을 사랑하며 보냈지만, 미셸은 결국 가짜 여동생에 불과했다. 만약 비즈니스적으로 뛰어난 형이 있다면, 부장경에게 그것은 하늘이 준 기회와도 같을 것이었다. 같은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인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와 비즈니스가 결합된다는 점에서 부씨 가문은 더 큰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아가 부남진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부씨 가문은 이미 대화를 나누며 준비하던 참이었다. 민연주 역시 그 여인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따질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자신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임호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그런 양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부씨 가문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이었다. 민연주는 손익을 따져보았고, 무엇보다 부남진이 어렵게 찾은 아들을 반대해도 소용없겠다는 결과에 다다랐다. ‘그래, 오히려 통 크게 받아들이는 게 낫겠어.’부남진은 특수한 신분 탓에 떠날 수 없었기에, 대신 부장경이 부씨 가문을 대표해 소임호와 정식으로 인연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부장경은 결단력 있는 기운을 풍기며 빠르게 걸어왔다. 회의실을 아주 넓었는데, 부장경과 그의 일행이 들어오자 그들이 내뿜는 살벌한 기운이 전장을 휩쓸 듯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부장경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등골이 오싹해졌다. 최근 소씨 가문에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지아조차 부씨 가문의 이야기를
이 말이 나오자마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몸을 움츠렸고, 그들 중에는 한때 소임호의 뒤를 따르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비행기 사고 소식이 전해지며 소씨 가문이 혼란에 빠지자, 그 사람들은 곧장 새로운 선택을 했다.본래 군자는 좋은 벗을 택하는 법이지 않은가? 소임호가 죽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시후가 병으로 쇠약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도 믿음직하지 못하니, 결국 사람들은 소상현 쪽으로 몰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소임호가 죽음을 위장하고, 이렇게 난감한 시점에 돌아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일명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즉각 태도를 바꾸었고, 앞다투어 소임호에게 아부하며 말했다. “대표님,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는 날마다 대표님을 위해 기도드리며...”소임호가 차갑게 그들의 말을 끊었다.“빨리 극락에 가서 뼈도 남지 않길 바랐다고?” “허허, 여전히 유머러스하시네요.” “저희는 대표님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길 바랐습니다. 대표님께서 부재중인 동안 회사가 이렇게 큰일을 겪었으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방금까지는 시후를 몰아세우며 목소리를 높이던 한 원로가, 소임호를 보자마자 태도를 바꿔 소지훈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여긴 너 같은 애송이가 앉을 곳이 아니야! 어서 비켜, 대표님께서 오셨다고!”이 세상에서 진정한 힘은 실력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모두 이 회사가 누구의 손에서 태어났는지, 누구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인지, 누구의 뿌리이자 삶의 전부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래 소임호가 없다고 생각하고 산 정상에 꽂힌 깃발을 훔치려 했지만, 고지에 닿기도 전에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역습을 해온 꼴이었다.상황을 지켜보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자연스레 소임호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소상현의 편에 서 있었으나, 소임호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이 소상현에게 등을 보였다. 이 상황에 소상현도 살짝 당황했
소상현과 소임호는 원래 이복형제였지만, 어린 시절의 소상현은 아버지에게서 아주 엄격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네 형의 반이라도 닮으렴.”“형은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데, 넌 왜 그렇게 어리석니?” “이렇게 간단한 보고서도 이해 못 한다니, 네 형이라면...”소상현은 집안의 둘째였기에 형인 소임호와 비교되는 일이 많았다. 소임호의 빛나는 존재감 아래, 소상현은 얼마나 평범해 보였는지 모른다. 소상현은 이미 열심히 노력했지만 노력과 재능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소임호는 단순히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노력도 부족함이 없었는데, 천부적인 재능 위에 더해진 노력은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었다.즉, 소상현은 평생을 다 바쳐도 소임호를 따라잡을 수 없을 터. 소임호는 소상현의 평생의 트라우마였다. 그러던 오늘,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다.이번 기회에 소상현은 당당히 소임호와 그의 가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되찾을 참이었다. “시후야, 너도 똑똑한 사람이니 길게 말하진 않으마. 네가 약간의 지분을 샀다고 해도, 우리 손엔 여전히 아버지의 지분이 있어. 결국 너희는 ‘패배’했단 뜻이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니? 결국 사람들한테 비웃음이나 살 텐데.” 시월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그 말은 옳지 않아요! 우리 아빠가 할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한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에요. 우리 몸에는 할머니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애틋하게 사랑하며 함께 살아오셨는데, 우리한테 상속권이 없다는 게 말이나 돼요?” “게다가 이 회사는 우리 아빠가 맨손으로 일궈낸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크게 성장한 회사에 숟가락을 얹겠다니, 세상에 이렇게 구차한 일이 어디 있어요?” 소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버지, 더는 말싸움할 것도 없어요.” 소지훈은 손뼉을 치며 전문 변호사팀을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시후 측의 변호사들도 들어왔는데, 그들은
도윤은 지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자기야. 이미 사람들을 보내 조사하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도윤의 세력은 대부분 A국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곳에서는 섣불리 행동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심세호는 이날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계획을 세웠으니, 심세호를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소임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소임호가 보낸 사람들마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윤은 이틀 동안 무릎을 꿇은 탓에 체력이 바닥나 빗속에서 기절할뻔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조금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시하가 냉담하게 말했다.“저러다 죽으면 더 좋겠어.” 시언도 맞장구쳤다.“좋은 사람은 오래 못 산다더니, 나쁜 놈은 천년이 가도 안 죽는구나.” 소임호는 그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당장 끌어내.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라고!”지아는 그들의 태도에 머리가 아팠다.‘아무래도 가족들이 도윤 씨를 받아들이는 건 단기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닌 것 같아.’ 지아는 진봉에게 도윤을 방으로 옮겨 정성껏 간호하라고 지시했다. 소씨 가문에서 도윤에 대해 가장 악의가 적은 사람은 시후였는데, 시후가 천천히 지아의 곁으로 다가왔다.“소시월이 자금을 다 모았어.” “그럼 이제 우리가 연극을 시작할 때네요.” 시월이 밤새 달려와 도착하자, 시후는 일부러 얼굴에 화장하고 아주 쇠약한 모습을 연출했다.“콜록콜록... 월아, 왔구나.” “오빠, 이틀 만에 상태가 왜 이렇게 악화된 거예요? 절대 쓰러지시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월아. 오래된 병이라서 그래. 그나저나 돈은 다 모은 거야?” “네, 오빠, 지금 상황은 좀 어때요?”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재산을 지켜내려 하겠지만...” 시후는 일부러 기침을 몇 번 더 하며 말했다.“월아, 앞으로 우리 소씨 가문은 너한테 달렸어.” “오빠, 괜찮을 거예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시월은 겉으
어떤 고통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법이지만, 사실 지아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첫째, 지아는 여전히 도윤을 사랑하고 있었다.둘째, 지아와 도윤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가족과 재회한 후에야 지아는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복수에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지금 가진 것들을 꼭 붙드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느꼈다. 지아는 누구보다 지금의 평온을 애틋하게 아끼고 있었다.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지아와 같은 마음가짐이 아니었다. 도윤이 예전에 저지른 일들로 인해, 도윤이 백번을 죽는다 해도 소씨 가문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도윤은 정원에서 하루 밤낮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아가 몇 번이고 도윤을 말렸지만, 도윤은 부드럽게 말했다.“자기야, 난 당신이랑 재혼하고 싶어. 당신한테 성대한 결혼식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지만 부모님의 축복이 없는 결혼은 완벽하지 않은 거잖아.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 가족의 용서를 구하고 싶어.”“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지아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모든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건 다 내 잘못이야. 당신이 살아 있고, 나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면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야.”도윤의 무릎은 이미 감각이 없었지만, 도윤은 등을 곧게 펴고 있었고 눈빛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그리고 내가 겪는 고통은 당신의 만분의 일도 안 될 거야.” 그날 밤, 하늘에서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고, 도윤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여자라면 이미 기절했을지도 모르지만, 도윤은 강인한 체력으로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한편, 지아는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소임호는 어제보다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다. 소임호가 지아를 보자마자 빙그레 웃었다.“우리 지아 왔니? 네가 처방해 준 약이 효과가 정말 좋더구나. 오늘 몸이 한결 가벼워졌어.”소임호의 얼굴에는 약간의 혈색이 돌았지만, 아내를 걱정하며
도윤이 예전에 지아에게 저지른 일들은 정말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물며 지아의 가족들이 그녀의 과거 고통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겠는가? 지아가 아무리 ‘다 지나간 일이다’라고 말한다 한들, 깊은 밤 홀로 고통과 싸우며 버틴 지아의 고통은 절대 그렇게 쉽게 잊힐 수 없는 것이었다. 소임호는 도윤을 원수 대하듯 노려보았다. “아빠,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지아가 부드럽게 달래자, 소임호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딸아, 우리 집안에 어떤 일이 생기든, 나는 절대로 저 자식과 네가 엮이게 두지 않을 거란다.” 소임호는 도윤을 향해 다시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뭘 그렇게 보고만 있어?! 당장 썩 꺼지지 못해? 우리 소씨 가문은 너 같은 놈을 환영하지 않아! 예전에 네가 우리 딸을 어떻게 괴롭혔는지는 벌써 잊은 게야? 그때는 우리가 없어서 네가 설치게 내버려뒀지만, 이제 내 딸한테 가까이 오기만 해 봐! 나는 평생 내 딸을 지킬 거야!” “장인어른, 제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씻어낼 수 없는 죄악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잘못을 사죄하고, 가능한 한 보상하고 싶습니다.” “필요 없어! 사과로 모든 게 해결된다면 세상에 경찰이랑 법은 왜 필요하겠나? 진심이든 아니든, 네 사과 따윈 듣고 싶지 않아!” “장인어른.”“그 따위로 부르지 말게. 난 너 같은 사위는 둔 적 없으니까!” “저와 지아는 두 아들과 두 딸, 총 네 아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저희를...”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소임호는 더욱 격분했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이제 와서 아이들을 들먹이다니! 예전에 지아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네가 백채원을 살리겠다고 지아를 유람선에서 밀어 조산하게 했던 건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지아가 목숨 걸고 낳은 아이를 왜 네 입에 들먹여! 그 망할 ‘은혜’ 때문에, 어미로서 자식을 사랑할 권리마저 뺏겠다는 건가?”소임호의 목소리는 격해지며 갈라
밤하늘 아래, 무무는 조용히 서로를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고, 두 사람의 애틋한 장면은 영상 통화를 통해 중계되고 있었다.수화기 너머에서 해경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좀 더 가까이 찍어봐! 잘 안 보여!]소망은 지윤의 머리를 밀쳐내며 핀잔을 주었다.[좀 조용히 해. 엄마랑 아빠를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그 큰 머리 좀 치워봐! 하나도 안 보이잖아!] [누구 머리가 크다고 그래? 형, 형이 판단 좀 해줘. 우리는 쌍둥이잖아. 내 머리가 크다면, 쟤도 똑같은 거지? 그렇지?]두 아이는 만나기만 하면 다투기 일쑤였지만, 지윤과 무무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무무는 말할 줄 모르지만, 부모가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 두고, 남매들이 다투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듯했다. ‘가족은 원래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엄마는 A시로 돌아가면 아빠랑 재혼할 거라고 했어. 그때가 되면 우리는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날은 금방 올 것 같았고, 그동안 지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가족들을 보살폈다. 소임호는 온화한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가 내 곁에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 같군.’ 소임호는 오랜 세월이 흘러 마주한 딸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지아가 걸어온 지난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지아는 침을 놓으면서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사실 어릴 때는 큰 고생을 하지 않았어요. 양아버지께서 절 많이 사랑해 주셨거든요.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고, 무엇보다 제게 온전한 사랑을 주셨어요.” 소임호는 손을 들어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정말 온화한 분이셨던 모양이구나. 너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주셨으니까.” “네, 만약 그분이 살아 계셨다면, 제가 가족을 찾은 걸 정말 기뻐하셨을 거예요. 물론 제 인생에도 어두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분이 주신 빛이 제 삶의 어둠을 몰아내고, 제가 진흙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