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추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양조장에 문제가 좀 생겼어. 연준이는 지금 양조장에 거의 갇힌 신세고.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양조장?’양조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조연아는 바로 이불을 젖혔다.하지만 두 다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이 세포 하나하나를 가득 메웠다.하지만 하나뿐인 동생이 양조장에 갇힌 상황, 짐승보다 못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생각하면 이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연아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지금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추연이 미친 사람처럼 병실을 뛰쳐나가는 조연아의 뒤를 따랐다.한편, 민하그룹 회의실.왠지 모를 긴장감에 다들 애꿎은 침만 삼키고 있던 그때, 문자를 확인한 오민이 민진훈의 곁으로 다가갔다.가장 상석에 앉은 민하준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말하세요.”“아, 사모님... 아니, 조연아 씨가 깨어났답니다.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지 병원을 뛰쳐나갔다는데요...”빠각!펜촉이 부러지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서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업무 보고 중이던 부장마저 그 소리에 겁을 먹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뭐야, 왜 갑자기 표정이 저렇게 안 좋아지신 거지.’‘아, 진짜 다음 차례가 우리 부서인데. 하필...’한참을 침묵하던 민지훈이 차갑게 한 마디 내뱉었다.“그래서요?”“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죄송합니다.”“큼큼, 다음 분기는...”오민이 눈치껏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부장은 자연스레 다시 보고를 시작했다.방금 전 해프닝은 꿈인 듯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더 무거워진 분위기에 부장들의 마음은 더 서늘해졌다....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가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날...부랴부랴 달려온 조현아의 시야로 엉망이 된 양조장과 백장미, 조연준의 모습이 들어온다.“조연준, 유운주 제조법 당장 말하라고.”차가 채 멈추지도 않았음에도 뛰어내린 조연아가
“너... 지금 날 때린 거야? 어쨌거나 난 네 새엄마야!”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의 백장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뭣들 하고 있어! 당장 잡아! 이 두 연놈들이 유운주 제조법을 말하기 전엔 절대 내보내지 마!”백장미의 호통에 경호원들이 바로 조연아의 두 팔을 제압했다.“이거 놔!”조연아가 거칠게 반항해 보아도 두 장정과 힘 싸움으로 이길 리가 없으니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백장미, 당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 손 안 놔?”뒤이어 따라온 추연이 달려들었지만 역시나 경호원들에게 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연아는 민 회장님이 직접 고르신 며느리야. 그런 연아한테 이렇게 하고 넌 무사할 줄 알아?”“민 회장?”하지만 백장미는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죽을 날 받아놓은 영감탱이가 뭘 어떻게 할 건데. 애비한테도 버림받고 남편에게도 버림받은 애야. 이런 대접 받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백장미!”추연의 외침에도 백장미는 개의치 않았다.“뭘 가만히 있어. 움직여. 말로 해서 안 통하니 몸 고생 좀 해봐야지.”백장미의 명령에 몽둥이를 든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가녀린 그녀의 몸에 몽둥이세례가 이어졌지만 맑은 눈동자에 담긴 증오의 감정만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또각또각.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백장미가 뾰족한 하이힐 굽으로 조연아의 등을 꾹 찍어 눌렀다.“유운주 제조법 너도 알고 있지? 어차피 다 말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냥 말해. 괜히 더 버텨봐야 몸만 상하잖아.”하지만 조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조인주업의 생명과도 같은 유운주의 제조법을 말하느니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하지만...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무조건 복수할 거야.’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조연아를 노려보던 백장미가 코웃음을 쳤다.“하, 좋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래, 두고 봐.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볼 테니까.”빠각.등뼈가 부러진 듯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
민지훈을 발견한 추연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백장미를 향해 소리쳤다.“백장미! 네가 무슨 자격으로 민 서방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조연아도 애써 고개를 들어 민지훈을 바라보았다.‘정말... 나 때문에... 날 구해주려고 온 건가.’11년 동안 일편단심으로 민지훈만 바라보았다. 그래도 한때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으니 위기의 순간 그녀를 구해줄 정 정도는 있을 거라 믿었다.떨리는 손으로 민지훈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조연아가 입을 벙긋거렸다.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에 목구멍이 꽉 막힌 듯했다.“지... 지훈 씨...”겨우 한 마디 내뱉은 조연아가 눈물 섞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진심을 담은 이 눈빛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길 바라며...하지만 차가운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던 민지훈은 쓰러진 그녀를 향해 손조차 내밀지 않았다.“또 이런 식이지. 이렇게 연기하는 거 지겹지 않아?”네 수작 따위 내 손바닥 안이라는 듯 경멸 어린 시선, 차가운 목소리.잠시나마 불꽃을 틔웠던 희망이 차가운 빗방울과 함께 식어버렸다.‘역시... 넌...’민지훈의 바지를 잡았던 그녀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그 모습에 잠시나마 긴장했던 백장미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민 서방 안으로 들어와...”“들으셨겠지만 저 조연아랑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민 이사라고 불러주세요.”“그... 그게 무슨...”백장미의 얼굴을 가득 채웠던 아부 섞인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민지훈의 비서 오민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대신 대답했다.“민 대표님께서 조인주업의 지분 55%를 인수하셨습니다.”지분 55%?다리에 힘이 풀린 백장미의 하이힐이 순간 삐끗거렸다.절반이 넘는 지분, 즉 지금 이 시간부로 민지훈이 조인주업의 대주주가 된 것이었다.“제 사업장에서 누가 죽어 나갔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차분한 말투와 달리 민지훈의 눈동자는 차갑게 번뜩였다.잠깐의 시간 동안 부리나케 머리를 굴린 백장미는 빠르게 상황
고고한 표정으로 이 말을 내뱉은 민지훈은 이 공간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빗속을 뚫고 사라지는 롤스로이스를 바라보던 조연아는 쓴웃음을 내뱉었다.“그러게 착하게 살았어야지.”민지훈의 차가운 말이 메아리가 되어 조연아의 가슴을 울리고 또 울렸다.‘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뭘 더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내게 잘못이 있다면 널 사랑한 죄뿐인데...’민지훈은 그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짓밟기 위해 온 것인데 행여나 그녀를 도와주러 온 게 아닐까 잠시나마 기대했던 스스로가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윽...”복부쪽에서 고통이 또다시 밀려오고 뜨거운 피가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며 병원복을 적셨다...하지만 조연아는 지금 느껴지는 이 고통이 부서질 듯 아픈 몸 때문인지 찢어질 듯 아픈 마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두 번째 출혈, 병원으로 긴급 이송된 조연아는 바로 대수술을 받아야만 했다.조연준 역시 매를 맞긴 했지만, 가벼운 타박상에 불과한 반면, 얼마 전 유산을 한 데다 비까지 맞은 조연아는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뜬 조연아가 가장 먼저 들은 건 민지훈이 이혼 발표를 했다는 말이었다.절망적인 눈동자로 가만히 듣고 있던 조연아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아, 기사까지 났으니 이제 정말 번복은 안 되겠구나...’하지만 곧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어 보이는 그녀다.‘조연아, 정신 차려. 설마 다시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아직도 민지훈을 포기하지 못한 거냐고.’시어머니 때문에 아이를 잃었고 그 사실을 솔직하게 말했을 때 그는 그녀의 연기력을 비웃었고, 양조장에 쓰러져서 제발 누구라도 그녀를 구해주길 바랐을 때 그는 누구보다 더 잔인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짓밟았다.11년간 불태운 사랑이 그녀에게 남긴 건 그저 수많은 상처뿐, 그 흔한 행복한 기억 한줄기 없는 결혼생활, 도대체 뭘 바라고 그 긴 세월을 버텼던 걸까.공허함, 허탈함이 밀려오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
질문이었지만 확신이 담긴 말투였다.“오빠...”“추연 이모가 너 좀 설득해 보라더라.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네가 바보도 아니고. 그 사람과 함께해서 행복할 수 없다는 건 너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상처받고 아파하면서도 쉽게 놓을 수 없는 게 사랑이잖아.”고주혁의 따뜻한 목소리에도 조연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미안... 괜히 나 때문에 걱정만 끼치고. 미안해...”다시 고개를 든 조연아의 볼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미안하다는 말 빼고 그녀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이혼 사실이 기사화되었다는 걸 안 순간 가슴이 미어지고... 정말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나...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민지훈이 좋구나...’“바보야, 네가 왜 사과를 해.”고주혁이 따뜻한 손길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네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 민지훈 그 사람도 참 너무한다. 네가 묵묵히 내조해 준 덕분에 지금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헌신짝 버리듯 널 버릴 수 있어?”결혼 초기 민하그룹이 재정위기에 빠졌을 때 조연아가 친정의 힘을 빌려 600억에 달하는 투자금을 유치했었고 그 덕분에 큰 고비를 넘긴 건 사실이었다.물론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다시 돌이켜보니 씁쓸한 것도 사실이었다.“지훈 씨는 잘못한 거 없어. 억지로 시킨 일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한 건데 뭐.”“바보야, 이 세상에 남자가 민지훈 그 사람 하나인 것도 아니고. 차라리 잘됐어. 이제 너도 새 인생 살아야지.”민지훈은 알고 있을까? 그가 그토록 경멸하는 조연아를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사람이 있다는걸. 누군가에게 조연아는 평생 아끼고 사랑해 줘도 부족한 귀한 사람이라는걸.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한참 동안 조연아를 바라보던 고주혁이 손수건을 건넸다.“울지 마. 눈 부으면 더 못생겨져. 그리고... 사실 오늘 회장님이 너한테 남기신 걸 전하려고 온
편지 봉투에 적힌 “추”라는 글씨체, 너무나도 익숙하고 정겨운 필체를 어루만지던 조연아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펼쳤다.[연아야,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엄마는 네가 자랑스러워. 사랑이라는 마음을 너처럼 마음껏 표현하는 것도 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든. 우리 딸, 너무나 힘든 사랑 누구보다 잘 해냈어. 그래서 엄마는 네가 자랑스러워. 솔직히 네가 지훈이한테 그렇게까지 목매는 걸 보면서 엄마로서 속상하기도 했어. 우리 딸,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은 보석같은 아이인데 왜 굳이 저렇게 힘든 길을 걸으려 하는 걸까 싶어서. 그래서 가끔씩 더 모질게 널 꾸짖었던 것 같아. 하지만 지훈이를 바라보는 네 눈동자가 너무 반짝여서 더는 뭐라고 못하겠더라. 안쓰러운 것과 별개로 네가 한 선택이니 무조건으로 응원해 주고 싶었어. 엄마는 그런 존재니까. 이건 엄마가 너랑 연준이한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연준이는 조인주업을, 넌 스타엔터를 맡도록 해. 스타엔터 지분 30%, 넉넉하진 않지만 적어도 회사에서 네 목소리를 낼 정도는 될 거야.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게 이 정도뿐이라 미안하지만 내 자식들이라면 그 어떤 시련이 있어도 누구보다 씩씩하게 이겨낼 거라고 믿어. 연아야, 연준아, 엄마는 평생 일에 빠져서 살았지만, 생의 마지막에서 삶을 돌아보니 엄마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게 너희 둘을 낳은 일인 것 같아. 엄마는 이제 그만 편해지려고. 엄마 없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더 씩씩하게 살아. 너랑 연준이는 엄마가 이 세상에 남겨둔 마지막 빛줄기나 마찬가지니까. 사랑한다, 내 자식들.]“흐흑, 엄마...”편지를 다 읽은 조연아는 편지지를 가슴에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오열했다.민지훈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못난 딸 뭐가 이쁘다고 지분까지 남겨주셨을까?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걱정만 안겨주는 천하의 불효녀가 또 어디 있을까?만약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민지훈을 볼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날 텐데...
“아버지”휴대폰 액정에 찍힌 발신인 이름을 확인한 조연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아... 무슨 일이시죠?”아빠라는 단어가 목구멍에 콕 걸린 듯 나오지 않고 결국 무덤덤한 목소리로 묻는 조연아다.그리고 다음 순간 화가 잔뜩 난 조학찬의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때렸다.“조연아,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인 줄 알았더니 발칙하게 나 몰래 이딴 짓을 벌여? 조인주업 지분 20%이 왜 연준이 명의로 돼 있는 건데! 도대체 나 몰래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너희 엄마가 나 몰래 유언장을 썼다는 게 말이 돼?”민하준이 55%의 지분을 가져간 이상 지분 1%가 아쉬운 지금, 아내가 가지고 있던 지분 20%마저 아들에게로 넘어가니 꽤 불안해진 모양이었다.오랜만에 딸에게 전화를 걸어 하는 말이 겨우 이거라니. 조연아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아버지야 밖에서 다른 여자랑 있으셨으니 모르실 만도 하죠. 지금 이렇게 저한테 따지는 거 굉장히 뻔뻔한 행동이라는 거 본인도 아시죠?”“고주혁 그 여우 같은 자식이랑 무슨 작당을 벌인 거야! 도대체 고주혁 그 자식을 어떻게 꼬신 거야? 뭐, 이제 이혼도 했겠다. 반반한 얼굴 믿고 육탄공세라도 벌인 거야?”“하...”이게 아버지라는 사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싶어 조연아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다들 아버지의 사랑은 산과 같아도 하지만 조연아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녀의 자존감을 짓이기는 태산과도 같은 존재였다.수화기 너머로 조학찬의 추잡한 말들이 또다시 들려왔다.“친정 집안 하나 믿고 민지훈 그 자식이랑 결혼했으면 뭐든 물어와야지. 빈털터리로 쫓겨난 것도 부족해서 이제 아비 재산까지 넘봐? 너 그 집안에서 도대체 뭘 한 거야? 넌 그동안 민지훈 그 자식 전용 창녀였을 뿐이야, 알아?”“아버지, 그만...”조연아가 반박하려던 그때, 누군가 그녀의 휴대폰을 홱 빼앗아 갔다.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조연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여전히
“하.”고개를 든 민지훈이 피식 웃었다.“이미 이혼한 사이에 결혼기념일을 챙기시겠다. 좀 웃기지 않아?”“우리... 신혼여행에서도 따로 다녔고 결혼하고 나서도 기념일 한번 챙긴 적 없잖아. 그러니까 오늘... 오늘만큼은 같이 있으면 안 될까? 그냥... 우리 결혼생활에 대한 마지막 작별 인사라고 생각해. 우리 비록 행복하게 살진 않았지만 마지막은 사이좋게 헤어질 수 있는 거잖아.”가벼운 그녀의 목소리에 애원이 살짝 서렸다.“조연아, 너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 거야?”“수작 같은 거 없어. 내일이면 여길 떠날 거야. 그리고 다신 당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약속해.”조연아가 다급하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아니, 맹세해.”순진무구한 그녀의 표정에 민지훈의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리기 시작했다.극심한 두통에 정신을 차리려는 듯 살짝 고개를 젓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따라 이상하리만치 잦은 두통, 그리고 그때마다 흐린 기억 속 낯선 여자아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과 함께 항상 조연아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꽤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왜 그래? 어디 안 좋아?”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민지훈이 되물었다.“정말... 약속 지킬거지?”그냥 매정하게 뿌리치고 돌아설 수도 있는데 왜 이 보잘것없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지 민지훈 본인도 의아할 따름이었다.“그럼. 무조건 지킬게.”“그럼 이거 놓고 타.”“우리 별장으로 가면 안 돼? 오늘 눈 와서 되게 예쁠 것 같은데.”차에 탄 조연아가 재잘거렸다.소복하게 쌓인 눈,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눈송이가 유난히 아름답게 빛나는 밤, 이 마지막을 민지훈과 함께하면 더없이 좋을 것만 같았다.그녀의 부탁에 민지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말없이 차는 돌리는 모습에 조연아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백 번 상처받고 아파도 단 한 번의 작은 친절에 감동받고 감사하며 살아온 지난 10년, 이제 이 감정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어딘가 후련햇다.차에서 내린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