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후, 하현과 원가령은 페낭 무도관에 도착했다.이곳은 페낭 무맹 산하에서 운영하는 무도관으로 평소 페낭 무맹 산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것 외에도 부잣집 자제들을 모집해 한 달에 수백만 원에 달하는 돈을 받고 있었다.이렇게 영업하는 곳이 여러 곳 있었지만 페낭 무맹에서 가르치는 곳은 사람들한테 더욱 인기가 있었다.예를 들어 원가령이 등록한 속성반은 등록금이 이천만 원에 달했다.대략 일주일에 두세 시간씩 가장 기본적인 권법을 가르치고 수료 후에는 소위 수료증을 발급하며 페낭 무맹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이 얘기를 듣고 하현은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만약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자 했다면 무성의 국술당은 1년도 채 안 되어 상장했을 것이다.하현은 돈 있는 바보들이 이처럼 많다는 데 탄식하며 원가령과 함께 페낭 무도관 훈련장으로 들어갔다.이곳에는 이미 수십 명의 부잣집 자제들이 앉아 있었다.모두 훌륭한 무도복으로 갈아입고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로 겨루고 있었다.다만 그들의 겨루기는 하현의 눈에 그저 아이들 소꿉장난으로 보였을 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원가령, 오랜만이야! 오늘은 어쩐 일로 왔어?”하현이 무도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무도복을 입은 남자가 무리들을 이끌고 다가왔다.그는 마치 이곳의 우두머리처럼 거침없는 몸짓으로 무도관을 누볐다.그리고 원가령을 바라볼 때 그의 얼굴에는 한없이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요 며칠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원가령, 당신이 없는 날은 세상이 온통 흑과 백뿐이란 걸 알았어.”“얼른 나한테 왔어야지!”하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마뜩잖은 기색을 드러내었다.키 크고 잘생긴 이 남자는 다름 아닌 양 씨 가문 양호남이었다.양호남 외에도 군중 속에는 양신이도 있었다.그녀는 하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가 죽일 거라는 위협을 보내려는 듯 목을 긋는 동작을 보였다.양호남이 나타나 뻔뻔스럽게 입을 놀리는 것을 본 원가령은 얼굴을 찌
하현은 두 사람의 감정싸움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이때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양호남을 마주한 원가령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양호남의 손을 피했다.동시에 그녀는 한 발짝 하현 곁으로 다가가 차갑게 말했다.“양호남, 멀리 떨어져.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하진 않잖아!”“게다가 당신은 양다리를 걸친 쓰레기 같은 남자를 믿을 정도로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거야?”“더 말할 것도 없어! 난 이미 남자친구, 아니 약혼자가 있어!”원가령은 직접 하현을 끌어당겨 방패막이로 삼았다.그리고는 하현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난 하현을 버리지 않을 거야. 다시는 당신 같은 사람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구!”“나 같은 사람은 사랑에 모든 걸 다 바쳐. 당신 같은 쓰레기들이랑은 완전히 달라!”하현은 뭐라고 설명하려고 했지만 애처롭고 가련한 원가령의 표정을 보고 한숨만 내쉬며 양호남을 쳐다보았다.“양호남, 오랜만이야.”“당신이? 당신이 원가령의 남자친구? 아니 약혼자라고?”양호남은 일순 안색이 일그러졌다.“당신은 양유훤 그 천한 여자가 키우는 기둥서방 아니었어?”“그런데 지금은 양 씨 가문으로도 모자라 원 씨 가문 치마폭에 싸인 거야?”“그러고도 낯짝을 들고 다니는 거야?”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한바탕 소란스럽게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차차 하현의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이 얼간이 같은 놈이 양호남의 여자를 빼앗았다고?말도 안 되는 소리?!“닥쳐! 당신들 모두 닥치라구!”“당신들이 내 남자친구를 모욕하다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하현은 진정한 남자야. 여자 치마폭에 싸여 허송세월하는 남자가 아니라구!”원가령은 양호남의 표정을 보자 속이 후련해졌다.지금 그녀는 마치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세운 사자처럼 포효하며 하현의 팔을 감싸고 있었다.“난 하현을 믿어.”“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
”원가령,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나도 잘 이해가 안 돼!”“그날은 내가 정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남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를 했을 뿐이야.”“용서해 줘. 제발!”말을 하면서 양호남은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가령, 나한테 돌아와. 내 곁으로 돌아와!”“봐 봐. 난 이미 약혼반지까지 준비했어.”“그저 난 당신을 아내로 삼아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야!”“쓰레기! 이제 와 이렇게 후회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원가령은 악에 받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양호남이 꺼낸 반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반성이나 제대로 해!”“앞으로 좋은 여자 만나면 잘해줘!”“이제 와서 이런 말 해 봐야 아무 소용없어!”하현은 원가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비록 그녀는 씨알도 안 먹힌다는 듯 양호남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태세였지만 하현은 그녀의 말투나 표정에서 미세하게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이건 어쨌거나 두 사람 사이의 일이었다.하현은 양호남에게 아무런 호감이 없었지만 이때 나서서 뭐라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큰일을 어떻게 선택할지는 원가령 본인의 일이었다.친구로서 필요할 때 하현은 얼마든지 그녀를 도울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현,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원가령이 나한테 이러는 거라고!”“이 나쁜 놈아! 양유훤이 양 씨 가문과 결별하게 만들더니!”“이제는 원가령을 부추겨 나와 헤어지게 만들어?”양호남은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하현의 코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고 동시에 하현이 이 모든 일의 주범이라는 듯한 발언을 이어갔다.“우리 양 씨 가문을 위해서도, 가령이를 위해서도 난 결정했어! 당신과 끝장을 보기로!”“바로 지금 여기에서 말이야!”“감히 당신이 날 때릴 수 있을까?”“만약 당신이 날 이긴다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겠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을 하며 날뛰는 양호남을 앞에 두고 하현은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그런 다음 하현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냉담하게 말했다.“양호남, 당신은 아직 나와 대적할 실력이 못 돼...”“그만하지?!”“스스로를 잘 생각해 봐.”하현의 말을 들은 후 떠들썩했던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현장에 있던 많은 남녀들은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하현을 쳐다보았다.자기가 무슨 천하제일인 줄 아나?양호남은 남양 3대 가문인 양 씨 가문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함께 페낭 무맹에서 훈련을 받았고 부잣집 자제들 사이에서도 매우 실력이 출중했다.심지어 페낭 무맹의 평범한 제자들은 그의 적수가 되지도 못했다.그런데 얼뜨기 촌놈 하현이 감히 양호남을 멸시해?대적할 실력이 못된다고?누가 하현에게 이런 말을 할 용기를 준 것인가?양호남 자신도 하현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허세를 부리며 자신에게 덤빈 사람들을 많이 봐 왔지만 하현까지 이런 척할 줄은 몰랐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하현이 무슨 큰 능력이 있는 줄 알 것이다.“하 씨! 양 씨 가문 별장에서 재미 좀 봤다고 천하무적이라도 된 줄 알아?”“그때는 우리가 좀 방심했었던 것뿐이야. 아직 싸울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와중에 당신이 덤비는 바람에 조금 재미를 본 것뿐이라구!”“이 형님이 정말로 때리면 당신은 한 방에 죽을 수도 있어!”하현은 담담한 눈빛으로 양신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됐고!”“잠시 후에 내가 손바닥을 휘두르면 당신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고.”“당신네 양 씨 가문 체면은 땅에 떨어질 거야!”“한 방에 날 죽여?”“당신이? 감히 그럴 실력이나 돼?”양호남은 마침내 서늘한 눈빛을 떠올리며 반응을 보였다.지난번에 하현한테 뭉개진 건 사실이지만 돌아가서 몇 번을 복기하며 복수의 칼을 간 양호남이었다.그때는 자신이 잠시 부주의해서 그런 결말을 맞았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
카리스마 넘치고 자신감에 가득 찬 양호남을 마주한 하현은 그저 무덤덤한 표정만 지을 뿐 다른 표정이 별로 없었다.하지만 원가령은 하현을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하현, 이 사람과 싸우지 마. 당신은 이 사람을 이길 수 없어.”원가령의 눈에는 하현이 양호남의 적수가 되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양호남은 어쨌든 양 씨 가문 유력 후계자였고 양 씨 가문이 아무리 쪼그라들었어도 외지인 하나 짓밟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원가령은 하현을 이용해 양호남을 화나게 하고 싶었지만 하현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하현, 왜 자꾸 여자 뒤에 숨기만 하는 거야?”“선뜻 나설 용기가 없는 거야?”양호남은 원가령의 행동을 보고 더욱더 잡아먹을 듯 하현을 노려보았다.“어쩐지 섬나라 사람들이 당신네 대하인들을 극동의 병신이라고 하더라니!”“역시 허튼 말이 아니었어!”양호남을 상대하기 귀찮았던 하현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하게 식었다.하현은 고개를 들어 제멋대로 날뛰는 양호남을 희미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양호남, 입을 비뚤어졌어도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지!”“당장 무릎 꿇고 사과해. 이것도 원가령을 봐서 기회를 준 거야.”“무릎 꿇고 사과한다면 손을 대진 않겠어.”하현은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모욕의 삿대질을 하는 건 별로 개의치 않았다.하지만 누군가가 감히 대하를 모욕하고 조국을 욕하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양호남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세상에서 가장 웃긴 말을 들은 듯 껄껄 웃었다.“다시 한번 말해 봐! 뭐라고?”양호남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고 온몸의 뼈에서 ‘우두둑’하고 소리가 울렸다.여기서 하현이 한마디만 더 하면 바로 하현을 죽일 듯한 자세를 취했다.긴장한 원가령이 하현을 말리고 나섰다.“하현, 그만해. 당신은 이 사람을 이길 수 없어.”하현이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지금은 내가 그를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해.”
얼굴을 가리고 일어선 양호남은 하현을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이 자식이! 감히 기습 공격을 해?”“이 파렴치한 놈!”“퍽!”하현은 냉담한 얼굴로 손바닥을 내리쳤다.“이건 기습이 아닌 거지?”“퍽!”“그 정도 실력으로 나한테 덤비려고 했어?”“퍽!”“당신은 나랑 싸울 실력이 못 된다니까 아직도 못 믿는 거야?”“퍽!”“당신 정도의 수준으로 감히 극동의 병신 어쩌고 하는 말을 입에 담는 거야?”“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어?”“무릎 꿇고 사과하라니까 못 알아듣겠어?”하현은 냉랭한 표정으로 훈계하듯 말하며 좌우로 손바닥을 휘갈겼다.이리저리 휘둘리던 양호남은 계속 나뒹굴다가 구석에 있는 무기 선반에 부딪히고 말았다.훈련용 무기들이 잔뜩 쌓여 있는 선반이 휘청이며 물건들이 우수수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참혹하기 그지없었다.양신이를 비롯한 부잣집 자제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아연실색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도무지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개자식! 죽여버릴 테야!”체면이 땅에 떨어진 양호남은 이를 악물고 바닥에서 칼을 주워 하현의 명치 쪽을 향해 훅 찔렀다.“윽!”하현은 차가운 얼굴로 한 걸음 다가가 양호남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단번에 높이 치켜올렸다.“양호남, 이까짓 솜씨로 우쭐거리며 날뛴 거야? 이 정도 칼에 내가 찔릴 거라 생각한 거냐고?!”하현은 말을 하면서 한 손에 힘을 꽉 주었다.벌겋게 달아오른 양호남의 얼굴이 점차 검붉게 물들었다.마치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그의 두 손과 두 발이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주변에 있던 부잣집 자제들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섰다.그들은 감히 나서서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페낭 무맹 제자들조차 아무 반응을 하지 못하고 아연실색했다.바로 그때 하현의 등이 갑자기 아파왔다.마치 누군가가 온 힘을 다해 각목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현이 고개를 들어보니 원가령이 그의
”하현,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안 되는 거야.”정신을 차린 후 목이 빨개진 양호남을 바라보던 원가령은 마음이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하현을 훈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양호남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랐어. 당신처럼 어려서부터 무술을 연마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방금 당신이 너무 심하게 손을 써서 하마터면 그가 목숨을 잃을 뻔했어.”하현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가 우리 대하를 모욕하고 또 먼저 손을 썼기 때문에 내가 움직인 거야.”“대하를 모욕한 게 뭐? 당신을 모욕한 것도 아닌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게다가 그가 그렇게 말한 것도 대적할 실력이 못 된다면서 당신이 그를 도발했기 때문이야.”“그렇지 않았으면 양호남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원가령은 원망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양호남은 거칠 것 없이 살았어. 그런데 당신이 일부러 그렇게 도발을 하니까 화가 나서 헛소리를 했고 결국 손을 쓰게 된 거야!”“원래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그래서, 지금 이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라는 거야?”하현은 이성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감싸고도는 한 여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애초에 이럴 필요도 없었던 거야. 남자친구인 척해 달라는 당신 요구를 들어줄 필요도 양호남을 도발할 필요도 없었던 거야, 그의 공격에 맞서지도 말고 가만히 맞고만 있어야 하는 거였어, 그렇지?”“하현,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야. 오해하지 마, 응?”원가령은 양호남을 부축하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어쨌든 이렇게 심하게 때리지 않아도 되는 거였잖아. 어떻게 외지인이 양 씨 가문 사람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 수가 있어? 난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자신도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을 하현이 만신창이로 만든 것에 원가령은 못내 마음이 아팠다.동시에 그녀는 이런 악수를 둔 하현에게 다소 불만을 품은 것이다.하현은 가늘게 눈초리를 흘기고는 차가운 미소를 흘
”원가령, 난 괜찮아. 그냥 얼굴이 좀 아프고 목이 아파서 죽을 뻔했을 뿐이야!”양호남처럼 약삭빠른 남자가 원가령의 마음이 지금 한없이 약해져 있다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그는 이 순간을 이용해서 하현과는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연약한 원가령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애썼다.“원가령, 그거 알아? 내 몸이 아무리 아파도 당신을 잃는 것만큼 아프지는 않아!”“당신이 날 용서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맞아 죽는다고 해도 난 다 괜찮아!”“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야!”비련의 주인공처럼 슬픔에 잠긴 얼굴은 그 효과가 엄청난 법이다.양호남은 계속해서 몰아붙였다.“원가령,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양신이도 얼른 거들고 나섰다.“원가령, 우리 오빠가 당신을 위해서 하현이 미치광이 같은 구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덤벼든 거야!”“질 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한 게 용감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우리 오빠가 지금 얼마나 다쳤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우리 오빠가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해 왔었다는 거 잘 알잖아!”“그런데 당신을 위해 오늘 이렇게 목숨까지 걸었어! 그런데도 용서할 수 없다는 거야?”“한 남자가 기꺼이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뭐가 부족한 거야?!”원가령은 애걸복걸하는 양호남의 얼굴을 보았다가 냉담한 눈빛으로 일관하는 하현을 보았다.그녀의 얼굴에 갈등으로 몸부림치는 괴로운 기색이 떠올랐다.한편에는 그녀가 가장 좋은 친구로 인정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편에는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도저히 선택할 수가 없었다.양호남은 이 기회를 틈타 하현을 향해 냉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열렬한 사랑의 고백을 이어갔다.“원가령, 약속해! 절대 다시는 당신을 잃지 않을 거야!”“하늘에 맹세코 죽는 날까지 당신만을 사랑할 거야!”말을 하면서 양호남은 주머니 속에서 반지를
”전부?”이 말을 듣고 강우금의 얼굴에는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여자한테 빌붙어 살면서 꼴에 자기가 재벌 2세인 줄 아나?”“정말 요즘 사람들은 자기 분수를 너무 몰라!”“전부는 고사하고 그의 전 재산을 다 부어도 소남가인 옷 한 벌 못 살 거야. 아니, 양말 한 켤레라도 산다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어!”금정의 스타트업 사장이나 재벌 2세들도 소남가인 브랜드의 옷을 함부로 사지 못한다.그런데 한낱 한량에 불가한 하현이 돈이 어디 있어서 저런 비싼 옷을 산단 말인가?매장의 직원들과 손님들이 좋은 구경거리를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소남가인 직원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살짝 망설였지만 결국 황보정에게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었다.곧 황보정은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모두 골랐다.수십 개의 옷 가방들이 순식간에 매장에 늘어섰다.이게 다 얼마인가?몇십억은 되어 보였다!“삑!”하현은 별일 아닌 듯 단번에 카드를 긁었다.그러자 승인되었다는 소리가 나면서 영수증이 좌르륵 쏟아져 나왔다.“어머?!”순간 소남가인 매장 안팎에선 수군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주변에 있던 직원들과 손님들은 하현을 쳐다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황보정에게는 질투와 부러움의 시선들이 쏟아졌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하현이 저 많은 옷을 한 번에 결제하다니!그야말로 거부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이럴 수 없어! 절대로!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강우금과 그녀의 매장 직원들은 모두 넋이 나간 듯 멍해졌다.뒤늦은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와 그녀들을 단번에 쓰러뜨렸다.그들은 도저히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방금까지 그들은 입만 열면 하현을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다.노점상에나 가서 옷을 사라고 쫓아냈다.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들의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역시 가장 난처해하는 사람은 강우금이었다.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강우금의 말을 들은 손님들은 하나같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옷도 안 사고 민폐만 끼치다니!덜떨어진 저런 사람이 이런 가게를 드나들 수는 없다!정말 재수없어!황보정은 슬쩍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강우금, 당신 같은 점장이 어디 있어요?”“정말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우할 거예요?”“우리가 정말로 못 살 거라고 생각해요?”“이런 식으로?”강우금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황보정,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에요?”“내가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당신이 그럴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해요?”“난 금정 쇼핑몰 판매율 10위 안에 드는 사람이에요! 연봉이 일억이 넘는다고요!”“흥! 그런데 당신은 뭐죠? 하얗게 세탁한 싸구려 티셔츠 한 장 입고 와서 무슨 부자 행세를 하고 그래요?”“그리고 정말로 옷을 사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사세요! 여긴 당신이 살 수 있는 옷이 없어요!”말을 하면서 강우금은 바깥을 가리키며 냉소를 흘렸다.“1킬로미터 정도 나가면 많은 노점상들이 있을 거예요!”“거기 가면 한 벌에 몇 천 원짜리가 널렸을 거라고요!”“그래도 당신이 우리 가게에서 옷을 사고 싶다면 내가 특별히 기회를 주겠어요. 당신이 그래도 집복당 아가씨니만큼 이월된 재고 상품들 중 쓸 만한 것을 권해 줄 수는 있어요.”“하지만 문제는 살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아무리 이월 상품이라고 해도 값이란 게 있는 건데 당신이 살 수 있겠어요?”하현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손을 뿌리치며 물건을 카운터에 올렸다.그리고 나서 황보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다른 데 가서 사자고!”황보정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바로 하현을 따라 가게를 나섰다.강우금은 이 광경을 보고 냉소적인 목소리로 직원들을 불렀다.“그들이 만진 물건들과 지나간 자리 얼른 소독하고 방향제 뿌려!”“저런 싸구려 인간들이 우리 가게를 더렵히게 놔두면 안 되지!”“뭐라고?”“다른 가게에 가서 산다고? 흥! 아무리 둘러
강우금의 말을 듣고 갑자기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찾은 듯 주변에서 쇼핑하던 사람들이 하현에게 눈을 힐끔거렸다.남자가 돈을 벌어서 가족들 부양할 생각은 하지 않고 부잣집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다니?!정말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야!“강우금?”황보정은 순간 누군가가 하현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 낯빛을 흐리며 말했다.“우리는 여기 옷을 사러 온 것이지 당신의 비아냥 따위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이런 식으로 손님을 대한다면 당장 당신 회사에 불만을 제기할 거예요!”황보정에게 있어 자신이 모욕당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하지만 하현이 모욕당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불만을 제기한다고요?” 강우금은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들썩였다.“황보정, 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내가 금정 쇼핑몰에서 판매율 10위 안에 드는 점장이라는 걸 몰라서 그래요?”“불만을 제기한다고요? 그게 무슨 소용이라도 있을 것 같아요?”“문제가 뭔지 알아요? 여자한테 빌붙어서 사는 이런 남자들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흥! 당신이 어떻게 불만을 제기하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볼게요!”“난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아마 당신이 이 사실을 안다면 나한테 불만을 제기하기는커녕 잘했다고 상이라도 줄 거예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집복당은 이제 한물간 거 아니에요? 내 앞에서 이럴 자격이나 돼요?”“이 옷, 정말 살 수 있어요?”이를 듣던 몇몇 손님들은 더욱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황보정 일행을 쳐다보았다.그녀들은 하현이 여자한테 빌붙어 있는 것뿐만 아니라 몰락해 가는 집안의 여자의 고혈을 쪽쪽 빨아먹고 있을 줄은 몰랐다.아마 오늘 그의 작전은 십중팔구 실패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하현은 강우금 같은 여자와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며 기분 상하기 싫어서 황보정의 손을 붙잡고 그녀가 마음에 들어 했던 옷을 집어 냉랭하게 말했다.“이 옷으로 합시다. 다른 건 나중에 사죠.”강우금은 하현의 손에
”손님, 아무렇게나 만지면 안 됩니다. 이 옷은 너무 비싸서 더러워지면 팔 수가 없거든요!”황보정이 옷을 꺼내 보려고 손을 뻗었을 때 점장으로 보이는 거만한 여자가 하이힐을 앞세우며 다가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황보정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며 말했다.“아, 죄송합니다. 저 옷 사고 싶은데 좀 꺼내 봐 주세요.”“꺼내 봐 달라고요?”점장은 황보정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깨끗하게 세탁한 셔츠에 눈길을 모으며 말했다.“정말 살 수 있어요? 꺼내 봐 달라고요?!”“그게 무슨 말이에요?”“우리 황보정이 집복당 손녀인 걸 몰라요?!”황보정 곁에서 가방을 들고 있던 나박하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버럭 했다.“집복당 손녀?”점장이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렸다.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했던가!비록 집복당 명성이 예전만 못했지만 점장은 함부로 황보정을 건드릴 용기는 없었다.점장의 목소리를 듣고 하현은 약간 귀에 익다는 생각이 들어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진홍민의 절친 중 한 명인 게 분명했다.예전에 진홍헌이 대대적으로 고백했을 때도 이 여자는 현장에 있었다.하현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의 가슴에 ‘강우금’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하지만 이 여자는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을 눈치채고 하현도 더는 쓸데없는 말씨름을 하기 싫어 아예 입을 다물었다.“손님, 어떤 색이 마음에 드시는데요?”“우리 매장에는 다양한 색상들이 있어서 선택할 수 있어요.”강우금은 미소를 지으며 한껏 판매에 열을 올렸다.황보정은 강우금의 말을 듣고 돌아서서 하현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하현, 여기 와서 좀 봐줘요. 어떤 색이 더 예쁜지.”“예?”“하현?!”강우금은 그제야 하현을 알아보았고 처음에는 살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냉소 가득한 얼굴을 보였다.비록 그날 하현이 진홍헌의 청혼식에서 크게 한판 벌였지만 나중에
황보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현은 앞에 놓인 다과를 말끔하게 먹은 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 그럼 이 일은 이렇게 잘 마무리되었으니 나중에 쇼핑몰에 가서 옷이나 몇 벌 사자고!”“앞으로 내 대변인이 될 사람이니 말끔하게 보여야지.”“우리가 하려는 프로젝트는 대단히 수준 높은 프로젝트거든. 당신이 앞으로 접촉할 사람들은 모두 부유하거나 지위가 높거나 하니까 절대 무시당하지 않도록 준비를 단단히 해야지!”하현은 오늘의 이 결정을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내린 것이 아니었다.현재 임단은 이미 금정 화원에 있는 쓰레기 매립장 인수 일을 착수했다.비록 세간에서는 임단이 머리가 나쁘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하현은 금정 화원의 유적지가 발굴되는 순간 프로젝트 전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이러한 전제하에 황보정이 자신의 대변인이 되어 일하겠다는데 멋진 옷 몇 벌 사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황보정이 비록 풍수사로서 인정은 받았지만 방값이 꽤나 비쌌고 수입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이전에 저축해 두었던 돈은 의사를 구하는 데 거의 써 버렸기 때문에 정말로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황보정은 한참 예쁘게 꾸밀 나이였지만 제대로 된 번듯한 옷도 몇 벌 없었다.하현은 이 기회를 빌어 황보정에게 옷도 몇 벌 장만해 주고 살아갈 발판도 마련해 주고 싶었다.황보정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나지막이 말했다.“하현, 아직 입을 만한 옷이 있어요. 살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왜? 안 사게?”옆에 있던 나박하는 차를 마시며 껄껄 웃었다.“하현이 옷을 사 준다고 하잖아!”“우리가 말끔하게 차려입지 않으면 하현의 체면이 깎여!”“이제 하현은 금정 제일의 풍수지리사로 불리게 되었어!”“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너무 허름하게 입으면 손님들이 우리 대사님의 실력을 의심할 거야!”“그러니 사양하지 마. 잠시 후에 우
다음날 아침 일찍 하현은 방을 나섰다.설은아의 방문을 지나칠 때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두 사람이 또다시 다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거실에 와 보니 최희정은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하현이 지나가자 그녀는 눈을 흘기며 슬쩍 곁눈질할 뿐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미간에는 그를 향한 마뜩잖은 기색이 가득했다.최희정은 어젯밤 설은아와 하현의 말다툼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래서 그의 뻔뻔함과 노여움을 눈빛으로 드러낸 것이다.하현도 최희정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문을 나서려는 순간 최희정이 우다금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소리를 들었다.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최희정이 우다금과 연락을 하고 있다고?지난번 저지른 일로 우다금은 따끔하게 혼이 나야 했었다.하지만 그다지 큰일이 아니라서 하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집복당으로 갔다.“하현, 아침은 먹었어요?”집복당 입구에 도착해 보니 언제 일어났는지 벌써 황보정이 나와 있었다.그녀의 눈은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고 이제는 집복당 일을 하기 시작했다.하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황보정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다과를 좀 만들었는데 한번 먹어 볼래요?”황보정은 오늘 짧은 잔꽃 무늬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고운 자태였고 걸을 때 슬쩍슬쩍 보이는 하얀 다리는 눈부시게 빛났다.특히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하현은 싱그러운 젊은의 기운을 물씬 느꼈다.아찔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가 말했다.“그럼 감사히 먹어 볼게.”“감사할 사람은 나예요. 내 눈을 낫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몸도 정상으로 돌려놓았잖아요!”황보정은 동작이 재빨랐다.“안타깝게도 할아버지는 내가 남들 관상을 봐주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세요. 내가 박명해서 다른 사람들의 관상을 계속 봐준다면 결국 내가 천기를 누설할 거라고 하셨어요.”“이번엔 다행히 당신을 만나서 살았지만 다
”풍수?”“하 대사?”“풍수관?”설은아는 명함을 움켜쥐고 노기 어린 얼굴로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제대로 된 일을 하지는 않고 강호의 사기꾼이 되겠다는 거야?”“내가 당신을 이렇게나 오래 알고 지냈는데 당신이 풍수지리술을 안다는 걸 어떻게 몰랐을까?”“풍수를 보는 일이 얼마나 진지하고 엄숙한 일인지 알아?”“몇 마디 말로 사람들을 속이며 돈을 벌 수 있는 게 아니야!”“자칫 잘못하다간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기도 하는 거야! 알기나 해?”하현의 명함에 적힌 직함을 보면서 설은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집복당, 아홉 대째 내려오는 대단한 실력, 주역 대사...하현은 자신의 본업에는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남원이나, 무성, 대구에서는 하현이 정말로 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금정에 와서 하현과 간민효가 친밀하게 지내더니 지금 눈앞에 내놓은 명함이라는 것을 보고 설은아는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이전에 하현이 보여준 모든 것은 자신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닐까?지난 모든 것은 하현이 설 씨 가문을 설득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허상 같은 것이었다!그리고 이 허상을 만든 장본인은 하현이 밖에서 만나고 있는 간민효임이 틀림없다!금정 간 씨 가문의 간민효는 이 모든 것을 해낼 능력이 있는 여자이다.바닥에 널브러진 사진들이 그것들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들이다!분노한 설은아를 보며 하현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우선, 그런 눈빛으로 날 쳐다볼 필요가 없어.”“난 당신한테 말할 수 있어. 나와 간민효는 금정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처음 알게 되었어.”“과거의 모든 일은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어.”“둘째, 그녀와 난 그저 평범한 친구일 뿐이야. 당신한테 하나하나 말하긴 어렵지만 지금 함께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어.”“셋째, 내가 풍수관을 연 것은 나름의 목적이 있어서야. 내가 개업을 할 수 있다는 건 나 스스로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는 걸 의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간민효랑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라고 한다면 당신 믿겠어?”설은아의 두 눈에 찬서리가 내려앉았다.“그럼 내가 김탁우랑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한다면 당신 믿겠어?”“그거랑 이거랑은 달라.”설은아의 말을 듣자마자 하현이 되받아쳤다.“뭐가 달라?”설은아도 지지 않고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긴장감을 올렸다.“김탁우가 이 사진을 주었을 때 우리 부부간의 감정을 해칠 수 있다며 약간 망설였었어.”“하지만 지금 보니 이 사진들이 아니었어도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훼손될 감정도 없는 것 같아!”“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둘 게 있어!”“내 차는 정비한다고 당신 비서 이시운이 가져갔어.”“그래서 일이 끝난 후 김탁우가 마침 가는 길에 날 데려다준 것뿐이야!”“나와 그 사람은 결백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 누구와는 정말 다르지!”하현은 설은아의 말에 다소 화가 치밀어 올라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난 당신을 믿어. 하지만 김탁우는 믿지 않아.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설마 당신이 그것을 눈치 못 챌 리가 없을 텐데?”“하현, 함부로 말하지 마! 김탁우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설은아는 얼굴 가득 노기를 띠며 말했다.“내가 이 사진들을 당신 앞에 내놓은 것은 적어도 당신이 조금이라도 반성하길 바래서였어!”“앞으로 이 들개 같은 여자랑 엮이지 말라고 말이야!”“하지만 당신은 결국 나의 호의는 전혀 헤아리지도 못하고 이런 무의미한 질투까지 하고 있어!”“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재혼에 대해 엄마한테 잘 말할 수 있는지 그런 거나 궁리해야 하는 거 아니야?!”하현은 냉정을 유지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조건을 내걸었잖아?”“당신을 대구 정 씨 가문 수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그래서 나도 그쪽으로 노력하고 있어...”“뭐?”하
나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말했다.“하현, 주광록은 여섯 은둔가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주 씨 가문 출신이야.”“은둔가 주 씨 가문은 예전에 금정이 수도였던 시절의 왕가였어.”“그래서 금정 은둔가 중에서 주 씨 가문의 권세가 가장 강해.”“주 씨 가문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대개가 다 관청이나 관청 산하에 있지.”하현은 생각에 잠긴 듯 살짝 눈썹을 오므렸다.그는 요즘 보이지 않는 세력이 은둔가들을 공격하는 듯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그러나 은둔가 가문들이 자신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아직까지 발견된 것은 없었다.짚이는 데가 있긴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나천우 부부와 헤어진 뒤 하현은 다시 집복당으로 돌아가 인테리어 공사하는 것을 둘러보고 몇 가지 풍수적인 사항을 짚어본 뒤 그곳을 떠났다.설 씨 집안으로 돌아온 그는 방에 들어와 창문을 열었다.바로 그때 마세라티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차창 아래로 얼굴을 내민 사람은 김탁우였다.곧이어 조수석에서 내리는 설은아의 모습이 보였고 김탁우는 신사다운 점잖은 모습으로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다.이를 본 순간 하현은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뭐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지금 무슨 말을 해도 설은아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곧 문 앞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방문이 열리자마자 방금 돌아온 설은아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하현이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본 그녀는 살짝 당황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당신, 방금 다 봤어?”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은아를 쳐다보았다.“그가 당신한테 접근한 것은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거야.”“다음부턴 만나지 마.”하현이 자신을 힐난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설은아는 갑자기 화가 났다.그녀는 냉랭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하현, 지금 상당히 선을 넘은 것 같은데!”“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