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문이 열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상복을 입은 남자가 살기 어린 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 차가운 표정과 눈빛에 사람들은 소름이 돋았다.“유진우? 네가 어떻게 왔어?”장경화가 인상을 썼다. 유진우를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와서 공짜로 한 끼 먹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어디가 잘못된 건가, 상복을 입고 생일파티에 오다니, 불길하게!”단소홍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좋은 날에 상복이 웬 말이야?’“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진짜 왔네.”강백준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며칠 뒤 다시 처리하려 했는데, 이렇게 빨리 나타나 줄 줄은 몰랐다.“진우 씨?”이청아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급히 문 쪽을 쳐다보았다. 유진우가 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와줬다. 유진우에게 이청아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진우 씨 왔구나. 그럴 줄...”이청아가 웃으며 입을 떼려는데, 마침 유진우의 차가운 눈빛을 보았다. 순간 그녀는 굳어졌다. 이렇게 차가운 눈빛은 본 적 없었다.유진우는 이청아를 슬쩍 보고는 더 이상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모르는 사람을 본 듯 무심했다.이청아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백준!”유진우의 눈길이 강백준에게 고정됐다.“나 불렀어?”강백준은 자리에 앉아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채였다. 그의 눈빛에서 경멸과 비웃음이 보였다.“강백준, 나쁜 일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거야.”“웃기는 소리! 강 장군님께 까불다니, 살고 싶지 않나 봐?”사람들은 모두 화가 나 씩씩거렸다. 강백준에게 잘 보일 기회를 그냥 날릴 순 없었다.“뭐 하는 거야? 네 옷 좀 봐. 축하하러 온 거야, 저주하러 온 거야?”장경화가 화를 내자 단소홍이 맞장구를 쳤다.“유진우!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당장 꺼져!”“오늘 일은 당신들과 상관없는 일인데, 꼭 강백준 편을 들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절대 안 봐 드릴 겁니다.
“여봐라! 당장 가서 저 짐승 같은 놈을 잡아!”정신을 차린 장경화가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왔고 저마다 전기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가서 잡아!”명령이 떨어지자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한꺼번에 유진우에게 달려들었다. 유진우가 한쪽 손을 휙 휘두르자 은침 한 줄이 질서 정연하게 날아갔다.경호원들은 유진우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나같이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울부짖었다.눈 앞에 펼쳐진 괴이한 광경에 주변 사람들은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두려워 뿔뿔이 흩어졌다. 조금 전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떠들어대던 장경화도 더는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오늘의 유진우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아주 매정했다.“강백준, 오늘 네 제삿날이 될 거야. 아무도 널 구하지 못해!”유진우는 고개를 돌려 날카롭고 살벌한 눈빛으로 강백준을 쏘아보았다.“아주 미쳐 날뛰는구나!”그때 옆에 있던 한 장발의 남자가 갑자기 상을 탁 치며 일어났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진우를 쏘아보았는데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었다.“넌 또 누구야?”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난 귀멸사 정혁이다.”장발의 남자가 이름을 얘기한 순간 현장이 떠들썩해졌다.“세상에나! 귀멸사 정혁이라고? 그자가 여긴 어쩐 일이야?”“정혁이 누구야? 실력이 강해?”“강하다 뿐이겠어? 저 사람은 스카이 랭킹 3위인 강자야. 강남의 젊은 세대 중에서 정혁의 상대가 거의 없을걸?”“대박! 스카이 랭킹 3위라고? 그런 거물이 왜 여기에 있어?”정혁의 명성을 들은 후 나름 식견이 넓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강북과 강남에 무사들이 많긴 하지만 스카이 랭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무사는 손에 꼽힐 정도로 아주 적었다. 그리고 스카이 랭킹 10위 안에 든 고수는 대부분 연경에 있었다.정혁 같은 고수들은 강남에 거의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런 도전성이 없으니까.“장군님, 저 사람
“으악...”천장에 꽂힌 정혁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으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이런 변고가 생길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상대는 스카이 랭킹 3위인 귀멸사 정혁이다. 이런 최고의 강자가 강남에 왔다면 강남 바닥을 휩쓸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그런데 고작 주먹 한 방에 맥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몸 절반이 천장에 꽂혀 내려오지도 못했다.설마 짝퉁 귀멸사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맥을 못 춘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정혁이... 날아갔어?”“X발, 저 자식 어디서 온 괴물이야? 귀멸사 정혁까지 상대가 안 되다니!”“말도 안 돼... 너무 어이없는데?”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현장 전체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다들 유진우를 괴물을 쳐다보듯 했고 혹시라도 그의 눈에 띌까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말... 말도 안 돼. 정혁이 졌어?”강백준의 얼굴에 지어졌던 미소도 완전히 사라졌고 그 대신 놀라움과 경악으로 가득 찼다.정혁의 실력이 어떠한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선보인 공격은 그의 필살기였다. 이치대로라면 그 공격을 받으면 유진우는 바로 즉사해야 했다. 그런데 왜 눈 깜짝할 사이에 상황이 역전된 거지? 조금 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단 1초에 정혁을 해결하다니, 저 자식 대체 정체가 뭐야?”부관은 두려움에 떨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군인 무사인 그는 스카이 랭킹 3위의 실력이 어떠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연경에서도 손꼽히는 일류 고수일 것이다.이런 존재가 단 일격에 패했으니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강백준, 인제 네 차례야.”정혁을 해결한 후 유진우의 싸늘한 눈빛이 또다시 강백준에게 향했다. 겁에 질린 강백준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인마! 경고하는데 함부로 나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강씨 가문의 도련님이자 용국의 소장이야. 내 털끝 하나라도 건
“거기 서!”그때 이청아가 갑자기 앞을 막아서며 소리를 질렀다.“진우 씨,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오늘은 우리 엄마 생신인데 오자마자 다짜고짜 난장판을 만들어? 당신 날 안중에 두기나 해?”“이건 나와 강백준의 일이야. 당신과는 상관없어.”유진우의 표정이 냉랭하기 그지없었다.“왜 나와 상관없어? 우리 엄마를 때리고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가만히 놔둘 것 같아?”이청아의 예쁘장한 얼굴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유진우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난동을 부리며 주먹을 날렸다. 계속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일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지도 모른다.“청아 씨와 나 사이의 원한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 지금은 일단 물러나 있어.”유진우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이젠 그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나기 시작했다.“물러서지 않겠다면? 설마 나도 때리려고?”이청아가 몰아붙였다.“내 인내심을 테스트하지 마.”유진우가 눈살을 찌푸렸고 눈빛도 아주 서늘했다.“진우 씨, 대체 언제 이렇게 변한 거야? 내가 알던 그 사람 맞아?”이청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진우가 이렇게도 매정하게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쌓인 정 같은 건 아예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난 늘 이랬어. 당신이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지.”유진우가 매정하게 쏘아붙였다.“이... 나쁜 자식아!”분노가 치밀어 오른 이청아가 손찌검을 날리려 하자 유진우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냉랭하게 말했다.“당신은 지금 나에게 손댈 자격이 없어. 난 당신에게 빚진 게 없으니까 저리 물러가 있어.”그러고는 그녀를 옆으로 밀어냈다. 순간 중심을 잃은 이청아는 비틀거리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에 시뻘건 손가락자국이 선명하게 생겼다.“뭐야?”유진우의 시선이 다시 강백준에게 향했을 때 강백준은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던 틈을 타서 도망치고 말았다.“X발!”유진우의 표정이 확 어두워지더니 곧바로 쫓아나갔다. 그런데 얼마 못 가 이청아가 다시 앞을 막아섰다.“진우
“빨리! 더 빨리! 그 자식 거의 쫓아온다고. 액셀 더 밟아!”검은색 벤츠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강백준은 끊임없이 다그치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그런데 조금 전 겨우 도망친 후 얼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또 누가 쫓아오는 걸 발견했다. 뒤차가 어찌나 끈질기게 달라붙는지 아무리 떼어놓으려고 해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하여 운전기사에게 계속 빨리 달리라고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강백준은 유진우에게 잡히면 절대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X발, 정말 미친놈이야. 천한 목숨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진다고? 내가 연경으로 돌아가면 바로 군대를 동원해서 강린파인지 뭔지 하는 그 잡것들을 전부 다 죽여버릴 거야.”강백준은 입으로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이마에는 식은땀이 멈추지 않았다.오늘처럼 이렇게 초라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큰소리치며 다니던 강씨 가문의 직계이자 용국의 소장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그리고 문제는 근위병마저 전부 잃었다는 것이다. 실력이 가장 강한 정혁마저도 주먹 한 방에 천장에 꽂혀 지금까지도 내려오지 못했다.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미친 듯이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물론 연경으로 돌아가면 자기 구역이니 다시 큰소리를 칠 수 있다. 유진우의 실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연경에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될 뿐이다.“도련님, 점점 더 많은 차가 쫓아오고 있어요. 계속 이대로 뒀다간 연경으로 못 갈 수도 있어요.”운전기사가 갑자기 당황해하며 말했다. 백미러로 점점 많은 차가 그들을 포위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X발, 정말 끈질기네.”더는 머뭇거릴 겨를이 없었던 강백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 구원 요청을 보냈다.그 시각 연경의 강씨 저택.“뭐? 쫓기고 있다고?”위엄이 넘치는 한 중년 남자가 전화를 든 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사람이 바로 강씨 가문의 둘째이자 강백준의 아버지 강성덕이었
강백준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노발대발했다. 하필 생사가 오가는 중요한 순간에 기름이 없다니, 그더러 죽으라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도련님, 어떡하죠?”거의 바닥난 기름을 보며 운전기사는 땀을 뻘뻘 흘렸다. 주변이 온통 허허벌판이라 숨을 곳도 없었다.“조금만 더 버텨. 지원병이 곧 도착해.”강백준이 이를 꽉 깨물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지원병이 제때 도착하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제때 도착하지 못한다면 결과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10분 후, 검은색 벤츠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결국 길가에 멈춰 섰다. 그 순간 승합차 십여 대가 우르르 몰려와 벤츠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차 문이 열리자 강린파의 엘리트 고수 수십 명이 기세등등하게 내렸다. 어떤 이는 총을 들고 어떤 이는 칼을 쥔 채 그를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었다.유진우는 장 어르신의 칼을 건네받고 벤츠 앞으로 다가가 발을 보닛 위에 올려놓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차 안의 강백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내려서 내 칼을 받아.”“인마, 함부로 나대지 마. 내 지원병이 곧 도착해.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다 죽을 거야.”강백준이 흉악스러운 표정으로 협박했다.“불 질러서 차를 태워버려.”더는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았던 유진우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태워버려!”장 어르신이 손을 흔들자 부하들이 기름을 가져와 벤츠에 냅다 부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성냥에 불을 붙여 벤츠에 던져버렸다.화르르!불길이 순식간에 자동차 전체를 집어삼켰고 사나운 기세로 하늘 위로 치솟았다.“절 죽이지 말아주세요! 제발요.”당황한 운전기사가 재빨리 차에서 내려 무릎 꿇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강백준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차 문을 걷어차고 부랴부랴 도망쳤다.“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장 어르신이 앞으로 달려가 강백준을 단번에 제압했다. 마스터급 이하의 무사 중에 본투비 대원만 고수인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강백준 같은 보잘것없는 실력을
“인제야 잘못한 걸 깨달았어? 네가 사람을 해칠 땐 오늘이 있을 줄 생각 못 했어?”머리를 조아리며 손이야 발이야 비는 강백준을 보고 있는 유진우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두 눈에 찬 살기도 여전히 그대로였다.“내가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되었었나 봐. 사과할게. 그러니까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줘. 날 놓아주면 앞으로는 정말 인간답게 살게.”강백준이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렸고 한 마리의 개처럼 비굴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존심 따위 다 버렸다.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왜 내가 너에게 인간답게 살 기회를 줄 거라고 생각해?”유진우가 싸늘하게 물었다.“나... 돈도 있고 인맥도 있어. 목숨만 살려준다면 그 어떤 조건이든 다 들어줄게.”강백준은 유진우를 회유하려 했다.“난 다른 조건 없어. 그저 네가 죽길 바랄 뿐이야.”유진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죽이지만 말아줘! 제발. 날 살려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야. 널 더 높은 자리에 앉힐 수 있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줄게.”당황한 강백준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 모습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관심 없어.”유진우는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강백준의 등을 베었는데 기다란 상처가 생겨났다.그는 강백준을 바로 죽일 생각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공포와 고통이 무엇인지 제대로 맛보게 할 생각이었다. 하여 강백준이 아무리 빌고 처참하게 울부짖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것이었다.유진우는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강백준의 몸을 여기저기 찔렀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강백준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고 피를 철철 흘렸다.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유진우가 급소를 전부 다 피했다는 것이다. 강백준에게 더 많은 고통을 주려고 심지어 침을 놓고 약까지 먹이면서 지혈해 주었다.칼에 백여 번이나 찔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몰골이었지만 여전히 힘이 남았고 단지 비명만 처참할 뿐이었다.
적외선 빛이 유진우의 몸에 빼곡하게 나타났다.“셋...”안 장관이 손을 들고 카운트다운하기 시작했다. 말투가 매우 느리긴 했지만 위압감만큼은 아주 강했다. 특히 수많은 무장 병사들까지 더해져 더욱더 위압적이었다.“하하, 인마, 넌 결국에는 날 죽이지 못해. 네가 머리를 짜내서 날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버린들 어쩌겠어? 내가 죽지 않는 한 가문의 자원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회복할 수 있어. 그런데 넌? 이젠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 신세가 돼버렸잖아. 내 말 한마디면 넌 바로 목이 날아갈걸? 일이 왜 이렇게 된 줄 알아? 네가 천민이어서 그래.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천민이면 천민답게 굴어야지. 개미 새끼 한 마리 주제에 감히 나에게 덤벼?”강백준이 흉악스럽게 웃었다. 안 장관이 나타난 후로 그는 마치 승리를 손에 거머쥔 듯 배짱이 두둑해졌다.“강백준, 네 말이 맞긴 한데 아쉽게도 한 가지가 틀렸어.”유진우가 불쑥 말했다.“그게 뭔데?”강백준이 잠깐 멈칫했다.“너의 생사는 내 손에 달려있어.”말을 마친 유진우는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다.“안 돼!”“멈춰!”성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강백준의 목을 스치고 말았다.“너... 너 감히...”강백준이 두 눈을 크게 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오면서 목이 툭 떨어졌고 마치 공처럼 바닥에서 몇 바퀴 구르고 나서야 멈췄다.죽기 직전까지도 강백준은 유진우가 진짜로 자신을 죽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무주의 장관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이 녀석은 정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너... 너... 이 미친놈! 짐승만도 못한 놈아, 감히 강 장군님을 죽여? 오늘 그 누가 와도 널 구하지 못해! 총 쏴! 당장 쏴!”정신을 차린 안 장관이 노발대발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꼼짝 마!”장 어르신은 한 손에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게 교묘하게 짜인 계획이었던 셈이다.유태범은 이들의 동선과 의도를 이미 꿰뚫고 있었고, 애초부터 이들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유태범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그래서 미리 판을 짜 두고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병부를 빼앗는 데 성공한 것이다.결국 이들이 스스로 늑대를 집 안에 들인 셈이 되어 병부를 잃고 말았다.서경의 표기대장군 자리에서 유태범이 한 사람 아래 수많은 사람 위를 차지했던 이유가 새삼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속내를 꿰뚫는 교활함에서 이들은 아직 조금 모자랐다.밤이 지나 아침이 밝았다.밤새 치른 전투의 흔적을 정리하면서 왕부 대문 앞에 쌓였던 시신들은 이미 수습됐지만 땅속으로 스며든 핏자국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남은 세 제후가 이끌고 온 병력은 근처 성방영에 배치되어, 만약 사태가 급변하면 언제든 왕부를 도울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다.병부를 도난당한 탓에 왕부 안 사람들은 대부분 밤새 한숨도 못 잤다.석태혁이 이끌고 나간 유만군 역시 밤새 밖을 뒤졌지만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뒤, 이의진은 다시 한번 주한휘, 은성종, 그리고 장범규를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하고 정보를 모았다.하지만 병부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뾰족한 방도가 떠오를 리 없었다.그때, 간밤에 사라졌던 석태혁이 마침내 돌아왔다.떠날 땐 부하들과 함께였는데 돌아올 땐 그 혼자뿐이었고 게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모습이었다.의논 중이던 이들이 모여 있던 의회장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더니 피를 토했다.“장군님! 어쩌다 이렇게 크게 다쳤습니까?”이의진이 크게 놀라 급히 사람들을 시켜 석태혁을 의자에 앉혔다.“장군님, 병부는 찾으셨나요?”주한휘는 석태혁의 상처보다도 병부의 행방이 더 급한 듯 보였다.“왕비님, 소장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제갈영군을 따라잡기는커녕 도중에 매복을 당해 함께 간 유만군 병력도 전멸됐습니다. 병부 역시 되찾지 못했으니 부
“뭐라고요? 서경을 떠나 도망치자고요? 그럼 왕위는 그대로 유태범한테 넘어가는 거잖아요.”유천우는 표정이 어두워졌다.“산만 남아 있으면 땔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살기만 하면 우리는 아직 기회가 있어.”은성종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왕위를 뺏기고 병부도 잃고 50만 흑용군까지 모조리 유태범이 호령하게 되면, 저희가 무슨 수로 다시 기회를 잡겠어요.”주한휘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도 이 지경이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욕심내어 유씨 가문과 연을 맺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무 이득도 못 보고 오히려 그만 곤란한 처지에 빠졌으니 진퇴양난이었다.“은 제후님 말씀대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요.”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들에게 너무나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병부가 정말 유태범 손에 들어가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터. 결국 서경을 떠날 수밖에 없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그녀는 용국의 장공주이니, 서경을 떠나 연경으로 가더라도 어떻게든 자리 하나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들에게 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 길도 고려하고 있었다.“그래도 너무 낙담하진 마요. 석 장군의 실력도 제갈영군과 막상막하니까요, 혹시라도 병부를 되찾아 온다면 저희에게도 길이 열릴 거예요.”은성종이 나직이 덧붙여 말했다.“맞습니다. 아직 결판이 난 건 아니니 모두 기운 내세요.”장범규가 힘주어 말했다.“여러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유천우는 가볍게 몸을 숙여 예를 표한 뒤 뒤돌아서 편전을 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형 육진우였다.유천우는 도령 차림으로 변장한 육진우를 따로 불러 자신이 묵는 방으로 안내했고 시종들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지시했다.“천우야, 아까 지붕 위에서 인기척이 스쳐 갔던데 무슨 일이 생긴 거야?”안전하다고 느낀 육진우가 먼저 물었다.“네, 제후님들께서 함께 계시던 편
은성종이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빨리! 병부를 쫓아!”이의진도 곧바로 지시했다.“쫓아가요!”석태혁은 번개처럼 칼을 뽑아 들고 유만군 부대 일부를 이끌고 제갈영군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유천우는 멍하니 서 있다가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설마 제갈영군이 병부를 빼앗아 도망칠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갈영군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천우야, 제갈영군은 원래부터 유태범 쪽이었나 봐. 전력을 다해 너를 지지하고 왕부를 돕는 척한 건, 우리 경계를 완전히 풀어놓기 위해서였던 거지. 때가 되면 병부를 빼앗아 우릴 궁지에 몰아넣을 속셈이었어.”은성종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제길... 제갈영군이 배신자였다니, 너무 괘씸하잖아요!”장범규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러게 말이에요. 흑용군 얘기를 그렇게나 강조하더니, 결국 병부를 훔쳐 달아날 빌미를 만든 거였네요. 정말 교활해요!”주한휘가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렸다.“만약 병부를 되찾지 못하고 유태범 손에 넘어가면... 저희는 완전히 끝나고 말 거예요.”이의진은 눈살을 찌푸린 채 심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원수 병부가 흑용군의 지휘권을 결정한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병부를 쥔 자가 흑용군을 움직일 수 있으니, 유태범이 지금껏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부대를 끌어온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었다.병부만 있으면 그 즉시 전군을 호령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50만 흑용군이 들이닥치면 서경은 물론 천하 어디라도 막아낼 재간이 없을 터였다.“어머니, 죄송합니다. 전부 제 탓이에요. 제가 좀 더 주의 깊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유천우는 깊이 고개를 떨구었다. 병부가 자기 손에서 떨어져 나간 이상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고 생각했다.“천우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제
왕부의 편전.네 명의 제후는 차례대로 자리에 앉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제갈영군은 한가롭게 차를 음미했고, 은성종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주한휘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왕부 편전의 장식을 구경했고, 장범규는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일어나 앉았다가 몇 걸음 왔다 갔다 하며 마음을 졸이는 모습이었다.한 차례 시간이 흘러, 이의진이 유천우와 석태혁을 데리고 마침내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정교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여러분, 병부를 가져왔어요.”이의진이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열자, 그 안에는 금빛의 호부가 놓여 있었다. 호랑이 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위엄이 깃들어 보였다. 호부 한가운데에는 ‘병갑지부, 좌재왕, 우재경’이라는 금색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역시 병부군요!”호부를 본 장범규가 눈을 반짝였다.“이 병부만 손에 넣으면 흑용군을 동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유태범의 음모도 허무하게 끝나겠죠.”“천우야, 지체할 시간 없어. 병부를 들고 흑용군 주둔지로 가서 그 장수들을 만나. 신분을 확실히 밝혀야 해. 유태범이 틈탈 구석이 없도록.”주한휘가 서둘러 재촉했다.“병부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야. 유태범이 순순히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 가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다. 철저히 준비해야 해.”은성종이 경고하듯 말했다.“알겠습니다, 제후님. 이미 어머니께도 상의드렸어요. 열 개 정찰팀을 꾸려 여러 갈래로 성을 나갈 거고, 저 역시 그중 한 무리에 섞여서 움직일 겁니다. 유태범이 대비하고 있어도 쉽게 제 위치를 알아내진 못하겠죠. 유태범이 위협을 눈치챌 무렵이면 저는 이미 흑용군 주둔지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그거면 충분하겠군.”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번 당부했다.“천우야, 이번 행선지는 너랑 왕비님만 아는 걸로 해. 괜히 입 밖에 새면 사고가 터질 수 있어.”“명심하겠습니다, 제후님.”“자, 그럼 빨리 움직이자.
“안 돼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육진우가 모험을 강행하려 하자 유천우는 곧바로 제지하고 나섰다.유천우는 그가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유태범의 주변에는 정말 많은 고수가 몰려들어 있었다.두 주먹이 네 손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만약 암살에 실패라도 하면 수많은 고수들의 포위망에 걸려들 위험이 컸다. 장차 서경왕이 될 몸으로서, 유천우는 결코 함부로 유진우가 위험을 감수하도록 둘 수 없었다.“천우야,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는 누군가 희생을 감내해야 하지. 게다가 호위는 하나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주한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유천우는 거의 고함치듯 외쳤다.강한 기세가 순간 터져 나와 주한휘는 뒷걸음질 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아무도 유천우가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하지 못했다.자신이 좀 과격했음을 깨달은 듯, 유천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제후님, 호위의 목숨도 저희와 똑같이 소중해요. 괜히 헛된 희생을 치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모두를 납득시키겠어요?”“그래,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네.”주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속으로는 그가 호위 하나 때문에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면,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설마 그냥 손 놓고 당하기만 할 생각은 아니겠죠?”장범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제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제갈영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 어떤 방법인데요?”이의진이 살짝 미간을 올리며 물었다.“유태범이 믿는 가장 큰 무기는 흑용군이에요. 우린 이 점을 공략하면 됩니다.”제갈영군은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다들 아시다시피, 전쟁 시기가
석태혁의 발언은 순간적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의진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머뭇거리며 술을 다물었다.석태혁은 왕부의 친위이자 그녀가 굳게 신뢰해 온 인물이기에 솔직히 그가 목숨을 걸고 위험에 뛰어들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장군님께서는 워낙 강하시고 충성도 깊으니 유태범을 암살하러 간다면 가능성이 있겠죠.”장범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친위대장인 만큼 실력이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장군님, 제가 괜히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아니지만 혼자 가시는 건 좀 무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제갈영군이 갑작스레 말했다.“잠깐! 아직 그 전설 속의 인도가 있잖아요?”주한휘가 문득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인도란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겠죠. 인도의 실력이라면 장군님 못지않을 텐데요?”“아니요, 홍복홍께서는 저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석태혁이 차분하게 답했다.그가 친위대장이기는 해도 왕부의 진정한 비책은 사실 인도 홍복홍이다. 서경의 세 고수 중 검선은 세상을 떠났고, 주광은 행방이 묘연하다. 결국 남은 인도가 서경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다.대 마스터 급의 인도는 그가 견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와, 그럼 잘됐네요! 인도가 장군님보다 훨씬 강하시다면, 그분께 부탁드리는 게 훨씬 확실하지 않을까요?”주한휘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유감이지만, 홍복홍께서는 왕부를 떠나신 뒤로 지금까지 종적을 감추셨어요. 그분께 부탁드리긴 힘들 것 같네요.”석태혁이 고개를 저었다.“종적이 묘연하다니...”장범규가 미간을 찌푸렸다.“홍복홍이라는 분, 왕부가 이렇게 위태로운데 어디 가신 건지 모르겠군요.”“설마 상황이 안 좋아 보이니까 도망쳐 버린 건 아니겠죠?”주한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주 제후, 그런 말씀은 삼가주세요. 홍복홍께서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 바쳐 오신 분이에요. 도망칠 리가 없습니다.”석태혁의 얼굴이 굳어졌다.“아,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주한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문제가 좀 있어요.”제갈영군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새 왕이 즉위하려면 폐하의 허가와 백관의 승인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워요. 게다가 폐하의 뜻을 받고 백관을 모시려면 앞뒤로 최소 사흘은 걸려요. 지금 우리 상황으로는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없죠.”“에이, 설마? 즉위가 그렇게나 복잡해요?”장범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다들 천우가 어르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잖아요. 그럼 당연히 서경왕 자리를 잇는 게 맞지 않나요?”“맞아요! 급할 때는 융통성도 발휘해야 하는 거잖아요.”주한휘가 곁에서 맞장구쳤다.“두 분 다 서경왕위를 산적 두목 뽑듯 생각하시는 건가요? 깃발 하나 꽂고 술 몇 사발 마신 다음 큰소리 몇 마디로 끝낼 일이 아니에요. 농담하지 마세요.”제갈영군이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서경왕위는 서경 백성만이 아니라 천하 모든 사람의 안위와도 연결돼 있죠. 서경이 혼란스러워지면 천하가 뒤숭숭해지고, 서경이 안정되면 천하도 평안해져요. 과장이 아니라 서경왕위의 무게는 폐하의 황위에 전혀 뒤지지 않아요. 그런 중요한 자리를 함부로 정하고 아무나 앉을 수 있겠습니까?”“맞아요. 저도 천우가 빨리 왕위를 이어서 군심을 안정시키면 좋겠지만, 왕위 계승은 장난이 아니죠.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고 남들 입방아에 오르기 딱이니까요.”이의진이 고개를 저었다.규율과 절차 없이는 질서가 서기 어려운 법. 서경왕 자리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다. 폐하의 명령과 문무백관의 증인이 없으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다들 너무 규칙만 따져서 이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어요.”장범규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지금 도련님이 왕위를 잇지 못하면 유태범의 대군이 쳐들어올 때 어쩌자는 겁니까?”주한휘가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은 제후님, 혹시 다른 방도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냥 말씀 좀 해주세요. 더는 뜸 들이지 말고요.”제갈영군이 은성종을 바라봤다.“두
“뭐라고요? 목격자를 전부 없애버린다고요?”그 말을 듣자 장범규의 안색이 급변했다.“농담하는 거 아니죠? 북쪽 4대 제후는 모두 유태범의 사람인데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전부 죽인다는 게 말이 돼요?”“큰일을 하는 자는 마음이 독해야 하는 법입니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사람한테 약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제갈영군이 덤덤하게 말했다.“물론 이건 마지막 계획이에요.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무사히 왕위를 빼앗고 병부를 손에 넣는다면 유태범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바로 왕위를 이어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실패하면 유태범은 큰일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욕심이 많은 자일수록 더욱 광기 어린 행동을 보일 것이다.예전에 유태범은 위왕에게 억눌려 힘을 숨기고 기회를 기다렸다. 위왕이 세상을 떠난 지금 속박을 벗어난 유태범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렇다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네요.”장범규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흑용군은 서경에서 가장 강하고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흑용군을 장악한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만약 유태범이 표기 대장군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다시 왕실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흑용군을 대량으로 동원할 가능성이 컸다.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오직 승자만이 왕이 되고 패자는 반역자가 될 뿐이니까.“제후님들은 모두 서경의 기둥입니다. 혹시 좋은 해결책이라도 있습니까?”이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전 싸우는 것만 잘하지, 머리를 쓰는 건 절대 안 돼요.”장범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저도 그렇습니다.”주한휘도 고개를 내저었다.“회음 제후님은 재능이 뛰어나니 뾰족한 수가 있으면 얘기해보시죠.”제갈영군의 시선이 은성종에게 향했다.그들이 성문 앞의 십만 대군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은성종의 회유책 덕분이었다.장교들의 가족과 친구를 이용하여 그들을 설득하고 항복하게 했다.많
지금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유태범이 흑용군을 이끌고 오는 것이었다.“너희 둘은 주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력자야. 사형은 면해도 처벌은 면치 못해.”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여봐라. 저 두 놈을 끌고 가서 감시하고 내 명령 없이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거라.”“알겠습니다.”몇 명의 친위대가 재빨리 다가가 포박된 진승민과 강윤기를 강제로 끌고 갔다.“장군님, 항복한 병사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더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이의진이 석태혁을 보며 말했다.“알겠습니다.”석태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왕비님 자비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그때 네 명이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병사들이 자동으로 길을 터주었는데 네 사람이 바로 남쪽 4대 제후였다.맨 왼쪽으로부터 제갈영군, 그다음은 은성종, 주한휘, 장범규가 나란히 서 있었다.“저희가 너무 늦게 온 바람에 왕비님께서 많이 놀라셨죠? 부디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은성종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겸손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그런 말씀 마십시오. 만약 제때 와주시지 않았다면 왕부가 위험에 처했을 겁니다. 제후님들 모두 공신이십니다.”이의진은 재빨리 다가가 허리 굽힌 은성종을 일으켜 세웠다.사실 남쪽 4대 제후가 이렇게 빨리 군대를 보내 지원해 줄 거라는 건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다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밤낮으로 달려왔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왕부를 지키고 서경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이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은성종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맞습니다. 만약 위왕님께서 저를 살려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왕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요.”장범규가 호탕하게 말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그는 가장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왕비님,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왕부의 어려움은 곧 우리의 어려움이니 당연히 도와야죠.”주한휘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