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목이 무쇠처럼 단단한 손가락에 잡혔다. 그녀는 옥죄여 오는 질식감에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는 격노하여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것 같은 초왕의 얼굴이 보였다. 호흡이 막힌 그녀는 페속의 산소가 점점 줄어드는 질식감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곧 기절할 것만 같았다.“열 살도 안 된 아이한테 어찌.”초왕의 분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찌 이리도 잔인할수가 있을가? 여봐라, 왕비를 끌고나가 곤장 30대를 쳐라!”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원경능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고 방금 뺨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온전히 서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다. 하여 초왕이 목을 조르던 손을 풀자 그녀는 맥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다시 호흡이 가능해지자, 그녀는 다급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의 몸은 다시 누군가에 의해 일으켜졌고 강제로 끌려나갔다.아직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그녀의 눈에는 얼음이 서릴 정도로 냉혹한 초왕의 얼굴이 들어왔고, 이와 동시에 그의 눈에 어린 증오와, 몸을 감싼 화려하고 진귀한 비단 옷도 보였다.그녀는 그대로 돌계단에서 끌어 내려졌다. 딱딱하고 뾰족한 돌계단에 머리가 부딪혔다. 날카로운 아픔과 함께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결국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살아생전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허리와 허벅지에 끊임없이 매질이 이어졌고고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뼈마디에서 부터 온몸으로 고통이 퍼져나갔다. 그녀는 허리와 다리가 곧 부러질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곧이어 입안에서도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과 혀를 깨물었기 때문이였다. 정신은 점점 더 아득하게 멀어지는듯 했으나 아예 기절할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이 그녀를 깨어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곤장 서른대를 다 맞는 시간은 그녀에게 한평생처럼 길게 느껴졌다.원경능은 22세기의 의학천재라 불렸으며, 그녀를 숭배하고 존경하는 사
탕양은 녹아에게 약을 짓게 하고, 기씨 어멈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넨뒤 그 곳을 떠났다.기씨 어멈은 계속 화용이를 돌보고 있었고 날이 어두워 지자 부쩍 겁이 나기 시작했다.녹아도 기씨어멈의 곁에서 함께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채 조용히 화용이를 지켜봤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숨을 쉬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잠들었던 화용이는 뜻밖에도 자시가 가까워지자 깨어났다. 아이는 한쪽 눈을 천천히 뜨더니 기씨 어멈을 바라보았다.“할머니, 저 배고파요!”기씨 어멈은 놀랍고도 기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처가 번지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가 힘들게 구해온 양유(羊奶) 역시 한모금도 넘기지 못했던 화용이다.기씨 어멈은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의외로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의원님의 약이 효과가 있구나, 효과가 있어!”기씨 어멈은 기쁨에 겨워 녹아에게 말했다.“그러게요, 의원님의 약이 효과가 있나 봐요!”녹아도 덩달아 기뻐했다.***다음날 이씨 의원은 다시 초왕부로 모셔졌다.그 아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식에 그는 신기해 했다.“이 녀석은 명줄이 참 길구먼. 다 죽어가던 참이었는데.”기씨 어멈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의원님, 약을 하나 더 지어주십시오. 제 손주 녀석 좀 살려주십시오.”이씨 의원은 잠시 멍해졌다. 어제 처방한 약은 전혀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껏해야 통증을 멎게 하고 진정시키는데 쓰였을 뿐, 상처 치유에는 큰 효과가 있는 약이 절대 아니였다.그러나, 어쩌면 우연히 맞아 떨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화용의 맥을 짚어보니, 확실히 어제보다 나아 보였고 몸도 더는 뜨겁지 않았다.하여 그는 다른 처방을 내렸다. “시녀를 불러 나를 따라와 약을 지으라 이르게. 연속 이틀 동안 먹여야 하네. 상처에 바르는 가루약도 마찬가질세. 호전을 보이면 계속 약을 지으러 오게.”“감사합니다, 의원님!”“진찰비와 약값은 누가 내는가?”의
차가워진 찐빵을 절반 정도 먹고나서 한참이 지나니 그녀의 기력도 어느 정도 회복이되는듯 했다. 바닥에서 애써 몸을 일으켜 탁자 옆 의자에 앉아 탁자에 엎드렸다. 허나 상반신을 일으켜 물을 따를 힘은 없어서 그나마 잔에 남아 있던 차로 일단 목부터 추겼다..이윽고 조금 나아진 느낌이 들어서 엎드리려고 천천히 두 다리를 뒤로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기력이 부족한 나머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 충격에 등에 난 상처에서 저릿한 아픔이 전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아픔이 어느정도 사그러지기 까지 버틴후 팔꿈치로 기어가 약 상자를 찾아냈다. 어둠속에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소염제와 해열제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주사를 맞을 수 없으니 약의 복용량을 늘이이는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또 반시간 정도 지난후 그녀는 비타민C를 찾아내여 몇 알 집어먹었다. 물과함께 삼킬수도 없어 씹어서 삼킨 그녀는 비타민C의 시큼한 맛에 정신이 번쩍 드는듯 했다.약을 다 먹은 그녀는 몸을 웅쿠린채 바닥에 누워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 정도의 육체적인 고통은 태여난후 처음 겪어 보는 것이였다. 이번에 맞은 곤장은 그녀로 하여금 이 시대는 자신이 살던 곳과 매우 다름을 제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곳은 높은 권력과 위치를 가진 자는 사람의 명줄도 손에 쥐고 있는 곳이였다.그리고 그녀의 명줄은 초왕의 손에 쥐여 있었다.이 곳에서 살아 남으려면 반드시 이러한 생존환경에 적응해야 했다.다만 그 아이는 어떻게 됐는지 걱정됐다. 비록 상처는 처치했지만, 약을 쓰지 않으면 제대로 나을 수 있는건 아니였기 때문이다.***한편, 약을 먹은 화가는 다시 고열이 시달리고 있었다.기씨 어멈은 마음이 급해졌다. 분명 낮에는 좋아지고 있었는데, 왜 밤이 되니 다시 열이 나기 시작하는지 알수가 없었다.녹아도 덩달아 급해졌다: “아니면, 제가 다시 이씨 의원을 불러 올가요?”기씨 어멈은 열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며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손자를 바라 보다가, 이씨 의원과 다섯 냥의
어두운 환경에 적응되어 있던 원경능은 갑자기 눈을 자극하는 빛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윽고 귓가에 ‘털썩’하고 무릎 꿇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씨 어멈이 땅에 무릎을 꿇은채 애원하고 있었다.“왕비님, 소인이 왕비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만 왕비님을 오해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소인의 손주를 살려주십시오.”“이리 와서 날 부축해!”원경능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기씨 어멈은 급히 등불을 내려놓고 원경능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리고 원경능의 등에 가득 남아있는 핏자국에 눈이 갔다. 곤장에 맞은 상처라고 생각하니 조금 망설여졌다. 사실 그녀는 아직도 왕비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화용이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움을 청하러 온것이다.“왕비님 일어서실 수 있겠습니까?”“내 약 상자를 갖고와!”원경능은 기씨 어멈이 자기를 죽도록 미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는 건 아마도 화용이의 상황이 많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할수 있었다. 하여 약 상자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숨기는것 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네, 네!”기씨 어멈은 얼른 가서 약 상자를 챙겨들고 다시 그녀를 부축하였다. 그러나 겨우 한 발자국 내딛자 원경능은 엉덩이와 다리에서부터 이어지는 고통에 심장까지 아파왔다. 방문을 나서기만 했을 뿐인데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졌고 극심한 고통에 이까지 덜덜 떨렸다.“왕비님….” “잔말 말고 빨리 가자!”원경능은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사람을 구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매우 순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화용이를 구하는 일에 그녀는 또 다른 생각이 더 추가됐다. 이번에 반드시 아이를 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세워야만 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이 곳에서 살아 남을수 있기 때문이다.“이제 죽지는 않겠네.”갑자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원경능은 본능적으로 기씨 어멈을 돌아 보았다. 기씨 어멈은 한
모든 일을 마친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쳤다. 탁자에 엎드린 채로 잠깐 쉬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볼썽사납다는 것을. 하지만 모습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밖에서는 기씨 어멈의 다소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왕비, 다 되셨습니까?”원경능은 책상을 짚고 천천히 일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들어오너라.”갑자기 문이 열리고 기씨 어멈과 녹아가 뛰어들어 왔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달려가 화가를 살펴보았다. 화가의 안정적인 숨소리를 확인한 기씨 어멈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원경능은 약상자를 들며 말했다.“오늘 밤 일은 비밀에 부치거라. 초왕이나 초왕부의 그 어떤 사람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기씨 어멈과 녹아는 서로 쳐다보며 속으로 원경능의 반응이 의외라고 생각했다.녹아는 앞으로 나아가 원경능을 부축했다.“왕비 소인이 부축하여 모셔드리겠습니다.”“되었다. 화가를 돌보거라. 침대 머리에 내가 남겨놓은 약이 있으니 두 시진마다 한 번씩 먹이거라. 약을 다 먹이면 나에게 와서 더 달라 하거라.”원경능은 녹아의 손을 벗어나 힘겹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왕비!”기씨 어멈이 소리 내어 불렀다. 그녀는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지만, 원경능과의 예전 일이 떠올라 감사하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밤길 어두우니 등불을 들고 가십시오.”그녀는 등불을 넘겨 주었다. 원경능은 등불을 받으며 말했다. “고맙구나!”기씨 어멈은 깜짝 놀랐다.고맙다고? 왕비가 고맙다고 말한 건가?원경능은 봉의각에 돌아와 혼자 주사를 한 대 놓은 후 침대에 쓰러졌다.염증을 최대한 억제시켰지만, 상처 면적이 너무 컸다. 거기다 항생제가 들어 그녀는 너무 약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열에 시달린 그녀는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아 머리를 들기조차 힘들었다.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깊은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급한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원경능은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약상자를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침대 밑에서 약상자가 사라져버렸다.원경능은 삼 초 동안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침대 밑을 더듬어보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다.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천천히 침대위로 올라가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최근에 발생한 사건들은 그녀가 정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그녀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은 미지의 일에 공포를 느끼기 마련, 원경능은 정말 두려움을 느꼈다.‘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원경능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냉기가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두피로부터 고통이 느껴지더니, 그녀는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본왕 앞에서 죽은 척하는 것이냐? 지금 당장 죽던지, 아니면 기어 일어나서 본왕과 함께 궁으로 가야 한다.”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꼭대기에서 울려 퍼졌다. 초왕은 다시 원경능을 거칠게 뒤집었다. 등이 바닥에 닿자 그녀는 고통에 온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곧장 억센 남자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았다. 턱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힘이었다.원경능의 고통스러운 눈빛이 초왕의 광기 어린 눈에 들어오자 냉혹하고도 난폭한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혐오와 멸시가 짙게 드리워졌다. “본왕이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말거라. 만일 또 태후마마 앞에서 허튼 소리를 지껄인다면 너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원경능은 너무도 아픈 나머지 화가 치밀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목숨이 이렇게나 하찮은 것인가?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도 도무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원경능은 젖 먹던 힘까지 모아 우문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무릎으로 몸을 지탱한 뒤 머리로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죽기 전 마지막 일격과도 같은 행동이었다.우문호는 원경능이 반격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더더욱 머리로 들이 받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
약을 마시니 위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원경능은 몸이 훨씬 개운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씨 어멈은 나지막하게 말했다.“왕비, 황궁에서 돌아오시면 소인이 차츰 몸조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먼저 눈을 감으시고 잠시 휴식하십시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 지실 겁니다.”원경능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불꽃이 춤을 추며 터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잡한 소리들이 귓전에 울렸다.‘너는 증오할 가치도 없다. 본왕은 그저 너를 혐오하는 것뿐이니라. 본왕에게 있어서 너는 악취를 따라다니는 파리처럼 혐오스러울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너와 잠자리를 하는데 약까지 마시진 않았겠지.’초왕 우문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원망과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원경능은 그렇게 무정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또 누군가가 귓전에서 ‘흑흑’ 울어댔다. 머리 속의 불꽃은 구불구불한 핏물로 변했다. 점차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마치 머릿속에 얽히고 설켰던 실들이 드디어 정리된 것 같았다. 고통도 점차 사라져왔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원경능은 눈을 떴다. 녹아가 침대 앞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왕비, 괜찮아지셨습니까?”녹아는 그녀가 눈을 뜨자, 재빨리 물었다.“이젠 아프지 않구나.”원경능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온몸은 두려울 정도로 마비된 상태였다. 원경능은 볼을 꼬집었으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마취제보다도 약효가 강했다.“그렇다면 소인이 부축하겠습니다. 의복을 갈아입지 않으신다면 왕야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녹아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였다. 기씨 어멈도 두 손으로 의복을 받친 채로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원경능이 깨어난 것을 발견하자 이렇게 말했다.“빨리 의복을 갈아입으십시오. 왕야께서 재촉하십니다.”원경능은 무덤덤하게 서있었다. 녹아와 기씨 어멈은 그녀의 옷을 벗기고 새 의복을 갈아 입혔다. 상처를 조여 맸으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의복을 갈
주먹 절반정도 되는 크기의 그 상자는 분명히 침대 밑에서 사라진 그녀의 약상자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약상자가 왜 작아져서 내 소매 속에 숨어있지?'순간, 마비되었던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원경능은 재빨리 약상자를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소인이 왕비를 모시고 가겠습니다.”녹아는 그녀를 부축했다.“소인이 왕야께 사정 드리고 왕비와 함께 입궁하겠습니다.”원경능은 심란한 나머지 녹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무턱대고 머리를 끄덕이고는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아치형으로 된 문 몇 개를 지나 회랑에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걸어서야 앞채에 있는 문에 도착하였다. 마차는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문호는 마차에 앉지 않고 검은 준마(骏马: 좋은 말)를 타고 있었다.그는 옅은 보라색 의복을 입었는데 금과 옥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었다. 얼굴은 마치 칙칙한 날씨와도 같았다. 눈에는 성가신듯 한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흘끗 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출발할 채비를 하거라.”“왕야, 입궁하는데 소인이 필요하십니까?”녹아는 눈을 딱 감고 한 마디 물었다. 우문호는 녹아를 흘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그렇게 하거라. 태후마마가 합방한 일을 물어보면 네가 증명을 할 수도 있으니.”왕부 문 앞에는 하인들이 열명 정도 있었다. 함께 입궁하여 시중을 들어줄 사람들이었다. 그중 가신인 탕양도 있었다. 우문호는 그들 앞에서 원경능이 얼마나 비참할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이런 말들을 뱉았다. 원경능은 무표정이었다. 근육이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아무리 난처해도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녹아는 그녀를 부축하면서 마차에 올랐다. 발이 닿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우문호의 증오 섞인 눈빛과 얄밉게 웃고 있는 하인들의 표정을 발견하였다.원경능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귓전에는 우문호가 뱉은 말들이 떠올랐다.원주인 원경능은 외모가 뛰어났다. 우문호는 도대체 얼마나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