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진무혁은 웃기만 했다.“하긴, 미안해. 내가 너무 갑자기 이런 말을 했지.”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그의 대범한 태도에 비해 성유리가 지나치게 쏘아붙인 감이 없지 않았다.성유리도 이를 깨닫고 사과를 덧붙였다.“제가 너무 흥분했네요.”“괜찮아, 너도 네 평판이 있는데 그러는 게 당연하지. 내가 잘못했어.”진무혁의 말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의 말대로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 멋졌다.저 멀리 점점이 흩어져 있는 네온사인과 불어오는 저녁 바람이 사람의 기분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진무혁은 먼저 성유리의 반응을 살피며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말을 이어갔다.“사실 난 진무열과 성유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야. 예전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진무열은 내 동생이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잖아. 내가 봤을 때 성유정은 아내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그의 말은 성유리에게 다소 의외였다.그전까지만 해도 이 바닥 사람들은 전부 성유정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배척하지는 않았을 테니까.물론 이를 위해 성유정이 들인 노력도 절대 작지 않았다.어쨌든 그 정도의 위선을 떠는 것도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성유정은 속셈이 너무 많아. 우리 집안 사정이 안 그래도 복잡한데 걔가 결혼해서 들어오면 분명 문제를 일으킬 거야. 난 그걸 보고 싶지 않아. 미안해, 성유정이 네 동생인 건 알아. 험담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저 단지... 너랑 이 일에 대해 상의하고 싶어서.”진무혁은 미안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성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오히려 조금 전 진무혁의 말에 성유리는 마치 아군을 만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건... 진무혁은 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네 작품 봤는데 아주 좋아. 로열티는 최대한 높게 책정해 줄 테니 시간 되면 대본 집필에도 참여해
성유리가 차창을 살며시 두드렸다.“사모님!”성유리가 몇 번이나 상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오 기사는 이렇게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성유리도 차마 시정해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여긴 왜 오셨어요?”“대표님 출장 가셨어요.”오 기사가 그녀에게 설명했다.“해외 출장 가셨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돌아오실 텐데 초대장과 비행기 티켓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당황한 성유리가 시선을 내리자 그의 손에 지난번 박한빈이 건넸던 것과 똑같은 경매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지난번 성유리는 가면서 초대장을 시월 파크에 두고 갔는데 박한빈이 다시 보내줄 줄은 몰랐다.심지어 이번엔 양성 행 티켓까지 직접 예매해 주었다.“사모님?”성유리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오 기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고 그가 이상하단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안 받을래요.”“그래도... 사모님, 이건 대표님께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건데요. 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누구한테 고개 숙이는 일 없는 분인데 이러시면...”“저랑 그 사람은 지금 단순히 거래 관계인데 이런 경매장에는 업계 사람들이 많이 가잖아요. 그때 가서 일일이 해명하기 귀찮아요.”단호한 성유리의 태도에 오 기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괜히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오셨네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세요, 그럼 이만.”말을 마친 성유리도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오 기사는 그녀의 뒤에서 뭐라고 말하려다가 망설임 끝에 결국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말았다.성유리가 집으로 돌아온 직후 박한빈의 전화가 걸려 왔지만 2초 정도 울리고 뚝 끊겨버렸다.마치 실수로 잘못 건 것처럼.성유리 역시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오히려 진무혁 측에서 빠르게 연락이 왔고 그가 바라는 건 간단했다.이번 주말에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성유리가 거절하려는데 진무혁이 그녀가 뭘 망설이는지 아는 듯 재빨리 두 번
“대표님.”금성 공항에서 서훈은 남자의 불쾌한 표정에 눈치가 보이면서도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건넸다.“방금 진성에서 보내온 데이터 보고서인데 한번 보시죠.”박한빈은 보고서를 훑어본 뒤 물었다.“그리고?”“뭐요?”“시장 가치 추정 이후에는? 어떤 각도로 시장 진입을 유도할 거래? 관련 분석 보고서와 언론 보도 계획은?”이 외에도 박한빈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어리둥절하던 서훈도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앞으로 나아가던 박한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다시 바라봤다.그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그 사람들은 모른다 쳐도 서 비서는 내 옆에 오랫동안 있었으면 이런 간단한 것도 몰라?”서훈은 이 보고서가 단지 인수를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일차적으로 박한빈에게 보여주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했는데 그때 박한빈은 아무런 말도 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확실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지만 서훈은 이유를 몰랐다.이번 출장에서도 박한빈은 순탄하게 협상을 마친 덕분에 일찍 금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서훈은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죄송하다고만 했다.박한빈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훈에게 파일을 다시 던져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오 기사는 이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박한빈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서훈과 눈빛을 주고받았고 서훈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운전해.”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차 안에 있던 누구도 감히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서훈은 조수석에 앉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 전 대표님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여기 초대자 명단입니다.”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훈이 건네준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때마침 태블릿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는데 바로 동영상이었다.무시하려던 박한빈은 동영상에 멈춘 화면을 보는 순간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붉은 끈 드레스에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긴
성유정은 이날을 위해 특별히 춤까지 연습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모두 망가져 버렸다.성유리 때문에!성유리가 가면을 쓰고 평소와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도 성유정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그 순간 성유정은 정말 달려가서 성유리의 가면을 벗기고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러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 것 같았다.성유정은 그냥 서서 이를 악물고 지켜보기만 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서 성유정은 문득 14살 나던 해 성유리가 성씨 집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지난 10년 동안 성씨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컸고 그런 날이 앞으로도 계속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성유리가 돌아왔다.성유리가 진짜 성씨 집안의 딸이었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건 응당 그녀의 몫이어야 했다.아니면 그들이 자신을 쫓아낼 수도 있었기에 성유정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그래서 성씨 집안 내외에게 더 잘 보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성유리와 그들 사이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걸 빌미로 온갖 일들을 꾸며대기 시작했다.성유리 앞에서는 일부러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정한지 보여주고 성씨 집안 내외 앞에서는 성유리보다 더 세심하고 상냥하게 행동했다.10년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성유리보다 그들의 생활 습관을 더 잘 알았고 이 바닥에서 또래인 사람들도 다 그녀의 친구들이었다.그녀는 완전히 성씨 집안 아가씨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하지만 박씨 집안에서 두 집안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김서영은 단번에 박한빈과 결혼할 사람은 성씨 집안의 친딸이어야 한다고 대놓고 말했고 그때 성유정은 깊은 무력감만 느꼈다.아무리 노력해도 진실은 바꿀 수 없는 느낌.그리고 지금 성유정은 또다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성유리는 너무 쉽게... 모든 사람의 관심을 빼앗고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가져갔다.하지만 성유정은 문득 자신이 잘하는 건 성유리가 개의치 않는 것들뿐이며 성유리
“6시 방향, 저기 서 있는 사람 보이지?”진무혁이 물었다.춤사위 때문에 두 사람의 몸은 서로 바짝 붙어 있었고 성유리는 오랜만에 이렇게 재미있게 놀아본 터라 이미 호흡이 다소 흐트러진 채 가면 아래로 코끝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진무혁이 그렇게 묻자 그녀도 바로 고개를 돌렸다.“네, 그래서요?”“해조그룹 임 대표 아들인데 요즘 너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내가 나중에 소개해 주면 잠깐 같이 춤이라도 춰볼래?”성유리가 피식 웃었다.“내가 왜요?”“내가 요즘 쟤 아버지랑 같이 일하려고 하거든.”진무혁은 성유리에게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이번에 네가 날 도와준다면 판권 제작할 때 네 지분도 넣어줄게. 드라마가 대박 나면 배당금이 쏠쏠할 거야.”성유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진무혁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진무혁 역시 그녀의 반응에 놀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물론 돈은 너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도 있지만 네가 버틸 힘이 되어주잖아?”성유리는 진무혁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몇 초간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녀가 물었다.“도와달라는 게 저 사람이랑 춤추라는 거였어요?”“물론 아니지.”진무혁이 웃었다.“지금 해조그룹이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저녁에 기회를 노리고 임정우에게 빌붙으려는 사람들이 꽤 많을 텐데 혹시라도 네가 그 사람과 춤을 추게 된다면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잖아?”“나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몇 마디 한다고 그 사람이 들을까요?”“응, 그러면서 다음번에 나와 저쪽 아버지가 따로 만날 식사 약속을 잡아.”진무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고 아주 직설적으로 저녁 약속을 성사해야만 이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성유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진무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이때 두 사람의 춤도 끝이 났다.성유리는 진무혁의 손을 놓았고 혼자서 몇 바퀴를 돈 후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파티장에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봐요, 먼저 온 사람이 우선 아닌가요?”임정우가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박한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알죠, 하지만 선택은 이 숙녀분이 하셔야 할 것 같아요.”그의 말은 상대를 말문이 막히게 했고 박한빈도 더 이상 임정우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성유리만 올곧게 쳐다보았다.늘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 눈동자가 지금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요동치며 흐르는 게 보였다.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드리운 손을 꽉 말아쥐었다.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임정우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초대에 응했다.박한빈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갔고 내밀었던 손도 꽉 움켜쥐었다.그가 다시 성유리를 바라봤을 때 성유리는 이미 남자를 따라 돌아선 뒤였다.박한빈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조금 더 악물었다.그때 진무혁이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참석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진무혁이 웃으며 말했다.“아직 축하 인사를 못 드렸네요. G국에서 협상 아주 잘 끝냈다고 들었어요.”“감사합니다.”박한빈은 형식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대충 답했고 시종일관 고개를 돌려 진무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박 대표님께서는 오늘 성유리 때문에 오신 건가요?”진무혁이 덧붙이자 박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박 대표님하고 성유리가 이혼한 게 안타까워서요. 참 매력적인 여자 아닌가요?”말하며 진무혁의 시선도 다시 성유리에게 향했다.이때 이미 성유리와 임정우의 춤은 반쯤 진행된 상태였고 두 사람의 동작은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호흡이 아주 잘 맞아 서로 밀고 당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왜요, 좋아해요?”진무혁의 시선을 따라가던 박한빈이 다그치듯 물었다.“저런 여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겠죠.” “아, 그런데 진 대표님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행복을
성유리와 임정우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노래가 끝나도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두 번째 춤을 추기 시작했다.“아직도 그쪽 이름을 모르네요?”임정우가 참지 못하고 묻자 성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면무도회인데 이름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그런데 그쪽은 날 알잖아요. 그건 나한테 불공평한 것 아닌가?”“여기서 임정우 씨를 아는 사람은 많죠. 그렇게 유명하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성유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력감이 묻어났지만 임정우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그럼 오늘 밤이 지나면 그쪽이랑 식사 한 번도 같이 할 기회가 없다는 말 아닌가요?”“아뇨, 기회는 있어요.” 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쪽은 아버님과 함께, 전 진 대표와 같이 만나서 식사하면 더 좋지 않아요?”“그러니까 결국엔 진무혁 부하직원이다? 비서인가? 아니면 비서 실장? 그것도 아니면 회사 소속 연예인?”임정우는 하나하나 추측을 해보았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되묻기만 했다.“그럼 식사하는 건 동의하세요?”“그쪽이 온다면 난 무조건 동의죠.”“좋아요.”성유리는 흔쾌히 동의했고 한참을 쳐다보던 임정우가 말했다.“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미리 말하는데 나 오늘 당신 제대로 기억했어요. 진무혁이 다른 사람을 대신 데려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요.”성유리는 미소만 지었다.“뭐에요, 나 못 믿어요?”“믿어요.”성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임정우 씨 관심은 감사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간다고 했으면 전 꼭 갈 거니까. 알아보는 건 임정우 씨 눈썰미에 달렸죠.”“그렇게 말하니까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임정우가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스텝을 빌미로 성유리에게 성큼 다가갔다.성유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갑자기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임정우의 발등을 밟았다.“누구야!”임정우는 순간 화가 나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위에 매달려 있던 크리스털 조명이 깜박
그제야 성유리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계속해서 걷어차려던 다리를 거두었다.그의 가면은 여전히 얼굴에 제대로 붙어 있었고 시리도록 차가운 두 눈은 성유리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당... 당신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요?”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왜, 즐거운 시간 방해해서 싫어?”박한빈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해졌고 그의 손은 성유리의 턱을 꽉 쥐었다.아까 춤추자는 제안을 거절당한 것과 조금 전 차였던 발길질에 대한 복수심이 차오른 듯 성유리의 뼈를 분질러 버리려는 듯한 힘이었다.성유리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박한빈이 그녀의 두 손을 낚아챈 뒤 무릎을 위로 들어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성유리 씨 인기가 참 많네.”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교계의 꽃이 될 자질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과거 그녀는 늘 얌전하고 조용했으며 딱 어떠한 순간에만 그토록 유혹적인 모습을 드러냈었고 박한빈은 그런 모습을 자신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은 마치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아니, 속았다기보다... 자신을 갖고 노는 것 같았다.박한빈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박 대표님 눈에는 누가 다른 사람과 춤 두 번 추면 사교계의 꽃이 되나 봐요?”“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넌 신분이 다르잖아. 다른 남자한테 그렇게 웃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내 신분은 뭐가 다른데요?”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가 말을 뱉는 동시에 무언가 떠올라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에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이 반응은 그녀의 생각이 맞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신분이 뭐가 다른데? 결국 다른 사람에게 험한 짓 당할뻔했다는 거잖아.지석민이 잡혀간 후 성유리는 그녀가 조심하지 않아 이런 일을 당했다는 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
“이렇게 오래 앉아계셨는데 배고프시죠?”여자는 억지로 준비한 음식을 박한빈의 손에 쥐여주며 계속 말했다.“얼른 이거라도 드세요!”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손을 뻗어 여자가 준비한 음식을 던져버렸다.“내 몸에 손대지 마.”냉랭한 그의 목소리에 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바닥이 떨어지는 소리에 밖에 있던 남자가 급히 들어오며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십니까?”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으며 물었는데 어찌나 다정한지 모르고 보면 남편 같았다.하지만 여자는 당황해하며 자기 손을 빼내더니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요. 실수로 면을 쏟아버려서...”여자의 말에 남자는 밑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엉망진창이 된 바닥을 발견하곤 얼굴이 새빨개졌다.그리더니 박한빈을 보며 경고하듯 말했다.“이러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박한빈은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만 봤다.분명 남자가 서 있었고 밖에 그의 형제들도 어마무시한 도구들을 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박한빈의 기세에 놀란 듯 움츠러들었다.분위기는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었고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외쳤다.“큰일 났습니다! 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한 것 같아요.”그 목소리를 들은 남자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고 바로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봤다.“경찰에 신고하라고 시켰습니까?”이 소식은 박한빈에게도 의외였기에 그도 지금 안색이 어두워졌다.이미 몇 년 동안 자신을 따르던 비서 서훈이 이런 경거망동한 짓을 벌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게다가 박한빈이 지금 사람들에 의해 감금돼 있는 상황인데 경찰에 출동하면 더 위험해지지 않겠는가?그러니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서훈이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다.박한빈의 앞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화나게 해 그를 죽이려는 셈이었을까?“시*!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어.”제일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박한빈을 죽일 듯 다가오는 그때, 박한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무릎을 강하게 찼다.꽤 센 힘에 남자가 바로 주저앉아
박한빈은 지금 마당을 마주한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앞쪽의 대문은 이미 닫혀 있었고 마당에는 몇 사람이 괭이와 쇠망치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그들은 혹시라도 그가 도망칠까 봐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오히려 조금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들이 지키고 있지 않아도 애초에 뛰쳐나갈 생각이 없었다.왜냐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사실 이 보상금 처음부터 저한테 얘기하셨으면 안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누군가 뒤에서 당신들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박한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그 말을 들은 남자의 눈동자가 급격히 떨리고 있었다.“당신 형의 죽음, 혹시 숨겨진 진실이 더 있는 건 아닙니까?”박한빈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희 형은 당신이 죽인 거잖아요. 당신 같은 파렴치한 개발업자들은 돈만 되면 뭐든 하는 놈들이잖아요! 안 그랬으면...”“그래요. 괜찮습니다. 당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차피 입막음 돈을 받았으니까.”박한빈이 남자의 말을 끊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다만, 사람의 운명이라는 건 정해진 게 있는 법이죠. 당신이 가져서는 안 될 걸 억지로 가지려고 하면...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군요.”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옆에 놓여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쾅.작은 소리였지만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제 쪽에 있는 사람이 곧 돈을 가져올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나가 보세요.”박한빈은 평소처럼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이 상대방에게는 이상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이 상황에서 그가 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걸 장악하고
성유리는 다시 하늘이를 바라보았다.하늘이는 조금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고 성유리의 시선이 닿자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엄마, 난 동생이 갖고 싶어. 근데 남동생 말고 여동생이었으면 좋겠어.”...결국, 성유리는 혼자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마침 꽃집이 보여 잠시 들러 꽃 한 다발을 샀다. 그리고 꽃을 들고 공항에서 서 있다가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내가 왜 박한빈 씨한테 꽃을 주려고 했지?’하지만 이미 꽃을 손에 든 상태였고 예쁜 꽃다발을 그냥 버리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들고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더 항공편이 도착했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나오는 게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끝내 박한빈을 찾을 수 없었다.오랜 시간 기다린 성유리는 조금씩 지쳐가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그래서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그 숫자를 보는 순간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만 곧장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박 대표님 부인되시죠?”상대는 여자였다.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누구시죠?”“하하, 당신 남편이 지금 우리 쪽에 있어요. 그렇게 잘 나신 사장님이 겨우 백만으로 우리를 내쫓으려 하다니... 이거 저희를 무시하는 거 아닌가요?”“말해두는데 제 남편이 죽었어요. 이 일... 몇백만은 받아야 끝낼 수 있을 거예요!””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대체 뭘 하려는 거죠?”순간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타고 올라온 성유리가 급히 물었다.“박한빈 씨는요?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걱정 마세요.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다만, 지금은 보낼 수 없다는 것뿐이죠.”“당장 돈을 들고 이곳으로 오세요. 저희는 오백만 원을 요구해요. 그것도 현금으로요. 알아들었어요?”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상대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멍해 있던 성유리의 핸드폰에 곧이어 서훈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박한빈의 목소리를 수화기 너머에서 듣자 평소보다 더 낮고 섹시해보였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술 드셨어요?”“어떻게 알았어?”박한빈은 웃으며 화면전환을 했다.“봐, 아직 안 끝났어.”복도를 걷고 있던 박한빈은 걸려있던 액자를 쓱 비추더니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술자리를 찍어줬다.성유리는 말이 없었지만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걱정하지 마, 조금만 있다가 갈 거야.”그는 마치 성유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들은 도한시 방송국 분들이야. 저 사람들이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밥이나 같이 먹자고 내가 불렀어.”박한빈은 망설이다 이런 말을 덧붙였다.“다 남자야.”성유리가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은 듯 피식 웃자 박한빈이 눈썹 한쪽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올래?”“네?”“여기 풍경이 너무 좋더라고.”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되물었다.“일은 다 해결하셨어요?”“응. 거의 다 됐어.”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박한빈이 말을 이어갔다.“공사장 쪽에서 책임자를 내세웠고 유가족도 이미 다 위로했어. 방송국이 아마 내일쯤 이 일에 대한 소식을 전할 거고.”성유리가 물었다.“이미 다 해결하셨으면 돌아오셔도 되는 거 아니에요?”그녀의 물음에 박한빈이 주춤거리며 대답했다.“가면... 하늘이도 있잖아.”“네?”“내 말은... 여기 풍경이 좋다고. 나는 너를 데리고 돌아다니고 싶은데 하늘이는 유치원 가야 되잖아.”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의 말에 숨은 의도를 알아차렸다.“안 갈래요.”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실망한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성유리는 원래 그가 일을 다 해결하면 돌아올 거라고 믿었지만 박한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만약 다른 말을 더 한다면 꼭 다시 자신을 난감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질 것을 알기에 성유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먼저 끊을게요.”“끊어. 일찍 자고.”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가 이내 통화를 끊어버렸다
“됐어요.”성유리는 재빨리 대답했다.“그 사람이 저한테 직접 말 안 했으니까 제가 묻는 게 아무 의미도 없을 거예요.”김서영은 성유리가 말한 ‘문제’가 이것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박한빈을 위해 몇 마디 해주려고 입을 뻥긋거렸다.그러나 성유리는 이미 하늘이의 손을 잡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가자. 우리 저기 가서 좀 쉴까?”하늘이는 말을 신나게 탄 바람에 얼굴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그래서 성유리의 말에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김서영은 떠나가는 둘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몰래 핸드폰을 꺼내 박한빈에게 문자를 전송했다....[나 지금 도한시야. 이쪽 일은 한 사흘 동안 처리해야 될 것 같아. 요 며칠 너랑 하늘이는 엔젤 월드에서 지내.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공항 도착했어.][지금 이륙 준비하고 있대.][비행기에서 내렸어. 지금 호텔가는 길이야.]...이건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보낸 문자들의 일부였다.문자 빼고 사진들도 몇 장 보냈고 가는 길 내내 성유리에게 자신의 일정을 보고해 줬다.성유리는 끊임없이 새 문자가 전송되는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 결국 박한빈에게 답장했다.[알겠어요.]그녀는 자기가 답장을 하면 박한빈이 가만히 있을 줄 알았지만 예상은 아예 빗나갔다.게다가 성유리의 답장을 받자 그는 신이 난 건지 더욱 많은 문자를 보내왔다.어느 호텔에 묵는지, 방은 어떤 구조인지, 사흘 동안 스케줄은 무엇인지까지 하나하나 성유리에게 전송했다.결국, 성유리는 박한빈을 차단해 버렸고 그녀의 반응에 그는 더 이상 쓸데없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당연하게도 아마 박한빈이 너무 바빠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다.필경 성유리는 뉴스에서 이번 일에 관한 소식을 많이 접했으니까.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초기 단계에서 기중기가 고장 나 아래에 있던 사람 한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현장에는 사고 당시에 영상을 찍은 사람도 있었기에 짧은 영상은 인터넷에서 빠르게 퍼졌다.그리고 사람들은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개발상에게 돌렸고
“보아하니... 아직 제대로 달래주지 못한 것 같네?”박한빈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김서영은 옆에서 불 건너 강 구경하는 식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머니는 대체 누구 편입니까? 어머니는 제 친어머니잖아요!”보다 못한 박한빈이 입술을 오므리다 김서영에게 말했다.“당연히 그건 알지.”김서영은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그런 말이 있잖니? 혈연관계를 토대로 사람을 도우면 안 된다고.”“그러십니까? 전 또 어머니께서 이 상황을 즐기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박한빈의 평온한 목소리에 김서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아니야. 게다가 나도 오늘 너한테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았니?”김서영의 물음에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만 봤다.그 시각, 성유리와 하늘이는 말 위에 타고 있었는데 승마장 직원들이 앞에서 두 사람을 데리고 달리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김서영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네.”비록 빠르게 대답했지만 그의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무슨 일 있니?”김서영은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껴 다시 물었다.“아니요.”하지만 그의 대답을 김서영은 믿지 않았고 미간을 점점 더 찌푸려갔다.조금 망설이던 박한빈은 낮은 소리로 김서영에게 먼저 말했다.“사실 뭐 별 건 아닙니다. 다른 지사에 일이 좀 생긴 것뿐이죠.”“처리하기 힘든 일이니?”“네. 제가 직접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대화를 나누던 박한빈은 손목에 있는 시계를 쓱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좀 잇다가 여기서 바로 공항으로 떠날 겁니다. 요 며칠... 유리네는 어머니 쪽에서 지내게 해주십시오. 제가 돌아오면 데리러 오겠습니다.”박한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발신자는 비서였다. 그는 박한빈에게 지금 어서 공항으로 출발해야 한다며 보챘다.“저 먼저 가보겠습니다.”박한빈은 시선을 성유리에게서 떼지 못했고 그걸 김
김서영은 그날 밤, 성유리와 한참을 이야기했다.처음 그녀가 술을 함께 마시자고 했을 때만 해도 성유리는 그녀가 박한빈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줄 알았다.하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오히려 박한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었다.이야기에 빠져들던 그녀는 급기야 그의 사진첩까지 가져왔다.그 사진들을 보면서 성유리는 점점 깨달았다.박한빈의 성격은 단순히 박씨 가문의 영향만이 아니라 타고난 면도 있었다.다른 아이들의 돌사진이나 유치원 사진 속 모습은 활기차고 장난기 넘쳤지만 박한빈은 언제나 똑같은 표정이었다.지금과 다름없이 어린 시절의 그도 마치 현재의 모습이 축소된 듯한 느낌이었다.그렇게 이야기와 사진을 주고받다 보니 성유리는 원래 이 대화를 왜 시작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결국, 둘은 박한빈에 대해 이야기하며 와인 두 병을 비웠다.다음 날 아침.잠에서 깬 성유리는 머리는 아프지 않았지만 정신이 여전히 몽롱했다.몸을 돌리는 순간, 손가락 사이에 박한빈의 어린 시절 사진이 끼어 있는 걸 발견했다.사진 속 그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정색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던 그녀는 조용히 그것을 옆에 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집 안은 평소와 똑같이 조용했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도우미가 다가와 김서영이 이미 하늘이를 데리고 마장으로 갔다고 알려주었다.그녀는 김서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미처 말을 꺼내기 전에 하늘이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내 말 보러 와!”그제야 성유리는 아직 하늘이의 말을 본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그래, 지금 갈게.”“그럼 내가 운전사를 보낼게.”김서영이 대답했다.“길이 좀 복잡하기도 하고 네가 처음 가는 곳이라 헷갈릴 수도 있어.”성유리는 시계를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옷 좀 갈아입고 갈게요. 준비할 거 있어요?”“아니, 다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냥 와.”김서영의 말엔 전혀 의심할 만한 글이 없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꿈에서조차 예상하지
“한빈 씨가 저랑 싸울 사람인 것 같나요?”성유리의 반문에 김서영은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은 없네.”그러면서도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그 애 성격상 가끔은 사람 속 뒤집는 말을 할 수도 있어.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그럴 리 없을 텐데?”성유리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시선을 살짝 돌리더니 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저는 화난 것도 아니에요.”“오?”“그냥...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화가 난다기보다는... 너무 답답해요. 저에 대한 그 사람의 불신이.”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도대체 어떤 모습을 보였기에 박한빈 씨가 그렇게 오해한 걸까 싶어요. 대체 무슨 이유로 제가 고작 남이 하는 몇 마디 말에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을까요?”김서영은 이미 박한빈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그럼에도 다시금 성유리의 입에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녀의 가벼운 웃음에 성유리는 더욱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김서영을 바라봤다.“네가 뭘 잘못했을까 고민할 필요 없어.”김서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 그 애 스스로의 문제야.”“걔가 널 믿지 않는 게 아니야. 단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거지.”“네가 너무 소중해서 혹시라도 잃을까 봐 불안한 거야. 그래서 계속 확인하고 싶어 하고 스스로 선택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는 거지.”그녀의 말에 성유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잔을 채워주며 계속 말했다.“아무튼 괜찮으면 된 거야. 결국엔 둘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해결될 테니까.”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적어도 이틀 정도는 걔가 좀 불안해하면서 지내게 내버려둬.”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녀의
하늘이의 맑은 목소리는 어쩐지 약간 남의 불행을 즐기는 듯한 기색마저 띠고 있었다.분명, 딸은 부모의 가장 든든한 존재라 하지 않던가?그런데 하늘이는 대체 어느 쪽인 걸까?박한빈은 그 자리에 서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한편, 성유리는 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건 저녁 식사 때가 되어서였다.말을 아낀 채 식사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박한빈을 쳐다보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기회를 잡아 성유리에게 먼저 물었다.“이따 나랑 같이 집으로 돌아갈 거야?”“아니요.”망설임 없이 돌아온 단호한 대답에 박한빈의 표정이 굳어졌고 곧장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성유리는 그보다 먼저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는데 순간, 김서영이 입을 열었다.“그만하고 우선 돌아가는 게 좋겠다.”차분한 목소리가 박한빈을 멈춰 세웠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서영을 보며 말했다.“어머니.”그러나 김서영은 박한빈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성유리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마침 내일 주말이잖니. 하늘이도 학교 안 가는 날이고... 너희 둘이 여기서 이틀 정도 쉬어가는 게 어떠니?”그리고 다시금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너는 회사 일로 바쁘잖아. 일단 돌아가도록 해.”결국 박한빈은 억지로 ‘쫓겨나듯’ 이곳을 떠났다.하늘이 역시 그런 박한빈을 달갑지 않게 대하는 듯했다.하지만 밤이 되어 성유리가 아이를 재우던 중, 하늘이는 갑자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진짜로 화난 거야?”그 질문에 행동을 멈춘 성유리는 이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미소에 하늘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역시 그럴 줄 알았어. 엄마가 진짜 화난 건 아니구나.”“응?”“엄마가 진짜 화났다면 바로 나를 데리고 바로 경운시로 갔겠지.”그 말을 듣고 나서도 성유리는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결국 성유리는 아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