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치고 “어르신”은 차 문을 열며 모든 것을 바닥에 쏟아냈다.그때, 천씨의 다른 사람들을 태운 차도 저택에 도착했다.모든 차는 함께 떠났기에 다른 이들도 그들이 미행을 당한 것을 알아차렸다.그들은 긴장한 채로 차에서 내리며 “어르신”이 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보며 그를 걱정했다.천정엽은 천우진을 질책했다.“할아버지가 이렇게 되었는데 부축하지도 않는 거냐...”“어르신”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명백히 어르신과 다른 모습에 천정엽은 큰 소리로 소리쳤다.“이건 누구야?”다른 이들도 눈앞의 그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천씨 어르신”은 고개를 돌려 천우진을 쳐다보았다.천우진은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제가 찾은 연기자에요.”“천우진, 지금 뭐라는 거야?”천정엽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우리를 놀려?”“지금까지 모든 건 할아버지를 해한 놈을 찾기 위한 것이었어요.”“그럼 찾아냈어?”천정엽은 냉정하게 물었다.“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을 인정합니다.”“그럼 차지 못했단 거네.”천우진은 침묵했다.“천우진, 이 놈이!”천정엽은 천우진에게 순간 어떤 말을 할지 떠오르지 않아 욕설을 내뱉었다.“이 망니니 같은 놈이!”“그래서 포기했어요.”천우진은 천정엽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만약 천씨 가문에 할아버지를 해하려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나의 패배를 인정하죠. 천씨 가문을 삼촌에게 넘기죠.”“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천정엽은 천우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천씨 가문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요.”소이연은 입을 열었다.좋은 사람인 척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들의 예측이 틀렸다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그자가 이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이뿐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천씨 가문을 오늘 계속 모니터링했지만 아무도 다른 일정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이런 일을 저지른 자는 메세지나 카카오톡으로 지시를 내려 범죄 증거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시간이
“나는 너희들을 믿지 않아.”천정엽은 소이연의 말을 전부 무시해 버렸다.“삼촌, 우리를 믿지 않으셔도 되는데 방해하지는 말아 주세요.”천우진은 진지하게 말했다.“저와 이연은 여러분이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알렸어요. 우리가 힘을 합쳐야만 할아버지를 해하려는 자를 찾을 수 있어요. 그자는 결국 천씨 가문을 위협할 거예요.”천정엽은 천우진을 보며 더 이상 반박을 하지 않고 약한 기색도 내지 않았다.“아버지의 신임을 얻은 이상 아버지가 없을 때 너의 말을 따라야겠지. 그런데 우리를 또 속이거나 실망시키지 마라.”“삼촌, 걱정하지 마세요. 삼촌은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우리만 믿으시면 됩니다.”“그럴 힘도 없다.”천정엽은 한 마디만 남겨두고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마당으로 나왔다.천우진은 그 “어르신”을 천씨 저택에 두고 왔다.수를 두는 것이라면 끝까지 철저하게 해야 했다.그들은 어떻게든 그자를 색출해 내겠다고 다짐했다.소이연의 방 안.천우진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걱정이 가득하니 마음도 복잡했다.소이연도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제일 나쁜 결과는 임씨 가문과 얽히게 되는 것이다.오랫동안 두 가문은 권력싸움을 해왔다.그러나 외부인들이 봤을 때 천씨와 임씨 가문은 뗄 수 없는 관계였고 서로에 대한 영향은 매우 컸다.지금 임씨 가문이 그 관계를 깨고 독식하려 한단 말인가?“아직도 생각 중이야?”천우진은 담배를 피우고 난 뒤 방으로 들어왔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천씨 가문에서 배신자를 찾는 것과 임씨 가문과 맞서 싸우는 게 난이도가 같을까요?”사실이었다.만약 가문 내부 갈등이었다면 오히려 해결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임씨 가문과 엮여있고 천씨 어르신은 힘을 쓰지 못하기에 천우진은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그래도 천씨 가문은 서로 단합하니, 이걸로 위안을 삼죠.”지금 더욱 많은 역경이 있어도 가문이 지켜줄 것을 생각하니 많은 위로가 되는 건 사실이었다.“그래.”천우진은 고개를 끄덕였
“천씨 가문이 육현경과 임아영의 결혼식에 계략을 꾸몄다는 뜻인가요?’소이연이 물음에 천우진은 두 눈을 번쩍거렸다.“이건 좋은 기회야.”소이연은 그의 말에 침묵을 지켰고 천우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이번 결혼식을 망치려는 건가?”“네.”천우진에게 소이연은 항상 솔직했다.“문제는 네가 망칠 수 있어?”소이연은 얼굴색이 조금 변했다.“너한테 상처 주려는 건 아니야. 지금 상황으로 보면 네가 임청하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혹시 모르잖아요?”“혹시 이긴다면 우리는 다른 기회를 찾을 수 있겠지.”그녀가 이번 결혼식을 막을 수 있다면 천우진이 소이연의 행복을 축복해 주겠다는 뜻이기도 하다.“후회하지 말아요.”“후회하지 않아. 원래부터 육현경과 같은 편이고 싶었어.”“알아요.”“그 사람이 말해 준 건가?”“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자는 모든 걸 너한테 말해 주었네.”“전에는 나를 사랑했으니까요.”“그것도 다 예전이지.”“지금은 단지 기억을 잃은 것뿐이에요.”천우진의 말에 소이연은 발끈했다.그녀의 모습에 천우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천씨 가문은 사이가 좋은데 굳이 육현경더러 도우라고 하는 이유가 뭐죠? 천씨 가문에 깊은 내부 갈등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소이연은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육현경의 말에 따르면 천씨 가문은 갈등이 첨예하여 그가 천우진을 도와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심씨 가문의 일에서 육현경이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아니. 나는 단지 천씨 가문에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할아버지가 일을 당하면 가문이 망하게 될가 두려운 거야.”“자신도 믿지 못하는 건가요?”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나랑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면서 내가 가업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몰라? 오래전에 이미 할아버지에게 말했어. 천씨 가문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천우진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왜요?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요.”“내가 그렇
“육현경은 제일 적합한 사람이야. 심씨 가문과 맞설 때 그의 능력을 나는 이미 알아봤어. 그후에 얘기를 나눌때도 그가 내가 찾는 사람임을 알아 차렸어.”“왜 물려받으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천씨 가문의 장손으로서 능력도 뛰여나고 나이도 적당한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소이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천씨 가문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아니꼽게 보던 천정엽도 그를 후계자로 생각한 것을 보면 말이다.이렇게 큰 기회를 버릴 이유가 있단 말인가?“나의 이미지를 망칠까봐 지금 말하지는 않을게.”천우진은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요. 그렇게 좋은 이미지도 아니니깐.”“그래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천우진의 말은 소이연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상상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내가 알려줄게.”“언제요?”“때가 되면.”소이연은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말하기 싫은 것을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단지 천우진의 일이기에 더욱 마음이 가기는 했다.“다섯 날 후에 육현경과 임아영이 결혼식을 올릴거야. 행운을 빌어.”천우진의 말에 소이연은 언짢아졌다.천우진이 떠난 후 그녀는 침대 위에서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그렇다.어떻게 해야 육현경의 마음을 돌리고 그가 임아영과 헤어지게 할수 있을가.임아영이란 여자는 참 쉽지 않았다.소이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침대에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소이연은 핸드폰을 꺼내들어 육현경과의 대화내용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몇 글자 적었다.[퇴원해요.]메세지를 전송한 후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여왔다.그리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육현경에게서 문자는 되돌아 오지 않았다.화가 난 그녀는 다시 문자를 적어 내려갔다.[오늘 교통사고가 날뻔했어요.]전송 버튼을 누르자 대화창은 전송불가라는 알림이 떴다.소이연은 그가 자신을 차단했음을 여러번 인터넷을 검색한 끝에 알아차렸다.육현경이 자신을 차단하다니…소이연은 호흡이 가빠왔다.그녀는 정말 그에게 달려가 그의 뺨을
“나는 빨리 퇴원하고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요.”“결혼일은 미뤄도 괜찮아요.”“안 돼요. 어렵게 좋은 날자를 정했는데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어요. 부정 타요.”“당신의 몸이 더 중요해요.”“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결혼은 내 몸을 더욱 좋게 만들 거예요. 내 주치의가 한 말 기억하죠? 행복해야 오래 산다잖아요.”육현경은 어쩔 수 없었다.“그럼 그렇게 해요.”“루카스,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임아영은 적극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육현경의 손은 눈에 띄게 떨려왔지만 그녀를 밀치지는 않았다.…다음날.소이연은 휠체어를 이끌고 육현경을 보러 병원에 갔다.천우진은 그녀가 걱정되어 굳이 따라나섰다.그들은 그렇게 육현경의 병실 앞에 멈춰 섰다.육현경은 대부분의 시간을 임아영의 병실에 있었다. 그가 가지 않으면 임아영이 기어코 그를 찾으러 왔기 때문이다.그러나 임앙영의 몸은 그렇게 움직일 만큼 건강하지 않았기에 육현경은 그녀의 병실로 가서 임아영이 잠에 든 후에야 나왔다.오늘도 그러했다.그는 자신의 병실로 돌아온 후 소이연과 천우진을 마주치자 깜짝 놀랐다.천우진은 그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고 그가 나타나자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소이연도 어두운 얼굴로 다짜고짜 물었다.“왜 나를 차단한 거예요?”“연락할 필요가 없어서요.”“당신을 거슬리게 했나요?”“아영 씨를 거슬리게 했죠.”육현경은 직설적으로 내뱉었다.그의 말에 소이연은 가슴이 아파왔다.원래 성격대로라면 몸을 돌려 떠났겠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자리를 지켰다.“다시 추가하면 안 되나요?”소이연은 물었다.“싫다면 앞으로 문자 보내지 않을게요.”육현경은 바늘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파왔다.콧대 높던 그녀가 지금 그의 앞에서 이렇듯 비굴해진 것이다.육현경은 하마터면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그녀를 안을 뻔했다.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런 생각을 멈추고 숨겨진 카메라를 힐끗 보며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이연, 우리는 앞으로 가능성이 없어요.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소이연은 눈물 어린 모습으로 그에게 물었다.“안 돼요.”“정말 후회할 거예요.”소이연은 진지하게 그에게 말했다.“후회하더라도 아영 씨와 결혼할 겁니다.”육현경은 말에 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할 말이 많았지만 할 수 없었다.그의 태도는 무섭도록 강경했다.더 이상 육현경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다른 방법이 없었다...“나에게 시간 낭비하지 마요.”육현경은 소이연을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태연한 듯 말을 뱉었다.“그럴 자격이 나는 없어요.”말을 마치고 그는 그렇게 몸을 돌렸다.소이연은 눈물이 차올라 결국 뺨을 타고 흘렀다.그녀는 자신이 항상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거절을 태연하게 맞이할 수 있을 줄 알았다.만약 육현경이 그렇게 쉽게 타협한다면 임아영이 그렇게 죽기 살기로 그를 내몰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매번 그의 잔인함을 겪을 때면 소이연은 가슴이 칼로 베인듯 아파왔다...천우진은 큰 보폭으로 쫓아갔다.“육현경!”병원의 복도에서 천우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육현경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나를 한 대 때리고 싶은가요?”저번에 심문헌은 소이연 때문에 그를 쳤었다.천우진도 그러려고 하는 것인가?그도 그러할 것이 그는 정말 얄미웠다.“나는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아요.”천우진은 차갑게 말했다.육현경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그냥 말해주고 싶었어요. 선택을 했다면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알아요.”육현경은 대답을 한 후 자리를 뜨고 임아영의 병실로 향했다.소이연은 휠체어를 끌고 나와 그런 육현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천우진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다.“이길 수 없다고 했잖아.”소이연은 이미 눈물을 추슬렀다. 그녀는 항상 자신에게 독햇다.“그래요. 도와주셔서 참 고맙네요.”소이연은 천우진과 육현경이 한 대화를 들었다.“다 너를 위해서야.”“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어요.”소이연은 뒤를 돌아 자리를 떴다.천우진은 그런 그녀의 휠체어를 잡으며 말했다
소이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천우진의 걱정을 잘 알았다.육현경과 임아영이 결혼한 뒤 그녀가 계속 육현경에게 매달린다면 임아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반드시 그들의 결혼을 막아야 한다.이튿날 소이연은 다시 병원으로 찾아갔다.천우진은 그런 그녀의 고집에 감탄했다.어제 금방 그에게 거절을 당해서 기분이 상한 듯 보여도 오늘 다시 그를 찾으러 온 것이다.소이연이 육현경의 병실로 들어설 때 그가 나왔다.그녀를 만나자 육현경은 꽤 놀란 눈치였다.그녀가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다시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소이연...”“오바하지 말아요. 당신 찾으러 온 것 아니니까.”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을 끊으며 콧대 높은 표정으로 말했다.그 모습에 육현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천우진은 옆에서 경악했다.오늘부터 막 나가는 것인가?그러나 천우진은 이 방법도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마음대로 해요.”육현경은 그 말만 남겨두고 떠났다.“기다려요.”소이연은 그를 불러 세웠다.그 소리에 육현경은 멈칫했다.그녀의 부름에 한 발짝도 걸음을 뗄 수 없었다.할 수만 있다면 그는 소이연을 품 안에 가두고 평생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임아영을 만나러 가는 거죠?”“네.”소이연의 직설적인 물음에 육현경이 답했다.“안 돼요.”육현경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내 말은,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기다리라고요.”소이연의 사나운 태도에 육현경은 멍해졌다.천우진 또한 깜짝 놀랐다.소이연이 또 무슨 일을 만들려고 하는 거지?직접 겪지 않으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소이연 같은 냉미인이 남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다니.육현경을 이기지 못하니 적수에게 반격을 하는 것인가?“밀어줘요.”소이연은 천우진에게 말했|다.천우진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소이연을 밀어 멍하게 있는 육현경의 앞을 지나쳐 왔다.“소이연...”“여자들의 싸움에 남자는 끼지 마요!”소이연은 육현경에게 끼여들 기회를 주지
“당연하죠.”임아영은 아무런 주저 없이 대답했다.그녀는 가지고 싶은 걸 놓친 적이 없었다.상대가 누구라도 말이다.“거래를 하지.”소이연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우리 둘이요?”“응.”임아영은 살짝 망설였다.소이연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겁먹지 않았다.여러 번 그녀와 맞섰을 때 소이연은 항상 졌었다.“그래요.”임아영은 소이연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제안을 하는지 궁금했다.“두 분은 나가주세요.”소이연은 육현경과 천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둘은 미간을 찌푸리며 병실을 나갔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소이연과 임아영만 남았다.“말해요.”임아영이 소이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나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다고 생각해.”“어떤 면에서요?”“모든 면에서.”소이연의 말에 임아영은 입술을 깨물었다.임아영은 항상 상대에 대해 꽤나 깊숙히 조사를 했다.“나에 대해 잘 알거라고 생각하지만 너랑 싸워서 이길 거야.”“나를 협박하는 건가요?”“협박은 아니고 알려주는 거야. 나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그래서요?”“두 날만 시간을 줘. 나랑 루카스가 만나게...”“절대 안 돼!”임아영은 소이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번에 거절했다.“두 날 뒤에도 루카스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게.”소이연은 또박또박 말했다.임아영은 잠시 주저했다.“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결혼 후에도 내가 가만히 두지는 않을 거야.”임아영은 소이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소이연의 말에 두려움으로 긴장되었다.지금까지 그녀와 이런 ‘불공평한’ 거래를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져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그러나 지금 소이연은 그녀가 손해인 거래를 하려고 하고 있다.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 할 기회를 주겠는가!루카스는 원래 그녀의 남자다. 결혼하든 하지 않든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소이연에게 루카스를 ‘빌려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임아영은 잠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
“보름 넘게 준비한 건데 서두르는 건 아니지.”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떠나는 일인데도 송문수는 참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갔다가 언제 와?”“그건 몰라. 상황 봐서 잘 되면 빨리 오는 거고 잘 안되면 못 오는 거지.”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송문수에 그의 결심이 바뀔 리 없다는 걸 알아챈 송승우는 그만 입을 다물고 하지수의 손을 맞잡았다.무의식중에 눈물을 흘리던 하지수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빠르게 표정을 감췄다.“가자.”그리고는 송승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그녀는 송문수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마지막 작별인사도 전하지 않은 채 그렇게 헤어졌다.하지수의 몸에 감히 시선을 두지 못하던 송문수도 그녀가 송승우와 함께 차에 타서야 차창 너머로 비치는 그 뒷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그는 한참 동안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실 캐나다도 송문수가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회사에 유능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 아무에게나 CEO라는 직급을 쥐어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송문수는 본인이 가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여기서 다정하게 지내는 둘을 보고 있는 게 더 가슴 아플 것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을 계속 보는 건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는 이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송문수는 캐나다에 도착해서야 육현경과 소이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출국 소식을 알렸다.그리고 언제 돌아갈지는 모른다는 말까지 남기자 다들 깜짝 놀랐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몸 잘 챙기라는 소리들뿐이었다.그리고 시간 되면 놀러 오라는 얘기들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 역시나 예수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굳이 송문수에게 따로 문자까지 보내며 물었다.[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가겠다고? 다 버리고? 송문수, 너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니? 내가 너였으면 당장이라도 송승우랑 싸웠어!][어차피 못 이
둘의 이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고 두 사람은 각각 손에 이혼 증명서를 들고 법원에서 나왔다.“이제 끝난 거지?”“네.”하지수에게 건네받은 이혼 증명서를 들춰보던 송승우는 안에 적힌 내용을 다 확인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혹시라도 돌발상황이 생길까 봐 따라온 건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이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송문수는 하지수를 보고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절차대로 서류만 제출했다.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송승우는 감정이란 게 저렇게 쉽게 사라질 수도 있나 싶었다.둘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혼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송승우는 다른 건 묻지 않았다.이제 두 사람이 이혼했으니 송승우는 저와 하지수도 떳떳해진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 송문수만 연락을 끊는다면 하지수를 다시 자기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그래서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송승우가 먼저 송문수를 불러세웠다.“시간 되면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어. 엄마 아빠가 전화해도 안 오던데, 많이 바쁜 거야?”“응.”“바쁘다고 가족들도 다 내팽개치는 건 아니지. 워라벨도 신경 써야지.”어른스러운 말투로 나무라듯 말하는 송승우를 송문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서울에서 일할 때 1년이 넘도록 안 오던 게 누군데.부모님이 굳이 송승우를 부르지 않은 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무튼 송승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은 언제든지 시간을 뺄 수 있는 여유 적적한 일이라 여기는 사람.“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도우미들 시켜서 너 좋아하는 거...”“나 해외에 잠깐 나가봐야 해.”“뭐라고?”송문수가 송승우의 지루한 말을 끊으며 대답하자 송승우는 당황하며 물었다.“엄마 아빠가 말 안 했어?”“무슨 말이야 그게?”금시초문이었던 송승우는 하지수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녀 역시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았다.“우리 회사 전기차 해외 매출이 자꾸 오르니까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