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연은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그녀는 쫓아가려는 충동을 애써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분이 유강후의 어머니 강해숙이에요. 강씨 가문의 아가씨죠.”온다연이 고개를 홱 돌렸다.강해숙은 유재성의 부인인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한 번도 유씨 본가에 돌아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온다연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그런 분이 갑자기 돌아왔다. 게다가 딱 봐도 급하게 돌아온 것이다. 유강후가 심각한 상태인 게 틀림없다.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방법을 대서 들어가야겠어요. 유강후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이에요. 가봐야 해요. 더 이상 이렇게 기다릴 수 없어요.”장화연이 그녀를 잡아당겼다.“들어가면 뭐 해요? 수술해 줄 거예요? 무엇을 할 수 있는데요?”“셋째 도련님은 아직 위험한 고비를 넘기지 못해서 들어가도 보지 못해요. 중환자실에는 의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쉽게 들어갈 수 없어요.”온다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병원 앞을 지키고 있는 완전 무장 경호원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잠시 후, 바람이 불기 시작해 곧 폭설이 내릴 것 같았다.장화연은 온다연이 감기에 걸릴까 봐 억지로 끌고 호텔에 돌아왔다.하지만 장화연이 약을 달여서 들고 왔을 때 온다연은 이미 방에 없었다.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승합차에서 온다연이 병원 간호사복을 갈아입고 있었다.임정아는 팔짱을 낀 채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지난달까지도 도망치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그새 푹 빠졌어요? 유강후가 곧 죽는데, 지금이 도망칠 좋은 기회가 아닌가요?”온다연은 멈칫하더니 말했다.“정아 씨와 상관없는 일이에요.”“네네, 저하고는 상관없죠. 하지만 궁금한 게 있는데, 임 교수가 저의 삼촌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리고 제가 영원시에 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고?”“어려울 게 뭐 있어요? 회사에서 정아 씨가 여기서 촬영하고 있다고 매일 홍보하는데.”“임 교수님이 정아 씨 삼촌이라는 건 기사를 통
그가 싸늘한 시체처럼 여기 조용히 누워 있는 것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다.이 장면이 앞으로 악몽이 될 것 같다.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차가운 손을 건드렸다.“유강후...”그의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 거무스름해 보였고, 손에는 전혀 온기가 없었으며 건드려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예전에는 아침에 그녀가 조용히 이름을 부르면 그는 오랫동안 키스를 퍼부었다.이번에도 그가 일어나서 키스한다면 그녀는 열광적으로 반응할 것이다.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강후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을 뿐이고 들리는 건 차가운 의료기기의 작동 소리뿐이다.온다연은 그를 바라보며 괴로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유강후,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이러면 제가 당신에게 목숨을 빚지게 되잖아요. 이런 방법으로 저를 묶어두고 싶으면 빨리 일어나세요.”이전의 여러 가지 일들이 뇌리를 스치면서 그녀는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그녀는 링거를 꽂지 않은 손을 당겨다 자기 아랫배에 대고 울먹이며 말했다.“저 임신했어요. 당신이 아기를 포기하면 저는 당신을 다시 보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너무 괴로워 이 말을 했을 때 유강후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온다연은 말을 이었다.“다만 앞으로 저한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마세요. 제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으라고 강요하지 말고 쓴 약을 마시라고 강요하지도 마세요.”“그리고 저는 나은별이 싫어요.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세요.”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유강후, 당신이 이 아이를 없애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저는 당신 곁에 오랫동안 머물 것이예요.”“사실 당신이 만든 음식은 맛있었어요. 갑자기 먹고 싶네요.”“아저씨, 보고 싶었어요...”그녀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목이 메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주변의 기기들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움직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왔다.온다연은 뒤를 돌아보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모두 마스크를
온다연은 머리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유강후!”즉시 뛰어갔지만 그녀의 손이 이송침대에 닿기 전에 유강후는 응급실로 옮겨졌다.그녀는 간호사를 따라 들어가려다가 밀려났다.“여기는 수술실이에요. 나가세요.”현장은 어수선했고, 유씨 집안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온다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유자성에게 발각됐다.“너 온다연이구나.”그는 앞으로 다가와 온다연의 모자와 마스크를 확 벗겼다.온다연은 한발 물러서서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저는 그냥 아저씨를 한 번 보고 싶어서...”“닥쳐!”유자성의 눈에는 싫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강후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너는 자격이 안 돼.”“너를 받아준 것이 후회되는구나. 너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유씨 가문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놨어.”유자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하령이 달려들어 뺨을 후려갈겼다.“천한 년, 감히 우리 오빠를 꼬시고 우리 삼촌을 이 지경이 되게 해? 죽여버릴 거야.”온다연은 몸을 낮추어 피했다.이때 최금영이 호통쳤다.“저년을 죽도록 두들겨 패거라.”경호원처럼 보이는 사람 두 명이 곧바로 온다연을 붙잡았다.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유씨 집안과 관계가 없다면서요? 무슨 자격으로 저를 때리는데요?”“이건 법을 알면서 고의로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최금영은 화가 잔뜩 나서 온다연을 가리키며 말했다.“때려! 주둥이를 찢어놔!”손바닥이 곧 온다연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그만!”경호원의 손은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강해숙이 온다연의 앞에 다가가더니 말했다.“놓아줘요.”경호원은 온다연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강해숙은 그녀를 자세히 훑어본 후 물었다.“네가 온다연이니?”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듣기 좋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박력이 있었다.온다연이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유씨 집안 사람들 쪽으로 돌아서더니 말했다.“내 아들이 목숨을 걸고 구한 사람인데, 누가 감히 건드려?”그녀는 온다연의 앞에 서서 부드럽지만
온다연은 묵묵히 의자 위의 캐시미어 숄을 그녀에게 건넸다.“이걸 걸치세요.”강해숙은 그것을 받아서 어깨에 걸치더니 담배를 던지고 온다연을 바라보았다.“내 아들이 지금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엄마인 나는 너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내 아들의 성격을 내가 제일 잘 알아. 네가 걔 마음속에서 지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그녀는 다시 한번 온다연을 훑어보았다.“어느 단계까지 갔어?”온다연이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또 말을 이었다.“대답할 필요 없어. 걔가 널 강박했다는 걸 알아. 수단을 써서 너를 억지로 곁에 두고 자유도 박탈했겠지.”그녀는 극히 지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미안해. 내가 아들을 잘못 교육해서 너한테 폐를 끼쳤어.”그녀는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너를 위해 죽을 지경이 됐으니 이전의 일은 퉁친 셈이야. 이제 너는 자유로운 몸이니 떠나렴. 장화연한테도 너를 막지 말라고 말해둘게.”강해숙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온다연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한참 후에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가요. 아저씨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강해숙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강후를 좋아해?”온다연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아까 하신 말씀이 절반만 맞습니다. 아저씨가 저를 통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도 기꺼이 원한 것이고 저도 아저씨를 이용했어요. 그러니 피차일반이라 할 수 있죠.”강해숙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앞으로 나를 강 대표라고 불러. 네가 이렇게 담대할 줄은 몰랐네. 감히 내 아들을 이용하다니.”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아저씨가 저를 이렇게 아낄 줄은 몰랐어요.”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이 다시 가슴속에서 치솟아 올랐다.알고 보니, 이 세상에 그녀를 이렇게 아끼는 사람이 있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아랫배에 올려놓고 침묵을 지켰다.강해숙은 마음이 초조해서 온다연의 작은 동작을 눈치채지 못했다.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온다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강후가 언제 깨어났는지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차분한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유강후...”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목멘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고, 손에 든 칼도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손을 가져와 봐.”온다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살살 해.”온다연은 잔뜩 긴장하며 이내 그를 놓아주었다.“미안해요. 혹시 상처 부위를 건드렸어요?”유강후는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큰 병을 앓고 난 후의 병색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머리가 좀 어지러워. 너무 오래 자서 그런가 봐.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온다연은 상처 부위가 갈라질까 봐 걱정하며 즉시 의사를 부르러 가려고 했다.하지만 유강후는 잔뜩 긴장한 그녀를 불러세웠다.“조금 있다가 불러. 먼저 내 곁으로 와 봐.”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손에 칼에 베인 상처가 가득한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어쩌다 이렇게 됐어?”온다연은 손을 빼며 말했다.“부주의로 긁힌 거예요.”사과를 너무 오래 깎다 보니 가끔 집중하지 않으면 다쳤다.유강후는 침대 가장자리를 툭툭 쳤다.“여기 앉아.”온다연은 얌전히 그의 옆에 앉았다.그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얼굴을 건드리더니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살이 많이 빠졌네.”온다연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저씨도 살이 많이 빠졌어요.”그녀는 얌전하고 온순하게 그의 가슴팍에 엎드려 나지막이 말했다.“너무 오래 잤어요. 10여 일이 지났거든요. 아저씨 때문에 놀라 죽을 뻔했어요.”유강후는 말없이, 그저 조용히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졌다.칼날이 온다연을 향할 때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전에는 그녀를 지키지 못한 적이 많은데,
물론 물어봐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온다연이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일부러 그녀를 놀렸다.“너를 싫어할까 봐 걱정돼?”얼굴이 더 빨개진 온다연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무슨 헛소리하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손바닥을 주무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온다연, 아무도 내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없어. 유씨 가문이든, 강씨 가문이든, 그들의 취향은 아무 소용이 없어.”이때 임 교수가 들어오자, 온다연은 급히 한쪽으로 물러섰다.다시 한번 자세히 검사한 후 임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이 가져온 약이 효과가 좋아서 빨리 회복되셨네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며칠 일찍 깨어나셨어요. 앞으로의 회복도 이상적일 것으로 예상됩니다.”“오늘부터 유동식을 먹을 수 있어요. 큰 운동은 하지 말고 너무 흥분해도 안 돼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이번에는 강해숙과 다른 유씨 가문 사람들이 들어왔다.그 속에 유민준도 있었다. 그는 온다연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다연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잠깐이면 돼.”그는 거의 애원하는 말투로 말했다.요 며칠 그는 온다연에게 말을 걸려고 각종 기회를 이용해 그녀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온다연은 항상 그를 피했고, 유씨 가문의 사람들도 단단히 감시해 온다연과 단둘이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오늘이 절호의 기회다. 온다연이 상대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온다연이 동의할 줄이야.“밖에 나가서 얘기해요.”온다연은 말하면서 유강후를 힐끗 보았다. 그의 눈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문을 나서자마자 유민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딱 잘라 말했다.“잘 들어요. 저는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전혀 좋아한 적이 없어요. 앞으로 더 이상 저한테 매달리지 마세요. 우리가 단둘이 얘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에요.”유민준은 감정이 약간 격해졌다.“아니, 그럴 리 없어. 내가 이전에 너한테 못되
유하령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 분명하다.그녀는 경멸과 혐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았다.“온다연, 네년이 감히 우리 오빠를 이렇게 대해? 이렇게까지 비는데, 더 이상 뭘 어떻게 해? 죽으면 돼?”“닥쳐!”유민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가 맨날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다연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어.”“뭐라고?”유하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유민준을 쳐다보았다.“오빠도 작은 아빠처럼 저년 때문에 나한테 못되게 굴 거야?”유민준은 대답하고 싶지 않아 온다연에게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우리가 이전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오빠!”유하령이 분노하며 유민준의 말을 잘랐다.“얘한테 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얘가 뭔데? 얘랑 얘 이모는 모두 품성이 나쁘고 뻔뻔스러운 년들이야.”찰싹! 온다연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유하령에게 따귀를 한 대 갈겼다.유하령은 완전히 멍해졌다.온다연이 먼저 때릴 줄은 생각지 못했던 그녀는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온다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네가 고유정을 들여보냈지? 네가 아니면 내가 테이프 커팅식 현장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어떻게 현장에 들어갈 수 있어?”“고유정이 나를 죽였다면 너는 뜻을 이루었을 것이고, 나를 죽이지 못해도 고유정이 감옥에 가게 되잖아. 어차피 고유정은 상갓집 개와 같으니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그녀는 유하령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아저씨가 나를 구하려고 칼을 맞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겠지. 너 때문에 아저씨가 죽을 뻔했어.”유하령은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고유정을 못 본 지 오래됐어. 내가 들여보냈을 리가 없잖아?”그녀의 표정에서 온다연은 원하는 답을 얻었다.온다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하령을 노려보았다.“유하령, 이건 다 자업자득이야. 아저씨가 너를 가만둘 것 같아? 강씨 가문에서 너를 가만두겠어? 이 일은 유씨 가문 아가씨라는 신분도 소용없어. 감옥에 갈
유강후는 표정이 잔뜩 굳어있고 눈빛도 차갑고 침울했다.화났다는 것을 눈치챈 온다연은 물티슈를 뽑아 손가락을 하나하나 깨끗이 닦은 후 손을 유강후 앞에 내밀었다.“그 사람이 잡았던 손을 깨끗이 닦았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그 자식과 단둘이 얘기하지 마.”그는 또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것 같았다.“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그 자식이 너를 괴롭히지 않았어?”온다연은 솔직하게 말했다.“있어요.”유강후는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너한테 무슨 말을 했어?”온다연은 그의 옆에 앉은 후 그의 손을 자기 얼굴에 대고 속삭였다.“아저씨가 깨어나기 전에는 그 사람과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유씨 가문 사람들이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하잖아요. 제가 피할 필요도 없이 그 집안 사람들이 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어요.”유강후는 그제야 표정이 좀 풀렸다.“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저씨와 나은별은 어떤 사이에요?”“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유강후의 표정을 봐서는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나은별과 어떤 사이인지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그 중요한 일을 말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보드라운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복잡한 일이라 짧은 시간 안에 설명하기 어려워. 내가 좀 힘이 생기면 천천히 말해줄게. 나와 나은별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은 말해줄 수 있어.”“두 분이 외국에서 결혼하지 않았어요?”온다연의 말에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말했다.“두 사람은 약혼반지도 있잖아요...”그 반지는 그녀의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무슨 반지?”유강후가 어리둥절해하자, 온다연이 뾰로통하게 말했다.“아저씨가 항상 끼고 있는 그 은색에, K자가 새겨져 있는 반지 말이에요.”유강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담담하게 웃었다.그는 그 은색 반지를 빼서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 놓
매우 두려운 듯 작은 아이는 말을 하다 멈추고는 옆에 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그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아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나, 나도 그냥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눈이 시큰해지며 온다연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하고 아팠다.두 아이를 품에 꼭 안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내가 엄마야. 너희는 모두 내 아이들이야...”그때,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아!”동시에 두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그녀의 품은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건 온 하늘을 덮은 눈송이뿐이었다.온다연은 다급히 소리쳤다.“아가야, 어디 있어? 아가야!”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다연아, 일어나!”“다연아!”놀란 온다연이 벌떡 깨어났다.눈앞에는 염지훈의 커다란 얼굴이 보였다.그가 그녀의 이마를 만지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열은 없는데 땀이 많이 났네.”온다연은 아직 꿈속에 머물러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땀이 젖은 머리카락이 하얀 피부에 들러붙어 그녀의 흑발과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염지훈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행동을 피했다.그러자 염지훈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이 스쳤다.3년이 지났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염지훈의 스킨쉽을 거부하고 있었다.‘기억은 희미해졌다고 하지만... 왜 여전히 날 거부하는 거지?’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도 괜찮아. 이제 곧 약혼식을 올릴 거야. 그 이후엔 다연이도 더 이상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겠지.’“또 악몽 꿨어?”그는 손에 든 휴지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물었다.“요즘은 한동안 악몽 안 꿨잖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온다연은 염지훈의 손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들어왔어요?
바닷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 가득 시원함이 가득 찼다.공기에는 안심이 준비해준 라벤더 아로마의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온다연은 안심과 진수현을 떠올렸다. 그들은 온다연을 특별히 아껴주며 사랑으로 감싸주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듯이 노력했다.‘이런 부모님이 곁에 있는 이상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면 잃은 대로 괜찮지 않을까...’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서서히 잠에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전통 스타일로 꾸며진 정원에 살고 있었다.마치 설날처럼 느껴졌고 창밖에는 하늘 가득 불꽃놀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손에는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었다.그리고 키가 큰 남자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연아, 너는 내 거야. 그리고 너는 오직 나만의 것이야.”“말해 봐. 내가 누구인지.”그 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몸을 떨리게 했고 부끄러움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남자는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녀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을 했다.결국 그녀는 숨죽인 채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당신은... 내 남자예요...”꿈속에서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부끄러워했지만 남자의 끊임없는 스킨쉽을 이겨낼 수 없었다.그의 손길 아래 온다연은 마치 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다.그러나 어느 순간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모든 것이 사라지고 눈송이가 휘날리는 추운 풍경으로 바뀌었다.얼음장 같은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고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다.그녀는 복도의 입구에 서 있었고 복도 끝에는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그 아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추운 겨울에도 맨발이었다. 작은 발은 어느새 새빨갛게 얼어있었다.아이의 손에는 더 작은 아이의 손이 잡혀 있었다.더 작은 아이는 온다연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그 아이 뒤에 숨었다.그리고 작은 머리만 빼꼼히 내밀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온다연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곧 마치 무엇에 이끌리듯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그녀를 본 작은 아이는 이내 눈
온다연이 사라진 것을 알자마자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소리쳤다.“다 아빠 때문이에요! 아빠가 겁만 안 줬으면 도망가지 않았을 거라고요!”유강후도 속이 타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네가 울고불고 소란만 피우지 않았으면 달아났겠어?”아이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나서 갑판에 주저앉아 버릇없이 울며 떼를 썼다.“내가 찾았단 말이에요! 아빠가 못 찾은 걸 내가 찾았는데 아빠가 겁줘서 도망가게 했잖아요! 아빠가 책임요! 돌려달라고요!”“모두 엄마가 있는데 나만 없었어요! 겨우 찾았는데 아빠가 또 놓쳐버렸잖아요! 아바가 무능해서 그런 거예요!”유강후는 그녀를 쫓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아이가 계속 소란을 피워 참을 수가 없었다.하여 화를 억누르며 으름장을 놓았다.“지금 찾으러 갈 거야. 너는 여기 위층에 가서 기다려! 네가 울어서 도망간 거니까 못 찾으면 너 바다에 던져버릴 줄 알아!”이 말을 들은 아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도 같이 갈래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따라오면 발목만 잡을 뿐이야!”아이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맨날 사진만 들여다보고도 못 알아봤으면서! 내가 먼저 찾지 않았으면 또 놓쳤을 것 아니에요?! 근데 내가 발목을 잡는다고요? 이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돈을 번 건지 모르겠네요!”둘은 서로의 핑계를 대며 초조하게 온다연을 찾아 나섰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마치 이 세상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 시각 온다연은 이미 진씨 가문 헬리콥터를 타고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그날 크루즈에는 많은 손님들이 있었고 크고 작은 헬리콥터들이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다.진씨 가문의 헬리콥터는 그중 하나로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온다연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질 듯한 기분으로 벽에 기대며 숨을 골랐다.가슴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거대한 크루
다만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마치 사람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는 듯한 냉정함과 거리감이 느껴졌다.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온다연의 가슴이 다시 답답하게 조여왔다.게다가 남자가 점점 다가오자 그의 강렬한 존재감에 압도당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온다연은 황급히 아이를 내려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꼬마야, 가족 왔으니까 난 먼저 갈게.”하지만 아이는 그녀의 다리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유강후는 자신의 아들이 낯선 여자아이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아이는 사실 평소에 낯을 많이 가려서 자신과 장화연 외에는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낯선 여자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봤다.그러나 보이는 건 고개를 숙인 채 옆모습만 드러난 평범한 얼굴이었다.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였지만 그녀는 유강후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가 한 걸음 다가가면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결국 난간 근처까지 물러난 뒤, 그녀는 아이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는 도망치듯 달아났다.그러자 아이는 눈에 금세 눈물이 고여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엄마!”그녀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아이를 돌아봤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하지만 그 짧은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유강후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순간, 그의 가슴이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듯했다.그녀의 눈. 그 눈은 온다연의 눈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조명이 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 속에는 깊고 따뜻한, 샘물이 고인 듯한 투명함과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잠시 멍하니 있다가 유강후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다연은 온몸이 경직되어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이내 두려움에 온다연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유강후가 너무도 두려웠다.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온다연이 부드러운 아이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넌 누구네 아기야? 이름이 뭐니?”아이의 목소리는 귀여운 아기 말투로 답했다.“난 엄마의 아기예요, 엄마.”그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에 온다연의 마음이 마치 녹아내린 설탕처럼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졌다.그녀는 아이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난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데?”그러자 작은 아이는 갑자기 입을 삐죽거리며 슬픈 얼굴이 됐다.“근데 난 내 엄마인 것 같은데...”그러다 문득 눈을 반짝이더니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결혼 안 했다니 잘됐네요! 우리 아빠 혼자예요. 아빠 아내가 아빠를 버렸거든요. 아빠랑 결혼하면 그쪽은 내 엄마가 되는 거예요!”온다연은 눈이 휘어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대체 누구 집 아이지? 정말 너무 사랑스럽네.’그리고 어쩐지 어디선가 본 듯도 했다.“너희 아빠는 누구셔? 왜 아내가 그분을 버렸는데?”온다연이 웃으며 묻자 아이도 같이 웃으며 허리를 한껏 꼿꼿이 세우고 뒤를 가리켰다.“우리 아빠는 성이 강씨이고 저 안에서 술 마시고 있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엄마가 떠난 거예요.”아이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근데 걱정하지 마요! 우리 아빠는 잘생겼어요. 나처럼요! 그리고 아빠랑 결혼하면 내가 아빠 술 못 마시게 할게요. 아빠가 반드시 잘해줄 거예요!”“그래서 이제 엄마가 돼 줄 거예요?”온다연은 점점 더 환하게 웃었다.아이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볼을 다시 한번 꼬집으며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좋아. 그런데 난 혼수 많이 받을 거야.”입술이 삐죽 나왔지만 아이는 곧 당당하게 말했다.“아빠 돈 많아요! 원하는 대로 말만 해요!”온다연은 웃으며 주변을 가리켰다.“그럼 여기 있는 모든 크루즈랑 이 바다를 다 달라고 해. 그걸 혼수로 주면 내가 너희 엄마 해줄게.”아이는 눈빛을 반짝이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꼭 잡았다.“직접 말한 거예요?! 약속이니까 꼭 지켜야
진수현은 유강후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유강후의 배경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나이에 이런 성과를 이룬 건 실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자신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잔을 살짝 흔들며 진수현은 미소 지었다.“유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혹시 결혼은 하셨습니까?”유강후의 시선이 안심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고 그 눈빛에 어두운 기운이 스쳤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은 했지만 지금은 부인이 절 떠나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는 절 보려 하지 않네요.”이 말에 진수현이 피식 웃었다.“젊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많은 관용을 기대하죠. 유 대표님처럼 뛰어나신 분이라면 사모님도 틀림없이 대단한 분일 겁니다.”유강후는 다시 한번 안심을 바라봤지만 침묵하며 답하지 않고 대신 잔을 들어 와인을 살짝 흔들었다.“진 대표님은 잃어버렸던 따님을 찾으셨다고 하던데... 정말 축하드립니다.”진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유 대표님 소식이 정말 빠르시네요. 그런 일까지 알고 계시다니.”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서 있던 안윤희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혹시 이분이 대표님의 따님이신가요?”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실망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이 젊은 여자는 진수현의 곁에 서 있었고 안심과도 매우 친밀해 보였다.‘이 사람이 진 대표의 딸인가?’하지만 그녀는 온다연이 아니었다.‘다연이 소식이 또 끊겨버렸네.’그는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왜 그렇게 매정할까? 왜 나한테 조금의 희망조차 남겨주지 않는 걸까?’진수현은 유강후의 물음에 미소만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고 직접적으로 부정하거나 긍정하지 않았다.그는 자기 딸의 정체를 굳이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필요 없는 오해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진수현의 태도에 유강후의 마음속에서 간신히 피어오르던 작은 희망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고통이 다시 찾아왔고 목구멍에는 쇳내가 가득 차올랐다.그는 억지로 고통
‘왜 이렇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저 사람 누구지? 왜 보자마자 이렇게 괴로운 거야? 가슴이 너무 아파.’극심한 통증 속에 온다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어떤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역시 이런 여름날과 비슷한 계단 끝이었다.빛 속에 서 있던 고귀하고 우아한 흰옷의 소년, 너무도 아름다워 그녀의 마음에 수많은 열등감과 동경을 불러일으켰던 그 모습.‘누구지? 왜 내 머릿속에 있는 사람이랑 이렇게 닮은 거지? 왜 내 머릿속에 이런 장면들이 떠오르는 걸까?’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머리가 더욱 심하게 아팠다.심지어 통증은 가슴을 갈가리 찢는 듯한 고통으로 번져갔다.그러나 이런 장소에서 그녀는 소리칠 수도 없었다.진수현은 딸의 이상한 모습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녀를 안아 옆에 마련된 휴게실로 데려갔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과 땀범벅이 된 모습을 본 안심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하여 땀을 닦아주며 그녀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그냥 돌아갈까? 이런 연회 안 가도 돼.”뜨거운 물을 조금 마시고 나서야 온다연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그러나 방금 떠오른 장면들을 더는 떠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녀는 안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저 괜찮아요, 엄마. 이번 연회는 정말 중요한 자리예요. 안 갈 순 없어요.”진수현도 몹시 안타까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갑자기 머리가 아팠던 거니? 거의 2년 동안 이런 적 없었는데... 혹시 또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거야?”한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후회가 몰려왔다.염지훈의 말을 믿고 딸의 과거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한 것이다.염지훈은 온다연이 과거에 행복하지 못했다고 했고 그녀가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한다며 과거를 들추면 더 큰 고통을 안길 것이라고 조언했었다.진수현도 딸이 힘든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기에 대충 알아보는 선에서 그쳤다.딸의 양부모는 이미 사망했고 그녀가 살던 동네의 이웃도 모두 떠난 상태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은 눈에 가득 애정을 담아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다음 달 약혼식은 미루면 안 돼. 우리 딸의 일이 가장 중요한 거야.”그러자 얼굴이 붉어지며 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엄마, 그런 얘기 그만 좀 하세요.”안심은 웃으며 말했다.“지훈 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네 아버지 젊었을 때와 닮았어. 나도 네 아빠도 그 사람이 아주 마음에 든단다. 너를 그 사람에게 맡겨야 우리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진수현이 방으로 들어오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에 들긴? 난 마음에 안 들어! 내 딸은 평생 시집 못 가!”이를 들은 안심이 그를 매섭게 쳐다보았다.“그딴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오늘 밤엔 거실 소파에서 혼자 잘 줄 알아요!”당황한 진수현은 급히 변명했다.“여보, 그러지 마. 우리 딸 듣고 있잖아.”안심은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온다연의 손을 잡아끌며 방을 나섰다.조금 뒤, 진씨 가문의 전용 헬리콥터가 크루즈의 갑판 위에 부드럽게 착륙했다.헬리콥터에서 내리자 온다연은 크루즈의 거대한 규모에 잠시 넋을 잃었다.각 크루즈선은 마치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넓고 평탄했고 열여덟 척의 크루즈가 연결된 모습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육지와 다를 바 없는 규모였다.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복장을 입고 있었고 특히 여성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게 꾸민 모습이었다.그들 사이에서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오아시스 그룹 사람들이야. 이번 해양 프로젝트의 최대 주주라지.”“들리는 말로는 겨우 서른 초반인데 아직도 미혼이래.”“근데 그 사람 얼굴을 본 적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모르겠네.”“어떻게 생겼든 오아시스 그룹의 대표라잖아. 들은 바로는 화운 그룹과 제경 그룹도 그 사람 소유래.”“세상에... 그럼 진씨 가문도 저 사람보다 못한 거네.”“진씨 가문이 동남아시아에서 강하지만 이쪽에서는 오아시스 그룹 쪽이 더 강해. 단지 영향권이 다른 거지, 서로 비교할
온다연은 난간 옆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석양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집사가 다가왔다.“사모님께서 드레스 갈아입으시고 준비하시라고 전하셨습니다. 곧 저녁 연회가 시작되니 출발해야 합니다.”그제야 온다연은 정신을 차렸다.드레스를 갈아입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늘 그렇듯 그녀만을 위한 전용 메이크업을 시작했다.이 메이크업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가려버려 단지 청순한 정도로 보이게 만들었다.사실 이 메이크업은 아버지 진수현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그녀를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의뢰한 것이었다.특히 이 메이크업은 특수 재료로 만들어져 쉽게 지울 수 없고 최대 3개월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덕분에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그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진수현의 딸이나 진씨 가문의 금융 천재 소녀와 연결 지으려 하지 않았다.과거에 누군가 진씨 가문의 금융 천재 소녀가 노트북으로 일하는 모습을 몰래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사진 속의 그녀는 마치 요정처럼 세상에 내려온 듯한 아름다움을 뽐냈다.그 모습은 젊은 시절의 안심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그러나 그 사진은 즉시 삭제되었고 촬영한 사람도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 결과 많은 이들이 온다연의 사촌 언니이자 안심의 조카인 안윤희를 진수현의 딸로 착각했다.안윤희는 안심과 약간 닮은 데다 비록 외모가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꽤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온다연이 보석을 착용할 때 집사가 그녀의 목에 걸린 호박석 펜던트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온다연은 이를 막았다.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펜던트를 한순간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펜던트를 떼어낼 때마다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연회에 인공 보석을 착용하고 가는 건 진씨 가문의 명예에 걸맞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펜던트를 떼어내어 다이아몬드 팔찌와 함께 손목에 착용했다. 이로 인해 펜던트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온다연이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본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