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원의 시선이 ‘양시연’이라는 이름에 잠시 머물렀다. 몇 초 후 그는 서류를 담담히 닫아 왼쪽에 내려놓았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묘지를 짓겠다고?”연정훈이 말했다.“문제 있어?”그저 상업적 수단일 뿐이다.부승원이 대답했다.“...문제없어.”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은 의미가 없지. 협력하는 게 낫지. 땅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면서.”연정훈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상대방을 무너뜨리고 나면 저렴하게 사용권을 사들여 고급 묘지를 짓는 거지. 땅은 여전히 쓸 수 있을 테야.”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반우희는 겉으론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연정훈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천재다.돈을 벌 줄 아는 천재란 이런 사람인가 싶었다.부승원은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말했다.“이 땅에는 작게나마 문제가 많아. 이번 기회에 다 해결해 버리자.”연정훈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네가 전적으로 처리해도 좋아.”정인과 JX는 지난 몇 년간 다양한 협력을 이어왔고 양사의 고위층과 변호사들은 이제 서로에게 오랜 친구나 다름없었다. 업무가 끝난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연 대표님, 저녁 시간 괜찮으신가요?”연정훈은 말을 건 변호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저녁에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 함께할 수 없어요.”“네. 유감입니다.”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정인 쪽 고위 임원은 연정훈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측하였다. 몇 년 사이 연정훈이 참석하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직접 대접받곤 했다.30대 초반의 그는 업계의 노련한 전문가처럼 보였다.다른 이들이 모두 흩어진 후 연정훈은 부승원의 사무실로 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결국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부승원이 상징적으로 물었다.“같이 저녁 먹으러 갈까?”“아니. 다른 일이 있어”부승원은 속으로 비웃었다.‘무슨 할 일이 있겠어.
강남시티에서.연정훈이 집에 도착하자 아주머니가 나비를 데리고 나왔다.아주머니는 그가 돌아온 걸 보고 웃으며 말했다.“늦으셔서 제가 산책을 대신 나갈까 했어요.”연정훈은 목줄을 받아들며 말했다.“제가 데리고 갈게요.”“네.”아주머니가 물었다.“저녁 드시고 나서 산책하시는 게 어떠세요?”“괜찮아요. 한 바퀴 돌고 나서 먹을게요.”“알겠습니다.”최근 한 달 동안 연정훈이 매일 나비와 산책을 나서는 모습이 이제 아주머니에게 익숙해졌다. 나비는 체중이 많이 나가 의사가 다이어트를 권했던 참이었다.수천억 자산을 가진 회장이 양을 이렇게 세심하게 챙긴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나비는 다소 게으른 편이라 영준이와 비교하면 훨씬 더 몸집이 크다.연정훈이 산책을 시키려고 목줄을 잡으니 나비는 가기 싫다는 눈치였다.“안 가면 내일 저녁밥 못 먹는다.”길가에서 사람과 양의 익숙한 실랑이가 시작되었다.나비는 고집스럽게 꿈쩍도 안 했고 연정훈은 목줄을 살짝 당기며 나비에게 말했다.“빨리 앞으로 걸어가.”나비는 자리에서 걷는 시늉만 하며 연정훈의 말을 흘려들었다.연정훈이 나비를 냉랭하게 보며 힘주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그러자 고집 센 나비는 걸어가다 멈춰 서서 심통을 부리는 듯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초여름 밤의 공기는 적당히 서늘해 산책하기 좋았다. 그렇게 둘은 빌라 주변을 몇 번 돌아본 후 집으로 향했다.집에 들어서자 검은색 털 뭉치가 소파 옆에서 졸고 있었다.나비는 즐겁게 집 안을 뛰어다니며 아들을 깨우고 연정훈 곁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연정훈이 저녁을 먹으려 하자 나비는 끊임없이 머리로 그의 다리를 밀어댔다.아주머니가 말했다.“아마 간식을 먹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녁을 덜 먹었나 봐요.”연정훈은 손으로 나비의 머리를 그의 다리에서 떼어냈다.나비는 다시 머리를 올리며 끈질기게 매달렸다.그는 어이없다는 듯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이틀 사이에 체중이 좀 줄었나요?”“네. 계속 줄고 있어요.”연정훈은 고
토요일 저녁.반우희는 단정하게 차려입고 길가에서 부승원의 차에 올랐다.부승원은 반우희의 A라인 치마와 흰 셔츠를 힐끗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반우희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부 변호사님, 이거 정장 맞죠?”“응.”반우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부승원이 차를 출발시키자 반우희는 거울을 열어 머리와 옷매무새를 점검했다.이번 달 월급이 들어오면 새 셔츠를 하나 꼭 사야겠다.최근 온몸에 고르게 살이 많이 쪘다. 가슴까지 살이 붙어버려 셔츠가 조금 작게 느껴졌다.에휴.지난 몇 년간 안시연이 준 4천만과 부승희 씨가 준 금괴가 없었다면 지금쯤 정말 바쁘게 일하면서도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을 것이다.승주와 다른 두 아이의 학비 그리고 그녀의 학위 취득 비용까지 모두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부 변호사님, 안시연 언니 다시 돌아올까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모르지.”‘조금 후면 알게 될 거야.’반우희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부승희 씨도 오랫동안 못 봤네요.”“승희는 새해에 돌아왔었어.”“정말이에요?”“그런데 친구가 너무 많아서 너를 챙길 시간이 없었어.”반우희는 침묵했다.“...”정말 짜증이 난다.레스토랑 주차장에 도착하자 부승원이 갑자기 반우희에게 경고했다.“잠시 후 사람을 만나면 좀 자제해.”반우희의 호기심이 더 커졌다.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니 다른 몇 명의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고 반우희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방의 문을 열기 전 묘한 긴장감이 스쳤다.스크린을 지나가자 앞사람들이 키가 커 테이블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 변호사님, 오랜만이에요.”응???반우희는 즉시 눈이 반짝였다.익숙한 목소리였다.다만 기억 속의 온화함에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 더해져 있었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부승원이 말했다.“제 예상이 맞았네요.”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경
안시연은 테이블을 돌며 차례로 술을 권했지만,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정인과 부승원 측 사람들은 노련한 이들이라 처음엔 안시연을 그저 젊고 예쁜 여자로만 보며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몇 잔의 술을 주고받은 후 그들은 진지하게 대응하며 적당히 웃어넘기기 시작했다.안시연도 그들이 처음부터 사용권을 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럼에도 이 사용권은 반드시 따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안시연의 목표는 정인의 지분 참여를 끌어내 쌍방이 협력하는 구도를 만드는 것이었다.하지만 이 자리에 오기 전부터 상대방이 이미 자신의 의중을 꿰뚫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이면 더욱 불리해질 뿐이었다.이것이 바로 상대가 부승원임을 알면서도 안시연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였다.최소한 벽처럼 완고한 상대는 아닐 거로 생각했다.담소 중 안시연은 술기운을 빌려 조심스럽게 하소연을 시작했다.새롭게 맡은 자리에서 몹시 어려운 상황을 물려받았다는 얘기는 듣는 이 누구에게도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더구나 그녀처럼 눈에 띄는 미녀가 공격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니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분위기는 저절로 부드러워졌다.하지만 이내 그들은 다시 주도권을 잡으며 안시연의 배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을 나서기 전 양지원이 해준 말이 생각났다.즐거우면 일하고 싫어지면 다 팔아버리고 땅을 다시 사서 새로 시작하라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자존심이 상할 뿐 아니라 돌아가면 선생님들에게 엄청난 놀림을 받을 게 뻔했다.‘아니. 그건 싫어. 그만두면 안되.’안시연은 포기하려는 마음을 떨쳐내고 다시 의욕을 다잡으며 협상에 집중했다.그때 중간에 반우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언니, 저쪽이 땅을 안 팔 생각인가 봐요. 게다가 언니 땅에 묘지를 짓겠다고 하네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곧 반우희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연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
부승원 앞에서는 쉽게 인사말을 건넬 수 있었지만, 연정훈 앞에 서니 그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귀국 전에 안시연은 언젠가 연정훈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번 상상해 보았다.그런데 아무리 예행연습을 해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막상 실전에서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연정훈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안시연을 깊숙이 응시했다.안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 대표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연정훈은 순간 어이없었다.“...”연정훈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것입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말했다.“지나가는 길에 뵙게 된 것도 저희에게는 기회입니다.”그러고는 카드를 비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사장님께 가서 제가 보관해 둔 술을 가져와 주시겠어요?”“네. 알겠습니다.”비서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양쪽 사람들은 정중히 연정훈에게 앉아 달라고 요청했고 안시연은 자리에서 가방을 들어 그에게 상석을 양보하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냉정한 표정으로 바깥쪽 의자를 당겨 편안하게 앉으며 마치 이 자리를 자기 주도 아래에 두고 행동했다.사실 연정훈이 입장한 순간부터 이 방의 분위기는 이미 그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그가 앉자 모두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조정했고 출입문 맞은편 자리가 상석처럼 변했다.하지만 연정훈의 왼쪽 자리는 안시연 측 사람들에 의해 깔끔하게 비워졌다.안시연은 상황을 파악하고 비서가 술을 가져오는 동안 자리로 다가가 연정훈에게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한 잔을 채웠다.“연 대표님, 이 잔은 감사의 마음으로 올리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안시연은 자연스럽고 유창하게 말을 이어갔다. 연정훈뿐만 아니라 반우희와 부승원도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안시연이 연정훈을 정말 처음 보는 줄 알 정도였다.연정훈은
용도?여기에 추모 공원을 짓는다고?양시연은 속으로 툴툴거렸다.‘이렇게 큰 공간에 왕릉이라도 지으려는 거야?’그러나 양시연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알겠어요. 정인 그룹이 봐 둔 곳이라면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좋은 것이겠죠. 덕분에 좋은 곳을 알게 되어서 감사해요.”“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시연 씨.”“...”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데 자신이 성을 바꾼 사실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하지만 옆자리에서 덤덤하게 음식을 먹고 있는 부승원을 보는 순간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부! 승! 원!’‘정말 겉보기랑 다르게 가십에 빠른 변호사라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말했다.“실례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정인 그룹은 이 땅을 어떻게 사용하실 생각인가요?”“아직 생각해 둔 바가 없어요.”‘생각해 두지 않았으면서 따로 용도가 있다고 말하다니.’차라리 ‘상업 기밀’이라고 말했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이건 분명 태클이 분명했다.하지만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최악의 상황이 오면 발을 빼면 되었다.그러니 두려울 게 없었다.양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정인 그룹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면 연 대표님은 협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연정훈은 덤덤하게 양시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협력이요?”“네.”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라면 섭섭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정인 그룹 사람은 아무리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바로 알아차렸다.느닷없이 나타난 연정훈은 양시연과 모르는 사이 같아 보여도 행동에서 보면 양시연을 노리고 온 게 분명했다.그리고 늘 깔끔하고 정돈된 모습만 보이던 연정훈이 오늘엔... 시계를 차지 않았다.급하게 달려왔다는 의미였다.어느 높은 자리의 사람이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가 말하는 협력은 어떤 의미인가요?”양시연이 입을 열려는데 연정훈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옆에 놓인 담배를 힐끗 바라봤다.그러자 양시연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뜯어 다른
“스케줄 확인하고 말씀드리죠.”연정훈은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이에 부승원은 몰래 헛웃음을 내쉬었다.다른 사람들은 이게 연정훈의 평소 스타일이기에 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양시연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협력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괜찮았다. 양시연은 과거 자신이 말도 없이 떠난 것에 원한을 품은 연정훈이, 공과 사를 가리지 못하고 복수를 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시간을 확인한 양시연이 살짝 떠보듯 물었다.“연 대표님 아직 식사 전이죠?”그리고 그 예상이 맞은 듯 연정훈은 차가운 얼굴을 살짝 끄덕였다.“여기 시그니처 메뉴 한번 드셔보실래요?”양시연은 웨이터를 불러 다시 음식을 주문했다.그러나 주문할 때 과거 연정훈이 좋아하던 음식을 주문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많은 고민 끝에 양시연은 그 메뉴를 주문했다.협력 파트너의 입맛을 굳이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으며 연정훈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다른 협력사 관계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메뉴판을 돌려주며 양시연은 웨이터에 재차 강조했다.“고등어는 꼭 찜으로 해주세요.”다시 자리에 앉은 양시연은 또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양시연은 연정훈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또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다.그러자 연정훈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양시연이 무슨 질문을 해도 연정훈은 짧은 단어로 답했다.아무렴 상관이 없다는 양시연의 태도에 연정훈은 점점 더 굳어갔다.그러자 식사 자리 분위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갔다.겨우 식사를 마치고 양시연은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여러 고위 임원에게 드렸다.그러나 마침 연정훈의 차례에 준비해 둔 선물이 동이 나버렸다.연정훈은 차량 뒷좌석에 앉아 ‘없어도 그만’이라는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이 미소를 지은 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연 대표님,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선물이라는 단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차 안의 사람이 대답이 없자 양시연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종료하고 손을 휘휘 저었으며 차량 뒤쪽으로
양시연은 진작 번호를 바꿨다. 반우희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건 양시연이 따로 반우희의 번호를 옮겨 저장했기 때문이었다.양시연이 방금 자리에서 건넨 명함의 번호는 개인 번호가 아니었으며 반우희가 가지고 있는 번호가 진짜였다.부승원은 바로 눈치를 챘었고 양시연이 건넨 명함에 개인 번호를 옮겨 적었다.반우희는 그 옆을 총총 맴돌며 이렇게 하는 게 맞는 일인지 초조해했다.“시연 언니가 그랬는데 이건 개인 번호라 다른 사람한테 넘기면 안 된다고 했어요.”“내가 뺏은 거지. 네가 준 게 아니잖아.”부승원이 말을 고쳤다.“...”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저녁이었다.부승원은 우산을 쓰지 않고 쿠키와 명함을 챙겨 연정훈의 차로 걸어갔다.멀지 않은 곳에 세워 둔 양시연의 차도 출발을 했다.부승원이 창가를 똑똑 두드리자 창이 내려가고 예상했던 그 차가운 얼굴이 드러났다.부승원은 그 쿠키 박스를 안으로 던지고 명함을 표창처럼 얼굴에 꽂았다.“...”그러자 연정훈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부승원은 팔짱을 척 끼며 말했다.“쿠키는 시연 씨가 직접 구운 거고 명함에 적힌 번호는 개인 번호야.”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려 옆에 떨어진 박스를 쳐다봤다.“멍하니 있지 말고 차에서 내려 나한테 절이라도 할래?”“...”...양시연은 술을 적지 않게 마셨다. 1년 동안 술을 많이 접했지만 주량은 늘지 않아 조금 알딸딸한 상태였다.뒷좌석에 편히 기대앉은 양시연은 연정훈에게서 풍기던 그 옅은 향이 떠올랐다.레몬 페퍼먼트 향.과거 양시연이 즐겨 쓰던 향이었다.술자리에서는 파트너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연정훈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기억이 났다.이건 또 이것대로 꽤 난감했다.과거 사랑했던 사이인데 연정훈은 조금도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쯧.‘내일 다시 만나면 표정을 조금 풀까?’그런데 그때 기사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누군가 우리의 뒤를 밟고 있습니다.”양시연이 바로 허리를 세우
이승우와 모연준이 싸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양시연과 연정훈 역시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무도회를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승주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급히 말했다.“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봤을 때는 이미 싸우고 있었어요. 근데 서로 말은 안 하고 싸우기만 하더라고요. 왜 싸우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승주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싸움이 고조되지 않은 채 욕설도 오가지 않은 것이 못내 답답한 듯했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다 왔어요. 바로 저 앞이에요.”승주는 다급하게 외쳤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끌며 더 빠르게 움직였다.방 입구 바로 앞의 넓은 홀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대부분 싸움을 말리려는 사람들이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어수선했다.반우희도 홀 한쪽에 있었는데 아마 부승희를 말리려다 부승원에게 밀려난 듯했다. 전체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모연준은 몇몇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었고 이승우 또한 제지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승우의 이마에서 선명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이렇게 심하게 싸운 건가?’양시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승우 머리 다친 건 부승희가 때린 거예요.”양시연은 더욱 놀랐다. 그녀는 연정훈을 밀어 싸움을 말리러 가라고 했지만 연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손짓으로 이승우의 반응을 보라고 했다.홀 중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승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의 상처를 만졌다. 손바닥에 묻은 피를 확인하더니 그의 얼굴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승우는 조용히 부승희를 응시했다.부승희는 모연준의 앞에 서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이승우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부승희 너 진짜 대단하다. 저놈 때문에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이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듯 말했다.부승희
양시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연준 씨에게 문제가 있다면 부승원 씨가 이미 알아냈을 텐데 부승희 씨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있어요?”연정훈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손으로 간식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걸음을 옮기며 그는 차분히 대답했다.“부승희 성격을 알잖아. 부승원이 설령 뭔가 알았다 해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을 거야. 암시 정도로 끝냈겠지. 부승희가 직접 고른 남자가 문제 있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부승희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면 배신도 못 참지만 자신의 선택이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건 더 못 견딜 것이다.그래도 부승원은 딱 하나뿐인 여동생이니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할 말을 전했을 것이다.그들은 방에서 나와 위층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도착한 무도회는 건물 꼭대기에 있었고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주변 건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무도회 중앙에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양시연은 춤에 자신이 없었지만 연정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연정훈은 격식을 차린 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가볍게 감싼 채 부드러운 리듬에 맞춰 움직였고 양시연도 그의 목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정훈 씨와 부승원 씨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당신 생각엔 부승원 씨가 우희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연정훈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 쓰기 싫다는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며 대답했다.“부승원을 누가 알겠어.”“...”“남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들이 잘살든 못살든 우린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양시연은 그를 흘겨보며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당신과 형제 맺는 사람은 정말 불쌍하네요. 좋은 일은 안 하면서 불난 데 부채질이나 하고 말이에요.”‘장서진 얘기를 괜히 꺼내서 부 변호사를 속상하게 만들고.’연정훈은 당당히 말했다.“나는 부승원이 더 이상 속지 않도록 돕고 싶었어. 정말로.”“당신은 마
반우희는 솔직하게 말했다.“친구 한 명이 돈이 조금 모자란다고 해서 승주랑 상의하고 건담 피규어를 팔았어요.”“의리 있네요.”이승우가 반우희를 칭찬하자 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그 친구가 누구예요?”연정훈이 갑자기 물었고 반우희는 물으면 뭐든 답하는 성격이라 솔직하게 말했다.“장서진이요.”양시연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물었다.“그때 승주 생일 때 너희 집에 왔던 그 남자애 맞죠?”“네. 맞아요.”‘오호라.’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허리를 살짝 밀며 눈짓했다.‘정훈 씨, 엄청 예리하네요.’연정훈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고 사실 그는 반우희의 친구가 그 한 명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만남에서 그의 관심은 온전히 양시연에게 쏠려 있었지만 장서진과 반우희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이승우는 다시 활기를 되찾은 듯 일부러 말했다.“재산 다 털어서 도와줄 정도면 진짜 친한 친구인가 보네요.”반우희는 가슴을 툭 치며 대답했다.“저랑 장서진은 함께 자랐어요. 장서진의 일이 곧 제 일이죠. 돈이 뭐가 대수겠어요.”“말 잘하네요.”이승우가 박수를 치며 그녀를 응원하듯 말한 후 일부러 부승원을 힐끗 쳐다봤다.‘쯧쯧.’부승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를 밀며 조용히 말했다.“끝.”이승우는 눈썹을 치켜세웠고 부승희는 제일 먼저 패배를 인정하며 말했다.“돈 내야지.”조금 떨어진 곳에서 승주가 크게 반우희를 불렀고 반우희는 모두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그쪽으로 뛰어갔다.반우희가 떠나자마자 이승우는 부승원에게 묘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반우희 씨가 너를 피하는 것 같은데?”부승원은 속으로 불쾌함을 느꼈다. 반우희가 자신의 물건까지 팔아가며 돈을 빌려준 상대가 그 남자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자신도 힘든 처지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의 구세주 노릇을 하는 거지?’이승우의 말을 곱씹으며 부승원은 미간을 찌푸렸다.‘반우희가 나를 피한다고?’곰곰
이승우와 그의 진짜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양시연도 연정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시작은 화려했지만 끝은 초라했고 결국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그야말로 이승우답게 제멋대로 굴다가 끝난 일이었다.이승우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부승희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는 양시연조차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연정훈은 이를 단순히 해석했다.“아마도 조금 모자라서 그럴 거야.”양시연은 그 말에 장난스럽게 응수했다.“정훈 씨는 다른 사람 얘기할 때는 유독 말을 잘하네요.”연정훈은 침묵했다.“...”지금도 양시연이 다른 사람들을 힐끔거리는 것을 본 연정훈은 슬며시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물었다.“어디 보고 있어?”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에 기대 안겼고 연정훈은 한 손으로 대충 포커를 하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불평을 터뜨렸는데 이승우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포커 테이블에서 애정행각이라니 진짜 양심도 없네.”연정훈은 양시연을 흘끗 바라봤고 그녀는 눈치를 채더니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하면 어쩔 건데?’이승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부승희는 양시연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시연 씨도 이제 많이 뻔뻔해졌네요.”양시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곁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들게 마련이죠.”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 대화에 어이없어하며 잠시 침묵했다.“...”이들의 유쾌한 티키타카가 오가는 동안 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그였기에 지금 그의 기분을 짐작하기는 더욱 어려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반우희가 이승우의 뒤에 조용히 다가왔다. 이승우는 입이 독한 편이라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제 뒤에 서지 마세요. 우희 씨가 내 패를 훔쳐보고 부 변호사님한테 일러바칠까 봐 무섭단 말이에요.”반우희는 순간 멈칫하며 부승원을 힐끔 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고 당황하며 더듬거렸다.“그럴 리 없어요. 저는 절대 반칙 같은 거 안 해요.”이승우는 비웃으며 응수했다.“
부승희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또각또각 이곳으로 걸어왔다.이승우는 부승희를 바라보다가 또 양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요즘 밤을 자주 새웠더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네요.”그리고 담배랑 라이터를 모두 한편에 내려 두었다.부승희는 그 옆자리에 앉더니 양시연과 연정훈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다시 이승우를 바라봤다.“대체 무슨 상황이야? 새해 전날까지 하다가 온 거야? 아주 영혼까지 털린 것 같은데?”“...”이승우는 자세를 바로 앉으며 말했다.“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어제 밤새운 건 새해 카운트 다운 때문이라고.”“어디에서 어떻게 밤을 새운 건지는 모르지.”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침대에서도 카운트 다운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그러자 연정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말조심해.”“아이도 가진 사람이 부끄러워하긴.”그러나 양시연이 뱃속 아기를 가리키자 부승희는 바로 알겠다는 듯 입의 지퍼를 닫는 행동을 했다.“아차차. 태교도 아주 중요하다는 걸 깜빡했어요.”부승희는 양시연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기야 태어나면 꼭 우리 오빠를 닮아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해.”양시연은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부승원은 독설인 걸 제외하면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이의 성별을 막론하고 부승원처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그런데 이승우가 이런 말을 했다.“넌 말해도 참. 정훈이 아이인데 네 오빠를 닮으라고 하면 뭐가 돼?”“...”“...”부승희는 쯧하고 혀를 차더니 손에 집히는 물건을 이승우에게 던졌다.“그 입 다물어.”이승우는 부승희가 던진 빵을 손에 쥐더니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방금까지 생기가 없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번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원도 도착했다.요즘 들어 양시연에게 있어 부승원은 ‘귀인’ 같은 사람이었고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원을 맞았다.그러나 부승원은 아주 침착하고 무뚝뚝했고 대체 누가 대표인지
“널 낳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다시 아이 낳고 싶지 않아.”양지원의 말에 양시연은 과거 양지원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그러고 보니 양석진도 다시 양지원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모녀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연정훈과 양홍두가 바둑을 두는 게 보였다.양석진도 구경하고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지원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떠났다.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양홍두는 그곳을 슬쩍 보다가 혀를 찼다.‘나이가 몇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애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말이야.’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겨우 웃음을 참았다.두 사람은 양씨 가문에 한참 머물다가 여러 친척 집을 다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그러니 양시연은 지칠 대로 지쳐버려 몸이 노곤했다.손님을 모두 보내고 연정훈은 양시연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노곤하긴 한데 잠이 오지는 않아요.”연정훈은 요즘 양시연의 말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주고 싶은 심정이었고 양시연이 따분해 보이자 소파에 나란히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승우가 매해 남산 저택에서 파티를 여는데, 같이 갈래?”“파티에서 뭘 하는데요?”“네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게 있을 거야.”그러자 양시연이 눈을 반짝였다.“가요!”그렇게 두 사람은 바로 행동에 옮겼고 연정훈이 운전해 남산 저택으로 향했다.남산 저택 반경 1km 안으로 보이는 풍경 곳곳에 새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게 모두 남산 저택이 꾸민 거라 생각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주차하고 차에서 내리자 누군가 양시연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시연 언니!”밝고 당찬 목소리가 들려오고 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그래서 입구 쪽에 있는 반우희를 향해 손을 저었고 예상대로 세 꼬맹이도 함께 보였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에 팔짱을 걸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다들 여기 있어요?”반우희가 대신 대답했다.“승주가 승우 씨한테 새해 인사를 해야 한다고 아우성쳤고 승우 씨가 흔쾌히 대
드디어 새해 아침이 밝았다.펑펑 내리던 눈이 드디어 새해 첫날엔 멈추고 따뜻한 햇살이 세상을 비췄다.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으나 연정훈은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며 아침상을 가지고 나타났다.연정훈은 침대 옆에 앉아 양시연을 불렀고 양시연은 아직도 이불 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연정훈이 허리로 손을 뻗어 겨우 자리에 앉게 했다.“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 칭얼거렸고 그 모습이 아기 고양이 같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어제 누가 아침 7시에 일어나 어머님 아버님께 인사 가겠다고 말했더라?”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말실수예요. 아침 7시에 엄마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인사를 드려요?”연정훈도 같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런데 지금 벌써 9시가 다 되어가는걸.”“아이참. 엄마 9시에도 안 일어난단 말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허리를 잡고 품 안에 머리를 비볐다.어차피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니 연정훈도 재촉하지 않고 양시연의 칭얼거림을 받아줬다.두 사람은 한참 알콩달콩하다가 고기만두 냄새를 맡은 양시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양시연이 먼저 연정훈을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세뱃돈 줘요!”연정훈은 미리 준비를 해뒀고 서랍을 열어 봉투 두 개를 건넸다.그러자 양시연은 활짝 웃으며 세뱃돈을 쥐고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아기야, 새해 복 많이 받아. 아빠가 우리 두 사람한테 세뱃돈도 챙겨줬어.”그리고 양시연은 다시 연정훈의 목에 팔을 둘렀다.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연정훈은 바로 양시연을 안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씻으러 가야지.’민수희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호민은 세운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연정훈의 부모님이 직접 세운으로 향했다.그렇기에 양시연과 연정훈은 전화로 인사를 대신했고 바로 양씨 저택으로 향했다.9시가 넘긴 시간이었으나 아래층엔 할아버지만 홀로 앉아
부승원은 심장이 떨려왔고 이를 꽉 깨물어 겨우 표정 관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반우희를 바라봤다.반우희는 크게 심호흡하더니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봐요! 변호사님도 넘어질 뻔했잖아요!”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내가 많이 미끄럽다고 말했잖아요.”“...”감정에 무딘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어이가 없었다.반우희는 한참 호탕하게 웃다가 부승원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꽉 쥐고 있던 손의 힘을 스르르 풀었고 얼굴도 점점 붉어졌다.사실 반우희도 완전히 감정에 무딘 사람은 아니었다.부승원은 옅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자세를 고쳐 안았다.“꽉 안아. 또 넘어지고 싶어?”그 말에 반우희는 부승원을 슬쩍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추운 겨울밤, 두 사람은 뜨거운 온도를 함께 나눴다.몰래 침을 삼킨 반우희는 조용히 부승원을 살폈고 부승원은 반우희의 숨결이 얼굴과 목 언저리에 떨어지는 걸 느끼며 온몸이 간질거렸다.주변은 아주 조용했고 눈밭을 내딛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반우희는 왠지 온 세상에 두 사람만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왜 코트 하나만 입고 있어요?”“집히는 대로 입었어.”“안 추워요?”다시 얌전해진 반우희를 슬쩍 바라보다가 부승원이 물었다.“춥다고 하면 모자 빌려줄 거야?”“당연하죠.”반우희가 냉큼 대답했다.“...”부승원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반우희가 모자를 벗으려 손을 뻗자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너나 쓰고 있어. 난 안 추워.”“그래요.”그러자 반우희는 고분고분 손을 내렸다.오피스텔 아래층부터 대문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눈이 많이 쌓여 걸음걸이가 더디었다.대문에 거의 도착하고 보니 익숙한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기사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있다가 부승원이 반우희를 안고 나오자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반우희는 부끄러운 마음에 부승원더러 내려 달라고 말하려 했으나 무표
반우희는 발이 미끄러진 건지 크게 뒤로 넘어졌다!우당탕.“아이고. 내 엉덩이.”반우희는 눈 속에 파묻혀 앓는 소리를 냈다. 온몸에 찾아온 고통에 반우희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그러다가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뭐지?’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는데 상대는 이미 반우희의 옆으로 다가왔다.“변호사님?”반우희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부승원은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와 호흡이 많이 거칠었다. 방금 창가에서 보다가 반우희가 사라지자 넘어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앉은 채로 꼼짝도 못 하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왠지 심장이 철렁했다.“일어나지 못하겠어?”반우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큰 어른이 이렇게 크게 넘어지다니.그래서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좀 쉬고 있었어요.”부승원이 인상을 찌푸렸다.“일단 일어나봐. 어디 다친 건 아니야?”“아, 네!”굳은 부승원의 표정에 반우희는 아픈 것도 꾹 참고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움직이다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갔다.부승원은 빠르게 반우희를 부축했고 제대로 자리에 설 수 있자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몇 걸음 걸어봐.”“네네.”반우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몇 걸음 걸었으나 다리를 절뚝였다.부승원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다.“어디가 아픈데? 왜 다리를 절어?”반우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별거 아니에요. 엉덩이로 넘어져서 그래요.”반우희는 다시 헤헤 웃으며 말했다.“요즘 살이 쪄서 그런지 다행히 지방이 충격을 많이 흡수해 줬어요.”“...”부승원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오늘 집에 돌아가 지켜보고 내일 아침에도 아프면 병원 가.”반우희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시간이 많이 늦었고 더 지체를 하면 동생들이 걱정할 것 같아 다시 인사를 건네고 절뚝이며 밖으로 걸었다.부승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멀어지는 반우희를 다시 불러세웠다.“왜요?”“기사는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