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후회되는 일은 안 하거든요.”강하리의 결연한 대답이 돌아왔다.구승훈은 더 말 없이 강하리를 보고만 있다가, 강하리가 영양제를 다 맞은 후 그녀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죽도 먹고 영양제도 맞은 터라, 강하리는 힘이 좀 나기 시작했다.그래서 구승훈이 안아들려고 할 때 단 칼에 거절해 버렸다.돌아온 건 구승훈의 냉소.응급실을 나온 후, 구승훈이 지나치듯 한 마디 던졌다.“일단 집으로 가. 이 몸으로 밖에서 쓰러졌다가 나 탓하지 말고.”또 시작이다. 물고 늘어지기.이젠 웃기지도 않았다.“아니에요. 괜찮아요.”강하리는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택시 잡으러 가 버렸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승훈은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젠장, 거름밭 돌멩이처럼 고약하고 딱딱한 여자 같으니라고.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자괴감까지 들었다.미간 팍 찌푸린 채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그제야 옆 시트 위에 놔둔, 곱게 포장된 선물꾸러미가 보였다.내가 미쳤지. 저런 여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선물을 다 사고.구승훈은 거칠게 선물꾸러미를 콘솔박스에 던져넣고는 시동을 걸어 떠났다.같은 시각, 강하리는 길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기분이 착잡했다.후련한 느낌도 있었다. 다신 그 남자와 송유라와 엮일 일이 없었으니까.하지만 말 못할, 다른 무언가도 있었다.그게 뭔지 확인하기도 전, 손연지의 전화가 걸려왔다.“하리야, 어떻게 됐어?”손연지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검진을 받을 때 강하리가 먹었던 약 성분이 모두 검출된 터였다.손연지는 강하리에게 약을 준 게 자신이란 걸 구승훈이 알게 될까 조마조마했다.화가 나면 구승훈에게 대들기도 하는 그녀지만.그렇다고 구승훈이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잘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야.”강하리가 씁쓸하게 웃었다.그러자 핸드폰 너머, 손연지의 눈이 반짝 빛났다.“진짜? 계약 해지하기로 한 거야?”“응.”손연지가 기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너무 잘됐다! 이따가 축하 파티라도
”그래. 밥 한 끼 같이 하자. 하리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주해찬이 거들었다.강하리가 시간을 확인했다.식사 시간이 아니기도 했고, 사흘 동안이나 굶은 위장에 부담이라도 가지 않을까 걱정도 살짝 들었다.“네, 그러죠.”하지만 걱정과는 별개로 선뜻 응낙하고 차에 탔다.언제 또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 몰랐다.과식만 하지 않으면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다.세 사람은 소문난 근처 맛집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나, 한 여인과 함께 나오는 안현우와 마주쳤다.강하리와 닮은 여인.강하리를 본 안현우가 멍해졌다.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는 강하리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왜인지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안현우였다.그냥 노리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이 기분은 대체 뭘까.“강 부장, 잘 지냈어요?”예전 같으면 만나자마자 비아냥을 퍼부어댔을 안현우지만,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덕분에요.”짤막하게 대답하는 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웠다.눈빛 속에 혐오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그러고는 몹시 불편하다는 듯, 얼른 주해찬과 정주현을 따라 룸에 들어가 버렸다.닫히는 룸 문을 바라보며 안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빠, 왜 저 여자만 보는 거야.”옆에 여인이 뾰루퉁해 불렀다.“그래서?”안현우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답했다.여인은 분했으나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웃다가도 다음 순간 천둥 번개가 치는 안현우의 괴랄한 성격을 잘 아니까.더군다나 지금 상태로 봐서는 기분 잡친 게 분명했다.역시 안현우는 기분이 잡칠 대로 잡쳐 있었다.강하리의 냉담한 태도에 짜증이 마구 솟구치는 중이었다.옆에 서 있는 여인이 순간 너무나도 성가시게 느껴졌다.“꺼져. 그리고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입금은 비서한테 시켜 놓을 테니까.”그 자리에 얼어붙은 여인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차에 타 잠시 고민하다가 구승훈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아가씨는요?”상다리 부러지게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아줌마가 홀로 집에 들어
구승훈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가 곧 냉소를 지었다.웃기는 여자네.계약 해지 서류를 받기도 전에 날 차단해?[보면 전화해.]톡을 보낸 뒤,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하지만 회신이나 전화는 없었다.조용하기만 한 핸드폰. 대화창도 감감무소식 그 자체였다.구승훈은 또다시 열불이 치밀기 시작했다.누를래야 누를 길이 없었다.겨우 놓아주려고 마음먹었건만.그게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사실 강하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 쯤은 너무 쉬웠다.당장 달려가고 싶었다.하지만 그게 강하리에게는 구질구질하게 보일 게 뻔했다.알량한 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참나, 그 여자 하나 없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그나저나 핸드폰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구승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그러나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핸드폰.구승훈은 강하리와의 톡 내역을 거칠게 내리기 시작했다.그제야 알 수 있었다.몇 줄 안되는 메시지들. 둘이 톡으로 나눈 대화가 거의 없었다.비서를 통해 찾거나, 집에서 바로 용건만 전달하곤 했으니까.일상 토크 같은 건 해본 기억조차 없다.구승훈은 갑자기 기분이 확 잡쳤다.나랑 나눌 얘기가 이렇게도 없었나?다른 사람들과도 이런 식인 건가?아마 아닐 거다.친구와는 너무나도 즐겁게 수다 떨던 강하리다.문득, 둘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강하리가 한동안 톡을 자주 보내던 게 생각났다.외출했다가 귀엽게 생긴 구름 송이를 봤다고.맛있는 요리 조리법을 새로 배웠다고.이것저것 사진도 많이 보냈고, 그날 기분도 공유했었다.그때마다 자신은 어떻게 회신했던가?기억을 짜내 봤지만, 없었다.아마 안 했을 거다.구승훈의 시점에서 그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잡담에 불과했으니까.심지어 이런 쓸데없는 건 보내지 말라고 화를 냈을 수도 있었다.구승훈은 깊은 주름이 만들어진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꾹 집었다.그러다 벌떡 일어서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간 구승훈이 구승재에게 전화했다.“승혁이 쪽은 얼마나 알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언제든 강 부장님을 영입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정주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렇다면 저야 고맙죠.”그렇게 몇 술 뜨지도 않은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났다.주해찬이 정주현을 호텔에 데려다준 후, 차 안.“요즘 좀 어때? 구승훈이랑은…….”강하리가 잠시 침묵에 빠졌다.솔직히 구승훈 얘기는 하고싶지 않았다.정작 떠날 때가 되니 왠지 가슴이 답답해났다.좋든 나쁘든, 너무 깊숙히 새겨진 기억들 때문일까.“잘 끝나가는 중이에요. 그나저나 선배.”강하리가 급히 말을 돌렸다.“박 교수님께 일 좀 더 달라고 부탁해 줄래요?”“걱정 마. 내가 교수님께 잘 말씀드려 둘 테니까.”운전대를 돌리던 주해찬이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사실 나는 네가 통역실에 올인했으면 하거든. 정식 입문이 잘 돼야 일거리도 많아질 거니까. 교수님 곧 퇴직하실 건데, 네가 사업 이어받길 바라고 계셔.”올인하기 싫은 게 아니었다.하지만 구승훈의 지원이 없어지면, 통역실 하나로는 엄마 약값도 모자랐다.송유라와의 소송 비용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심준호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넙적 공짜로 받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네요. 돈 벌어야 해서요.”주해찬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도와줄게, 가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입 밖에 나오진 못했다.강하리에게 급급히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의 주위에, 그녀의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고 싶었다.손연지네 아파트단지 앞에 도착하자 주해찬이 차를 세웠다.“하리야, 통역실 전담 말인데.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흔한 기회도 아니고, 박 교수님께서 여러 번 꺼낸 얘기기도 해.”강하리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그때 마침 손연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언제 와? 나 자금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얼른 와서 먹어. 아참, 과식은 안돼?”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알았어. 곧 도착해.”“맞다, 나
”미안하다.”한 마디가 구승훈의 입에서 힘겹게 흘러나왔다.“뭐,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걸요. 송유라가 그렇게 중요하면 걔랑 잘 지내요. 두 사람 다내 주위에 더이상 보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송유라 얘기에 구승훈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이렇게 나를 혐오했던 건가?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송유라는 왜 여기서 나오고?내가 언제 송유라와 지내겠다고 했나?돌아서서 갈 길을 가려고 하는 강하리의 팔목을 붙잡았다.“또 왜요?”강하리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왔다.“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줘. 연락 씹는 일 같은 거,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 네 전화는 자다가도 받을께.”“만회할 기회라고 했나요?”강하리가 픽 웃었다.“뭐든 말만 해. 다 들어줄게.”“송유라가 나한테 했던 짓들, 그대로 돌려줘요.”“…….”구승훈이 뚝 멈췄다.강하리의 팔목을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얼마나 지났을까, 구승훈이 겨우 입을 뗐다.“유라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 둘 사이.”“아,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팔목을 빼냈다.“그럼 내일 계약 해지 깔끔하게 끝내는 걸로 해요.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죠?”한 마디를 남기고, 강하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 버렸다.구승훈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참 달래기 힘들다, 강하리.……초인종을 누르자 우다다 달려나오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여는 손연지.“구승훈이 아직 밖에 있어!”살 떨리는 듯한 손연지의 말투에, 강하리는 별 흥미가 없단 듯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주방에 들어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밥솥을 열었다.전복죽이었다.강하리는 죽 한 그릇을 떠서 식탁 앞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하리야, 괜찮아?”맞은 편에 앉은 손연지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응.”“구승훈이랑 얘기 다 나눴고?”“내일 계약 해지 서류 확인하러 가. 그거 가져오면 우리 둘은 영영 끝인 거고.”“손해배상으로 받는 건 없고?”손연지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그냥 끝내면 안 되지! 그
강하리는 창 밖에서 눈길을 떼고 돌아섰다.하지만 물컵을 쥔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다음날, 노을카페.심준호가 미리 와 있었다.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있는 모습은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일찍 오셨네요. 잘 부탁드려요.”강하리가 웃으며 다가가 옆에 앉았다.그녀을 위 아래로 훑어보던 심준호가 미간을 좁혔다.“정신 상태는 좋은 것 같은데 몸이 많이 말랐네요. 진짜 단식투쟁 한 거예요?”뻘쭘해진 강하리가 고개를 숙였다.“다신 안 그럴게요.”“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것만큼 큰 실책은 없는 법이에요.”심준호가 나무라듯 말했다.그 말을 마침 걸어오던 구승훈이 들었다.커피점에 들어설 때부터 구겨져 있던 인상이, 그 소리를 듣자 더 구겨졌다.“우리 심 변호사님은 업무 능력이 줄었나? 요즘 많이 한가해 보이던데.”“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해결해 드릴 자신 쯤은 있습니다. 특히나 계약 해지 같은 업무는요.”구승훈의 아픈 데를 골라 야무지게 꼬집는 듯한 말투.구승훈은 욕이 튀어나올 뻔 하다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애써 참았다.강하리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이 자리에 내 편은 없다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변호사님, 전에 작성 부탁했던 계약해지 증명서는 어디 있나요? 어서 마무리짓고 싶네요.”“급한 용무 있어?”구승훈이 강하리를 노려보았다.“아니. 없는데.”강하리의 담담한 대답.구승훈의 표정이 또 구겨지기 전, 심준호가 웃으며 얼른 증명서를 꺼내들었다.“잘 살펴보시고, 문제 없으면 두분 다 사인해 주세요.”강하리가 대충 한 번 쓸어보고 사인했다.반대로 구승훈은 좀처럼 사인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아주 토씨 하나까지 샅샅이 확인하겠다는 듯, 한 자 한 자 느릿느릿 읽어나갔다.강하리는 재촉 대신 구승훈을 내버려 두었다.재촉하면 그걸로 또 태클 걸고 넘어질 게 뻔했으니까.느긋하게
말을 마친 강하리는 그대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심준호가 구승훈의 휴대폰을 힐끗 바라보고는 일어나 그의 어깨를 툭 쳤다.“정말 잡고 싶으면 주위를 깨끗하게 잘 정돈하고 다시 오든가.”구승훈이 담배 한 대를 꺼내들었다.“네가 가로막지만 않으면 돼.”심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이 싱글로 컴백하면 가로막는 게 나뿐이 아닐 텐데.”그 말을 남기고 심준호도 서류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다.수박 겉 핥기.지금 구승훈이 하는 짓거리가 딱 그랬다.강하리를 붙잡는 태도부터가 영 글러먹었다.큰 상처를 입은 여인에게, 가지 말라고 우악스럽게 붙잡기만 하는 게 통할 리가.하지만 귀띔해줄 생각은 없었다.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누가 말하든 소 귀에 경 읽기인 것들이 있으니까.……-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구승훈이 받지 않자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다.액정에 뜬 “송”자를 보며 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뒤,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이번에는 받았다.“응, 유라야. 무슨 일이야?”“오빠, 나 이마가 너무 아파요.”구슬프게 지저귀는 듯한 송유라의 목소리.느닷없이 강하리가 생각났다.꿈 속에서마저 아프다고 중얼거리던.자면서까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던.그리고, 그날 이후로 아프단 소리 한 번 없던.“진통제 먹었어?”욱하고 치미는 뭔가를 가까스로 누르며, 구승훈이 애써 평온한 말투를 지어냈다.“먹었는데 효과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한참동안 말이 없어진 구승훈.던지듯 한 마디를 뱉었다.“의사 선생님을 찾는 게 날 찾는 것보다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구승훈은 강하리가 사용했던 물컵을 집어들고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가볍게 문질렀다.“용하다는 의사 찾아 놨으니까 이마에 흉터 안 남을 거야. 걱정 마.”“와서 나랑 같이 있어줘요, 오빠!”구승훈이 희미하게 웃었다.“유라야, 너도 이제 새로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어? 나만 싸고돌지 말고.”“……뭐, 뭘 새로 시작해요?”핸드폰 너머 송유라가
”하리 씨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싫어하는 건?”심준호가 물었다.“단 거 제일 좋아히긴 하는데, 견과류 알러지 있어서 그 쪽으로는 못 먹는 거 빼고 다 잘 먹어요.”심준호가 멈칫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우리 어머니인 줄. 언어 천재에다가 단 것 마니아, 견과류 알러지까지 꼭 닮았네요.언제 한 번 어머니한테 하리 씨 소개시켜 줘야겠네.”“백 장관님 말씀인가요?”강하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밖에서나 백 장관님이지 집에서는 그냥 남편바라기 응석쟁이 아줌마예요.”엄마 흉 보는 심준호의 눈이 행복으로 빛났다.그게 강하리는 새삼 부러웠다.가족애란 건 어려서부터 사치였으니까.“다 좋아질 거예요. 하리 씨도. 모두가.”심준호가 강하리의 기분을 캐치한 듯 따뜻하게 말해주었다.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맛집을 찾아, 밥을 먹으면서 송유라 소송건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다.“충분한 심리적 준비가 되어야 할 거예요. 송유라의 유명세로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될 거고, 하리 씨가 유산했단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가급적 파급을 줄이는 쪽으로 제가 노력해 볼게요.”“잘 알겠습니다. 고마워요.”자신의 유산 사실이 알려지는 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언제든지 여론에 밝혀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하지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는 심준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강하리를 바라보는 심준호의 마음이 일렁였다.정말이지, 너무 닮았다. 자신의 누나와.생김새나 표정, 몸짓 하나하나까지.“하리 씨, 부탁이 있는데.”뭔가에 홀린 듯 심준호가 입을 열었다.“언제 한 번 하리 씨 어머님을 뵐 수 있을까요?”강하리는 기꺼이 허락했다.그동안 도와준 게 있는데, 그 정도 부탁은 얼마든지.……이틀 동안 푹 휴식한 강하리가 회사에 나갔다.“부장님! 이직하신다던데 사실이에요?”가장 먼저 마주친 건,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의 안예서였다.안예서의 입을 통해 강하리는, 자신의 이직 소식이 회사에 쫙 퍼졌단
구동근은 갑자기 침묵하더니 지팡이를 짚고 다소 힘겹게 걸으며 창문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를 부축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피우지 않고 손에 쥔 채 시선을 내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구동근은 말없이 창가에 서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도 다그치지 않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구동근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창밖으로 보이는 아래층 정원에서 기사가 가정부와 연정이를 데려다주었다.연정이는 진태형이 얼마 전 사준 작은 패딩에 토끼 목도리를 두르고 곱슬곱슬한 머리에 예쁜 머리핀 두 개를 하자 작고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인형처럼 귀여웠다.차에서 내려와 강하리를 보자마자 아이는 신이 나서 가정부가 내려주기 바쁘게 뒤뚱거리며 강하리를 향해 달려가면서 깔깔 웃었다.강하리가 다가가 연정이를 안고 볼에 입 맞추었다. 정원의 조명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이 장면은 유난히 선명하게 구동근의 눈에 각인되었다.희미한 눈동자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섬광처럼 번쩍이다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그가 말을 꺼냈다.“솔직히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구승훈은 그의 대답에 놀라지 않은 듯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요. 난 기다릴 수 있어요. 아시게 됐을 때 다시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문을 나섰고 단호한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구동근은 순간 불안한 마음에 주름진 노인의 얼굴엔 금세 화난 기색이 돌았다.“이 자식, 무슨 뜻이야? 날 가두는 거야?”구승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고개를 돌려 소위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상대를 바라보았다.“그럴 리가요. 할아버지 안위가 걱정돼서요. 오늘 피까지 토하셨는데 제가 잘 챙겨드려야죠.”“이놈 자식이!”구동근이 지팡이를 내리쳤지만 구승훈은 이미 문을 닫고 나간 뒤 문 앞에 있던 사람에게 잘 지켜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방을 나선 구승훈은 혼자 3층 테라스로 올라갔다.저녁 바람은
구동근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이 장면을 지켜보던 구민성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할아버지에게 강요해서 무덤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이젠 억지로 결혼까지 밀어붙여? 우린 다 앞 못 보는 장님인 줄 알아? 네가 오늘 할아버지를 강요해 결혼을 진행해도 우린 인정하지 않아!”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고 구동근을 내려다보았다.“할아버지, 제가 강요했어요?”구동근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구승훈을 노려보았다.손자 하나는 참 잘 키웠다.구승훈을 노려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구씨 가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결혼 허락받으러 온 거야. 심씨 가문에서 동의하면 앞으로 강하리는 구씨 가문의 당당한 며느리가 될 거야.”구동근의 말이 떨어지자 구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한 겹 내려앉은 듯 어두운 표정이 역력했다.“아버지, 미쳤어요?” 구민성이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구동근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는 한숨을 쉬며 거실로 들어서면서 마음속으로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뭐라고 해도 반대하지 말았을걸. 그러면 이 지경으로 되지도 않았고 구씨 가문도 망하지 않았을 텐데.구동근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백아영을 바라보았다.백아영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구동근의 체면을 생각해 별다른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구동근 역시 빙빙 돌리지 않고 자리에 앉은 뒤 곧장 입을 열었다.결혼 허락은 물론 예물까지 전부 준비할 생각이었다.SH그룹은 무너졌지만 구동근은 여전히 많은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중 일부는 구승훈의 예비 신부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선물이다. 연성 중심가에 있는 사무 빌딩, 그리고...원래 여초연의 손에 있던 팔찌까지.“승훈이 엄마가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보낸 겁니다.”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고 말을 마친 구동근은 강하리에게 팔찌를 건넸다.하지만 강하리는 팔찌를 받을 생각이
강하리의 말에 진시연은 물론 이정숙도 당황했고 곧바로 이정숙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강하리, 주제넘게 굴지 마!”강하리가 웃었다.“앞으로 저한테 잘해준다는 게 이런 건가요?”이정숙의 말문이 막히자 진시연이 곧장 입을 열었다.“난 무릎은 꿇을 수 있지만 할머니는 그냥 두면 안 될까요? 연세가 있고 그쪽 할머니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른은 존중해야죠.”또다시 강하리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말에 강하리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아주머니, 손님 내보내세요.”오영숙이 서둘러 달려왔다.“어르신, 진시연 씨, 나가시죠.”오영숙이 말을 마치자 진시연은 이를 악문 채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시연아!”소리를 지르며 이정숙은 진시연을 끌어당기려 했고 진시연의 몸도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앞으로 다시는 건드리거나 성가신 일 만들지 않을게요. 강하리 씨,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강하리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진시연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꺼져요. 앞으로 나랑 내 가족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고.”진시연은 나지막이 고맙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이정숙과 함께 떠났고 거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들 눈에 강하리는 줄곧 만만하고 연약한 상대였다.그게 아니면 구승훈이 아니라 바로 강하리의 회사로 찾아가지도 않았을 거다.그런데 지금 보니 구승훈이 만나는 여자가 진태형의 양딸과 어머니도 몰아붙일 만큼 독한 사람이고 거실에 있는 심씨 가문 사람 중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구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복잡한 표정이었고 구동근은 더더욱 그러했다.그는 강하리가 구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늘 생각해 왔다.출신이 비천한 데다 안주인이 될 만한 자질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시골 출신인 계집이 성격도 연약하고 소심해서 훌륭한 안주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의 섣부른 판단이었다.거실에서 심준호는 눈썹을 치켜들고
이정숙은 구씨 가문 사람들을 슬쩍 보았고 그들도 하나같이 신기한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도우미가 한쪽으로 데리고 갔지만 거기서도 그들은 전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그들은 오늘 특별히 사과하러 온 것이었다.그날 병원에서 돌아온 뒤 진강석은 모습을 감췄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그 직후 진시연은 외출을 하다가 실수로 차에 치여 얼굴에 상처를 입을 뻔했고, 다음날 외출을 하러 나갔다가 또 차에 치여 긁히자 겁에 질린 진시연은 감히 외출조차 하지 못했다.그뿐만 아니라 누가 퍼뜨렸는지 친손녀를 학대했다는 소문이 떠돌자 요즘은 외출만 하면 손가락질을 받았다.진강석은 보이지 않고 진시연은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이정숙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데 진태형은 업무 때문에 해외에 있어서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다.며칠 사이 진씨 가문은 바람 잘 날이 없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이제야 심씨 가문을 찾아와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사실 사과는 이미 했고 백아영과 심준호 모두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그들이 어쩔 수 없이 살가운 말을 다 뱉고 나서야 심준호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그 사과는 하리한테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저희한테 하시죠?”진시연과 이정숙은 순식간에 분노로 얼굴이 빨개졌다.소용없는 짓이었으면 왜 도중에 멈추지 않았을까.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강하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그런데 강하리가 이렇게 많은 사람과 함께 올 줄이야.그들이 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강하리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뜻인가?차라리 죽는 게 낫지.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고 분노로 가득 찬 이정숙의 얼굴을 보며 구승훈은 웃었다.“그럴 거면 이만 돌아가세요. 저희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이정숙은 구승훈과 강하리를 노려보았다. 사과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으면 상황이 바뀌지 않으니 한참이 지난 후 결국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다.“하리야, 할머니가 너한테 못되게 굴어서 미안
구씨 가문 사람들이 다시 심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구동근은 정말로 비틀거리고 있었다.토해낸 피에 모든 힘을 담은 듯 그의 얼굴은 늙고 초췌해 보였다.구승훈은 차에 오른 뒤 뒤따라오던 의사에게 구동근의 상태를 물어보았고 다행히 큰 문제 없이 홧김에 피를 토한 거다.구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구승훈을 무슨 악마를 보듯이 쳐다봤다.구승훈이 정말 노인을 이 지경까지 몰아붙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하지만 구승훈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냉정하고 차가운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고 구씨 가문 전체에서 구승재를 다소 특별하게 대하는 것 말고는 친어머니한테도 살갑게 군 적이 없었다.그래도 겉으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는데 이젠...구승훈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강하리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조용히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그는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기껏해야 무례하고 자비 없는 냉혈한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사건을 이용해 그를 또다시 곤경에 빠뜨릴 궁리나 하겠지.그런데 조금 전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와서 머리를 조아리라는 그의 말이 먹혔는지, 아니면 어르신에게 강요하는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다들 화가 나지만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이었다.강하리는 그런 사람들의 생각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묘지에 도착하는 순간 진씨 가문 사람들이 다시 심씨 가문으로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집안 분위기가 생각만큼 살벌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고 거실에는 백아영이 침울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고 그 옆에서 심준호가 차분하게 차를 끓이고 있었다.진시연은 눈이 충혈된 채 거실에 서 있었고 이정숙도 평소처럼 건방지게 굴지 않았다.이 모습은...강하리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남자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남자의 얼굴엔 싸늘함이 사라지지 않은 채 조롱까지 섞여 있었다.“무슨 짓을 한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뒤돌아 걸어 나갔고 구동근은 구승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씩씩거리느라 가슴에 찌릿한 통증까지 느껴졌지만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구동근은 가는 내내 아무 말이 없다가 비행기 탑승 직전에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너 대단한 놈이잖아. 네가 결혼하는데 내가 굳이 가야 할 필요가 있어?”구승훈은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난 하리가 구씨 가문의 당당한 안주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 구승훈이 원해서 결혼하는 여자는 한명 뿐이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구씨 가문에서 조금의 괴롭힘도 당하지 않게 할 거예요.”그가 곁에 없더라도 말이다.“그래서 B시에 도착하면 둘째 삼촌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러 오라고 연락하세요. 하리는 할아버지가 인정한 손자며느리라는 걸.”“너...”구동근은 문득 구승훈이 미쳤나 싶었다.그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미친 걸까.하지만 이제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자신은 이 망할 손자를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걸.구승훈은 연성에 다녀온다는 걸 강하리에게 말하지 않았고 당일 일정이라 강하리는 구승훈이 출근한 것으로만 생각했다.그런데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심씨 가문 저택 마당에서 구동근을 비롯한 구씨 가문 일가 10여 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강하리의 표정이 확 바뀌며 저도 모르게 이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러 찾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아무 말도 하기 전에 구승훈이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어떻게 된 거야? 이 사람들 소란 피우려고 찾아온 거야?”강하리가 깊은 목소리로 묻자 구승훈은 강하리에게 다가가 허리를 낚아챘다.“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는 없어?”강하리는 구씨 가문 사람들이 던지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눈빛을 보며 도저히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구씨 가문 사람들에 대해선 구승훈과 구승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어머니 뵈러 가자.”강하리는 당황했고 구승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늙은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사모님, 여씨 가문의 조상 묘에 대해서...”휴대폰을 잡은 여초연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얼굴에 분노가 서린 듯했지만 잠시 후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내뱉었다.“걔가 서두르고 있다는 뜻 아니겠어?”집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초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향해 걸어갔다.추운 겨울날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깔끔한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고 집사가 그녀의 어깨에 숄을 둘러주자 여초연은 자연스럽게 숄로 몸을 감쌌다.나이를 지긋하게 먹었지만 여전히 40대처럼 보이는 그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테이블로 걸어갔고 테이블 위에는 매화로 만든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여초연이 가위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듬자 집사는 다소 초조한 듯 말했다.“그래도 조상님 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여초연은 멈칫하다가 이내 차갑게 웃었다.“우리가 가서 구씨 가문의 조상 무덤도 같이 파면 되잖아.”그렇게 말하던 중 갑자기 가위를 꽉 쥐었다.“그리고 구동근 그 늙은이도 언젠가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거야.”...구동근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또 한 번 분노에 휩싸여 쓰러질 뻔했다.살면서 이렇게 화가 났던 적이 또 있을까.지난번엔 심문석의 체면 때문에 심씨 가문으로 갔고 당시 구승훈과는 물과 불같은 사이라 그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찾아갔는데 백아영에게 뺨을 맞을 줄이야.그런데 이젠 심미현의 무덤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니.아무리 그래도 그가 웃어른인데 자존심을 굽힌다고 한들 심미현이 그걸 받을 자격이 있을까.구동근은 기가 막혀 무슨 일이 있어도 B시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구승훈이 자신을 데리러 사람을 보낼 줄은 몰랐다.데리러 오는 것이라기엔 사실 납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경호원 몇 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구동근의 앞으로 다가와 순식간에 그를 둘러쌌고 그 순간 방 안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구동근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죽기 전까지 구씨 가문은 내 말에
강하리가 무심코 흘깃 쳐다보니 임희주였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거두며 심문석 쪽으로 다가갔다.구승훈이 슬쩍 강하리를 돌아보자 그녀는 이미 심문석 옆에 자리를 잡고 웨딩 촬영 계획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그는 시선을 내린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어젯밤 두 시 넘어서 임희주가 보낸 메시지도 그제야 눈앞에 나타났고 구승훈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메시지를 읽은 후 휴대폰을 도로 넣었다.강하리는 그의 행동을 못 본 척 심문석 옆에 앉아 애교를 부렸고 구승훈은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이 떠나서야 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고 백아영은 강하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몇 번이나 그녀를 불러서야 강하리는 마침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할머니, 왜 그래요?”백아영은 눈가에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강하리는 입술을 다물며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하지만 백아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증조할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그렇게 심각한 상태 아니야. 근데... 승훈이랑 싸웠니?”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지 구승훈을 걱정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가 얘기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굳이 끝까지 파고들 필요가 없으니까.한편 병원 밖으로 나온 구승훈의 표정도 살짝 어두워졌고 준봉이 병원 앞에 차를 세우자 구승훈은 곧바로 차에 올랐다.“대표님, 회사로 갈까요?”“정신과로 가.”임희주는 구승훈을 보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다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기분은 좀 어때요?”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선을 긋는 듯 차가운 아우라를 풍겼다.“사람이라도 보내 임 선생한테 적당한 거리가 뭔지 가르쳐 드려야 할까요?”임희주는 멈칫하다가 정신을 차렸다.“메시지 말하는 거예요? 죄송해요. 어젯밤 노민준 씨랑 두시까지 그쪽 병에 대해 연구
이정숙은 강하리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당황한 듯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강하리는 이미 의사 진료실로 걸어가고 있었다.진시연의 얼굴은 뺨을 맞아 두 개의 손자국이 남았고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에 담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강하리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저 협박이라는 건 알지만 괜스레 겁이 났다.이정숙과 진강석이 지켜주기에 그동안 선 넘는 짓을 수없이 했었다.진태형이 없어도 이정숙과 진강석은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줄 테니까.하지만 이 또한 그녀가 감옥에 가지 않게 하거나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며 강하리를 막을 순 없었다.지금의 강하리는 심씨 가문을 등에 업고 곁엔 구승훈이 지키고 있으니 만약 정말로 그녀에게 어떠한 고통을 선사하려고 들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그동안 강하리가 나서지 않고 반격하지 않은 건 전부 진태형 때문이란 걸 안다.하지만 지금은...강하리가 떠난 것을 확인한 이정숙이 병동으로 들어가 따지려고 하는데 진시연이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겼다.“할머니, 가지 마세요.”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일을 더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이정숙을 말린 진시연은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다.“구승훈 씨, 이걸로 나도 오늘 벌을 받은 거니까 강하리 씨한테 나 좀 내버려두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내가 강하리 씨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강하리 씨 곁엔 지켜주는 사람이 많고 난 할머니와 할아버지밖에 없는데...”“진시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이 가로챘다.“그쪽이랑 하리를 비교하지 마.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진시연의 얼굴이 또다시 하얗게 질리며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그리고 고작 뺨 두 대 맞은 걸로 벌을 받았다는 거야? 진시연,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어?”진시연의 입꼬리가 파들거렸다.“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