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지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살기가 번뜩였다. 그 눈빛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서늘했다. 송은미가 말도 하기 전에 소은지가 쏘아붙였다. “나와 여섯째 도련님과의 관계가 어떻든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두어야겠어.”여기까지 말한 소은지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송연미를 향한 그녀의 시선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송연미는 마치 심장을 찔린 듯 숨이 막혀왔다. “그게 무슨.?”말을 멈추고 서늘하게 쳐다보는 소은지의 눈빛에 송연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진짜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독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소은지가 전에 이혼 전문 변호사였고 어떤 이유로든 결혼이 깨지는 건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지금 송은미의 이런 행동은 완전 소은지의 역린을 건드린 꼴이었다.소은지가 송은미를 매섭게 노려보며 또박또박 쏘아붙였다. “내가 여섯째 도련님하고 무슨 사이든 전 지금 일곱째 도련님의 법적 배우자라는 걸 잊지 마라.”법적 배우자란 말에 소은지는 특히 날이 서 있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송은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에 소은지가 날카롭게 덧붙였다. “그리고 잊지 마. 넷째 도련님과 당신 사이의 그 관계를.”무슨 말인가? 바로 어떤 식으로 맺어진 인연이든 지금이 어떤 상황이든 기본적인 도리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건 도덕 강요가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때로는 도덕과 양심 앞에서 자신을 통제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다른 누구도 아닌 최소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송은미의 눈에서 폭풍이 휘몰아쳤다.“소은지.” 그 순간 그녀에게서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지만 소은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과 그분은 영원히 불가능한 사이예요.”“그럼 둘사이에 뭔가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해?” 소은지가 매서운 어조로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에 엔데스 현우가 결혼하기 전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의 관계가 얼마나 됐든 한결같이 기다려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 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고 자신은 반드시 그때를 기다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존재와 그녀의 날카롭고 솔직한 말과 눈빛은 그녀에게 깊은 치욕감을 안겨주었다.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존재와 그녀의 날카롭고 솔직한 말과 눈빛은 깊은 치욕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엔데스 현우 곁의 단 하나뿐인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깨달음이 마음에 스며들 때 그 아픔은 참을 수 없었다. “둘의 사이가.”“내가 그 사람과 어떤 사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송연미의 말은 소은지에 의해 단호하게 잘렸다. “나는 그 사람 아내니까.”아내라는 두 글자가 송연미의 신경을 거세게 후려쳤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나는 날카롭고 다른 하나는 차갑고 무감했다. 한참을 그렇게 대치한 뒤 송연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라니. 하하.”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은지는 송연미가 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녀가 울다니.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밖에서 어수선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순식간에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엔데스 현우였다.송연미는 엔데스 현우를 바라보는 순간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연약하고 가련한 여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소은지는 얼굴에 차가움이 가득했고 두 사람은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다.남자는 이 상황을 보자마자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소은지는 손의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걸어가다 엔데스 현우 옆을 지나치면서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 시간에 돌아왔으니 점심은 집에서 드시겠죠? 주방에 준비하라고 할게요.”이 말만 던진 채 엔데스 현우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소은지는 바로 그 자리를
엔데스 현우의 이미 찌푸려진 미간이 이제는 더욱 깊게 주름졌다. 눈앞의 가련한 모습을 보며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를 돕는다고? 지금 엔데스 가문은 그들 둘의 관계를 매우 미묘하게 보고 있었다. 이런 때 그녀가 소은지와 가까워지는 것은 분명 이런 식으로 그 루머들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그때 엔데스 현우가 말했다. “돌아가요!” 고작 네 글자였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남자의 이토록 매정한 말에 송연미의 얼굴빛이 순간 굳어졌다.“당신.무슨 말이에요? 돌아가라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에요?” 왜 지금 현우 씨가 이렇게 차갑게 구는 거지? 마치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처럼.송연미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때 엔데스 현우가 말했다. “앞으로 반산월에는 다시는 오지 말아요.”“하지만.” 송연미의 말은 엔데스 현우의 차가운 목소리에 끊겼다. “똑똑한 사람이면 그런 헛소문에 넘어가지 않겠죠.” 그의 냉정한 말에 송연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슬픔과 억울함이 서려 있던 그녀의 눈빛은 히스테리컬한 폭풍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헛소문은 똑똑한 사람들한테서 멈춘다는 건가요? 설마. 소은지 때문이에요?“송연미는 쓴웃음을 지우며 말했다. 그녀가 소은지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엔데스 현우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좀 어이없군요.”송연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순간, 송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눈이 마주쳤다. 깊은 눈 속에는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에게서는 차가운 기운만이 감돌았다.소은지가 부엌 정리를 끝내고 나오니 화실에 있던 엔데스 현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손에 시가 담배를 든 채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그의 깊은 근심이 더욱 짙어 보였다. 소은지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엔데스현우는 소은지의 기척에 고개를 들고 손을 내밀었다.소은지는 남자의 넓고 두터운 손을 보
하지만 엔데스 현우가 보기에 소은지가 이런 능력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미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대단한데요.” 남자는 자연스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닿았고 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 벽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을 느꼈지만 곧 이성을 되찾았다.자신과 엔데스 현우와의 이 접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일이 곧 끝날까요?”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의 품 안에서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조금 더 견뎌야 할 거 같아요.”외부인의 눈에는 지금 이 둘의 모습이 얼마나 완벽하고 조화로워 보일까.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실상은... “네.”생각보다 쉽지 않네.그러고 보니 그날 저녁 만찬에서 엔데스 가문 사람들을 다 봤는데 다들 보통내기가아니었다. 그러니 이 일이 어떻게 간단히 끝나겠어?점심 식탁.지현우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소은지는 일할 때만큼은 진짜 제대로였다.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엔데스 현우에 대해 나름대로 파악한 듯 보였다.핸드폰 알림음이 울리자 소은지는 재빨리 확인하고는 엔데스 현우를 보며 말했다. “유영이 왔나 봐요.”엔데스 현우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순간 굳어지는 것을 소은지는 똑똑히 보았다. 입꼬리를 올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오후에 백산 별장에 갈래요.” “알았어요.” 남자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엔데스 현우는 소은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존중하는 편이었다.점심 식사가 끝나자 엔데스 현우는 자리를 떴다.최근 들어 그는 반산월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시기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비록 그의 행방에 대해 묻지는 않았지만 엔데스 현우와의 호흡은 완벽할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현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연미가 왔다.두 사람이 다시 다시 마주 섰다.아침보다 더 냉랭하고 무거운
느낌? 어떤 느낌이란 말인가?송연미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 순간 소은지의 말에 돌이켜보니 부인할 수 없었다. 분명히 뭔가가 달랐다.“당신들.”입술을 움직여 뭔가 말하려 했지만 말이 입가까지 왔다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소은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놓아주시지?”송연미의 차갑고 창백한 얼굴을 보며 소은지는 그녀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마음이 없었다. 송연미의 머릿속은 완전히 뒤집혀버렸다. 결국 소은지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던 힘이 조금씩 풀어졌다. “더 이상 배웅하지 않을게.”소은지는 말을 던지고 곧바로 조용히 떠났다. 그 의연한 뒷모습은 사람에게 매우 깔끔하고 단호한 느낌을 주었다.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마치 그녀는 영원히 상처받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시원스럽고 깔끔한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붙잡아두고 싶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송연미는 지금 소은지에 대해 바로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하물며 남자라면? 그러면 지현우는? 이런 생각이 들자 송은미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폭풍에 휘말리고 있었다.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괴로웠으며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무언가가 송연미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었다. 어떤 돌파구를 찾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은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30분 후.소은지가 백산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이유영의 문자를 받았다. 이유영은 자신이 반산월 앞에 있다고 했다.예전 같으면 이런 이웃 관계가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30분 후.소은지가 반산월에 들어섰다. 이유영은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돼지 한 마리를 품에 안은 채 무심하고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런 애완 돼지에 대해 유독 애착을 보이는 것 같았다. 소은지가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
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흔들림은 순식간에 확고한 믿음으로 바뀌었다.“대역은 정말 존재하는구나. 그런데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유영아.” 소은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연서라...” 이유영이 비웃듯 말했다.연서란 사람 얘기가 나오자 또 와인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소은지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그 사람은 누구야?” “강이한과 박연준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지.”“그만 마셔.” “거짓말이야. 알아?”이유영이 취기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영아.”이 순간, 그녀는 이해했다. 이유영이 이번 서주 여행에서 알게 된 것들이 무엇인지. 소은지는 와인병을 들려는 이유영의 손목을 잡았다. “이제 그만 마셔.”그동안 그녀가 아무리 잊고 무시하고 냉담하게 굴었다고 해도 그 10년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깊은 상처 때문에 그 10년을 잊으려 애썼지만 모든 것이 다시 그녀 앞에 놓이자 이유영은 전례 없는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10년이란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그런데 강이한이든 박연준이든 모두 가짜였다니 이유영은 물론이고 소은지마저 그 소식에 크게 놀랐다. “그럼. 그 사람들 눈에는 네가 그저 연서 대역에 불과했던 거야?”거기다 강이한 이란 사람은 너무 속을 알 수 없었다. 소은지가 강이한을 처음 만났을 때 변호사로서의 직감으로 그가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그런 거였어.그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유영에게 접근했던 거였구나.돌이켜보면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10년이란 세월이 우습지 않아?” 이유영의 말투에는 비통함이 가득했다. 우습다고? 이건 우스운 게 아니라 비극적인 현실이었다.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몰려 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십 년의 감정과 십 년의 모략이라
이유영은 술에 잔뜩 취했다. 소은지는 그날 밤 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유영의 곁을 밤새도록 지켰다. 한밤중에 이유영이 심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우지와 우현은 속이 타들어 갔다. 아가씨 몸이 원래 약한데... “아가씨, 우리 아가씨 좀 말려주세요. 몸도 약하신 분이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해요?” 원래 눈도 안 좋은데 이렇게 마시다가 큰일 날 것 같았다.소은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정리하고 나서 우율과 우선이 내려가고 소은지는 침대에 누운 창백한 얼굴의 이유영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기꾼들, 모두 다 사기꾼이었어.”그녀의 세계에서 강이한과 박연준 그저 사기꾼이란 존재가 아니었나? 하지만 이런 존재가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이유영이 거기에 감정을 안 쏟았을 리가 없다.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아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는 순간 이토록 괴로운 것이다. 바로 지금의 이유영은 너무 아팠다.부르르르.소은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꺼내보니 엔데스 현우의 전화였다. 소은지가 전화를 받았다. “네.”“어디예요?' “유영이가 취했어요. 오늘은 여기서 유영이를 돌봐줘야 겠어요.” 소은지는 자연스레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이 끝나자 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알았어요.” 소은지가 뭔가 더 말하기도 전에 전화 너머의 남자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남은 건 이유영의 작은 잠꼬대뿐이었다. “사기꾼.”“아.”소은지는 한숨을 쉬며 안쓰럽게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졌다. 도대체 얼마나 심한 상처를 받은 거야. 취해서 자면서도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은 이유영에게는 충격 그 이상이었다.이런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자, 지난날의 상처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지난날의 그 일들이 대체 뭐였단 말인가?하룻밤 과음 후 이유영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심한 갈증에 잠에서 깨어나니 물 한 잔이 그
모든 것이 뒤엉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완전히 뒤틀려버렸다.이전엔 상상조차 해본 적 없고, 고려해 본 적도 없던 문제들이 이제 눈앞에 현실로 닥쳐왔다.소은지는 이유영의 질문을 들은 뒤,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너 정말 모르겠어?”“뭘?”“아직도 강이한과 박연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이유영은 당황하며 말했다.“그게...”“아니면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거야?”‘그 사람’은 바로 강이한이었다.소은지가 생각하기엔 그랬다.이유영은 어릴 때부터 늘 차분하고 냉정한 아이였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평소와 달랐다.결국, 모든 이유는 결국 강이한에게 있었다.강이한을 만난 뒤로 이유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남자가 이유영에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유영은 가슴이 약간 답답해지기 시작했다.“그런 거 아니야!”이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십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다. 단순히 떠나보낸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한지음을 위해 포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 모든 소식은 이유영에게 너무 갑작스러웠다.소은지는 이유영의 작고 여린 얼굴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너라면, 절대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걸 모조리 빼앗아버리겠어.”소은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태연하게 들렸다.하지만, 이 여유로움은 아마도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의 관계가 그리 복잡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증오로 엮인 관계였다. 엔데스 명우가 조은지를 붙잡았을 때, 조은지에게 안긴 건 증오와 고통뿐이었다.그렇기에 소은지는 복수할 기회를 잡자마자 기꺼이 그 고통을 되갚아주려 했다. 하지만 이유영의 상황은 달랐다.“은지야!”“너와 나는 달라. 강이한... 그 사람은!”지금 이 순간에도, 소은지가 강이한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이유영은 멈칫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어떤 존재였던 걸까?지금 상
연서가 없었다면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녀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상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서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달랐다.결국, 그녀는 연서로 인해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휘말렸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었다.“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게 누구인데, 이제 와서 나 자신을 용서하라고?”“...”“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워?”자신을 용서하고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건 이유영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그들의 단순한 생각이 너무 우스웠고 증오스러웠다.“...”이미 창백했던 박연준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이유영과 강이한,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용서하고 모든 걸 놓아버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기다림은 언제나 잔인한 법이었다.박연준은 이유영에게 파리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대신 꼬박 이틀 동안 강이한의 연락만을 기다렸다.하지만 강이한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한참 후에야 박연준은 문자를 받게 되었다.[예약한 병원으로 데려와.]전에 서재에서 박연준과 함께 예약한 병원이었다.결국 이런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박연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문기원이 방으로 들어왔고 그가 본 박연준은 검은색 긴 코트에 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여전히 깔끔하고 고고한 기품을 풍겼지만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상실감은 감취지지가 않았다.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박연준의 마음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선생님.”박연준은 정신을 차리고 문기원을 바라보았다.그의 눈동자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떼었음에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연준도 아마 느꼈을 것이다. 그와 이유영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이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모든 것을 이유영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기원아.”박연준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용성시로 갈 준비해.”“...”용성시로 가다니, 결국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고 만 것인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몰랐다고는 해도, 그래도 이유영의 딸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박연준이 침묵하자 이유영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내뱉었다.“너와 그 사람, 둘 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야!”이미 숨 막힐 듯한 답답함이 가득한 가슴에 이유영의 말은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람은 감정에 휩쓸릴 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된다. 과거 연서 사건으로 분노했던 것처럼 지금은 이유영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었다.“사실 네가 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은 나야.”박연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이 박연준이라고? 그는 자신이 증오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실 박연준은 강이한과 마찬가지로 증오스러운 존재였다.“날 알프산에 데려갔을 때,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유영아.”“지금 와서 착한 척하며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려고 하네.”이유영의 말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고 박연준은 그 냉소를 느끼며 가슴이 더욱 아팠다.“넌 그저 한지음을 그 사람 곁에 보냈을 뿐이라고 하며 누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그 사람의 마음의 저울이 결정할 거라고 했어.”답답했던 가슴은 이유영의 말에 더욱 아픔으로 퍼져 나갔다.맞다. 박연준은 한지음을 강이한 곁에 보냈을 뿐이었다. 강이한이 왜 한지음을 이유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심지어 한지음의 딸을 이유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는지, 박연준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박연준도 이유영도 강이한의 마음속에서 한지음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었다.“박연준.”“응?”“네가 아버지라면, 과연 누가 네 아이보다 더 소중할까?”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누가 자기 자식보다 더 중요할까?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답만 존재했다. 누구도 자기 자식을 능가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유영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유영은 이미 화가 난 상태였고 그러니 그녀를…“유영아, 너도 한 번쯤은 스스로를 용서해 줘. 응?”“이온유는 아직도 그 사람 곁에
어둠 속에서 박연준은 담배를 연거푸 피웠지만 가슴속 답답함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에 강이한의 번호가 떠올랐다. 곧 신호음이 울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시간이 됐어.”“언제 돌아올 거야?”두 사람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평온했다.참으로 아이러니했다.지난 몇 년 동안,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엔 언제나 칼날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고 두 사람 사이에 평화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모든 것은 연서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이유영 때문에 잠잠해졌다.하지만 그 평온함은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네가 와서 데려가.”박연준의 말이 끝나자, 공기는 순간 얼어붙었고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데려가라고? 박연준은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수술은 내가 할게.”박연준은 전화 너머의 강이한에게 말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공기는 다시 정적에 휩싸였고 박연준은 그 말을 하는 데 온 힘을 다 쓴 듯 강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어둠 속에서 박연준은 차갑고 외로운 기운을 내뿜었다.그는 모든 것을 잘못했다. 단 한 가지, 서주에 대한 인식만은 옳았다.서주는 마치 늪과 같았다. 하지만 그 늪은 결국 그와 강이한을 삼켜버렸고 그는 이유영까지 그 늪으로 끌어들였다.만약 빚을 따진다면… 그와 강이한 중,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박연준이었다.만약 그 음모와 계략이 없었다면 이유영과 강이한은 원래대로 행복했을 거지만 결국 박연준이 상황을 이렇게까지 몰아넣은 것이다그날 밤, 누구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아침 식탁에는 이유영을 떨리게 했던 쓴 약이 사라졌다.“내가 먹여줄게.”“싫어.”“유영아, 나에게 그렇게 냉정하지 마.”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연준의 감정은 분명히 이상했지만 어디가 이상한지는 이유영도 알 수 없었다.박연준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유영은 아직 어둠에 익숙하지 않았다.그때 박연준은 이유영을 도와주려고 했고 이유영
이유영의 차가운 떨림이 전해지는 순간, 박연준의 마음속을 지배하던 집착이 산산이 무너졌다.“네 말이 맞아. 만약 그 약이 효과가 없다면 넌 괜히 3일 동안 고생하는 거잖아.”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었다.결국 그 약이 이유영에게 효과가 없다면 그녀는 수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그와 강이한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고 강이한은...강이한의 얼굴이 떠오르자, 박연준의 심장은 거칠게 요동쳤다.이유영은 박연준의 말에 온몸의 긴장이 풀린 듯했다.박연준은 그 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또다시 깨닫게 되었다.밤이 깊어지자 이유영은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박연준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언제 파리로 돌아갈지는 말하지 않았다.우지가 이유영에게 담요를 하나 더 덮어주며 말했다.“아가씨, 이렇게 하면 좀 따뜻해질 거예요.”“네.”그러나 이유영은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 없었고 여전히 싸늘했다.우천시의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였다.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견뎌내기 힘든 혹독한 추위였다.“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여기 너무 추워요.”이곳의 추위는 그녀가 알프산에서 느꼈던 한기보다 더 혹독했다. 알프산은 눈이 전부 덮여 있었지만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이렇게 춥지 않았다.그러나 이곳은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도 서늘했고 비가 내리면 뼈마저 얼어붙을 만큼 냉혹했다.“우지 씨.”“네, 아가씨.”“아니네요, 나가 보세요. 자야겠어요.”이유영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우지는 이유영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깊이 탄식했다.“그럼 아가씨, 푹 주무세요.”우지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유영은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눈을 떴다.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공허와 끝없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이유영은 손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암흑이었고 이유영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서재에서.희미한 조명 아래,
이유영이 어떻게 버텨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박연준도 강이한도 그녀가 그 약 때문에 온몸을 떨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석 달 동안 끼니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이제 며칠 안 남았어.”박연준은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말했다.마지막 3일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았다.“앞으로 내가 어떤 고통을 감당해야 할지, 네가 알기나 해?”이유영은 박연준을 향해 물었다.보이지 않았지만 이유영의 그 텅 빈 눈동자에서 박연준은 고통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수술이 사람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무슨 의미일까? 너무도 많았다.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서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었다.하지만 어떤 고통이든, 그녀는 빛을 되찾아야 했다. 마음속의 증오가 아무리 크더라도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후에 그 감정을 표출하기로 했다.잘못에 대한 사과나 돈으로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걸, 박연준은 처음 깨달았다.그는 자신의 잘못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는지 몰랐고 이제야 그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어떤 고통이든, 내가 함께 견딜게.”오랜 침묵 끝에, 박연준이 말했다.이유영은 대답하지 않았다.이유영이 반응할 틈도 없이 박연준은 그녀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며 쓴 약을 삼키게 했다.한 모금, 또 한 모금.이유영은 자신을 꽉 잡고 있는 박연준의 떨리는 손을 느꼈다.박연준 역시 이유영이 그 쓴맛을 들이킬 때의 고통스러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박연준에게는 약의 쓴맛보다 이유영이 느낄 고통이 훨씬 더 쓰라렸다.약 한 그릇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약 한 그릇이 사람을 얼마나 무너뜨릴 수 있는지, 박연준은 뼈저리게 깨달았다.단순히 한 모금 맛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한 그릇의 약은 세상에서 가장 쓴 맛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을 꼭 안고 그녀의 작은 코끝에 입술을 부드럽게 댔다.두 사람의 숨결이 뒤섞였고 박연준은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켰다
박연준은 손끝이 허전해지는 순간, 마음까지 텅 빈 듯 가라앉았다.“네 말이 맞아. 우리는 자격이 없어.”“포기해!”“뭐?”“저녁 약은 가져오지 마.”“유영아.”이유영이 약을 거부하자 박연준의 가슴이 더욱 세차게 조여왔다.이제 모든 희망은 염 선생에게 걸려 있었다. 그는 오전에 염 선생을 찾아가 약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실제로 약이 바뀌었고 마지막 3일 치는 이전과 달랐다.박연준은 약이 바뀌었으니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이유영이 저녁 약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대로 포기하려는 건가?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유영아, 포기하지 마!”박연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은 침묵했고 박연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이유영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의 침묵 속에 결연함을 읽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오랫동안 한약을 먹어서 그런지 이유영의 몸은 항상 차가웠다.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차가운 마음까지 덥힐 수는 없었다.이유영은 손을 빼내려 하자 박연준은 더욱 세게 잡았다.“유영아...”박연준의 가슴이 답답해졌다.이유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침묵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안 돼!”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허무함이 스며 있었다.그는 절대 여기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과거에 그가 이유영에게 저지른 일들을 떠올리면, 안 된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었다.저녁.우지와 우현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결국 박연준의 말을 따라 온몸을 떨리게 만드는 쓴 약을 가져왔다.3일!마지막 3일이었다.사실 그들도 약이 이유영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연준은 마지막 3일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약을 먹였다.“아가씨?”우지가 이유영 앞으로 다가와 약을 가져다 놓았다.“치워요.”박연준은 말없이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오후에 이유영에게 했던 말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을까? 그녀는 듣
이유영은 처마 밑 긴 의자에 누워 밖에서 스며드는 대나무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이었다.빗방울이 대나무잎에 부딪치는 소리, 그 울림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들어가. 춥잖아.”“서주는 지금 어때?”오전에 신지수에게 전화가 와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요즘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음모라면 대체 누가 그의 것을 박연준에게 넘긴 걸까?신지수의 조사 결과,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의 격렬했던 싸움이 모두 박연준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강이한은 도대체 왜 그런 걸까?“아직도 못 잊는 거야?”박연준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억눌린 고통을 삼켰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못 잊는다고? 박연준은 분명 강이한의 최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서주는 이유영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그녀가 그 모든 일을 저지른 이유는 강이한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이유영이 눈이 보였다면, 박연준에게 어떻게 복수를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이유영은 원래 복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분노는 깊고도 거셌다.“못 잊는다고?”이유영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차가웠다. 한겨울의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미소였다.토끼털로 장식된 옥색 한복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 옷을 입은 이유영은 차가웠다.그녀의 평온함은 한때 그의 다정함 속에 묻혀 있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했던 모습은 언제였던가.강이한에게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했지만 나중에 그 사실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달았다.그녀는 완벽한 전업주부, 완벽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단지 대역일 뿐이었다니.“이유영.”“박연준, 너와 강이한은 한 번이라도 내가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 있어?”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독립적인 존재? 그렇다. 이유영은 살아있
그는 덜컥 겁이 났다.더 큰 대가가 두려웠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차라리 그 대가를 키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강이한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는 듯한 아픔에 휩싸였다.염 선생의 의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정도였고 문제는 운명, 아니 그 대가가 이유영에게 재앙처럼 닥친 것이다.석 달의 고된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만약 이 모든 고난의 대가를 누군가가 짊어져야 한다면, 강이한은 기꺼이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다.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의 빛을 되찾아주고 이유영에게 고요한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우천시.마지막 3일째가 되자 박연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늘 평정심을 지키던 그도 이유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문기원이 돌아왔다.“선생님.”박연준은 묵묵부답이었다.기다림만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남은 3일은 마지막 희망을 바라는 간절한 시간이 되었다.박연준은 연서의 죽음이 회장의 치밀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그날부터 그의 밤은 끝없는 불면으로 채워졌다.그와 강이한은 모두 함정에 빠졌고 이제 와서 강이한이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걸 볼 수는 없었다.점심 식탁은 평소와 다름없었다.박연준은 남은 이틀 동안, 이유영이 약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는지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한 방울의 약이라도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을 것처럼.“펑!”이유영은 빈 그릇을 세게 내려놓았다.박연준은 텅 비어 있는 그릇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물었다.“다른 느낌은 없어?”그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이유영의 말 한마디에 박연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가에는 깊은 슬픔이 서렸다.“한 그릇 더 마셔야 해?”박연준은 말없이 침묵했고 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이미 체념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영은 이미 약이 소용없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이해하지 않으면 더 고통스러울 거라니?소은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넌 한지음과의 관계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거야?”소은지는 강이한의 뻔뻔한 대답에 또다시 놀랐다.이유영을 위해 희생하는 강이한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답변을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소은지, 넌 몰라.”“그래, 모르겠어.”소은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졌고 강이한을 향한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소은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내뱉었다.“한지음을 돌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굳이 곁에 두어서 누군가를 짓밟아야 했어?”“...”“강이한, 이유영에게 마음이 흔들린 건 네 응보야!”만약 강이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유영은 아마 강이한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소은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노려보았다.강이한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응보라고? 그래, 강이한도 그것이 응보임을 부정하지 않았다.“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똑같이 한지음을 곁에 둘 거야?”한지음은 이유영 비극의 시작이었다. 소은지는 지금까지도 강이한이 그 일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이런 사랑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소은지의 물음에 강이한은 눈을 크게 뜨고 깊은 고통이 서린 눈빛으로 답했다.“물론이지.”“...”소은지는 한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를 느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고 강이한의 얼굴에 뿌렸다.예전에 우천시 서재에서 '수술 동의서'를 보았을 때, 강이한이 마음을 바꿨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우스웠다.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소은지는 분노에 찬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씁쓸한 고통이 가득했다.후회할까? 물론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전생과 현생을 거치면서 강이한은 한가지 깨닫게 되었다. 어떤 운명은 바꾸려고 한다면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