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유영을 강성건설로 보낸 이유도 여기 있었다.디자인에 참여한 사람만 알 수 있는 문제라 유영이 가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저는 회의하고 올 테니까 유영 씨는 좀 쉬고 있어요.”유영은 긴장이 확 풀리자 지친 기색이 확 드러났다.“알겠어요.”그 시각, 강이한은 사무실에서 온갖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세강의 디자인 팀은 업계 최고 엘리트들만 모아놨다고 평가 받고 있는데 그런 그들마저 오너의 까다로운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강이한은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디자인 구상이 보이지 않았다.이때, 조형욱이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고 사무실을 찾았다.“사모님은 스튜디오에 취직한 게 아니라 스스로 스튜디오를 창설하셨더라고요.”강이한의 두 눈이 서슬퍼렇게 빛났다.그가 너무 아내를 얕잡아보았던 걸까?“그럼 모든 회사에 공개 입장을 보내서 그쪽 스튜디오에 일감을 주지 말라고 해.”언제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최근 보여준 그녀의 행보를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다.그의 가족들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 집에서 나간 뒤로 그와 완전히 선을 긋겠다는 그 당돌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10년이라는 시간이 이토록 허무했었나?그는 한 번도 자신과 유영 사이에 이토록 깊은 감정의 곬이 생길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회사는 괜찮은데 강성건설 쪽은 그런 협박이 먹히지 않을 것 같네요.”조형욱이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표명했다.박연준!강이한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학교 때부터 그의 최대의 라이벌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회사의 오너가 된 시기도 비슷하고 두 회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물밑 경쟁을 치러왔다.동교 신도시 프로젝트의 입찰에 참여한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이번에도 사실 상 세강과 강성의 경쟁이었다.그리고 그의 아내인 유영이 박연준과 손을 잡는다면 여론이 또 어떻게 떠들어댈지 훤히 보였다.강이한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그의 주변으로 섬뜩한 살기가 요동치고 있었다.“박연준 쪽은 일단 신경 쓰지 마.
이어지는 이틀 간, 유영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팀원들과 함께 강성건설 근처의 커피숍으로 가서 작업하기로 했다. 조민정은 호기롭게 커피숍 전체를 이틀 간 세내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팀원들에게 조용하고 안정적인 작업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이번 수정만 제대로 끝나면 유영은 최종 도면을 가지고 강성건설을 방문할 예정이었다.만약 또 수정할 부분이 생기면 커피숍이 근처라 바로 돌아와서 수정하기도 편리했다.처음 도면을 가지고 방문했을 때, 유영은 박연준이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정 횟수가 반복되면서 그가 얼마나 까다로운 상대인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전보다 더 이상한 것 같은데요? 그리고 여기랑 여기도 수정해 주세요.”남자가 설계 도면을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유영은 점점 더 숨이 막혀왔다.오늘 밤이 아마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았다.내일 아침까지 마음에 드는 설계 도면을 내놓지 못한다면 강성과의 계약은 물 건너 갔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랬기에 더욱 간절했다.강이한이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면 일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유영이 커피숍으로 돌아가자 팀원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조민정조차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다시 수정하라고 하네요.”유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자리로 돌아갔다.조민정이 다가와서 말했다.“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새로 생긴 팀이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 성장할 수 있어요.”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시작 자체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역시 이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여기부터 수정하죠.”유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녀는 지금 머리가 지끈거리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다.하지만 상대는 강성건설이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조민정은 고개를 끄덕인 뒤, 회의를 소집하고 함께 수정해야 할 부분을 짚어나갔다.직장 경험이 부족한 유영은 번번이 퇴짜를 맞는 상황이 오자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하
“타.”차가운 목소리가 유영의 잡념을 깨웠다.그녀는 차 앞으로 다가가서 썼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남자의 비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벌써 며칠 째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아직도 포기 못하겠어?”이 남자는 시비를 걸러 온 게 분명했다.유영의 실력이 마냥 형편없었더라면 컨택을 받지도 못했을 텐데도 그는 당연히 그녀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유영은 숨을 가다듬고 차갑게 말했다.“난 쉽게 포기란 거 안 해. 물론 포기하면 다시 뒤돌아보는 법도 없지.”그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요즘 여론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와 강이한의 상황을 다루었다.옛날에는 그에 관한 기사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여론에서 뭐라고 떠들어대든,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착실히 하고 싶었다.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자신에 대한 외부 평가가 아닌, 강성건설과의 계약 체결이었다.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다.“타.”“나 오늘 많이 바빠.”“아직도 모르겠어? 박연준은 처음부터 당신이 설계한 그 쓰레기를 채택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유영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쓰레기를 쳐다보는 듯한 싸늘함이 담긴 눈빛이었다.그와 오랜 시간 함께 보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그녀를 폄하한 건 처음이었다.변한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강이한 역시 변했다.“당신은 물론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박 대표님은 수정할 기회라도 주셨어.”그랬다.중요한 건 기회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강이한은 예전에도 그녀에게 출근하지 말라고만 했지 한 번도 그녀의 실력을 제대로 알아준 적도,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준 적도 없었다.디자이너로서 까다로운 업계의 평가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맹목적으로 자신을 깔아뭉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유영은 서서히 굳어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내 디자인 실력이 쓰레기 수준이라는 걸 일부러 알려주려고 온 거라면 이
유영에게 거절당한 강이한은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전문 디자이너들이 설계한 방안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조 비서.”“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조형욱이 물었다.커피숍을 떠난 뒤, 그는 목적 없이 시내를 돌고 있었다.매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강이한의 저기압도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운전기사나 조형욱은 빨리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퇴근하고 싶었다.계속 이러다가 주변 사람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병원으로 가지.”한참이 지난 뒤에야 남자가 말을 꺼냈다.하지만 조형욱이나 운전기사의 얼굴 표정은 예상했던 것처럼 편하지 않았다.매번 병원에 다녀온 뒤로 강이한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와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하자 조형욱은 강이한을 따라 병실로 올라갔다.한지음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과 넋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은 보는 사람의 보호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왔어요?”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강이한을 불렀다.누구와는 다르게 듣고 있어도 기분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였다.강이한이 잠깐 넋을 놓고 바라만 보고 있자 한지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에는 제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서 주제넘은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본인이 끝까지 사과를 거부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해요.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유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강이한 입장에서는 과분한 요구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사과를 받고 싶다는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유영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사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꼴이라니!잘못을 했으면서도 뻔뻔하게 자신을 떠나려는 모습에 강이한도 화가 많이 났었다.그런데 한지음이 사과는 됐다고 하니 오히려 그녀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죄책감이 더 커졌다.“지음아.”강이한이 긴 한숨을 쉬며 그녀를 불렀다.전보다는 다정한 목소리에 한지음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흰 붕대가 눈을 가리고 있어 눈빛을 볼 수
그녀는 거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듯이 한참 숨을 고르고는 계속해서 말했다.“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는 대표님을 봐서 참고 넘어갈게요.”이대로 용서한다고?오히려 당황한 건 강이한이었다.“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강이한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의사와 간호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강이한을 보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강 대표님, 한지음 씨는 안정을 취해야 해서 이제 그만 나가주셔야 합니다.”“그러죠.”자리에서 일어선 강이한이 한지음에게 말했다.“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지금은 회복에만 집중해.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할게.”지켜준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었다.한지음은 예쁜 미소로 그에게 회답했다. 보고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미소였다.강이한은 의료진을 따라 밖으로 나오고 조형욱이 그 뒤를 따랐다.강이한이 물었다.“염증 때문에 고생한다고 들었는데 후유증은 없겠죠?”“위험한 수준입니다. 사실 지금은 수술이 시급해요.”의사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강이한은 또다시 막막함을 느꼈다.두 번이나 응급수술을 받으면서 이미 한지음의 상태는 눈에 띄게 안 좋아져 있었다.매번 의사를 만나면 이식 수술이 시급하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매번 재촉하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 시력을 회복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지금 시기를 놓치면 더 이상 광명을 되찾기 힘들지도 모릅니다.”강이한은 할 말을 잃었다.“물론 수술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죠. 하지만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하기엔 나이가 아깝잖아요.”“알겠습니다.”강이한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듣고 있던 조형욱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기증자를 찾는 일은 그가 담당하고 있었기에 상황이 얼마나 시급한지 조형욱 역시 알고 있었다.하지만 무조건 산 사람의 망막을 이식해야 하는 일인데 아무리 돈이 중해도 누가 선뜻 자신의 망막을 내놓을 수 있을까
강이한의 뒤를 따르던 조형욱도 그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혀왔다.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옷에 묻었던 커피가 그녀의 하얀 원피스에 그대로 뚝뚝 떨어졌다.유영이 버럭 짜증을 냈다.“강이한, 당신 미쳤어?”“흡….”여자가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남자는 그대로 달려들어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강압적인 키스였다.그의 돌발행동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유영은 입술에서 피비린내가 확 느껴졌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밀어냈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강이한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유영아, 그만 고집을 피워. 응?”매번 그녀가 화를 낼 때면 시간을 두었다가 다가와서 좋은 말로 달래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그리고 그녀 역시 이런 방식을 좋아했다.매번 그가 이렇게 목소리를 깔고 다정하게 말해줄 때면 그녀는 서운한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었다.그의 가족들의 냉대와 무시에도 강이한만 자신을 사랑해 주면 모든 걸 참아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유영은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말해. 또 뭐 때문에 온 거야?”화해?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론이 이끄는 대로 한지음의 말만 믿고 그녀를 몰아세웠는데 화해가 가능할 리 없었다.어차피 지금 그가 원하는 건 그녀의 타협이었다.“일단 나가자.”강이한이 그녀의 손을 잡고 커피숍을 나갔다.유영은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기에 어쩌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의 차에 타고 있었다.그들을 태운 차는 청하 병원으로 와서 멈췄다.유영의 마음도 차갑게 식었다.아직도 포기를 못한 건가?“강이한, 대체 날 뭐로 생각한 거야?”그렇게 싫다고 했는데 또 억지로 여기까지 끌고 온다고?예전에는 그녀가 싫다고 한 일을 이렇게까지 강요한 적 없었다.유영은 미친 사람을 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일단 나랑 들어가자.”강이한도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
그런데 유영이 그 난리를 쳐대는데도 강이한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강서희가 인내심을 잃어버렸다.한지음이 말했다.“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너랑 네 엄마 쪽에서 압력을 넣는 것만으로 부족한 것 같은데?”“그게 무슨 뜻이야?”“그냥 그렇다고.”한지음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강서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음, 네 위치를 잘 기억했으면 해. 이번 일 끝나면 넌 해외로 떠나는 거야. 주기로 한 돈은 섭섭지 않게 챙겨줄 거야. 하지만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협박의 의미가 다분한 말이었다.한지음의 얼굴색이 싸늘하게 굳었다.그녀는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유영을 제거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야?”“그건 네 알 바 아니고.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어.”말을 마친 강서희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핸드폰을 내려놓은 한지음의 얼굴이 싸늘하게 빛났다.네가 그렇게 잘났어?세강의 양녀 주제에 어차피 유영과 그녀가 다 사라져도 강서희와 강이한 사이는 불가능했다.진영숙이 유영과 한지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듯이, 콧대 높은 재벌 집안은 양녀와 아들의 결합을 두고두고 반대할 것이다.“내가 돈이나 받자고 이 난리를 부리는 줄 알아? 잘난 척하긴!”한지음은 생각할수록 강서희가 가소롭고 괘씸했다.그녀는 욕실 가운을 내팽개친 뒤,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의사가 말한 것처럼 심각한 상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청순하고 요물 같은 얼굴이 거울에 비춰지고 있었다.한편, 엘리베이터를 나온 유영은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잡고 안으로 끌었다.유영이 말했다.“이렇게 억지로 끌고 오면 내가 사과할 줄 알았어? 꿈 깨!”“일단 한지음 상태를 보고 다시 얘기해!”강이한은 그녀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대신, 말을 바꿨다.한지음이 병원에 실려온 뒤로 유영은 한 번도 그녀의 상태를 제대로 본 적 없었다.그래서 그는 그녀가 상대의 지금 상황을 보
그녀는 이 남자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하필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혼 얘기를 또 꺼낼 줄은 몰랐다.유영은 그에게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이미 그에 대한 기대나 마음은 접은지 오래지만 남자의 선택이 궁금해졌다.“사과할게. 당신이 이혼만 해준다면.”이혼과 사과,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뜻이었다.강이한은 한참이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친 사람처럼 실소를 터뜨렸다.유영이 물었다.“웃겨?”“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어떤 짓도 할 수 있다는 거구나. 내가 그렇게 싫어?”“당신과 한지음이 붙어먹은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했어야지. 대체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집착?그녀에게는 이게 단순히 집착으로 보였던 걸까?보내기 싫은 그의 마음을 그녀는 집착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강이한은 숨을 가다듬고 유영을 노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사과해.”유영의 마음도 차갑게 식어갔다.이미 그에게 실망한지 오래지만 이런 모습을 직접 마주하자 여전히 지옥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래.”한참이 지난 뒤에야 유영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서 한지음의 병실을 향해 다가갔다.강이한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전에는 그렇게 사과하래도 끝까지 안 한다며 버티다가 요구를 들어준다니까 저리도 쉽게 걸음을 내딛는 그녀가 야속했다.병실 문이 열리고 유영이 들어갔다.그녀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는 한지음을 보자 걸음을 멈추고 강이한이 있는 쪽을 살폈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유영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한지음의 눈동자와 마주했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전혀 시력을 잃은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유영은 숨이 꽉 막혔다.유영을 본 한지음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새벽 시간이라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유영이 연락도 없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그녀의 두 눈에 증오가 용솟음치더니 유영이 보는 앞에서 붕대를 가져다가 두 눈을 가
그런 걱정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소은지는 이유영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유영의 차가운 손을 조용히 잡았고 아무 말 없이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너무 힘들었어.소은지는 파리를 떠난 지 벌써 4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강이한과 박연준이 이유영 곁에 있었지만 그녀가 어둠 속에서 얼마나 절망했을지, 우천시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소은지만이 알 수 있었다.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고 식당의 도무미들이 식탁을 정리를 시작하면서 곧 차를 가져왔다.“네가 과일차 좋아하는 거 알고 준비했어.”“응.”이유영은 과일로 우려낸 차를 정말 좋아했다.차를 한 모금 마시자 익숙한 향이 입안을 감쌌다.소은지는 웃으며 말했다.“네가 만든 것만큼 맛있진 않지?”“그야 당연하지.”“나도 네가 만든 게 더 맛있어.”소은지는 감회에 젖은 듯 조용히 말했다.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그 순수했던 시절이었다.하지만 그 시절을 진정 그리워하는 사람은 소은지뿐일지도 모른다. 이유영에게 그 시간은 착각에 불과했다.강이한과의 관계에서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유영은 끝까지 그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기억을 붙잡고 버텼다.그러나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지금 엔데스 가문은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어. 넌 괜찮아?”이유영은 걱정스럽게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엔데스 가문의 인장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그 때문에 전기봉의 중요성은 일시적으로 희미해졌지만 만약 인장이 다시 나타난다면 엔데스 가문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이유영은 소은지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소은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말했다.“영향은 있지만 내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야.”이유영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라니.“엔데스 명우 때문이야?”우천시에서도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유영은 여전히 소은지를 걱정했다.특히,
예전에 강이한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소은지를 찾아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밤늦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어때?”“맛있네. 모이산 요리사, 실력이 좋네.”이유영은 음식의 맛이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청하시의 맛도 살짝 느껴졌다.“요리사가 청하시 출신이야?”“어떻게 알았어?”사실, 현우가 데려온 요리사였다.현우는 소은지가 파리 음식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고 그녀가 엔데스 명우의 압박 속에서 힘들어할 때마다 직접 요리를 해 주었다. 덕분에 소은지는 최근 살이 많이 붙었다.현우가 청하시에서 요리사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소은지의 마음속에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청하시 음식은 내가 다 먹어 봤는데. 아마 원씨 집안 요리사일 거야. 맛이 너무 비슷해.”“그래, 너 안 가본 데가 어디야?”소은지는 이유영을 흘겨보며 말했다.강이한... 그 남자는 정말 짜증 나는 존재였지만 연애할 때만큼은 이유영을 극진히 아꼈다.그녀가 맛있게 식사할 수 있도록 청하시의 유명한 레스토랑은 거의 다 찾아다녔다.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유영의 키는 크게 자라지 않았다. 아무리 정성껏 먹여도 소용없었다.“그만 얘기하고 맛있게 먹자.”이유영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순수하고도 맑았다.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현우는 좀 먹었으니까, 너 많이 먹어.”“아직도 입맛이 그렇게 없어?”“응.”소은지는 이유영의 세심함에 마음이 흔들렸다.청하시에 있을 때, 둘이 함께 식사하면 소은지는 늘 이유영의 식습관을 세심히 관찰했다.하지만 엔데스 명우에게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후, 소은지의 식욕은 현저히 줄어들었다.비록 함께 식사하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이유영은 그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은지야.”“왜 안 먹어?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잔뜩 준비했어. 다 담백하고 지금 너한테 딱 맞는 음식이야.
이유영은 아이를 꼭 안은 채 창밖으로 희미한 달빛을 바라보며 전에 없던 만족감이 밀려왔다.분명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지금은 달빛 아래에서도 시야가 또렷했다. 그녀의 눈을 집도한 의사가 얼마나 신중하게 치료했는지 알 수 있었다.그날 밤, 이유영은 딸의 향기 속에서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이유영은 가장 먼저 소은지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그녀는 곧바로 모이산 뒤편으로 향했다.소은지는 우천시를 떠난 후 이유영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최근 파리 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소은지가 그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했다.차에서 내리자, 현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트렌치코트를 멋스럽게 걸친 현우는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가문의 깊은 역사가 그의 태도에서 자연스레 드러났다.과거, 이유영이 그의 곁에 있을 때도 이 기품을 감추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녀가 주부에서 직장 여성으로 변신하는 동안 주변을 세심히 살피지 못했던 것일까?맞아, 분명 그랬을 것이다.현우는 가까이 다가와 이유영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은 깊고도 반짝였다.“이제 볼 수 있나 보네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거실 창 너머로, 소은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를 보살피던 왕 아주머니는 소은지의 뒤에 서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왕 아주머니는 엔데스 가문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가문의 여주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와 그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왕 아주머니.”“네.”“모두 담백한 음식이죠?”소은지는 차분하게 물었다.왕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걱정 마세요. 다 말씀해 신 대로 준비했습니다.”“네. 유영이는 수술을 마친 직후라 너무 자극적인 음식은 안 돼요.”“알겠습니다.”소은지는 왕 아주머니에게 말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 속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멈칫했다.“아빠?”“아니야, 가서 쉬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정국진의 눈에 스친 망설임을 이유영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파리와 서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으니까.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이 말했다.“그럼 전 방으로 돌아갈게요.”“응.”이유영이 서재를 나서자 정국진만 남은 공간에는 복잡한 기운이 감돌았다.서주에서 박연준이 돌아왔다.그리고 강이한은...정국진은 사람을 보내 그의 행방을 찾으려 했지만 강이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는 떠날 때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감췄다. 마치 세상에서 존재조차 지워버린 듯했다.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수술 후에는 이유영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이유영을 완전히 떠나기 전, 그는 얼마나 깊은 고통을 견뎌야 했을까?...방으로 돌아오자, 유 아주머니와 월이가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이유영을 보자 바비 인형을 월이에게 건네며 공손히 말했다.“아가씨.”“네.”“잠시만요.”이유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유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그 사람, 몇 번이나 왔어요?”강이한을 물어보고 있었다.이제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씨 가문 사람들은 이유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조용히 대답했다.“두 번 왔어요.”두 번.즉, 우천시에서 돌아온 후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이유영은 강이한이 아이를 보러 왔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꼈다.그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다. 만약 그가 아이가 자신의 혈육이라는 걸 알고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이 세상에 그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일단 나가보세요.”“네, 아가씨.”유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이유영은 조용히 월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임소미는 이유영을 꼭 끌어안으며 마치 텅 비었던 가슴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이유영이 돌아오기 전, 임소미는 이미 그녀의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여진우가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수술 전까지 모두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만큼, 그 소식은 임소미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다.“엄마, 숨 막혀요.”이유영이 투덜거렸다.“얘가...”임소미는 그녀를 품 안에서 놔줬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눈가를 쓰다듬었다.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임소미의 가슴은 다시 먹먹해졌다.지난 2년 동안, 이유영의 눈에 드리워진 어둠을 바라보며 마지막에 결국 텅 빈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임소미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두려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정말 볼 수 있는 거 맞지?”이렇게 맑은 눈동자를 보고도 여전히 불안했던 임소미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정말 볼 수 있어요. 엄마, 오늘 검은색 원피스 입으셨네요.”“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이유영이 옷 색깔을 정확히 맞추자 임소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도 그 말을 듣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됐어, 보이면 됐어.”“아빠.”“밥 먹자.”이것이 바로 가족이었다.언제든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밥과 뜨끈한 국이 기다리고 있는 곳.여진우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따뜻함을.정국진과 임소미 앞에서 그도 편안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참 좋았다.재벌 가문에서 이렇게 화목한 가족 분위기를 가진 곳은 드물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조화를 이루며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식탁에는 여진우가 좋아하는 음식과 함께 이유영을 위해 준비된 담백한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고 이유영은 기꺼이 그 음식을 받아들였다.“엄마, 저거 먹고 싶어요.”월이는 이유영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을 만나기 전, 비록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순수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앗아갔다. 계산해 보면 그는 이유영을 2년 동안 지켜왔고 5년을 연애했으며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이유영은 그 감정이 진짜라고 믿었고 온 마음을 다해 화답했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거짓이었다.강이한도, 박연준도 모두 거짓이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끝없는 사랑을 선물했지만 박연준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가장 큰 보호를 제공했다.한 명은 사랑을 주었지만 보호는 없었고 다른 한 명은 보호를 제공했지만 사랑은 없었다.둘 중 누구든, 이유영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었다.“알겠어요.”배준석이 씁쓸하게 말했다.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거예요.”“...”“하지만 그들은 저에게...”이유영은 말을 멈췄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냥 보내주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끝내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배준석 씨.”“네?”“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생사의 이별이 아니라 사랑하지만 얻을 수 없는 사랑이에요.”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유영은 어땠을까?그녀가 손에 쥔 모든 것은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그것은 사랑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그는 이유영 씨에게 진심이었어요.”배준석이 이유영이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러나 이유영은 비웃음만 나왔다.진심이라고?그 말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진심이란 것이 존재할까? 누가 누구에게 끝까지 진심일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한 사람이 결국 가장 큰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과거의 자신이 너무 진심이었기에 지금 이렇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순간, 배준석은 확신했다.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영원히 용서하
여진우는 이유영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사람은 배준석이었다.청하시에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에서의 배준석은 마치 햇살처럼 밝은 청년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그는 끝없는 광기와 붕괴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때의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상처를 입혔다.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그는 미친개처럼 사람만 보면 물어뜯으려 했고 특히 이유영에게는 더욱 그랬다.지금도 이유영은 그날 밤 순정동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배준석은 조형욱과 함께 이유영의 집으로 찾아와 뱃속 아이를 없애려 했다.거의 3년 만에 다시 만난 배준석은 마치 숱한 풍파를 겪고 난 후의 고요함처럼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씁쓸함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여진우는 지쳐 있었다.오랜 시간 이유영의 곁을 밤낮으로 지켰던 탓에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자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배준석은 잔에 따른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정말 그렇게 미워요?”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요즘 이유영 앞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덕분에 그녀는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배준석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이유영은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 애썼다. 요즘 그녀는 금식 중이었다. 예전에는 죽을 먹으며 다른 음식을 달라고 떼를 썼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된 후 시력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는 눈을 위해서라면 한 달 금식은 물론, 1년, 2년도 감수할 수 있었다.술은 절대 마실 수 없었다.배준석의 질문에, 이유영은 조용히 되물었다.“준석 씨는 누구를 미워해요?”이유영은 생각했다.배준석이 자신을 위해 수술을 집도하고 평생을 바친 연구로 성공을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과거에 약혼녀를 해쳤던 진짜 범인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배준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유영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다.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여전히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 희미했다.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마침내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눈앞의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이유영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모두가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지와 우현은 작은 손을 꼭 잡은 채,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는 듯 서로를 꼭 붙잡고 있었다.두 아이는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 만약 그녀가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될 터였다.“이유영 씨.”“보여요.”배준석은 이유영에게 복수하지 않았다.그 사실을 깨닫자, 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 전, 배준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온몸이 긴장했고 심지어 공포감에 휩싸였었다.의사는 평소 만날 일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절대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는 존재다. 환자가 되는 순간, 결국 그의 손길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유영아.”여진우는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의 온몸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이제는 익숙했다.그래서 여진우가 자신을 안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온기를 느끼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하지만 이제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감각에만 의존했던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정말 보여?”여진우는 그녀를 품에서 놔주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보여.”진짜였다. 정말 볼 수 있었다.여진우는 장난스럽게 물었다.“내가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보여? ““파란색.”“...”“됐어. 너 수염 난 것도 다 보여.”태연한 이유영의 말에, 여진우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아침 면도를 깜빡했는데 그녀가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병실 안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수술은 성공했다.붕대를 풀고 눈
그 순간, 이유영과 여진우의 숨이 가빠졌다.이유영은 눈을 감은 채,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듯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마지막 순간이었다.이제 눈을 뜨는 순간, 무엇을 마주하든 그것이 앞으로 남은 삶 동안 마주해야 할 현실이 될 터였다.“눈 떠보세요!”의사의 목소리가 한층 강해졌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그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였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배준석이었다.강이한과 싸운 뒤, 완전히 사라졌던 그 사람.그가 여기에 있다고?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유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때, 여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준석아, 너 때문에 유영이가 놀랐잖아.”배준석의 묵직한 목소리보다 여진우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병실에 울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여진우가 배준석을 그렇게 부르는 걸 듣자, 이유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려 했다.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눈을 뜰 수가 없어.”병실은 고요해졌다.그때, 차가운 손끝이 피부를 스쳤다. 배준석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닦아냈다.보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유영은 자신의 수술을 집도한 사람이 바로 배준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믿을 수 없었다.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휘몰아쳤다.왜냐하면 배준석이 바로 한지음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였다.그때 청하시는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왜 강이한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걸 받아들이라고 했을까?어떻게 그렇게 평온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 씨.”배준석이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제 기억 속의 이유영 씨는 나약한 주부가 아니었어요.”그 한마디에, 이유영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그렇다. 그녀는 한때 평범한 주부였다.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