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강이한은 정말 완벽해 보였다. 이유영은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지금 박연준의 모습이 딱 그때의 강이한 같았다. 앞으로 누가 될지 몰랐지만, 그에게 반한 여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평생을 걸어버리게 되리라.“무슨 생각 해요?”이유영이 한참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때, 박연준이 잘린 스테이크 그릇을 내밀며 물었다. 그제야 이유영은 정신을 차리며 다급히 말했다.“죄송해요!”“아니에요.”박연준이 답했다.본래 이 자리는 이번 개발 사업을 성공적으로 따낸 것을 축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둘의 미묘한 분위기 때문에 서재욱은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이유영이 무언가 다시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었으나, 쌓인 세월이 있으니 이름이 없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이혼 후, 삭제했던 강이한의 번호였다.이유영은 전화를 받는 대신 화면을 뒤집어 통화를 거부했다.그 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세 사람은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이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이유영이 맡고 있어 업무 부담이 컸다.서재욱은 그녀의 작업을 도울만한 사람을 파견할 거라 말했다. 이유영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막 시작한 터라 사무실에 인원이 부족하던 차였기 때문이다.“그러면 당연히 감사하죠. 외부에서 디자이너를 찾으려니 실력이 보증되지 않아 걱정이었거든요. 대표님께서 보내주신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이 말과 함께 이유영은 샴페인잔을 서재욱과 맞부딪혔다.안 그래도 조민정이 이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그런데 서재욱 덕분에 간단히 해결되었다.이유영이 한참 사교활동에 열중하던 도중, 강이한 쪽에선 열불이 나고 있었다. 그는 한 통, 또 한 통, 끊임없이 이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유영은 도무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이미 조형욱을 통해 이유영의 위치를 보고받은 후였다.박연준과 서재욱과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박연준은 강이한을 한번 쳐다본 후 자리를 떠났다. 강이한은 화가 났지만, 박연준을 굳이 잡지 않았다. 왜냐면 이유영은 이제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박연준을 잡아 세웠다면, 이유영이 또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병원 앞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강이한은 다시 열이 솟구쳤다. 이때 이유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따라와.”하지만 강이한이 가만히 자리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이유영이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에 강이한의 몸에서 다시 싸늘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따라오라고? 감히 나한테?“이유영!”“왜!”“너의 시어머니, 지금 병원에 입원했어!”강이한이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그의 말에 이유영은 자리에 멈칫했다. ‘너의 시어머니’, 그의 입에서 나온 인물이 누구인지 잘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어찌 보면 당연했다. 회귀 후, 그녀는 진영숙을 시어머니로 대접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강이한이 ‘너의 시어머니’라고 했을 때, 정확히 누구인지 인식되지 않아 한참 떠올려야만 했다. 그녀의 멍한 표정을 본 강이한이 더 크게 분노를 표출했다.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그야 당연히….”“우리 이혼했어. 도대체 누가 내 시어머니라는 거야!”강이한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유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 순간 강이한은 숨이 멎은 것 같았다.이혼!그래 둘은 이혼했다!이유영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그였다. 그는 둘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가 진영숙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이유영을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과거, 집안 어른들한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나섰던 것은 이유영이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간병인을 따로 두지 않고 퇴원할 때까지 이유영이 직접 챙겼었다.그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본 이유영이 어깨를 으쓱였다.“정말 잊고 있었나 보네.”그녀의
집안에 들어가자 긴장된 분위기가 겉돌았다. 사용인들 모두 바쁘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이런 그들을 보며 정국진은 이리저리 손짓하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삼촌.”이유영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사용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이유영은 모시기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쉬운 편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에 이토록 긴장할 일이 없었다. 정국진이 이유영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비록 중년에 접어들며 나이가 들었지만, 그 특유의 신사적이고 품위 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젊은 시절 그는 분명 여러 여자를 홀리고 다녔으리라!이유영은 비록 작은 체구지만, 아주 힘찬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와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삼촌, 뭐 하세요? 오신 김에 아주 집을 뒤엎으려고요? 밤도 늦었는데, 사람들 힘들어해요.”“뒤엎다니! 내가 언제? 너야말로 집안 꼴이 이게 뭐니?”“….”“가구들끼리 톤도 안 맞고, 엉망이잖아!”“됐어요, 됐어. 로열 그룹 회장님이 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요!”“네가 불편할까 봐 그러지!”“여기 정말 편해요! 그리고 전 이런 거 신경 안 써요!”강이한과 함께 있던 시절 그녀는 나름 자신이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정국진 앞에 서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괜히 대기업 회장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사에 모든 사람, 모든 것에 철처하고 깐깐한 사람이었다. 이유영은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여긴 어쩐 일이예요?”“회사에 여기에도 지사가 있는데, 요즘 좀 문제가 있어서 확인 좀 하러 왔지.”“지사요?”“그래.”“….”로열 글러벌 그룹이 청하시에도 지사가 있다는 얘기는 처음이었다!놀란 그녀의 표정을 본 정국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괜히 불필요한 소리가 나올까 봐 우리 회사 이름을 쓰지 않았어. 여기 사람들은 그 지사가 우리 로열 글로벌 그룹 거라는 것도 모를걸.
”강이한과의 일은 더 이상 마음에 두지 마. 진짜 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널 전적으로 믿을 테니까!”전적으로 믿는다. 이유영은 순간 마음이 찌릿했다.“저 이제 신경 안 써요.”이 말 할 때, 이유영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이때 정국진이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입을 열었다.“전에 알아보라고 했던, 그 한지음이랑 연관된 일 말이야, 결과 나왔어!”“진짜요?”“하지만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닐 거야.”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정국진은 이유영에게 말하지 말지 고민했었다.하지만 전에 조민아가 이유영이 개인 탐정까지 고용해서 조사하고 있다는 얘기들 듣고 마음을 굳혔다. 얼마나 이 일이 이유영에게 절실한지 느꼈기 때문이다.그리고 정국진이 말해주지 않아도, 언젠간 이유영이 알아낼 일이었다.이유영이 침을 꼴깍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무슨 뜻이에요?”정국진이 앞에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사실 한지음이 미워하는 건 너의 엄마야.”“….”‘엄마를 미워한다고?’“삼촌.”그녀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딱딱해졌다.이유영을 바라보는 정국진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스쳤다.이 소식은 절대 이유영에게 좋은 얘기가 될 수 없었다.“내 생각에 이 일은….”“말씀해 주세요!”정국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유영이 입을 열었다.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이유영에게 알리지 않고 일을 처리하고자 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한지음이 그녀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렸다. 회귀 전에 한지음한테 빼앗긴 망막은 그렇다 쳐도, 마지막 순간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그 화재도 한지음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이유영과 한지음 사이엔 씻을 수 없는 악연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니 그 근원의 뿌리를 알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유영아.”“말씀해 주세요. 저 강해요. 잘 버틸 수 있어요!”이유영은 어쩌면 한지음과의 관계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이 그 깊은 내막을 알게 되고 견디지 못할까 봐
“그만해!” 강서희는 그의 화난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오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한테 어떻게 화를 내....'강이한은 평소 강서희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영이 강씨 집안의 며느리로 있을 때도 그랬다.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그는 항상 강서희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번 상황은 강서희에게 충격이었으며, 그녀는 강이한의 변화된 태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넌 이만 돌아가.”강이한의 짜증은 강서희의 서운한 표정을 보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과거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강서희를 예전처럼 바라볼 수 없었다. 여전히 동생으로서의 애정은 있지만, 그녀의 행동에 대한 인내심은 소진되었다. 강이한은 강서희가 이유영에게 저지른 일을 알고 있었다.강서희는 강이한의 눈빛에서 분노를 감지하고 억울함을 느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 표정을 통제하며 감정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나 엄마 옆에 있을래.”강서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누구라도 연민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애처로웠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녀의 감정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강이한의 무반응은 강서희를 더욱 흔들었다.그녀는 강씨 집안에 처음 입양되었을 때의 두려움을 떠올렸다. 당시 그녀는 매일 밤 버림받을지, 상처받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했다. 현재는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씨 집안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이 항상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강이한의 냉담한 태도는 강서희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럼 넌 여기 있어. 난 지음의 병실에 좀 다녀올게.”강이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서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마음속은 폭풍이 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강이한이 한지음에게 부드럽게 ‘지음’이라고 하는 모습을 보며, 강서희는 자신의 가슴
“그렇다는 건 결국 너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거잖아.”강이한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불확실한 정보와 추측에 기반한 정보는 강이한이 가장 경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기업의 총수로서 활동하며, 그는 불확실성이 어떻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몸소 경험했다. 그러한 정보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항상 확실하고 검증된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원칙은 그의 일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전화를 끊은 강이한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그는 한지음이 어떻게 시력을 잃게 되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한지음의 깊은 아픔이 느껴져 가슴이 저렸다. 그 아픔은 이유영에 대한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병실로 돌아온 그는 한지음이 자신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상처는 이미 새로운 붕대로 다시 감싸져 있었다. 강이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미안함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일어났어...” 강이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한지음은 약간 힘겨워 보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빠가 전화하는 소리에 깨어났어요. 오랜만에 듣는 소리라서...”그녀의 말에 강이한은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한지음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물 마실래?”“아니요, 괜찮아요.” 한지음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강이한은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한지음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없어, 그는 마치 불안한 물결에 휩싸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심란해진 그는 담배를 찾으려 했으나, 한지음의 모습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강이한의 복잡한 마음을 눈치챈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곧 수술이 가
강이한이 한지음을 바라보며 말했다.“곧 좋아질 거야. 나 믿지?”곧이라고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누가 아는가?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렇게 있는 것도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어둠도 생각만큼 그리 무섭지 않고… 오빠, 저….”“한지음!”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끼어든 강이한, 그는 이런 한지음의 모습이 너무나도 속상했다.“일단, 잘 쉬고 있어.”강이한은 자리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가 병실문을 나가기 직전, 뒤에서 한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지금 낮이에요? 아니면 밤이에요?”강이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 상황은 그에게도 너무나 버거웠다. 어둠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한지음을 생각하며, 그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평범하게 세상을 바라보던 한지음이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은 상황, 그 고통의 크기가 그는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한지음에게 이제 밤과 낮의 차이가 느껴질까? 그런 생각이 들며, 강이한의 마음은 먹먹해졌다. “약속할게, 얼마 남지 않았어. 곧 좋아질 거야.”강이한은 아이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한지음의 귀에 닿자, 조금 마음의 안정이 되찾아졌다. “오빠만 믿을게요.”한지음은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며 강이한의 감정을 교묘하게 조종했다. 그녀의 계획대로, 강이한은 점차 그녀의 함정에 빠져 뜻대로 움직이게 되었다.강이한은 병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지음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병실 앞에 경호원 두 명을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이번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 보도의 출처를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누구든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면, 책임을 피할 수 없으리라! “알겠습니다, 대표님.”조형욱이 전화 너머에서 답했다.단 몇 분 만에 강이한은 한지음에게 견고한 보호막을 구축했다. 이유영이 위험에 처했을 때보다 훨씬 빠른 행동이었다. 한편, 병실 안에서 한지음은 강이한이 남긴 말을 곱씹고 있었다.
한지음은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편, 순정동에서 이유영은 정국진으로부터 조사 결과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며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때로는 놀라움, 때로는 분노, 때로는 두려움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마침내 모든 사실을 들은 이유영은 큰 혼란에 빠졌다. 깊은숨을 내쉰 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정국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한지음이 아빠가 불륜으로 낳은 딸이라는 거예요?”“그래.”이유영은 말문이 막혔다.“엄마가 돌아가시게 된 것도 결국 이것 때문이에요?”“그렇지.”이유영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엄마의 죽음이 아빠를 잃은 슬픔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드러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가족을 모두 잃고 남겨진 이유영은 홀로 남겨진 재산으로 학업을 마쳤다. 그녀는 부모님의 사랑을 믿으며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폭풍우처럼 격동하는 그녀의 감정을 앞에 두고, 조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안 그래도 너의 숙모가 알리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했는데, 나는 네 고집을 아니까….”정국진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유영은 너무 어렸고, 별도의 조사가 없었다면 평생 이 진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더 컸다.이유영은 멍하니 정국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는 충격과 혼란이 서려 있었고,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먼저 외도한 건 아빠인데. 겨우 엄마가 그 여자한테 따졌다고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마음이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정국진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의 대한 남은 이야기를 계속 들려줬다. 그는 이유영이 어차피 직접 조사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기로 결정했다.이유영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상대는 과부였다. 그 과부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
이유영은 처마 밑 긴 의자에 누워 밖에서 스며드는 대나무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이었다.빗방울이 대나무잎에 부딪치는 소리, 그 울림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들어가. 춥잖아.”“서주는 지금 어때?”오전에 신지수에게 전화가 와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요즘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음모라면 대체 누가 그의 것을 박연준에게 넘긴 걸까?신지수의 조사 결과,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의 격렬했던 싸움이 모두 박연준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강이한은 도대체 왜 그런 걸까?“아직도 못 잊는 거야?”박연준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억눌린 고통을 삼켰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못 잊는다고? 박연준은 분명 강이한의 최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서주는 이유영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그녀가 그 모든 일을 저지른 이유는 강이한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이유영이 눈이 보였다면, 박연준에게 어떻게 복수를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이유영은 원래 복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분노는 깊고도 거셌다.“못 잊는다고?”이유영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차가웠다. 한겨울의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미소였다.토끼털로 장식된 옥색 한복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 옷을 입은 이유영은 차가웠다.그녀의 평온함은 한때 그의 다정함 속에 묻혀 있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했던 모습은 언제였던가.강이한에게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했지만 나중에 그 사실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달았다.그녀는 완벽한 전업주부, 완벽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단지 대역일 뿐이었다니.“이유영.”“박연준, 너와 강이한은 한 번이라도 내가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 있어?”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독립적인 존재? 그렇다. 이유영은 살아있
그는 덜컥 겁이 났다.더 큰 대가가 두려웠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차라리 그 대가를 키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강이한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는 듯한 아픔에 휩싸였다.염 선생의 의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정도였고 문제는 운명, 아니 그 대가가 이유영에게 재앙처럼 닥친 것이다.석 달의 고된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만약 이 모든 고난의 대가를 누군가가 짊어져야 한다면, 강이한은 기꺼이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다.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의 빛을 되찾아주고 이유영에게 고요한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우천시.마지막 3일째가 되자 박연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늘 평정심을 지키던 그도 이유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문기원이 돌아왔다.“선생님.”박연준은 묵묵부답이었다.기다림만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남은 3일은 마지막 희망을 바라는 간절한 시간이 되었다.박연준은 연서의 죽음이 회장의 치밀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그날부터 그의 밤은 끝없는 불면으로 채워졌다.그와 강이한은 모두 함정에 빠졌고 이제 와서 강이한이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걸 볼 수는 없었다.점심 식탁은 평소와 다름없었다.박연준은 남은 이틀 동안, 이유영이 약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는지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한 방울의 약이라도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을 것처럼.“펑!”이유영은 빈 그릇을 세게 내려놓았다.박연준은 텅 비어 있는 그릇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물었다.“다른 느낌은 없어?”그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이유영의 말 한마디에 박연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가에는 깊은 슬픔이 서렸다.“한 그릇 더 마셔야 해?”박연준은 말없이 침묵했고 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이미 체념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영은 이미 약이 소용없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이해하지 않으면 더 고통스러울 거라니?소은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넌 한지음과의 관계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거야?”소은지는 강이한의 뻔뻔한 대답에 또다시 놀랐다.이유영을 위해 희생하는 강이한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답변을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소은지, 넌 몰라.”“그래, 모르겠어.”소은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졌고 강이한을 향한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소은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내뱉었다.“한지음을 돌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굳이 곁에 두어서 누군가를 짓밟아야 했어?”“...”“강이한, 이유영에게 마음이 흔들린 건 네 응보야!”만약 강이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유영은 아마 강이한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소은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노려보았다.강이한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응보라고? 그래, 강이한도 그것이 응보임을 부정하지 않았다.“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똑같이 한지음을 곁에 둘 거야?”한지음은 이유영 비극의 시작이었다. 소은지는 지금까지도 강이한이 그 일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이런 사랑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소은지의 물음에 강이한은 눈을 크게 뜨고 깊은 고통이 서린 눈빛으로 답했다.“물론이지.”“...”소은지는 한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를 느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고 강이한의 얼굴에 뿌렸다.예전에 우천시 서재에서 '수술 동의서'를 보았을 때, 강이한이 마음을 바꿨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우스웠다.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소은지는 분노에 찬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씁쓸한 고통이 가득했다.후회할까? 물론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전생과 현생을 거치면서 강이한은 한가지 깨닫게 되었다. 어떤 운명은 바꾸려고 한다면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강이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강이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쓰라린 마음이었던 것이다.“유영이를 기다리고 있을게요.”강이한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정국진은 알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이유영을 만나고 이제 영원히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것.“사실...”“제가 빚진 거예요.”정국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이한이 말을 잘랐다.그는 정국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고 강이한도 역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결국 이유영의 눈에 다른 사람의 빛이 비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휴...”정국진은 한숨을 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람은 한 번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깨달음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인데 지금의 강이한은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는 깨달았고 그 고통을 온전히 자기가 짊어지게 된 것이다....소은지는 강이한이 파리에 왔다는 것을 알고 오후에 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소은지였기 때문이다.“후회해?”소은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강이한에게 물었다.“...”한지음 일로 후회하냐는 것이었다. 소은지는 강이한과 한지음의 관계를 가장 혐오했다. 소은지는 이혼 전문 변호사였기에 수많은 부부의 파탄을 목격하면서 자연히 불륜을 가장 혐오하게 되었다.그런 소은지가 강이한에게 후회하느냐고 묻자, 강이한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질문, 몇 번이나 해봤어?”“...”소은지의 머릿속에 설선비가 떠올랐다.당시 그 사건은 청하시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고 만약 소은지의 변호가 없었다면 설선비의 명성은 더욱 추락했을 것이다.소식은 철저히 숨겨졌지만 우연히 식당에서 설선비를 만난 소은지는 그녀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후회하니?”설선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소은지 씨,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절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지금 강이한의 가슴속에서 어떤 절망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절망은 마치 끝없이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보다 가혹한 절망은 없었다.조용히 서서 아이를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에는 깊은 상처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강 선생님, 이만 가주세요. 선생님을 보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네요.”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악몽과 마주할 때 쉽게 맞설 수 없다. 어린 월이도 마찬가지였다.오는 길 내내 마음을 다잡았지만 눈앞의 월이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찢어지는 고통을 억누른 채 망연히 서 있었다.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몰랐고 그것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었다.결국, 그는 돌아가기로 했다.돌아서는 순간, 유 아주머니가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요. 아가씨, 이제 괜찮아요.”“으흑, 으흑...”아이의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 울음소리에 강이한의 마음은 씁쓸함으로 가득 찼다.그저 아이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아이를 겁먹게 하고 말았다. 강이한은 그저 아이 곁에 있고 싶었고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고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하지만 아이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세상에 이보다 더 처참한 아버지가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복도 끝에 정국진이 서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을 보니 강이한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듯했다.상처 입은 강이한의 모습을 보며 정국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아이가 아직도 너를 무서워해?”“...”‘무서워한다'는 단어가 강이한의 심장을 깊이 찔렀다.과거의 강이한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서 이토록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은.“다 제 잘못이에요.”그는 깊은 슬픔을 담아 말했다.“...”강이한의 잘못이 확실했다.하지만 마냥 아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강이한은 월이의 마음속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사람들은 부모가 아이에게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강이한은 아이가 정씨 가문에서 얼마나 소중히 자라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최고의 스승이셨고 외삼촌 또한 훌륭한 삼촌이었으며 엄마 역시 다정한 어머니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의 삶에 너무나 큰 그림자를 드리웠고 결국, 그는 좋은 아버지조차 되지 못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이한의 가슴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에 짓눌렸다. 마치 쇳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유씨 할머니, 유씨 할머니?”아이는 강이한을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소중한 바비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 인형은 이유영을 똑 닮아 있었다. 이유영을 볼 수 없는 아이는 온 마음을 그 인형에 의지하고 있었다.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아는 아이와 달리, 그는 무엇을 지켜냈던가?아이의 경계심 어린 눈빛에 강이한의 가슴은 다시금 깊은 고통에 잠겼다.아이를 돌보는 유 아주머니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왔다.“아가씨.”“나쁜, 나쁜 사람!”유 아주머니도 강이한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곳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정 선생님과 사모님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정씨 가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이한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국진과 임소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아이에게 그토록 상처를 준 사람을 왜 다시 만나게 하는 거냐고, 차라리 바깥 여자의 아이와 함께 살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수군거렸다.“아가씨, 무서워하지 마세요.”유 아주머니는 아이를 꼭 껴안고 강이한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자신을 향한 경계의 시선 속에서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그의 가슴속에서 어떤 고통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가장 가까운 딸에게 원수처럼 취급받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월이를 통해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뼛속까지 깨닫고 있었다.그는 아이에
강이한의 가슴은 칼날에 도려내듯 아려왔다.영원히 기다릴 수 없는 이를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둬야 하는 고통을, 이제야 강이한은 깨달았다.한때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 자리는 이유영에게는 비극이었다.이유영의 모든 기다림을 강이한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던가!그렇기에 지금, 이유영의 냉담함을 견뎌내는 고통은 그만큼 절망스러웠다.“이제 그만 울어, 응?”“엄마가 보고 싶어요.”작은 아이는 울먹이며 강이한을 바라보았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강이한은 눈가에 맺힌 씁쓸함과 고통을 감추려는 듯 눈을 감았다.강이한 역시도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우천시를 떠난 후, 그는 이유영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3개월은 많은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서주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도 대부분 마무리되었다.그 일들은 서주와 파리 엔데스 가문 전체를 뒤흔들었다. 진실을 아는 이는 정국진뿐이었고 나머지는 강이한이 미쳤다고 여겼다.강이한은 다시 파리에 오게 되었다.강이한의 방문에 임소미는 여전히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태도와 분위기에서 분명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임소미는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위층에 있어.”임소미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지난번처럼 아이를 보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다.“고맙습니다.”“...”강이한이 다시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고 임소미는 이것이 아이를 만나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에 더욱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이유영은 우천시에 머물 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강이한에게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며칠 동안,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염 선생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포기할 수가 없었기에 마지막 며칠이라도 모두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임소미 역시 알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이 여전히 호전되지 않는다면, 오늘 강이한이 아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확실해
강이한은 아이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착하게 있어야 해.”“아빠, 엄마 찾으러 가는 거야?”“...”아빠, 엄마...그 두 단어가 온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에 강이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는 온유의 아빠였고 이유영은 온유의 마음속에서 엄마였다.월이라는 존재만 없었다면 어쩌면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까?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과거와 현재의 악연, 그리고 연서까지... 이 모든 것이 쌓인 이상,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온유야.”강이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답답함을 억눌렀다.온유는 멍한 눈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아빠?”“엄마는 잊어.”“...”아이의 눈에서 순간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강이한의 눌러 두었던 아픔이 다시 치밀어 올라 목이 메었고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팠다.“엄마는... 잊어, 응?”이유영은 엄마가 아니었고 이제는 영원히 엄마가 될 수 없었다.강이한은 온유가 가족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가슴 아플 수밖에 없었다.“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아요?”“...”“엄마는 동생만 원하는 거죠?”작은 아이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강이한은 알고 있었다.온유는 태어난 이후로 한지음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는데 그것은 박연준의 계략 때문이었다.온유에게 엄마는 항상 이유영이었다.박연준의 가장 잔혹한 행동은 온유에게 화살을 돌렸다는 건데, 하지만 강이한은 박연준이 온유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만약 박연준이 온유를 보았다면 아마도...돌이켜보면 박연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강이한이 그에게 저지른 잘못도 작지 않았다.“잊어, 응? “이 아이가 이유영을 잊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더 이상 기다릴 수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항상 고통이 뒤따랐다.과거, 한지음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 때문에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강이한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일이 이 지경까지 오자, 늘 강이한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이정과 신시욱 모두 한지음이 강이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지음이 어둠 속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면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각막을 기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유영의 각막을 기증하겠다고 말했지만 모두 그가 홧김에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수술실로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 기간 동안 수많은 일이 벌어졌고 혼란 속에서 누구도 강이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특히 강이한이 직접 이유영을 감옥에 보냈을 때, 그들은 한지음이야말로 강이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하지만 이제야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분명해졌다.우천시에서 이유영은 침착하고 태연했으며 한지음처럼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강이한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결심을 굳혔다. 만약 염 선생의 약으로 회복이 되지 않을 경우, 이유영을 위해 본인이 수술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다.“이유영 씨는...”생각에 잠긴 이정은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 결국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뱉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밖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온유 아가씨와 오셨습니다.”“...”온유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정의 가슴은 더욱 아프게 조여왔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험난했던 과거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였다. 그날 병원에서 이유영이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강이한이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연서의 존재마저도 온유와 월이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서는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었다.“들어오라고 해.”강이한은 손에 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썹에는 떨쳐낼 수 없는 긴장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