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71화

Author: 윤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하고 부드러운 노래가 실내에 울려 퍼지고 윤소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곡은 아직 가사도 없고 사람의 목소리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음악이다.

그러나 단순한 음악인데도 불구하고 깊숙이 빠져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곡 대부분을 듣고 나서야 윤소현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 곡이 박민정이 쓴 곡이라고? 말도 안 돼.”

처음에는 박민정이 좋은 곡을 써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좋은 곡임을 부정할 수 없어지자 그녀는 또 박민정이 이 곡을 돈을 주고 샀다고 생각했다.

“몰라요. 표절일 수도 있고 작곡가를 매수했을지도 모르죠.”

매니저가 윤소현의 말에 동참했다.

“당장 가서 알아보고 같은 장르를 찾으면 알려줘.”

박민정이 쓴 곡이 히트 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예.”

매니저가 떠난 후에도 윤소현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또 돈을 주고 2위에 놓여 있는 곡에 모든 데이터를 쏟아부으라고 분부했다.

박민정을 짓밟을 수만 있다면 얼마를 써도 아깝지 않았다.

...

같은 시각, 박민정도 집에 돌아가 대회 실시간 상황을 눈여겨보았다. 현재 그녀의 곡이 다운로드 재생 수와 청중들의 평점이 가장 높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녀와 2위의 격차가 매우 컸지만 지금은 뜻밖에도 격차가 점점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민정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2위 곡을 들어봤지만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여 박민정은 더 이상 인터넷 순위를 보지 않았고 그저 혼자 쉬면서 오늘에 있었던 일들을 소화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한수민의 딸도 아니고 박씨 가문 아가씨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박민정은 더욱 답답해졌다.

밖에는 언제부터 내린 것인지 큰비가 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그때, 입구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 나가보니 문밖에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박민정은 우산도 없이 걸어 나갔다.

눈앞의 가정부는
Locked Chapter
Continue Reading on GoodNovel
Scan code to download App

Related chapters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872화

    통화가 연결되고 전화 건너편에서 유남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추경은 씨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대요. 그래서 병원비를 내달라고 부탁하더군요.”박민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해주었다.추씨 집안과 박민정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그리고 박민정과 추경은은 더더욱 아무런 혈연이 없으니 이 일은 자연히 유남준에게 맡기면 된다.“알았어. 사람을 보내서 처리하도록 할게.”“네.”박민정이 전화를 끊었다.병원 안.병상에 누워있는 추경은은 정말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 집에 남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번에는 하마터면 정말 저승사자와 만날 뻔했다.그리고 마침내, 누군가가 병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추경은이 힘겹게 두 눈을 뜨고 쳐다보았지만 찾아온 사람은 뜻밖에도 서다희였다.“새언니는요?”추경은이 잔뜩 갈라진 입술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병원비를 지급하는 것 뿐인데 사모님이 직접 오실 필욘 없죠.”그녀를 대하는 서다희는 유난히 차가웠다.대표님을 대신해서 추경은이 정말 교통사고를 당한 건지 아니면 연기를 하는 것인지 확인해보러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교통사고는 진짜였던 모양이다.추경은은 오른쪽 다리에 깁스하고 있었는데 보름 내에는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할 듯했다.“아.”박민정이 오지 않았다는 말에 추경은은 눈에 띄게 실망한 눈치였다.“혹시 사촌 오빠도 알게 된 거예요? 그럼 사촌 오빠에게 전해주세요. 저는 괜찮아요. 이곳에서 치료받다가 몸이 좋아지면 집에 돌아갈게요. 그리고 앞으로 절대 오빠를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만약 추경은의 정체를 몰랐다면 서다희도 아마 그녀의 불쌍한 모습을 정말 믿었을 것이다.서다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병실을 나와 병원비와 입원비 등을 모두 지급하고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방금 치료기록을 훑어보았는데 가짜가 아닙니다.”“그럼 간병인을 불러서 그녀를 돌보게 하도록 해.”어쨌든 추씨 집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873화

    결국, 유남준의 최종 선택은 욕실로 가서 찬물샤워를 하는 것이다.요즘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때로는 저도 모르게 박민정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남준 씨.”갑자기 귓가에 박민정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다급히 샤워기를 끄자 그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빌어먹을, 이제 환청도 들려?”짜증이 난 유남준이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요즘에는 머리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서다희와 다른 사람들이 말해준 요 몇 년 동안의 기억은 대체 왜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지 모르겠다.유남준은 잠이 오지 않아 핸드폰을 켜고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지 말지 망설였다.그런데 그때, 마침 전화 한 통이 걸려왔고 음성 알림을 들어보니 발신자는 박윤우였다.“아빠.”전화를 받자마자 흥분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박윤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응.”유남준은 이제 박윤우의 호칭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엄마도 빨리 와서 아빠한테 인사해.”박윤우가 박민정의 곁으로 가 그녀를 끌어당기며 말을 걸었다.결국, 박민정은 박윤우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유남준 씨, 좋은 밤이에요.”유남준 씨?박윤우도 비로소 이 호칭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엄마, 우리 반 친구들 엄마는 다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는데 엄마는 왜 아직도 아빠를 이름으로 불러? 엄마도 빨리 여보라고 해.”그것도 모자라 박윤우가 몇 마디 거들었다.“이름을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지. TV에서도 싸울 때만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단 말이야.”박민정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대체 평소에 뭘 보고 다니기에 이런 걸 배운단 말인가.“윤우야, 나와 윤우 아빠는 이제 노부부니까...”박민정이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와 유남준은 결혼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노부부는 남편에게 그렇게 오글거리는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윤우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알았다.”“응?”“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874화

    대부분의 작곡가는 모두 자신만의 판단을 가지고 있다.박민정 역시 2위에 놓여 있는 그 곡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정말 그녀의 노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2위에 있던 그 곡은 처음에 다운로드 수와 재생량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반나절도 되지 않아 갑자기 비약적으로 치고 올라온 거지?여기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시간이 늦었으니 박민정은 내일 진서연에게 연락하여 조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이튿날 아침 일찍, 진서연을 찾기도 전에 진서연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보스, 큰일 났습니다.”“무슨 일이야?”“오늘 아침 대회 실시간 랭킹을 살펴보니 2위에 있던 곡이 보스를 앞질렀습니다.”그리고 진서연은 마음속으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누군가 대회에서 수작을 부린 것 같습니다.”비록 대회 측에서 데이터를 조작할 수 없다고 여러 번 선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가자가 패배를 인정할 순 없다.“네가 가서 조사해봐. 증거를 찾아내야 해.”증거가 없다면 박민정은 다른 참가자들을 함부로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마어마한 노력이 깃들었기 때문이다.“알겠습니다.”진서연이 전화를 끊고 박민정이 대회 실시간 랭킹을 다시 열어보니 과연 2위에 있던 참가자가 이미 그녀를 추월해 있었다.그러자 일부 네티즌들이 나서 언변을 펼치기 시작했다. “장난해? 이 어디가 좋다는 거야? 어떻게 을 추월한 거지?”첫눈은 바로 2위에 있던 곡이다. 그리고 메인 타이틀은 사랑이다.그리고 박민정의 은 역경 속에서 피어나는 용기를 찬양하는 곡이다.같은 시각, 또 다른 네티즌이 나서 반박하기도 했다.“뭐래. 분명 이 더 듣기 좋거든.”“진짜 장난해? 도 괜찮지만 과는 비교할 수 없어.”“맞아. 우리도 모두 듣는 귀가 있다고.”대부분의 네티즌은 그래도 의 편에 서주는 모양이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상황이 바뀌더니 수많은 네티즌이 우르르 달려와 너도나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875화

    글쎄 청각장애인인 박민정이 무슨 수로 그토록 훌륭한 곡을 써낼 수 있겠어. 지금 생각해보니 결국 모두 민 선생님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었군.이를 포착한 윤소현은 곧바로 박민정이 앞으로 음악계의 비난을 받고 다시는 곡을 쓰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한편, 박민정의 곡 댓글 창에서는 호평 일색에서 슬슬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이 노래도 들어보니 그저 그런데.”“뭔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그래, 나도 느꼈어. 박민정이라는 작곡가 말이야, 설마 인터넷 인플루언서들처럼 여기저기에서 베껴오는 건 아니겠지?”“윗댓 말이 맞아. 애초에 더 물어볼 게 있나? 이건 분명 베껴온 작품이야. 그렇지 않으면 신인이 무슨 수로 이렇게 훌륭한 노래를 써내겠어.”“나도 들어봤는데 이 곡 분명 민 선생님 작품을 베낀 거야.”“설마 외국에서 유명한 대가에게 빌붙으려고 이름을 다 바꾸고 같은 민자를 따서 민정이라고 지은 건 아니겠지?”“...”각종 혹평이 호평을 모두 잠식시켜버렸고 정상인이라면 이 변화가 마냥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박민정은 댓글들을 읽지 않았고 오히려 진서연이야말로 가끔 박민정이 표절했다는 말을 듣고는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이 사람들 지금 뭐라는 거야? 애초에 민 선생님과 대표님은 동일인물인데 말이지.”애초에 대회의 공정성을 위해, 다른 선수들이 대회에 무슨 내막이 있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박민정은 자신이 민 선생이라는 것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그런데 오히려 지금 일부 네티즌들에게 이 사실을 들킬 줄 생각지도 못했다.“그런데 이런 혹평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진서연이 기술 부서 사람을 불러 조사에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곧 이 혹평들의 IP 주소가 거의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러고 보니까 이게 전부 댓글 알바라는 거네.앞서 2위 의 재생횟수와 다운로드 데이터를 올려준 것도 박민정에게 악플을 단 이들과 같은 IP 주소였다.진서연은 기술 부서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876화

    한 시간 뒤.박민호가 출근하고 있는 호산 그룹 지사에 이른 박민정.다가오고 있는 그녀를 직접 마중하고자 박민호가 회사 앞으로 나왔다.“누나, 사무실 구경시켜 줄 테니 얼른 올라가자.”정장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박민호는 그렇게 박민정을 이끌고 사무실로 향했다.걸어가고 있는 내내 직원들은 박민호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박 대표님.”180도 달라진 박민호의 현재 모습에 박민정은 그저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사무실로 들어온 두 사람, 박민정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박민호는 그녀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자, 물이라도 한잔해.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커피는 삼가는 게 좋잖아.”“고마워.”섬세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동생이 마냥 기특한 순간이었다.“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돼. 누나, 우리 어릴 적에도 자주 같이 놀았었잖아.”말하면서 앉는 박민호에게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네 모습 아주 보기 좋아.”‘아빠,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민호 지금 아주 잘살고 있어.’후회라는 것을 하고 있는 듯한 박민호의 모습이다.“이렇게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대표님 덕분이야. 정말 좋은 분이시고 평생 고마워하면서 지내야 하는 분이셔.”박민호가 말하고 있는 대표님은 바로 유남우이다.박민정 역시 유남우가 좋은 사람임을 잘 알고 있으나 둘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생겼다.“그래. 알고 있어.”“참, 누나, 볼일 있어서 나 찾아온 거 아니야?”박민호가 물었다.박민정은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윤석후를 상대로 네가 소송을 제기했으면 좋겠어. 돈 좀 갚으라고.”잠시 멈칫거리다가 박민정은 결국 두 사람 사이에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그 사실을 박민호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말이다.“윤씨 가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라고? 누나 이미 하지 않았어? 나까지 나서면 좀 그렇지 않겠어?”박민정이 어떠한 속셈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박민호이다.자기한테 박씨 가문 재산을 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877화

    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어쩔 수 없이 홍주영은 사무실에서 나왔고 앞으로 기나긴 시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유남우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홍주영은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윤소현 씨, 도련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저녁에 중요한 손님과 만나야 하므로 오늘은 시간이 좀 힘들다고 하십니다. 안타깝지만 연출은 함께 보러 가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웨딩드레스를 보고 있던 윤소현은 그 말을 듣게 되는 순간 바로 발끈하고 말았다.“정말로 시간 없는 거 맞아요? 알리지도 않고 지금 이렇게 전화하는 건 아이고요?”유남우 곁에 있는 여자라면 그게 누구든 윤소현은 늘 지금처럼 이렇게 날이 서 있다.홍주영은 거듭 사과하면서 똑같은 말을 전했다.“죄송합니다만 부탁하신 대로 도련님께 전달하고 연락드리는 바입니다.”말하면서 홍주영은 대표이사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유남우를 바라보았는데, 대신 거짓말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도련님께서 사죄의 의미로 선물을 준비해달라고 하셨습니다.”유남우가 자기한테 선물을 준비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윤소현은 화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앞으로 오늘처럼 이렇게 거절하지 말라고 전해줘요.”“네.”기나긴 시간을 끝으로 홍주영은 고객에게 드릴 선물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윤소현에게 가져다주라고 분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우가 사무실에서 나왔다.“주영아.”그의 부름에 홍주영은 바로 다가갔다.“도련님.”“잠깐 일 보러 나갈 건데 혹시나 회사에 일 있으면 전화해.”“네.”“참, 윤소현 씨 화 좀 풀어드리려고 도련님 명의로 선물을 보냈습니다. 고객에게 드리려고 준비했던 선물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보냈습니다.”유남우의 수석 비서로 홍주영에게는 그럴만한 권력이 있다.하지만 유남우는 그 말을 듣고서 눈빛이 차가워졌다.“앞으로 네가 그 사람에 관해서 어떻게 해결하든 묻지 않을 건데 내 이름 걸고 그 무엇도 하지 마.”순간 홍주영은 어리둥절하기만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네.”...박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878화

    여자아이를 지켜주고자 앞으로 나서는 박민정을 보고서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언짢아했다.“누구시죠? 이 꼬마 우리 정 대표님께서 데리고 가셔도 된다고 보호자인 할아버지께서 이미 동의하셨다고요.”“그쪽이 지금 이 아이를 유괴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증명할 수 있어요?”박민정이 되물었다.여자는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내가 누구 비서인지 알기나 해요? 우리 정 대표님께서 유괴한다고요? 그럴 필요가 있는 분이신 것 같아요?”“그쪽이 누구든 그쪽 대표님이 누구든 제가 알 바 아니에요. 대낮에 거리에서 싫다는 아이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는데 그럼 보고만 있을까요?”박민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이윽고 여자아이를 품에 꼭 안고서 핸드폰을 꺼내 신고하려고 했다.“괜찮아. 경찰에 신고하면 돼.”박민정이 신고하려고 하자 여자는 바로 나서서 그녀를 말렸다.“잠시만요. 신고하지 말아 주세요. 억한 심정으로 그런 건 아니에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여자아이에게 물었다.“어떻게 된 일인지 아줌마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여자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닦으면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랑 길거리에서 꽃을 팔고 있었는데 저 아줌마들이 저를 입양하겠다고 다가왔었어요.”“예쁜 언니, 저 할아버지랑 영원히 같이 살고 싶어요. 저 아줌마랑 가고 싶지 않아요.”여자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참으로 어리석은 아이구나. 네 할아버지 얼마나 가난한지 몰라서 그래? 그렇게 계속 네 할아버지랑 같이 살게 되면 너만 힘들어질 거야. 나중에 어른이 돼서 후회할지도 모른다고.”경제가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있다 보니 돈이 ‘왕’일 때도 많다.여자아이는 바로 여자의 말에 반박했다.“저 어리석지 않아요. 할아버지만 있으면 되고 돈은 필요 없어요.”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여자아이가 터득하지 못하고 있자,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숨만 내쉬었다.두 사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879화

    정수미의 손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여자아이는 정수미의 손 대신 박민정의 손을 꼭 붙잡았다.“예쁜 언니, 저 좀 바래다 주시면 안 돼요? 저 무서워요... 할아버지한테 가고 싶어요.”지금으로서는 박민정이 그녀에게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듯한 심정으로 자신의 손을 잡은 여자아이를 바라보면서 박민정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박민정은 여자아이의 손을 꼭 잡고서 정수미에게 말했다.“정 대표님, 정말로 이 아이를 입양하고 싶으시다면 일단 아이의 생각부터 확인하고 존중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정수미는 얼어붙었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같이 가자. 나도 같이 바래다줄게.”앞장선 여자아이의 뒤를 따라서 좁고 좁은 골목길을 여러 개나 지나서야 아주 평범한 저택 앞에 이르게 되었다.이곳은 도시 중심이라 이치대로라면 여자아이의 생활환경도 조건도 그리 나쁘지 않아야 한다.여자아이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여자아이는 갑자기 박민정의 손을 뿌리치고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 곁으로 달려갔다.“할아버지.”“사랑아.”“할아버지, 저 다른 사람 딸로 살고 싶지 않아요. 평생 할아버지 곁에서 살고 싶어요. 그러니 할아버지도 저 버리지 말아 주세요. 네?”어르신은 단번에 손녀인 사랑이를 꼭 껴안고서 정수미를 바라보았다.“정 대표님, 죄송합니다만 저 사랑이 보내지 못할 것 같아요.:이윽고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네주면서 덧붙였다.“돈은 다시 돌려드릴게요.”사랑이를 정수미에게 입양 보낸다고 마음을 먹고 은행 카드까지 받았었으나 텅텅 비어 버린 집을 보게 된 순간 후회하고 말았다.아내도 아들도 며느리도 모두 잃은 어르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라곤 사랑이 하나뿐이다.사랑이 역시 할아버지가 세상 전부였다.앞으로 사랑이 곁에 얼마 있어 주지 못할 것 같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낫은 집안에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입양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의 ‘이별’을 겪고서 그 마음이 달라졌다.

Latest chapter

  • 죽기 전엔 못 놔줘   재1682화

    그렇더라도 이상하게 이번이랑 지난번이랑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아무 미련없이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자꾸만 머릿속에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이게 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거랑 없는 것 차이일 것이다.오후가 되어서야 박민정은 진서연과 에리가 가짜 연인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그녀의 물음에 진서연이 답했다.“에리 씨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크게 실망하실까 봐요.”“이러다가 나중에 들통나면 오히려 더 불쾌해하실 거야. 그때 가서 했던 말들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고.”“에리 씨가 요 며칠 시간을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여자 친구를 찾겠대요. 그러면 저는 슬쩍 빠지면 되거든요.”“그래.”박민정은 더 이상 말하기도 뭐했다.저녁 퇴근길에 그녀는 정민기의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는데 하마터면 앞에 차를 들이받을 뻔했다.정민기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며 그녀에게 연신 사과했다.“정말 죄송합니다.”여태껏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이런 실수를 범했는데 한눈에 봐도 정민기는 지금 온통 진서연과의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민기 씨, 혹시 서연이랑 무슨 오해가 생긴 건가요?”박민정의 물음에 정민기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아니요.”그가 부정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원래 진서연과 에리 사이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려 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을 보니 정수미 비서인 길연서였다.“여보세요? 무슨 일이시죠?”“둘째 아가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병원에 한 번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실에 실려 왔거든요.”울먹이면서 말하는 비서의 목소리에 박민정도 순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네, 바로 가겠습니다.”정민기는 그길로 박민정을 병원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응급실 복도에서 윤소현이 안정부절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그녀는 어제 정수미와 이모 정주보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81화

    에리는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하늘 아래에 널린 게 남잔데 왜 하필 정민기 씨에요?”그도 정민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보고는 분명 평범한 보디가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에리 씨는 아마 모를 거예요. 저 같은 여자가 그런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건 하늘에 별 따기라는 사실을요.”진서연은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정민기는 마치 드라마 속의 여느 멋진 남주처럼 느껴지면서 더욱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에리는 반지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아니에요. 이건 제가 드리는 위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요.”에리는 항상 씀씀이가 컸고 더구나 아직 여자 친구가 없는 그로서는 반지를 다시 돌려받는다고 해도 줄 사람이 없었다.진서연은 원래 기뻐해야 할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다.“싫어요. 이런 반지는 나중에 진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한테서 받을래요.”에리는 난생처음으로 여자에게 준 선물을 거절당했는데 순간 자신이 저따위 보디가드보다 매력이 없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지금 헤어진 마당에 그냥 제 가짜 여자 친구가 되는 건 어때요? 당연히 이에 따르는 보상도 있고요.”에리는 잠깐 뭔가를 고민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아직 그 사람이 신경 쓰이잖아요. 그러면 정민기 씨도 서연 씨가 신경 쓰이게 저를 이용해서 한번 자극해 보는 건 어때요?”“정민기 씨는 자기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바로 저 같은 대스타랑 연애한다고 생각하면 분명 배 아파할 겁니다.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오잖아요? 많은 여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남자들한테 자신이 매우 인기가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들잖아요.”진서연은 어느새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 그에게 물었다.“그래도 될까요?”“어차피 헤어졌는데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그렇게 두 바보는 이상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민수아가 지나가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어 박민정의 사무실로 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80화

    박민정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왜?”그러자 진서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저도 모르겠어요.”어제 집에 돌아간 뒤, 진서연이 막 자려고 누웠는데 정민기가 갑자기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하여 진서연은 두 사람 사이에 드디어 진전이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건 정민기의 이별 선고였다.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 멍한 상태였다.낮에는 별말이 없었다가 왜 저녁에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이유가 뭔지 물어봤어?”“우리 두 사람은 안 어울린대요.”진서연은 어느새 눈가가 빨개져서는 겨우 말을 이었다.“그러면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안 어울린다고 할까요? 설마 밖에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니겠죠?”“설마.”박민정은 정민기가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왜 그럴까요? 갑자기 저한테 흥미가 떨어졌을까요?”진서연은 박민정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중얼거렸다.“내가 못 생겨서 질렸나?”진서연은 진심으로 정민기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니 자꾸 이상한 생각만 들면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분명 무슨 오해가 있다고 생각해. 일단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기회를 봐서 민기 씨한테 물어볼게.”“네.”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걱정스레 말했다.“혹시 물어보실 때 절대 제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가볍게 원인만 물어봐 주시면 돼요. 네?”비록 헤어졌지만 자존감은 지키고 싶었고 정민기한테 집착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래, 알겠어.”박민정은 먼저 진서연을 회사로 보낸 뒤 곧바로 씻으러 갔다.“민정아, 왜 날 피해?”유남준이 언제부터 화장실 문 어구에 서 있었는지 박민정은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양치하던 물을 삼킬 뻔했다.“설마요. 제가 왜 남준 씨를 피하겠어요?”유남준은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진짜 일부러 피한 게 아니라고?”그가 들어오면서 순간 화장실이 좁아졌는데 박민정은 숨을 한번 깊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9화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진서연은 볼록해진 배와 트림까지 하더니 대뜸 감탄하기 시작했다.“에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랐을 텐데 너무 행복했겠어요.”“서연 씨는 식성이 좋아서 뭐든 다 맛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요?”그녀의 말대로 에리는 어렸을 때부터 산해진미를 먹고 자라서 오늘 요리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그게 복인 줄도 모르고.”진서연은 투덜거리다가 아까 받았던 돈봉투를 에리에게 돌려줬다.“자, 이건 돌려줄게요.”어차피 가짜 여자 친구인데 밥 한 끼 정도는 먹어줄 수 있어도 이 돈은 받을 수 없었다.그러자 에리가 덤덤하게 답했다.“하루 일당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요.”“맛있는 밥도 얻어먹었는데 돈은 당연히 돌려줘야죠.”“제가 그 돈이 아쉬운 사람처럼 보여요?”에리의 물음에 진서연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사람한테는 이깟 돈이 아무것도 아니다.“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요. 고마워요.”비록 봉투 안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께를 만져보니 적지 않은 돈인 것 같은데 문득 출근하는 것보다 수입이 짭짤하다고 생각되었다.“별말씀을요. 저희는 친구잖아요.”에리는 그길로 진서연을 박씨 가문 옛 저택까지 데려다줬다.도착해보니 저택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져 있었다.진서연은 차에서 내린 뒤 에리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그러나 누군가가 어두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진서연은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역시나 5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 있었다.이때 갑자기 봉투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는데 줍고 나서야 그게 커다란 다이아몬드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대박, 너무 예뻐!”진서연은 그들이 여기에 다이아몬드까지 넣어줄 줄은 몰랐다.이렇게 큰 사이즈면 분명 몇천만 원도 넘을 것이다.첫 만남에 500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이런 다이아몬드는 당연히 받을 수 없었다.하여 진서연은 내일 아침 일찍 회사에 가자마자 에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8화

    결국 진서연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들어줬다.그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정민기에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내일 같이 밥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이 시각, 정민기는 문자를 보자마자 혹시나 진서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원래 많이 물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는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애써 참고 메시지에 답장했다.“네.”저녁때쯤, 에리는 진서연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정민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라오던 그의 부하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보스, 오늘 형수님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일 있대.”“헐, 저거 엄청 비싼 차인데!”그의 말에 정민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두 사람은 값비싼 슈퍼 카를 타고 자리를 떴다.부하들은 원래 정민기를 무서워했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보스, 형수님은 왜 갑자기 저런 차를 타고 갈까요?”정민기는 원래 몇십억짜리 자동차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했지만 부하가 대놓고 물어보니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나도 몰라.”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탔다.지금 그가 타고 다는 차는 고작 몇천만짜리였고 길거리에 몰고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안 줄 그런 차였다.그저 박민정의 보디가드로서 너무 좋은 차를 끌고 다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민기가 말없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부하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설마 형수님이랑 다툰 건가?” “아까 그 차는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싼 차일 것 같은데 설마 형수님께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우리 보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어떻게...”“대단하면 뭐 해? 지금 시대는 돈이 제일 쓸모가 있단 걸 몰라?”“하긴 요즘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야.”부하들의 말을 정민기는 차 안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었다.그러나 지금은 퇴근한 박민정을 박씨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7화

    하정철의 황당한 물음에 에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어떻게 연 사장님을 좋아해요?”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얼굴인데 좋아한다고 하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만약 이런 사람이랑 매일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에리의 말에 연지석은 그제야 마음 놓고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어르신, 들으셨죠? 정말 오해라니까요.”하정철은 그제야 묵은 체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직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된 게 있어 다시 에리에게 다가갔다.“그러면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야? 애초에 없는 거 아냐? 만약 없으면 저번에 외삼촌이 소개한 그 여자를 한 번 만나보던지.”여기까지 와서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를 보고 에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마침 진서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에리가 대뜸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이에요.”순간, 문 어구에 서 있던 진서연은 어안이벙벙해졌다.“네?”‘에리 씨가 날 좋아한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자신은 정민기와 사귀는 사이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에리도 외모가 아주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딴마음을 가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저기, 어르신...”진서연이 막 해명하려는데 에리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슬쩍 눈빛을 보냈다.이건 분명 도와달라는 구조신호였다.하여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예의상 하정철에게 말했다.“처음 뵙겠습니다.”하정철은 진서연을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니 얼굴도 귀엽고 예의 바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는데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면에서 크게 안심이 되었다.“아가씨, 이름이 뭐예요?”“진서연이라고 합니다.”하정철 세대의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상이 바로 진서연처럼 귀엽고 순진한 여자일 것이다.“그래요. 오늘 퇴근하면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요. 제가 제 아내한테 말할 테니까 혹시 특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6화

    하정철은 최대한 그가 알아듣기 쉽게 말했으나 연지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저기 어르신, 혹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랑 에리가 왜 거짓말하겠어요?”에리랑은 친구 사이라고도 말 못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함께 말을 맞춰 그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하정철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더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더 알아듣게 말할까요?”순간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두 사람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그의 으름장에도 연지석은 덤덤하게 답했다.“네. 전 괜히 오해를 사기 싫습니다.”그러나 연지석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당신이랑 우리 에리가 지금 사귀는 중인가요?”하정철의 말에 주변은 삽시에 조용해졌고 연지석은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뭐라고요?”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아요. 저랑 에리 엄마도 이미 다 눈치챘으니까. 만약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 거라면 일찍이 말해주지, 굳이 이렇게까지 늙은이들을 마음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요!”하정철의 호소에도 연지석은 여전히 이게 무슨 말인지 상황판단이 안 섰다.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소문까지는 견딜 수 있어도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리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어떻게 게이란 말인가? 그것도 한때의 라이벌인 사람과?“오해입니다. 저랑 에리는 그저 동료일 뿐,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연지석은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게 되었다.사람 중에서 구경하던 진서연은 갑작스러운 일의 전개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박, 설마 진짜야?’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연지석은 어쩔 수 없이 하정철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일단 제 사무실로 가시죠.”“인정하는 건가요? 그래서 창피해서 이러는 거죠?”하정철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계속 캐물었지만 연지석은 대답할 가치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5화

    “내일 회사에 가서 그 여자가 누구인지 한번 봐야겠어.”에리의 아버지 하정철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하자 조미연도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우리 아들이 나쁜 길로 빠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사실 그녀도 에리가 진짜로 남자를 좋아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오히려 돌싱에 아이도 있는 여자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이튿날 아침.박민정이 회사로 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고 설인하의 모습도 보였다.“인하 씨, 무슨 일이에요?”“에리 씨 아버님께서 오셨는데 에리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네?”박민정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제 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혹시 인하 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박민정의 물음에 설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야 당연히 모르죠. 회사에 이렇게 많은 인플루언서며 예쁜 여배우들이 있는데 에리는 다 싫대요. 눈이 아주 높은가 봐요.”“그럼 에리랑 아주 친한 사람이겠네요?”아마 그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혼기가 찬 에리가 걱정되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또한 신경외과 전문의의인데도 이렇게 회사까지 직접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면 분명 에리의 아버지도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설인하는 에리가 평소에도 자주 교류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사람들을 다 제외한다면...그녀의 얼굴이 순간 돌변하더니 박민정에게 물었다.“에리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 연 사장님은 아니겠죠?”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처럼 아마 에리는 연지석을 좋아해서 그와 자주 트러블이 생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네?”박민정은 순간 깜짝 놀랐다.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연지석과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보통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괜히 그 사람한테 장난치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어진다.“설마 진짜일까요?”박민정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뭐가?”이때 연지석이 언제 왔는지 문 앞에서 두 사람을 가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674화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