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찬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결을 지키지 못한다는 생각만 들었다.얼마 후 그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자기 방으로 가서 쉬었다....한편, 고씨 저택.경호원은 유남준에게 박민정이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공관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했다.그리고 그의 심드렁한 모습은 이지원과 고영란의 눈에 그대로 비쳤다.“지원아, 너 오늘 어렵게 온 건데 그냥 여기서 자고 가. 내일 우리 남편도 돌아올 거야. 널 만나고 싶어 하셔.”유명준은 사랑꾼 탕아로 쉰 살이 넘었건만 정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며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이지원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유남준은 그녀들 사이의 대화에 무관심했고 아무렇게나 음식을 먹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을 떠났다.“어디 가니, 남준아?”고영란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집 갑니다.”그녀는 더욱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거긴 남준이가 예전에 결혼한 뒤 박민정과 함께 살던 곳인데 무슨 집 이긴 집이야?’“오늘은 여기 머물러 있어라. 내일 네 아버지가 돌아올 테니, 너와 지원이의 혼사도 상의해보자꾸나.”‘혼사?’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저 아직 이혼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혼사에요?”그러자 고영란은 갑자기 마음 한쪽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한쪽에 있는 이지원은 안색이 변하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쥔 손이 저절로 조여졌다.‘박민정이 죽은 지가 언젠데, 이혼하고 말고가 그렇게 중요한가?’이윽고 유남준이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고 이지원이 그의 뒤를 따랐다.“오빠!”유남준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이지원은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오빠, 내가 뭐 잘못했어요? 왜 지금까지도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거예요? 오빠가 박민정이랑 결혼한 후로 지금까지 나 8년 동안 오빠 기다렸어요.”이지원은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내가 오빠한테 어울리지 않을까 봐 줄곧 노력해 왔고, 어렵게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건데... 이제야 감히 오빠한테 다가갈 수
「호산 그룹 CEO, 고씨 가문의 가장 젊고 유능한 후계자...」박예찬은 곧 호산 그룹, 즉 유앤케이 그룹 본사 건물을 찾아 묵묵히 위치를 적었다.곧 또 하나의 새로운 소식이 보였다.「이지원이 호산 그룹 대표와 함께 집으로 가 부모님을 뵀다. 아마도 그녀는 재벌가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박예찬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윽고 그는 즉시 이지원의 자료를 뒤지러 갔다.다크웹에서 그는 이지원에 대한 많은 폭로를 발견했는데, 하나하나가 매우 경이로웠다.그것들을 보는 박예찬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나쁜 아빠! 어떻게 이런 쓰레기 같은 여자랑 눈이 맞을 수 있어?! 정말 창피해!’박예찬은 원래 이것들을 전부 공개해보려고 했지만 생각을 해보니 이건 ‘쓰레기 같은 아빠’를 너무 쉽게 곤란하게 하는 거라 생각되었다.‘이런 여자는 끝까지 남아서 아빠로 하여금 스스로 애초의 잘못을 뉘우치게 해야 해.’...다음 날.조하랑은 이번에 돌아와 일을 찾았다.조씨 가문의 세상 둘도 없는 보배딸로서 그녀의 아버지는 조하랑에게 돌아와 지사를 관리하고 자신을 단련하라고 하셨다.그래서 그녀는 자주 별장에 와 살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그곳에는 가정부가 있었다.또 박예찬은 어른 같은 아이라 거두기도 매우 쉬웠다.“민정아, 예찬이 말 잘 들어. 지금도 자기 방에서 쿨쿨 자고 있는걸?”조하랑은 씻으면서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럼 다행이네. 에스토니아에 있을 때 내가 예찬이를 학교에 보내려고 했는데 윤우 일 때문에 늦어졌어. 그래서 나도 유치원을 찾을 생각이야.”“응?! 유치원?!”조하랑은 손을 멈칫했다.‘이런 똑똑한 애가 유치원에 가면 그곳에 있는 어린애들한테 엄청난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예찬이는 사람들을 좋아해서 다른 애들을 괴롭히지는 않을 거야. 또 아주 잘생겼으니까 유치원 다른 남자애들 체면도 서지 않을 것이고.’“왜 그래?”박민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니야, 나한테 맡기면 돼. 내가 아는 국제 유치원
그때 김훈의 전화가 걸려왔다.“이 자식! 너는 외롭게 늙어 죽을 작정이야?! 누가 너더러 맞선 상대를 그냥 날려버리라고 했어?! 간땡이가 부었어?!”노인은 잔뜩 화나 보였다.“할아버지, 저는 지금 바빠요.”“바빠?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밖에 나가서 날마다 그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전혀 진취적이지 않다는 거?”김훈은 끝내 인내심을 잃었다.“지금 당장 나한테 와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모든 길을 끊어버릴 테니까!” 그렇게 김인우는 어쩔 수 없이 우선 돌아갈 수밖에 없다.호산 그룹.박민정은 회사에 온 후 곧장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유남준의 전담비서인 서다희는 세련된 차림새와 요염함을 잃지 않은 박민정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게 되었다.서다희는 아직도 옛날 박민정이 치장하기 싫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그녀는 매일 어두운 색조의 옷을 입으며 볼품없이 보여 전혀 고귀한 사람 같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눈앞의 여인은 아름답고 눈에 띌 뿐만 아니라 온몸에 고귀한 기품과 매력이 배어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민정 씨, 무슨 일 있어요?”박민정이 냉담하게 말했다.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온 얼굴에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은 오늘 매우 바쁘셔서 아마 민정 씨를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서다희는 그대로였다.그는 원래 그녀에게 별로 호감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박민정을 데리고 유남준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박민정은 하도 서다희에게 문전박대를 많이 당해서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그녀는 올라오기 직전, 이미 유남준의 일정에 대해 알아보았고 오늘은 중요한 회의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아, 그래요? 그럼 대표님께 말씀하세요. 저희의 협력도 여기서 끝내자고요.”이윽고 말을 마친 박민정이 떠나려 하자 과연 서다희가 태도를 바꿨다.“민정 씨, 잠시만요. 그럼 대표님께 한 번 여쭤볼게요.”그러다 그들은 비서 사무실을 지나게 되었다.이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일해 온 몇 명의 비서들은 하나같이
그의 눈빛에는 박민정이 읽을 수 없는 기분이 가득했다.“5년도 안 됐는데,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이 나서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어? 연지석이 준거야?”박민정은 그녀가 떠난 후로 유남준이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요 며칠, 유남준은 더욱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박민정과 연지석이 함께 있는 그림들로 가득했다.“지석이랑은 그냥 친구입니다. 제 돈은 전부 제가 직접 벌어들인 거고요...”박민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은 큰 손바닥을 그녀의 어깨에 떨어뜨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어떻게 벌었는데? 이걸로?”박민정의 머릿속에는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유남준을 쳐다보았다.“뭐라고 하셨어요?”그의 손은 매우 뜨거웠지만 내뱉은 말은 오히려 그렇게 냉혹했다.박민정은 말문이 막혀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세게 쥔 탓인지 손톱은 당장이라도 손바닥 안을 뚫고 들어갈 지경이었다.유남준은 그녀의 귀가에 몸을 숙이고 말했다.“연지석이 얼마를 줬는지 말해. 나는 두 배로 줄 테니까!”유남준은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박민정을 영원히 품속에 가두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다.“아직도 너희 가족이 나한테 얼마를 빚졌는지 기억해? 이제 더 원하지 않겠어. 그냥 액수만 말해. 나랑 이런 장난 치지 말고. 성실하게 말하면 내가 전부 다 줄게!”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민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뺨을 호되게 갈겼다.“이 개자식!”유남준의 수려한 얼굴이 화끈거렸다.다만 아프지도 않은 지 그는 오히려 박민정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말해! 얼마를 원하냐고!”박민정은 자신이 잘못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지만 자신이 한 번도 그를 알아가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그저 줄곧 유남준이 결벽증이고 꽃 도령이며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다고 여겼다.그러나 이제야 그녀는
갑작스러운 이지원의 방문에 조금 전의 뜨거웠던 분위기가 금세 사그라들었다.그래서 유남준은 다시 박민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러자 박민정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이러한 행동은 유남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예전엔 박민정이 먼저 다가왔지만 지금은 모든 게 변했다.“대표님, 저랑 나눌 일 얘기라는 게 뭐죠?알 수 없는 표정의 유남준, 그리고 지난번의 실패에 직면하여 박민정은 그 일을 서서히 그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유남준은 침울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어쩐지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일을 숨기고 있다고 느껴졌다.“자선활동 좋아한다며? 내일 와. 데리고 갈 데가 있으니까.”박민정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는지라 그 제안을 승낙한 후 몸을 돌려 떠났다.문을 밀어 열자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는 이지원을 발견했다. 이지원은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바로 그녀를 가로막았는데, 눈 밑에는 온통 박민정에 대한 관심뿐이었다.“민정 씨, 정말 살아있었네요. 잘됐어요. 우리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이지원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그쪽은...”이지원은 어리둥절해 했다.“저 몰라요?”박민정은 그녀에게 딱히 더 설명하지 않았다.“저희 친한가요? 저는 별로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요.”말을 끝낸 박민정은 바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그렇게 자리에 남겨진 이지원은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윽고 그녀는 몸을 돌려 유남준의 사무실로 갔고 그는 이지원이 온 것을 보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늘 뉴스에 대해 설명드리러 왔어요. 몰카에 찍힐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기자가 또 인터넷에까지...”오늘 아침, 비서는 유남준에게 인터넷 뉴스에 대해 알려주었다.그가 이지원을 집으로 데려가 부모님을 뵈었는데, 이는 두 사람이 결혼하기 위해서라는 뉴스를 말이다.그럼에도 유남준은 홍보팀에 처리를 맡기지 않았다. 주로는 박민정이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기 위해서였는데 오늘 보니 그녀는 딱히 별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민정 씨, 내가 충고하는데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못 본 척을 하든 못 들은 척을 하든 기억상실을 했다 해도 남준 오빠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박민정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듣고 있었다.“다 말했나요?”이지원의 어안이 벙벙해하는 모습에 박민정은 일어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그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확신하면서 이민정 대스타님께서는 왜 원한이 가득한 얼굴로 저를 찾아왔을까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냉소를 흘리고는 자리를 떠났다.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지원은 예전의 도도하던 박씨 가문 아가씨일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박씨 가문의 후원을 받기 위해 박민정에게 잘 보이려 애쓰던 일을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지금 박씨 가문은 이미 몰락했는데도 박민정은 뭘 믿고 아직도 이렇게 도도한 척한단 말인가? 이지원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때 매니저 윤재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원 씨, 전에 가지고 싶다던 곡 말인데요, 희망이 보여요.”“정말?”“다만...”매니저가 조금 머뭇거리자, 이지원이 말했다.“뭐가 문제야? 말해 봐.”“민 선생이 해외의 마이너 플랫폼에 올린 곡이 하나 있는데 아직 저작권을 신청하지 않았어요. 제가 이 곡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분명 히트할 거예요. 우리가 조금만 편곡하면 돼요...” 매니저의 말은 그냥 표절하자는 뜻이었고 이지원은 물론 알아들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말했다.“저작권이 없다면 그 사람의 작품이라 할 수 없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이지원의 동의를 구한 매니저는 그제야 마음 놓고 작업에 들어갔다.한편 전화를 끊은 이지원은 어떻게 박민정을 상대할지 고민했다....박민정은 집으로 가지 않고 예전에 살던 하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박민정의 어머니 한수민과 동생 박민호는 하씨 가문을 말아먹은 뒤 저택까지 저당 잡혔고 그곳에는 지금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박민정은 죽음으로 위
“난 왜 본 적이 없지?”그러자 박예찬이 입을 열었다.“민기 아저씨의 신분은 아주 비밀스러워 엄마가 위험에 처하지 않은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아.”“그래서 해외에 있었을 때도 주변에 보디가드가 있단 말만 들었지, 본 적이 없었구나.”조하랑은 찹쌀떡을 먹으며 말했다. 그녀의 곁에도 전문 경호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몸을 숨기지 않고 항상 그녀와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어 한눈에 찾아볼 수 있었다.연지석은 해외에서의 신분이 특수해 그의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경호원을 보내 박민정의 가족을 지키게 했다. 십분 후, 정민기가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꼿꼿한 정장 차림으로 다른 사람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조하랑은 그를 보자마자 두 눈이 반짝거렸다.“미남이시네...”박예찬은 센스 있게 그녀에게 티슈를 건네줬다.“입 좀 닦아, 이모.”조하랑은 침을 꿀꺽 삼켰다.박민정은 자기 절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얼빠였지만 마음속 깊이 숨겨둔 사람이 있었다. 그 남자를 위해 조하랑은 27살이 될 때까지 결혼은 물론 연애도 해보지 못했다.“들어와요. 이분은 제 친구 조하랑이예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박민정의 말에 정민기는 방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이때 박예찬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말했다.“아저씨, 내일이면 단오잖아요. 들어와서 찹쌀떡 드세요.”정민기의 차갑고 딱딱한 얼굴선이 한결 부드러워졌다.“괜찮아, 고마워.”박민정은 그가 혼자 있기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찹쌀떡을 조금 담아서 그에게 건네줬다.“미리 명절 축하드려요.”“네, 고마워요.”정민기는 찹쌀떡을 받고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그가 떠나간 후 조하랑은 궁금해서 물었다.“이 자식 왠지 느낌상 보디가드 같지 않은데?”“무슨 뜻이야?”“뭐랄까... 딱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느낌이 그래...”정민기가 박민정에게 주는 느낌도 보통 경호원이랑은 차이가 있었다.비록 정민기가 박민정을
박예찬은 박민정이 힘들게 자신을 돌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아무리 연지석이 괜찮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주변은 너무 위험하므로 박예찬은 엄마가 안전한 남자 곁에 있기를 바랐다.조하랑은 박예찬이 이런 궁리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녀도 옆에서 거들었다.“우리 아빠는 비록 내가 비즈니스 관계의 결혼을 하길 바라지만 소개해 준 재벌집 자제들은 다 괜찮게 생겼어.”박민정은 두 사람의 말에 당해내지 못하고 박예찬을 바라보며 말했다.“좋아.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랑이 이모를 대신해서 나가는 것뿐이지, 너에게 아빠를 찾아 주려고 나가는 건 아니야.”“알았어.”박예찬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TV에서 방영하던 로맨스 드라마를 떠올렸다. 사랑은 보통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며 이런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야말로 가장 쉽게 사랑이 싹틀 수 있었다. 박예찬과 박윤우는 아직 너무 어려서 엄마를 지킬 힘이 없었고 만약 국내에 있는 동안 괜찮은 남자를 찾아 엄마를 보살피게 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박민정은 이런 박예찬의 속궁리를 알 길이 없었다.밤이 되자 박예찬을 다독여 재운 뒤 박민정은 조하랑과 앉아서 대화를 나눴다. “너 내일 강연우를 찾으러 가려고?”조하랑은 부정하지 않았다.“그래,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는데 내일 본가로 돌아온대. 민정아, 나 대신 선 자리에 나가줘서 고마워. 만약 이번 일로 강연우를 만나지 못한다면 난 아마 평생 후회할 거야.”박민정은 그녀를 안아줬다.“우리 사이에 굳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조하랑은 약간 목이 메어왔다.“너와 유남준은 지금 어떻게 돼가고 있어?”“그냥 그대로지 뭐...”그 말을 듣고 조하랑은 박민정을 꼭 끌어안았다.“하랑아, 나 갑자기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빚을 지는 거라는 말이 정말 맞다고 느껴져.”박민정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너와 강연우는 서로 사랑하니까. 꼭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야.”조하랑을 위로하고 박민정은 쉬러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유남우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윤소현을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해 줬는데 이런 모습을 일부러 박민정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홍주영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홍주영과 박민정 두 사람은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거부 반응은 없는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박민정과 조하랑도 그곳에 한참 동안 머물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은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그녀는 원래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오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유다혜를 본 뒤로는 이상하게 망설여지기 시작했다.모든 아이한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괜히 그 기회를 마음대로 저버리는 게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김인우 씨가 혹시나 아이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지?’“민정아, 내가 임신한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해줘. 특히 인우 씨한테.”박민정은 왜 그래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먼저 조하랑을 데려다준 뒤 박민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에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민정아, 아까 급하게 나가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일 아니야. 그저 하랑이 만나고 왔어.”“그럼 됐어.”그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만 에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민정아, 저번에 그 뉴스 기사 봤어?”‘기사?’순간 저번에 최현아가 에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에리가 다급하게 해명하기 시작했다.“민정아, 난 극히 정상적인 남자야. 절대 게이가 아니니까 믿어줘.”그의 말에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래. 믿을게.”박민정이 웃자 에리
“민정아, 하랑 씨.”다름 아닌 정수미와 윤소현이었는데 그중 정수미는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민정아, 병원에는 웬일이야? 어디 아픈 거야?”이때 조하랑이 갑자기 일부러 기침하더니 박민정 대신 답했다.“콜록! 콜록! 제가 감기 걸려서 민정이랑 같이 왔어요.”그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의사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네줬다.“조하랑 환자분, 임신 보고서를 두고 가셨어요.”순간 조하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탄로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민정은 재빨리 일어나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조하랑도 멋쩍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왔던 김에 산부인과에도 와봤어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활짝 웃었다.“축하해요.”“감사합니다.”그러나 조하랑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윤소현은 김씨 가문의 후계자를 임신했다는 소리에 또다시 질투심이 마구 불타올랐다.이렇게 되면 김씨 가문에서 조하랑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볼 수 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신분이나 지위, 외모 면에서 조하랑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밀려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유남우와 홍주영 두 사람도 손에 한 무더기 결과서를 갖고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박민정 손에 들린 검사 보고서를 본 순간 표정이 변했다.‘임신 보고서인가?’‘또 임신했다고?’유남우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윤소현이 빠르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남우 씨, 우리 다혜는 어떻게 됐어요?”“방금 수술이 끝나서 이제 회복 결과를 지켜봐야지.”윤소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유남우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만약 우리 다혜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 그러면 저도 그냥 죽어버릴래요.”유남우는 그녀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애써 참고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야.”“너무 무섭지만 남우 씨가 제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윤
박민정은 왠지 조급하게 들리는 조하랑의 목소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답했다.“그래.”한 시간 뒤, 어느 작은 내과 병원.박민정은 허름한 병원 외부와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조하랑에게 의아해서 물었다.“하랑아,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조하랑은 그녀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그리고 주머니에서 마스크 두 장을 꺼내더니 하나는 박민정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었다.“민정아, 나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서 검사해 봐야겠어.”“뭐?”박민정은 진짜 큰 일인 줄 알고 가슴을 졸였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런 건 먼저 테스트기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나?’조하랑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해명했다.“임테기도 다 정확한 건 아니잖아. 무조건 병원에 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그렇지만 꼭 이런 곳에서 검사해야 해?”박민정은 이곳의 위생 상태가 너무 걱정되었다.그러나 진주시의 크고 작은 병원들은 거의 다 김씨 가문 산업이다 보니 조하랑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혹시나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김인우랑 김훈한테 해명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가자. 걱정하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더러운 의료 기기들을 보고는 기겁하더니 빠르게 뛰쳐나왔다.“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자.”두 사람은 다시 짐을 싸서 결국에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소변 검사와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조하랑은 검사 보고서에 임신 4주 차라는 글씨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해 났다.“어떻게 4주가 되는 거예요?”“마지막 생리 주기를 계산해 본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조하랑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좋은 일인데 인우 씨한테 빨리 알려줘.”그러나 조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아니, 절대 안 돼.”자신도 아직 받아 들을 준비가 안
정수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의사한테 자신이 사인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멀리서부터 유남우가 다가와 그들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소현은 유남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눈물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남우 씨, 우리 다혜가 혈액암이래요. 그래서 다른 피를 수혈받아야 한다는데 그래도 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대요. 저희 이제 어떡하죠?”유남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수혈부터 진행하자고 해.”윤소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사인했다.그러나 정수미는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분명 이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유남우의 원인이 크다는 걸 윤소현도 알 텐데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렇게 그들은 밤새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새벽 때쯤, 홍주영도 전문의들을 데리고 달려왔다.그리고 어린아이가 고생하고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도련님, 다혜는 괜찮나요?”홍주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유남우는 문득 어제 하민재와 그녀가 같이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도 아직 몰라. 지금 수술 중이야.”홍주영은 수술실 쪽을 바라보면서 애써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그러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소현은 그녀의 모습이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되었다.“홍 비서님, 다혜는 제 딸인데 왜 비서님이 난리예요?”그녀의 날카로운 말투에 홍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때 유남우가 고개를 돌리고 윤소현에게 물었다.“다혜가 자기 딸인 걸 아는 사람이 왜 지금 하나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그는 원래 이 계기로 윤소현에게도 만약 아이한테 사고가 일어나게 되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윤소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이 일은 점점 크게 번져 어느새 김씨 가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김인우는 유다혜가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는
“연애해 본 적 없다면서요?”하민재는 다소 의아했다.도대체 자신이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게 뭐란 말인가?홍주영은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네, 연애는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짝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하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렇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럼 왜 고백하지 않았어요?” 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홍주영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그 사람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좋아하지 않거든요.”“그럼 둘이 이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거네요?”하민재가 다시 한번 확인하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헤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난 신경 안 써.”짝사랑이라면 아무 문제없었다.하민재는 자신만만했다. 연애 경험 없는 홍주영쯤이야 얼마든지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홍주영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민재가 가로막았다.“하지만은 무슨. 이제 이 얘긴 그만해요. 연애에 공평함 같은 게 어디 있어요? 난 주영 씨 마음속에 누군가 있는 걸 개의치 않으니까 주영 씨도 내 과거에 신경 쓰지 않으면 돼요.”하민재의 단호한 태도에 홍주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좋아요, 약속할게요.”“네.”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하민재의 할머니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어떻게 됐어?”“뭐가요?”하민재가 되묻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랑 주영이 말이다. 주영이 같은 아이, 꼭 소중히 여겨야 한다. 부잣집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아이야.”하민재의 할머니는 함부로 연을 맺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홍주영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었다. 홍주영은 비록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그녀는 가문 사업에는 별 관심 없는 손자가 이런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하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하민재가 아니라 유남우였다.홍주영은 순간 얼어붙었다.“도련님? 어떻게 오셨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유남우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별일 아니야. 네가 연락도 없고 전화도 안 받아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해서 와봤어.”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거짓말을 했다.홍주영은 황급히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유남우가 여러 번 전화와 문자를 보냈다는 걸 확인했다.“죄송해요. 오늘 오후 바빠서 폰을 무음으로 해뒀거든요. 그래서 확인을 못 했어요.”유남우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낯선 컵이 눈에 들어왔다.“누가 왔었어?”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묻자 홍주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오늘 남자 친구 가족을 만나고 왔어요.”‘남자 친구 가족...? 벌써 부모님을 만난 건가?’“언제 그렇게 됐어? 상대는 누구야?”유남우는 모르는 척 물었고 이 말에 홍주영은 주먹을 살며시 쥐었다.“...하민재 씨예요.”‘역시, 그놈이었군.’유남우는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애써 감췄다.“그때는 사귈 생각 없다고 하지 않았나?”“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생겼어요.”홍주영은 손바닥을 꼭 쥐었다. 어쩐지 유남우 앞에서는 괜스레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더 이상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얼른 주방으로 가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도련님 오늘 저한테 왜 연락하신 거예요?”“별건 아니고, 전에 고 대표 건 홍 비서가 맡았지? 그 계약서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되더라. 나중에 혼자 찾았어.”“아... 찾으셨군요. 죄송해요. 앞으로는 업무에 지장 없도록 할게요.”유남우는 그녀가 내민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물맛이 입안 가득 퍼졌지만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괜찮아. 이제는 홍 비서 일도 중요하니까. 홍 비서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니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됐겠지.”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차 안에 앉아 있던 유남우는 여전히 홍주영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고 그는 무심코 넥타이를 당겼다.또다시 10분이 지나도록 메시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온 건 차가운 자동 응답음뿐이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가슴 한구석이 더 답답해졌다. 그는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한쪽으로 던지며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운전해.”운전기사가 물었다.“어디로 모실까요?”“모르겠어. 그냥 아무 데나 가.”“네.”차는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고 창밖으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한편, 홍주영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씨 가문의 할머니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하민재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하민재는 벌써 그녀를 미래의 아내로 여기고 있었다.“어때요? 불편한 점은 있어요?”홍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없어요. 할머니도 너무 좋으시고 아버님과 어머님도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그때 하민재가 갑자기 등 뒤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자, 받아요.”“이게 뭐예요?”홍주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하민재는 그녀의 손에 상자를 쥐여 주었다.“열어봐요. 우리 부모님께서 주영 씨에게 주시는 첫 선물이에요.”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고풍스러운 장신구 세트가 들어 있었다.아니, 단순한 ‘고풍'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전통 예물이었다.하민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리 부모님께서 주영 씨를 인정하신 거예요. 이건 우리 집안의 며느리만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홍주영은 너무 놀라 얼른 상자를 다시 그의 손에 돌려주었다.“이건 너무 귀한 거라 받을 수 없어요.”“왜 못 받아요? 어차피 우린 결혼할 사이인데.”‘결혼'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망설였다.“결혼하고 나서 받아도 늦지 않잖아요. 아직은 너무 일러요.”결혼 이야기가 나온 이상, 섣불리 받을 수 없었다. 만약 나중에
“저는 남준 씨가 동서를 못마땅해하던 시절도 지켜봤어요. 그 삼 년 동안 동서는 정말 처참했죠. 아무도 동서를 사모님으로 대우하지 않았어요.” 최현아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빨리 변하다니. 나는 동서가 영영 남준 씨랑 화해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동서는 정말 너그럽네요.”유남우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으나 최현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도련님께서 돌아오기 전에 전 이미 동서한테 사람을 잘못 알아봤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동서는 그때 이미 남준 씨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유남우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거니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요.”최현아는 입을 다물었다.유남우는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서 걸어갔고 최현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유남우는 유남준이 잘되는 꼴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두 형제가 어떻게 싸울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유남우는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는 홍주영이 조수석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가 타자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도련님.”“응, 회사로 가자.”“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핸드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그녀는 확인하지 않았고 유남우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왜 메시지를 안 봐?”홍주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개인적인 메시지라 굳이 볼 필요 없어요.”그녀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건 하민재였다. 둘은 이제 화해하고 교제하기로 했는데 하민재는 예상외로 틈만 나면 연락을 해왔다.“괜찮아. 지금 업무 시간도 아닌데.” 유남우는 부드럽게 말했다.“네.”홍주영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어 하민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그는 오늘 오후에 그녀를 하씨 가문에 초대했다. 할머니가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홍주영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유남우에게 말했다. “도련님, 오늘 오후에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요.”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
그가 고개를 숙이며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박민정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박민정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리며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을 손으로 가렸다. 덕분에 그의 입술은 그녀의 손등에 살짝 닿고 말았다.둘의 시선이 엉키며 공기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유남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치우려 하자 박민정은 급히 외쳤다.“안 돼요!”그녀의 반응에 유남준의 동작이 멈췄다.“저... 저 갑자기 기억이 난 것 같아요.”유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정말?”“네! 어제, 아마도 음료에 술이 조금 섞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미안해요.” 박민정은 얼굴이 불타오를 듯이 새빨개졌으나 유남준은 오히려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당연한 거야. 너도 결국 참지 못한 거잖아.”“뭐라고요?” 박민정은 순간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뭘 참지 못했다고요?”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 이제 그만. 일어나자. 예찬이랑 윤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박민정은 아이들이 밤새 자신을 찾아다니다 놀랐을 걸 생각하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유남준은 그녀를 놓아주며 말했다.“좋아. 아침 먹고 바로 돌아가자.”그의 기분은 오늘따라 유난히 좋아 보였다. 돌아가는 길 내내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반면, 박민정은 그의 곁에 앉아 잔뜩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 이미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을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도대체 왜 참지 못한 거지?'유남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고 박민정은 깜짝 놀라며 손을 빼려 했다.“괜찮아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하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이건 걷는 문제랑 상관없어.”박민정은 그의 아내였다. 그는 그녀가 항상 그의 시야 안에 머물도록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유남준이 어제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어제, 최현아가 너한테 뭘 하지 않았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