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지는 숨이 턱 막혔다. 그 착한 성혜인더러 감정이 없다니...성씨 가문에서 아무리 가혹하게 대해도 복수조차 생각해 본 적 없는 아이, 서천의 사람들이 아무리 모질게 대해도 그저 인연을 끊는 것으로 마무리한 아이, 겉보기에는 냉정해 보여도 실제로는 가장 여리고 따뜻한 아이가 바로 성혜인이다. 반승제는 그런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한 침대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 지금 이런 못된 말을 내뱉고 있다.강민지는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자신이 성혜인에게 한 경고가 옳았다.강민지는 뒤로 물러서서 반승제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흘러내린 눈물을 의연하게 소매로 닦았다. 그러고는 사고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현장은 어수선했고 경찰들이 도착해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앞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어수선하게 차가 언제쯤 다닐 수 있느냐 물어보기에 바빴다.강민지가 차량 앞으로 달려갔을 때 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고 달려온 경찰들은 현장을 에워싸고 소방차를 위한 길을 터주고 있었다.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2차 폭발의 위험이 있었다.맥없이 서 있던 강민지는 아직 불타고 있는 차를 보고는 혼절할 뻔했다.화가 나고 걱정될수록 그녀는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 혜인이를 포기한 반승제가 사무치게 증오스러웠다.혜인이의 좋아하는 마음을 이렇게까지 짓밟을 수도 있다니.20분 뒤 소방차가 도착해 불을 껐고 폭발 위험이 사라진 뒤에야 경찰이 차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강민지도 서둘러 경찰을 따라 앞으로 나가 살폈다.“안에 사체는 없는 거로 보아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중도에 내린 것 같습니다.”강민지가 입을 가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경찰이 그녀의 곁에 다가와 말을 덧붙였다.“제가 경찰관을 시켜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중도에 내린 거라면 반드시 흔적이 있을 겁니다.”강민지는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그가 하이힐을 신은 채 경찰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경찰들이 길을 수색한 결과
성혜인이 고개를 떨구었다. 굴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아예 차단당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강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알 수 없는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민지는 깜짝 놀라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당장 갈 테니까 얼른 주소 보내!”성혜인은 여학생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쉰 목소리로 인사했다.“고마워요.”전화기 너머 남자의 반응을 모두 들은 여학생이 얼른 위로했다.“아까 그 사람이 혹시 남편이에요? 임신까지 한 몸인데, 진짜 쓰레기네요. 돌아가면 이혼부터 해요. 저런 남자한텐 시집 가면 안 돼요!”성혜인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사실 이미 이혼했어. 그 사람은 내 전남편이고.성혜인은 말없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귓가에 중년 남자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인제 그만 가자. 빚쟁이들 진짜 따라 오겠어.”여학생이 성혜인을 힐끗 보더니 조심스레 어깨를 토닥였다.“돌아가면 꼭 이혼해요. 이렇게 힘들 때 기댈 수 없는 사람은 결국 가정을 망치게 돼요. 우리 아빠처럼 도박하고 바람이나 피우고. 빚쟁이들 때문에 우리 엄마가 죽음으로 내몰렸는데 아빠는 돈 훔쳐서 내연녀랑 도망갔어요. 언니, 언니는 예쁘니까 절대 남자 하나 때문에 인생 망치지 마요.”고작 열몇 살 난 아이가 이런 말을 한다.성혜인은 조금 놀랐지만 아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래. 꼭 기억할게. 너도 나중에 크면 남자보다 커리어에 더 신경 써야 해.”여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보고 있던 중년 남자는 그들의 대화에 가슴이 아팠지만 얼른 아이를 잡아당겼다.“이제 가자. 그 사람들이 정말 찾으러 오기 전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성혜인이 혼자 이곳에 있을 것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언니, 가족이 곧 도착할 것 같으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요.”성혜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녀에게 휴대폰이 있었다면 당장에서 아이에게 돈을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로부터 돈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하지만 자신은 임신한 언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 삼촌까지 다치게 했다.남자가 한숨을 쉬며 아이의 볼을 어루만졌다.“괜찮아. 괜찮으니까 울지마...”그러나 아이는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몇몇 건달들이 마음 아픈 장면을 보기 싫어 바로 여자아이를 잡아 데려가려 했지만 삼촌이라는 사람이 아이의 손을 잡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는 손을 놓기라도 하면 여자아이가 정말로 어딘가 팔려 갈까 봐 겁이 났다.“삼촌, 놔줘요.”여자애는 심지어 그에게 부탁하고 있었다.건달들도 경찰이 올까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그들이 야구방망이로 남자의 팔을 부러뜨리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위기일발의 순간, 성혜인이 저 멀리서 외쳤다.“빚진 돈이 얼만데요? 제가 대신 갚을게요.”그녀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천천히 걸어왔다.건달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눈을 돌렸다가, 그녀의 비대한 몸을 보고 다시 험악한 얼굴을 했다.“이 여자가 정말. 여기서 진료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무려 10억이야. 네가 어떻게 그걸 갚을 수 있겠어?”성혜인이 배 위에 붙였던 인공피부를 떼어냈다. 배가 다시 원래의 모양을 되찾았지만 몸은 여전히 뚱뚱한 모습이다.그녀가 천천히 여자아이 곁으로 걸어가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10억이라고요? 제가 갚아드리죠. 이 아이 열 명을 팔아도 갚지 못한다고요. 그럼 차라리 제가 갚는 것이 그 쪽한테 훨씬 이득이지 않겠어요? 지금 제 친구가 오고 있어요. 친구가 오면 바로 수표 써드리죠.”“뚱녀야, 네가 우릴 속이는 거면 어쩔 건데? 몰래 경찰에 신고한 거면?”“그럼 경찰이 오면 절 인질로 잡으세요.”그녀가 담담하게 말하더니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중년 남자를 응시했다.그의 머리에선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성혜인이 여학생에게 말했다.“일단 네 삼촌 진료소로 데려가. 처치 좀 하게.”여학생이 성혜인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불러있던 그녀의 배가 갑자기 날씬
그 자리에 남겨진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여자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삼촌. 저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죠? 이거 10억이에요? 천 원이나 만 원이 아니라 10억이란 말이에요?”중년남자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지 두 볼이 상기되더니 이내 여자아이를 꽉 껴안았다.“장하다, 장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느님이 널 구원해 주시러 온 거야!”이 말을 하던 그는 다 큰 남자답지 않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옆에 있던 의사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저도 몇 년 동안 이 보건소에서 일하면서도 그렇게 큰돈은 못 벌어봤는데, 정말 운이 좋은 분들이시네요.”“삼촌, 10억은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거예요.”“바보야, 너더러 갚으란 말도 안 했는데 그런 걱정을 왜 해. 넌 좋은 아이고 저분도 좋은 사람인 거야. 그러니까 이제 만나게 되면 정말 고맙다고 전해주면 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여자아이는 머리를 끄덕이며 성혜인이 떠난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귓가에 울려 퍼지는 그의 흐느낌 소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벅찬 행운이 그녀에게 주어졌음을 계속해서 말해주고 있었고 덕분에 마음속이 한겨울의 난로처럼 더없이 따뜻해 났다.오늘부터 사는 게 지옥일 줄 알았는데 천사 같은 언니의 도움으로 한순간에 운명이 뒤바뀌게 될 줄이야.이제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인 제원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비록 엄마는 없지만 주위엔 여전히 많은 친구가 그녀를 버티게 해주고 있다.그러니 힘을 낼 거다. 열심히 살아서 언젠간 저 언니와 정상에서 만날 거다.한편, 성혜인은 강민지의 차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강민지는 거즈로 둘둘 감싸진 그녀의 손바닥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에 경찰이랑 이 길을 따라 널 찾았었어. 그런데 그때 사람이 너무 몰려있었고 차도 심하게 막혔어. 한 임산부가 끌려갔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성혜인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민지야. 나 포레스트로 데려다줘. 지금
한편,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어 이실직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심지어 그 전화를 먼저 끊은 건 반승제였다는 것도.아무래도 이제 진짜 그녀를 원망하게 된 모양이다. 그런데 어젯밤엔 왜 찾아왔던 거지?성혜인은 시선을 떨군 채 뜨거운 김에 눈이 따가워 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반승제에게 제대로 설명해야겠다고 결심했다.따뜻한 물에 30분 동안이나 몸을 담그고 있었더니 그제야 몸이 조금 회복된 것 같았다. 성혜인은 만족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향했다.아래층으로 가자, 소파에서 신예준에게 연락을 하는 강민지가 보였다.아직도 야근한다는 신예준은 늘 그렇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젯밤에 왜 돌아가지 않았냐며 그녀에게 물었다.“혜인이 일이 아직 해결이 안 돼서. 나중에 찾으러 갈게. 예준 씨, 나 없다고 밥 거르지 말고 제때 챙겨 먹어. 일도 너무 힘들지 않게 쉬엄쉬엄 해.”신예준은 병상에 있는 조희서의 옆에서 죽을 든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조희서는 잘 요양한 덕인지 얼굴도 전처럼 창백하지 않았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신예준을 보고 있었는데 말하지 않아도 누구와 통화하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신예준은 그녀의 뜨거운 눈빛을 의식하고 말했다.“응. 알겠어. 그럼 이만 끊을게.”전화를 끊은 후 조희서는 언짢은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오빠. 누구야? 설마 또 그 여자야? 왜 내가 오빠 약혼자라고 말하지 않는 거야? 오빠 설마 그 여자 진짜 좋아하는 건 아니지?”조희서는 잔뜩 시무룩 해져서는 말했다.그러자 신예준은 손을 올려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런 거 아니야. 희서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영원히 너뿐이야.”조희서는 그제야 입을 벌려 그가 건넨 죽을 받아먹었다.“그 여자가 오빠한테 너무 잘해주니까 그러지. 오빠가 분명히 말했어. 나 다 나으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결혼 안 해주면 나도 수술 안 해. 말 바꾸면 나 그냥 죽어버릴 거야.”그 말에 신예준의 얼굴에 그늘이 지더니 죽
청천벽력이라도 들은 듯 성혜인이 안색이 파리한 채로 멍하니 있자 강민지가 대신 쪼그려 깨진 조각을 모았다.“내가 아까 한 말에 과장된 부분은 전혀 없었어. 차에 시동 걸릴 때 울기까지 했는데 그냥 가 버리더라. 내 생각엔, 정말로 너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어. 게다가 요즘은 설인아랑 가깝게 지내는 것 같던데...”성혜인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새 숟가락을 꺼내 눈앞의 죽을 먹을 뿐이었다.반승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어려웠지만, 그가 설인아와 만난다는 소식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사실 오해는 전부 해명할 수 있었다.“혜인아.”멍 때리는 성혜인의 눈앞에서 손을 휘젓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성혜인이 웃어보였다.“우리 사이에 오해가 좀 있어서. 내가 나중에 해명할게.”그 말에 강민지의 말문이 막혔다.“해명해도 안 들으면 어쩔 건데.”“그럼 인연이 아니라는 거지.”성혜인은 뱉은 말과 반대로 속이 문드러지는 중이었다. 그걸 아는지 강민지가 손을 꽉 붙잡았다.“요 며칠 시간 있으면 꼭 같이 있어 줄게. 만약 반승제가 진짜 태도를 안 바꾼다면 내가 무조건 더 좋은 사람 소개해 줄 거야. 그러고 보니까 온수빈도 괜찮던데? 최소한 부정적인 감정은 안 생기게 하잖아.”성혜인은 자신을 위해 일부러 하는 말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떻게 답해야 할지는 몰랐다.다행히 강민지가 더 자세히 엮으려 하지 않았기에 조용히 죽만 먹을 수 있었다.아침 식사를 끝내고 났을 때 시계는 정확히 열 시를 가리켰다.배현우와 함께 했던 시간이 몸을 혹사시켜 성혜인은 여전히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성혜인은 배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했다.만약 다정한 배현우가 사라진다면 나중에는 그 미친놈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때 강민지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발신인은 강민지의 아버지였다.“너 요즘 별 이상한 놈이랑 연애한다는 말이 들리는데. 거래처에서는 네가 어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걸 봤다고도 하고. 얼른 집에 들러서 해명해
성혜인이 손을 뻗어 반승제의 옷을 잡으려 했지만 그에 의해 제지되었다.“반...”한 글자 불렀을 때 반승제는 이미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의 행동은 꼭 성혜인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것 같았다.설기웅은 여전히 성혜인의 옆에 선 채로 말했다.“저희 두 가문 요즘 혼담이 오고 가는 사이라서요. 양해 부탁드릴게요.”그 말을 한 설기웅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이 바닥에서 혜인 씨 명성 어떤지 모르세요? 반 대표님을 위해서라도 좀 멀어지셔야죠.”설기웅은 그대로 성큼성큼 멀어졌다.잠깐 멍하니 있던 성혜인이 정신 차리고 쫓아갔을 때는 이미 엘리베이터의 문이 거의 닫힌 상태였다. 반승제는 그 작은 틈새로도 성혜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이런 식의 태도는 성혜인으로 하여금 첫 만남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성혜인이 서둘러 버튼을 눌렀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전용 엘리베이터였기 때문에 성혜인은 탑승할 수 없었다.결국 직원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1층을 눌렀지만 반승제가 내릴 층은 지하 주하장이었다.양복을 입은 성인 남성 두 명이 들어간 엘리베이터는 조금 좁았다.반승제는 태연하게 앞만 주시하며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왼손은 아까 성혜인이 붙잡은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남은 온기를 찾으려는 것처럼... 그런 반승제의 미묘한 행동을 설기웅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주차장에 도착해 뒷좌석에 올라탄 순간 룸미러로 누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성혜인이었다.성혜인은 아직 다 낫지 않아 계단으로 내려올 때 또 넘어질 뻔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해 몸을 일으켰지만 자각하고는 억지로 눈을 뗐다.“출발하지.”거부할 수 없던 심인우는 그대로 엑셀을 밟았다.“반승제!”제대로 선 성혜인이 외쳤지만 차는 이미 주차장을 빠져나간 상태라 성혜인의 외침만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아까 일 층에 내려 반승제의 차를 보지 못해 지하로 급히 달려온 거라 성혜인의 온몸이 땀으로 젖는 것 같았다.비틀거리며 벽을
갑자기 안을 줄 몰랐던 반승제가 당황하며 설인아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설인아가 눈치껏 팔을 풀더니 고개를 들어 말을 걸어왔다.조금 어지러웠는데 손은 여전히 소매를 매만지는 중이었다.한참이 지나고 소매를 놓은 순간 설인아가 물었다.“여보, 오늘 나랑 저녁 같이 먹을래?”눈을 내리깐 순간 성혜인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금세 지워지고 말았다.“응.”설인아의 시선이 반승제를 거쳐 성혜인에게 닿았는데 그 눈빛에는 도발이 잔뜩 담겨 있었다.“그럼 위치는 오빠가 정해서 알려 줘.”성혜인은 설인아가 일부러 자기를 도발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 도발에 넘어갔다.결국 성혜인은 뒤돌아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엘리베이터 문에 닫힐 때가 되어서야 겨우 몸을 뒤로 기댈 수 있었다.일 층에 도착하자 심인우를 마주쳤는데 커다란 꽃다발을 안은 심인우가 어색한 눈빛을 떨치지 못했다.“페니 씨.”물론 성혜인은 저 꽃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피했다.꽃다발을 안은 심인우도 한동안 무어라 할 말을 못 찾았다.병실에 들어선 후 병실의 주인에게 꽃다발을 건넬 때까지 그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사람은 자기 상사의 아내고 이 꽃은 그 상사가 시켜서 가져온 것뿐인데 그 모습을 성혜인이 볼 줄은 몰랐다.설인아의 병실에서 반승제를 봤을 때 결국 말하고 말았다.“저 페니 씨와 마주쳤어요.”반승제는 그가 회사에서 마주쳤다는 줄 알고 별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심 비서님,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 있나 찾아봐 줘요.”“설인아 씨랑 가시려고요?”“네.”반승제는 입술을 짓씹으며 소매 부근을 봤다.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심인우는 또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반승제는 회사에 돌아와 업무를 보는 순간까지도 집중하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반승제는 못 참고 관제실로 향해 성혜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찾았다.성혜인은 BH그룹에 들어온 순간부터 침착했다. 얼굴에서 민망함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