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종을 바라보던 그녀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소 비서님, 별장으로 돌아가시는 길이신가요? 제가 지난번에 별장에서 귀걸이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혹시 같이 타고 가도 될까요?”소종은 당연히 거절할 수 없었다.그 별장은 유진이가 들어가기 전에도 방민아가 종종 방문해 육경한과 식사를 함께했던 곳이었으니 말이다.게다가 별장에는 방민아를 위해 마련된 전용 객실도 있었다.하지만 소종은 의아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방민아와 육경한이 여전히 각방을 쓰고 있는지 말이다.보통 성인 남녀라면 서로 끌리는 감정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런 상황은 다소 이상했다.방민아는 외모도 준수했고 몸매나 분위기 역시 상위권이라 할 만했다. 특히 그녀 특유의 재벌가 아가씨 같은 기품은 매우 매력적이었다.그런데도 육경한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심지어 자신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여자를 찾는 편인데 육경한은 아무런 욕구도 없는 듯했다.그래서 한동안 소종은 육경한이 혹시 어떤 신체적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었다.예전 소원과 함께할 때 육경한의 표정은 가장 매력적으로 빛났고 항상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하지만 방민아와 함께한 뒤로는 그런 열기가 사라지고 차가운 표정만 남았다.별장에 도착한 뒤 소종은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진이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방민아도 뒤따라 올라왔는데 그녀가 귀걸이를 찾으러 가지 않고 자신을 따라오자 소종은 퍽 난감했다. 결국 그가 물었다.“민아 씨, 귀걸이는 안 찾으시나요?”그러자 방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도 아이를 좀 보고 싶어서요.”소종은 순간 멈칫했다. 육경한의 특별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방민아가 아이를 봐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이전에 방민아를 데리고 아이를 보러 간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이런 소종의 마음을 알아채서인지 방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경한 씨가 전에 저더러 아이 봐도 된다고 했어요. 믿기 어려우시면 경한 씨한테 전화해서 확인하셔도 돼요. 아니면
소종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별장이 워낙 멀어 직접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게 빠를 것 같았지만 유진이를 혼자 두고 가는 것도 걱정이었다.집에는 어린아이에 대해 잘 모르는 도우미 두 명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그때 방민아가 자청하며 말했다.“소 비서님, 제가 아이 돌볼게요. 소 비서님은 아주머니를 병원에 데려다주세요.”소종은 잠시 망설였다. 방민아를 아이 곁에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러자 방민아가 덧붙였다.“걱정 마세요. 제가 잘 돌볼게요.”그녀는 고개를 숙여 유진이에게 말했다.“유진아, 네가 착하게 말을 잘 들어야 아저씨가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다줄 수 있어. 이모 말 들어줄래?”어린 유진이는 아직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고 그저 할머니를 살릴 수 있다면 뭐든 좋다고 생각했다.하여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말했다.“들을게요! 이모 말 잘 들을게요. 우리 할머니 구해주세요!”유진이의 말에 안심한 소종은 곧바로 아주머니를 업고 차에 태운 뒤 병원으로 향했다.방민아는 먼저 두 도우미에게 유진이가 혹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지 물었다.그런 다음 두 사람에게 자신이 아이를 돌볼 테니 밖에서 쉬라고 말했다.도우미들은 방민아가 자주 별장에서 육경한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봐왔고 그녀가 곧 유진이의 새어머니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따라서 그녀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그렇게 방민아는 아이의 방을 둘러보았다. 별장의 단순한 흑백 인테리어와 달리 이 방은 어린 소년에게 어울리도록 꾸며져 있었다.벽에 걸린 그림들과 책상, 침대까지 모두 소년의 방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육경한이 유진이를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떠올리자 방민아의 마음속에서 불편한 감정이 점점 커져갔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유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이름이 뭐니?”“유진이요.”유진이는 조금 전보다 진정된 상태였다.그러나 방민아는 그에게 있어 낯선 이모일 뿐이었는지
유진이는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엄마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가가 붉어졌다.“엄마... 엄마다...”아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방민아를 애타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모, 저 언제 엄마 볼 수 있어요?”유진이는 엄마를 간절히 보고 싶었다. 엄마를 볼 수 있다면 그와 함께 보고 싶었던 서현재 삼촌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진이는 그 둘이 너무나 그리웠던 것이다.“이모 말 잘 들으면 엄마 만나게 해줄게.”아이를 달래듯 방민아는 부드럽게 속삭였다.“네. 유진이 말 잘 들을게요!”유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방민아는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그럼 이제 잠깐 자야겠네. 힘을 키워야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지, 맞지?”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방민아의 말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정도였는데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도우미들에게도 충분히 들릴 만큼이었다.육경한은 유진이를 절대 혼자 두지 말라는 특별 지시를 내린 바 있었다.그래서 방민아가 곁에 있더라도 도우미들은 문밖에서 대기하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비록 방민아가 곧 안주인이 될 사람처럼 행동했지만 도우미들은 그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결국 방민아는 새엄마일 뿐이었고 새엄마가 아이를 해쳤다는 뉴스를 수도 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만약 사고라도 생긴다면 도우미들은 자신들이 책임질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문밖에서 그녀들의 귀에 들리는 방민아의 말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녀가 아이를 다독이는 모습에 안심한 도우미들은 긴장을 조금 늦추었다.그러나 그녀들은 보지 못했다.방 안에서 방민아가 이미 얼굴이 붉어진 유진이를 이불도 덮여주지 않은 채 얇은 잠옷만 입힌 상태로 침대에 눕혔다는 것을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바람은 방 안으로 들어와 곧바로 유진이 쪽으로 불어닥쳤다.방민아는 침대 옆에 앉아 육경한을 꼭 닮은 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질투와 증오가 서려 있었다.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그녀는 소
의사는 몸이 스스로 회복하고 있는 중이라며 환자가 오랜 시간 제대로 잠을 못 잤기 때문에 이렇게 깊이 잠든 것이 오히려 좋은 징조라고 설명했다.육경한은 의사의 말이 정말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침대 옆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잠시 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 건 사람은 소종이였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육경한은 짧게 침묵하다 차갑게 말했다.“알아서 처리해.”그때였다.소원이 희미하게 정신을 차리며 들은 말은 바로 ‘처리’라는 한 단어였다.‘처리... 누구를 처리한다는 걸까?’그러다 소원은 안지철이 떠올랐다.‘그 사람을 처리한다는 거겠지?’육경한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다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원을 발견했다.그녀는 무표정하게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그 모습에 잠시 놀랐지만 육경한은 곧 안도와 함께 기쁨을 느꼈다.조금 전 소원이 쓰러졌던 모습이 떠올라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기 때문이다.“깨어났어?”짧게 말한 뒤, 육경한은 소원의 이마에 손을 대 체온을 확인하려 했다.그녀가 깨어난 뒤에는 체온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했고 발열이 있다면 즉시 조치를 취하라고 의사가 당부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손이 이마에 닿자마자 소원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더러운 손으로 나 만지지 마!”순간 몸이 얼어붙더니 육경한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뭐라고?”소원은 힘겹게 몸을 옆으로 돌리며 냉랭하게 말했다.“나가.”그녀는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육경한이 나타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지금의 소원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잠깐의 휴식 같았던 이번 실신 이후, 소원은 다시 싸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이제는 육경한이 아닌, 그들과 싸워야 할 차례였다. 특히 방민아 말이다.그녀가 했던 말들은 아직도 소원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소원의 직감은 방민아가 단순히 위협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겉으로
“돌아온 후 한 일 중에서 단 하나라도 네 목숨을 천 번이나 내놓기에 충분하지 않은 일이 있었어?”육경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내가 널 그렇게 많이 봐줬는데 대체 어디가 부족했단 말이야!”그러자 소원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웃었다.“하하...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 다 네가 나를 억지로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잖아.”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육경한, 나는 그저 정정당당하게 너와 맞섰을 뿐이야. 그런데 넌 매번 온갖 비열한 술수를 부렸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잖아. 안지철, 네가 음모를 꾸며서 죽인 거지? 그다음은 누굴 죽일 건데?”“유시연?”육경한은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야. 난 안지철을 죽이지 않았어.”그러나 소원은 비웃었다.“물론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겠지. 너 같은 사람이 그런 자잘한 일에 손대겠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대신 처리해줄 사람들이 줄을 서 있잖아. 완벽하게, 빈틈없이 말이야.”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너한테 사람 목숨이라는 건 뭐야? 네가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긴 게 어디 한두 번이야?”이 말에 육경한은 분노에 차 소원의 손목을 단단히 잡아 쥐었다.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며 목소리조차 거칠어졌다.“내가 안 했다고 말했잖아!”“육경한!”소원은 필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너 현재한테 손 써서 기억을 잃게 만든 건 물론 나한테서 유진이까지 빼앗아갔잖아. 그 순간부터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난 네가 역겨워.”이 말에 육경한의 몸이 굳더니 손에 들어갔던 힘도 점점 풀렸다.길게 이어진 침묵 후, 그는 문밖으로 발길을 돌렸다.곧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침대마저 흔들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그는 지금 이 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소원을 찢어발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그렇게 미운 거야? 왜 뭘 하든 마음을 돌릴 수 없는 거지?’심지어 육경한은 나중에 나타난 서현재에게조차 자신이 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소원의 눈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안 요원은 소종의 말을 과장이라 생각했지만 절차대로 상부에 보고하기로 했다.잠시 후, 병원의 관리 책임자가 직접 내려왔다.그는 소종의 회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소종의 제안이 허언이 아님을 금세 알아챘다.책임자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더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그러고는 소종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며 말했다.소종은 공손하게 부탁했다.“이번 일은 단순한 오해입니다. 아래 직원들에게도 함부로 말을 퍼뜨리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저희 대표님이 가족이 입원 중이라 감정이 격해져 잠시 이성을 잃으신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울 때가 있잖아요, 안 그렇습니까?”병원 책임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작은 일입니다.”병원 입장에서는 육경한이 문 하나를 부순 것이지만 실질적인 피해도 없었고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었다.게다가 이 사건으로 병원은 건물 전체의 문을 방탄 문으로 교체할 예산을 얻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병원이 이득을 본 셈이었다.책임자는 다짐하듯 말했다.“안심하세요. 직원들에게는 절대 입을 닫으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소종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예산은 이미 배정해 두었습니다.”책임자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소종이 이렇게 신중하게 행동한 이유는 단순했다.최근 안지철 사건과 더불어 소원이 육경한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던 일이 계속해서 소문으로 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여기에 오늘 사건까지 엮인다면 사람들이 육경한을 정말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될 위험이 있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연결되면 예상치 못한 나비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하여 소종은 마치 소방관처럼 불이 더 번지기 전에 빠르게 진화하는 데 집중했다.육경한은 이미 차로 돌아와 있었다.손의 부상은 소종이 부른 의사가 차 안에서 직접 처치했다.처치가 끝난 후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차를 출발시키라는 명령도 하지 않았고 소종은 분위기를 읽고 말없이 기다렸다.소종은 지금까지 이
“민아 씨가 왔다고?”육경한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당황한 도우미는 급히 대답했다.“네, 민아 씨가 지금 위층에서 작은 도련님을 돌보고 계십니다. 저더러는 내려와서 작은 도련님이 드실 호박죽을 준비하라 하셨고요.”육경한은 눈썹을 찌푸렸다.유진이를 이 별장에 머물게 한 이후로 그는 방민아를 이곳에 다시 데려온 적이 없었다.방민아가 아이를 보고 싶다고 몇 번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유도 모른 채 이를 꺼려왔다.“누가 그 사람을 들여보라고 했지?”육경한의 목소리엔 분명한 불쾌감이 담겨 있었다.그러자 도우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다.‘민아 씨는 미래의 안주인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거지?’소종이 급히 상황을 설명했다.“대표님, 제가 데려왔습니다. 민아 씨가 귀걸이를 별장에 두고 갔다고 해서 함께 왔는데 마침 아주머니가 급성 질환으로 쓰러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동안 민아 씨가 작은 도련님을 돌보겠다고 하셨습니다.”소종은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지만 육경한의 찌푸린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더 다급해진 소종이 말했다.“민아 씨가 아직 떠나지 않았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경한은 벌써 계단을 올라가 유진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곧 문이 쾅 하고 열렸다.육경한은 한마디 하려다 침대 옆에 반쯤 기대어 잠든 방민아를 발견했다.눈을 가늘게 뜬 채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옆에는 물과 수건이 놓여 있었고 유진이의 이마에는 물수건이 얹혀 있었다.뒤따라 올라온 도우미가 급히 설명했다.“어젯밤 도련님께서 갑자기 열이 나셔서 민아 씨가 밤새도록 간호하셨어요. 약을 쓰는 건 안 된다고 하셔서 물리적으로 열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저희가 대신 간호를 하겠다고 해도 본인이 직접 지켜야 한다고 하시면서요.”이 말을 들은 육경한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방민아는 소음에 잠에서 깨어났는지 비몽사몽 눈을 뜨며 그를 보고 반갑게 말했다.“경한 씨, 돌아왔어
소종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작은 도련님, 그러면 안 됩니다.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아빠 아니에요!”유진이가 소리쳤다.“아니라고요! 내 마음속에 있는 아빠는 현재 삼촌뿐이에요!”그러자 육경한이 발걸음이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한 마디씩 힘주어 물었다.“뭐라고 했어?”“현재 삼촌이 내 아빠라고요. 현재 삼촌만 난 아빠로 받아들일 거예요!”곧 육경한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로 갑자기 유진이의 옷깃을 움켜쥐며 소리쳤다.“입 다물어! 내가 네 아빠야! 너한테 아빠는 평생 나 하나밖에 없어!”아직 어린 유진이는 육경한의 분노에 압도당했다.결국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아이는 계속 말했다.“아니에요... 아저씨는 아니에요...”참다못한 육경한은 유진이의 뒤 옷깃을 움켜쥐고 갑자기 높이 들어 올렸다.유진이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데다 숨이 막혀 금세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경한 씨!”방민아가 크게 외쳤다.그 소리에 육경한은 정신을 차렸다.방민아는 아이를 빼앗듯 안아 들고 꼭 끌어안은 채 간절하게 말했다.“경한 씨, 아직 어려서 애가 뭘 몰라서 그런 거니까 화내지 마세요. 이렇게 대하면 애 악몽 꿔요.”유진이는 방민아의 품에서 계속 기침을 해댔다.그제야 육경한은 자신이 또다시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게다가 그것도 이렇게 작은 아이 앞에서 말이다.유진이의 두려움 가득한 눈빛만 봐도 자신이 얼마나 아이를 겁먹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미안하다’는 말이 입술 끝에서 수없이 맴돌았지만 결국 육경한은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육경한은 유진이가 서현재를 아빠라고 한 말에 여전히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민아 씨가 아이 돌봐요.”다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육경한은 방민아에게 말했다.그들 모자 입에서 서현재라는 이름만 나와도 육경한은 견딜 수 없었고 모든 걸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그리고 방민아가 조금 전 보여준 모성애 넘치는 모습은 육경한에게 작은 충격을 주었다.그런 모습을 보니 방민아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