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미래에 대해 홍승희도 당연히 그녀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다. 하여 더는 구지윤의 결정을 막지 않았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우리 딸, 이제 네가 스스로 결정하는 나이가 됐구나. 엄마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가 스스로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구지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엄마, 건강 잘 챙기세요. 저 꼭 성장해서 엄마의 버팀목이 되어줄게요...”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곽진명은 구지윤의 유학 절차를 모두 마쳤다. 구지윤은 곧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녀는 친한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외출하여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홍승희가 아직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구지윤은 평소처럼 홍승희를 찾으러 갔다.혹시 도울 일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본채에 도착한 그녀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곽경천과 마주쳤다.그는 소파에 앉아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술을 마셨는지 조금 지쳐 보였다.구지윤은 곽경천 옆을 지나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에게 더 이상 그를 신경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의 보상은 그녀를 다른 나라로 보내는 것이었으니 그가 마음속으로 구지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며칠이 지나면서 처음에 느꼈던 심장이 도려내는 듯한 고통은 이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구지윤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고 홍승희와 함께 이리저리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잘 견디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이런 경험은 그녀를 자존심이 강하고 민감하며 조숙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구지윤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더 이상 경계를 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곽진명의 말은 그녀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계층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주방에 가서 홍승희를 찾지 못한 구지윤은 그대로 돌아가려 했다.몇 걸음 걸었을 때, 그녀는 소파에 기댄 채 목을 젖히고 앉아 있는 곽경천이 목을 불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곽경천은 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네잎클로버 목걸이를 꺼냈다.그의 소꿉친구가 여자들은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보석을 좋아한다고 사라고 권유했었다.곽경천은 한눈에 이 네잎클로버 목걸이에 마음이 들었다. 네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하니 말이다.며칠 동안 그는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구지윤에게 줄 핑곗거리를 찾지 못했다.컵 안의 얼음물을 다 마시고 곽경천은 내일, 반드시 이 목걸이를 그녀에게 주리라 다짐했다.다음 날, 회사 일을 마무리한 곽경천은 구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뚜뚜뚜...”상대방의 번호가 없는 번호로 나와 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렸다.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없는 번호였다.잠시 생각한 후, 곽경천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빨간 도돌이표가 화면에 떴다.곽경천은 자신이 구지윤에게 차단당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이 며칠 동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민망함을 피하려고 그녀와 일부러 거리를 둔 것이 전부였다.‘도대체 왜...’그는 답답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책상 위에 네잎클로버 목걸이가 예쁜 상자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곽경천은 잠시 그 목걸이를 응시하더니 상자를 힘차게 덮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어린 소녀의 마음을 추측할 여유가 그의 삶에는 없었다.일어나 회의에 참석하려던 순간, 곽경천은 다시 쓰레기통 속 목걸이 상자를 힐끗 바라봤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상자를 주워들었다.행정실의 쓰레기통은 방금 새것으로 교체된 것이라 목걸이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처음으로 산 목걸이를 가장 깊숙한 서랍에 넣어두고는 잊어버리기로 했다.그 후,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되며 곽경천은 약 20일간 집에 머무르지 못할 만큼 바빴다.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회사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곽경천은 그 자리에서 술을 꽤나 마셨다.차에 탄 그는 온몸이 피곤함에 휩싸였다.운전기사가 물었다.“아파트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곽경
“네!”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모르셨어요?”전에 곽경천과 홍승희의 관계가 굉장히 좋아 보였기 때문에 도우미는 그가 구지윤이 아스테리아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의아했다.그녀는 곽경천이 진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덧붙였다.“이미 한 달이나 됐어요. 딸이 올해 설에도 안 온다면서 승희 씨한테 같이 설 쇠자며 아스테리아 행 비행기 표까지 사 줬다던데요.”도우미가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곽경천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우미는 곽경천이 이렇게 침착하지 않은 모습을 처음 본지라 멍하니 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물컵을 집어 들었다.곽경천은 서둘러 홍승희가 살고 있는 집사 거처에 달려가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돌렸다. 홍승희는 밤에 무슨 일이 있을까 봐 항상 문을 잠그지 않고 두었고 본관과 가까운 곳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구지윤이 예전에 살았던 작은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전에 늘 작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던 소녀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방 안에 있던 가구들마저 모두 치워져 있었고 침대조차 없었다.순간, 곽경천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구지윤이 정말로 떠났는데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도련님?”뒤에서 홍승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제야 몸을 돌린 곽경천은 그녀와 마주쳤다.“도련님,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러자 곽경천은 문가에 서서 곧바로 물었다.“아줌마, 지윤이 어디 갔어요?”곽경천은 아직도 도우미가 한 말을 믿기 어려웠다.구지윤이 이곳 대학에 다닐 거라 말했던 말을 곽경천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홍승희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도련님, 지윤이는 학교 다니러 갔잖아요.”“그건 알아요.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는 겁니다.”“아스테리아로요.”그 말을 들은 순간, 곽경천의 차가운 눈동자가 더욱 날카로워지며 그의 몸에서는 한기가 퍼져 나왔다.“지윤이가... 어떻게 아스테리아로 가게 된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그때... 지윤이는 그렇게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구지윤은 곽경천을 차단했고 떠나면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곽씨 가문과의 관계를 끊는 것뿐만 아니라 곽경천과의 관계도 완전히 끊으려는 듯했다.십수 년의 정을 이렇게 쉽게 끊어낼 정도로 구지윤은 정말로 냉정했다.곽경천은 눈을 감으며 지친 표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홍승희에게 인사도 잊은 채 방을 떠났다.홍승희는 곽경천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걱정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문득 구지윤이 곽씨 가문에서 멀어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계절은 지나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곽경천은 여느 때처럼 일에 몰두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스테리아의 한 대표가 곽씨 가문의 해운 회사와 협력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아스테리아는 L국에서 매우 먼 곳으로 중간 비용을 계산해 보면 이 항로는 수익을 내기 힘들었고 심지어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아스테리아 시장을 개척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 곽경천은 그들의 현장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침 아스테리아는 한겨울이었고 그는 하루 넘게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아스테리아의 날씨는 영하 수십 도였고 L국보다 훨씬 추웠다.그는 추위를 몹시 싫어하는 구지윤이 어째서 이처럼 얼어붙을 듯한 아스테리아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첫날은 간단히 협력사 대표를 만나고 대화를 마친 후 술자리 제안을 거절한 곽경천은 차를 몰아 프린스턴 대학교로 향했다.그 학교는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매우 크고 아름다웠다.간단한 방문 등록 후 그는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여자 기숙사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왜 여기에 서 있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운에 맡겨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하늘에서 내리던 작은 눈송이는 어느새 커다란 눈송이로 변해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그녀는 여전히 가끔 곽경천의 그림자를 보곤 했다.나무도, 눈도, 심지어 희미한 뒷모습조차도 그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나 정말 미쳤나 봐.’구지윤은 속으로 생각했다.곽경천은 구지윤을 서둘러 내보내고 싶어 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그 남자를 점점 더 그리워하게 되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몇 년 동안 곽경천을 보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스스로 다짐했다.반드시 그 남자를 잊어야 한다고.설령 완전히 잊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yuan?”옆에 있던 남학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직도 몸이 안 좋은 거야?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주 있는 일이야. 약 먹고 자면 나아질 거야.”그녀는 아스테리아의 추운 날씨에 익숙해지지 못해 감기와 열병이 일상처럼 되어버렸다.자주 아프다 보니 몸도 눈에 띄게 야위었다.다행히 겨울이라 헐렁한 패딩 덕분에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방금도 그녀는 수업을 듣던 중 갑작스레 열이 올라 혼자 기숙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하여 교수는 같은 과 남학생에게 그녀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라고 시켰고 처음에는 남학생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걸었지만 후반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남학생에게 의지해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yuan, 너희 한국 여자들은 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야?”남학생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작은 체구에 큰 에너지가 숨어 있네.”하지만 구지윤은 미소를 지을 힘조차 없어 보였고 이를 눈치챈 남학생이 말했다.“yuan, 내가 기숙사까지 업어줄까?”이 말에 구지윤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어.”하지만 남학생은 결국 기숙사 관리 아줌마에게 부탁해 구지윤을 방까지 데려다주었다.기숙사에 도착하니 다른 학생들은 모두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갔고 구지윤 혼자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기숙사
목걸이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네잎클로버의 로즈골드 테두리에는 작은 맞춤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가까이에서 보다가 구지윤은 그 위에 ‘JY'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렇게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주운 목걸이의 이니셜이 자기 이름과 같은 것이다.구지윤은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하여 목걸이를 학교의 분실물 센터에 맡겼다.이런 고급스러운 목걸이에는 모두 고유 번호가 적혀 있기 때문에 그 번호로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약 3일 후, 학교 분실물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명품 회사에서 받은 정보에 따르면 목걸이의 주인은 바로 구지윤 본인이었고 신분증 번호까지 일치한다고 했다.구지윤은 어리둥절한 채로 목걸이를 찾아왔다.이 목걸이를 자신이 직접 산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곧 공식 홈페이지에 문의해보았다.하지만 돌아오는 건 구매자의 정보는 제공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데이터베이스에는 목걸이 주인의 정보만 남아 있었다.어쩔 수 없이 구지윤은 그 목걸이를 보관해 두었다.대학에서의 4년은 빠르게 흘러갔다.첫 3년 동안은 홍승희가 아스테리아에 와서 함께 설을 보냈고 마지막 해에는 구지윤이 귀국하여 홍승희와 새로 산 작은 집에서 명절을 보냈다.20일간의 방학 동안 구지윤은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아스테리아로 돌아가기 전날이 되어서야 그녀는 익숙한 쇼핑몰과 학교를 잠깐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사실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니 사람들과의 교류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L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 구지윤은 어머니에게서 곽경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3년 전, 그는 회사에서 퇴직했으며 외부에는 일에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알려졌다고 했다.그렇게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일하며 연구를 시작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국
구지윤은 정신이 혼미한 채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반쯤 감긴 눈으로 홈 화면을 확인하자 한 줄의 문자가 보였다.[구지윤, 나 너 보러 왔어.]“쿵.”핸드폰이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머리가 한 대 얻어맞은 듯 울리기 시작했고 과거의 악몽들이 몰려왔다.구지윤은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이 꽉 잠긴 듯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아...”그녀는 온 힘을 다해 겨우 뭔가 막힌듯한 소리를 냈다.그 순간, 쿵 소리와 함께 몸에 커다란 통증이 밀려왔다.눈을 깜빡였을 때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고요함이 감돌았다.구지윤은 허둥지둥 핸드폰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렇게 이성을 잃어갈 때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구지윤의 알람 소리였다.소리가 나는 곳을 더듬어 보다가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조용히 놓여 있는 핸드폰을 발견했다.알람을 끄고 화면을 확인했지만 핸드폰에는 아무 메시지도 없었다.알고 보니 방금 그저 악몽을 꾼 것이었다.구지윤은 이미 번호를 바꿨고 연락처에도 육선재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게다가 육선재는 육씨 가문의 어르신에게 L국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여기까지 올 리가 없었다.점차 정신이 돌아오자 구지윤은 침대 옆의 가구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잠시 후, 그녀는 일어나야 한다는 책임감에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제대로 쉬지 못해 몸이 무거웠고 일어설 때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신 후,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구지윤은 당황스러웠다.곽경천, 윤혜인, 그리고 홍승희 외에는 이 집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홍승희는 지금 L국에 있었고 윤혜인은 아침에 찾아올 일이 없었다. 하지만 곽경천은 구지윤네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구지윤은 문득 어젯밤에 비밀번호를 바꾼 게 생각났다.‘근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웬일로 여기 온 거지?
악몽이 다시 덮쳐오자 구지윤의 손발은 완전히 굳어버렸다.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신의 팔을 세게 물었고 그 덕에 잠시나마 의식을 되찾았다.혼란 속에서 구지윤은 간신히 테이블 쪽으로 기어가 힘겹게 핸드폰을 잡았다.그러고는 번호를 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여보세요, 저 신고하려고 그러는데요...”그러나 문밖에서 들리는 육선재의 악몽 같은 목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구지윤은 테이블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 몸을 작게 말아 떨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회사 동료에게서 온 전화였다.그녀는 급하게 벨 소리를 끄려고 했지만 이미 육선재는 그 소리를 들은 후였다.육선재는 구지윤이 집 안에 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곧이어 그가 문을 허리띠로 세게 때리며 짜증 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구지윤, 네가 아무 말 안 한다고 내가 못 찾을 것 같아?”그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루는 숨을 수 있겠지. 그런데 평생 날 피해 다닐 수 있겠어?”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갈 정도로 구지윤은 세게 힘을 주었다.문밖에서는 육선재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구지윤, 우리가 했던 그 숫자 세는 게임 기억나지?”그는 끔찍하게 웃으며 말했다.“열까지 센 다음에도 문을 안 열면 나 아주 화낼 거야. 내가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구지윤은 그 게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육선재가 열까지 세면 그녀는 마치 개처럼 기어 나와야 했다. 기어 나오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지윤은 온몸에 특제 소스를 뒤집어쓰게 되었다.때로는 토마토소스, 때로는 간장, 그리고 때로는 고추장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쏟아부었다.그 후 육선재는 카메라로 그녀의 모습을 엉망으로 찍어 커다란 사진으로 인화하고 그 사진을 강제로 보게 하며 구지윤을 조롱했다.그에게 있어서 구지윤을 육체적으로 때리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고문하고 그녀의 의지를 깎아내리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었다.구지윤을 복종하는 동물로 길들이려는 것이다
육경한이 그래도 대꾸하지 않자 육연주는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댔다.“삼촌, 나 성폭행당했어요. 흑흑흑...”이말에 현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육경한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육연주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지금 뭐라고 했어?”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육연주는 면죄부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육경한의 관심만 남아있다면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갈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육경한에게는 살아있는 혈육이 별로 많지 않았기에 육연주와 이지애가 제일 가까운 가족이었다. 게다가 육경한은 육연주가 커가는 걸 지켜본 사람이었기에 그 정은 쉽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나도 몰라요... 방씨 가문인지 서씨 가문인지 모르겠어요. 내 눈을 가리고 골목으로 끌고 가서 바닥에 누르고는... 반항할 새도 없이...”육연주는 이미지를 완전히 내려놓고 마구 울어대기 시작했다. 설명을 듣고 나니 꼴이 왜 그 모양인지, 괴롭힘당한 흔적은 뭔지 알 것 같았다.경비원들은 이미 육연주를 잡고 경찰이 오면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고의로 해치려고 한 건 엄연한 죄였기에 그대로 놓아줄 수는 없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육연주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하지만 소원은 육연주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태도 그렇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꺼낸 걸 봐서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미지가 실추될 수도 있는 일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말할 여자는 이 세상에 없었지만 그중 어딘가에 책임을 회피하려는 요소도 들어있는 것 같았다.“삼촌, 삼촌,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아요...”육경한이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육연주의 사정이 딱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했다.“네가 빌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비록 소원이 다치지 않게 육경한이 막아주긴 했지만 육연주가 정말 해치려든 사람은 소원이었기에 육경한이 용서한다고 해서 용서할 수 있
육연주도 깜짝 놀란 상태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경비원에 의해 바닥에 제압되고 나서야 훌쩍훌쩍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삼촌, 삼촌... 나 좀 살려줘요... 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삼촌...”얼굴이 굳어진 육경한이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남은 힘으로 소원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너 괜찮아? 황산에 맞은 건 아니지?”육경한이 아래위로 훑으며 소원의 몸에 망가진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소원은 육경한에게 고려 백자 같은 존재였기에 조금의 흠집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아직 놀라움을 떨쳐내지 못한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나 괜찮아...”“정말 괜찮은 거 맞아?”육경한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다시 한번 되물었고 소원이 고개를 저어서야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보기 드물게 중얼거렸다.“너만 괜찮으면 됐어. 그러면 된 거야.”육연주가 아직 뒤에서 울부짖고 있었다.“삼촌, 이 사람들 좀 어떻게 해줘요... 너무 아파요. 빨리 풀어주라고 해요.”육경한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끔찍이 아껴왔던 조카였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육연주는 이제 육경한이 기억하던 순진하고 해맑은 여자아이가 아니었다.“연주야. 너무 실망이다.”육경한이 침통한 심정으로 말했다. 소원을 해치려 드는 사람이 가족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지금 소원에게 손대면 소원뿐만이 아니라 소원 뱃속의 아이까지 위험해지게 된다. 아까와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조금만 엇나가도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족 간의 정이라 해도 더 봐줄 수가 없었다.육연주는 살짝 무섭긴 했지만 지금까지 줄곧 자기를 아껴줬던 육경한이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울기만 하면 육경한의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육연주가 무슨 사고를 치든 나서서 뒤처리를 해주던 사람이 바로 육경한이었으니 이다.육연주가 이렇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변한 것도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삼촌... 삼촌...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니
소원이 비웃으며 물었다.“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는 게 사랑이라면 그 사랑 참 위대하네요.”“현재 씨는 원래 내 꺼였어요. 소개팅한 그날부터 나는 사랑에 빠졌다고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왜 나와 소개팅했겠어요?”육연주가 늘어놓는 말은 정말 갈수록 가관이라 소원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행색이 다소 이상해 보이는 육연주를 정신과에 데려가는 게 어떻겠냐고 육경한에게 제안해 볼 참이었다. 얼핏 보기엔 큰 자극을 받아 정신이 약간 이상해진 것 같았다.육연주는 아직도 씩씩대며 중얼거렸다.“다 너 때문이야. 빌어먹을 년. 여우 같은 년. 우리 삼촌을 꼬드긴 것도 모자라 내 남편까지 꼬드겼잖아.”소원은 새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욕을 들으며 어이가 없었다. 아까 이지애도 똑같은 욕을 했고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생각이 막무가내라 입씨름을 벌여봤자 전혀 의미가 없었다.더는 실랑이를 벌이기 싫었던 소원이 자리를 떠나려는데 육연주가 갑자기 쫓아오더니 일그러진 표정으로 병사리를 들고 욕설을 퍼부었다.“죽어. 네가 없어지면 현재 씨도 나 바라봐주겠지. 그래야 현재 씨가 나 영원히 사랑해 줄 거야.”마침 차를 끌고 온 주석훈이 이를 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소원 씨, 조심해요.”차로 박을 수도 없는 일이라 일단 먼저 세우고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뛰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육경한의 보디가드도 이지애를 끌어내느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소원 옆에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소원은 육연주의 손에 들린 게 뭔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지만 좋은 물건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뚜껑이 열리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공기 속으로 퍼졌다.눈살을 찌푸린 소원은 속에 든 것이 황산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미쳐버린 육연주가 소원의 얼굴을 망가트리려 하고 있었다.소원이 자기도 모르게 한 손으로 얼굴을 막으며 다른 손으로 육연주를 밀어내려 했지만 육연주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그럴 수가 없었다. 피할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육연주가
두 사람의 관계는 이혼한 거나 다름없지만 이혼 신청은 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보충한다고 보는 게 맞았다.게다가 소원은 육경한이 했던 말을 도로 무를까봐 그러는지 변호사까지 대동했고 이혼 협의를 공증까지 하겠다고 했다. 소원도 쩍하면 제멋대로 약속을 어기는 육경한이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아이를 남기는 건 육경한의 제안뿐만이 아니라 뱃속에 아이가 생기면서 포지션이 다시 엄마로 변하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처음에는 따듯하게 반겨주지 못했지만 아이의 형상이 소원의 마음속에서 점점 입체감 있게 만들어지고 있었다.잘못은 어른이 했고 아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에 소원도 아이의 살 권리를 함부로 뺏을 수는 없었다.육경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 이런 불평등 조약에도 속수무책인 건 그가 이기적이게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걱정하지 마. 이 아이가 태어나면 너 자유롭게 해줄게.”육경한이 사인하며 말했다. 이젠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질 때가 된 것이다. 소원과 아이를 보호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도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이제 정말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다른 일 없으면 이쯤 하자."소원이 이렇게 말하며 주지훈과 자리를 떠났고 육경한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뒤에서 지켜봤다.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떠나려는데 갑자기 앞에 육연주가 나타났다.“소원.”육연주가 소원을 불러세웠다. 옷은 어딘가 헝클어져 있었고 표정도 약간 이상했는데 더 무서운 건 몸에 괴롭힘과 학대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었다.소원은 육연주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누가 모녀 아니랄까 봐 하는 말도 이지애와 똑같아 소원은 절로 웃음이 났다.“당신들이 내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은 안 해요? 잘못을 저질러서 벌받는 건데 왜 자꾸만 다른 사람이 당신 인생을 망쳤다고 하는 거예요?”소원은 이 사람들의 뇌 회
방씨 가문에서 지키려 한다 해도 방민아의 인생은 별로 희망이 없었다.육연주는 적게 연루되기도 했고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구치소에 한 달 구금되었다가 나왔다. 육경한이 육연주에게 변호사를 찾아줬지만 육연주 모녀는 이를 소원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한사코 거절하면서 일부러 육연주를 구치소에 들여보냈고 육경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하지만 육연주 모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게 원칙인 방씨 가문은 방민아가 이 지경까지 된 게 다 육연주 탓이라고 생각한 이상 복수를 준비할 것이고 그 후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그다음은 서씨 가문이었다. 육연주가 서씨 가문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오라지 않았지만 서현재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람이 점점 이상해진 데다 원래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재벌 집 아가씨라 서씨 가문에 척을 진 사람이 많았다.지금의 서씨 가문은 몰락하게 되었고 서현재가 암 덩어리 같은 사람들을 서씨 가문에서 몰아내긴 했지만 줄곧 호의호식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그 어떤 미친 생각을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육연주가 계속 서울에서 나댄다면 앙심을 품은 서씨 가문 사람들이 기회를 노리고 복수해 올 수도 있기에 아예 이지애와 함께 외국으로 나가 피신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지만 모녀는 육경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소원에게 홀려 인사불성이라고만 생각했다.이지애는 끌려가면서 육경한에게 원망을 퍼붓기도 했다.“경한아,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래? 우리가 잘해준 거 다 잊은 거야? 여자 하나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이 우리를 내치겠다고? 가족인데 어떻게 그래?”사실 잘해줬다고 할 것도 없었다. 상대편에 서서 손가락질하지 않고 돈 몇십만 원 쥐여준 게 전부였다. 이지애도 그때는 살만했기에 양심이라는 게 남아있었고 조금의 ‘선심’을 베풀었지만 육경한은 갚아야 할 돈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많은 돈으로 보답했다.다만 이지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빚쟁이 대하듯 대했다. 돈이 많으니 이걸로는
“경한아... 억울해서 죽을 것 같구나. 쟤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날 욕하고 때리고...”이지애는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소원은 어이가 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나왔고 한편으로는 육경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육경한은 이 일에 엮이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지 차가운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데려가.”육경한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경호원들은 두피가 저릿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데려가겠습니다.”이지애는 육경한이 자신의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해 재빨리 다각 그의 손목을 잡았다.“역시 경한이가 최고야. 우린 가족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저 여자가 우리 남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연주가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살도 많이 빠졌어. 삼촌이 무시한다며 얼마나 울었는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지애는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경호원이 왜 나한테 오지?’‘저 천박한 계집애를 끌어내지 않고 뭐 하는 거야.’“잠깐만... 지금 착각하는 모양인데 경한이는 저 여자를 끌어내라고 한 거야. 옆에 있는 변호사까지 묶어서 밖으로 쫓아내.”경호원들은 이지애처럼 눈치가 없고 멍청하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육경한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이지애였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빽이 있다며 대표님과 미우 그룹을 언급하는지...’‘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지?’경호원들은 이지애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를 끌고 나갔다.현실 부정 중인 이지애는 육경한의 팔을 꽉 잡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경한아, 말 좀 해봐. 저 여자 쫓아내려고 했잖아. 나는 네 누나야.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외부인 편을 들 수 있어? 경한아...”이지애는 눈물을 쏟았다.“말 좀 해봐.”“누나.”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진지하게 말했다.“여러 번 말했잖아요. 소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대뜸 욕을 바가지째로 먹었다.그럼에도 이지애는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X신들. 멍청하기는.”방금까지 동정심을 느끼던 여자에게 심한 욕을 먹었으니 다들 어이가 없었고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 말을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저렇게 추잡스러운 엄마 밑에서 자란 딸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그러니까요. 좋은 사람이었다면 구치소에 수감되었겠어요?”이지애는 여론이 이렇게 빨리 바뀔 줄 몰랐는지 더욱 흥분했다.“너희들이 뭘 알아. 이 여자가 내 딸을 해쳤고 내 딸은 피해자야. 이 여자가 헛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수감될 일도 없었어.”사람들은 더 이상 이지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소리 지르며 욕하는 모습은 정말 품위가 없어 보였다.“그쪽이 돈 많고 대단한 사람이라면서요? 딸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으면 당연히 빼냈겠죠.”이때 한 아주머니가 일침을 놓았다.“맞는 말이에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잡았겠어요? 다 이유가 있는 거지.”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이유 없이 사람을 잡았다면 돈도 없고 인맥도 없는 우리가 일 순위이겠죠.”“됐어요. 됐어요. 이만하고 다들 들어갑시다. 구경났어요?”아파트 단지 관리자가 달려와 구경 중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그 시각.육경한은 고위급 회의에 참석 중이었고 황진수는 전화를 받고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육경한은 해외의 유명 대기업과 협상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중요한 회의인 만큼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에 관한 일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황진수는 몇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회의실로 들어갔다.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그는 육경한에게 다가가 보고 했다.그러자 육경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더니 옆에 있던 황진수를 회의석으로 끌어당겼다.“네가 해.”‘지금 나한테 이 중요한 회의를 떠맡기고 간 거야? 내가 이런 걸 할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바로 이때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했다.“소원 씨, 괜찮아요?”말을 건넨 사람은 주석훈이었다.오늘 아침 두 사람은 합의 사항을 만들기 위해 만나기로 약속했다.그러다가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드는 이지애를 목격했고 소원이 중심을 못 잡고 뒤로 넘어지려던 찰나에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부축했다.옆에서 발악하던 이지애는 어디선가 나타난 경호원에게 제압되었다.“너 누구야? 감히 날 막아?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경호원에게 꽉 붙잡힌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가려는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럽다.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당장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미우 그룹 대표가 내 동생이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하는구나. 내 동생이 오면 너희는 하나도 빠짐없이 서울에서 쫓겨날 거야.” 이지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반응을 보니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육경한이 보낸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경호원들은 육경한과의 관계를 듣고 쉽게 손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임무는 소원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기에 이지애가 해치지 못하게 손을 묶어두었다.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지애와 소원이 다투고 있을 때 곧바로 육경한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이지애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소원을 부축하는 주석훈을 보며 막말을 퍼부었다.“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 동생이랑 헤어진 지 며칠 됐다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 너는 남자를 꼬시는 게 취미야?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하여튼 개 버릇 남 못 준다니까.”이지애의 말은 듣기 굉장히 거북했고 소원은 방금 한 대만 때리고 멈춘 자신을 원망했다.그 시각 주석훈은 단호한 표정으로 이지애를 바라봤다.“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것도 처벌 대상입니다. 제 의뢰인이 내연녀라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일방적인 모함에 속하고 법에 의거하여 충분히 고소할 수 있
이지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생트집을 잡았다.그러나 사건의 경과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무작정 소원을 내연녀라고 생각했다.하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라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소원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이를 본 이지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오늘 기필코 소원을 짓밟으리라 다짐했다.그녀는 계속하여 소리쳤다.“빈말이 아니라 여러분은 남편 간수 잘해요. 한동네 살다가는 이 여자한테 홀랑 넘어갈 수도 있다니까요?”소원은 분노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말조심하세요. 계속 이런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고소할 겁니다.”소원이 경찰에게 신고하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이지애는 단번에 핸드폰을 쳐냈다. 소원을 모욕하려고 찾아온 만큼 절대 경찰에 신고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핸드폰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화가 났던 소원은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그 타이밍에 이지애가 손을 들어 그녀를 밀었다.계단에 서 있던 소원은 이지애가 손을 뻗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짚었다.그러고선 자신의 본능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내가 왜... 이 아이를 신경 쓰는 거지...’그녀의 몸은 이미 아이를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 같다.비록 소원은 결정을 내린 상태가 아니지만 본능이 이렇게 행동하게끔 그녀를 이끌었다.이런 제스처를 취하는 건 타고난 모성애일까?이지애는 죄책감을 느낀 소원이 겁을 먹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착각했다.아니나 다를까 더욱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로 욕설을 퍼부었다.“다들 봤죠? 겁먹었잖아요. 잘못한 게 있으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거예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겠어요?”“이 여우 같은 계집애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세요. 남자에 환장한 X이에요. 천박한 것.”주변 사람들은 이지애의 말을 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우리 동네에 이런 여자가 살고 있었다니. 정말 몰랐네요.”“이래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저 예쁜 얼굴로 이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