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이 너무 매혹적이라 당장이라도 맛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소원은 육경한의 몸에 일어난 변화에 화들짝 놀라더니 불같이 화내며 욕설을 퍼부었다.“육경한,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벌건 대낮에 문도 닫지 않고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려 하고 있다.육경한은 욕구가 달아오른 상태라 소원을 너무 갖고 싶었지만 일단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오늘은 일단 용서해 줄게. 너 몸조리 끝나면 그때 보상하는 걸로 해.”소원은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정말 미친놈 같았다.육경한은 운전석으로 돌아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어째서인지 상태가 아까보다 훨씬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소원이 이번에 배신한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배신하고 칼로 찌르긴 했지만 이걸로 소원을 향한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줄었다.벌도 줄 만큼 주었으니 이제 앞으로 나아가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소원이 지내는 아파트에 도착한 육경한은 문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소원은 그런 육경한을 경계했다. 혹시나 아까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문 앞까지야. 들어오면 안 돼.”소원이 소녀처럼 교태를 부린 건 참 드물었다. 육경한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마른기침했다.“나도 며칠 밤을 꼬박해서 체력이 안 돼.”“거짓말하지 마.”소원이 육경한을 반박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아까 욕구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육경한이 멈칫하더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입가에 걸린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소원이 돌아온 뒤로 육경한은 처음 이렇게 많이 웃어봤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성격은 변하기 힘들었다.“소원아,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지?”소원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비아냥댔다.“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는데 내가 없다고 해봤자 믿어줄 것도 아니잖아.”육경한이 오히려 되물었다.“믿어도 돼?”주변은 아주 고요했다. 육경한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었다.“소원아, 믿어도 되냐고.”육경한이 고집스럽게
모든 증오를 그녀는 더 깊고 먼 곳으로 숨겼다.두 사람이 헤어지려 할 때, 처음으로 묘한 감정이 솟구친 육경한은 긴 다리를 뻗어 문을 막으며 웃으며 말했다.“정말로 들어가게 안 해 줄 거야?”소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아까 분명 약속했잖아.”하지만 육경한은 성큼 한 발을 내디뎌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소원이 화를 내려는 순간 그는 그녀를 풀어주며 가볍게 웃었다.“알아.”곧 육경한은 예의 바르게 물러나 문틀에 기대어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내일 밤 데리러 올게.”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감정이 실린 ‘쾅’하는 문 닫는 소리였다.육경한은 꽉 닫힌 문을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떠났다.그는 알지 못했다. 문 뒤에서 소원은 시종일관 영상 초인종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남자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려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 그녀는 창가로 달려가 육경한의 차가 떠나는 것도 직접 확인했다.검은색 마이바흐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마자 소원은 즉시 찬장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해 금고를 열고 별 기능이 없는 구식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아주머니, 아침 6시 비행기 표를 예약했어요. 지금 짐을 챙기세요. 조금 있으면 차가 아주머니와 유진이를 공항으로 데리러 갈 거예요. 도착 후에도 차가 준비되어 있을 테니 우리는 도착 후에 다시 만나요.”전화를 끊은 후, 소원은 유심 카드를 뽑아 라이터로 칩을 까맣게 태운 뒤 반으로 쪼개서 변기에 흘려보냈다.핸드폰 케이스는 칼 손잡이로 부숴 쓰레기봉투에 담아 가져갈 준비를 했다.그런 다음 미리 준비해 둔 짐을 꺼내 검은색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신중한 판단으로 소원은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가지 않고 아파트 단지의 임시 주차장으로 가서 눈에 띄지 않는 폭스바겐 차에 올랐다.그렇게 차를 몰고 뒷문으로 나가려 했지만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경비실의 사람들
당황한 표정으로 소원은 서현재를 바라보며 말했다.“서현재, 네가 왜 여기에...”하지만 서현재는 아무 말도 없이 지팡이를 꺼내 들어 몸을 일으킨 후 지팡이를 내려놓고 방금 지팡이를 짚었던 왼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주었다.소원은 그가 오른 손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일어서자마자 그녀는 서현재의 손에 이끌려 옆에 있던 한 대의 SUV에 탔다.걸어가는 도중, 소원은 서현재가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쪽 다리도 심하게 다쳐서 절뚝거리며 걷는다는 것을 발견했다.소원의 마음이 아려왔다.“현재야,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일단 차에 타요.”소원이 차에 오르자 서현재는 고개를 숙여 손을 내밀며 말했다.“키 줘요.”“키?”“네. 줘요.”그러자 소원은 멍하니 차 키를 건넸고 서현재는 차 키를 받아 짐가방을 실어 넣었다.차 문을 닫고 그는 뒷좌석에 앉으며 말했다.“비행기 타려고 했어요? 타지 마요. 내가 친구한테 부탁해서 가짜 탑승 기록을 만들어놨어요. 유진이 쪽도 비행기 기록을 취소했고 누나가 말한 장소로 유진이랑 아주머니를 데려가도록 차를 준비했어요.”그러더니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아마 지금쯤 출발했을 거예요.”소원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서현재, 너 미쳤어? 나랑 엮이지 말고 빨리 떠나. 사람들이 보기 전에...”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차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차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서현재는 소원은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으며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말했다.“가려면 같이 가요.”그의 얼굴에 남아 있는 흉터를 보자마자 소원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너 바보야? 진짜...”서현재는 한 손으로 소원은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다.그래서 소매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우리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약속했잖아요. 누나 나 버리려는 거예요?”더 이상 소원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넌
이 순간, 어떤 감정 때문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아마도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연민일 수도 아니면 무엇인가가 질적으로 변하는 감정일 수도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서현재의 손에 안심하고 맡겼다.서현재는 소원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차는 빠르게 달려 남안 도로로 들어섰다.소원은 열려 있는 선루프를 통해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을 바라보며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비현실감을 느꼈다.“우리 정말로 도망쳐 나온 거야?”“네. 나왔어요.”소원이 물었다.“넌 내가 오늘 밤 떠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오늘 간호사가 나한테 쪽지를 전해준 후에 짐작했어요.”떠나기 전에, 그녀는 서현재도 같은 병원에 있다는 걸 알고 간호사에게 쪽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그 쪽지에는 서씨 집안을 떠나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서진태는 아주 잔인한 사람이었다. 비록 친가족이라도 중요한 순간이 오면 주저 없이 버릴 사람이었다.소원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2시 31분이었다.그녀는 앞에 있는 LCD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저 화면으로 뉴스 볼 수 있지?”“볼 수 있어요.”“켜봐.”그녀가 말했다.화면이 켜지자 뉴스 속보, 경제 속보, 연예 속보에서 폭발적인 뉴스를 일제히 보도했다.유민 그룹의 대표와 한 여성이 클럽에서 촬영된 고화질 영상이 공개된 것이었다.화면 속 남자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했고 거의 학대에 가까웠다.밑에는 뜨거운 반응의 댓글들이 쏟아졌다.[이게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이 노는 방식인가?][이게 유민 그룹 대표 육경한이라고? 이건 좀 변태적인데?][여자가 자발적이었다 해도 이렇게 더러운 방식으로 놀면 안 되지...][육경한은 말을 너무 독하고 악랄하게 해. 협박처럼 들리는데? 그리고 명확하게 보이는 화질은 아니지만 누군가 맞고 있는 것 같은데?]“봤지?”소원이 말했다.“그날 내가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어.”소원은 육경한과 만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피할 수 없
그날 밤 이후로 윤혜인은 며칠 동안 이준혁을 다시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같은 도시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혜인은 만약 이준혁이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 아마 평생 다시는 그와 마주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그날 밤 이준혁의 차가운 태도와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이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밤이 되어 눈을 감기만 하면 윤혜인은 이준혁이 폭약이 가득 실린 차에서 자신을 밀어내던 그 순간의 결연한 눈빛이 떠올랐다.그때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눈빛과 지금의 차갑고 무관심한 눈빛.‘지금의 준혁 씨는 정말 그 사람이 맞는 걸까?’오후가 되어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름이는 또다시 자신을 구해준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아마도 혈연의 끈 때문인지 아름이는 구출된 이후 몇 번이나 문현미의 상태를 물어보았다.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윤혜인은 아름이를 데리고 문현미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준혁이 내린 금지령 때문에 그녀는 아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우리 음식을 좀 만들어서 할머니 병실 밖에 두자. 그때 엄마가 들어가 볼게. 들어갈 수 없다면 우리 마음만 전해도 괜찮아.”그러자 아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 아름이 말 잘 들을게요.”딸의 순종적인 모습에 윤혜인의 마음이 아려왔다.사실 아름이는 아빠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홍 아줌마에게 전했었지만 곧 윤혜인과 이준혁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걸 눈치채고 윤혜인 앞에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윤혜인은 직접 국을 끓였다. 하지만 마음이 불안한 탓인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윤혜인은 뜨거운 국에 데어 손에 물집이 두 개나 생겼다.그녀는 간단하게 붕대로 감싸고 국을 들고 아름이와 함께 여은이 운전하는 차에 타 병원으로 향했다.문현미가 있는 VIP층에 도착했을 때, 예상대로 문현미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혹여 아이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하여 윤혜인은 경호원에게 아름이를 언급했다.어쨌든 그녀가 목숨을 걸고 구한 아이이니 아름이를 보고 싶지 않을 이유
보온병을 막 내려놓고 돌아선 윤혜인의 눈에 바로 이준혁이 다가오는 모습이 들어왔다.그 역시 문현미를 보러 온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윤혜인의 옆을 지나가며 이준혁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윤혜인은 잠시 멍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불렀다.“준혁 씨.”그제야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감정 없이 ‘응'이라고 답했다.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더욱 차갑고 냉정하게 보였다.윤혜인은 아름이를 데리고 문현미를 한번 보고 싶었다. 예전에 문현미가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든 간에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구해주었으니 마땅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게다가 이준혁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문현미만이 윤혜인을 믿어주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이준혁이 불쾌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간절히 요청했다.“아주머니를 잠깐만 뵐 수 있을까요?”“안 돼.”이준혁은 냉담하게 말했다.윤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했다.“정말 잠깐만 볼게요. 방해하지 않을게요...”하지만 윤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가로막았다.“볼일 없으면 떠나. 외부인은 받지 않으니까.”‘외부인...’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윤혜인은 손이 떨렸다.그들 사이의 관계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외부인'이라는 말로 전부 설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조금 전까지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경호원들에게 말했던 윤혜인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녀는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해해서 죄송합니다.”곧 떠나려는 순간, 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외부 물건을 받으라고 했어?”그러자 경호원이 서둘러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사모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버려!”남자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돌아설 때, 윤혜인은 자신이 4시간 동안 끓이고 손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정성 들인 국이 병원의 쓰레기통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았다.그동안 그녀는 이준혁을 보통의 사고방
왜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윤혜인을 이리도 상처받게 한 것이냐고 말이다.아름이는 울면서 마음속에 있던 말을 참지 못하고 쏟아냈다.“나쁜 아빠! 엄마를 슬프게 해서 이제는 더 이상 아빠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는 아빠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예요!”아름이는 울며 발끝을 세워 이준혁을 향해 주먹질하다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순간 바닥에 엎어지며 아이는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여은이 재빠르게 움직여 윤혜인보다 먼저 아름이를 안아 올렸다.그들이 서 있던 위치에서 봤을 때 마치 이준혁이 아름이를 짜증스럽게 밀어낸 것처럼 보였다.이 행동에 윤혜인은 즉각 분노를 터뜨렸다.“준혁 씨, 뭐 하는 거예요?!”그녀는 이준혁을 세게 밀쳤다. 예상치 못한 것은 그 키 큰 남자가 윤혜인이 밀쳤다고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그러나 그 순간 윤혜인은 이런 디테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윤혜인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준혁 씨, 내가 정말 잘못 봤어요. 당신을 믿은 내가 바보였어요!”그가 냉담하게 대했을 때, 심지어 자신이 끓인 국을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조차 그녀는 울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윤혜인은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왜 우리 아름이까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냐고...’굵은 눈물이 한 방울씩 그녀의 뺨을 타고 떨어졌고 그 눈물은 하나하나 이준혁의 심장을 때렸다.이준혁은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억누르며 자신을 애써 무심하게 서 있게 만들었다.여은이 울고 있는 아름이를 안은 채 윤혜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아가씨, 우리 가요.”윤혜인은 자신이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어 단호하게 돌아섰다.그 뒤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준혁이 서 있었다. 고통을 참느라고 그의 턱 근육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겉으로는 냉정한 척하며 그는 다시 한번 아름이와 윤혜인을 지나쳐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자마자 그의 큰 몸이 갑자기 ‘쿵'하며
하지만 이준혁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 윤혜인과 아름이의 안전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어야 했다.이준혁이 윤혜인을 버렸다고 말이다.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평생 곁에 두고 싶었던 사람을 직접 밀어내야 한다는 고통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이준혁은 손을 꽉 쥐었다가 다시 풀며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구운은 갔어?”“갔습니다. 아까 모퉁이에서 전부 지켜보더라고요. 사모님을 따라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만...”그러자 이준혁은 갑자기 주훈의 말을 가로채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그 호칭, 앞으로는 절대 쓰지 마.”습관이 되어 윤혜인을 종종 사모님이라 부르던 주훈은 즉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혜인 씨라고 부르겠습니다.”그제야 이준혁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이 시점에서 한구운도 감히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할 거야. 게다가 여은이 있는 한, 쉽게 이득을 볼 수 없을 거고.’주훈은 계속해서 보고했다.“이 매니저님께서는 간호사를 매수해 병실 상황을 알아보려 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미리 준비해둔 대로 잘 대처했고요.”병상에 누워 있는 여자는 문현미와 닮은 점이 7할이나 되었다.하지만 진짜 문현미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이미 해외로 이송돼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다.문현미가 깨어났다고 발표한 것은 이천수가 겁먹도록 하기 위한 계획이었다.주훈은 덧붙였다.“그리고 주진희 씨가 살해당한 것이 확인되었는데 시신은 800㎞ 떨어진 저수지에서 발견됐습니다.”그러자 더 날카로워진 표정으로 이준혁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지금은 건드리지 말고 소문을 막은 상태에서 주 집사님의 장례를 잘 치러 줘.”“알겠습니다, 대표님.”이준혁은 마비된 다리를 움직여 억지로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머릿속이 어지러워 하마터면 균형을 잃을 뻔했다.주훈은 그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조금 더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야 당연히 괜찮죠.”소원은 매우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약을 바라보며 몇 초 동안 깊이 생각했다가 다시 약을 가방에 넣었다. 약을 먹고 부작용이 생기면 곤란한 상황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약을 먹을 만한 안전한 시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주석훈과 소원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세심하게 카페인이 안 들어간 재스민차를 주문해 주며 말했다.“오후니까 차 마셔요.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잘 거예요.”“고마워요, 주 변호사님.”소원은 처음부터 주석훈에 대한 인상이 좋았었다.그는 깔끔한 인상에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평소엔 항상 검은색이나 회색 정장을 입고 다녔다.성격도 온화하고 얼핏 보면 조용해 보였지만 법정에서는 논리적인 말들로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변호사들과는 또 스타일이 달랐다. 주석훈은 매번 자신의 풍부한 지식과 논리를 바탕으로 상대를 무방비하게 만들고는 그 타이밍에 결정적인 질문을 던져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편이었다.두 사람은 그 사건의 여러 측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자 주석훈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소원 씨, 이번에는 제가 변호사 이석훈의 이름을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반드시 면회권을 따낼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주 변호사님, 너무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냥 함께 최선을 다하면 돼요. 보장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저는 변호사님의 실력을 믿으니까요.”주석훈이 이렇게까지 진지한 표정을 짓자 소원은 오히려 민망해졌다. 육경한과의 소송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게다가 보장까지 하겠다고 하다니...’“소원 씨, 저를 굳이 변호사님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요. 너무 딱딱해 보이잖아요.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주석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럼 주 변호사님도 존칭 쓰지 마세요. 우리 서로 편하게 말해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원은 계속 그를 주 변호사님이라 불렀다. 주석훈은 그녀가 쉽게 말을
소원은 아이를 보호할 자신이 없었고 아이가 고통 속에서 자라는 것보다 차라리 이 세상에 오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생수 한 병을 사서 약을 꺼내 먹으려 했다.이때 갑자기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에 소원의 소송을 도왔던 주석훈 변호사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소원 씨, 현재 면회권을 위해 변호사를 찾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주석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소원은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변호사들도 그들만의 소셜 서클이 있어서 이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변호사 커뮤니티 내에서는 이미 널리 퍼졌을 것이다.육경한이 그녀의 소송을 맡지 못하도록 명령하는 바람에 현재 많은 변호사가 그녀의 의뢰를 거절한 상황이다.“맞아요, 주 변호사님.”소원은 주 변호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지난번 양육권 소송 때 주석훈 변호사가 그녀를 도와준 후 그가 근무하는 국내 법률사무소가 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육경한이 한 짓이 틀림없었다.주석훈 변호사는 현재 해외에서 일하고 있어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일로 해외에 있는 주석훈 변호사를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어떻게 되고 있나요, 소원 씨?”주석훈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직 찾고 있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약 적합한 변호사를 아직 찾지 못했다면 제가 그 사건을 맡아도 될까요?”소원은 잠깐 멈칫하다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주 변호사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저는 지금 국내에 있습니다. 제가 소원 씨 소송을 맡는 게 어떠신가요?”주석훈은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소송에서 승소하지 못해 너무 죄송했습니다. 이번 면회권 소송이라면 자신 있으니 맡겨주세요. 해외 M그룹의 이혼 및 양육권 사건을 맡았을 때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양육권은 좀 어렵지만 면회권은 문제없어요.”소원은 미안함을 느끼며 말했다.“저 때문에 번거로우셨
이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조차 사치일 정도였다.서현재는 평생 소원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원이 잘 지내기만 한다면 이대로 서서히 멀어지는 것도 괜찮았다. 그녀가 필요할 때만 나타나서 그녀 곁을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소원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의뢰한 법률사무소의 영업 정지 소식을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육경한이 한 짓임을 눈치챘다.이제부터 그녀의 소송을 맡는 법률사무소는 하나도 빠짐없이 육경한의 강렬한 보복을 받을 것이다.그녀는 이 소송을 맡아줄 사람을 더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서 머리가 아파 났다. 육경한이 그녀와 유진의 만남을 막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유진이는 내 아이야. 육경한 당신이 뭐가 돼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유진이가 아기였을 때도 내가 곁을 지켜주지 못했는데 이제는 만나는 것마저 막는다니.’이 생각에 그녀는 배 속에 자리 잡은 작은 생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미안해, 엄마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널 낳을 수 없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그녀는 육경한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고 싶었다. 끝까지 함께할 생각이 없다면 더는 얽힐 필요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의 소원은 어린아이를 잘 키울 자신감이 없었다.그녀는 유진이가 무사히 자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어머니와 유진이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아버지를 따라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소원은 다른 법률사무소에서 그녀의 의뢰를 거절했다고 하여 소송을 접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육경한과 맞서 싸울 것이다.유명한 법률사무소들을 다시 한번 연락해 보았으나 예외 없이 전부 거절당했다.심지어 어떤 곳은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면담을 거절했으니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그 누구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사람을 위해 미우 그룹의 대표님의 노여움을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미우 그룹의 변호사들을 상대할 승산도 없을뿐더러 설
소원은 복잡한 눈빛으로 대답했다.“저는 지금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요.”의사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원하지 않으신다면 다음 달 10일 전까지 약물로 낙태하는 것을 추천해요. 그 이후로는 약물 낙태가 불가능해서 인공 유산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몸에 더 심한 손상을 줄 수 있어요.”의사는 안타까운 듯 말을 이었다.“엄마가 이렇게 아름다우니 분명 아이도 예쁘게 태어날 거예요. 집에 가서 다시 한번 얘기해 보시고 섣불리 결정하지 마세요.”“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볼게요.”소원은 대답을 마치고 진료실 문을 나서자마자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병원 밖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하느님이 왜 그녀에게 이런 어이없는 장난을 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육경한의 아이를 다시 임신하다니.하느님은 정말 그녀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끝까지 괴롭혀서 피를 말리기 전까지는 성이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소원 누나?”소원이 고개를 들자 서현재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소원 누나가 왜 병원에 있어요? 몸이 안 좋아요?”“아무것도 아니야.”소원은 손에 들고 있던 검사 결과 보고서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그냥 요즘 소화가 잘 안돼서.”“검사는 받았어요?”서현재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검사 결과 보고서 제가 한번 봐 드릴까요?”“아니야, 괜찮아.”소원은 보고서를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별문제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서현재의 상황이 인제야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기에 소원은 자기 일로 그에게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저번에 내가 말했던 그 약 결과 나왔어? 어때?”“네, 나왔어요.”서현재가 대답했다.“그 약은 아주 귀중한 한약이었어요. 희귀한 재료로 만든 거라서 병으로 망가진 몸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유진이의 경우에는 이식 수술을 한 후에 그 약을 복
다른 건 제쳐두고 서씨 가문이 지금처럼 서서히 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선 그룹의 투자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은 서현재가 출중한 개인 능력으로 이준혁을 설득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오랜 친구로서 육경한은 이준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이 프로젝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설득을 해도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보다도 서현재가 어떻게 이준혁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유일한 가능성은 윤혜인이었다.아마도 소원이 윤혜인을 찾아간 것 같다.육경한은 쌀쌀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빠르게 움직이는군. 서현재가 조금이라도 고통받는 걸 보기 싫었나 보지.’“그 일은 잠시 미뤄두자.”육경한은 이준혁과 대립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에게서 프로젝트에 관한 정보를 캐어낼 생각이었다.책상 위에는 소원이 의뢰한 변호사가 보내온 서류가 놓여 있었다.‘정말 대단한걸. 감히 날 상대할 변호사를 찾아내다니. 그 변호사도 대담하게 이 사건을 수임했다니. 신기하네.’양육권 분쟁? 면접권?육경한은 이미 소원에게 서현재를 선택한다면 양육권을 가져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내 아들은 다른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면 안 돼.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어.’육경한은 서류에 적힌 법률사무소를 가리키며 지시했다.“저 법률사무소가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게 해.”곁에 있는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육 대표님.”곧 그 법률사무소는 세무 문제로 세무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한편 그 소식을 들은 소원은 마침 병원에서 몸 상태를 검사받고 있었다.그녀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최악의 시나리오가 반복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임신 테스트기로는 임신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계속 메스꺼움과 구토 증상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소원은 혈액 검사를 받았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한참 동안 기다린 뒤에야 그녀는 자신의 검사 결과를
“응, 네 말이 맞아.”이 점에 대해서는 소원이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서현재의 가장 큰 꿈은 의사가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하지만 서현재는 그녀 때문에 이 복잡한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소원은 서현재에게 미안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고집이 아주 세기에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소원은 윤혜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탁자 위에 놓인 블루베리 잼을 토스트에 발라 먹으려 했다.블루베리 잼 통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달콤한 냄새가 퍼지더니 갑자기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났다.윤혜인이 헛구역질 소리를 듣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야, 소원아?”“난 괜찮아, 방금 위가 좀 쓰려서 그래.”블루베리 잼을 살피니 변질한 것도 아니고 유통기한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원인인지 소원은 그 냄새를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잼을 다시 캐비닛에 넣으며 윤혜인의 말을 들었다.“깜짝 놀랐네. 난 네가 또 임신한 줄 알았어.”소원은 잠깐 멈칫하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에이. 그럴 리가.”윤혜인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첫째 때는 괜찮았는데 둘째 임신 때는 갑자기 예민해져서 조금이라도 강한 냄새를 맡으면 토할 것 같았어. 임신 4개월이 지나니까 많이 나아져서 다행이지.”그 말을 들은 소원은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임신? 그건 절대 아닐 거야. 나는 육경한이랑...’소원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날 하던 도중 무언가 몸 안에서 터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았지만 당시 육경한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소원은 깊은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그녀의 몸 상태로 임신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절대 불가능한 일이다.전화를 끊은 후, 소원은 휴대전화로 이번 달 생리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그녀의 생리는 항상 불규칙적이라 늦춰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하지만 지금은...소원은 급히 임신 테스트기를
지금까지 안지영은 집안의 보물처럼 어른들 손에서 애지중지하며 자랐고 단 한 번도 매를 맞은 적이 없었다.아버지는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그녀를 불쌍히 여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뻐했다.하지만 아들과 손녀 사이에서 박혜순은 망설임 없이 아들을 선택했다. 안상철은 그녀가 10달을 고생해서 낳은 핏줄이기 때문이다.박혜순은 안지영이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할머니의 갑작스러운 공격 때문에 안지영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그 충격으로 휴대전화도 멀리 떨어져 나가 할머니에게 빼앗겼다.할머니는 엄숙한 표정으로 손녀에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일은 다 네 뜻대로 해줄 수 있지만 네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만은 안 된다. 네가 기어코 사실을 알리겠다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너를 손녀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박혜순은 방을 떠나더니 밖으로부터 문을 단단히 잠갔다.안지영은 굳게 잠긴 방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평소 그토록 자신을 아껴주던 할머니께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낯설게 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소원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이 일은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고 결과가 그리 빨리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안상철은 이미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서 어찌할 바 모르는 상태였고 그를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소원은 많이 피곤했는지 요즘 따라 잠이 많아졌다. 한번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벌써 10시가 넘어 있었다. 물을 마시려고 일어서자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워서 넘어질 뻔했는데 다행히 탁자를 잡아 몸을 겨우 지탱할 수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그녀는 따뜻한 꿀물을 마시며 에너지를 보충했다.이때 전화가 울렸다.윤혜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소원아, 아침에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더라? 무슨 일 있어?”“그땐 자고 있었어, 방금 깼거든.”소원이 설명
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약속한 대로 해내지 못했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소진용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다.그는 이렇게 하면 소진용이 죽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소진용은 큰 풍파를 겪어본 사람이니 이런 일로 자살하지 않을 것이고 더 강해져서 유일한 딸을 지키려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가던 길에 그는 소진용이 정말로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안상철은 그동안 숨어 지내며 소진용 죽음의 진실을 밝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신비로운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안지영은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알았어요, 아빠.”“지영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그냥 아빠 말만 들어. 아빠는 절대 너를 해치지 않을 거야. 이번 일만 지나면 아빠랑 외국으로 가자. 우리 함께 이곳을 떠나서 평화롭게 살자. 응?”안지영은 현재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져 있었기에 기운 없이 대답했다.“알았어요, 아빠.”전화를 끊은 안지영은 핸드폰을 바라보며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상황을 소원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빠가 소원 언니의 아빠를 죽이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그가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이걸 소원 언니에게 알려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더니 할머니가 다가오며 말했다.“지영아, 핸드폰을 할머니에게 주렴.”안지영은 할머니가 자신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당황한 기색으로 핸드폰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할머니, 왜 이러세요? 나가게도 안 해주시면서 이젠 핸드폰도 못 쓰게 하시려고요?”박혜순은 안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네가 너희 아빠랑 통화한 거 다 들었다. 지영아, 난 네가 아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그건 네 아빠야, 바보짓
안지영은 북받쳐 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더는 통제할 길이 없었고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양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아빠... 어릴 적부터 늘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나요? 아빠도 항상 그런 분이셨잖아요? 만약 오해가 있다면 그분들에게 설명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이렇게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숨어 살 필요가 없을 텐데.”안지영은 안상철을 설득하며 그가 진실을 밝히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지영아!”안상철도 목소리를 높였다.“내가 말했잖아.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몸조리나 잘하고 있어. 곧 너를 데리고 해외로 나갈 거다. 외국에 가면 우리 가족도 더는 숨어 살 필요 없을 거야.”“외국이라니요??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는요? 노약자분들께서 견디실 수 있겠어요?”안지영은 어릴 적 가족과 해외로 떠났던 고된 시절이 생각났다. 노인이 어떻게 그런 고생을 견뎌내겠는가.“먼저 너를 데리고 간 뒤 조금 기다렸다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셔 올 거다. 걱정하지 말아라. 할머니 할아버지를 돌봐드릴 사람을 구해놓을 테니 괜찮을 거야.”안상철이 설명했다.지금까지 희미한 기대를 품고 있던 안지영에게 안상철의 이 말은 모든 희망을 꺾어버리는 결정타가 되었다.그녀는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해외 이민은 사실 도피 행각이었고 정상적인 수단으로 이 나라를 떠나는 것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이로부터 안지영의 마음속 안상철의 모습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존경해 온 아버지가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을 저지르다니.“아빠, 왜 그러셨어요?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소원 언니 부모님은 우리 가족들에게 그렇게 잘해주셨는데. 다 좋은 분들이셨잖아요. 그런데 왜?”안지영이 실망에 찬 눈길로 안상철을 바라보며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차라리 진실을 모른 채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실을 알고 난 뒤로부터 그녀는 짙은 후회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배은망덕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