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민이 입술을 가리더니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어머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냥 친구가 말해줘서 알고 있었을 뿐이에요. 저 모함할 생각하지 마세요. 너무 무서워요. 근데..”원지민이 멈칫하더니 억지로 쥐어짠 눈물을 닦아내는 척하며 말했다.“금방 임산부를 함부로 대하려고 한 거 사람들이 다 봤어요...”문현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원지민이 일부러 쇼하면서 목격자까지 얻은 것이다. 이 여자는 악독하다는 말로 묘사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모기 같았다.문현미는 화가 치밀어올라 눈시울마저 붉어졌다.“내 손녀 어디 숨겼어. 얼른 내놓지 못해? 내가 귀신이 돼서라도 너 가만히 놔두나 봐라.”원지민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이더니 느긋하게 말했다.“어머님, 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성격이 더 급해지시는 거예요? 제가 드린 약 꼬박꼬박 드시고 있죠? 제가 어머님을 왜 해치겠어요. 약을 안 드시니까 지금 이렇게 화를 참지 못하시는 거예요.”문현미는 다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녀가 어디 갔는지 알 수가 없으니 정말 마음이 바질바질 타는 것 같았다. 할머니인 문현미도 그런데 윤혜인은 오죽하겠는가.이준혁이 사라지고 문현미는 주변 사람들의 민낯을 알아보게 되었다.윤혜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준혁이 떠난 자리를 넘보는 하이에나들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문현미는 전에 눈이 멀어 며느리를 밀어낸 빌런이 되었고 아들 이준혁이 윤혜인을 잃고 몇 년간 슬픔 속에 지내게 했다.윤혜인이 강에 빠진 게 문현미 잘못은 아니지만 생각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었다. 그때 막지만 않았다면, 윤혜인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두 사람이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알콩달콩 재미난 삶을 살았을 것이다.사람은 잃고 나서야 후회하고 아파하게 된다.문현미는 지금 손녀가 안전하게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기만을 빌었다.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든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설사 그게 목숨일지라도 말이다.문현미는 애써 진정
“쯧쯧...”원지민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또 다급해하시네요. 아직 말 안 끝났잖아요.”원지민이 까만색 핸드폰을 꺼내 문현미에게 건네주며 귀띔했다.“전화에서 알려주는 대로 하면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면 안 돼요. 그러면 앞으로 영원히 사랑하는 손녀를 만날 수 없을 거예요.”원지민은 이렇게 말하면서 껄껄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묘하게 소름이 끼쳤다.문현미는 원지민이 독한 여자라는 걸 알았기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병원에서 나와 얼마 걸지도 못했는데 앞을 지키고 있던 윤혜인과 마주쳤다.윤혜인은 거리낌 없이 문현미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아주머니, 원지민이 뭐라든가요? 아름이 행방을 알고 있든가요?”문현미가 침묵했다.시간이 일분일초 지나가자 윤혜인은 다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골든 타임 48시간이 거의 다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아름의 행방은 전혀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곽경천이 강력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경찰서에 입건되긴 했지만 여전히 아무 단서도 없었다.곽아름은 홍 아주머니가 데려갔기에 경찰은 아는 사람의 유괴라고 의심해 홍 아줌마의 주변 사람들을 조사하는 데 주력했다. 구지윤도 홍 아주머니의 딸로서 소환 조사를 받았다.윤혜인은 홍 아주머니가 곽아름을 유괴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홍 아주머니는 곽아름을 친손녀처럼 아끼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경찰은 믿지 않았고 새로운 단서도 더 나오지 않았다.윤혜인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문현미가 부축했다. 윤혜인이 울먹이며 문현미에게 물었다.“아주머니, 아름이 소식 알고 있죠? 제발 알려주시면 안 돼요?”문현미는 한참 고민하다가 버벅거리며 말했다.“아니... 없어...”윤혜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윤혜인이 울면서 말했다.“아름이 어릴 때부터 자폐증 증상이 있었어요. 제때 치료를 받아서 심각한 후유증으로 발전하지 않은 거예요. 환경이 바뀌면 병이 다시 도질 수도 있어요.
“같은 배에 탔는데 같은 마음은 아니구나. 무슨 일 있으면 둘이 토론하고 다시 얘기해.”“...”상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윤혜인이 전화를 끊었다.역겨운 사람끼리 서로 물고 뜯게 할 생각이었다. 개들이 싸워봤자 털만 잔뜩 먹을 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운전기사가 윤혜인에게 물었다.“아가씨, 어디로 모실까요?”윤혜인이 대답했다.“잠깐만요.”그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오빠, 문현미 아주머니 위치 좀 파악해 줄 수 있어?”곽경천은 얼른 아래 사람에게 지시하더니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조사하라 했어. 아참, 나도 단서를 좀 찾아냈는데 그 길목 바로 아래 길목에 그 시간대에 지나간 184대의 차량 중 까만 밴 하나가 대포차더라고. 그 차에 아름이가 유괴되었을 수도 있어.”곽경천도 단서를 찾기 위해 밤새 눈을 붙이지 못했다. 몇몇 수하와 밤을 새우며 100여 대나 되는 차량의 가정과 인간관계, 그리고 혐의가 있는지까지 조사했다.곽경천이 다시 물었다.“근데 이준혁 어머니 행방은 왜? 혐의점이 있어?”윤혜인이 말했다.“지금 아름이 찾으러 가는 것 같아서.”곽경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름이를?”“아직 설명하자면 일러. 빨리 위치 추적이나 해줘. 찾으러 가게.”“응. 보냈어.”곽경천은 문현미의 위치를 윤혜인의 핸드폰으로 보냈다.“잠깐만 기다려. 같이 가자.”곽경천이 말했다.“지금 바로 갈 거야. 끊어.”윤혜인이 운전기사에게 위치를 알려주며 그쪽으로 가달라고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 위치가 10분째 미동도 없었기 때문이다.아무리 차가 막힌다 해도 서울에서 이렇게 꽉 막힌 도로는 드물었다. 다행히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윤혜인은 바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길가에는 멈춰 선 차가 보이지 않았다.운전기사에게 잠깐 차를 대라고 하고는 직접 찾으러 내려갔다. 한 바퀴 빙 둘러봤지만 그 어떤 차량의 흔적도 없었다.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게 몇 바퀴 더 돌고 나서야 윤혜인은
윤혜인이 안으로 들어가 차량 행적이 끊긴 곳에서 내렸다.습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간 윤혜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멀지 않은 곳에 문현미가 아이를 안고 서 있었는데 곽아름이었다.“아름아.”윤혜인이 울면서 그쪽으로 다가가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눈물이 마치 줄 끊어진 구슬처럼 하염없이 흘렀다.“아름아, 드디어 너를 찾았어...”하지만 곽아름은 지금 윤혜인의 말에 대꾸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말이다.윤혜인은 얼른 곽아름의 맥박을 짚어봤다. 꽤 안정적인 편이었다.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아 병원에 가서 검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윤혜인이 고개를 들어 문현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아주머니, 아름이 옆에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아름이를 돌보던 아주머니도 같이 사라졌거든요.”문현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바짝 긴장한 채 곽아름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아주머니, 아름이 어디서 찾은 거예요? 한번 가보고 싶어서요.”윤혜인이 물었다.문현미가 강가를 가리켰다. 멀지 않은 곳에 녹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아이는 저 나무 아래서 자고 있었어.”핸드폰 알림에 따라 찾아오면서도 원지민이 다른 수단을 썼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곽아름을 찾을 줄은 몰랐다.윤혜인은 지금 문현미가 어떻게 곽아름을 찾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건 일단 둘째 치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곽아름의 몸 상태와 홍 아주머니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이때 윤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곽경천이 걸어온 전화였다.문현미는 아이를 안고 있는 윤혜인이 전화를 받기 힘들어 보이자 손을 내밀었다.“내가 안을게.”윤혜인이 문현미의 자애로운 눈빛을 보고는 잠깐 망설이다가 곽아름을 넘겨줬다.그러더니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곽경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혜인아, 홍 아주머니 찾았어.”“찾았다고?”“길에 쓰러져 있는 걸 지나
윤혜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문현미에게 밀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몇 미터 밖으로 구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조경석에 부딪히고 나서야 구르는 걸 멈출 수 있었다.등에서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곽아름을 꼭 안은 채 놓지 않았다.하지만 윤혜인이 상처를 살피기도 전에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문현미가 마치 깃털처럼 차에 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아악.”윤혜인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절규하며 몸부림쳤다.바닥에는 문현미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문현미는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사람 살려.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누가 좀 살려주세요.”윤혜인은 아까 구른 탓에 조경석에 기대 꿈쩍도 못했다. 그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사고를 낸 차는 떠나지 않았다.윤혜인이 다시 소리를 내기 전에 까만 세단은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다시 정비하더니 그녀를 향해 질주해 왔다.윤혜인은 머리에서 윙 해지더니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그 차는 윤혜인과 곽아름을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 윤혜인은 그저 곽아름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윤혜인이 힘겹게 곽아름을 안고 일어나려 했지만 까만 세단이 더 빨랐다. 액셀을 풀로 밟고 거의 날아 오다시피 질주해 왔다.두려움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윤혜인은 어쩔 바를 몰라 두 눈을 부릅뜬 채 까만 세단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화살처럼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절체절명의 순간 까만 롤스로이스 하나가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까만 세단이 윤혜인과 매우 가까워졌는데 롤스로이스가 갑자기 언덕에서 나타나더니 정확하게 까만 세단을 들이박았다. 까만 세단이 공중에서 두 동강으로 분해되었다.쾅. 쿵.그렇게 부서진 차는 흙에 빠지고 말았다. 차 안에 있던 사람은 즉사했다. 하지만 까만 롤스로이스는 그대로 습지에 천천히 멈춰 섰다.범퍼가 바닥에 떨어진 것 외에
윤혜인이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는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하지만 살이 많이 빠지고 조각 같은 턱라인이 예전보다 더 튀어나와서 그런지 뭔가 날카로운 느낌이 더해졌다.윤혜인의 불안함은 남자를 보자마자 말끔히 사라졌다. 뭔가 더 말하려는데 남자가 덤덤한 말투로 아무 감정 없이 이렇게 말했다.“문 닫아요.”이 말은 윤혜인이 아니라 구급대원에게 한 말이었다.구급대원은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윤혜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멀리 떠나고 나서도 윤혜인은 꼼짝도 못 했다.곽경천은 원래 곽아름을 데리고 떠나려다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윤혜인을 보고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다가갔다.“혜인아.”윤혜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손은 언제 까졌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곽경천이 다급하게 윤혜인의 손을 잡더니 걱정스레 물었다.“손은 언제 다친 거야?”몸에 힘이 풀린 윤혜인은 그제야 곽경천의 품에 기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나 너무 무서워... 준혁 씨 나 못 알아보는 것 같아...”곽경천도 가슴이 덜컹했지만 얼른 윤혜인을 위로했다.“어머니가 걱정돼서 그랬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준혁의 눈빛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정도가 아니라 낯설 정도였다.눈빛이 어두워진 곽경천이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먼저 병원 가자.”병원에 도착해 곽아름의 몸 상태를 체크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윤혜인은 그제야 한시름 놓고 문현미가 있는 응급실로 향했다.응급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순간 너무 애틋해진 윤혜인은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그렇게 한참 동안 망설이던 윤혜인은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준혁 씨...”이준혁이 천천히 눈까풀을 들었다. 그 눈동자는 차가우면서도 덤덤했다.날씨는 금방 가을에 들어섰지만 윤혜인은 오한을 느꼈다. 응급실이 워낙 차가운 건지는 알 수 없었다.윤혜인이 초롱초
윤혜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왜 그래요...”“윤혜인. 엄마가 지금 너 때문에 응급실에 들어갔는데 왜라니?”이준혁은 더는 윤혜인이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주변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윤혜인은 꽁꽁 얼어붙은 강물에 떨어진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몸이 무거워졌다. 벽을 잡고 나서야 간신히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었다. 윤혜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준혁 씨, 우리...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이 말에 이준혁이 귀한 몸을 돌려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우리? 우리 무슨 사이인데?”윤혜인이 멈칫하더니 말했다.“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이혼까지 한 마당에 사랑은 무슨. 우습지 않아?”이준혁이 서늘하게 말했다. 말투가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사랑했다면 이혼하지도 않았겠지.”이 말에 윤혜인이 어렵게 끌어모았던 용기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얼음장과도 같았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윤혜인.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아직 재결합하기 전 아닌가?”무섭게 몰아치는 언어 공격을 윤혜인은 당해낼 길이 없었다. 파르르 떨려오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처음으로 이준혁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윤혜인이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자 이준혁이 더 싸늘하게 식어버린 목소리로 명령했다.“불필요한 인원은 당장 내보내. 내 허락 없이는 안에 들이지 말고.”불필요한 사람이라...목숨을 걸고 구한 사람이 불필요한 사람이라니, 윤혜인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것 같았다. 가슴을 뭔가 동여맨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이준혁이 살아있다는 희열에 잠겼던 윤혜인은 지금 이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이준혁은 잘빠진 뒷모습만 보여줬다. 윤혜인의 눈동자는 지금 혼돈과 절망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보디가드가 일제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윤혜인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내
“아이고...”김성훈이 어쩔 바를 몰라 하다가 손수건을 건넸다.“일단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눈물은 일단 흐리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었다.윤혜인은 손수건을 받아 들고 아무렇게나 닦았다. 어깨를 파르르 떨며 숨을 참았더니 눈물은 그쳤지만 어깨는 여전히 들썩들썩했다.윤혜인이 이내 고개를 들어 물었다.“이준혁 씨 돌아온 거 알고 있어요?”“음...”김성훈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웅얼거렸다.“알아요.”“그러면 언제 돌아왔는지도 알아요?”윤혜인이 또 물었다.김성훈이 잠깐 고민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어제 오전에 비행기에서 내렸어요.”이 말에 윤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어제 오전에 비행기에서 내렸다면 곽아름의 실종과 그녀가 부딪친 어려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니 오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게 그녀와 곽아름을 위한 게 아니라 문현미를 위해서 온 것이었다.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손바닥만 한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준혁 씨... 무슨 일 있어요?”이에 김성훈이 침묵했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윤혜인 씨. 인제 그만 해요.”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말이었다. 윤혜인은 정신이 혼미해졌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다.“왜 그만해요?”김성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혜인이 캐물었다.“왜 그만해요? 목숨을 바쳐 나를 살렸는데 지금은 왜 그만하라는 거예요?”윤혜인의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김성훈은 그런 윤혜인이 너무 마음 아파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윤혜인 씨. 내 말 들어요. 그냥 준혁이는 이제 없는 셈 쳐요.”그래도 친구였는데 김성훈은 윤혜인이 다치는 게 싫었다. 이준혁의 결심을 김성훈도 옆에서 지켜봤다.윤혜인에게 제일 좋은 보호는 바로 기대가 없다는 것이었다.“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떻게 없는 셈 쳐요...”윤혜인이 입꼬리를 당기더니 못생기게 웃어 보였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으니
소원은 얼굴에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과 두 가문의 원한이 아마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해라도 과거의 상처는 사실이잖아.”그녀는 육경한이 조금이라도 변했다고 해서 과거의 고통을 잊을 수는 없었다. 자기 자신이 더욱 비참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그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육경한, 내가 쉽게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을 위한 거라면 날 그만 보내주고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해. 지금처럼 나를 네 곁에 가두려 하지 말고.”소원이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널 이대로 놓아달라고?”육경한의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다음엔? 네가 내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남자랑 같이 떠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그만해. 난 결혼할 마음 없어.”소원이 정중한 태도로 약속했다.그녀는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버리려 했던 물건이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육경한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내가 널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현재 두 사람 사이에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육경한은 소원이 아버지와 서현재의 일을 조사하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신의 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유진이 때문에 참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 무엇도 육경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려 했지만 소원이 서현재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순간부터 더는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계속 현실을 회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소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육경한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바다처럼 깊고 어두웠다.“소원아, 앞으로 내 앞에서 그 남자 얘기 꺼내지 말고 그 남자랑 접촉하지도 마. 그렇지 않
육경한은 그날 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내 생각은 안 해? 서현재 편을 들 때마다 네가 나한테는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지 생각 안 해봤냐고.”침대 머리맡에 밀쳐진 채 그에게 잡힌 턱에 고통이 밀려왔다.“육경한, 이것 좀 놓고... 얘기해...”하지만 육경한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서현재를 언급할 때마다 온몸에 화가 솟구치며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남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육경한...”소원이 몸부림치며 해명했다.“그날 당신 경호원이 서현재를 갑자기 밀쳐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밀어낸 거야. 약을 먹어서 온몸에 힘이 없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맹세코 당신이 죽길 바란 건 아니야. 그 순간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야. 적어도 당신은 그 사람보다 몸이 멀쩡하니까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소원의 해명을 듣고 육경한의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었지만 오랫동안 그녀에게 냉대받고, 몇 번이고 상처받은 마음이 한 번에 치유될 수는 없었다.육경한이 조롱하듯 말했다.“그 자식 때문에 나한테 거짓말까지 해?”“거짓말 아니야...”소원이 반박했다.“아니라고?” 육경한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내가 죽길 바라지 않았다지만 진아연이 준 미션은 수행하지 않았어?”소원은 당황했다.다 알고 있었구나.진아연과의 거래에 대해서 그는 이미 알고 있었고 진아연이 얼굴을 바꾸고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속으로 삭이며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소원은 소름이 돋았다. 상대는 여전히 모든 걸 손에 쥐고 들여다보는 육경한이었다.“아니야. 그 약을 당신에게 먹이지 않았어. 진아연이 준 약은 내가 침실 세 번째 서랍에 넣어뒀어. 가서 확인해 봐.”소원은 처음부터 육경한에게 약을 먹일 생각은 없었지만 순전히 진아연이라는 사람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진아연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다.진아연의 배후에 있는
육경한은 생각에 잠겼다.“죽이지 마.”소종은 깜짝 놀랐다.“형님, 그 자식까지 지켜줄 거예요?”“약속했어.” 육경한이 말하자 소종은 이를 악물었다.“죽이지만 않을게요.”사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서현재를 죽이고 싶었다. 사지만 발달하고 생각은 단순했던 그는 서현재가 죽으면 그 여자가 착해져서 형님을 더 이상 화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두 사람을 갈라놓는 건 서현재 한 명이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서현재보다 더 심각한 일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많은 오해도 섞여 있지만 오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에 균열을 자아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육경한은 묵인했다. 그 또한 서현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뿐 그가 전혀 다 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소종이 없었으면 팔을 잃은 사람은 그가 됐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독한 그 여자와는 팔 하나로도 눈물 한 방울을 바꾸지 못할 거다.육경한은 냉정하게 말했다.“나도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만 했어.”소종은 금방 알아들었고 육경한의 의미심장한 말에 다시 살아갈 희망까지 타올랐다.“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빨리 나을 거예요.”그래서 서현재 그 자식을 혼내줄 거다.형님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면 아직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육경한은 소종의 눈에서 타오르는 야망을 보며 옳은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종에게 서현재를 상대하게 시키면 그는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이 순간 그는 소종의 이기심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이 죽든 살든 상관이 없다는걸.살게 내버려두어도 반드시 고통을 동반한 삶이 지속되길....소원은 진료실에서 상처를 치료했고 상처를 감싼 뒤 간호사가 나가자 그녀도 나가려는데 육경한이 들어왔다.그의 깊은 시선이 만두처럼 감싸진 소원의 손으로 향하며 이렇게 물었다.“더 불편한 데는 없는지 이참에 검사해 봐.”“아니, 방금 다 검사했어.”
소종의 말은 독사처럼 치명적인 곳을 제대로 공격했다.“소 비서님!” 소원은 소종이 이처럼 도발할 줄은 몰랐다.“그만해!” 육경한이 갑자기 입을 열더니 피가 흐르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경호원에게 말했다.“데려가서 치료해.”소원은 할 말이 남았지만 육경한은 경호원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라며 명령했다.문이 닫히고 소종은 조금 전 막무가내로 몰아붙인 것과 달리 단번에 화가 사그라들었다.“네 뜻은 잘 알아.”육경한은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전 그냥 형님이 제대로 알았으면...”“알아. 나도 똑똑히 보고 있어. 그런데...”육경한은 쓴웃음을 지었다.“난 못 하겠어.”“형님,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만나는데 왜 꼭 그 여자한테 매달리는 거예요?”소종은 무척 이해되지 않았다..매달려도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저런 양심 없는 여자는 그럴 가치가 전혀 없었다.“소종, 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본 적 있어?” 육경한이 갑자기 물었다.“아니요.”사실이었다. 소종은 사랑에 마음을 돌린 적도 없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난 적도 없었다.눈이 높은 건 아니지만 천성적으로 거친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은 그의 돈을 바라거나 다른 목적이 있을 뿐, 그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진 않았다.예전에도 없었는데 지금은 장애인까지 됐으니 더 그럴 일이 없을 거다.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는 건 원하지도 않았다. 적이 그렇게 많은데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없고 아이가 생기면 약점이 되는 데 그건 원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혈혈단신으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게 제일 편하고 자유로웠다.육경한이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만나면 알게 될 거야. 호랑이가 있다는 걸 알고도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뛰어드는걸. 앞에 큰길이 있는데도 굳이 진흙탕으로 발을 내딛는걸. 넌 이번 생에 생사를 함께할 형제고 그 여자는 내가 평생 놓지 못할 사람이야.”육경한은 한 마디로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다.소종은 자신이 어
소원은 소종의 불똥이 그녀에게까지 튈 줄은 몰랐다. 하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소종의 눈에 그녀가 육경한을 먼저 구하지 않은 건 잘못으로 보일 수 있었다.소종이 그녀를 비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터무니없는 질책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녀나 서현재의 목숨은 아무렇게나 버려도 될 정도로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육경한의 표정이 살벌해지며 입술을 다물자 소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전 이 팔 따위 상관없어요. 형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명예로운 일이죠. 절 구해준 날부터 제 목숨은 형님의 것이라고 말했지만 형님께 마음도 없는 여자 때문에 형님이 희생할 필요는 없어요.”소종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육경한의 마음에 꽂히는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똑똑한 그가 소원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리가 있을까.그러나 한번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람이라 눈앞에 깊은 심연이 놓여 있어도 되돌아갈 수가 없었고 그는 지금 도박꾼처럼 백만 분의 1인 가능성에 베팅하고 있었다.“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결정해. 이 팔은 내가 빚진 걸로 해. 네가 뭘 원하든 다 들어줄게.”소종은 화를 낼 힘도 없는지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형님, 저 여자는 건드리지 않겠지만 서현재는 팔 하나를 내놔야 해요.”소종의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 소원이 정신을 차리고 매섭게 쏘아붙였다.“따지고 싶으면 나한테 따지면 되지 서현재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이 모든 사건에서 제일 억울한 건 서현재였다. 그때 그녀가 육경한을 살렸으면 서현재는 지금 온전한 시신조차 없이 나무에 깔려 흙더미가 되었을 거다.나무가 무너진 것은 재난이었고 육경한 일행이 그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그런 참사를 겪지 않아도 됐을 거다.마지막에 쏜 화살 때문에 그들이 알아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해도 육경한이 그들을 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이제 소종이 그녀 때문에 팔을 잃은 것이라 탓해도 인정하겠지만 그 책임을 서현재에게 돌리는 건 다소 억지였다.그녀가 사람을
경호원이 소종을 놓아주려던 찰나에 그가 던진 찻잔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경호원은 그가 자신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서 다시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모두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차갑고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손 놔!”육경한이 걸어 들어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경호원들은 소종을 힐끗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형님, 저 좀 내버려두세요.” 소종은 조금 전처럼 미쳐 날뛰지 않았고 눈빛도 차츰 차분해졌지만 아직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난 살고 싶지 않아요.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산속에서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는 육경한이 그를 버리지도,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그러나 이제 완전히 깨어나 불구가 된 몸을 보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죽으려는 생각을 했지만 칼도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게 그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수년 동안 그는 국내외에 많은 적을 만들었는데 힘없이 적에게 잡혀 고문당해 죽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단번에 끝내면 남에게 모욕을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그는 체념한 모습으로 말했다.“형님, 저를 보내주세요. 평생 저를 지켜줄 수는 없잖아요.”소종의 뜻은 분명했다. 잠시는 가능해도 평생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며 이번에 죽지 못하면 또 시도하겠다는 말이다.언제든 죽을 기회는 있다.소종이 정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한쪽 팔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거다.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팔이 없어도 목숨은 온전하지 않나?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 세상 저마다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오랫동안 무력을 사용했던 소종에게 팔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잃는 것과 같았고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육경한은 자리에 서서 엉망이 된 소
“필요 없어요.” 소원이 손을 흔들었다.이 시간에 육경한은 분명 병원에 있거나 일하고 있을 텐데 전화해도 무슨 말을 하겠나.그가 이미 마음속으로 확정 지은 일이면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식사를 마친 후 잠시 유진과 놀아주다가 병원으로 향했다.아침에 그녀는 서현재로부터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현재 일행이 돌아왔고 육경한은 약속대로 서현재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종합검진을 위해 병원에 간 서현재는 소원에게도 언젠가 종합검진을 받으라고 말했다.그 약의 성분을 알 수 없어 혹시나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병원에 도착한 소원은 먼저 검진받으러 갔지만 결과는 며칠이 지나야 나온다고 하니 소종을 보러 갔다.병동 입구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소원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말했다.“사모님, 소 비서님 보러 오셨나요?”“네.” 소원이 물었다.“소 비서님은 쉬고 계세요?”“일어났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경호원이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려고 하자 소원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니요. 나 혼자 들어갈게요.”소원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소종이 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막 가려는데 갑자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깜짝 놀란 소원이 문을 확 열고 들어갔더니 온몸이 바닥에 쓰러진 채 무언가를 집으려고 몸부림치는 소종의 모습이 보였다.예리한 눈썰미로 소종이 집어 든 것이 단검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그는 망설임 없이 칼로 목을 그었다.그가 죽으려고 한다!소원이 달려들어 칼을 빼앗으려 했지만 소종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팔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의 무공이 남아 있었고 여자인 소원은 힘으로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두 사람의 몸싸움 과정에서 칼날이 소원의 손에 깊은 상처를 내고 피가 솟구치듯 흘러내렸다.소종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젠장, 죽고 싶어요?”소원의 머릿속에는 소종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뭐라 해도 절대
전부 다 봤지만 유독 지금처럼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차가움이 배어 있을 정도로 싸늘한 모습은 처음이다.소종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는 안다.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후 소종의 존재는 그에게 가족 못지않았다.그의 팔을 끊어낸 것에 그녀의 책임도 없지는 않았다.만약 제때 육경한에게 알렸다면 육경한의 기량으로 피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그녀의 눈에는 경호원들에게 뿌리쳐지는 서현재만 보였을 뿐이었다.서현재는 약을 먹어 온몸에 힘이 없던 터라 죽었을 게 분명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그런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죄악처럼 느껴졌다.소종이 아직 살아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죄책감에 시달리며 힘들었을 거다.이 침묵은 병원에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의사는 소종의 상태를 살핀 후 고개를 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육경한 씨,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상처가 꽤 심각합니다. 그래도 제때 팔을 잘라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을 겁니다.”“꼭 살리겠다고 약속하세요.”육경한은 굳은 표정으로 이 말만 내뱉었고 그 후 수술실 문은 몇 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었다.마침내 소원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수술이 끝났다는 의사의 말이 들리며 소종이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게 된 후에야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내려놓았다.그 후 소종은 중환자실로 옮겨져 한동안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육경한은 사라지고 그를 따라다니던 다른 비서가 와서 소원에게 돌아가라고 말했다.육경한의 지시였을 거다. 깨어난 소종이 제일 만나길 원치 않는 사람이 그녀일 테니까.소원은 별장으로 돌아가 뜨거운 물로 목욕하며 더러움을 씻어낸 뒤 유진을 만나러 갔다.밤에 유진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후 그녀는 푸른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무술곡에서 나온 그녀는 족장이 바닥에 놓고 간 도자기 병을 집어 들었다.족장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여러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떨어진 것 중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서현재에게 먹이던 것을 제외하고 재빨리 한 병을 집
마침내 경호원이 돌아오고 헬기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자 소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헬기에 연락했으니 이제 소종도 구할 수 있다.헬기는 도킹할 수 없어 구조 로프와 매트를 내려야 했고 경호원이 소종을 구조 매트에 올려놓고 묶은 다음 로프를 조심스럽게 감았다.헬기에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경호원 3명이 남아서 다음 헬기를 기다려야 했고 소원도 그들과 같이 탈 생각이었다.그런데 육경한이 헬기에 타기 전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말했다.“뭘 기다리는 거야?”“...”소원은 당황했다.“따라와.” 남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원은 사실 서현재를 이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독벌레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빠져나간 게 없다고 함부로 장담할 수는 없었다.경호원이 세 명이나 있었지만 그들 중 한 명은 서현재를 갑자기 떼어놓았기에 믿을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떼지 않았으면 소원도 육경한에게 알려줄 시간이 있었을 텐데...하지만 이건 전부 일이 벌어진 뒷이야기고 육경한이 한번 마음속에 생각을 품으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모두 변명으로 듣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육경한은 냉정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오늘 밤 여기서 짐승들 먹이가 되고 싶지 않으면 따라와.”이렇게 말한 뒤 그는 소원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밧줄을 잡은 채 위로 올라갔다.소원은 남자의 강압적인 말을 알아듣고 입술을 꽉 깨문 채 여린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육경한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옆에 있던 서현재는 자신이 이곳에서 위험에 처할까 봐 소원이 망설인다는 걸 알고 나지막이 말했다.“누나, 난 괜찮으니까 육경한 씨 따라가요. 전 다음 헬기 타면 돼요.”서현재는 육경한의 위협이 두렵다기보다 소원이 곁에 있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곳은 깊은 산이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기에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좋았다.소원은 자신이 이곳에 있기를 고집하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