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지유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일개 비서가 어떻게 전무를 이기겠는가, 결국 가차 없이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 전무가 고세리를 데리고 뛰어왔다.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에 오자마자 바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누구야. 누가 우리 세리 괴롭힌 거야?”고세리가 탕비실에 있는 지유를 가리키며 말했다.“삼촌 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나를 때렸어요. 삼촌, 어릴 적부터 부모님도 저를 때린 적이 없는데 저 여자가 지금 나를 때린 거예요.”진예림은 이 상황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얼른 불쌍한 척하면서 좋은 사람인 양 쇼를 하기 시작했다.“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세리를 잘 챙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무실에서 제 입지가 작으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뜻인즉 직급은 지유와 같지만 항상 지유에게 눌린다는 뜻이었다. 진예림은 지유가 이 사무실에서 너무 우쭐댄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전무는 예전부터 지유의 안 좋은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이현의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의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려고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온지유 씨, 비서 주제에 감히 우리 조카에게 손을 댄 거예요? 여 대표님 옆에서 일한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고? 내 말 한마디면 바로 여진그룹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고 전무는 여진그룹을 다닌 시간이 지유보다 훨씬 길었다. 하지만 같은 부서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활동할 때를 빼고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지유도 원칙적인 사람이라 모든 뒷담화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었다. 지유의 한계를 건드린 것이다.고 전무가 아무리 발악해도 지유는 자기 입장을 지켰다.“고 전무님, 저도 고세리씨가 전무님 조카인 건 압니다. 아끼고 보호하는 게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해야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내 얘기를 함부로 지껄이는데
이현이 밖에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강력한 아우라와 차가운 기운에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진예림은 어떻게 지유를 혼내줄지 상상까지 끝냈는데 공교롭게도 이현이 도착한 것이다.진예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아무리 지유를 혼내주고 싶어도 이현이 나타난 순간 너무 두려워 차마 손이 내려가지 못했다.“여 대표님.”사무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이현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살피다 꼭꼭 묶여있는 지유를 발견하고는 미안을 찌푸린 채 차가운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직접 마주한 게 아니라면 여진그룹이 제 회사가 아니라 고 전무님 회사인 줄 알겠어요.”고 전무는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기염이 확 줄어서는 이렇게 말했다.“아, 아닙니다. 온지유 씨가 저희 조카에게 손을 댔거든요. 우리 집안에서 이 조카를 워낙에 아껴서요. 집에서도 한번 맞은 적이 없는 애가 이런 수모를 당했으니 삼촌이 돼서 힘이 되어주려고 그랬던 겁니다. 아니면 온지유 씨가 점점 더 무서운 게 없이 나올 것 같아서요. 지금도 사람을 때리고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제게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대표님을 모시겠어요.”고 전무는 지유의 트집을 잡으며 이현에게 지유의 성품이 좋지 못하니 자르라고 유도하고 있었다.지유가 아무리 날고뛰어봤자 결국 비서 나부랭이인데 이현은 결국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 고 전무는 생각했다.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고 전무님이 한 말씀 인정해요?”“아니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고세리 씨는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를 터트리다 제게 들키고도 뻔뻔하게 저를 도발했습니다. 고세리 씨의 행위는 제게 상처를 주었고 제가 고세리 씨를 때린 건 저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해 보세요. 제가 잘못했나요? 저는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대표님 보십시오. 아직도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거만하기 그지없습니다.”고 전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 전무를 쏘아봤다.“고 전무님
고 전무는 고세리가 말을 많이 했다가 무슨 사달이라도 날까 봐 그녀를 잡아당겼다. 까딱 잘못하면 회사 초기 멤버였던 그도 쫓겨날 위기였다. 고 전무는 사태를 파악하고 얼른 아부했다.“대표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초지종을 잘 파악하지도 않고 섣불리 대처했으니 온 비서님께 실례가 많았습니다.”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이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엄숙했다.“고 전무님은 아셨지만 조카 되는 분도 알았을까요?”고 전무가 고세리를 앞으로 당겨오며 말했다.“온 비서님께 큰 실례를 끼쳤으니 얼른 사과해. 그리고 앞으로 더는 헛소리하지 말고.”고세리는 뺨을 맞은 것도 억울한데 사과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삼촌,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 싫어요!”고세리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고 전무는 이현을 힐끔 살폈다. 이현은 이미 인내심을 잃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여진그룹에서 이현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상책이었다.고 전무는 냉큼 고세리의 뺨을 후려갈겼다.“제멋대로 굴지 마. 얼른 사과해. 아니면 여기 계속 무릎 꿇고 있든지!”고 전무는 한 번도 고세리를 때린 적이 없었다. 늘 이쁨을 받고 자란 고세리는 처음 삼촌이 이렇게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봤다. 깜짝 놀란 고세리가 얼굴을 부여잡고 지유를 힐끔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 온 비서님, 제가 눈에 뵈는 게 없이 말실수를 했어요. 죄송합니다.”진예림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 전무도 지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이현은 지유를 지켜주기 위해 고 전무의 체면도 마다했다.이현이 지유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지유에게 눈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진예림은 깨닫게 되었다.지유도 이현이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도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록 이현이 친분보다는 도리를 따져야 한다고 했지만 이현도 무의식적으로 그녀 편에 서 있었
지유의 말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게 딱 맞았다.이대로 놔두면 앞으로 이혼하고 나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하지만 이현의 눈엔 지유가 너무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은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게 싫은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이현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지더니 거리감이 느껴졌다.“그렇게 무서워?”지유는 어두워진 이현의 표정을 눈치채고는 말을 돌려서 설명했다.“나는 이현 씨 이미지가 안 좋아질까 봐 그러는 거죠. 이혼하고 나서도 나랑 엮이는 게 싫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 이미지가 좋은 것도 아닌데 엮어서 좋을 게 없죠.”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비아냥거렸다.“요만한 일도 이렇게 선을 긋는데 이미지가 안 좋을 게 뭐가 있다고?”비아냥거리는 이현의 말투에 지유는 멈칫했다.말을 잘못했나? 서로를 위한 일인데?두 사람의 사이를 추측하면서 지유가 이현의 애인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이현은 이런 말을 역겨워하고 싫어할 것이다.지유가 이렇게 귀띔하는 것도 다 이현의 이미지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혼하고 나서도 케케묵은 찌라시들이 다시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그를 위해 서로 거리를 두면 좋을 것 같다고 당부했는데 이현은 오히려 지유가 너무 선을 긋는다고 생각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입을 앙다물었다.“나는 이미지가 이미 이 모양 이 꼴이니 신경 안 쓰는데 이현 씨는 신경 써야 하잖아요. 나 때문에 이현 씨 인생을 영향 줘서는 안 되죠.”이현은 지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고 되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나를 지극히 생각해 줘서 고마워. 몇 년간 너도 수고했고.”이 말에 지유는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그 말에 맞춰 이렇게 대답했다.“별말씀을. 이현 씨와 여진그룹을 위한 일인데 내 의무기도 하죠.”고분고분하고 책임감 넘치는 모습에 이현은 입을 앙다물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넥타이를 당기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온 비서님, 참 마음이 깊
하지만 승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이나 착용했다. 만약 기자들에게 사진이라도 찍힌다면 무조건 이를 비웃으며 추측성 기사를 쇄도할 것이다. 그래도 승아는 흔들림이 없었다.이번 일로 승아는 살이 많이 빠져 가냘파 보였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친화력 있는 미소를 지었다.기자들은 이번에 죽을 고비를 넘긴 일에 대해 취재했다. 승아는 기자들 앞에서 불쌍한 척하며 자기가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인 이미지를 심는 걸 빼먹지 않았고 절대 다음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댓글은 모두 승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동감하는 글도 보였다.기자들은 어떤 질문을 해야 화제성이 높은지 알고 있었기에 바로 드레스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승아가 대범하게 대답했다.“다시 카메라를 마주하면서 새롭게 태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이 드레스는 제게 매우 소중한 드레스예요. 이 드레스만 입으면 살아있다는 걸 느끼죠.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 같은 힘도 생기고요. 이제는 아름다운 것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고 싶어요.”기자가 또 물었다.“선물 받은 드레스로 보이는데 혹시 누가 선물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혹시 약혼자인가요?”승아는 달콤하게 웃으며 누구라고 콕 집어서 얘기하지는 않았다.“제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살아갈 용기과 동력을 준 사람이죠.”이 말을 뒤로 승아는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갔다.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기자가 쫓아가며 물었지만 승아는 이미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기자와 네티즌들도 놀고먹는 사람들은 아니었다.그 드레스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걸 알고 그 드레스를 선물한 사람이 누군지 토론하고 있었다.승아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만한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얼마 지나지 않아 네티즌은 그 사람이 이현임을 알아냈고 이현은 바로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이현은 그렇게 승아의 약혼자로 굳혀졌다.이현과 승아 중 그 누구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네티즌과 팬들
씩씩거리는 윤정의 모습에 지유는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윤정 씨 말만 들어보면 대표님이 저랑 만나는 줄 알겠어요.”윤정은 착각인지 뭔지 몰라도 두 사람의 사이가 약간 묘하다고 생각했다.“대표님 확실히 온 비서님을 많이 챙기는 것 같아요.”윤정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두 분은 못 느끼실 수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달라요. 노승아 씨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두 사람 사이 망치게 둘 수는 없어요.”윤정은 지유가 이현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아이고, 윤정 씨, 헛다리 짚지 마요.”지유가 윤정의 머리를 톡 건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저랑 대표님은 아무 사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하는 헛소리 새겨듣지 말아요. 대표님이 누굴 만나든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이런 말은 앞으로도 하지 마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또 소문이 이상해지니까.”윤정이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 안 하죠. 근데 다른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아무리 회사에서 지유가 부정당한 방법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소문이 파다해도 윤정은 믿지 않았다.윤정이 아는 지유는 정직하고 부드럽고 부하를 잘 챙기는 사람이지 그런 비열한 방법을 쓸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윤정은 지금 퍼지고 있는 지유에 관한 소문이 뒷담화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질투로 인해 헐뜯는 소리라고 생각했다.지유는 그 뉴스가 진짜여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티를 내서는 안 된다.지유는 요즘 이현이 자기와 점점 거리를 두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업무든 생활에서든 서로 간의 대화가 줄어들었고 가끔은 선택적으로 그녀가 한 말을 무시하기도 했다. 같이 퇴근하는 경우도 줄어들었고 요즘 계속 서재에서만 잠을 자면서 침실에 들어오지도 않았다.아마 이현도 뉴스를 보고 속으로 승아에게 명분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걸 수도 있다.지유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실망했다.…“이런 염치없는 년을 봤나
“아니야.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 아직도 나를 몰라? 내가 어떻게 너를 탓해?”지유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다.“이 결혼은 처음부터 계약 결혼이었어.”“뭐?”지희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너 한 번도 나한테 얘기한 적 없잖아. 여이현이 왜 너랑 계약 결혼을 해? 뭔가 이상한데?”지유가 말했다.“내가 전에 너한테 그랬잖아. 이현 씨 할아버지가 나를 좋아해서 이현 씨와 결혼하기를 바랐다고. 나도 그때 핍박에 의해 이현 씨와 결혼한 거야.”지희도 그때 이 결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지유가 이현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지금 보니 그렇게 갑자기 결혼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잠깐만, 나 진정 좀 하자.”지희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너와 여이현은 계약 결혼인데 여이현 할아버지가 결정한 거다? 여이현은 너를 좋아하지 않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고…”“근데 이것도 이상한데. 여이현이 집에서 뭐라고 한다고 들을 사람이야? 그리고 그땐 잊지 못하는 첫사랑도 있었잖아. 왜 순순히 너랑 결혼한 거지?”지희는 턱을 매만지며 이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나도 그 생각 했었어. 근데 이 계약 결혼의 존속 시간은 3년이야. 3년이 지나면 우린 이혼할 거고.”“그럼 그 기한이 다 되어가네.”이를 들은 지희는 더 마음이 아팠다.“그래도 아직은 여이현의 법적 와이프니까 이 정도인데 이혼이라도 하면 노승아가 얼마나 더 기고만장하게 나올까? 이혼해도 넌 여이현 수행비서로 있을 텐데 노승아가 여이현과 결혼해서 여씨 집안 사모님이라도 되면 널 얼마나 괴롭힐 거야. 안돼, 절대 안 돼.”지희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지유가 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왜 이혼해도 내가 이현 씨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결정한 거야? 이혼하면 여이현 곁을 떠나게?”지희가 물었다.지유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말했다.“네가 그랬잖아. 사람은
“허투루 하는 거 걸리기만 해봐요. 다들 잘리고도 남을 테니까.”승아의 매니저 예진이 우쭐거리며 점원에게 이렇게 당부했다.이렇게 으름장을 놓는데 누구도 홀대할 엄두를 못 냈다. 점장이 굽신거리며 이렇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고객님이 원하시는 드레스는 정성을 다해 만들도록 하겠습니다.”“내일은 여진그룹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자선 행사에요. 그 자리에 입어야 하는 드레스니까 내일 전에 완성해야 할 거예요.”예진이 이렇게 덧붙였다.점장은 약간 난감했다. 드레스를 얼마나 많이 고쳤는데 매번 그냥 넘어갈 때가 없었다. 직장 생활을 꽤 오래 한 그녀였지만 이렇게 깐깐하게 하나하나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여러 번 고쳤으니 된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퇴짜를 받았다.점장이 이렇게 말했다.“드레스를 가져다드린지도 며칠은 되는데 이제야 가져오시니 좀 난감하네요. 수작업으로 완성한 드레스라 수선하려면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데 아마 시간이 빠듯할 것 같네요.”예진은 이런 말을 새겨들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럼 하던 일 다 멈추고 우리 승아 언니가 입을 드레스에만 집중하면 되잖아요. 허투루 할 생각 마요. 이 행사 우리 승아 언니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리란 말이에요. 제때 완성하지 못해서 행사에 차질이 생기면 이 매장 닫아야 할 수도 있어요.”승아가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를 한 다음부터 예진은 여씨 집안 사모님 자리를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해 말하는 것도 점점 거만해졌다.점장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약 이 드레스에 수놓은 꽃을 완성하려면 다른 고객이 예약한 드레스가 늦어지게 된다. 그러면 다른 고객의 클레임도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신뢰를 제일 중요시하는 매장이니 점장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예진은 점장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손에 들었던 쇼핑백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면 이렇게 말했다.“내 말이 어려워요? 사태 파악 좀 해요. 다른 사람은 밉보여도 괜찮은데 여씨 집안 미래 며느리한테 밉보이면 좋을 게 뭐에요?”점장도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은서우는 인명진이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확실하게 티가 난건 아니지만 자세하게 보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더욱이 은서우는 인명진 옆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사람이라 미묘한 그의 표정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죄송해요. 원장님, 저 때문에 난처해진 거 아니에요?”고개를 들고 은서우를 바라보던 인명진은 그녀의 눈빛에 하고 싶었던 말을 또다시 목구멍으로 삼킨 채 다른 말을 꺼냈다.“앞으로 사석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면 뭐라고 부를까요? 인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이름 불러요.”인명진은 나이프와 포크로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은서우는 기분이 좋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앞으로 병원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고 사석에서는 인명진 씨라고 부를게요.”은서우가 부르는 이름에 인명진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은서우는 식사 자리가 너무 좋았다. 돈에 대한 걱정과 집사람들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들이 전부 사라질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병원에서 인명진이 준 차트를 받아쥔 은서우는 뿌듯한 마음에 의기양양해지기도 했다.하지만 병원 내부에서는 점점 귀에 거슬리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단순히 은서우가 인명진이 꽂은 낙하산이고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 퍼지고 있을 때는 인명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은서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소문은 점점 더 허황한 쪽으로 퍼졌고 심지어 근무시간에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은서우 같은 배경이 어떻게 우리 병원에 들어온 거예요? 여기가 무슨 개인 진료소도 아니고 시에서도 권위 있는 병원이잖아요.”“내가 뭐라 그랬어요. 무조건 낙하산이라니까요? 원장님과 엄청 가깝게 지내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르죠.”“그럼 설마...”은서우는 차트를 쥐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은서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은서우는 인명진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봐봐요. 못 드시는 음식 있어요?”인명진은 간결하게 대답했다.“없어요.”은서우는 다시 메뉴판을 받아 들고 현재 자신의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요리를 몇 개 주문했다.“이 정도면 될까요?”인명진은 은서우를 힐끗 쳐다봤다.분명히 덤덤한 눈빛이었지만 은서우는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밥을 사주겠다고 큰소리쳐놓고 겨우 이 정도밖에 못 산다는 게 창피했다.‘분명히 날, 별로라고 생각하시겠지.’은서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명진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좋아요. 그리고 내 생각만 하지 말고 은서우 씨가 좋아하는 걸 주문해요.”인명진도 은서우가 자신의 입맛을 고려해 주문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속마음을 들킨 은서우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올라왔고 은서우는 익숙하게 젓가락을 가져왔다.“이 식당은 젓가락을 직접 가져와야 해요. 여기요. 전부 소독한 거예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기분 좋게 젓가락을 받았다. 의사들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명진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는 물끄러미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이런 것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은서우는 인명진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저도 의사잖아요. 직업병인가 봐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무심코 주변을 훑어보던 인명진의 눈길은 갑자기 누군가에게 멈췄고 은서우는 자신이 제일 존경하던 원장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인명진은 누군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온지유?”자신의 이름에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은서우의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온지유는 인명진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윤별의 손을 잡고 다가왔다.“명진 씨가 여기 왜 있어요? 병원이 바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말을 마친 온지유의 눈길은 은서우에게 멈췄고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장 카드에 사천만 원 보내. 휠체어를 좋은 거로 바꿔야겠어.”은서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타고 있는 휠체어도 산 지 얼마 안 됐잖아. 그건 그냥 핑계고, 또 다른데 탕진하고 싶은 거겠지.”속셈이 들킨 소태훈은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줄 거야 말 거야? 사천만 원만 보내주면 한동안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빨리 보내!”소태훈의 말에 지난 과거가 더욱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워진 은서우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은서우는 그날 밖에 나가지 말걸, 그 차를 타지 말걸, 수없이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랬다면 죽는 사람이 자신이었을 거고, 그랬다면 최소한 이렇게 소씨 가문 사람들한테 시달리면서 살 필요도 없었겠지.소씨 가문 사람들은 흡혈 충처럼 그녀의 골수까지 다 빨아들일 기세였다.은서우는 무기력해져 맥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나 돈 없어. 몇 번을 물어봐도 내 대답은 똑같아. 인터넷에 올리고 싶으면 올려.”은서우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충분히 했으니 미안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소태훈의 협박도 오로지 그가 꼬투리를 잡은 거였다.말을 마친 은서우가 전화를 끊자, 소태훈은 끈질기게 다시 걸어왔고 지긋지긋해진 그녀는 아예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은서우는 더 이상 소씨 가문 사람과 연계하고 싶지 않았다.몇 분 전의 기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생기를 잃은 채 은서우는 옷으로 뒤덮인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인명진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준비가 다 됐어요? 지금 데리러 갈게요.”은서우는 그제야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 앉았다.“아직이요. 조금만 기다려줘요.”인명진의 전화 한 통이 그녀를 다시 숨을 쉬게 한 것 같았다.즉시 옷을 차려입고 계단을 뛰어 내려간 은서우가 주위를 훑어보자 멀지 않은 잔디밭에 아우디 한대가 보였다.차 안에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던 인명진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길은 은서우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구태원은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상이 밝혀졌다.여자아이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구태원이 이식할 간을 몰래 바꿔치기했기 때문에 거부반응이 생겼던 거였다.조사가 끝난 뒤 병원은 구태원의 착오로 인해 많은 돈을 배상했지만, 여전히 가족들의 아픈 마음은 보상해 줄 수 없었다. 결국 돈이 죽은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은서우도 슬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혐의를 벗은 인명진은 병원의 최신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겠다는 은서우와의 약속을 지켜주었다.나이도 어리고 실력도 인증되지 않은 은서우를 어려운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대고 생각했던 병원 사람들은 인명진의 결정에 불복했다.하지만 인명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제 조수로 선택한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죠.”인명진이 자기 조수로 선택한 사람이라 굳이 다른 사람의 동의는 필요 없었다.그는 사람들의 불복에도 은서우를 연구에 참여시켰다.은서우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 많은 전문 지식을 배웠고 실력도 나날이 발전했다. 그녀는 인명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원장님, 시간 괜찮으세요?”은서우는 큰 용기를 내고 인명진의 사무실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인명진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들어와요.”은서우가 들어오자, 인명진은 그녀를 쭉 훑어보았다. 은서우는 며칠 전과는 달리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예전에 그녀는 업무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항상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했고 자신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눈빛도 일거수일투족도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자신감 넘치는 여유가 느껴졌다.인명진은 뿌듯한 눈빛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에요?”은서우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원장님한테 신세 진 게 너무 많아서 보답으로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으실까요?”인명진이 병원에 온 뒤로 많은 여자들이 은근히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고 식사 약속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는 단 한
깜짝 놀란 은서우는 인명진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살피며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고 말했다.“손은 왜 이래요? 왜 방금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은서우의 손을 피하며 상처를 숨기는 인명진의 차가운 눈매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욱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괜찮아요. 큰 상처도 아니고 놔두면 괜찮아져요.”“안 돼요.”은서우는 다시 인명진의 손을 끌어당겨 물티슈로 피를 닦은 뒤 상처에 밴드를 붙였다.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은서우를 조용히 지켜보던 인명진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차갑게만 느껴지던 가로등 불빛이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고 복잡하고 예민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다음 날, 두 사람은 구태원을 찾아갔다.구태원은 외과에서 권위 있는 의사였는데, 원장 선거에서 인명진 보다 표수가 조금 모자라 원장에서 밀려났고 어쩔 수 없이 계속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구태원은 모든 사실을 부정했다.“나 때문이라는 증거 있어요? 장기이식이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건 정상적인 현상이잖아요. 누굴 탓하겠어요?”“하지만, 거부반응이 있다고 무조건 죽는 건 아니잖아요. 원장님이 안 계셨으면 구 선생님이 수술했어도 되고 아니면 원장님한테 연락해도 되잖아요.”구태원은 얼굴빛이 싹 변하더니 가볍게 한마디 했다.“깜빡했어요.”어이없는 구태원의 대답에 멍하니 있던 은서우는 이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성을 잃었다.‘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데 사과는커녕 잘못을 인정도 안 해? 그리고 그걸 전부 원장님한테 뒤집어씌운 거야?”인명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서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는 듣기 거북한 욕을 듣는 것도 괜찮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평가하든 다 상관없었지만, 환자의 죽음만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인명진은 만약 그 당시 자신이 있었다면 그 환자는 분명 살 수 있었을 거로 생각했다.짝!이성을 잃은 은서우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화가
보통 사람들보다 피부가 하얗던 인명진의 등은 여드름 하나 없이 깔끔하고 매끈해 상처가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하지만 그런 건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던 은서우는 약을 바르는 데에만 신경 썼다.반대로 인명진은 은서우의 숨결과 그녀의 손끝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자신의 등이 이렇게 예민한지 이제야 알게 된 인명진은 늦은 후회를 하며 주먹을 꽉 쥐고 참고 있었다.갑자기 은서우는 상처를 입으로 호호 불어주며 말했다.“매우 아프죠? 좀 불어줄게요.”인명진은 순간 움찔하더니 즉시 셔츠를 잡아 올려 입고는 흰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이 정도면 됐어요. 고마워요.”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던 은서우는 그제야 단둘이 한 방에 있다는 걸 인식했다.누가 봐도 애매한 분위기였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오른 은서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말했다.“원장님,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인명진은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은서우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말을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조차 모르겠는 기분이 이상해서였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그만 가죠.”경찰서로 간 두 사람은 진술서를 작성했고 경찰의 협조하게 합의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원만한 합의를 원하지 않았다.심지어 그 사람들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욕설을 퍼부었다.경찰이 책상을 두드리며 말렸지만 전혀 소용없었고 그 남자는 오히려 인명진을 가리키며 분노했다.“저 새끼가 내 딸을 죽였다고!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지!”경찰은 막무가내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인상만 찌푸렸다. 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법으로 해결해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폭력을 쓰는 건 아니죠.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일은 원장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요.”은서우의 말에 가족들은 오히려 더 크게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녀가 심호흡하고 다시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려는 찰나 인명진이 입을 열었다.“제가 설명할게요.”인명진은 짧고 명확하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
두 남자가 다시 손을 대려고 움찔하자, 크게 다치는 것보다는 쪽팔리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은서우는 당장이라도 인명진을 끌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방금 인명진이 등을 맞았을 때 은서우는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간담이 서늘해 났다. 인명진의 등에 큰 멍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지금은 옷을 걷어 올려 상처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더 이상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은서우는 즉시 인명진의 손을 잡았다.그의 큰 손바닥이 그녀의 손을 감쌌지만, 은서우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원장님, 가시죠. 여기는 경찰들이 와서 처리할 거예요.”잡은 손을 은서우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인명진은 반대였다.자기 손을 꽉 잡은 은서우의 손은 작고 따뜻했다. 인명진은 그녀의 손이 이렇게 작다는 걸 미처 몰랐고 조금만 더 꽉 잡으면 그녀의 손 전체를 감쌀 수 있을 것 같았다.인명진은 왠지 가슴이 뜨거워져 손을 풀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조급해진 은서우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경찰들이 도착했다.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경찰들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은서우가 눈을 내리깔자, 한쪽 편에 떨어져 있는 인명진의 휴대전화가 보였다.상황을 보아하니 인명진은 이미 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신고를 한 뒤 휴대전화를 한편에 급하게 넣어놓은 거였다.어쩐지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더라니, 경찰들이 이렇게 일찍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인명진의 신고 때문이었다.경찰들은 빠른 속도로 소란을 피우고 있던 가족들을 제압했고 인명진과 은서우는 경찰서로 가 진술서를 작성해야 했다.일단 상처 치료부터 하기로 했던 인명진은 혼자 어떻게든 등 뒤에 약을 바르고 싶었지만, 눈이 뒤통수에 달린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혼자는 어려웠다.한참을 낑낑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인명진은 매서운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보며 어림짐작으로 말했다.“은서우 씨?”문밖에서는 쟁쟁한 은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장님, 저예요. 상처가 등에 있어서 혼자 치료
젊은 남자가 먼저 달려들었다.인명진이 넋을 놓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기습을 한 것이다.몽둥이가 그대로 등에 내리꽂혔다.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은서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당황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명진을 부축했다.“원장님, 괜찮으세요? 왜 저 대신 맞으신 거예요!”몸을 곧게 세운 인명진은 그 와중에도 덤덤히 답했다.“은 선생님 대신 맞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저를 향해 오던 거였어요.”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을 확인한 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충격이 상당했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과거 법로의 약인 이었던 그는 이런 고통에 익숙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그는 천천히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고 서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짓눌렀다.젊은 남자는 그 눈빛에 움찔했지만 순간뿐이었다.“다 너 같은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다면 내 동생은 지금도 멀쩡했을 거라고! 돌팔이 의사! 더러운 병원도 다 망해버려야 해!”은서우는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나섰다.“당신은 어떻게 우리 병원의 잘못이라고 확신해요?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게 잘못인가요?”남자는 주먹을 꽉 쥐고 은서우를 노려보았고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아니면 또 누가 있지? 간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름 후로 수술을 잡았어. 하지만 병세가 악화해서 수술을 앞당겼지.”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자의 말을 들었다.은서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인명진을 바라봤다.그녀는 인명진이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우린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려서 수술비를 마련해서 딸을 수술실로 보냈어.”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수술실에 들어갔다면 잘 된 거 아닌가요? 병세가 악화했다면 이식을 빨리 진행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죽었을 거예요.”눈이 붉
“모르겠어요. 본인 말로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면서 급히 떠났어요.”은서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았다.‘세상에 이렇게 우연이 반복될 수 있나?’오히려 그 인턴은 들통날 걸 알고 단서를 끊어 그들이 더는 추궁할 수 없도록 미리 도망친 것처럼 보였다.은서우의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인명진은 담담했다. 그는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고마워요. 수고했어요.”그는 곧 은서우를 잠시 바라보고는 뒤돌았고 은서우도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그때 간호사가 참지 못하고 은서우를 불러 세웠다.“은 선생님, 언제부터 원장님이랑 그렇게 친했어요? 그리고 요즘 다들 원장님이 선생님을 차기 부원장으로 키우려고 한다던데 진짜예요?”은서우는 순간 당황했다.인명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도 없는 일을 떠벌일 순 없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간호사가 다른 질문을 이을까 봐 급히 자리를 떠났다.복도로 나왔을 때 인명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아무도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인명진은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은서우의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조용히 그에게 다가갔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인명진이 먼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면 돼요. 이름이랑 신분이 가짜일 리는 없잖아요.”그가 인턴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달은 은서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엉터리 의사, 거기 서!”깜짝 놀란 은서우가 뒤를 돌아보니 며칠 전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환자의 가족들이었다.한 쌍의 부부와 젊은 남성이 함께였는데 그들의 손에는 벽돌이나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은서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