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는 점점 더 묘하게 흘러갔다. 하연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왕대천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무심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대천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이현아, 누가 왔는지 좀 봐라.”하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왕대천의 핸드폰 화면 속에 비친 얼굴은 분명 손이현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이 느려 목소리마저 끊기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하연 씨가 아저씨를 보러 갔어요?]화면이 계속 끊기자, 왕대천은 답답한 듯 중요한 말만 간추려 말했다. “그래, 그래. 하연이는 정말 착한 아이야. 나는 이 아이가 참 좋아.”한편, 한창명도 손이현의 이름을 듣고 그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 손이현의 얼굴은 그가 정태산에게서 받은 자료 속 사진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창명은 잠시 멈칫하며 하연을 다시 한번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하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손 선생님, 아직도 B시로 안 돌아가셨어요?” [그때 하연 씨가 떠날 때는 급하게 갔지만, 오히려 모든 일을 철저하게 정리해 두고 떠나셨더라고요. 제가 운성시에 있지 않으면 어디 있겠어요.]이현의 말투에는 미묘한 불만이 묻어 있었고, 그날의 일에 대한 마음속 응어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하연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날의 상황은 너무나도 급박했고, 상혁의 압박은 그날 쏟아진 비보다도 더 강하게 그녀를 휘몰아쳤다. 당시의 하연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상혁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분명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를 특별하게 대했으니 말이다. “손 선생님, 비를 맞았다면 생강차라도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하세요.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하연은 그날 자신이 갑작스럽게 떠난 것에 대해 예의를 갖추며 우회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이현은 무심한 태도로 화면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렸다. 왕대
3일 후, B시에서 신에너지 회의가 열렸다. 각 업계의 거물들이 속속 공항에 도착해 국제호텔에 머물렀다. 하연도 초대장을 받은 사업가 중 하나였다. 그녀는 서둘러 로비로 들어가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무시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BN그룹의 대표 오기용이 하연을 크게 불러세웠다.“최 사장님! 제가 마침 최 사장님을 찾고 있던 참이었어요.”하연은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저도 막 오 대표님을 찾으려던 참이었어요.”오기용은 곧바로 물었다.“방금 들은 소식인데, 곽강민 씨도 우리와 협력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인가요?”하연은 살짝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오 대표님도 아셨으니, 이제는 온 세상이 다 알겠네요.”“대단하십니다! 곽강민 씨는 FL그룹이 인수된 이후로 아무도 영입하지 못한 인재였는데, 어떻게 해내셨나요?”하연이 답하려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오 대표님, 여전히 안목이 좁으시군요. 쫓겨난 개 한 마리 데려오는 게 그렇게 자랑할 일인가요?”뒤돌아보니, 여자 정장을 입은 왕아영이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HD그룹의 대표도 함께였다. 오기용의 얼굴은 굳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왕 대표님, 정말 오랜만입니다.”“오랜만이네요. 오 대표님의 사업이 B시까지 진출하다니, 다음에 꼭 가르침을 받아야겠어요.”왕아영은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말 속엔 비꼬는 뉘앙스가 가득했고, 동시에 경고의 뜻도 서려 있었다.“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최 사장님의 덕을 보고 있을 뿐이죠.”왕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최 사장님에게 그런 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그녀 앞에 선 하연은 분명 더 젊고 아름다웠으며, 차분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하연은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제가 덕이 있는지 없는지, 오늘 밤 입찰에서 왕 대표님께서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왕아영의 입가에는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곽강민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혁은 수많은 기자의 환호 속에서 당당하게 입장했다. 그의 옆에는 우아한 미소를 띤 주슬기가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지만, 마치 의도적으로 과시하지 않으려는 듯 절제된 움직임을 보였다. 상혁은 신사적인 제스처로 주슬기의 의자를 빼주며 그녀가 앉도록 배려했다.기자들의 카메라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사람을 포착했고, 그 모습은 곧 대형 스크린에 크게 비쳤다. 하연은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서여은에게서 온 메시지가 도착했다.[주슬기가 호텔 청소 직원으로 변장해 부상혁의 방에 들어갔대. 그 여자, 아무래도 4조를 차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하연은 이미 로비에서 이 소문을 들었고, 참다못해 여은에게 그 진위를 물어본 것이었다. 여은은 언론계에 있으니 누구보다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그 말은 사실이었다.여은은 혹시 자신의 말이 부적절했을까 봐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주씨 가문의 가주가 금융위원회의 일원 중 한 명이잖아. 부상혁이 주슬기의 체면을 세워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아. 하연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혹시 문제가 있다면 직접 부상혁에게 물어봐.]‘직접 물어보라고? 여은이는 모르는 모양이군. 우리 둘의 사이는 이미 많이 변해버렸어. 아마도 상혁 오빠는 더 이상 나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이때 단상 위에 서 있던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크리스티 경매사인 성지나입니다. B시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 경매할 타이틀은 ‘태양광 홍보대사’이며, 시작가는 60억입니다. 경매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성지나는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경매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여유롭고 기품이 넘쳤다. 성지나는 크리스티 부사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매사로, 언론에서는 그녀를 두고 ‘영원히 우아하고, 영원히 욕망을 자극하는 여성’이라 평했다. 그
“900억.”하연은 곧바로 팻말을 들어 응수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곽강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다가와 조언을 건넸다.“너무 무리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하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800억은 DS그룹의 예산이고, 그 이상은 제 개인 명의로 내는 겁니다.”하연이 포기하지 않자, 성지나는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DS그룹의 최 사장님께서 900억을 제시하셨습니다. 부상혁 대표님, 참여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이 질문의 의미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부상혁이 이 경매에 뛰어들면, 이는 곧 최하연과 부상혁 사이의 대결이 될 터였다. 더욱이 최근 두 사람의 스캔들이 계속해서 화제가 되는 상황이라, 이 경매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대형 스크린에 비친 상혁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성지나의 질문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그런 상혁을 바라보며, 마음 한편이 아프게 조여왔다.상혁의 결정을 기다리던 그 순간, 주슬기가 상혁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상혁은 몇 마디 답을 하고, 주슬기가 팻말을 들었다.“1400억.”하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술렁였고, 이번 금액이 상혁의 지시인지, 아니면 주씨 가문이 자금을 추가한 것인지 궁금해했다.성지나는 이번에도 여유로운 미소로 물었다.“최 사장님, 계속하시겠습니까?”하연은 팻말을 꽉 쥐었는데, 곽강민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안 됩니다. 자문가로서 이 이상 가격을 올리는 건 절대 권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 경매는 실질적인 가치를 넘어섰어요. 저는 최 사장님이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원치 않습니다.”곽강민은 하연의 손을 강하게 눌렀다. 하연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성지나는 그런 하연을 보며 어딘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1400억, 하나. 1400억, 둘. 더 이상 올릴 분 없으십니까?”세 번째 망치가 떨어지기 직전, 전화 입찰석에서 한 입찰자가 일어섰다.“2000억!”
최하연과 성지나는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두 사람의 집안 배경은 크게 달랐지만, 고집스러운 성격만큼은 서로 닮아 있었다. 그래서 둘은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사이로 지냈다. 졸업할 때, 지나는 먼저 하연에게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며 하연의 미래 계획을 물었다. 하연은 솔직하게 자신이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남자를 따라 B시로 갈 것이라고 답했다. 지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정말 부럽네요.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자본이 있어서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제가 원하는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하니까요.”“그럼 지나 씨의 목표는 뭐예요?”“최고의 경매사가 되는 거예요.”지나는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이후 지나는 하연과 찍은 사진을 이용해 고급 경매장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지나와 하연을 친구라 여겼고, 상류 사회의 아이콘이었던 하연의 체면을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하연은 이 사실을 정예나에게 전해 들었다. 예나는 비꼬듯 말했다.“그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깊이 사귈 만한 사람은 못 돼.”하지만 하연은 지나를 야망 있는 인재로 보았고, 그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며 오히려 지나를 도와주었다.“제 예상대로, 지나 씨는 결국 본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네요. 축하해요.”하연은 과거를 떠올리며 담담하게 웃었다. ‘크리스티의 부대표 자리에 오른 것이 단순히 나와의 사진 한 장 덕분만은 아닐 것 같아. 성지나도 분명 그 자리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겠지.’“그럼 하연 씨는요? 원하는 걸 얻었나요?”지나는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오늘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네요. 2000억으로 타이틀을 따냈는데, 축하 파티를 열 생각은 없어요?”하연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세면대 감지대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얼음물 모드로 전환한 후, 한 줌의 차가운 물을 얼굴에 뿌렸다. 그것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고,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이 순간에 잠시
“정말 그렇게 부러워하셨습니까?”아주 우아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문가에 기댄 채로 서 있던 주슬기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왕 대표님이 그렇게 부러우시다면, 제가 부상혁 대표님을 소개해 드릴 수도 있어요.”그 말을 당사자에게 들켜버린 왕아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필요 없어요. 저도 제힘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정말요? 왕 대표님은 말씀만 하시면 남자 얘기뿐이라, 스스로 할 수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슬기는 정확히 핵심을 찌르는 말을 던졌고, 왕아영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바로 이때 핸드폰이 울리자, 왕아영은 이 틈을 타 전화를 받으며 빠르게 걸어 나갔다.“뭐라고? 그분이 B시에 도착했다고? 됐어, 내가 직접 마중 나갈게.”그 말을 들은 하연은 거울 속 멀어져가는 왕아영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금빛 찬란한 호텔 로비에서 하연은 슬기와 나란히 걸었다.“아까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하연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별말씀을요. 아린이가 최하연 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최하연 씨와 최하경 씨가 철없는 자신에게 많은 신경을 써줬다면서요. 언니로서 사과드려요.” 슬기는 예의 바르고 세련된 태도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서는 명문가 아가씨의 우아함이 느껴졌다.그러나 하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로비 밖에는 아직도 상혁의 차가 서 있었다. 차창이 살짝 내려져 있었고, 공무원들이 상혁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의 반응은 적었으며, 단지 가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하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마지막 경매에서, 1400억을 제시하신 건 부상혁 대표님의 지시였나요?”“물론이죠. 우리 ZT그룹은 신에너지 분야에 깊이 발을 들이지 않았으니, 사실 그 타이틀은 필요 없어요. 하지만 금융위원회 간담회가 막 끝났고, 부 대표님은 위원으로서 실물 경제에 기여할 필요가 있었어요. 제가 명목을 만들고, 부 대표님은 자금을 지원한 거죠. 일종의 협력이랄까.”슬기는 부드럽게 대답했지만, 그 말은 하연의 마음속을 깊
주슬기가 처음 부상혁을 만난 것은 그가 막 DL그룹에 들어갔을 때였다. 부동건은 아들을 단련시키기 위해 부상혁이 부씨 가문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상혁은 낮은 직급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그 환경은 절대 좋지 않았다. 그는 ZT그룹과의 사업을 맡았지만, 2주 동안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이에 따라 주위 사람들은 이 침착하고 온화한 청년을 무시했다.슬기도 그 당시 ZT그룹에 막 들어갔다. 그녀는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이 슬기를 떠받들었으며, 그녀는 단순히 결정을 내리고 계획을 세우기만 하면 되었다. 그 외의 고된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상혁은 일주일 동안 ZT그룹의 1층 로비에서 앉아 사업 책임자를 기다렸다. 어느 날, 슬기는 그를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가가 물었다.“부상혁 씨, 얼마나 더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에요?”상혁은 대답하지 않고, ZT그룹의 대형 스크린에 떠 있는 데이터를 응시했다.“저 숫자, 틀렸어요.”슬기는 순간 놀랐다.상혁도 그제야 슬기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여기 직원들이 꽤 오만하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기다릴 시간이 충분하니까요.”두 사람은 모두 명문가 출신이라 여러 자리에서 서로 얼굴을 익힌 사이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만약 기다려도 못 만나면요...?”“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거예요. 사업이 실패해도 저는 후회하지 않을 거고요.”슬기는 상혁이 매우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두 달이 지난 후, 상혁은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고, 사업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결과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이 사업으로 상혁은 부동건의 인정을 받으며 점차 고위직으로 올라가 결국 이사회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상혁이 이사 자리를 얻은 날, 당시 이 사업의 책임자는 ZT그룹의 고층 빌딩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유는 바로 ZT그룹의 그 사업 책임자가 도박 중독에 빠져 회사 자금을 횡령했고, 이를
슬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매력적인 얼굴에 어이없는 미소를 띠웠다.“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이 마음을 둔 사람이 누군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최근 언론에서는 부상혁과 최하연이 이미 결별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슬기는 그 소식을 듣고 속으로 크게 기뻤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상혁을 만날 수 없었던 그녀는, 호텔 직원으로 변장해서라도 그를 만나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상혁은 여전히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슬기를 내쫓지는 않았다.상혁은 슬기에게 두 시간의 대화를 허락했지만, 그중 한 시간은 일 처리를 하면서 보냈다. 그런데도 슬기는 그저 감사했다. 상혁이가 허락한 그 짧은 시간이 그녀에게는 아주 소중했다.그리고 오늘 밤, 슬기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날, 왜 저와의 만남을 받아들였나요?”깊은 밤, 남녀 단둘이서... 아무리 공적인 대화를 나누더라도 약간의 낭만적 사건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하다못해 하룻밤의 관계라도, 슬기는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혁은 여전히 청렴하고 깔끔했으며, 슬기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이 시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어떤 대답이 나오더라도 슬기에게는 상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예상치 못한, 가장 직설적인 대답을 받았다.“ZT그룹이 신에너지 산업에 발을 들였으니, 더 유용한 정보를 얻고 싶었어요. 그 정보가 나중에 하연이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연이가 이 산업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제가 다 봤으니까요. 저는 이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합니다.”슬기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굳어버렸다. 어이가 없었다.‘이 남자... 나를 만난 이유가 결국 최하연 때문이라니...’“도대체 그분이 뭐가 그렇게 좋아요? 오늘 밤 당신도 봤잖아요. 다른 남자가 그분을 위해 2000억을 투자했다고요. 그분이 정말 당신을 사랑했다면, 다른 남자가 나타나게 두지 않았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상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으나, 전혀 화를 내지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