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1학년은 하교 시간이 3학년보다 빠르기에 하연은 진작 교문 앞에서 기다리며 학교에서 나오는 사람을 이리저리 살폈다.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경, 하성 그리고 상혁 세 명이 자전거를 타고 나오는 걸 발견했다. 하연을 보자 하경이 맨 먼저 인사했다.“하연, 너 이 자식 오빠들 기다려서 집에 같이 가는 거 처음이네.”그때 하성이 끼어들었다.“그런데 어쩌나? 우리 피시방에 가서 놀기로 했는데. 너 먼저 기사 아저씨랑 집에 가.”하연의 시선은 뒤에 서 있는 상혁에게 향했다.“누가 오빠들 기다린댔어? 상혁 오빠, 우리 가요!”하경과 하성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니, 하연아, 너 설마 상혁이 기다린 거야?”“네, 아침에 상혁 오빠가 큰 도움을 줘서 제대로 보답하려고요. 다른 일 없으면 우린 이만 갈게요.”그때 하경이 상혁을 바라보며 경고를 날렸다.“부상혁, 너 오늘 우리랑 PC방 가기로 했잖아.”“맞아, 우리 아직 게임 다 못 했어.”하성도 맞장구쳤다. 두 사람한테는 게임이 무엇보다 대단하기에 상혁도 저들과 같다고 생각했다.때문에 하경은 아예 나서서 상혁 대신 거절했다.“상혁은 오늘 못 가. 나중에 다시 약속 잡아.”“아니야, 하연아, 우리 가자.”상혁의 말에 하성과 하경은 어안이 벙벙했다.“야, 우리 게임하기로 했잖아.”“우리 중3이야, 게임은 좀 줄일 필요 있어. 시험 준비 잘해야지.”하경과 하성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투덜거렸다.‘분명 본인이 맨 처음에 우리 둘 꼬드겼으면서 이렇게 갑자기 변한다고?’그에 반해 하연은 활짝 웃었다.“역시 상혁 오빠밖에 없어요, 우리 가요. 제가 아이스크림 살게요.”점점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하성은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그런데 상혁 저 자식 우리보다 하연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지 않냐?”하경은 그 말에 눈을 가늘게 접으며 멀리 떠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우정은 버려? 나
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알바생을 불러 아이스크림 세트 두 개를 주문했다.“얼른 먹어봐요. 이건 딸기 맛, 이건 바닐라 맛, 이건 초콜릿 맛이예요.”상혁은 하연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받으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어때요? 맛있죠?”“응. 괜찮네.”그 말에 하연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오빠도 좋아할 줄 알았어요.”상혁은 또 한 숟갈 더 먹어보더니 감탄했다.“맛있어. 네가 좋아할 만하네.”“그렇죠? 이 집 아이스크림은 맛도 좋고 광고 문구도 아주 좋아요.”하연은 말하면서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어 위에 찍힌 광고 문구를 보여주었다.“자동차에 롤스로이스가 있다면 아이스크림에는 하겐다즈가 있다.”“그리고 이것도요. 매 순간 네가 있고, 매 순간 사랑이 있다. 항상 무심코 너에게 세심한 배려를 주다.”“사랑하는 그녀에게 하겐다즈를.”“...”하연은 아이스크림 통에 있는 광고 문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이것 봐요. 이 아이디어도 정말 기막히지 않아요?하연은 자기가 할 말에만 집중하느라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 박스를 빤히 보고 있는 상혁을 발견하지 못했다.그 박스에는 방금 하연이 읽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사랑하는 그녀에게 하겐다즈를.”그날 저녁 상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전제품 가게 직원에게 명령했다.“2층 침실로 옮겨주세요.”조진숙은 주방 쪽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내려왔다가 새로 산 냉장고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아들, 왜 갑자기 냉장고를 샀어?”“물건 넣으려고요.”그 말에 조진숙은 더욱 의아해졌다.“집에 냉장고 있잖아. 이건 뭘 넣을 건데?”그제야 상혁은 매장에서 가져온 아이스크림 몇 상자를 가리켰다.“저기, 아이스크림이요.”조진숙은 너무 놀라 의아한 듯 물었다.“너 단 음식 안 좋아하잖아? 아이스크림은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이 샀어?”‘그것도 몇 상자씩이나. 이걸 언제 다 먹는담?’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오늘 맛봤는데 괜찮더라고요. 어머니도 맛 좀 볼래요?”“아니야, 엄마는 됐어
상혁은 눈을 들어 하경과 하성을 바라보더니 조금도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하연이 분명 너희랑 같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즘 성적이 좀 떨어져서 할아버지가 집에서 공부하라고 했거든. 당분간 올 수 없어.”“아, 무슨 과목인데?”“수학 올림피아드.”“...”다음날, 잔뜩 풀이 죽어 학원에 도착한 하연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수학 올림피아드 너무 바쁜데 안 하면 안 되나?”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연은 제 자리에 앉은 상혁을 발견했다. 이에 너무 놀란 하연은 믿기지 않아 연신 눈을 비볐다.“상혁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상혁은 눈꺼풀을 들어 하연을 바라봤다.“수학올림피아드는 중간고사 때 가산점이 붙어. 우리 어머니도 그래서 학원 끊어줬거든.”하연은 상혁의 말에 깨고소해했다.“난 또 나 혼자만 강요당한 줄 알았는데, 이모도 오빠를 강요했네요.”“응, 같은 처지야.”“그런데 이거 너무 바빠요.”하연은 수학올림피아드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울고 싶었다.상혁은 그런 하연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웃더니 책을 펼쳤다.“나 중1 문제는 할 줄 아는데, 내가 설명해 줄까? 방금 네가 푸는 거 지켜봤는데 이 문제 풀이 과정이 틀렸어. 이건 우선 문제부터 잘 봐야 해...”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알고 있던 하연은 상혁의 설명을 듣고 난 뒤 머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상혁 오빠, 오빠가 설명하면 바로 알겠는데 쌤이 설명하는 건 하나도 모르겠어요. 오빠가 쌤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요. 앞으로 오빠가 저 가르쳐주면 안 되나요?”하연은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혁을 바라봤다.“그래.”이윽고 들려오는 짤막한 한마디에 하연은 활짝 웃었고, 순간 수학올림피아드가 그렇게 싫지 않았다.그 뒤로 상혁은 하연과 함께 반 학기 동안 수학올림피아드를 다녔고, 그 덕에 하연은 중학교 1학년 조에서 금상을 수상했다.트로피를 받은 순간까지 하연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상혁 오빠, 이거 다 오빠 덕이에요.
이제 막 정신이 든 하연은 상혁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흑흑, 상혁 오빠, 저 이제 죽는 거예요?”상혁은 다급히 앞으로 다가가 하연의 어깨를 꼭 껴안아 주며 위로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죽는다니.”“그런데 저 피 엄청 많이 흘렸어요. 바지도 침대 시트도 온통 피범벅이에요...”상혁은 그 말에 감전이라도 돈 듯 흠칫 떨더니 귀까지 빨개져서는 모기 소리로 말했다.“뭐라고?”“상혁 오빠, 어떡해요? 저 죽고 싶지 않아요. 흑흑...”하연이 더 큰 소리로 울자 상혁은 얼른 하연의 입을 막았다.“바보, 너 안 죽어. 내 말 듣고 여기서 기다려.”하연은 그제야 울음을 멈추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상혁을 바라봤다.“오빠 어디 가요?”“얌전히 기다려.”상혁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이 말만 남기고 떠났다.덩그러니 혼자 남은 하연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보건쌤 강지은이 들어오며 물었다.“쓰러졌다며? 어떻게 된 거야?”“흑흑, 쌤, 저 죽는 거예요?”“뭐? 무슨 상황이야?”하연은 자초지종을 모두 말했고, 그걸 들은 지은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연을 위로했다.“괜찮아. 여자가 나이가 되면 나타나는 생리 반응이야. 네가 이제 컸다는 증거야.”의사의 말에 상황을 알아차린 하연은 너무 난처했다.그런데 마침 그때, 상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서는 헐떡이면서 비닐 주머니를 건넸다.“얼른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어.”하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화장실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은 뒤 꾸물대며 밖으로 나왔다.그에 반해 상혁은 오히려 아무 일 없는 듯 흑설탕과 생강을 끓인 물을 하연에게 건넸다.“이거 마셔, 배 아플 때 통증 완화에 좋아.”“...”“상혁 오빠, 이런 건 어떻게 이렇게 많이 알아요?”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당부했다.“앞으로 특별한 날에는 보온에 주의해. 수시로 흑설탕물 준비해 두고 찬물에 몸 닿지 않게 하고, 격렬한 운동 하지 말고 찬 음식 먹지 말고...”상혁은 주절주절 길게 말했지만 하연
하경이 말하면서 당장이라도 가정의에게 전화하려고 하자, 보다 못한 상혁이 얼른 전화를 뺏으며 설명했다.“여자애들 매달 겪는 특별한 날이야. 제발 좀 그만 캐물어.”그 말에 하경은 머쓱한 듯 눈을 껌뻑거렸다. 생물 수업에서 이미 여성의 생리 현상에 관한 지식을 하경과 하성 모두 어느 정도 배웠기에 잘 알고 있다.그제야 상혁이 말한 ‘특별한 날’이 뭔지 알아챈 하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놀랐잖아. 난 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지. 너 앞으로 몸조심해. 우리 걱정하게 하지 말고.”하성 역시 헛기침을 하며 어색함을 애써 감추었다.“괜찮다니 다행이네. 하지만...”이윽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 왜 그렇게 저질 체력이야? 평소 운동 많이 해야겠어.”“알았어요.”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평소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하던 애가 무슨 용기로 800미터 달리기에 지원했어? 완주할 수나 있겠어?”하연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고 이내 반박했다.“오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누가 800미터도 완주하지 못한대요? 완주하는 건 기본이고 제가 이번에 메달도 딸게요. 두고 봐요!”“그래? 못 믿겠는데? 네가 만약 완주하면 네 이번 학기 간식은 내가 책임질게.”그 말을 들은 순간 하연은 승부욕이 활활 타올랐다.“약속했어요? 후회하지 마요.”“후회라니, 그럴 리 없어. 하지만...”하성은 의미심장하게 말머리를 돌렸다.“만약 완주 못 하면 나 게임기 세트 사줘. 최고 사양으로다가.”“오케이, 약속했어요!”하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그 모습을 본 하경이 다급히 하성의 팔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귀띔했다.“너 그만해. 쟤가 어릴 때부터 운동은 젬병이었잖아. 이번에도 참여에 중점을 둘 텐데 왜 그래?”그건 하성도 알고 있다.“나도 다 생각 있어. 하연이 운동 열심히 해서 체력을 키우라고 그러는 거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그래, 네 말 기억해.”하성은 뒤돌아 하연을
800미터 달리기는 곧바로 시작되었다.800미터는 그나마 장거리 종목에 속하기에 하연은 총소리가 울린 직후부터 계속 3등을 유지했다. 하지만 약 두 바퀴쯤 돌았을 때부터 체력이 달려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그때, 상혁이 언제 나타났는지 불쑥 나타나 라인 밖에서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하연아, 호흡 가다듬고 세 걸음에 한 번씩 호흡해.”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페이스를 조절하며 점차 속도를 끌어올렸다.그 덕에 막판 스퍼트에 3등이라는 성적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헉헉헉... 안 되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조금만 휴식할게요. 저 잠깐 누워 있을게요.”하연은 말하면서 운동장에 드러누우려 했지만 다음 순간 상혁이 하연의 팔을 잡아당겼다.“이제 막 달리자마자 앉으면 안 좋아. 내가 부축할 테니 천천히 걷다가 페이스 돌아오면 앉아서 휴식해.”“싫어요, 너무 힘들어요.”“안돼. 괜찮아, 천천히 걸을게.”상혁은 하연을 부탁한 채로 천천히 걸으며 하연을 도와줬다. 그때 하경과 하성이 달려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어때? 하연아, 괜찮아?”하성을 보자 하연은 바로 회복이라도 한 듯 우쭐댔다.“오빠, 저 3등이에요. 우리 내기 잊지 않았죠?”하성은 싱긋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잘하던데. 완주에 등수까지. 좋아. 이번 학기 간식은 내가 책임질게.”“약속했어요? 저 엄청 많이 먹을 거예요.”“그래.”하연은 얼른 몸을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오빠 뭐 먹을래요? 하성 오빠가 쏜다고 하니 마음대로 시켜요. 상혁 오빠가 같이 달아준 덕에 저 끝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이제 괜찮아졌어?”상혁이 걱정스레 물었다.“네, 이제 괜찮아요.”“그럼 됐어.”“...”그 일이 있은 뒤 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 하성, 하경과 사혁은 중간고사를 치르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한편 하연도 2학년 생활을 맞이지만 물리에 도저히 흥미를 가질 수 없어 성적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하경 오빠, 물리 너무 어려워요. 배우고 싶지 않은데 안 배울 수 없어
주말.자전거를 타고 최씨 저택에 도착한 상혁은 최동신을 보자마자 예의 있게 인사했다.“할아버지, 잘 지내셨어요?”최동신은 상혁을 보자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상혁이구나. 하성과 하경이 찾아왔어? 그 두 녀석은 집에 없어, 아침 일찍 나갔거든.”“괜찮아요, 저 오늘 하연이 찾아온 거예요.”그 말에 최동신은 알겠다는 듯 싱긋 웃었다.“그럼 내가 하연이 불러오라고 하마.”이윽고 가사도우미를 물러 왔다.“가서 하연이 좀 불러오게. 상혁이 왔으니 얼른 내려오라고.”“괜찮아요, 할아버지, 저 여기서 기다리면 돼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계단 입구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하연이 총총걸음으로 달려 내려왔다.“상혁 오빠, 왔어요?”“응.”상혁은 간단히 대답하고 최동신을 바라봤다.“할아버지, 우리 이만 나가볼게요.”“그래, 가 봐.”최동신의 답변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고, 하연은 바로 의아한 듯 물었다.“오빠, 우리 어디 가요? 뭔데 그렇게 비밀스럽게 행동해요?”“아직은 말 안 할게. 이따가 알게 될 거야.”“아, 알았어요.”“뒤에 앉아.”자전거에 앉자마자 진지하게 건네는 초대에 하연은 조금도 망설이지 상혁의 뒤에 앉았다. 하연이 제대로 앉은 걸 확인하자 상혁은 바로 페달을 밟으며 출발했다.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하연은 여전히 의아했다.“상혁 오빠, 여기 어디에요?”상혁은 얼른 하연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었다.“자, 들어가 보자.”두 사람이 들어선 방 안에는 물리 실험 기구들이 가득 놓여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기구들은 단번에 하연의 흥미를 끌었다.“상혁 오빠, 이게 뭐예요?”“그건 볼록렌즈와 오목렌즈야.”“신기하네요. 그럼 저건요?”“저건 저항상자, 옆에 있는 건 발파 저항측정기와 전류 측정기.”“...”물리 실험을 하자 하연은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이것저것 물었다.그런 하연의 질문에 상혁은 인내심 있게 설명하며 실험실 반대편으로 거어갔다.그러다 목적지에 도달한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하연을
하연은 본인이 확실하게 인정한 일에 대해서는 집요한 사람이었는데 물리 실험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부터 물리학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변하게 되었다.그 덕에 하연의 물리 성적은 중학교 졸업 때까지 매우 좋았다.게다가 그동안 다닌 학교가 귀족학교인 만큼 커리큘럼이 풍부해 문화 수업뿐만 아니라 직업 관련 수업도 일부 섞여 있었다.그래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하연은 집안의 배정에 따라 미리 MBA 교육을 받았고 고1 때부터 경영학 수업을 접했다.사춘기 아이들은 어느 정도 반항기가 있다고 하는데 하연은 반항기가 좀 늦게 왔다.“할아버지, 저 경영학 배우기 싫어요, 앞으로 회사 일에도 큰 관심이 없을 거예요.”“제발요. 이제 더 이상 배우지 않으면 안 돼요? 집안에 큰오빠도 있잖아요.”하연은 할아버지에게 애원하며 말했다.최동신은 평소에 하연을 총애했지만, 이 일에서는 시종일관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다.“안돼.”“왜요, 할아버지?”“경영 수업 열심히 받아, 모르는 거 있으면 큰오빠한테 물어봐.”“싫어요, 저 정말 관심이 없어요.”“그럼 말해봐, 넌 대체 어디에 관심이 있는 거야?”“...”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비록 할아버지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지만 고집을 꺾기 싫었다.“어쨌든 저는 경영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걸 찾으면 무조건 좋아하는 일을 할 거예요.”하연의 말을 들은 최동신은 결국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좋아, 그럼 관심사를 찾기 전에 얌전히 EMBA 수업 받아.”하연은 입술을 오므렸다. 물론 내키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요구대로 먼저 경영학 수업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어느덧 고3이 된 하성과 하경은 집안 배정으로 대학 입시를 치르는 대신 졸업 후 곧바로 고등교육부에 진학했다.그래서 남들이 모두 대학 입시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이 둘은 집에 틀어박혀 게임을 했다.그날, 하연은 갑자기 하성과 하경을 찾았다. “오빠들, 저 나중에 디자인을 배워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거 어때요?”두 사람은 동작
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혁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한 줄기 차가운 빛...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지석 도련님 말씀대로, 형제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죠.” “다만, 부씨 가문의 일을 굳이 외부인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상혁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기운에 압도된 지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석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슬기가 먼저 나섰다. “하연 씨, 여기 메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이 괜찮아요? 추천 좀 해주세요.” 슬기의 말에 하연은 조용히 상혁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자, 상혁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날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별일도 아닌 걸로 걱정하는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혁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바로 슬기에게 메뉴를 추천했다.“오리지널 맛도 괜찮고, 여러가지가 섞인 맛도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드셔보세요.” “그럼 두 가지 맛으로 각각 한 그릇씩 주세요!” 슬기는 메뉴를 탁 닫으며 밝게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석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가 나가는 것을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리를 떠나 자, 슬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오붓한 자리를 불편하게 해서요. 집안에서 주선한 선 자리를 억지로 나온 거라...” 여자의 말투에서 묘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슬기는 문득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혁은 그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온전히 하연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슬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눈빛을 외면했다. “그나저나, 하연 씨.” 슬기가 화제를 돌렸다. “최근 하연 씨가 뒤로 물러나고 회사를 최하성 씨에게 맡겼다고 들었어요.”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듣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남준을 믿고 기다린 게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모든 걸 걸어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남준 씨, 난 그냥...” “그냥 뭐요?” 다영은 고개를 저으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에 떠돌던 소문들 때문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것뿐이에요.”“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남준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기쁨에 젖어 있는 다영은 남준의 말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꼭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언제나 남준 씨의 편이에요. 당신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부르면 돼요. 항상 곁에 있을 거니까요.”‘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내가 도와서 얻게 해줄 거야. 그게 DL그룹이라 해도...’ 그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굳은 결심을 다졌다....새해를 맞이하는 밤.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렸고, 도시는 환희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모두가 기쁨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하연은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 안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으로부터 들어온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어났어?” 상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은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시예요?” 상혁이 곧바로 답했다. “아직 일러. 11시밖에 안 됐어.” “11시?” 하연은 예상외로 늦은 시간에 살짝 놀랐다. 그 순간 상혁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조금 더 자도 돼.”그러나 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연의 배에서 신호가 왔다
“남준 씨, 지금 당신 날 피한 거예요?” 다영은 손에 쥔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조용히 주머니에 넣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남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제는 마치 남이 된 것 같은 이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남준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요.” 다영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스쳤다. 망설임 없이 그녀는 차 뒤쪽을 돌아 조수석 문 앞에 섰고, 문을 열어 차에 탔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놓인 정교한 포장 상자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영은 상자를 들고서 물었다. “남준 씨, 이거... 내 선물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멈추지 않고 상자를 열고 있었다.남준은 살짝 찌푸린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다영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디자인된 고급스러운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푸른빛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예쁘네요...” 다영은 감탄하며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한 미소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이거 나한테 걸어줄 수 있어요?”남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목걸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남아공에서 천연으로 채굴된 최고급 보석입니다. 순도와 투명도가 모두 최상급이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 높아 전 세계에 단 하나뿐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죠.’ 그때 들렸던 매장의 직원 설명이 귀에 맴돌았다.
“나... 나 술 안 취했어.” 남준은 말끝이 흐려졌고, 아까의 당당한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하연은 남준의 이상한 태도를 감지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상혁이 어느새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혼자 있는 남자의 긴 그림자가 조명 아래 길게 드리워졌고, 묵직한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오빠...” 하연은 입을 열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상혁은 모든 상황을 이미 이해한 듯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편안한 눈빛을 주었다. 단 한 번의 눈맞춤으로 하연은 마음속에 있던 불안함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신뢰가 있었다.상혁은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바람이 차니까 빨리 들어가자.”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응, 알았어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 맞물리고,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서로에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장면은 남준의 가슴 깊은 곳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남준은 표정만큼은 최대한 담담하게 유지하며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리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DS그룹 연말 행사가 있다고 해서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들렸어, 마침 형도 여기 있었네.”상혁은 하연의 손을 살며시 감싼 채 고개를 들고 남준을 바라보았다. 상혁의 눈빛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왜 이젠 DS그룹 일에도 신경이 쓰여? 모르는 사람은 보면 네가 DL그룹 버리고 DS그룹으로 옮기려는 줄 알겠어.” 남준은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상혁의 말에는 은근한 경계와 조롱이 담겨 있었다. 남준은 불리한 상황임을 깨닫고 억지로 웃으며 변명했다. “형,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분위기나 좀 보려고 들른 거야.”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이미 간파하고
“시간 없어.” 하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메시지를 확인했고, 내용을 본 후 손에 힘이 들어갔다. 10분 후.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남준의 눈에 띄는 빨간색 스포츠카가 비상등을 켠 채 호텔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번화한 호텔 입구에서 유독 도드라져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남준이 내렸다. 그는 오늘 블랙 패딩을 걸친 채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며 여유롭게 하연을 바라보았다. “역시 올 줄 알았어.”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고, 말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차가운 바람이 하연의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하연은 몇 걸음 옮긴 뒤 걸음을 멈췄고, 남준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 흩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말해. 문자에 적힌 상혁 씨하고 관련해서 중요한 일이 뭔데?”남준은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형이 걱정돼?”“그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하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남준은 그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더니, 불과 반걸음 거리에 멈춰서 몸을 약간 숙였다. “너의 그 관심 나 한테도 좀 나눠 주면 안 돼?”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내뱉은 말에 은은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셨어?”남준은 입가를 비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혹시 나 걱정하는 거야?”“착각하지 마.”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부남준,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여기서 시간 끌 여유 없어.”남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어딘가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 갈수록 성격이 우리 형이랑 닮아가네. 역시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하연
하연은 밝게 웃으며 상혁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 대표님이 직접 짠 오렌지 주스라 그런가, 확실히 맛이 다르네요. 정말 맛있어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으면 자주 짜줄게.”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히 잘 마실게요, 부 대표님!” “아니,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서 둘이서만 꽁냥거리고 있었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하성이 두 팔을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너 요즘 이 녀석을 너무 애지중지하더라.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오빠!!” 하연은 볼이 부풀어올라 약간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던 상혁은 태연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애지중지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성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투항했다. “알았어, 알았어. 난 그냥 너희 둘이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여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잘 지내줘, 아주 보기 좋아!”그때 하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부남준’이라는 이름이 뜨자 그녀는 잠시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오빠들,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연이 자리를 비우고 복도로 나가자, 하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너희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더라. 동건 삼촌 쪽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상혁은 하연이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복도 쪽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노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하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건 삼촌이 그 여자를 꽤 오랫동안 봐줬던 모양이던데. 이제는 꽤 많은 걸 쌓아둔 듯하고, 한번 크게 판을 벌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