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소영금은 보디가드를 뒤로하고 원이와 함께 성도윤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병실의 문을 열려던 소영금은 다시 손을 거두었다.“할머니, 왜 그러세요? 어서 들어가요.”원이는 큰 눈을 깜빡이면서 소영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네 아빠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의식이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도 회복 중이야. 도윤이가 너를 보고 더 충격받으면 안 되는데...”소영금은 성도윤이 늘 걱정되었다.뇌수술이 순리롭게 끝났지만 의식을 되찾은 성도윤은 슬픔에 잠겨 창밖을 종종 내다보곤 했다. 작은 곳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외부와 접촉하려고 하지 않았다.그래서 소영금은 성도윤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기억해 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이와 만나게 했다가 자칫 상태가 악화하면 자극받은 성도윤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아들을 그렇게 못 믿으세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일 거예요. 그리고 제가 괴물도 아닌데 왜 저를 보고 충격을 받겠어요? 만약 이번 만남으로 인해 충격받고 쓰러질 나약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도움을 청하러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원이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나쁜 남자인 건 맞지만 능력 있는 든든한 어른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차설아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엄마를 사랑한다면서 엄마를 지키지 못한다면... 남자로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해야겠지.’“네 말을 들어보니 또 그런 것 같구나.”소영금은 원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성대 그룹의 대표가 나약한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회사를 날렸을 것이다. 소영금이 머뭇거릴 때, 병실 안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밖에 누구 있어요?”“보스, 제가 나가볼게요.”병실의 문을 열고 나온 진무열은 소영금과 원이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누가 왔나 했더니, 원이 도련님이셨군요! 두 분이 같이 오신 건가요?”“아니. 이 어린아이가 글쎄 여기까지 혼자 왔다지 뭐야? 원이는 너무 똑똑해.”소영금은 말하면서 병실 안쪽을 들여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그래. 그러는 게 두 사람한테 좋은 거겠지...”소영금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진무열의 말을 따랐다. 원이는 혼자 큰 병실에 들어갔고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성도윤을 발견했다.성도윤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얼굴이 창백했다. 살짝 밀어놓으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고 몸이 허약해 보였다.성도윤의 두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리스마 있고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던 눈은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빛을 잃었다.성도윤을 탐탁지 않아 하던 원이마저 그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이 찌질한 아빠를 어쩌면 좋아? 너무 불쌍해 보이잖아. 이러면 뭐라고 할 수도 없어.’혀를 끌끌 차면서 성도윤을 혼내고 싶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원이는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럽게 성도윤을 불렀다.“저기요.”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성도윤은 원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고 눈에 생기가 돌았다.“원, 원이야?”성도윤의 머릿속에 세 식구가 해바라기섬의 바닷가에서 뛰어놀던 화면이 번뜩 떠올랐다.“이제는 제가 누군지 아시나 봐요?”원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려고 했지만 자신을 알아봐 준 성도윤한테 그러고 싶지 않았다.“당연하지. 너는 내 아들이잖아. 원이야, 이리 와.”성도윤은 감격스러운 어조로 말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원이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성도윤은 밀려오는 통증에 상처 자국을 움켜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원이는 재빨리 침대맡으로 다가가서 말했다.“수술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침대에서 내려와요? 얼른 누우세요. 일단 하고 싶은 말만 하시고요.”어린 원이는 어른처럼 사뭇 진지하고 엄숙한 어투로 당부했다. 그러고는 작은 손으로 성도윤의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졌다.“그래. 먼저 너랑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어.”성도윤은 원이의 말대로 자리에 누우면서 미소를 지었다. 원이의 작은 손이 성도윤의 손등에 닿을 때,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면서 성도윤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사랑했지만 함께일수록 견디기 힘든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성도윤은 고민하다가 차설아를 멀리하기로 결심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 엄마를 두고 도망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성도윤의 말을 들은 원이는 표정이 삽시에 굳었다. 원이가 성도윤이 차설아한테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아예 달랐다.성도윤이 차설아를 멀리하겠다는 것처럼 말하자 원이는 화가 치솟았다.“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저 설아가 행복하길 바라서 그래.”성도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스스로 좋은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차설아를 평생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었다.“입으로만 그러지 말고 행동으로 증명하세요! 우리 엄마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에 진심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요. 예전에 우리 엄마한테 접근할 때마다 제가 막았었죠. 그럼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노력해서 저의 마음을 얻으면 안 돼요?”원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씩씩거렸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도윤을 노려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아직도 우리 엄마를 사랑하기는 해요?”“사랑해.”성도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다른 여자한테 마음을 표현해 본 적은 있어요?”원이는 엄숙한 표정을 하고서 계속 캐물었다.“아니...”성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한 명 있긴 하지. 네 엄마한테 수없이 많은 사랑 고백을 했었어.”돌이켜보면 차설아를 향한 사랑 고백은 전부 사도현이 직접 가르친 것이었다. 한때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고 단순했었다.성도윤은 아직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야 할지 잘 몰랐다.그리고 차설아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기에 적극적으로 다가갈 생각조차 사라져 버렸다.“사랑 고백이 뭐 대수인가요?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하고 싶어요? 저랑 엄마, 여동생이 아무리 밀쳐내고 거절해도 절대 포기하면 안 돼요. 알겠죠?”원이는 성도윤을 향해 박력 있게 말했다.“저희가 확실하게 거절하지 않은 건 여지를 주겠다는 말이에
그 뒤로는 전부 차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이었다. 성도윤의 어머니가 언급되지 않은 일기에서 성도윤은 차설아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었다.차설아의 부모님은 다정하고 상냥한 분이었고 차설아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으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차씨 가문은 다른 재벌가보다 더 가족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문이었다.성도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일기를 읽었다.“오늘은 우리 설아가 3살이 되는 날이다. 내 자식이지만 이렇게 사랑스럽게 클 줄 몰랐다. 설아는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블록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조각이 되는 블록을 이용해 집을 만들었다. 무려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기질이 드러나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성도윤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는 계속해서 읽었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설아의 12살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는 설아가 더 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우리 설아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설아는 여자라서 남자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지금 느끼는 것보다 수백 배 강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되어서 딸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에게 설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해주고 싶다.”성도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도윤은 차설아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하지 못했고 차설아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지도 못했다.성도윤은 자신이 좋은 남편이 아니라고 자책했다.“장인어른, 정말 죄송해요. 그동안 설아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남은 생을 통해 반성하고 설아한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거예요. 설아를 보살피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요.”성도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일기장을 계속 펼쳐보았고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나 마지막
차설아는 성도윤의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그럴 일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아요.”“알겠어. 이만 가볼게.”성도윤은 풀이 죽은 채 뒷마당에 있는 오두막으로 들어가서 휴식했다. 그리고 오전에 발견했던 그림 한 장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뭐라도 찾으려고 했다.단서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차설아의 아버지가 쓰던 오두막 안에 있기 때문이다.만약 차설아의 아버지가 성도윤의 어머니를 사랑해서 그린 그림이라면 성도윤과 차설아가 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성도윤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서재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낡은 일기장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성도윤은 일기장을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장인어른의 일기장을 내가 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지 않으면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어. 설아에게 전부 얘기해주기로 했으니까 확인해야 해.’주저하던 성도윤은 결국 자물쇠를 풀고 단서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소중한 사람의 생일로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아버지, 어머니, 차설아의 생일을 순서대로 입력했지만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설마 어머니의 생일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어.”성도윤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일기장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성도윤의 어머니 생일이라면 드라마틱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었다.소영금의 생일은 3월 31일이었고 별자리는 전형적인 양자리였다.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에 착한 마음씨를 지녀서 매력덩어리였다.성도윤이 소영금의 생일을 입력하자 자물쇠가 기적적으로 열렸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성도윤은 차설아와 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일기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10월 17일, 날씨 맑음. 화창한 날씨와는 달리, 나의 마음속에 먹구름만 가득했다. 오늘은 나랑 영금이가 헤어진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영금을 진작
차성철은 차설아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차설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설아야,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어. 성도윤이 너한테 도움이 되면 이용해도 좋지만 계속 의지하고 기대면 결국 너만 힘들어져.”“그럼 도윤 씨랑 다시 만나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야? 오빠는 역시 내 편이었어!”차설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차성철과 성도윤 사이의 원한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그래서 차설아가 성도윤과 다시 만나게 되면 차성철이 극구 반대할 줄 알았다.하지만 차성철은 두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다.“내가 반대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어차피 네 선택이니 나는 너를 믿어보기로 했어. 성도윤과 싸우면서 둘 다 크게 다쳤지만 성도윤은 결국 나를 구해주었지. 이제는 원한 따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차성철은 흉터 회복 수술을 받은 후부터 성도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게다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기에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차설아가 살아만 있다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는 오빠의 마음이었다.“오빠, 고맙고 사랑해. 오빠가 나를 응원해 주니까 마음이 놓여. 정말 다행이야!”차설아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차성철이 반대할까 봐 성도윤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차성철의 반응에 차설아는 감동했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나는 응원해 준다고 한 적 없어. 성도윤이 믿음직스러운 남자인지 아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직접 보고 판단할 거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집에서 내쫓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전해.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라도 일단 내 눈에 들어야 해.”“알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얼른 끝마치고 집으로 와.”차성철은 가라앉은 보물과 배를 찾고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성도윤과 대면했을 때 기죽지 않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뒤, 차설아와 성도윤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표정을
차설아는 성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을 재빨리 빼앗았다.“오빠도 얼른 쉬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차설아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차성철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그래. 상처가 아무니까 다쳤던 기억을 잊은 거겠지. 지금은 성도윤을 감싸고 돌아도 예전처럼 후회하게 될 거야.”“오빠, 그동안 도윤 씨랑 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이 과연 욕심일까? 그저 잠시라도 도윤 씨랑 함께하고 싶어. 도윤 씨 덕분에 요즘 정말 즐겁고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어.”차설아의 말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실명하고 나서 뒤바뀐 인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차설아는 어둠 속에 갇혀있기보다 성도윤의 손을 잡고 같이 행복해지고 싶었다.“성도윤과 네가 계속 이대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조사하면서 차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연합한 가문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어. 우리가 상대할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야.”차성철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차성철은 차설아한테 가문의 복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매일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내다보면서 아무런 수확도 없이 외롭게 견디던 차성철은 지쳐갔다. 그래서 차설아에게 전부 털어놓으려고 했었다.“어느 가문인지 알아냈다는 뜻이야? 그 자료를 나도 한 번 봐야겠어. 상대가 누구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차설아는 실명했지만 부모님을 죽게 만든 원수를 두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잘 나가다가 다른 가문의 함정에 빠져 몰락한 차씨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복수하고 싶었다.“자료만 보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설명할게. 이 일은 성도윤도 알아야 해.”차성철은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도윤 씨도 알아야 한다고? 그럼 성씨 가문과 연관되어
성도윤은 일부러 특별한 호칭으로 차설아를 부르면서 다가갔다.“주인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장난하지 말고 잘 들어요.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요.”차설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조금 전에 오빠랑 통화하면서 부지런한 사용인을 구했다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오빠는 당신이 나를 해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전화를 걸면 당신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 돼요. 오빠의 심기를 건드리면 우리 둘 다 끝장이에요.”“나랑 다시 만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나를 당신의 남자라고 소개하기 싫어?”“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 민망해서 그래요. 당신이랑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큰소리쳐서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어요.”차설아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재벌가 아가씨로서 인간관계의 원칙을 칼같이 지켰었지만 성도윤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설아는 성도윤 앞에만 서면 원칙을 어겼고 선을 넘었다.했던 말과 다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내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들통날 텐데...”“그럼 일부러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대화해봐요. 젊은 여자인 줄 알면 오빠도 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돼요.”차설아는 말하면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윤이 차성철을 속이길 바랐고 성도윤이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하고 있었다.“알겠어.”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차설아가 전화를 건네자 곧바로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쪽이 설아가 새로 들인 사용인이에요?”차성철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맞아요.”성도윤은 약속대로 여자의 목소리로 대화하지 않았다.“안녕하세요. 성도윤이에요.”“누, 누구라고요?”차성철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차설아는 깜짝 놀라서 성도윤을 툭툭 쳤다.“도윤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오빠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차설아는 차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차성철이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핑계를 대며 다급히 끊었다.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 차설아는 차성철과 덤덤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몇 초 후, 차성철이 전화를 받았다.“설아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너답지 않게 먼저 연락해서 놀랐어. 별일 없지?”차성철은 남부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아서 보물과 함께 가라앉은 배를 찾으려고 했었다. 배에 있던 보물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차성철은 점점 지쳐갔다.차성철은 차설아가 해안시에서 혼자 지내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당장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차설아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다. 차성철은 먼저 연락한 차설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차설아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 이상, 먼저 차성철에게 연락할 리 없었다.“오빠, 그렇게 진지하게 물을 필요 없어. 기쁜 일이 생겨서 오빠한테 알려주려고 용기 내서 전화한 거야.”차설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애교 섞인 어조로 말했다.“들어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무엇이 우리 설아를 기쁘게 했는지 들어나 볼까?”차성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음... 우리 집에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사용인이 한 명 들어왔어. 월급을 적게 주는데도 군소리하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일해. 오빠, 이런 사용인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차설아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수줍어했고 다른 사람에게 자꾸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차성철과 성도윤은 원수 사이였기에 성도윤을 사용인이라고 둘러댔다.“그래? 네가 편하면 돼.”“너무 편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다가 이런 사용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사용인을 쉽게 믿지 말고 계속 지켜봐. 집에서 너를 보살피는 사람인데 만약 겉모습에 속아서 경계하지
차설아는 깨어난 척하면서 기지개를 켜고는 성도윤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말했다.“도, 도윤 씨? 도윤 씨가 어떻게 저의 방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변태 같아요. 그리고 장난감이라고 한 건 뭐죠? 도윤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어요.”성도윤은 차설아가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자존심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당신 말대로 나는 뻔뻔스러운 변태 같은 남자야. 그래서 아이가 있는 여자의 방에 가만히 들어가서 장난감 역할을 자처하곤 했어. 주인님이 깨어났으니 이제는 주인님을 모시고 내려가서 음식을 대접해야지.”“음... 그래요.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요. 당신의 상황극에 맞춰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혀 줘요.”차설아는 긴 팔을 뻗고는 성도윤이 옷을 갈아입혀 주기를 기다렸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의 불을 켰고 편안한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혀 주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섰고 애틋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설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옷을 입은 뒤, 성도윤은 차설아의 가는 허리를 감싸면서 귓가에 속삭였다.“나를 유혹해 놓고 혼자 발 빼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모르는 척한다는 걸 다 알아. 나중에 우리 둘 다 몸이 회복하면 오늘 진 빚을 제대로 갚아야 할 거야. 알겠어?”“흥! 변태 같은 당신을 다시는 방 안에 들이지 않을 거예요. 이 손 치워요.”차설아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성도윤의 팔을 툭 쳤다. 어릴 적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차설아는 여린 면을 내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성도윤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져서 연약한 모습이거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도현이 차설아를 보면 ‘사랑스러운 여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차설아는 성도윤만 보면 저도 모르게 거만한 모습 대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두
원이와 달이는 식탁 앞에 앉아 성도윤과 차설아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이는 인쌍을 찌푸리고는 원이를 향해 말했다.“오빠, 아빠랑 엄마는 뭐 하고 있기에 아직도 내려오지 않는 거야? 음식이 식으면 맛없단 말이야. 아직 뜨거울 때 같이 먹었으면 좋겠어.”어른들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원이는 턱을 괴고 생각해 보았다.“나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안 나오는 거지? 아빠가 엄마를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야?”“흥! 아빠를 용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엄마를 괴롭히는 거지? 우리가 가서 아빠를 혼내주자.”두 아이는 주먹을 꽉 쥐고는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때 민이 이모가 맛있게 끓인 국을 들고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흥분한 달이와 원이를 말렸다.“원이 도련님, 달이 아가씨. 먼저 식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윤 도련님과 설아 아가씨는 피곤해서 쉬고 있을 거예요. 간만에 휴식하는 거라 방해하면 안 돼요.”“쉬고 있을 거라고요?”원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을 이었다.“엄마는 오후 내내 쉬고 있었잖아요. 저녁도 안 드시고 또 잔다는 뜻인가요? 그러다가 배가 고파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죠?”“그, 그건... 예전에 설아 아가씨는 실면해서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곁에 도윤 도련님이 계시니까 마음이 편해서 푹 주무실 수 있는 거고요.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아요.”민이 이모는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서 식은땀을 흘렸다.“자,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조금 더 기다리면 두 분이 식사하러 내려올 수도 있잖아요.”민이 이모는 위층에 있는 차설아의 방을 힐끗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도련님은 식사 시간이 끝나기 전에 설아 아가씨를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 어쩌면 좋지?’민이 이모의 예상과는 달리 성도윤과 차설아는 이불만 덮고 자고 있었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복근이 손에 닿자 깜짝 놀랐다.‘이건 꿈이 아니야! 이런 복근을 나의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다니, 꿈에 절대 나올 리 없는 초콜릿 복근이
성도윤의 말을 들은 차설아는 마치 청심환이라도 먹은 듯 마음이 안정되었다.생각이 많았던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눈앞의 행복을 놓쳤다.어쩌면 득보다 실이 많았었다.현재의 삶을 잘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보기로 결심했다.성도윤은 차설아를 위로하고 밥하러 주방으로 갔다.오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관문이었다. 처음으로 주방에 선 성도윤은 모든 요리 실력을 발휘하여 세 명의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켜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했다.화원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은은하게 전해지는 음식 향이 더해져 삶이 더없이 행복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다.오늘 불쾌한 일을 겪은 차설아는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졸음기가 없었던 그녀였지만 방금 겪은 일로 힘들었던 그녀는 잠이 들었다.“설아야,설아야.”비몽사몽인 그녀의 귓가에는 낮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입으로 중얼거리며 이불을 감싼 그녀는 계속 쿨쿨 잤다.“아직도 잠에서 덜 깬 거야? 밥이 다 되었는데 가져다줘?”성도윤은 희미한 조명 아래에 서서 차설아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저녁 내내 바쁘게 움직여 한 상 가득 음식 준비를 마친 성도윤은 마치 선생님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차설아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방에 들어온 성도윤은 깊게 잠든 차설아를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혼잣말을 했다.“당신이에요?”꿈꾸듯 비몽사몽인 차설아는 애교를 부리며 손을 내밀어 성도윤의 목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뽀뽀.”이 말을 들은 성도윤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뽀뽀라고... 진심이야?”성도윤의 기억 속에서 차설아가 이렇게 열정적이고 부드러운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갑작스러운 차설아의 적극적인 사랑에 놀란 성도윤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당신의 입술... 어디에 있어? 왜 닿지 않는 거야? 뽀뽀하게 얼른 가까이 들이대 봐.”자신이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차설아는 혀를 꼬며 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