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아는 지난번에 성도윤과 갈등을 빚은 뒤로 조심스러워졌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는 성도윤이 혼약을 취소할 수도 있었기에 눈치만 봐야 했다.다행히도 성도윤의 태도는 많이 좋아졌고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 조금 있다가 친구가 온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야.”성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 잔에 물을 받고 있던 서은아는 친구가 온다는 말에 넋을 잃고 있다가 하마터면 끓는 물에 손을 델 뻔했다.“사도현 아니면 강진우? 내가 아는 사람이야?”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서은아를 노려보았다.“내가 친구 좀 만나겠다는데 너한테 보고까지 해야 해?”“그런 뜻이 아닌 걸 알잖아. 사도현이면 나도 아는 사람이니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뜻이었어. 얼마나 바쁜지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거든.”서은아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너는 모르는 사람이야.”성도윤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그 정도로 궁금해할 줄은 몰랐어. 보면 알아.”성도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리면서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윤아, 우리는 매번 병원에서 만나는 것 같아. 이제는 밖에서 좀 보자.”캐주얼하게 입은 남자가 걸어들어오더니 서은아를 훑어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아, 제수씨도 계셨군요. 안녕하세요.”“누, 누구세요?”서은아는 처음 만난 남자를 경계하면서 지켜보았다.“신경외과 의사 박성훈이라고 해요. 우리 도윤이 잘 부탁드려요.”박성훈은 안경을 위로 올리고는 서은아한테 손을 내밀었다.“신, 신경외과 의사라고요?”서은아는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제수씨, 뭘 그렇게 놀라요? 제가 신경외과 의사인 게 너무 의외라서 그래요? 겁먹지 말아요. 저는 누군가를 해치는 사람이 아니에요.”박성훈은 서은아의 반응이 이상했지만 일단 농담으로 대처했다. 보통 신경외과 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사람들은 숭배하는 눈길을 보내왔다.하지만 서은아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알아요. 그저
박성훈은 가슴팍을 툭툭 치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제수씨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어요. 정 걱정된다면 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해 보세요. 제가 집도한 수술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수씨는 그저 도윤이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세요.”박성훈은 다른 건 몰라도 뇌수술과 바다낚시만큼은 실수한 적이 없었기에 자신 있었다. 서은아는 예전부터 박성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성진과 음모를 꾸밀 때, 돈으로 박성훈을 매수해서 더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었다.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박성훈은 돈과 명예에 큰 관심이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다.환자를 보거나 수술을 집도하는 건 전부 기분에 따라서 결정했다.그래서 서은아는 박성훈보다는 실력이 부족하지만 돈을 좋아하는 신경외과 의사를 찾아 수술을 맡겼다. 만약 박성훈이 성도윤의 수술을 집도하게 되면 들통날 것이 뻔했다.서은아는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말했다.“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윤이가 안정을 찾은 지 며칠 되지 않았어요. 더 이상의 수술은 무리라고 봐요. 저는 도윤이가 그저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기억을 되찾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고 지금처럼 건강하면 돼요...”“제수씨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수술은 환자가 받는 거잖아요.”서은아의 말에 박성훈은 가만히 누워있는 성도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도윤아, 너는 기억을 되찾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성도윤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차갑게 말했다.“형을 이곳까지 오게 했다는 건 이 수술이 나한테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에요. 흐릿한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기억을 되찾고 마음 편하게 지낼래요.”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성도윤이 성공한 사업가, 사랑하는 가족과 여자를 지킬 수 있는 남자였다. 완벽한 성도윤은 매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여겼다.그러나 성도윤은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닌 누군가의 조종에 따라 흘러가는 인생이 괴로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
“아마 불안해서 더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 수술하고 기억을 찾으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성도윤은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슬픔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서은아가 떠난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서은아가 옆에 있었기에 무수히 많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성도윤은 자신의 곁을 지켜준 서은아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싶었고 이 여자를 책임지고 싶었다. 수술 전이든 수술하고 나서든 여전히 서은아를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 수술은 그저 흐릿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박성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불안하다는 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가졌기 때문이야. 너에 비하면 자신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꼈거나 너와의 관계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할 리가 없잖아.”“관계가 떳떳하지 못하다고요?”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박성훈의 말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아직은 이해 못 하겠지. 수술받고 나면 그 기억이 돌아올 거야. 그럼 왜 수술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불안해하는지 알게 돼.”박성훈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신경외과 의사로서 서은아가 왜 갑자기 긴장하고 두려워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극도로 무서워하는 건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성도윤한테 의심 가는 점을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형이 시간 될 때 수술을 부탁할게요. 나는 언제든지 상관없으니까 형이 수술 날짜를 정해줘요.”성도윤은 두 팔을 벌린 채 덤덤하게 말했다. 언제든지 수술대에 누울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본 박성훈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누가 보면 내가 널 죽이는 줄 알겠어. 간단한 수술이니 미리 겁먹을 필요 없어. 지금의 너는 수술하기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야. 두 주일 정도 푹 쉬고 회복한 뒤에 수술해도 돼.”“알겠어요.”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훈은 다시 말을 이었다.“너랑 같이 많은 것을 겪어온 애틋한 사람이 바로 저분이구나. 나는 두 사람이 서로 없으면 못 살 것처럼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마음에도 파란을 일으켰다. 성도윤이 다급히 물었다.“다쳤다고요? 언제 어떻게 다쳤는데요?”“병원으로 이송된 지 얼마 안 되었어. 어린이집에서 열린 시합에 참가했다가 높은 곳에서 추락했대. 심하게 다쳤다고 기사가 났어.”박성훈은 심심해서 생방송을 보다가 차설아가 다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고는 성도윤의 반응을 보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아이가 둘이나 있는 애 엄마인데도 그렇게 좋아? 예전에 만날 때부터 재미난 일들이 많았을 것 같아. 혹시 알아? 두 아이가 너의 아이일지...”“농담도 정도껏 해요.”성도윤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거만하게 말했다.“아무 여자하고 놀아날 정도로 무식하지 않아요. 그런 여자는 아이를 낳고도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모를 거라고요.”“기억을 잃었다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을 네가 어떻게 알아? 가족한테 물어보지 그랬어.”“물어본 적 없어요.”성도윤은 차갑게 말했다.“두 아이가 내 자식이라면 엄마가 진작에 성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면서 데려왔을 거예요. 그런데 엄마는 아이에 관한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아.”박성훈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을 이었다.“지금 추측해 봐야 아무 소용 없어. 두 주일 뒤에 회복되면 전면적인 검사를 진행할 거야. 수술할 만한 상태라고 판단되면 수술 날짜를 정할게. 그럼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그러죠.”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성도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생각에 잠겼다.박성훈이 나간 뒤,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서 팔에 꽂은 링거를 뽑아버렸다. 그러고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아무도 모르게 병원을 빠져나갔다.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대기하던 진무열이 걸어오면서 말했다.“보스, 아직 퇴원하면 안 돼요. 아직 다 낫지도 않았잖아요. 나중에 또 쓰러지면 어떡해요?”진무열은 창백한 성도윤의 얼굴을 보고 걱정되었다.“일단 나왔으니까 차에 타. 지금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어.”성
차설아는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정형외과가 있는 층에 입원해 있었다. 성도윤의 병실도 그 층에 있었다. 차설아를 만나기 위해 뛰어다니다가 결국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차설아의 병실에는 가족과 친구, 배경윤과 선우 시원이 모여있었다.성도윤이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는 차설아의 곁으로 다가갈 틈조차 없었다. 또한 차설아를 걱정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다.이때 병실에서 간호사가 걸어 나왔다. 성도윤이 눈짓하자 진무열은 재빨리 간호사 옆으로 다가갔고 사람이 적은 복도 끝으로 데려갔다.“저... 혹시 저 병실에 있는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을까요?”간호사는 진무열과 성도윤을 경계하면서 말했다.“환자의 보호자예요? 아니라면 환자의 상태에 대해 말해줄 수 없어요. 이건 환자의 프라이버시나 마찬가지니까요.”“이분이 보호자예요. 우리 대표님이 저 병실에 있는 환자의 남편이라고요.”“환자의 남편이에요?”간호사는 성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팔짱을 낀 채 따져 물었다.“남편이면 병실에 바로 들어가지, 왜 사람이 없는 곳까지 데려와서 물어보고 있어요?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 복도에 감시카메라가 5개나 있다고요.”“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 얘기해요. 우리 대표님은 환자의 남편 되는 사람인데...”진무열이 간호사와 싸울 기세로 말하자 성도윤은 머리가 지끈했다. 그러고는 참다못해 진무열을 옆으로 끌어당겼고 간호사한테 진지하게 말했다.“사실 얼마 전에 아내랑 심하게 싸웠어요. 지금 들어가면 아내가 안 좋아할 거예요. 그런데 너무 걱정되어서 간호사님한테 여쭈었던 거고요. 아내의 상태가 어떤지 알려줄 수 없을까요?”“아, 알려드릴게요.”간호사는 조각상처럼 빛나는 성도윤의 얼굴을 보고 원칙 같은 건 진작에 잊어버렸다. 차설아의 상태가 어떤지 솔직하게 말했다.“환자분은 고비를 넘겼지만 허리가 크게 다쳐서 2주일, 제일 길게는 1달 정도 입원해야 해요.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만약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다면...”“회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데요?”성도
성도윤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갓난아기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해요?”“도윤아, 몸이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좀 엄마 말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소영금은 말을 듣지 않고 고집 피우는 성도윤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그러자 진무열이 성도윤의 앞을 막아서면서 말했다.“저... 탓하려면 저를 탓하세요. 대표님 탓이 아니에요. 전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내가 왜 너를 탓해야 하지?”소영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무열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대표님은 차설아 씨를 보러 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똑바로 알아보지 못한 탓에 병원 밖으로 나갔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 차설아 씨도 같은 병동에 입원했더라고요. 제가 민폐를 끼쳤어요.”진무열이 솔직하게 말하자 성도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쓸데없는 소리만 하는 걸 보니 시간이 남아도나 봐? 북아메리카 광석 프로젝트 담당자 명단에 네 이름도 추가할 테니 내일부터 진행해.”깜짝 놀란 진무열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대표님, 죄송해요.”“진무열, 당장 나가. 엄마도 이제는 나가주세요. 머리가 아파서 혼자 있고 싶어요. 깨어날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성도윤은 사복을 벗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운 성도윤은 머릿속에 전부 차설아와 함께했던 추억뿐이었다.병실을 나선 소영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진무열한테 말했다.“어떻게 다쳐도 우리 도윤이랑 같은 병원에 입원한 거야! 정말 악연이라는 말이 맞구나. 한쪽이 죽을 때까지 다치는 건 아니겠지?”“예전에는 미신을 믿지 않으셨죠? 상극이든 악연이든 전부 미신이에요.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 겹쳐 보여서 미신을 믿게 되는 거잖아요.”진무열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너도 곧 믿게 될 거야. 내가 유명한 점집에 가서 두 사람의 사주를 봐달라고 했더니 둘이 상극이라잖아. 도윤이가 차설아랑 만나기만 하면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한쪽이 다치지 않으면 다른 한쪽이 이상한 일에 휘말려 들었어. 지금은 둘 다 입원했
차설아는 침대에 누워서 배경윤을 위로해 주었다. 비록 허리에 통증이 밀려오긴 했지만 침으로 찌른 것처럼 따끔할 뿐이었다.선우시원과 배경윤은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차설아는 미소를 지으면서 농담했다.“설마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숨기는 거 아니지?”“절대 아니야! 그런 말 더 이상 하지 마.”차성철은 주먹을 꽉 쥐면서 말했다.“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유명한 의사를 찾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설아야,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오빠야말로 걱정하지 마.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내가 정말 반신불수가 된다면 차라리 죽여줘.”차설아는 피식 웃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한평생을 불구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설아야, 곧 나을 거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완치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잠잠해졌던 배경윤은 또다시 울먹이면서 말했다. 차설아는 한숨을 쉬더니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푹 자고 싶으니까 자리 비켜줘. 가서 밥도 먹고 쉬어.”차설아는 병원에 이송된 후로 통증을 잘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병실로 들어오는 사람마다 차설아를 부둥켜안고 울어서 내일이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 우리는 이만 나가볼게. 설아야, 푹 자고 일어나면 연락해.”차성철은 심호흡하고는 뭇사람들을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선우시원은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회사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랑 성철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해. 나중에 또 보자.”“바람아, 정말 고마워. 퇴원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가자. 내가 맛있는 걸 사줄게.”차설아는 선우시원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선우시원은 그동안 차설아를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다. 차설아는 선우시원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었다.텅 빈 병실 안에 적막이 흘렀다. 차설아는 그제야 편안하게 누울 수 있었다.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가족과 친구 앞에서는 밝고 쿨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혼자 남
성도윤은 의자에 기대앉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내가 왜 당신을 만나러 왔는지 알아?”“잘 모르겠어요.”차설아는 휴대폰을 찾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당장 나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오빠한테 전화할 거라고요.”“마음대로 해. 이 시간에 전화해도 구하러 오지 못할 거야.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얘기했잖아. 내가 아무 대책 없이 들어왔을 것 같아?”성도윤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차설아를 비웃었다. 계획적인 성도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설아의 병실로 들어왔을 리 없었다. 미리 손을 써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었다.“당신이라면 그랬겠죠.”차설아는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복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오늘 나의 목을 졸라서 죽인다고 해도 반항하지 않을 거니까요.”병실 안으로 내려앉은 달빛이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성도윤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더니 코웃음 쳤다.“당신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야?”“도윤 씨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차설아는 성도윤이 자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성도윤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성대 그룹 대표가 뒤끝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은 절대 손해 볼 타입이 아니에요. 저번에 내가 당신을 목 졸라 죽일 뻔했으니 당신이 날 죽인다고 해도 할 말 없어요. 억울하게 죽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요.”“그렇게 해야 우리 둘에게 공평하다는 말인가?”병실 안이 너무 어두워서 성도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성도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설아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늘고 약한 목에 손을 올려놓았다.“당신을 목 졸라 죽이는 건 참 쉬운 일이야. 백조처럼 목이 하얗고 가늘어서 비틀어 꺾어도 될 것 같아.”“잘 생각해 보고 죽여요. 충동 살인의 후과는 늘 좋지 못한 법이거든요.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미리 고려해 보세요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
성도윤은 묵묵히 참다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배경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랑 차설아의 관계는 너 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지금 행복해. 네가 보기 불편하면 그냥 나가면 되잖아.”“...”배경윤이 성도윤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손목이 붙잡히자 이번엔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려 했다.성도윤은 체격이 크고 힘도 센 편이었지만 배경윤의 저돌적인 공격에 살짝 밀리는 기분이 들어 결국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단단히 옭아맸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바로 그 순간, 사도현이 들어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상황이라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성도윤과 배경윤도 순간 굳어버렸다.“오해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성도윤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배경윤을 놓아주었고 배경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도윤의 발을 힘껏 밟았다.“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성도윤은 발끝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차설아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차설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했는데 그녀의 절친인 배경윤까지 보니 정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슬쩍 사도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너, 보험 많이 들어둬.”“무슨 뜻이야?”사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뜻이긴? 저 호랑이 같은 여자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고.”성도윤이 배경윤에게 얻어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투덜댔다.그러자 사도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지, 우리 경윤이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 애가 아니야. 분명 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런 거겠지.”그는 중요한 순간에 배경윤 편을 들기로 했다.사실 예전에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마다 배경윤과 말다툼이 잦았다.배경윤은 성도윤을 두고 철저히 쓰레기라고 욕했고 사도현은 차설아가 너무 까다롭다고 반박하며 두 사람은 끝없는 논쟁을 벌이곤 했다.하지만 이
“그만 좀 해요, 너무 닭살 돋아요.”차설아는 예전 같았으면 이런 사랑 고백을 들으면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쑥스럽기보다 오히려 닭살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처음엔 성도윤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전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이었고 실제로는 입만 열면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성도윤이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한 뒤 말했다.“물 받아놨어. 들어가서 몸 좀 풀고 와.”“좋긴 한데... 좀 나가주겠어요?”차설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건 안 되지. 당신이 미끄러지거나 수건이 필요하거나 옷을 입어야 할 때 누가 도와줘?”“괜찮아요,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줘요. 도윤 씨가 여기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어요.”차설아는 아직 성도윤과 그렇게까지 오픈된 관계는 아니었다.게다가 자신만 벗고 그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알겠어. 그럼 욕조까지만 데려 줄게. 다 끝나면 전화해.”성도윤이 한발 물러나며 휴대폰을 욕조 옆 선반에 올려놨다.“여기 핸드폰 놔뒀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야.”“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가요!”차설아가 손을 휘저으며 성도윤을 재촉했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차설아는 그가 정말 나갔다고 확신하고서야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차설아는 원래 몸매가 좋은 편이었다.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하얬다. 실루엣만 봐도 누구든 넋을 놓을 정도였다.그런데, 옷을 벗다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자 차설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도윤 씨, 변태예요?!”“들켰네.”성도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쉬운 듯 차설아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불만 지르고... 알겠어, 나 간다.”그는 투덜거리며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더 있다가는 차설아가 진짜로 그를 때려눕힐지도 몰랐다.성도윤은 자
“와, 대박! 이런 주제에 감히 남자를 뺏으려고 했다고?”그 여자들은 비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차설아와 배경윤을 마구 찍어댔다. 조롱과 비아냥이 섞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으...”배경윤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편으로는 차설아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그 여자들과 맞서야 해서 허둥지둥했다.“꺼져!”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도윤이 험상꿎은 얼굴로 난동을 부리던 여자 하나를 단숨에 잡아채 거침없이 밀쳐버렸다. “설아야!”그는 온몸에 더러운 물을 뒤집어쓴 채 힘없이 서 있는 차설아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주저 없이 배경윤을 밀어내고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았다.“도윤 씨?”차설아가 손을 더듬어 그의 손을 잡았다가 순간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가까이 오지 마요. 나 더러워요.”“상관없어.”성도윤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아 두 손을 꼭 쥐고는 후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너무 늦게 왔지.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그 모습을 본 여자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하지만 이 장면은 누군가에 의해 영상으로 찍혀 인터넷에 퍼졌고 각종 편집과 조롱으로 도배되었다.온라인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세상에 공평한 법은 있구나. 이게 바로 업보지!][아무리 그래도 팬들이 너무 폭력적이야.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그리고 바로 이 영상을 통해 차설아가 실명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한편, 성진의 차 안.성진은 무료한 듯 핸드폰을 스크롤내리며 영상을 보고 있었다.최근 권력 싸움에서 그는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러다 우연히 영상 속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선글라스를 낀 채,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초라하게 서 있는 차설아.그 순간, 그의 심장이 조여들었다.“설아의 눈이...”모든 게 퍼즐처럼 맞춰졌다.그가 가지고 있는 이 눈은 바로 차설아가 준 것이었다.여러 감
“당연히 다르지!”차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랑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도윤 씨 한 사람만 좋아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선우시원이든, 성진 씨든, 내 선택은 항상 도윤 씨였어. 하지만 넌 다르잖아... 네 마음은 진찬영 씨한테도 가고 도현 씨한테도 끌리고 있잖아. 솔직히 말하면, 너 둘 다 갖고 싶어 하는 거 맞지?”[너 진짜 무섭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집어내냐!]배경윤은 차설아의 날카로운 분석을 듣고 반박도 못 하고 민망하게 웃었다.사실 그녀도 자신이 왜 이렇게 고민하는지 몰랐고 이제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욕심이 많았던 거였다.“그러니까, 이제 솔직해지자. 굳이 도망갈 필요 없어. 양쪽 다 품으면 되잖아? 왼쪽엔 한 명, 오른쪽엔 한 명. 얼마나 좋아? 만약 내가 두 사람을 좋아할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후궁 3천은 거느렸을걸?”차설아가 반은 농담, 반은 진심으로 말했다.[야, 진짜 맞는 말이네! 네 말 듣고 나니까 머리가 확 맑아졌어!]배경윤은 갑자기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신나게 글을 써 내려갔다.[가만 생각해 보니까, 역사적으로 연애에서 이득 본 건 전부 남자들이었어. 우리는 애 낳아야지, 생리해야지, 시댁 챙겨야지, 애 키워야지, 일도 해야지, 불륜까지 걱정해야지... 정작 이득은 다 남자들이 보고 있잖아.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남편을 두 명쯤 두는 것도 합리적인 거 아니야?]“그치? 나는 진찬영 씨랑 도현 씨 둘 다 괜찮다고 보는데? 한 명은 집에서 살림하고 나 챙겨주고 한 명은 데이트하고... 완벽한 조합 아니야?”[하하하, 그러네, 그러네!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배경윤은 벌써 왼쪽엔 진찬영을, 오른쪽엔 사도현을 끼고 달콤한 나날을 보내는 상상을 하며 싱글벙글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잠깐만, 그런데 말이야… 너 아까 네가 오직 성도윤 한 사람만 좋아했다고 했잖아. 설마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 거야?]“어... 그러니까..
불과 20분도 채 안 돼서 배경윤은 성도윤은 물론 그의 주변 사람까지 깡그리 욕해버렸다.차설아는 그녀의 분노를 고스란히 느꼈고 이런 분위기에서 성도윤과 다시 화해했다는 사실을 밝힐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됐고, 너 얘기나 해 봐. 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은 잘 끝났어? 최종 선택은 누구야?”“이 타이밍에 왜 하필 이걸 묻냐, 이 친구야!”배경윤은 코를 킁킁대며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또 귤을 집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나 몇 회 봤는데 사도현 씨도 그렇고 진찬영 씨도 그렇고, 둘 다 너한테 진심이더라. 지금 많이 고민되겠어, 맞지?”차설아도 친구의 선택이 궁금했다.“하... 너까지 이 얘기를 꺼내다니, 나 진짜 이 주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퇴원 후 팬들을 만나고 오빠를 만나고 그리고 차설아를 만나기까지, 늘 똑같은 질문을 받는 것 같았다.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그래, 사도현과 진찬영, 둘 다 진심이었어. 그런데 나는 도대체 누구를 더 좋아하는 걸까?’“설아야, 너라면... 내가 누구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배경윤은 차설아의 말을 가장 신뢰했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너만 말해 봐. 네가 고르라고 하면 난 그냥 그 사람 선택할게.”“장난치지 마. 이런 중요한 인생 결정을 남한테 맡기면 안 돼. 네가 직접 결정해야지.”“내가 모르겠으니까 묻는 거잖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찬영 씨가 더 맞는 것 같아. 여러 면에서 봤을 때 우리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거든. 그런데...”배경윤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찬영 씨가 나한테 마취 깨고 난 뒤의 영상을 보여줬거든. 그걸 보고서야 알았어. 내 무의식은 사도현한테 더 끌리고 있더라. 거의 그를 한입에 집어삼킬 기세였어. 이유 없이 스킨십하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나 진짜 미쳤나 봐.”“음, 알겠다. 그러니까 네가 진찬영 씨를 좋아하는 감정은 ‘영혼의 동반자’
두 사람은 점점 지루해졌다.[우리 근처 공원 가볼까? 여기 많이 변했더라. 원래 화학 공장을 지으려던 곳인데 결국 보존돼서 주민 지역으로 바뀌었대. 습지 공원도 새로 조성돼서 꽤 예쁘더라고...]배경윤은 문장을 입력하다 문득 차설아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문장을 고쳐 적었다.[우리 근처 습지 공원 가볼래? 공기가 정말 좋더라.]“좋아!”차설아는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녀도 사실 집에만 계속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누군가가 데리고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참이었다.배경윤은 차설아의 손을 잡고 함께 근처 습지 공원으로 향했다.공원 안에는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었고 호숫가엔 무성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차설아와 배경윤은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그곳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호수 중앙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신선한 공기와 은은한 물풀 향기가 물씬 느껴졌고 햇살이 호수 위로 내려앉아 반짝이며 일렁였다.[괜찮으면 눈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어?]배경윤은 귤을 까면서도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타자한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 차설아에게 물었다.“빚을 갚았어.”차설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빚이길래 네 눈까지 내줘야 했어?]“마음의 빚.”[마음의 빚이라니, 누구한테?]배경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네가 무슨 빚을 졌다고 그래? 항상 손해 보는 쪽은 너였잖아.]“성진 씨...”차설아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예전에,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자신의 눈을 도윤 씨에게 줬어.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었는데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괴로웠어. 그의 인생을 망쳐버린 게 결국 나였으니까. 이 은혜를 갚지 않으면 평생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어.”[뭐라고? 네 말은, 네 눈을 성진한테 줬다는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귤을 손에 꽉 쥐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