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달래다 강한서는 결국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유현진은 고른 그의 숨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이튿날 아침, 의사가 다시 상태를 확인하러 왔을 땐 강한서가 이미 깨어있었다. 다만 유현진이 아직 달콤한 잠에서 깨지 않았기에 강한서는 이불을 그녀에게 덮어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의사는 조용히 그의 상태를 확인하곤 나가버렸다.유현진은 그렇게 오전 9시가 되어서야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강한서의 수려한 얼굴이었다. 유현진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주물럭거리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엔 왜 날 힘들게 했어?”아침부터 이 말을 들은 강한서는 다소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강한서는 그녀가 어제 말한 “의사가 한 말을 들어.”라는 말을 떠올리곤 기쁜 듯 웃었다.그가 나직하게 말했다.“어제 말한 보상 아직 못 받았는데, 언제 줄 거야?”부스스 깨난 유현진은 아직도 비몽사몽인 상태였다.“보상이라니?”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으려는 듯한 그녀를 보며 강한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강한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유현진은 순간 정신을 번뜩 차리게 되었다.그녀는 재빨리 손을 치워냈고 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여긴 병원이야! 정신 차려!”강한서는 살짝 웃음소리를 냈다. 장난을 그만두기로 한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나직하게 말했다.“일어나. 얼른 정리하고 집으로 데려다줄게.”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옷을 벗겨 확인했다. 피부발진이 많이 사라진 그의 몸을 보며 그녀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두 사람은 일어나 정리하였다. 강한서는 병원비를 내러 갔고 유현진은 그런 그를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병원에서 깨어났던 터라 그녀는 머리도 빗지 않았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만약 지인이 아니라면 절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이었다.
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현진은 바로 휴대폰을 꺼내 최연서에게 연락해 어떻게든 유상수를 병원으로 오게 할 생각이었고 백혜주가 절대 아이를 지울 수 없게 방해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최연서에게 자세하게 지시하고는 전화를 끊었고 강한서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왜 그래?”강한서가 말했다.“난 네가 유상수를 불러와 불륜 현장을 잡게 하려는 줄 알았거든.”유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백혜주는 조심성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그 여자가 백현석을 자신의 동생으로 만들었으니 실질적인 증거가 없는 한 유상수는 절대 믿지 않을 거라고. 백혜주가 지금 급하게 아이를 없애려고 하니 이것이 제일 증거가 될 거야. 난 절대 백혜주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할 생각이거든. 아이를 지운다고 해도 난 반드시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온 백혜주가 유상수에 의해 유산하는 꼴을 볼 거야!”“백혜주는 우리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유상수랑 붙어먹은 거야. 그리고 우리 엄마한테 자식을 맡긴 거고. 결국엔 우리 엄마 목숨까지 앗아갔지. 모든 건 그 여자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까 그 여자에게도 내가 느낀 고통을 느끼게 해줄 거야!”강한서는 그녀가 꽉 쥔 주먹을 풀어주면서 손깍지를 꼈다.“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복수해도 되는데, 저런 사람 때문에 네 손을 더럽히지는 마.”유현진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혹시 너도 이런 내가 두려워?”생각을 마친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네가 나한테 제일 심하게 대했던 건 기껏해야 뺨 때리는 게 전부였잖아. 내가 이걸 나에 대한 너의 편애라고 봐도 돼?”“...”유현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손을 꽉 잡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넌 요구가 너무 낮아. 정말로 내가 나중에 너한테도 이럴 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강한서가 눈이 휘어지게 웃더니 이내 다시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 아니까. 넌 나한테 손을 대지 못할 거잖아.”유현진이 입꼬리를 올렸다.“혹시 모르지. 네가 만약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한편, 연락을 받은 최연서는 바로 다시 유상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신이 넘어져 그만 피가 흘러나왔다는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유산의 징조임을 알게 된 유상수는 아들 학교도 뒤로하고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유상수는 그녀를 데리고 제일 좋은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연서는 한주병원으로 가자며 한주병원의 산부인과가 한주시 제일 좋은 산부인과라고 말했다.유상수는 초조해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그녀가 말하는 대로 따랐다.그렇게 20분 정도가 지나고 유상수는 최연서를 부축한 채 한주병원으로 오게 되었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유현진과 강한서는 바로 반대편에 있던 엘리베이터를 탔다.이때의 백혜주는 이미 수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젊은 여자를 부축하고 허둥지둥 달려오는 유상수를 발견하게 되었다. 유상수는 급하게 걸으면서 나직하게 젊은 여자를 달래고 있었다.“괜찮아, 괜찮아. 분명 괜찮을 거야...”백혜주는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 왔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까맣게 잊은 채 소리를 질렀다.“유상수 씨,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유상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백혜주를 보더니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엄청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혜주야, 네가 여긴 왜 온 거냐?”유상수의 품에 있던 여자는 백혜주가 유상수의 이름을 부르자 바로 몸을 움찔 떨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백혜주는 차가워진 얼굴로 이를 갈면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오빠가 여긴 왜 온 거예요? 이 여자는 또 누구고요?”유상수가 우물쭈물하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회사 직원이야. 몸이 안 좋다길래 데리고 와 본 거야.”“어디가 안 좋길래 산부인과를 다 찾아와요? 게다가 오빠가 왜 데리고 오는데요?”백혜주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힘들게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만큼 다른 사람이 그녀의 자리를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탐내는 걸 절대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유상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 이런 곳에서 백
백혜주는 치밀어오르는 화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배가 서서히 아파져 오기 시작했고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더니 마침 진단서를 들고 오던 백현석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곤 바로 그녀를 부축했다.“누나, 왜 그래요?”백혜주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지더니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유상수는 백현석의 목소리를 듣곤 바로 고개를 들었다. 백혜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치맛자락이 서서히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유상수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두 명의 임산부는 곧바로 응급실로 들어가게 되었다.강한서는 한주병원에 아는 지인이 있었기에 미리 지인에게 얘기해 둔 상태였다. 그랬기에 최연서가 가짜 임신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의사는 그저 최연서의 태아가 불안정하다며 약을 처방해주곤 집에 돌아가 푹 쉬라고 했다.그 말을 들은 유상수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한편 백혜주 쪽은 다행히 유산이 되지 않았고 의사는 그저 나이도 많은 데다가 갑작스럽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 출혈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게다가 아이는 무척 건강한 상태라고 했고 태아의 심박수 등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했다.유상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간호사가 진단서를 들고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하다며 들어왔다.백현석이 받으려는 순간 유상수가 먼저 가로챘다. 그것이 임신중절수술 확인서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지금 이게 뭐죠? 임신중절수술 확인서라니요? 누가 수술을 한다는 거죠? 잘못 가져오신 게 아니에요?”간호사도 행여나 잘못 가지고 왔을까 봐 얼른 확인해 보았다.“백혜주 님이 아니신가요? 주민등록증 확인해 보니 백혜주 님이 맞는데요?”유상수는 미간을 확 구겼다.“저희는 임신중절수술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간호사가 말했다.“하지만 본인께서 이미 임신중절수술을 하겠다고 이곳에 직접 사인하셨습니다.”간호사가 낮은 소리로 이어서 물었다.“혹시 보호자와 상의가 되지 않은 건가요?”유상수는 백혜주의 사인을 발견하곤 안색이 더욱 안 좋아지게
“나한텐 사찰로 간다고 해놓고 지금 여기 와서 수술받으려고 했던 거냐? 이렇게 큰일을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해?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한 거냐?!”백혜주의 머릿속엔 온통 최연서의 얼굴이 떠올랐고 유상수를 보자마자 그녀는 속이 메슥거려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백현석은 얼른 쓰레기통을 들고 와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백혜주는 한참이나 구역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게워 내지 못했고 그저 안색만 더욱 창백해져만 갔다.안쓰러운 백혜주의 모습에 유상수의 표정도 많이 누그러졌다.그는 침대 끝에 앉아 백혜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낳기로 약속했잖아. 대체 왜 지우려고 하는 거야?”백혜주가 싸늘해진 얼굴로 손을 빼내면서 따져 들었다.“그 여자랑 언제부터 붙어먹은 거예요? 그 여자 배 속에 있는 그 잡종, 몇 개월이나 된 거죠?”자신의 아이를 잡종 취급하는 백혜주에 유상수는 바로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러나 백혜주도 임산부였고 게다가 피까지 흘린 적이 있었기에 그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설명했다.“걔는 우리 회사 인턴이야. 전에 협력 업체랑 몇 번 미팅 간 적이 있었어. 그러다 우연히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고 다음 날 눈을 떠보니...”그는 뒷말을 삼켰다. 뒷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나도 그땐 죄책감이 들었어. 너한테 말하려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는데, 도무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걔를 그냥 회사에서 자르려고 했는데 그날의 사고로 임신을 하게 되었대.”추악한 변명에 백혜주는 매 순간이 역겹게 느껴졌지만, 분노를 꾹 참으면서 계속 따져 물었다.“그래서, 그 여자가 아이를 낳게 내버려 두려고요? 그리고 하현주에게 했던 행동 그대로 저를 내쫓으려고요?”“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유상수는 기분이 언짢았다.“나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어. 난 걔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 나라고 뻔뻔하게 다니는 줄 알아? 그 어린애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한테 당황한
유현아를 예뻐하던 그가, 결국엔 한 푼의 유산도 그녀에게 주지 않으려는 모습에 유현진은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는 딸을 아끼면서도 재산을 나눠주기는 싫어했다. 그 말을 들은 유현아의 반응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물었다. “너도 재산은 아들한테만 물려주고 딸에게는 주지 않을 거야?”강한서가 말했다. “너한테 줄 거야. 네가 날 데리고 다니면서 즐겁게 살면 돼. 돈이 필요하면 자기들이 벌어야지.”유현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네 아버지한테서 유산 물려받은 거잖아. 왜 네 자식한테는 그렇게 엄격하게 굴어?”강한서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집안 덕분에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시작한 건 맞아. 하지만 그냥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지금과 같은 것들을 누릴 수 있었어. 다만 시간이 조금 더 걸렸겠지. 아버지 유산은 할머니가 계속 관리하고 계셨고, 난 그 유산을 건드린 적이 없어. 만약 내가 능력 없이 그 자리에 올랐다면, 한성을 나에게 물려줬어도 지켜내지는 못했을 거야.”그는 말이 잠시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은 맥락이야. 나한테서 뭔가를 가지려면,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보여줘야 해.”강한서의 이런 교육 이념은 아마 정인월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유현진은 생각했다. 왜냐면 정인월이 바로 이렇게 그를 교육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민서는 반대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신미정의 얄팍한 사상과 좁은 시야의 영향을 받았다. 제대로 된 인간이 되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현진 같은 얼빠가 한 눈에 강한서를 찜했으니, 꽤 안목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왜 웃어?”강한서가 그녀의 손을 주물렀다. 유현진이 고개를 들고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재산을 나한테 다 물려주면, 네가 늙고 쇠약해졌을 때, 내가 널 차버리고 네 돈으로 젊은 남자를 데리고 살까 봐 걱정은 안 돼?”강한서: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이 여자
유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후원 딱 한 번 했어. 라이브로 추첨하길래 10명, 일 인당 2000만 원, 그냥 한 번 해볼까 하고 몇만 원만 후원한 거야.”결과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어떤 스트리머가 밑지는 장사를 하겠는가. 2억을 쓸 수 있다는 건, 20억, 심지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한 번 해볼까’하는 그 마음이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을 써서 만약 추첨에 걸린다면 그거야말로 자전거가 마세라티로 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스트리머도 계속 참여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추첨이 될 확률이 높다고 부추겼다. 이슈가 되면 될수록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수십, 수백 명에 달하는 시청자가 참여했으니 추첨 될 확률은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뻔했다. 팬들은 돈을 퍼부으며 이슈도 만들어 준 셈이었다. 이런 데 속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유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의 가방 하나도 2000만 원은 훨씬 넘는 가격이었다. 그는 유현진이 늘 공짜로 주어지는 일에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렸다. 전에도 매번 놀러 가서 돌아올 때면, 꼭 백화점 부근의 로또 가게에서 로또를 샀다. 도우미가 옷을 씻을 때면 늘 그녀의 주머니에서 로또를 몇 장 발견하곤 했다. 한 번은 6만 원이 당첨되었는데 그녀는 기뻐 춤이라도 출 지경이었고, 그를 끌고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갔다. 6만 원에 당첨이 되고 60만 원이 넘는 돈을 소비했다. 잘 생각해 보면 그녀는 얼마나 큰 돈이 당첨되는가 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공짜로 무언가를 얻었다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부잣집 딸 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쪼잔하고 세속적이었고, 말을 독하게 하면서 마음은 또 여렸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에 그는 푹 빠져버렸다. 병실에서는 여전히 싸우는 중이었다. 백혜주는 유상수의 남녀 차별적인 발언에 분노를 터뜨렸다. “딸이 어때서요? 딸은 오빠 자식 아니
유상수가 그녀를 또 잡으려고 했지만 백현석이 그의 손을 막으며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매형, 누나가 이런 꼴을 당하고도 매형한테 심한 소리 한 번 한 적 없어요. 대체 누나를 어떤 지경까지 내몰려고 그러시는 거예요?”유상수는 입을 뻐금거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현석이 덤덤하게 말했다. “제일 좋은 변호사를 모셔서 누나의 소송을 도울 거예요. 현아랑, 서훈이 우리가 꼭 데려갈 겁니다. 매형도 매형 변호사에게 준비하라고 하세요.”그에 유상수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백현석은 이미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주씨 가문의 일원이 되었으니, 어떻게 되든 그에겐 유리했다. 게다가 그와 백혜주의 결혼이 끝나기만 하면, 그때의 비밀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믿을 수 없어졌다. 그건 정말 큰 문제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유상수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 백혜주를 막아섰다. 그는 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혜주야. 화내지 마. 내가 잠시 미쳐서, 정신이 나갔어.”“네가 17살 때부터 나를 만나서 오랜 세월을 명분도 없이 내 옆에 있었는데, 난 너한테 제대로 된 결혼식도 못 해주고, 이런 일까지 겪게 했어.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백혜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나도 내가 이젠 나이도 먹고 갓 스물이 된 여자애랑은 비교도 안 된다는 걸 알아요. 이게 아마 제가 남의 가정을 파탄 낸 벌이겠죠. 받아들일게요.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는데, 좋게 끝내요.”유상수는 비통해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이혼 안 해. 현아, 서훈이랑 너, 그리고 배 속의 아이까지. 누구도 없어서는 안 돼. 넌 걱정하지 말고 태교에만 신경 써. 다시는 지우겠다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이 애가 우리한테 온 이상, 모두 운명이라고 생각해. 아들이든 딸이든, 난 다 좋아. 그리고 연서는, 돈을 줘서 애를 지우라고 할게. 다신 걔를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백혜주가 쉰 소리로 말했다. “날 속이려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
“넌 원래 은서한테 엄격하게 굴었잖아. 네가 나쁜 사람 역할을 하는 건 네 이미지에도 어울려. 난 평소에 은서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서 지금 엄하게 얘기해도 내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역시 네가 해야 해.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강한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갑자기 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응.”얼른 대답한 한현진이 몸을 돌리자 은서가 동그랗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분 연애하시는데 방해한 거예요?”한현진: ...“그건 아닌데...”“그럼 뭐하고 계셨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얼른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강한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현진을 배신했다. “은서야, 현진 이모가 은서한테 할 얘기가 있대.”한현진: ...은서가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눈빛으로 할 얘기가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한현진은 속으로 강한서를 의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지껄였다. 단순하고 맑은 은서의 눈을 마주한 한현진은 그 어떤 훈육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속도 모르고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뒤에서 슬며시 한현진의 허리를 다독였다. 입술을 달싹인 한현진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게... 사실은 별 거 아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강한서:...은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제비요! 할머니가 이따가 만드는 법 배워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모가 새우 수제비를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배워서 만들어드릴게요.”마음이 약해진 한현진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은서가 말하고 총총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한현진을 뒤로 한 채 잠시 후, 은서가 저금통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작은 돼지 저금통을 한현진 앞으로 들어 올리며 빨간 얼굴로 말했다. “현진 이모. 혹시 이 돈...”주머니에서 돈다발 하나를 꺼내 한현진에게 꺼낸 은서가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직원을 잘 대할 리가 없었다. 돈만 충분히 준다면 황 닥터의 죄증을 대신 비행기에 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 닥터는 외국인이었기에 이 곳에서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도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어 벌의 제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황 닥터를 처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 닥터의 입국이 금지 당한다면 송가람은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매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송가람을 일망타진할 좋은 기회였다. 한현진이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결국은 돈지X로 해결한 거네.”멈칫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너 방금 싸울 때 욕했지?”한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아닐걸.”“했어!”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잊었어?”‘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해주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나네.’어제 들었던 태교 수업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현진은 수면으로 채웠다. 강한서는 본인의 뱉은 말을 지켜 거금을 들여 태교 선생님을 고용해 1 대 1로 집에서 한현진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유난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임산부와 아이들을 상대하는 본인의 직업과 찰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수업하는 동안 한현진은 졸음이 몰려와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한현진이 하품을 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기억력도 좋으면서 노트도 작성하는 거야?”그때의 강한서가 뭐라고 했더라?“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작성된 기록보다는 못한 법이니까.”그 한 마디가 태교 수업 중 유일하게 한현진의 기억에 남은 말이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간 탓에 단 한 글자에 머리에 남지 않았
막장 소설을 거부하던 강한서는 강박적으로 소설을 듣기 시작해 결국 소설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왜 막장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하나 같이 멍청하거나 무지하게 구는 거야? 게다가 상남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틈만 나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왜 그러는 거야?”“남자 주인공 미친 거 아냐? 억지로 여자 주인공이 신장 기부를 하게 하다니. 조직 폭력배야?”“이쪽 세계에서는 신고를 하면 판결이라도 받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여자 주인공이 밀친 거라는 서브 여주인공 말을 믿어? CCTV를 찾아보는 건 불법인가 보지?”“현진아, 지금 나 미안하라고 들려주는 거야?”“난 못 해.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미친 거 같아. 대체 여자 주인공은 저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미쳤든 아니든, 소설처럼만 하면 돼. 순진한 척 하는 여우는 자기를 감싸주는 남자에겐 껌뻑 죽는 법이니까.”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몸보다 성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그의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저장했다. 막장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완벽히 재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다행히 송가람은 표정까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송가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강한서의 모습을 들켜버렸을 것이다. 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소설을 들려준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어. 진보가 빠른걸? 뭔가 유용한 팁이라도 있을까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말했다. “소리를 잘 지르면 돼.”그 말에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1층의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강한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그렇게 나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한서는 불만스럽게 투덜대면서도 한현진에게로 향했다. 베란다 밖에는 재스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현진은 난간 너머로 강한서의 목을 끌어안으며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