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은 인맥이 아주 넓은 사람이었고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는 사람도 엄청 많았다.인사를 마친 사람들은 바로 그녀에 관해 물었다.주강운은 그들에게 당연히 차현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유현진은 너무 미소만 짓고 있었던 나머지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그녀는 순간 강한서와 함께 이런 파티에 참석했을 때가 그리웠다. 강한서는 마치 걸어 다니는 설산 같았고 특히 친분이 없는 사람이 그에게 인사를 나누었을 때 비록 인사를 해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지만, 그는 항상 상대가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가버릴 때까지 차가운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예전에 그녀는 강한서의 차가운 얼굴 때문에 사람들이 다가오기를 꺼린다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차가운 얼굴은 수많은 불필요한 대화를 없애준 것 같았다.웨딩홀은 내부는 인테리어는 낭만적인 요소들로 가득했고 현장에 배치한 꽃도 생화였다. 생화를 썼다는 부분에서 이미 이 결혼식이 얼마나 호화로운 결혼식인지 알 수 있었다.그녀가 강한서와 결혼할 때 배치한 꽃도 생화이기도 했다. 심지어 답례품마저 자단으로 만든 팔찌였고, 팔찌는 주문 제작한 것이었고 개당 몇십만 원을 초과했다.원래대로라면 결혼식 답례품은 부부가 함께 준비하는 것이어야 했지만 강한서는 회사 일로 바빴고 신미정은 두 사람의 결혼식에 엄청난 불만을 보이었으며 정인월은 어르신이었기에 이런 힘든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강씨 가문에서 예물을 많이 준 것도 사실 유씨 가문에서 답례품을 준비하길 바랐던 것도 있었다.유상수는 당연히 기뻐했었다. 그러나 그가 준비한 답례품은 기껏해야 사탕과 초콜릿이었다. 조금 가격대가 있는 물건은 바로 쿠키 세트였다.결혼식 바로 전날, 그녀와 강한서가 미리 결혼식장에서 예행연습을 해볼 때에서야 유상수가 무엇을 답례품으로 준비했는지 알게 되었고 비록 정인월은 당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그러나 유상수는 계속 자신이 답례품
“아, 그래.”한성우는 유현진을 힐금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면 볼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었고 이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른 듯했다.“아, 혹시...”말을 마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 앉아도 될까요?”고개를 돌린 한성우의 시야엔 조준과 차미주의 모습이 들어왔다.차미주는 평소에도 잘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예쁜 드레스까지 입고 왔다. 큰 눈에 활기찬 그녀의 모습은 마치 발랄한 소녀 같았고 평소의 보이시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한성우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차미주가 조준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에 순식간에 표정이 차갑게 굳어져 버렸다.그는 조준을 흘겨보다가 이내 차미주에 시선을 옮겼다.“네가 여긴 웬일이냐? 너도 진성 형이랑 아는 사이였어?”차미주는 당연히 신진성과 친분이 없었다. 그녀가 친분이 있는 쪽은 바로 신부 쪽이었다. 예전에 그녀는 신부와 함께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고 사이도 나쁘지 않은 친구기도 했다. 신부가 그녀에게 청첩장을 보낸 것이었기에 그녀가 결혼식에 온 것이었고 조준과는 정말로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만난 것이었다.차미주는 그를 훑어보았다.“너도 오는 곳을 내가 왜 오면 안 되는데?”최근엔 왠지 모르게 한성우만 보면 그녀는 짜증이 밀려왔다.한성우는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만 보면 짜증이 확 났다.그녀는 원래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조준을 만나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그러나 한성우를 보게 되자마자 바로 기분이 더러워지게 되었다.한성우는 눈썹 사이를 구겼다.“알지도 못하는 사람 결혼식에 지금 하객 행세하며 저녁 먹으러 온 거냐?”차미주는 순간 아주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누가 하객 행세를 하고 저녁 먹으러 와? 나도 축의금을 냈거든? 그리고 누가 모르는 사람 결혼식에 왔다고 너한테 말했어? 내가 누구를 알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정말 어이가 없어!”말을 마친 그녀는 조준의 팔을 끌어당겼다.“
‘비행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낙하산이라도 타고 왔나?'‘설마 내가 남긴 문자를 못 본 건가? 나인 줄도 모르는 거 아니야?'유현진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한성우가 입을 열었다.“너 왜 혼자 왔냐? 형수님은?”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말을 고쳤다.“난 싱글이야.”아마도 자신이 주강운처럼 누군가에게 끌려가 여자를 소개받을 것이 두려웠던 그는 바로 한마디 보태었다.“지금도 마음을 되돌리는 중이고.”“...”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한서는 그녀와 한 약속대로 둘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은 것이었다.하지만 그가 한 말은 밝히나 마나 딱히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한성우는 원래 그를 놀릴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유현진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때 강한서는 항상 그에게 사소한 다툼이라며 ‘부부 사이의 소소한 취미'와 같은 말로 그가 아직 유현진과 헤어지지 않았음을 알렸다.그런데 현재 강한서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싱글이라고 말했다. 그럼 단 한 가지의 가능성밖에 없었다. 바로 강한서가 이미 유현진의 마음을 되돌렸다는 것이다.‘제기랄!'‘조금 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한성우는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다. 특히 주강운마저 여자친구를 사귄 모습을 보니 더 짜증이 났다.그는 차미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차미주는 현재 조준과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다시 입을 가리며 웃는 모습을 보니 그는 순간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그는 시선을 옮겨 유현진을 보았다.“차현진 씨, 혹시 학교에 여교사가 많아요? 괜찮은 여교사가 있으면 저한테도 좀 소개해 주세요.”차미주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를 훑어보았다.“여자친구가 있는 거 아니었어?”“뭐? 누가 그래?”한성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난 솔로야.”“아니, 분명...”말을 하던 차미주는 순간 주위에 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바로 뒷
“강운아, 이젠 좀 말해주라.”한성우는 턱을 괴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두 사람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한성우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오랫동안 연애를 안 한 사람이 바로 주강운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여자친구를 결혼식에 데려왔으니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주강운은 멈칫하곤 유현진을 보았다.이 문제에 대해 입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유현진은 오히려 덤덤한 표정으로 주스를 홀짝이더니 말했다.“주변 친구 찾기로요.”“푸흡--”차미주는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뿜어낼 뻔했다.그녀는 맞은 편에 앉은 여자를 쳐다보았다.‘이 말투, 그리고 헛소리까지. 왜 전부 현진이랑 닮아 보이는 거지?'예전에 동창회에서도 누군가 유현진에게 남편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유현진은 아주 덤덤한 얼굴로 말했었다.“소개팅 앱에서 추천해 줬어.”한성우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하늘중학교에서 근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거긴 강운이의 변호사 사무실과는 거리가 꽤 있을 텐데요? 이삼십 킬로미터 떨어진 거로 알고 있는데요?”유현진은 아주 침착한 얼굴로 답했다.“전에 강운 씨 사무실 근처에서 다른 변호사님께 이혼 소송을 맡기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근처에서 좀 오래 살았었어요.”사람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주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강운은 혹시라도 유현진이 아는 사람들 앞이라 행여라도 들킬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유현진은 마치 이곳이 자신의 무대인 것 마냥 뻔뻔하게 연기를 했다.“이... 이혼 소송이요?”한성우는 믿기지 않았다. 주씨 가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주강운이 감히 이혼녀와 사귀고 있을 줄은 몰랐다.유현진이 침착하게 말했다.“저 말고 제 다른 가족이요.”“...”한성우는 어이가 없었다.‘무슨 말을 이렇게 오해하게 해?'강한서는 자리에 앉은 후부터 별다른 말을 하지
신진성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마 차현진 씨가 낯이 익어서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나 봐요.”문다은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강운 씨한테 얘기하려는 걸 말려서 다행이지, 안 그러면 어색해질 뻔했어.”신진성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 마누라가 현명해요.”문다은이 신진성을 가볍게 툭 치자 그제야 그는 음식을 내려놓고 사람들과 안부를 전하더니 손님 접대를 하러 갔다. 신랑 신부가 가자 누군가 주강운에게 다가와 몇 마디 나누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유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잠깐 가서 도와주고, 곧 올게요.”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난처한 듯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메이크업을 받은 얼굴을 보며 여러 사람이 요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강한서를 놀리는 데엔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술잔을 채우고 사람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강한서도 하루 종일 바삐 다녔으니 배가 굉장히 고픈 상태였다. 그러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을 때, 그는 말도 별로 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젓가락이 갈비를 집으려 할 때, 또 다른 젓가락이 다가와 그 갈비를 집었다.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현진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죄송해요.”강한서는 말 없이 집었던 갈비를 놓고 다른 음식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유현진은 방금 집은 갈비를 강한서의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 “드세요.”강한서는 그녀의 젓가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이 사람은 선을 지킬 줄 모르는 건가? 음식을 집을 때는 공용 젓가락을 사용해야 하는 것도 몰라?’강한서는 그 갈비를 건드리지도 않고 다른 음식을 집어 먹었다. 차미주는 유현진을 흘겨보며 생각했다. ‘어디서 온 여우야, 이건. 감히 내 친구 남자를 건드려? 죽으려고.’유현진에게 고발하려던 그녀는 가방을 만지고 나서야 휴대폰이 밖에
유현진: ...맞은 편에서 웃음을 참고 있는 신우는 볼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고여정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거봐, 내가 못 알아본다고 했지?”고여정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씨, 시력 안 좋잖아. 웨딩홀 조명이 어둡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까지 하니까,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야.”그러더니 그녀는 한 마디 더 보탰다. “유현진 씨가 위장을 잘하기도 했어.”자유자재로 바뀌는 유현진의 음색은, 일반인은 정말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실, 고여정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강한서는 눈이 나빴기에 눈썰미도 나쁜 편이었다. 그는 애초에 유현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준 인상이라고는 짙은 화장에 이목구비가 선명했고, 그리고 얼굴이 굉장히 낯에 익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주강운이 기억을 되찾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유현진을 자세히 들여볼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유현진은 그런 강한서가 조금 답답해졌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강한서 이 개자식은 아직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전엔 강한서를 놀릴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영원히 못 알아보는 일은 없다며? 역시 순 거짓말쟁이!’유현진은 머리를 숙이고 밥을 먹는 남자를 흘겨보더니 갑자기 발로 강한서의 다리를 쓸었다. 강한서는 정전된 것처럼 “척”하고 몸을 일으켰다.그의 동작이 어찌나 컸던지, 테이블도 흔들릴 지경이었다. 유현진은 순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분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결국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화장실 좀.”그는 의자를 뒤로 밀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유현진은 눈을 반짝이며 굴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실례할게요.”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미주도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한성우에게 손목이 잡혔다. “나와, 할 얘기가 있어.”차미주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냈
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유현진 앞에 다가와 드디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화장이 짙었고 눈가의 아이라인도 일부러 길게 빼내어 그렸다. 콧등 양쪽의 하이라이터는 광대를 돌출되어 보이게 만들었고 턱의 섀도는 다른 곳보다 선명하게 짙었다. 특히... 귓불에 있는 그 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현진의 점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그녀의 두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고, 어쩐지 그를 어떻게 놀려먹을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입술을 앙다물고 태연하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주강운과 사귄 지 얼마나 됐어요?”유현진은 아직 자신의 정체가 들킨 줄 모르고 거짓말을 댔다. “1,2 개월쯤 됐어요.”강한서가 ‘허’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의 반응에 유현진이 흠칫했다. ‘왜 이 자식이 비웃는 것 같지?’강한서는 확실히 냉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도 아직 연애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는 기분이 더러웠다!하지만 유현진의 시선에 강한서에게 향하자 그는 표정 관리를 하고 언제나 그렇듯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한두달... 주강운한테 마음이 크지는 않은가 봐요. 아니면 왜 계속 저를 꼬시겠어요?”유현진은 계속 죽음의 문턱에서 강한서를 시험했다. “전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인데, 강한서 씨처럼 조건 좋고 잘생긴 이성에게 끌리는 것이 당연하죠.”그녀는 말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리고 친구 몰래 이러는 거, 더 자극적이지 않으세요?”강한서: ...그는 위험한 눈빛으로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얼굴을 바꾸더니, 성격까지 바꿔버렸네. 가벼운 말도 아무렇게나 내뱉고.’강한서는 그윽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뭐 하자는 거죠?”유현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강한서 씨, 아실만 한 분이, 왜 모른 척하세요?”유현진은 그에게 다가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강한서 씨랑 자고 싶다고요.”말을 마친 유현진은 강한서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를
유현진은 그의 손등을 툭 치고 흘겨보며 말했다. “너한테 카톡 했잖아. 못 봤어?”“나더러 잘 쉬라며?”유현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문자 여러 개 보냈는데? 강운 씨 상황 모면하는 거 도와줘야 한다고, 너 푹 쉬고 나중에 만나자고.”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잘 쉬라는 것만 봤어.”아마 휴대폰 전원을 끄면서 메시지가 제대로 보내지지 않거나 지연된 것 같았다. 유현진은 또 전후 사정을 강한서에게 얘기했다. “어떤 분이 강운 씨에게 사람을 소개시켜주겠다고 여러 번 말해서,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대. 신진성 씨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했고.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부탁했어. 네가 오해할까 봐 전화했었는데, 휴대폰이 꺼져있더라고.”‘도와줄 사람이 없어?’강한서가 코웃음을 쳤다. “넌 너무 원칙이 없는 거 아냐? 넌 남편이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걸 도와줘?”“인턴제 남자친구야.”유현진이 강한서의 말을 정정했다. 그녀는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장례식도 강운 씨가 도와줬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해?”유현진의 말에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널 속인 것도 아니잖아. 전화도 하고 문자도 했는걸.”강한서는 당연히 유현진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주강운이 유현진에게 기분 나쁜 화장을 해준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유현진이 주강운에게 진 그 신세 때문이었다. 그는 이혼 전 자신의 했던 그 일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만약 조금 더 소통하고 성질을 조금 덜 부렸다면, 주강운에게 그런 기회를 내주어 유현진이 신세를 지게 만들고 또 그 일로 매번 유현진이 마음 약해지게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강한서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유현진의 귓불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물었다. “누가 너한테 이런 메이크업 해줬어?”유현진이 말했다.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긴장감을 제외하면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주전자가 손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움직이지 마.”움찔한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강한서가 모든 기억을 회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강한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송가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목에서 뭔가 천천히 기어오르는 느낌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때 몸을 돌린 한현진은 주전자를 들고 그 자리에 굳어있는 송가람을 보고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곧 송가람의 목에서 기어 다니는 하늘소를 발견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촉수를 제외한 몸길이만 해도 새끼손가락만큼 길었고 날갯짓하듯 움직이는 부리는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한현진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목에서 기어 다니는 물체가 대체 뭔지, 사람을 무는 건 아닌지, 독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송가람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대체 뭔데요? 놀리지 말고 빨리 떼어줘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달래며 말했다. “말 하지 마. 목에 있는 거 건드리지도 말고. 내가 천천히 가서 떼어줄게.”“네.”대답한 송가람은 더 이상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천천히 가서 떼어준다던 강한서는 정말 그 말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현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발연기잖아. 송가람이 놀라 이성을 잃어서 망정이지, 안 그럼 다 들켰을 거야.’7, 8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강한서는 2분을 들여 도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겐 단 1초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견디기 괴로웠다. 강한서는 드디어 송가람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나지막이 그를 칭찬했다. “연기력 좋던데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더 지켜봤다간 은서가 내일 나랑 연을 끊겠다고 하겠어.”한현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널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세뱃돈을 받으라고 가르친 거야?”“모함하지 마. 난 가르친 적 없어.”“네가 직접 가르치지 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게 모범을 보이긴 했지. 평소에 나한테 어떤 식으로 선물을 받아냈는지 잊었어?”한현진: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녀에게 뭔가를 사주게 하기 위해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서 해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계속 내가 눈치를 줘야하는 거라면 그건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은서가 한현진의 포인트를 잘 캐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뻘쭘해진 한현진이 생각했다. ‘앞으로 부부 사이의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아이 앞에선 조심해야겠어. 우린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만 어린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 정신 건강에 안 좋겠어.’강한서가 위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이 내려왔다. 한현진은 캐주얼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의 한현진은 혈색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과분하게 건강한 한현진의 심신 역시 송가람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강한서가 보이지 않자 송가람도 더 이상 사이좋은 척 가식을 떨지 않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큰 병인 건 같지 않아요.”한현진이 씩 웃었다. “심심하면 픽 쓰러지는 가람 언니 체질을 보고나서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몸이 안 좋다가도 빨리 회복하던데요.”한현진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은 송가람이 째릿,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현진 씨, 들어와 산지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한서 오빠 기억을 회복하는데
‘이런 거로도 날 엿 먹이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실망한 기색으로 가득한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시선을 올린 은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현진 이모가 만약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전 이 머리핀 갖고 싶지 않아요.”“현진 이모가 마음에 안 들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을 텐데?”입을 꼭 닫은 은서가 몇 초 후에야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이모, 고마워요. 하지만 전 안 받을래요.”손을 내밀고 있는 송가람은 머리핀을 주기도, 다시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은서는 뭘 좋아해? 다음에 이모가 사줄게.”은서가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송가람이 멍해졌다. “뭐?”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거라고요. 이모는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려고 하잖아요. 설마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송가람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이렇게 귀여운데 이모가 왜 은서를 안 좋아하겠어. 현진 이모가 은서에게 농담한 거야.”자신의 앞길을 막는 건 한현진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꼬맹이가 덧붙은 지금,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오지랖 넓은 강한서를 원망했다. ‘대체 왜 개나 소나 불문하고 곁에 두는 거야. 한서 오빠와 결혼하면 꼭 이 꼬맹이를 다른 곳에 보내버려야겠어.’은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가람 이모는 은서 안 좋아해요. 설 연휴에 성우 삼촌, 신우 삼촌, 미주 이모 그리고 다른 삼촌과 이모들도 저에게 세뱃돈을 줬어요. 어른들은 예뻐하는 아이에게만 세뱃돈을 주는 거라고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하지만 가람 이모는 저에게 세뱃돈을 안 줬잖아요. 절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돈귀신 같은 한
한열의 일은 결국 서해금과 송가람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송가람은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지만 서해금은 이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서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셨네요?”송가람은 직접 묻기로 결정했다. 강한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신제품 발표회로 계속 바빠서 제대로 쉰 적이 없거든. 요즘 안 나쁠 때 휴가나 좀 보내려고.”송가람이 나긋하게 말했다. “쉴 때가 되긴 했어요.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바쁘기만 했잖아요. 교수님이 재검 받으러 오라고 하셔도 계속 미뤘잖아요. 오빠 건강 때문에 전 정말 걱정이에요.”“마침 휴가 중일 때 오빠가 재검 받을 수 있게 제가 교수님께 연락드릴게요. 현진 씨도 계속 여기서 오빠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도운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효과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시면 좋잖아요. 안 그럼 아무 명분도 없이 미혼 남녀가 계속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현진 씨 명성에도 안 좋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연락해줘. 고생해.”주저함 없이 쿨한 강한서의 대답에 송가람은 또다시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한서는 기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같이 집안 아래 함께 지내다 보니 또 다시 한현진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부터 황 닥터는 송가람에게 강한서처럼 건강한 심리를 갖고 있고 심지가 강인한 사람에게는 심리 암시의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송가람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은서가 갑자기 밖에서 들어왔다. 아이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큰소리로 말했다. “한서 삼촌, 제가 뭐 잡았게요?”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송가람을 본 은서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은서는 송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금방 돌아왔을 당시 송가람은 강한서의 본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친구가 없었던 은서는 줄곧 강한서 곁에 붙어있었다. 송가람은 강한서 앞에서는 은서를 예쁘고 귀엽다고 칭찬하며 먼저 얘기를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마침 그 얘기를 들은 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젠장! 저런 걸 핑계라고!’강한서의 말에 송가람의 눈빛에 순간 혐오의 감정이 스쳐갔다. 그녀는 결국 강한서가 건네는 신발 커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한서가 송가람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송가람의 눈빛은 끊임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소파에는 커플 쿠션이, 테이블에는 커플 컵이 놓여있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강한서와 한현진의 웨딩 사진이 걸려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는 한현진의 머리핀과 머리끈이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여자의 생활 흔적이 묻어있었다. 송가람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커피 마실 건지, 아니면 차를 마실 건지 묻는 순간 그녀는 곧 다정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차면 돼요.”송가람에게 앉으라고 얘기한 강한서는 황씨 아주머니에게 물을 떠달라고 부탁했다.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 전에 현진 씨에게 들었는데 오빠가 우린 홍차가 유난히 향이 좋다면서요. 차를 내리는 오빠만의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했다. 한현진은 자신이 송가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을 확신했다. ‘설마 강한서 기억 상실을 의심해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강한서를 떠보는 거야?’한현진은 혹시라도 강한서가 말실수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강한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송가람의 질문에 대답했다.“현진 씨가 널 속인 거야. 난 차 내릴 줄 몰라. 그리고 홍차를 제일 싫어해.”송가람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오빠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데요?”강한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용정차.”송가람이 강한서의 작은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용정차로 만든 계란장조림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말하며 뭔가를 떠올린 듯 강한서가 나지막이 중얼였다. “나중에 아주머니에게 만들어보라고
한현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서해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진아, 나야. 몸은 괜찮아? 푹 쉬었어?”“네, 괜찮아요.”서해금이 가식을 떨면 한현진 역시 가식으로 받아쳤다. “며칠 동안 출근을 못해서 일이 많았을 텐데 아주머니께 폐를 끼쳤네요.”“얘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최상급 연와를 선물해줘서 가람이에게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한동안 먹으면 기력회복에 좋을 거야.”“고마워요, 아주머니. 하지만 전 괜찮아요. 지금 집에도 있어요. 아주머니 드세요.”“품질이 좋은 연와야. 밖에서 쉽게 살 수도 없어. 네 아빠도 좋아하시는 거야. 전에도 계속 더 있으면 너한테 주라고 하셨어. 네가 거절하면 네 아빠는 내가 야박하게 군거라고 생각하실 텐데.”잠시 말을 멈춘 서해금을 다시 입을 열었다. “가람이가 이미 출발했어. 아마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받으면 조금 먹어봐. 마음에 들면 내가 나중에 더 보내줄게.”한현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겉으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주머니.”“아, 그리고 조향 대회 예선이 곧 시작될 거야.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너에게 보내줄게. 한 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그대로 대회 신청할게.”“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달려가며 강한서를 불렀다. 서재에서 서류를 프린트하고 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부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는 체념한 듯 말했다. “왜?”“빨리, 빨리, 빨리. 송가람이 온대. 집 정리 좀 해 놔!”강한서가 말했다. “뭘 정리해?”“사진이며 커플템 말이야. 송가람이 와서 보면 우리가 눈이라도 맞았다고 의심하면 어떡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우린 합법적인 사이야.”“얼른 정리나 해.”한현진은 말하며 소파 위에 있던 쿠션과 테이블에 놓인 컵, 그리고 신발장에 있던 슬리퍼까지 전부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