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하라고?”차미주는 턱을 매만지며 휴대폰을 들었다. 그녀는 휴대폰 액정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내 미모로 사극에 나오는 중전마마나 돈 많은 대표님의 아방한 인턴사원도 괜찮을 것 같아. 지금 이렇게 공격적인 얼굴이 유행이잖아? 최근 몇 년간 웹 드라마 찍은 배우들의 미모가 나랑 비슷하잖아. 이젠 새로운 유행이야. 그러니 어쩌면 나도 올해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배우로 뜰 수 있을 거야.”“... 화장실 갔다가 올래?”차미주는 그를 째려보면서 말했다.“화장실을 왜 가?”한성우는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가서 세수나 좀 하고 와.”차미주의 입꼬리가 순간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이내 다리를 들어 그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너 나 세수하고 와! 세수하다가 세숫물에 익사해버려!”한성우는 바로 러그로 궁둥이를 옮기면서 즐거운 듯 웃었다.이내 팔을 소파 위로 탁 올리고 그윽한 눈길로 말했다.“우리 회사로 와. 우리 회사로 와서 내 비서 해. 다른 일은 할 필요 없고 그냥 매일 나한테 밥만 해주면 돼. 월급도 1000만 원 줄게. 주말 휴식에 명절 휴가, 그리고 4대 보험까지 있어. 어때, 올래?”“안 가.”차미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그냥 도우미 아줌마를 회사로 불러.”한성우는 믿을 수가 없었다.“너 전에 각본을 고치면서 이 정도 벌어봤어?”“아니.”한성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럼 왜 안 하겠다는데?”차미주는 휴대폰을 보면서 말했다.“내 인생의 가치는 음식 만드는 것에만 있는 거 아니야. 정말 그랬다면 난 일찌감치 식당을 차렸을 거야. 나한테도 꿈이란 게 있어.”“네 꿈은 뭔데?”그의 말에 차미주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엄청 대단한 시나리오를 쓰고 엄청 대단한 상을 받는 거야. 그리고 엄청난 남자랑 자는 거지.”“... 마지막 한 마디는 지워버려도 되겠네. 넌 이미 엄청난 남자랑 자봤으니까.”차미주는 바로 발을 들어 그의 얼굴을 향해 발길질을
차미주는 그를 째려보았다.“통증 없는 인공 유산 광고를 본 적이 있어?”“뭐?”“어떤 여자가 무통 인공 유산하러 갔지. 전전긍긍하며 의사에게 물었지. ‘시작했어요?'라고 그러자 의사가 답했어. ‘이미 끝났어요.'라고.”한성우는 눈썹 사이를 찌푸렸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주는 건데?”차미주가 말했다.“그날 밤, 내가 딱 그 느낌이었어.”한성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시작했어요? 이미 끝났어요.빠를 뿐만 아니라 아무런 감각도 없었단 소리였다.한성우는 믿기지 않았고 심지어 다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는 강한서를 비웃어도 상관없었지만 그를 비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가 변명했다.“그건 네가 그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거여서 그래. 아무런 감각도 못 느낀 것도 네 기억이 끊겨서 그래.”차미주가 그를 째려보았다.“비록 난 경험이 없었지만 그래도 할 때는 느낌이라는 게 있을 거 아냐. 주사를 맞아도 고통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날은 정말 난 아무것도 못 느꼈다니까. 며칠 동안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는 건, 그건 네가... 네가 문제가 있다는 거야.”그녀는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그의 하반신을 힐끗 쳐다보며 대놓고 암시를 했다.한성우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미주는 그런 한성우의 모습을 보니 꽤 즐거웠다. 그녀는 이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여태 모르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많은 여자친구를 사귀어봤다면서 누구도 너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야?”한성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아, 알겠다. 그 사람들은 네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한 거구나. 그래서 너한테 말하지 않았던 거야. 어쩌면 일부러 대단하다고 말해준 거일 수도 있어. 그렇게 너한테 착각을 심어준 거지.”말을 마친 그녀는 한성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내가 아니었다면 넌 평생 몰랐을 거잖아.”한성우는 이를 갈면서 그녀의 손을 쳐냈다.“고맙긴 뭐가 고마워!”
“제가 시발, 그동안 수습해준 대본만으로도 부족했어요? 사극을 쓸 능력이 없으면 제발 쓰지 마세요. 본인이 쓴 사극 대본을 보기나 했어요? 사극에 자신이 없으면 제발 ‘암행어사'나 ‘태조 왕건' 좀 보세요. 조금만 신경 쓰고 열심히 대본을 쓰면 될 것을 왜 굳이 저한테 찾아와서 수정해달라고 하는 거죠? 제가 그쪽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쓴 건 줄 알고 수정을 해요? 그리고 본인이 쓴 글도 못 알아봐요? 도대체 글을 얼마나 휘갈겨 쓰면 본인이 쓴 글도 못 알아봐요?”단톡방은 아무런 글도 올라오지 않았고 안 작가만이 씩씩대며 말했다.“차미주 씨! 언행에 주의하세요!”“주의하긴 뭘 주의해요! 주의할 가치가 있어요? 대본도 제대로 못 쓰면서 회의는 어찌나 하던지. 회의할 때마다 저희 어시스트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거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요? 대본을 개판으로 써놓고 항상 뒤처리는 어시스트한테 맡기잖아요!”“그래요, 수정하는 건 문제가 아니에요. 어차피 저희가 하는 일이 대본을 수정하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사람 취급은 해주셔야죠. 저희가 매일 밤을 새우며 대본 수정 작업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와이프랑 영화 보러 다녔잖아요! 그리고 대본을 팔아 거액을 돈을 받고 저희한테는 대본값을 절반이나 월급으로 나눠줬다고 하셨죠. 그런데 대본값이 10억이었더라고요? 10억을 받아놓고 저희한테는 기껏해야 400만 원을 월급으로 주셨죠.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요? 수영 씨가 전에 작가님한테 쪼잔하다고 말했더니 바로 다음 날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을 해버렸잖아요. 왜요, 수영 씨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어요?”“이 대표님께서 6시 정각에 퇴근하라고 하셨는데 작가님은 항상 5시 50분에 저희한테 회의할 거라고 말했죠. 전 물론 당연히 솔로라 언제 퇴근하든 상관은 없었는데 유정 씨와 새롬 씨에겐 아이가 있어요. 유정 씨와 새롬 씨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데 안 작가님은 항상 쓰잘머리 없는 회의를 밤 9시까지 열었었죠. 심지어 회의
유현진이 옷을 다 입기도 전,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강한서는 바로 이불을 유현진의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우르르 몰려온 사람들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강한서를 발견했다. 바닥에는 여자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었고 침대 위의 이불은 부풀어 올랐는데, 누가 보아도 그 안에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록 강한서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목과 쇄골에는 너무나도 뚜렷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누구든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한성의 도련님이 어젯밤 여자와 함께 어떤 호텔에 있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강한서가 이혼한 소식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기자들에게 그는 여전히 기혼 신분으로 비치고 있었다. 연예기자는 연예인의 사생활을 캐낼 뿐만 아니라 한주 시의 유명 인사들의 찌라시를 캐내는 일에도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한성과 같은 최고의 명문가들을 말이다. 한성의 도련님이 다른 사람과 호텔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이런 뉴스는 어떤 스타의 스캔들보다 더 강력했다. 그러니 한 무리의 기자들은 들이닥치자마자 바로 휴대폰과 카메라를 들고 강한서를 향해 사진을 찍어댔다. 그들은 사진을 찍으면서 질문했다. “강 대표님, 침대 위에 있는 여성분과 불륜이신 건가요?”“두 분은 어떤 사이인가요? 이분도 강 대표님이 결혼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대표님께서 다른 분과 호텔에 있는 사실을 사모님께서 알고 계신가요?”...강한서의 사생활은 아주 깨끗한 편이었다. 한주의 유명인사 중 많은 가문의 도련님들은 거의 대부분 크고 작은 열애설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강한서의 사촌 동생 강현우의 전 여자 친구들로는 신인 스타, 슈퍼모델 그리고 명문가의 규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 두 여자가 남편을 뺏는 장면도 등장했는데, 두 여자는 남자 하나를 위해 크게 싸웠고, 그 남자는 그저 옆에서 방관하기만 했었다. 그의 이런 뉴스는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언론사를 먹여 살렸는지 모를 정도였다. 강한서는 누구나
‘이건 제보랑 다르잖아?’기자들은 크게 실망했지만 어떤 사람은 여전히 강한서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들어온 이후로 침대 위는 여자는 계속 이불속에 숨어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고 누워만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사모님이라는 것은 그저 강한서의 말뿐이었으니, 그 말이 진짜인지 누가 알겠는가?“정말 사모님이 맞다면, 인터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누군가가 강한서의 말에 빠르게 대처했다. 꼭 강한서의 불륜 현장을 찍어야만 특종인 것은 아니었다. 침대에 있는 것이 정말 강한서의 아내라면, 그것 또한 빅뉴스였다. 4년 전, 강한서는 페이스북에 당당하게 결혼한 사실을 공개했다. 하지만 아내의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4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강한서는 아내의 개인 정보를 매우 잘 지켜줬다. 누군가 염탐을 하려고 하면 바로 한성 그룹의 업계 경고를 받았다. 내부에서는 강한서와 송민영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보고 그의 아내가 송민영이라는 찌라시가 돌았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명령하에 강제로 삭제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한성에 직접 전화해 진실을 알아보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터무니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강한서 아내의 정체에 대해 더 궁금해했다. 만약 이번에 그의 아내의 정체를 밝혀낸다면, 이곳까지 온 보람은 있을 터였다. 기자의 말을 들은 유현진은 소름이 돋았다.‘이 파파라치들, 미친 거야?’‘강한서가 누구랑 호텔에 오든 말든, 지들이 무슨 상관이야!’ ‘당장 거절하고 쫓아내!’하지만 다음 순간, 이불 너머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이프 의견을 먼저 구해야 해서요.”유현진: ...강한서는 몸을 숙여 이불의 한 귀퉁이를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현진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다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당장 내보내!”이미 옷을 입고 있는 유현진을 발견한 강한서는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초조한 얼굴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내쫓으면 점수 줄
‘이게 무슨 스타일이지?’‘페이스키니?’유현진은 깜짝 놀라면서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다행히 강한서의 대처가 빨라 가방을 그녀에게 집어넣어 줬고, 가방 안에는 위장할 수 있는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얼굴은 기자들의 카메라에 노출되어 배우의 커리어가 완전히 끝장날 뻔했다. 사람들은 유현진의 페이스키니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강한서가 갑자기 이불을 잡아끈 사람의 손을 잡고 뒤로 비틀었다. 상대방은 비명을 지르더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한서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사람들을 냉랭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제가 너무 매너 있게 대해드렸죠?”그의 분노가 더욱 끓어올랐고, 검은 아우라가 그를 감쌌다. 평온한 모습으로 기자들의 말에 대답하던 그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자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강한서는 강현우와 달랐다. 강현우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기사를 써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는 파파라치계의 1순위였던 바나 미디어를 파산할 정도로 고소했던 당사자였다. 업계를 휩쓸었던 바나 미디어의 편집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도 전부, 강한서의 작품이었다.그들 언론사는 어느 곳 하나도 바나 미디어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곳들이었다. 그런데 감히, 주제도 모르고 강한서의 역린을 건드리다니.그깟 포상금이, 그들이 이런 리시크를 감수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사람들이 강한서에게 애원하던 그때, 꽁꽁 싸맨 여자가 입을 열었다. “당장 내보내, 안 그럼 점수 깎을 거야!”사람들은 불같이 화를 내던 강한서가 여자의 말에 카리스마를 거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언짢은 듯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게 왜 내 탓이야?”“자꾸 쓸데없는 소리할래?”강한서는 입을 닫고 잔뜩 불쌍한 태도로 말했다. “알았어.”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은 또 냉랭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잡고 있던 사
유현진은 가볍게 대꾸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갑자기 비틀거리자 강한서가 깜짝 놀라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유현진은 어쩐지 조금 말문이 막힌 듯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 돼지 타고 걷는 것 같아?”강한서: ...그는 어젯밤 절제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괜히 어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얼굴을 가리면 다른 사람들이 너인 줄 모를 거야.”유현진이 침묵했다. 그녀는 자신이 던진 질문의 답을 찾았다. 비슷한 것이 분명했다. 화장실에 찬물이 나오지 않아 강한서는 옆방을 예약하라고 했다. 두 사람이 샤워를 마치자, 민경하가 준비해 둔 차도 마침 도착했다. 차가 출발하자, 유현진은 그제야 이젠 두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과 강한서의 사이가 이런 식의 진전을 가져올 줄 몰랐기에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계획은, 최소한 일이 안정되어야만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강한서의 사업은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강한서 수준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실패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강한서의 첫 번째 결혼이 실패한 원인은 서로에 대한 의심은 둘째치더라도 두 사람 사이의 경제적 지위의 차이도 한몫했다. 그런 커다란 갭은 자꾸만 시시콜콜 따지게 했고, 자신이 강한서의 곁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지 반문하게 했다. 하지만 늘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 침대에서 자고 관계까지 가진 이 시점에, 강한서에게 단순히 약 때문에 그와 잔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말라고 얘기를 해야 하는 걸까?그 말은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주둥이를 때리고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말이었다!그녀는 어젯밤 왜 자신이 참지 못한 것인지 후회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강한서에게 병원에 가자고 했어야 했다. 창피한 건 창피한 거고, 이렇게 난처하기보다는 나았을 테니까. “어젯밤… 그건 사고야.”유현진이 아직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
강한서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유현진도 꾸물거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흔들리는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강한서가 요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는 노력들을 그녀는 쭉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도 언제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강한서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무리 좋은 감정이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차라리 더 당기는 것이 나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요즘은 동거해 보고 결혼하는 게 유행이잖아. 우리도 정식 연애 전에 테스트를 해보는 거야. 그러니까, 너한테 남자친구 인턴 기간을 줄게. 만약 네가 잘하면, 정식 남자친구가 되는 거고, 그게 아니면…“강한서는 얼른 유현진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그게 아닌 건 없어. 난 분명히 만점짜리 답안지를 낼 거니까.”유현진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찾았다. “너무 앞서가지 마. 나 아직 요구도 얘기 안 했어.”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귀담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내 요구는 단 하나야. 인턴 기간엔, 우리 둘 사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의심받지 않게 행동해. 알겠어?”유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랑 연애하는 게 창피해?”유현진이 그의 정강이를 발로 차버렸다. “재혼이 안 부끄러워?"강한서: …비록 마음에 무척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혼”이라는 두 글자가 그의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강한서가 물었다. “그럼 정식 남자친구가 되고 나면?”유현진이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앞서 가지 마. 인턴 기간이나 끝내고 말해.”잠시 생각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그럼 인턴 기간 내에는 커플이 하는 일은 우리도 다 할 수 있는 거야?”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가 가까이 다가오며 목소리를 잔뜩 깔더니 물었다. “어젯밤 일
진희연은 하늘을 안고 병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도일준이 몸을 뒤척이자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진희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물 드릴까요?”도일준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입술을 짓이겼다. “들어가요.”진희연이 말했다. “날이 밝으면 돌아갈게요. 저녁엔 링거를 맞으셔서 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링거 다 맞은 줄도 모르면 어떡해요.”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던 도일준이 말했다. “그럼 아이라도 침대에 눕혀요. 희연 씨는 안 자도 아이는 자야죠.”도일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라 침대 넓이가 1.2 m이었다. 어린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같이 자기엔 충분했다. 진희연은 주저 없이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는 몸을 일으켜 도일준에게 물 한 잔을 떠줬다.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도일준에게 약을 건네며 잊지 말고 복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하게 듣고 있던 도일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간호사가 멈칫했다. “네?”도일준이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약 잘못 가져왔어요.”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여 약을 확인하던 간호사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실수로 두 병실의 약이 바뀌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약을 바꿔 가져온 간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도일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도일준이 담담히 말했다. “의료업계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늘 경외심을 갖고 모든 생명에 책임을 다해야 해요. 매번 이렇게 행운이 따르진 않을 테니까요.”간호사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약을 내려놓고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진희연이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도일준 씨, 약이 바뀐 건 어떻게 아셨어요?”도일준은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려나, 생각하던 찰나, 도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의사였어요. 그래서 약에 대해 잘 알고 있죠.”“그래서 지난번 하늘이 상처를 치료해주시는 손길이 능숙하셨던 거네요.”진희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엄청 훌륭하신 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이 멍해졌다. “아니야 난—”강한서가 한현진의 말을 자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네가 말 안 해도 난 느낄 수 있어.”“느끼긴 뭘 느껴!”한현진은 어이없다는 듯 강한서를 찰싹 때렸다. “나라고 너한테 부탁 안하고 싶은 줄 알아? 둘째 삼촌과 경영권 다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너를 보는 게 마음이 아파서 그랬어. 신제품 발표회 파티가 있던 그 날을 제외하면, 네가 6시간 이상 잔 적이 있기는 해? 지금 네 다크써클 좀 봐봐. 지난번 같이 밥을 먹었을 때 오빠도 나한테 몰래 물어 봤었어. 혹시 네가 어디 아픈건 아니냐고. 네가 꼭 정기를 다 뺏긴 사람 같대. 너 지금 임산부인 나보다도 더 피곤해보여. 강한서, 넌 안 느껴져?”강한서: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아파?”기가 찬 한 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안 아파! 난 그저 네가 하루 24 시간 내내 일에만 매달려서 우리 셋 먹여 살릴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어!”강한서는 기쁘면서도 조금은 막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 돈 좋아하잖아. 내가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널 주면 네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지.”한현진이 찰싹, 강한서를 밀어냈다. “네가 과로로 몸에 무리라도 오면 내가 그렇게 많은 돈 해서 뭐하라고. 아이의 양육을 전부 나에게 맡길 생각은 하지마! 일 때문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난 남편, 아이 다 버리고 네 재산만 들고 재가할 거야.”강한서가 멍하니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쩐지 고생 끝에 드디어 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 듯 한 믿을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손을 뻗어 한현진을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몸 챙기면서 하고 있어. 임신 때문에 겪는 네 고통을 내가 덜어줄 수는 없겠지만 다른 건 나에게 다 맡겨도 돼.”한현진이 강한서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팔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어. 부탁할게.”바로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놓아주며
“아파?”강한서가 또 다시 물었다. 고개를 가로졌던 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허리가 조금 아파. 조금 전에 눌렸거든.”강한서가 한현진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애들 이름도 못 지어줬는데.”한현진: ...“나도 이름을 뭐라고 지을지 생각 안 해봤는데.”강한서가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이름 짓자. 만약...”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현진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그런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이때 검사를 마친 의사가 진단서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변연전치태반이예요. 심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해요. 될수록 누워서 하루 쉬셔야 해요.”강한서가 눈을 깜빡이며 한현진의 손을 입술에서 떼어냈다. 그가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물었다. “선생님, 제 아내와 아이 모두 괜찮은 건가요?”의사가 말했다. “괜찮아요.”강한서가 말했다. “하지만 하혈을 했잖아요.”“하혈은 변연전치태반의 증상 중 하나예요. 출혈량이 많지만 않다면 활동을 줄이고 누워서 휴식만 잘 취하시면 돼요.”“하지만 조금 전 밀쳐져서 허리를 부딪쳤어요.”“네.”의사가 말했다. “그럼 일단은 돌아가셔서 먼저 얼음찜질을 하다가 온찜질하세요. 이틀 정도면 붓기가 빠질 거예요.”강한서: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괜찮다고요?”의사가 반문했다. “허리를 부딪쳤는데 배가 왜요?”그 말에 강한서가 침묵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한서를 보며 의사가 말을 이었다. “허리를 부딪친 것 때문에 하혈한 건 분명 아녜요. 변연전치태반이 있은지는 조금 됐을 텐데 아마 모르시고 계시다가 마침 허리를 부딪치고 하혈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걸 거예요.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아이는 무사해요. 아내 분도 괜찮으시고요. 이름은 집에 가서 마음 좀 진정 시키고 천천히 지으시죠. 울면서 이름을 짓는 것도 그리 좋은 건 아니잖아요.”강한서: ...창피해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급히 병실로 들어서던 그때, 도일준은 주사바늘을 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희연이 얼른 다가가 도일준을 제지했다. “뽑으시면 안 돼요. 아직 링거 다 못 맞았잖아요.”진희연을 힐끔 쳐다보던 도일준은 진희연 옆에 서 있는 한현진을 보고는 멈칫 몸을 굳혔다. 그리곤 곧바로 진희연의 손을 떨쳐내며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한현진을 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진희연이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집에서 쓰러지셨어요. 의사가 보호자에게 연락하라고 하는데 누구한테 연락을 드려야 할지 몰라 도일준 씨 휴대폰으로 아무 번호에나 연락을 했어요. 무슨 고아원이라고 하던데 이 분이 바로 그 고아원에서 보내주셔서 함께 도일준 씨를 병원으로 모신 분이세요. 이분 도움이 없었으면 전 당황해서 아무 것도 못했을 거예요.”도일준 눈빛에 가득하던 경계가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말했다. “원장님께서 연락을 받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가보라고 전화하셨어요.”“전 괜찮아요. 원장님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전 그저 고아원에 후원을 조금한 사람일 뿐이에요. 그것 때문에 살면서 당신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 원치 않아요. 오늘 전화는 사고 같은 거였어요. 이만 돌아가세요.”도일준은 차가운 말투로 말을 마치더니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한현진은 도일준의 손에서 옷을 빼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도일준 씨가 본인이 후원하신 고아원의 사람들과 연락을 하던 안 하든 전 관심 없어요. 전 그저 원장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온 것 뿐이에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 도일준 씨는 꽤 안 좋은 상황이라 입원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원장님께 부탁을 받았으니 그냥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퇴원하고 싶으시면 의사 선생님이 퇴원하셔도 된다고 할 때 다시 얘기하죠.”말하며 한현진은 침대 맡에 있던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68번 베드 바
한현진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침대에 누운 조예단의 모습이 보이자 한현진과 진희연이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두 사람을 힐끔 쳐다본 의사가 물었다. “어느 쪽이 환자 분 보호자시죠?”진희연이 말했다. “제가 이 분 이웃이에요. 이 분은 교포라 가족은 몰라요.”한현진이 말했다. “저는 이 분이 기부한 고아원의 대표예요.”의사가 말했다.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져서 길어야 3개월 밖에 남지 않으셨어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드리세요. 비록 지금 수술은 의미 없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오셔서 약은 처방 받으셔야 해요. 안 그러면 통증이 심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고통스러울 거예요. 최대한 빨리 가족에게 연락하세요.”말하며 의사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일단 이것부터 사인하세요.”서류를 받아 훑어보던 한현진은 성별란에 적힌 남이라는 글자에 그만 멍해졌다. “선생님, 이 분이 남자라고요?”의사가 기이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편견 어린 시선으로 트렌스젠더를 보지 마시죠.”한현진: !!!의사의 재촉에 진희연이 서류를 건네받아 사인한 후 의사에게 돌려주었다. 한현진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줄곧 조예단이 도일준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전환이라니? 왜 성전환 수술을 한 거야?’이 사람에게는 너무 많은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한현진이 강한서 앞으로 걸어갔을 때, 그는 진희연의 아들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다가오자 강한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한현진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강한서에게 알려주었지만 그는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한현진이 물었다. “안 놀라워?”강한서가 물었다. “남장여자가 어떻게 티가 안 나? 여권, 비자 심지어 M국의 모든 신상정보도 전부 진짜였어. 만약 여자라면 그 모든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병 때문에 병원도 자주 가야 했을 텐데, 병원은 가기만 하
강한서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하며 말했다. “네가 가면 들통 나잖아.”한현진이 말했다. “희연 언니 똑똑한 사람이야. 언니가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원장님께 연락드렸대. 난 원장님 부탁으로 조예단 씨 병문안 간 척 하면 돼.”“그럼 같이 가.”“넌 오늘 생일이잖아. 넌 가지 말고 여기서 재밌게 놀아. 나 혼자 가면 돼.”강한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 놓고 놀 수 있겠어. 가자. 내가 운전할게.”두 사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조예단은 이미 응급실로 실려간 후였다. 아들을 데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희연은 두 사람을 보고 나서야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희연 언니, 어떻게 됐어요?”한현진이 앞으로 다가가서야 입을 열었다. 진희연이 말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어요. 의사 말로는 아파서 쓰러진 것 같대요. 쓰러질 때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있어서 가스 중독이 온 것 같아요. 저도 쓰러진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하늘이가 오늘 학교에서 상을 받았는데 잠자리에 들어서야 갑자기 떠올리고는 굳이 상장을 할아버지께 보여주겠다고 해서 문을 두드렸더니 인기척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경비를 불러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조예단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바로 119에 신고하고 현진 씨에게 연락한 거예요.”한현진이 진희연의 손등을 토닥였다. “고생하셨어요.”“고생은요.”진희연이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예단 씨도 참 안 됐어요. 몸도 성치 않은데 곁에 가족이나 친구도 하나 없고. 조예단 씨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려고 보니까 연락처에서 일부러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더라고요. 저장된 번호가 하나도 없었어요. 통화목록에서 원장님 번호를 찾아서 전화 드린 거예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예단은 당시 아이가 뒤바뀐 그 사건에게 혐의가 제일 큰 사람이었다. 오늘 그녀가 이런 처지에 이르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업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조예단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둔
불현듯 긴장감에 휩싸인 강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현진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되었을 땐 강한서는 단지 혈연으로 이어진 아기 두 명이 더 생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아이들을 사랑할 책임과 어른으로 성장시킬 의무가 더해지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꽤 흐릿한 느낌이었다. 아빠는 10개월 동안 아이를 품고 있는 엄마와는 달리 아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움직임을 느끼고 나서야 강한서는 두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뱃속의 아이는 그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생긴 혈육이었다. 두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태어나 그의 품에서 조금씩 성장하며 그를 “아빠”라고 부를 작은 생명체였다. 그 순간, 강한서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몸을 숙여 한현진의 배에 가까이 다가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착하지, 아빠 여기 있어.”마치 강한서의 말에 감응이라도 하듯, 뱃속의 어린 꼬물이들이 얌전해졌다.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물었다. “내 말을 들은 건가?”“이제 몇 개월이라고, 듣긴 뭘 들어.”라고 대답하려던 한현진은 반짝이는 강한서의 눈빛에 결국 그를 따라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런 것 같아. 애들에게 얘기 자주 해줘.”강한서가 갑자기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준비 좀 해야겠어.”한현진: ?“뭘 준비해?”강한서가 말했다. “태교 책도 좀 사고, 태교 수업도 받아야지. 계몽은 정말 중요한 거야. 태교라고 마음대로 가르치면 안 돼.”한현진은 진지한 모습의 강한서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태교는 너에게 맡길게. 난 누굴 배워주는 일에 참을성이 전혀 없거든.”강한서는 정중하게 태교 임무를 맡았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과일 좀 주고 올게.”한현진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과일은 바로 옆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미주네와 기껏해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굳이 가져다준다고?’하지만 강한
한성우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한현진은 웃으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넌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그땐 인터넷에서 한창 이과생의 낭만, 뭐 이런게 유행했을 때였어. 그래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본 거였어.”한성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문과생인 나한테 이과생의 낭만을 논해? 그 방법으로 고백을 안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넌 평생 솔로였을 거야. 그런 식으로 고백에 성공하면 내가 성을 간다.”차미주가 말했다. “넌 공부를 못하니까 당연히 모르겠지. 현진이는 공부 잘 했잖아. 이건 모범생끼리의 낭만이라고.”한현진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아냐. 나도 못 풀어.”혹여나 강한서가 또 “이과생의 낭만”을 선사하기라도 할까, 한현진이 당부하듯 말했다. “난 이과생의 낭만 같은 거 안 좋아해. 난 부자의 낭만이 좋아.”멈칫한 강한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한성우가 대답했다. “따뜻한 말보다는 수표라는 거예요? 저와 형수님이 생각하는 사랑이 같네요. 이젠 우리에게 뭘 선물해야 할지 알겠지?”강한서: ...차미주가 한성우를 꼬집었다. “네가 왜 끼어들어.”바로 그때, 민경하가 케이크를 밀며 나타났다. 민경하 옆에 선 강민서는 와인 두 병을 들고 있었다. 생일 노래가 은은히 흘러나오고 한현진은 나지막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케이크에 꽂힌 촛불이 흔들리며 밝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촛불이 익숙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비추었고 울컥한 강한서의 눈시울도 점점 뜨거워졌다. 생일이라는 건 언제나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걱정,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섭섭한 그런 날이었다. 강한서는 인맥이 넓어 생일엔 파티를 열어 다 함께 즐기는 한성우와는 달랐다. 그는 친한 친구 네, 다섯 명을 불러 호프집에서 간단히 술이나 한두 잔 하며 옛날 얘기도 하고 미래를 그리기도 하는 걸 즐겼다. 한현진은 그런 강한서를 누구보다
“현진아.”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울대가 움직였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주문한 거야?”“아마 새벽에 잠 못 들고 침대에서 일어난 네가 몰래 수집실에 들어가 그 기계뭉치를 꺼내봤을 때?”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 생각했지. 강아지처럼 불쌍한 사람이니까, 내가 많이 아껴줘야지.”피식 웃던 강한서가 곧 눈시울을 붉혔다. 손을 뻗어 한현진을 꽉 안은 강한서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의 가는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럽게 강한서의 등을 토닥이던 한현진이 와장창, 분위기를 깨뜨렸다. “이렇게 감동할 거 없어. 네 돈으로 산거야. 알잖아. DC 어르신, 값을 부를 땐 양심도 없다니까.”강한서: ...한현진은 다시 분위기를 살리고 나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때 어머니가 내가 망가뜨린 거라고 했잖아. 단 일 초도 날 의심한 적 없었어?”신미정은 먼저 강한서에게 못생긴 기계뭉치가 부서졌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신미정이 전한 스토리에서 기계를 망가뜨린 범인은 한현진이 되어버렸다. 당시 강한서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지만 한현진은 마음 속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강한서는 신미정을 믿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감동한 표정의 한현진이 말했다. “넌 그때부터 날 믿었던 거였어.”강한서가 말했다. “RC카에 블랙박스가 있었어.”한현진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굳어갔고 감동도 파스스 사라졌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어떻게 널 안 믿겠어? 넌 아무리 화가 나도 제일 싼 컵을 던지는 애였어. 그런 애가 그걸 부쉈을 리가 없잖아.”한현진은 기쁜 듯, 또 아닌 듯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짠돌이 근성을 믿은 것이었다. “강한서.”한현진이 나지막이 강한서를 불렀다. “응.”강한서가 대답했다. 눈을 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