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는 강한서만큼 하얗지 않을 뿐, 절대 까만 피부를 가진 아이가 아니었다. 그의 직설적인 화법은 어린애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휴대폰을 뒤지던 강한서가 민경하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만경하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고개를 든 강한서가 손을 들어 입에 지퍼를 잠그는 흉내를 냈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알겠죠?”민경하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가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고 담배를 껐다. “차에 들어가서 좀 자요. 날이 밝으면 현진이 데려다줘요.”다음 날 아침, 유현진은 민경하의 부름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이미 차 안이었고, 밖은 합숙 장소였다. 민경하가 운전석에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모님, 7시 30분에요. 들어가셔서 준비하셔야죠.”유현진이 눈을 꿈벅였다. 그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해 비몽사몽인 채로 차에서 내렸다. 침실에 도착하자 모두 방금 일어난 것 같았다. 다 씻은 유현진이 무용복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옷이 누군가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침실의 배우들에게 물으려고 했으나, 우왕좌왕하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유현진은 ‘물을 필요도 없겠구나’ 생각했다. 송민영 아니면 방이진이 그런 것이 확실했다. 한 명은 오랫동안 원망을 산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새로 생긴 적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어린 배우들이 감히 미움을 살 수 없는 배우가 그 두 명뿐이었다. ‘초등학생이나 할 짓을, 아직도 세 살짜리 애야?’안창수는 어제 특별히 오늘 카메라 테스트를 위해 단체복을 입고 오라고 요구했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바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 이사라는 극 중에서 꽤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러니 유현진이 카메라 테스트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었다.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찢긴 옷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옷을 둥글게 말아 휴지통에 버렸다. 은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현진 씨, 내가 테이프로라도 붙여 줄게요.
송민영의 말에 사람들은 그제야 유현진의 옷에 시선을 돌렸다. 오늘 연습실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핑크와 화이트가 섞인 무용복을 입고 있었다. 유현진의 무용복은 확실히 너무 눈에 띄었다. 유현진이 튀어 보이려고 입고 나온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단체 생활에서 사실 사람들은 이렇게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런 짓을 하는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딛고 올라서거나, 아니면 팀 전부를 곤경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송민영의 말에 사람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현진을 보기 시작했다. 유현진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찢겨진 그녀의 옷에는 관심이 없고, 그에 따른 결과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안창수 역시 송민영의 말을 듣고 말했다. “현진 씨, 왜 이렇게 입고 온 거죠? 팀복은요?”유현진은 안창수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말했다. “감독님, 제가 요즘 계속 이사라라는 캐릭터를 연구해 봤는데요, 제 기억이 맞는다면 대본에는 부잣집 출신에 집안이 좋고, 어렸을 때부터 고생이 뭔지 모르고 자라서 도도하고 오만한 성격으로 설정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재능을 타고난 윤여령을 이기지 못하니까 분노했던 거고요.”안창수는 배우와 캐릭터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기에 그는 유현진의 분석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사라는 도도하지만 매우 노력하는 사람이죠. 집안이 좋다고 해서 놀고먹는 그런 사람이 아니죠. 이사라가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던 건 자신의 노력이 천부적인 재능에 져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딱 그 재능이 부족해서, 이사라는 절대 윤여령을 초과할 수 없었던 거죠.”잠시 말을 멈춘 안창수가 물었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는 건가요?”유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의견까지는 아니고요. 제가 이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을 해봤거든요. 이사라는 도도한 사람이라 사실은 조금 자기중심적이에요. 이런 사람은 말은
촬영 감독은 이렇게 화면발이 잘 받는 여배우를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각도에서 찍어도 유현진은 완벽에 가까웠다. 예전에 다른 배우를 찍을 때는 특정된 각도에서만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배우는 조명과 메이크업에 많이 의지했다. 심지어 어떤 유명 배우들은 화면발이 잘 안 받은 날엔 촬영 감독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찍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피사체가 완벽하지 않을 때는, 촬영 수준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호박을 수박으로 둔갑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니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촬영 후 후시 작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후시 작업에 대한 의존도가 어느 정도인지 설명한다면, 그들은 편집 스태프에게 자신이 나온 부분을 하나하나 다 수정해 주기를 부탁했고, 그 결과 다른 배우들과 다르게 그들이 나오는 영상은 흐름이 끊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보정을 심각하게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유현진처럼 화면발이 잘 받는 배우는 촬영 스태프나 편집 스태프의 사랑을 받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그녀만 화면에 담고 싶어 했다. 두 번의 테스트 촬영을 마친 안창수는 영상을 모니터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상당히 만족해하고 있다는 것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송민영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녀와 유현진은 서로 가까이에 서 있었다. 유현진이 예쁘게 생겼다는 것은 송민영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송민영은 오늘 아침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잠에서 깨어나 정성을 들여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했다. 송민영은 너무 예쁘게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몇 년간 시술을 받으면서 이목구비가 더 또렷해졌고 그녀의 그런 순진무구한 얼굴은 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녀의 메이크업은 이미 여러 번 유행했었다.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같은 방식의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시스루 앞머리와 풍성한 올림머리는 그녀의 청순함을 더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화면 속 유현진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송민영은 자신과 유현진 사이에 큰 격차가 존
유현진이 입을 앙다물고 송민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송민영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눈빛에도 악랄함이 가득했다. 방이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른 사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요. 감독님께서 점심에 식사 대접도 해주시기로 했는데.”유현진이 송민영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막 입을 열려는데, 연습실의 문이 열리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독님,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고개를 돌리자 주강운이 미소를 지으며 손에는 커피를 든 채 문 앞에 서있었다. 유현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놀라던 안창수는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운아, 네가 어쩐 일이야?”유현진: ???주강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독님께서 요즘 새 영화를 촬영 중이라고 들어서요. 여기서 연습 중이시라길래, 지나가던 길에 들렀어요.”그는 안창수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방해가 된 건 아니죠?”“방해는 무슨. 아직 정식 촬영도 아니고. 네가 와서 오히려 기쁜걸.”그는 주강운의 손에 있던 커피를 받아 비서더러 배우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고는 주강운을 끌고 얘기를 시작했다. “언제 돌아온 거야?”주강운이 말했다. “꽤 됐어요. 새 변호사 사무실이 좀 바빠서요, 계속 연락 못 드렸어요.”“일이 중요하지, 언제든 연락만 하면 되지, 뭘.”안창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몸은 어때?”“건강해요.”안창수가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그럼 됐어.”이준이 말했던 것처럼 안창수는 정말 수다스러웠다. 그는 주강운을 데리고 30 분이 넘도록 수다를 떨었다. 안창수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서야, 그는 주강운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 받으러 나갔다. 유현진은 커피를 들고 주강운의 앞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주 변호사님, 저희 감독님 아세요?”주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 따님께서 해외 유학 중이신데, 왕따 사건에 휘말려서 제가 변호를 맡은 적이 있거든요.”‘어쩐지.’주강운이 목소리를 낮게 깔더니
안창수는 그제야 말했다. “현진 씨가 옷 갈아입고 오면 바로 시작하죠.”그러더니 유현진에게 말했다. “얼른 갈아입고 와요.”유현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고개를 들어 방이진을 쳐다보고는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막 문을 나서자 차미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미주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현진아, 너 몇 층이야?”“2층이야.”멈칫 행동을 멈춘 유현진의 눈빛에 웃음기가 서렸다. “나 너 봤어.”연습실.송민영과 방이진이 함께 앉아있었다. 방이진이 말했다.“옷도 다 망가졌을 텐데, 갈아입으러 가는 척하는 것 좀 봐요. 못 갈아입고 와서 감독님께 뭐라고 할지 지켜보자고요.”송민영이 말했다. “옷, 못 입을 정도로 찢어 놓은 거 맞아요?”“제가 직접 했어요. 아주 갈기갈기 찢어놨거든요. 같은 침실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어요.”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통을 뒤져서 입지는 않겠죠.”방이진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커피를 송민영에게 건넸다. “민영 언니, 먼저 커피 좀 마셔요. 시럽 안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요. 언니 좋아하시잖아요.”송민영이 고맙다며 커피를 받았다. 빨대를 꽂고 문 쪽을 바라보며 유현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10여 분 후, 연습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들고 핑크와 화이트가 섞인 무용복을 입고 온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방이진이 멍해졌다. 그러더니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송민영의 얼굴도 차갑게 식었다. ‘이런 멍청한 것!’“분명 제가 직접 가위로 찢어놨었는데, 저렇게 멀쩡할 리가 없는데.”“됐어요!”송민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해요!”‘이 바보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그녀는 주강운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유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송민영은 그제야 주강운이 안창수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해 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쩐지 손님이 하필이면 주강운이더라니.안창수는 유현
유현진이 악의를 갖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송민영의 안색이 너무 창백해 보여 건넨 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송민영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송민영 때문에 자신의 일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송민영의 귀에는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송민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현진을 째려보았다. “그쪽 조연 연기나 잘하면 돼요!”유현진: ...‘쓸데없는 말을 했군.’다시 대형을 정돈하고 무용 선생님을 따라 동작을 맞췄다. 송민영은 얼마 못 가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눈앞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더니 눈앞이 새까매지면서 송민영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이번에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바닥에 누운 채 온몸을 떨었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젊은 배우들은 깜짝 놀랐고 현장은 비명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안창수도 잠깐 멍해졌다. 그는 몇 초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앰뷸런스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송민영의 매니저인 임효우가 얼른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송민영을 한 번 살피더니 이내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명령했다. 임효우의 처사에 유현진은 소름이 돋았다. 송민영의 모습은 누가 봐도 쇼크였다. 심폐소생술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사진이나 신경쓰고 있다니, 미친 건가?다행히 현장에는 안창수가 무용 연습 도중 생길 부상에 대비에 모셔 온 의료진이 있었다. 의료진들도 얼른 현장에 도착했고,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송민영에게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몇 분 후 앰뷸런스가 도착했고 송민영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안창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송민영의 팬들은 유난스럽기로 소문이 났다. 평소 촬영 중 작은 상처만 생겨도 악플을 남겨 상대방이 SNS를 탈퇴하도록 만들었다. 이번엔 정식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그는 이 일이 밖에 전해지면 제작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송민영이 무사해야 한다
주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유현진이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레스토랑을 선택한 이유는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는 분위기를 원한 것도 있었고, 차미주가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현진은 스테이크의 맛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어느 레스토랑이 더 맛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유현진은 강한서가 자주 다니던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강한서가 이 레스토랑의 스테이크가 한주시에서 가장 맛있다고 했었다. 유현진은 강한서가 자주 시키던 세트로 주문하고 메뉴판을 차미주에게 건넸다. 차미주는 메뉴판의 가격을 보더니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스테이크 하나에 20만 원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가서 개자식한테 제육볶음이나 해 주는 건데. 그럼, 2만 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차미주는 아무 메뉴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어 결국 유현진과 같은 세트를 주문했다. 주강운도 주문을 완료했다. 차미주는 주강운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매번 유현진이 어려움이 있을 때 도와주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그는 변호사였으니 변호사 친구가 있다고 자랑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차미주는 밥을 먹는 내내 주강운과 대화를 나눴다. 주강운과 차미주는 대화가 잘 통했다. 그는 빨리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어떤 화제든 그는 전부 받아주었고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았다. 유현진은 배가 살살 아파졌다. 생리가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른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이때 한성우가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차미주가 창가 자리에 앉아 옆 사람과 웃고 떠드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도둑아, 오늘 약속 있다더니, 남자랑 데이트였어?”주강운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한성우?”한성우도 눈이 동그래졌다. “네가 어떻게?”차미주가 한성우의 손을 쳐냈다. “네가 뭔데 상관이야. 왜, 음식이 부족해?”한성우가 차미주의 머리를
한성우는 이상한 기분을 뒤로 하고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근데 너희 둘이 왜 같이 밥을 먹고 있어?”‘도둑이랑 강운이는 안 친하지 않았나?’주강운이 대답했다. “나랑 미주 씨가 현진 씨 보러 갔었거든. 현진 씨가 자리 마련해줘서 같이 밥 먹고 있었어.”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새 여자친구?”한성우가 대답했다. “아니, 집에서 선보라고 해서. 그냥 밥이나 같이 먹었어.”차미주는 주스를 마시며 한성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선보자마자 손잡고 다녀?”한성우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뜻이었다. 한성우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이 오라버니가 워낙 매력적이라서 말이야. 어떤 여자든 날 보면 빠져버리잖아. 너도 나 처음 봤을 때 내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잖아. 그리고 우리는 손 잡는 것보다 수위가 더 높았던 것 같은데?”차미주는 입 안에 있던 주스를 삼키지도 못하고 하마터면 사레가 들려 큰일 날 뻔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기침을 했다. 그녀의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미주는 한성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건 내가 시간 끄느라고 그랬던 거잖아!”한성우는 차미주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더니 턱을 괴고 웃는 얼굴로 차미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괜히 차미주를 놀리며 말했다. “그래? 난 왜 네가 내 매력에 빠져서 그런 거 같지?”차미주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만약 내가 너한테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난 벼락을 맞을 거야!”한성우: ...‘장난인데, 이렇게까지 말해야겠어? 나한테 마음이 있으면 어때서? 창피한가?’한성우의 기분이 더러워졌다.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유현진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한성우를 본 유현진이 놀라워했다. 그녀는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의 일들을 듣더니 한성우에게 예의상 물었다. “한 대표님도 같이 식사하실래요?”한성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차미주가 웃으며 말했다. “이미 다 먹었어.”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한성우에게 말했다. “얼른 가봐.”딱히 식사를 같이하려던 생각이 없었던 한성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