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말을 아끼던 윤명훈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회사에서는 쿨하게 한열을 보내줄 마음이 없거든요.”그가 한현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현진도 알 수 있었다. 윤명훈은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열이 아직 취해 있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윤명훈은 한현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제가 잠시 후 해명글을 올릴게요. 명훈 씨는 신하리 씨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쓸데없는 기사들 처리해 달라고 연락하세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해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해명하기 어려워질 거예요.”한열의 바람 스캔들을 터트린 건 그저 페이크에 불과했다. 성추문으로 한열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만약 한현진이 한열의 회사 대표였다면, 자신의 두 손으로 탑급의 자리까지 올린 아이를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계약을 해지 한다고 해도 한열의 빛을 어느 정도는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한열은 신하리라는 충무로 연기파 배우의 인맥까지 갖고 있으니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볼 이유는 없었다. 연예계에게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그러니 이번 일은 오히려 누군가 한열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 같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세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 했다. 다만 송민준의 눈은 모자이크 처리했다.[저희 오빠와 사촌 동생이 그렇게까지 닮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하리]사진 속에서 한현진은 가운데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엔 송민준이, 그리고 오른쪽엔 한열이었다. 막내 동생인 한승은 아예 잘라버린 후 사진을 업로드 했다.비록 송민준의 눈을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지만 하관만 보아도 한열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불현듯 긴장감에 휩싸인 강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현진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되었을 땐 강한서는 단지 혈연으로 이어진 아기 두 명이 더 생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아이들을 사랑할 책임과 어른으로 성장시킬 의무가 더해지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꽤 흐릿한 느낌이었다. 아빠는 10개월 동안 아이를 품고 있는 엄마와는 달리 아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움직임을 느끼고 나서야 강한서는 두 생명체가 살아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뱃속의 아이는 그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생긴 혈육이었다. 두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태어나 그의 품에서 조금씩 성장하며 그를 “아빠”라고 부를 작은 생명체였다. 그 순간, 강한서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몸을 숙여 한현진의 배에 가까이 다가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착하지, 아빠 여기 있어.”마치 강한서의 말에 감응이라도 하듯, 뱃속의 어린 꼬물이들이 얌전해졌다.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물었다. “내 말을 들은 건가?”“이제 몇 개월이라고, 듣긴 뭘 들어.”라고 대답하려던 한현진은 반짝이는 강한서의 눈빛에 결국 그를 따라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런 것 같아. 애들에게 얘기 자주 해줘.”강한서가 갑자기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준비 좀 해야겠어.”한현진: ?“뭘 준비해?”강한서가 말했다. “태교 책도 좀 사고, 태교 수업도 받아야지. 계몽은 정말 중요한 거야. 태교라고 마음대로 가르치면 안 돼.”한현진은 진지한 모습의 강한서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태교는 너에게 맡길게. 난 누굴 배워주는 일에 참을성이 전혀 없거든.”강한서는 정중하게 태교 임무를 맡았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과일 좀 주고 올게.”한현진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과일은 바로 옆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미주네와 기껏해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굳이 가져다준다고?’하지만 강한
한성우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한현진은 웃으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넌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그땐 인터넷에서 한창 이과생의 낭만, 뭐 이런게 유행했을 때였어. 그래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본 거였어.”한성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문과생인 나한테 이과생의 낭만을 논해? 그 방법으로 고백을 안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넌 평생 솔로였을 거야. 그런 식으로 고백에 성공하면 내가 성을 간다.”차미주가 말했다. “넌 공부를 못하니까 당연히 모르겠지. 현진이는 공부 잘 했잖아. 이건 모범생끼리의 낭만이라고.”한현진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아냐. 나도 못 풀어.”혹여나 강한서가 또 “이과생의 낭만”을 선사하기라도 할까, 한현진이 당부하듯 말했다. “난 이과생의 낭만 같은 거 안 좋아해. 난 부자의 낭만이 좋아.”멈칫한 강한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한성우가 대답했다. “따뜻한 말보다는 수표라는 거예요? 저와 형수님이 생각하는 사랑이 같네요. 이젠 우리에게 뭘 선물해야 할지 알겠지?”강한서: ...차미주가 한성우를 꼬집었다. “네가 왜 끼어들어.”바로 그때, 민경하가 케이크를 밀며 나타났다. 민경하 옆에 선 강민서는 와인 두 병을 들고 있었다. 생일 노래가 은은히 흘러나오고 한현진은 나지막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케이크에 꽂힌 촛불이 흔들리며 밝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촛불이 익숙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비추었고 울컥한 강한서의 눈시울도 점점 뜨거워졌다. 생일이라는 건 언제나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걱정,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섭섭한 그런 날이었다. 강한서는 인맥이 넓어 생일엔 파티를 열어 다 함께 즐기는 한성우와는 달랐다. 그는 친한 친구 네, 다섯 명을 불러 호프집에서 간단히 술이나 한두 잔 하며 옛날 얘기도 하고 미래를 그리기도 하는 걸 즐겼다. 한현진은 그런 강한서를 누구보다
“현진아.”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울대가 움직였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주문한 거야?”“아마 새벽에 잠 못 들고 침대에서 일어난 네가 몰래 수집실에 들어가 그 기계뭉치를 꺼내봤을 때?”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때 생각했지. 강아지처럼 불쌍한 사람이니까, 내가 많이 아껴줘야지.”피식 웃던 강한서가 곧 눈시울을 붉혔다. 손을 뻗어 한현진을 꽉 안은 강한서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의 가는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럽게 강한서의 등을 토닥이던 한현진이 와장창, 분위기를 깨뜨렸다. “이렇게 감동할 거 없어. 네 돈으로 산거야. 알잖아. DC 어르신, 값을 부를 땐 양심도 없다니까.”강한서: ...한현진은 다시 분위기를 살리고 나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때 어머니가 내가 망가뜨린 거라고 했잖아. 단 일 초도 날 의심한 적 없었어?”신미정은 먼저 강한서에게 못생긴 기계뭉치가 부서졌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신미정이 전한 스토리에서 기계를 망가뜨린 범인은 한현진이 되어버렸다. 당시 강한서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지만 한현진은 마음 속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강한서는 신미정을 믿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감동한 표정의 한현진이 말했다. “넌 그때부터 날 믿었던 거였어.”강한서가 말했다. “RC카에 블랙박스가 있었어.”한현진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굳어갔고 감동도 파스스 사라졌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어떻게 널 안 믿겠어? 넌 아무리 화가 나도 제일 싼 컵을 던지는 애였어. 그런 애가 그걸 부쉈을 리가 없잖아.”한현진은 기쁜 듯, 또 아닌 듯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짠돌이 근성을 믿은 것이었다. “강한서.”한현진이 나지막이 강한서를 불렀다. “응.”강한서가 대답했다. 눈을 감은
못생긴 기계뭉치는 강한서가 직접 만든 로봇 RC카였다. 한현진은 막 개조를 완성한 강한서가 못생긴 기계뭉치를 조종해 그녀에게 택배를 가져다 줄 때의 덤덤한 척 하지만 은근히 그녀의 놀란 표정을 기대하며 결국엔 입꼬리를 씩 올려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던 강한서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봇 RC카는 강한서가 먼지 한 톨이 묻어도 직접 닦을 정도로 아끼는 물건이었다. 만약 강한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 못생긴 기계뭉치가 아이들 손에 놀아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어쩌면 한현진이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한 탓인지 친척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신미정은 한현진의 말이 자기 얼굴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수리해도 우리 집안 돈으로 할 거야. 너한테 비용 감당하라고 안 해.”신미정의 그 말은 정말이지 듣기 거북할 정도였다. 한현진을 전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미정의 발언에 한현진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함께 따라온 친척들 역시 일이 더 커질 것을 예견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데리고 하나둘 자리를 피했다. 신미정은 한현진을 노려보며 차를 타오라고 명령했다. 한현진은 신미정이 그 화가 풀릴 때까지 자신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랬기에순순히 차를 내리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현진이 주방에서 나왔을 때 신미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못생긴 기계뭉치는 산산히 부서진 채 바닥에 널부러져있었다. 누군가 위에서 던진 것이었다. 강한서가 출장에서 돌아와서야 한현진은 그 일을 강한서에게 알렸다. 그가 돌아오기 전 한현진은 이미 수십 명의 정비사를 찾아 복원을 시도했다. 하지만 로봇 자체가 이미 강한서에 의해 개조된 것이었고 부품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더는 교체할 부품이 없었다. 한현진이 부탁한 모든 정비사들은 하나 같이 아쉽지만 도와줄 수 없다고 얘기했다. 강한서는 부서진 로봇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잔해를 안고 수집실로 향했다. 수많은 방법을 시도
물병엔 점과 선으로 구성된 부호가 찍혀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못생긴 병을 가져온 거야.’물을 마신 한현진은 물병을 던져버렸다. 화가 조금 가라앉고 나서야 한현진은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한현진은 얌전히 앉아있는 강한서를 보고도 무시한 채 곧장 샤워실로 들어가 씻은 후 잠에 들었다. 늦은 새벽, 잠결에 누군가 자신의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낀 한현진은 움찔 몸을 떨며 손을 들어 그대로 내려쳤다. 머리를 맞은 강한서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한현진은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너 뭐하는 거야? 이 새벽에 변태 행세라도 하려고 그래?”‘아직 화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달래지도 않고 그냥 들이대시겠다? 센스라곤 없는 자식!’강한서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는 한참만에야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그 물 마셨잖아.”멈칫하던 한현진이 물었다. “그 물에 약이라도 탔어?”‘그래서 직접 해독제라도 해주겠다는 거야?’강한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시간이 꽤 흘러서야 그는 어두운 얼굴로 이불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그날 밤, 강한서는 서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한현진은 잠이 들 때까지도 강한서가 대체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서가 한현진이 오랫동안 기대했던 케이크를 강민서에게 “선물”한 사건이 벌어졌다. 조금 느슨해졌던 두 사람 사이에 다시 긴장이 맴돌았다. 얼마 후 새해가 밝았다. 그날 강한서는 출장 때문에 한주에 없었고 신미정은 신표 가족을 비롯한 몇 촌인지도 알 수 없는 친척들을 데리고 한현진과 강한서 집에서 명절을 보냈다. 강한서가 있을 때면 신미정은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지 않았다. 비록 신미정은 강한서의 생활에 이것저것 간섭하기를 좋아했지만 강한서는 신미정의 그런 모습을 제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대화는 늘 다툼으로 마무리 되었다. 신미정은 아들
처음엔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한 한현진은 길을 피해주었다. 그러자 로봇 RC카는 그녀를 에워싸고 한 반퀴 빙 돌더니 또 다시 그녀의 발에 부딪혔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2층은 텅 비어 강한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났을 때면 한현진은 누구보다 강한서를 미워했다. ‘너로는 부족해서 거지같은 네 기계까지 날 괴롭히는 거야?’생각하던 한현진은 아예 몸을 일으켜 겉옷을 챙겨 밖으로 산책을 나섰다. 그 결과, 이상한 생김새의 RC카는 한현진을 따라 집을 나섰다. RC카는 강아지처럼 한현진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잔뜩 짜증이 난 한현진은 로봇 RC카를 펑 차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가방보다도 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떠올리곤 꾹 참아내야 했다. 한현지이 자리를 잡고 의자에 앉자 로봇 RC카는 그의 기계팔로 물병을 한현진의 발 옆으로 건넸다. 못생긴 기계뭉치를 노려보던 한현진은 물병을 잡아 던져버렸다. 그러자 “못생긴 기계뭉치”는 U턴하더니 강아지처럼 달려가 물병을 다시 주웠다. 아름드리는 입주민이 꽤 많은 별장에 속했다. 이웃들 모두 같은 업계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녀와 강한서처럼 아이도 없는 젊은 부부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아이를 키우는 부부거나 삼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한현진이 산책을 나선 시간은 마침 다들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즐기는 시간대였다. 그러니 로봇 RC카가 물병을 주워오는 그 장면은 마침 일반 RC카를 갖고 놀던 아이들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부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로봇 RC카를 구경하며 재잘재잘 질문을 던졌다. “누나,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너무 멋져요. 물건도 주울 줄 알아.”“엔진 완전 대박이야. 이렇게 가파른 길도 올라갈 수 있다니. 최고잖아.”“휘발유를 연료로 하는 거예요? 저게 연료탱크예요?”“바퀴도 더 큰 거로 개조한 거야. 무거운 물건도 끌 수 있어요?”못생긴 기계뭉치는 마치 일부러 뽐내기라도 하듯 기계팔을 뻗어 통통한 남자 아이를 잡고 자기 등으로 끌었다. “올라가라는
강한서는 멍해진 한현진에게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고 한현진은 더 이상 차미주를 말리지 않았다. 차미주가 한주에서 막 일을 시작했을 때 한현진은 그녀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줬었다. 김경선은 한현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줄곧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러니 차미주가 하현주의 병원비 때문에 걱정하는 한현진을 돕기 위해 김경선에게 손을 벌렸을 때, 김경선은 두 말 없이 바로 2억을 보내줬었다. 한성우에게서 그 일을 전해들은 강한서 역시 줄곧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는 한성 그룹의 모든 자회사의 사무용품과 명절 선물 세트를 구매하는 협력 업체를 미소마트로 바꿨다. 김경선이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맞지만 그녀 역시 사업가였다. 어떻게 한성과 계약을 맺게 된 것인지, 조금만 조사해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딸의 친구는 한주 명문가에서 태어난 재벌 2세였고 지금은 자신의 사업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 김경선은 한 번 더 은혜를 베푸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앞으로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이를 돈독히 해야 사업이 더 번창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차미주의 체면까지 세워줄 수 있었으니 더 좋은 일이었다. 강한서는 김경선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한현진에게 더 이상 거절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앞으로 협력할 기회는 지금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한성우가 질투 섞인 말투로 말했다. “휴. 역시 여자를 잘 만나는 게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아. 난 왜 그런 운이 없을까.”차미주가 한성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럼 나 가?”한성우가 차미주를 끌어안으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좋은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도 좋지.”차미주가 한성우의 가슴을 쿡 찔렀다. “좀 패기 있게 살면 안 돼? 왜 계속 데릴 사위할 생각만 해? 넌 줏대도 없어?”“내가 강한서처럼 큰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그저 내 아내와 아이가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 수 있으면 그거로 충분해. 너만 허락하면 난 바로 결
차미주가 옆에서 맞장구치며 말했다. “너 같은 짠돌이가 강한서 생일에 뭐라도 가져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강한서는 네가 환생이라도 한 줄 알 거야.”한성우가 이를 갈았다. “네가 더 해. 내가 남한텐 짠돌이처럼 굴어도 너나 친구한테 그런 적 있어?”차미주가 예를 들려 말했다. “앞에선 날 속이고 또 뒤에선 친구에게 거짓말 하면서 일전 한 푼도 안내고 한 달 동안 내가 해준 밥 축냈던 건 잊었나봐?”한성우가 변명했다. “중매인으로써 돈 조금 번게 뭐 어때서? 밥 얻어먹은 것도 너무한 거야?”“부끄럽지도 않아?”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며 강한서 앞으로 걸어왔다. 한성우는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강한서에게 건넸다. “친구, 생일 축하해. 전에 네가 강에 빠졌을 땐 이젠 평생 납골당에서 생일을 축하해 줘야 하나, 했어. 다행히도 하늘이 너 같은 사고뭉치를 데려가지 않으셨으니 오늘 이 기회를 빌려 진지하게 맹세할게. 내가 너보다 죽게 죽는 한, 매년 네 생일은 내가 책임질게.”차미주가 팔꿈치로 한성우를 퍽 쳤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생일에 죽느니, 사느니 그런 얘길 왜 해. 퉤퉤퉤.”한성우가 차미주의 어깨를 감싸 안고 웃으며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너랑 평생 친구 해준다고.”울컥한 강한서는 침착하게 한성우가 건네는 선물을 받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너 하는 거 봐서.”“쯧. 감동 받았으면 울어. 뭘 센 척 하고 있어.”흥, 콧방귀를 뀌던 한성우가 말을 이었다. “내 선물은 마지막에 뜯어. 너무 처음부터 감동을 주면 다른 사람 선물은 눈에 차지도 않을 테니까.”호기심에 가득 찬 차미주가 물었다. “강한서에게 무슨 선물을 준비해준 거야?”한성우가 검지를 내밀어 가볍게 흔들었다. “비밀이야.”“쳇.”차미주 역시 강한서에게 “선물”했다. “그, 넌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으니까 뭘 주면 좋을지 몰라서 준비했어. 마침 엄마 가게들이 리모델링 중이라 루나를 추천했더니 호객용으로
한현진이 이끄는 대로 강한서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밤공기는 조금 차가웠고 재스민 향으로 가득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강한서는 마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잎이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향기가 바람 따라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그가 좋아하는 향이었다. “계단 있어. 다리 높게 들어. 넘어지지 말고.”한현진의 목소리가 가볍게 귓가에 울렸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꼭 잡고 한걸음 천천히 내딛었다. 그의 발밑은 자갈로 포장된 길이었다. 그 위를 걸으면 돌멩이가 살짝 내려앉으며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현진이 말했다. “도착했어. 여기야.”그 자리에 멈춰선 강한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 “안대 벗어도 돼?”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벗겨줄게.”그 말에 한현진이 쉽게 안대를 벗길 수 있도록 강한서는 고개를 숙였다. 안대가 벗겨지는 그 순간, 강한서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불빛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천천히 눈을 뜬 강한서 앞에는 하얀 재스민으로 가득 차있었다. 정말 그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 한 송이, 한 송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마당을 따라 한 바퀴 빙 비추던 조명은 앞에 놓인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빛을 모았다. 그 순간, 프로젝터가 켜지고 신우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편안한 차림의 그를 보니 집에서 촬영한 것 같았다. “강한서, 생일 축하해. 얼른 나아서 최대한 빨리 기억 찾아. 시간 나면 술 한 잔 해.”어두워진 화면이 몇 초 후 다시 환해지며 이번엔 송민준의 모습이 보였다. “생일 축하해. 오늘은 생일이니까 욕은 안 할게. 그리고, 한라봉은 큰 게 맛있어. 현진이가 너한테 거짓말 한 거야.”말을 마친 송민준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도 그런 송민준을 따라 웃으며 생각했다. ‘유치하긴.’그 다음인 정인월이었다. 동영상 촬영은 처음이라 촬영이 시작되었음에도 한참 동안 진씨에게 촬영이 되고 있냐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