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다며 대답한 박해서는 동료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송가람을 지켜보았다. 송가람 곁에 있던 동료가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가람 씨, 한 대표님 비서와 많이 친하세요?”송가람은 그저 씩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해서는 조금은 틀에 박힌 듯 한 사람이라 규정대로만 일을 처리하려고 했고 융통성이 없는 편이었다. 사실 송가람은 박해서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당시 박해서가 면접 보러 왔을 때 송가람은 마침 볼 일이 있어 송민준에게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송민준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면접을 마치고 나온 박해서와 마주쳤다. 사실 송가람은 박해서라는 사람을 잊은지 오래였다. 박해서가 먼저 인사를 건네며 두 사람이 동창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송가람에게 초등학교 시절의 일은 그리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그러니 박해서가 그녀에게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을 때, 송가람은 그저 아무런 감정 없이 대꾸해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박해서는 의외로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수도 없이 비서를 바꾸고도 눈에 차지 않아하던 까다로운 송민준은 박해서를 마음에 들어 한 것은 물론 벌써 몇 년 동안 그를 곁에 두고 있었다. 송가람은 마음을 나누지 않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에게 박해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해금은 늘 그녀에게 박해서와 어느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라고 당부했다. 동창이니 서로 도와주라면서 말이다. 그 당부는 서해금이 박해서에게서 한현진의 유전자 검사 소식을 전해들은 이후로 최고조를 찍었다. 송가람은 박해서가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한 한현진이 깔린느에 출근하기 전까진, 그녀는 박해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제 보니 서해금의 선경지명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송가람은 손에 들린 밀크티를 동료에게 건넸다. “이거 현이 씨가 마셔요.”주현이 멈칫하더니 물었다. “박 실장님이 일부러 사오신 건데 안 마셔요?”송가람이 웃으며 말했다.
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에요? 전 꽃을 배달시킨 적이 없는데요.”“전화번호 끝자리가 8286인 남성분이 주문하셨어요. 꼭 직접 꽃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내려오실 수 있으세요?”익숙한 전화번호 뒷자리에 송가람이 멈칫했다. ‘8286이면, 한서 오빠 전화번호잖아.’송가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로비.배달원이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들고 프론트에 서 있었다. 로비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힐끔힐끔 배달원 손에 들린 꽃다발을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돌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회사로 꽃이 배달되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지 현실에선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그러니 다들 꽃다발의 주인이 누군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송가람이 성큼성큼 프론트 쪽으로 걸어갔다. 본인 확인을 마친 배달원이 송가람에게 사인을 부탁하고 나서야 꽃다발을 전해주었다. 꽃다발을 받아든 송가람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죄송한데 꽃을 주문한 남성분이 또 다른 말은 없었나요?”배달원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사장님께 카드도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카드는 꽃다발 속에 있어요.”송가람이 손을 뻗어 꽃을 뒤지자 그 안에는 예쁜 빨간색 카드가 들어있었다. 프론트에 있던 직원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가람 씨, 남자친구가 보내 준 거예요?”송가람이 붉게 물든 얼굴로 카드를 다시 꽃다발 속으로 넣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뇨, 친구가요.”그녀의 말에 다들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가람 씨 짝사랑하시는 분이 보내신 거구나.”씩 미소 지은 송가람은 그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꽃다발을 안은 채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송가람은 적지 않은 동료들과 마주쳤다. 곧, 송가람을 좋아하는 남자가 그녀에게 꽃을 선물했다는 소식이 회사 전체에 전해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송가람은 그런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비록 입
강한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보름에 할아버님 댁에 있었을 때, 네 휴대폰에 있던 그 추석 인사는 누가 보낸 거야? 누가 보낸 건데 한 밤중에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건데?]멈칫하던 한현진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밤 잠에 들기 전 그녀는 주강운이 보낸 명절 축하 인사를 받았다. 당시 그녀는 문자를 보며 토끼 키링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던 것이다. [너 그때 잠든 거 아니었어?][내가 잠들었는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묻잖아. 앞으로 걔 문자는 내가 너 대신 답장할게. 그래도 돼?]한현진은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말했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해. 난 청렴결백해서 무서울 것도 없어.]원하는 대답을 들은 강한서는 순간 한현진에게 이용 당했다는 사실도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겸허한 태도로 한현진에게 조언을 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송가람에게는 내가 뭐라고 답장하면 되는 건데?][답장할 거 없어. 앞으론 내가 옆에 없을 땐 송가람이 뭘 보내든 답장하지 마. 어차피 자기가 알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거야.][...]강한서와 문자를 주고받는 한현진의 앞으로 송가람이 식판을 들고 와 맞은편에 자리잡고 앉았다. 고개를 들어 송가람을 마주 본 한현진은 조용히 대화창을 껐다. 송가람이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현진 씨, 밥은 먹을 만해요? 만약 입에 안 맞으면 사무실 아래에 있는 식당도 맛있어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제가 사오라고 할게요.”멈칫하던 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예의상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것도 충분히 맛있어요.”송가람이 젓가락을 닦으며 무심코 흘리는 말인 듯 얘기했다. “현진 씨, 제 사무실에 꽃이 좀 있는데, 조금 이따 와서 몇 송이 좀 가져가서 사무실 꽃병에 꽂아요. 바쁠 한 번씩 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낚였다.’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웃으며 물었다. “좋아요. 무슨 꽃인데요?”송가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 테이블에 앉은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점심도 배불리 먹지 못한 한현진은 사무실에 앉아 강한서가 준비해준 산모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오물거리며 성월이 가져 온 깔린느 각 부서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센트가 깔린느로 이름을 바꾼 후 회사의 규모는 점자 확대되었다. 핵심 팀원들도 서해금에 의해 물갈이 되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몇 명 안 되는 초창기 멤버는 아마 서해금 본인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틈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자기 사람을 올려 보내야 했다. 송민준이 데려올 그 여자 아이가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었다. 02년생이라, 너무 어린 나이였다. 웅,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순조로운 첫 출근이냐며 묻는 차미주의 문자였다. 한현진은 휴대폰을 치켜든 한현진은 사무실을 빙 돌며 파라노마 모드로 사진을 찍은 후 차미주에게 전송했다. [완전 크지!]차미주: [!!! 커! 비서 부족하지 않아? 내가 면접 보러 갈게!]한현진이 살풋 웃음을 지었다. [한 대표가 비서로 있어주면 월급으로 1000만 원을 준다고 해도 싫다고 했던 애가 내가 줄 월급이 마음에 들기나 하겠어?][이건 달라. 한성우에게서 급여를 받는 건 왼쪽 주머니의 돈이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은 거잖아. 하지만 너에게서 받는 돈이야말로 정말 버는 거지. 얼마든 상관없어. 다른 건 모르겠고 복은 같이 누리고 힘든 건 네가 혼자 감내하는 거야.]차미주의 문자에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좋은 건 늦게 배워도 나쁜 건 빨리도 배웠네. 너 지금 네가 말하는 꼴 좀 봐. 한성우 씨 그 조잔한 인간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아?]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차미주가 물었다.[이제 첫 출근인데 손가락 모녀가 네 뒤에서 이상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어?][서해금은 내가 멀리 보내버렸어. 그리고 송가람은... 무서워할 것도 없어.][어디로 보냈는데?]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차미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대단한 애라니까. 아빠를
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걔가 널 경찰서에 신고했던 게 미안해서 일부러 값을 많이 쳐준 거야.]차미주가 답장했다. [그때 그 사실을 알았을 땐 그까짓 돈 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싶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두 시간 갇혀있는 대가로 2억이면 난 충분히 할 수 있어. 지금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넌 모를 거야. 최근 6개월 사이에 웹드라마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어서 나 요즘 줄곧 그쪽 일 하고 있었다니까.][너무 인지도 있는 배우도 필요 없고 3일에서 5일 사이면 촬영이 끝나. 대본은 인터넷으로 모집하고 촬영 주기가 짧고 촬영 비용이 적게 들어. 최대 4000만 원에서 6000만 원이면 충분하거든. 하지만 한 작품만 성공시켜도 수십억을 벌어들일 수 있어. 수익이 충격적일 정도로 높다니까. 그러니 지금 우리 업계에서는 제작사마다 웹드라마 제작을 위한 팀을 하나씩은 꾸리고 있거든. 내가 불행하게도 그 팀으로 발령 났지. 매일 투고된 막장 대본을 읽고 있자니 머리가 다 터질 지경이야.]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숏츠도 많이 보지 않게 된 한현진은 차미주가 말한 것들에 대해 잘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차미주에게 무슨 웹드라마냐며 묻자 차미주가 사이트 하나를 보내주었다. 사이트로 들어가 한참을 보던 한현진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반짝하며 떠올랐다. 그녀는 다급하게 문자를 작성했다. [미주야, 나 대본 좀 써줄래?][뭐?]한현진이 말했다. [좀 이따 퇴근하면 너한테 갈게. 만나서 얘기해.]문자로 얘기하기엔 타자 속도가 너무 느렸고 할 말도 너무 많았다. 한현진이 순간 떠올린 아이디어는 바로 차미주에게 수십 년 전 송씨 가문의 일을 웹드라마로 제작하고 한현진이 돈을 써 그 웹드라마를 인기 차트에 올려 이슈화 만드는 것이었다. 만약 서해금의 공범이 있다면 당시 실제 사건과 비슷한 내용의 웹드라마가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에 어쩌면 안절부절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안에 떨며 평정심을 잃는다면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다.
송가람은 흰색 실크 소재의 셔츠를 입고 머리를 느슨하게 뒤로 땋아 내렸다. 진주 귀걸이는 그녀의 마른 몸매에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그녀의 뒤에 따라 붙은 두 사람은 두 손 가득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다. 포장을 보아하니 명품 화장품인 듯 했다. 쇼핑백의 개수로 보아 적은 양은 아니었다. 송가람이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바쁘신데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연휴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바쁘셔서 사무실에 함께 모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은 현진 씨 첫 출근이라 모처럼 모두 계시니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한현진이 생각했다. ‘작은 선물? 환심이나 사려는 거겠지. 어쩐지 주현 씨더러 날 여기까지 불러내더라니. 이걸 보여주려고 그런 거였네.’선물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흥미를 보이며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사무실 분위기도 뜨거워졌다. 한현진은 송가람이 사온 선물을 슥 훑어보았다. 역시나 그녀의 생각대로 화장품과 향수였다. 너무 비싼 것도, 그렇다고 너무 싼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 사람들이 사지 못할 수준의 제품은 아니었다. 마음에 들든 아니든 사람은 선물을 사온 송가람의 성의를 생각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컬러는 전부 품절이라 살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고마워요, 팀장님.”“세상에, 불과 며칠 전에 이 파운데이션 리뷰를 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선물로 받게 되다니. 팀장님, 센스가 너무 좋으세요.”“이 향수 진짜 좋아요. 저희 엄마가 계속 쓰시 거든요.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가람 씨, 무리하신 거 아녜요?”...송가람은 직원들의 인사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심지어 웃으며 말했다. “별로 비싸지 않았어요. 저한텐 그다지 가치도 없는 물건일 뿐이에요. 친구가 가방 살 때 기다리면서 보다가 여러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아 그냥 샀어요.”그녀의 말에 직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을 마주쳤다. 얼굴에 드리웠던 미소가 전보다 옅어졌지만 송가람은 전혀 눈
한현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별 거 아녜요. 올해가 유난히 춥잖아요. 보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날이 풀리지 않아서 몸을 따듯하게 해 줄 수 있는 걸 선물하면 어떨까 생각했었거든요. 평소에도 방한 용품으로 사용할 수 있고요.”‘방한 용품?’‘모자, 목도리, 장갑 아니면 무릎보호대인 건가?’방한이라는 두 글자에 사람들의 호기심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물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회사에서 늘 나누어주었었다. 그러지 도무지 기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현진의 첫 출근 기념 발언을 떠올린 그들은 한현진을 그저 아무 생각도 없는 재벌 2세로 정도로 생각했다. ‘고작 저런 인간이 송가람 씨 모녀와 경영 다툼을 하겠다는 거야?’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송가람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이미 준비한 건데 차라리 지금 나눠줘요. 방한 용품이라 조금만 늦으면 아마 올해는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할 거예요.”주현도 송가람을 거들었다. “한 대표님이 고르신 건데, 방한 용품이라고는 해도 절대 평범한 건 아닐 거예요.”“한 대표님이 하고 계신 목도리도 예쁘잖아요. 혹시 전부 그 목도리로 준비하신 거예요?”“구찌 목도리요? 세상에. 진짜 그 목도리면 전 좋아서 미쳐 버릴 지도 몰라요. 한 대표님, 뜸 들이지 마시고 얼른 공개해주세요. 너무 기대돼요.”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그들은 한현진을 높이 띄워주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송가람의 눈가에는 비웃음이 서려있었다. 한현진이 준비한 물건이 직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뻘쭘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송가람 혼자 조향팀을 마주해야 했기에 서해금은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언질을 해둔 상황이었다. 그덕에 송가람은 조향팀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깔린느에는 똑똑한 사람으로 가득했다. 절대 공략하기 쉬운 곳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창피도 좀 겪어봐야지. 고작 창립자의 딸이라는 신분만으로 깔린느에서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누군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한 대표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한현진이 앞으로 나서며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방금 말했잖아요. 날이 추워져서 여러분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물건으로 준비했다고요.”“아니, 방금 통일된 물건을 준비하셨다고 하셨는데 전혀 같은 제품들이 아닌데요. 전부 다른 디자인이잖아요.”한현진이 말했다. “전부 같은 거예요. 제가 여러분들 옷 사이즈를 모르잖아요. 이제 첫 만남이라 직접 물어보기도 실례인 것 같고 그래서 전부 S사이즈로 구매했어요. 오늘 출근하고 보니까 몇 명은 저와 몸매가 비슷하신 것 같아서 몇 개는 M 사이즈로 바꾸려고 했었거든요. 하지만 가람 언니가 계속 오늘 주라고 하시고 또 여러분들도 기대를 하시는 것 같아서 가져올 수밖에 없었어요.”말하며 한현진은 옷의 재질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 옷들 보기에 두꺼운 것 같아도 입으면 보온성이 꽤 좋은 편이예요. 입기에도 편하고요. 가람 언니도 평소 이 브랜드의 옷을 좋아해서 같은 또래라 안목도 비슷할 것 같아 준비해 봤어요.”주현의 입 꼬리가 부들거렸다. 통일했다는 의미가 같은 사이즈로 구매했다는 뜻이었다니.‘일부러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거 아냐?’주현이 고개를 돌려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의 표정은 흉악스러워 보인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물론 주현은 송가람이 왜 저토록 화를 내는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송가람에게 눈앞의 광경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옷걸이에 걸린 모든 옷은 그녀가 한현진을 농락하기 위해 선물했던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부 한현진은 입을 수 없는 사이즈의 옷이었다. 송가람은 한현진이 그 옷들을 전부 가져와 깔린느의 직원들에게 선물로 주며 마음을 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말은 또 왜 저렇게 거창하게 하는 거야.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사람들은 한현진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명품 브랜드의 옷은 한 벌당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