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동안 찾아오지 않은 엔젤 월드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고 망고나무에 달린 열매도 맛있게 익은 상태였다.하늘이는 전부터 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바짝 들고는 열매가 맺히기를 지켜보는 것을 즐겼으니 오늘 아이는 자기가 직접 열매를 따겠다고 떼를 썼다.김서영은 하늘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사람이었으니 도우미에게 사다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는 밑에서 아이를 보호하려 했다.“조심해.”김서영은 하늘이가 다칠까 걱정되는 듯 옆에서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말했다.“너무 빨리 움직이지 마. 밑에 있는 열매만 따면 돼.”하늘이를 너무도 예뻐하는 김서영은 행여나 아이가 다칠까 노심조차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그러다 하늘이가 열매를 원하는 만큼 따고 내려오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아이는 제대로 땅을 딛지도 못하면서 성유리에게 막 달려왔다.“엄마, 이거!”하늘이는 자신이 직접 딴 열매를 성유리에게 건넸고 힘이 드는지 땀이 맺혀있었지만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초롱초롱한 눈으로 열매를 건네는 하늘이를 보던 성유리는 얼른 손을 뻗어 열매를 건네받으며 대답했다.“고마워.”“하나 더 따서 할머니 줘야지!”말을 마친 하늘이는 뒤돌아 다시 나무가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하늘아, 난 괜찮아. 할머니는 안 가져도 돼.”김서영은 하늘이가 딴 열매를 차마 먹어버릴 수가 없어 거절했지만 하늘이의 태도는 완강했다.“안 돼요! 할머니도 하나 있어야 돼요.”김서영은 하늘이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다급히 외쳤다.“뭐 하고 있어요? 얼른 애 챙겨야죠.”성유리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 웃음을 참지 못하며 김서영에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도 꽤 낮은 것 같은데요? 밑에 매트도 깔고 사람도 지키고 있으니 절대 다칠 리는 없을 거예요.”그러자 김서영은 성유리를 살짝 째려보더니 대답했다.“정말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엄마라는 사람이 담도 크다!”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머리는 왜
그해, 박세빈의 일이 있은 뒤 박한빈은 김난희를 연세가 많아 홀로 생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요양원에 보내버렸다.비록 금성에서 제일 좋은 요양원이긴 하지만 사실 관리가 너무 엄격해 외부인은 마음대로 면회를 갈 수도 없었고 안에 있는 사람도 자유롭게 외출하지 못했다.그러니 김난희가 요양원에서 어떤 생활을 보내는지, 그 생활이 호화로운지 아니면 안쓰러운지 아무도 모른다.만약 집사가 갑자기 김서영이 사는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성유리는 박씨 가문에 김난희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잊었을 것이다.“사모님, 오늘 의사 선생님께서 어르신에게 찾아와 이미 진단을 다 마쳤습니다.”찾아온 손님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김서영에게 말을 이어갔다.“어르신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다른 일들에 다 흥미를 잃으셨고 그냥 누워만 계십니다. 유일한 소원이라 하면 오직 친손자를 만나는 거라고 하십니다.”“박세빈이요?”김서영이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지금 걔는 해외에 있어서 당장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데.”“큰 도련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그 정도 시간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모님에게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큰 도련님 좀 설득해 주시죠.”“이건 저도 장담 못 해요.”집사의 부탁에 김서영은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애초에 어르신이 우리 모자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남들은 모를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 알 리가 없고요. 하지만 저희 모자는 아직 선명히 기억하고 있어요.”“솔직히 말하면 박세빈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해외로 보낸 것도 우리 한빈이가 넓은 아량을 베푼 거예요.”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집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굳이 작은 도련님이 돌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어르신에게 다른 손자라도 보여주시죠?”성유리는 원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필경 이 일은 박씨 가문의 일이니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김서영에게 먼저 가
김난희가 있는 요양원은 성유리도 와보지 못했다.그리고 예상대로라면 이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하늘이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요양원에 오는 것이기에 많이 신기한지 사방을 마구 둘러보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엄마, 저기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는 사람들은 왜 노인이야?”“왜냐하면 여기는 요양원이거든. 노인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야.”“그럼 저 노인들의 자식은?”“밖에서 일하고 있을 거야.”“노인들을 신경도 안 쓰고? 얼마나 외롭겠어.”하늘이의 말이 끝나자 그들에게 길을 안내하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뒤를 휙 돌아봤다.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하늘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아줬고 오늘은 김서영도 두 사람과 함께였다.하지만 그녀는 굳이 김난희를 보고 싶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김난희 또한 김서영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김서영은 밖에서 성유리와 하늘이를 기다리려고 결정했다.“성유리 씨, 이쪽입니다.”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아주 공손했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유리의 기억 속, 김난희는 늘 강하고 성격이 드센 사람이었다.아무리 연세가 지긋하고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해도 김난희는 무너지지 않았고 강인함을 유지했었다.그러나 지금,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나뭇가지처럼 삐쩍 말라 있었고 하늘이는 처음 그렇게 마른 사람을 봐서 그런지 무서워 성유리 뒤로 숨어버렸다.공허한 눈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김난희는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돌렸고 이내 성유리와 하늘이를 발견했다.그녀는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등장에 눈빛이 휙 변하더니 애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뗐다.“네가... 한빈이 딸이야?”하늘이는 성유리의 뒤에 숨어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성유리가 하늘이를 달래며 말했다.“하늘아, 인사해야지. 네 증조할머니야.”긴장했는지 혀로 입술을 핥고만 있던 하늘이가 주춤거리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그러자 김난희는 허허 웃으며 연신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정말 좋구나.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고민하다 결국 김난희가 내미는 서류를 건네받았다.“고맙습니다.”인사를 마친 성유리가 옆에 서 있는 하늘이에게 슬쩍 눈치를 주자 아이도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증조할머님, 감사합니다.”김난희는 두 사람의 인사에도 그저 침대에 기댄 채로 하늘이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성유리는 김난희와 할 말이 딱히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늘이도 그녀를 무서워하자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더 없어졌다.그렇기에 김난희가 버티다 못해 먼저 잠에 든 후,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원래는 김서영이 아직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줄 알았던 성유리는 방문을 나서자마자 뜻밖의 사람과 마주쳐버렸다.그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 그를 발견한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박한빈은 차분했다.성유리와 마주친 박한빈은 이내 시선을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에 돌렸고 망설이던 성유리는 서류를 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어르신께서 주신 주식 양도서예요. 저한테 있어도 별로 소용이 없으니까 이건 돌려드릴게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조롱하듯 물었다.“이건 내가 준 것도 아닌데 갖기 싫어?”“네. 싫어요.”“그럼 돌아가서 할머님께 돌려드려.”박한빈의 태도는 아주 완강했고 성유리가 내미는 서류를 건네받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건네기를 포기해 버렸고 그와도 나눌 대화가 없었기에 하늘이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한테 왜 그가 이곳에 나타난 건지도 묻지 않은 채로.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뒤돌아있는 성유리에게 갑자기 물었다.“할머니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아무 말도 안 했어요.”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지도 않고는 대답을 이어갔다.“그렇게 걱정되시면 가서 CCTV 돌려보세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뭐라 대꾸하지도 못했다. 사실 무슨 얘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냉랭한 성유리의 말투와 목소
박한빈은 결국 먼저 박세빈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이건 최근 2년 안에 박한빈이 박세빈에게 처음으로 연락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박세빈이 아니었다.“박세빈 씨와 어떤 사이십니까? 가족입니까?”수화기 너머 들리는 사람의 말투에 박한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얼른 되물었다.“박세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아,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감염이 꽤 심각한 상태고요.”의사로 추정되는 사람이 다급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가족이 맞으시면 빨리 여기로 오세요. 아마 다른 곳으로 데려가셔야 할 겁니다.”박세빈이 머물던 나라는 위생과 의료 설비,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었다.매년 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거의 다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라에 홀로 살아가고 있던 박세빈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박한빈은 원래 박세빈이 그곳에서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으려 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박세빈이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 그곳에 보낸 것이 아니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집사가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어 박한빈은 도대체 박세빈이 성유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심지어는 혼자 상상하고 두 사람이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려보기까지 하면서 말이다.‘그래서 그때 나를 떠나려고 한 건가?’‘그럼 왜 나중에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거지?’‘분명 잘 앉아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잖아.’박한빈은 자꾸만 드는 의문들에 대한 정답을 몰라 답답했고 하루라도 빨리 그 답을 듣고 싶었다.그는 얼른 자람시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해 먼저 박세빈을 다른 병원에 옮긴 뒤, 그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자기한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박세빈이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인 박한빈은 답을 알고 싶어 점점 더 초조해졌다.김난희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 동안, 장손인 박한빈은 빈소를 지켜야 했고 그 기간 동안 회사에도 많은 업무들이 쌓여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소문들이 업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연정우는 갑자기 떠오르는 샛별처럼 업계에 등장한 사람이고 성유리는 엄연한 박한빈의 전 아내였다.이런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퍼졌고 자연스레 그들이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연정우와 성유리 둘 다 겸손하고 관심받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인지라 업계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들리는 소문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기기 일쑤였다.하지만 지금 판은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오늘은 박한빈의 할머니, 즉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한 날이었는데 연정우와 성유리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그저 그런 형식들이 오가며 차가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던 추모회는 두 사람의 등장으로 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일제히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렸고 다들 그의 사소한 표정 변화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사람들은 마음 같아선 앞으로 달려가 박한빈의 시선을 가로막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 같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를 선택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향을 피우고 애도하고는 연정우와 함께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비통하시겠습니다.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성유리의 행동들은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 같았다.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고 목소리에도 전혀 파동이 없었다.박한빈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의 말을 다 들어줬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는 개의치 않았고 연정우와 함께 떠나려고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박한빈이 굳게 닫았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할 말이 있어.”박한빈은 잘 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던 사람들이 다 귀를 기울일 것이고 무슨 행동을 하던 다 지켜볼 것이라는 사실을.그리고 한 말과 행동들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라 사람들의 “심판”을 받을 것
“박세빈이 전에 너한테 찾아간 적 있지? 걔가 무슨 말을 했었어?”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물었다.조급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와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성유리는 잠시 굳었다 미간을 찌푸리고는 되묻기 시작했다.“무슨 뜻이에요?”“내가 지금 묻잖아. 그때 내가 구치소에 있을 때 말이야. 박세빈이 너 찾아간 적 있지?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데? 협박이라도 한 거야?”“걔가 너한테 한 말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고 했어? 혹시 나한테 영향을 끼칠까 봐? 맞아?”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성유리만 뚫어져라 보는 박한빈은 며칠 밤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마치 이 결론이어야만 당시 성유리의 선택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박한빈은 어쩌면 박세빈이 정말 성유리를 협박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 정말 성유리가 재물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여자였다면 떠날 때 박한빈이 준 모든 물건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늘 모순적이던 성유리의 행동이 그제야 퍼즐 조각처럼 맞아가는 것 같았기에 박한빈은 꽉 막혀있는 속이 풀리는 기분마저 들었다.마음 같아서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성유리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주지 않은 건지, 왜 홀로 그런 감정을 떠안고 살았는지.분명히 남편이던 자신에게 알릴 수 있었지만 왜 숨겼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답을 안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 박세빈의 협박 때문에 자신을 떠난 것이 맞다면 말이다.“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침묵하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짧디짧은 한마디에 박한빈의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이 일제히 사라져 버렸고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유리를 쳐다보았다.“박세빈 씨가 저한테 찾아왔던 건 맞아요.”성유리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근데 저를 협박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박한빈에게 물었다.아무 대답 없는 박한빈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성유리는 그의 침묵이 곧 수긍이라고 생각해 뒤돌아 떠나버렸다.박한빈은 전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떠나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던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세빈 쪽에 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박 대표님, 깨어났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박한빈은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네.”몇 초 뒤, 박한빈은 수화기 너머에서 박세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어머나, 이게 누구십니까? 한빈 형님 아니신가요?”박세빈은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나약했고 힘없어 보였다.“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형님이 아직 저 같은 동생을 기억하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박한빈은 자신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박세빈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며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셨다.”그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는 약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박세빈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어쩐지 전에 쓰러졌을 때 꿈에서 할머니가 나타난다 했는데...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찾아오셨나 보군요.”박한빈은 옛날 박세빈이 박씨 저택에 들어왔을 때, 김난희에게 아부하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비록 당시에도 박한빈은 박세빈이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김난희의 부고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박한빈은 굳이 이런 문제로 박세빈에게 따지고 싶지 않아 낮은 소리로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 아쉽게도 볼 기회가 없었지만. 3일 뒤에 장례식이 끝날 예정인데 오고 싶으면 와도 돼.”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꾹 닫아버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세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형, 지금 제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계십니까?”“최근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성유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두 주먹을 꽉 쥐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정우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마치 엄청나게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 웃음에는 묘한 결단력이 섞여 있는 것도 같았다.그리고 이내 진정한 연정우가 말했다.“뭘 솔직하게 말하라는 거야? 내가 솔직히 말하면 우리 관계가 더 나아질 것 같아? 내가 지금 다 털어놓으면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성유리, 자꾸 나를 이렇게 속이지 마.”그 순간, 성유리가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답이 확실해지자 꽉 쥐었던 두 손에도 힘이 풀렸다.애써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연정우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그래. 맞아. 난 널 속였어.”“그 투자자라는 사람, 사실은 유효정 씨야. 그 사람 아버지가 해외에 남긴 자산이 있어서 이번에 그걸 함께 가져오려는 거야.”“그리고 그것도 맞아. 나 또다시 유효정 씨와 얽혀버렸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그 사람을 좋아한 적 없어. 난 유효정 씨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이 모든 게 너와 하늘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지.”“그게 전부야?”성유리가 물었다.“뭐라고?”“나 하나만 더 묻고 싶어.”성유리가 말을 이었다.“네 회사가 지금 이 상황까지 온 게 정말 나 때문이고 박한빈 씨 때문인 거야? 아니면 그 과정에서 네 원인도 있어?”“그거 박한빈 씨가 말한 거야?”연정우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묻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그는 피식 웃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이미 성유리에게 답을 전해주고 있었다.“난 네가 어떤 상황에서도 날 선택한 줄 알았어.”망설이던 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데 알고 보니까 너는 내내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네.”“내가 뭘 속였는데? 내가 너한테 잘못해 줬어? 그리고 네가 아니었다면 박한빈 씨가 나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였겠어?”“그래. 내가 조금 극단적인 수단을 쓴 건 맞아. 하지만 이 업계에서 그렇게 깨
연정우가 놀이공원의 티켓을 핸드폰으로 보내왔을 때, 성유리는 막 하늘이를 재우고 있었다.[아까 물어봤는데 거기 직원들이 꽤 많대. 혼자 하늘이 데리고 갔다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그 사람들을 찾아가.”연정우는 성유리가 이 시간에 아이를 재우고 있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전화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그는 차분하고 다정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뿐만 아니라 주의 사항도 몇 가지 더 보내줬다.성유리는 연정우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연정우는 기다렸다는 듯 금방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하늘이는 자?”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요 며칠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잠시 머뭇거리게 되었다.잠깐 침묵한 뒤,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응. 잠들었어.”“내가 아까 보낸 거 다 봤지? 직원들이 준비는 해두겠지만 그래도 수건 두 장 정도는 챙겨 가. 그리고 하늘이가 좋아하던 수영 튜브도 잊지 말고...”“연정우.”그가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그의 말을 뚝 끊었다.가벼운 세 글자일 뿐이지만 연정우는 그대로 멈춰버리더니 뭔가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레 물었다.“왜?”“며칠 뒤에 출장 간다고 했잖아. 누구랑 가는 거야?”성유리가 물었다.“혼자 가.”“정말? 그 투자자는... 네가 아는 사람이야?”“알긴 알지. 왜?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 건데?”연정우는 웃으며 물었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나지막한 성유리의 숨소리에 연정우는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를 거뒀다. 하지만 성유리는 그때까지도 침묵하고 있었다.“무슨 일 있어?”정적을 참다못한 연정우가 먼저 물었다.“누가 뭐라고 한 거야?”“응.”성유리는 아까와 달리 재빨리 대답했지만 연정우는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왜 내게 물어보지도 않아? 누가 그랬는지.”성유리는 침묵하는 연정우가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연
성유린느 고개를 들어 유효정을 똑바로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다.“저 싫어하신다면서요. 근데... 왜 저한테 이런 걸 알려주시는 건데요?”“왜냐하면 전 연정우 그 사람을 유리 씨보다 더 싫어했거든요. 그때 정우 씨가 일부로 판을 짜서 저를 해친 거 알아요. 게다가 정우 씨가 신고하지만 않았어도 제 아버지한텐 그런 일이 생기기 않았을 거고요. 제가 연정우 씨를 싫어하지 않을 이유라도 있나요?”“그래서... 자산 뭐 그런 말 하신 것도 정우를 속인 거네요? 맞아요?”“네.”유효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미소 띤 얼굴로 보며 물었다.“어때요? 정우 씨한테 알려드릴 건가요?”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대답했다.“근데 전 이 모든 걸 다 유효정 씨 혼자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뭐라고요?”“유효정 씨가 그랬잖아요. 그때 유씨 가문을 고발한 건 정우라고. 그러니까 유씨 가문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는지 정우가 모를 리가 없었을 거예요.”“해외에 자산이 더 있다는 것도... 꼭 알고 있을 거고요.”“게다가 막 출소한 유효정 씨가 자산이 있다는 걸 증명하려면 전문적인 사람을 찾아가야 할 텐데 말이죠.”“정우도 이 업계에서 몇 년 동안 몸을 담그고 있었어요. 그런 정우를 속이려면 쉽지 않을 거고요. 누가 유효정 씨를 도와주고 있다면 모를까.”성유리의 목소리는 냉랭하다 못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유효정은 그런 성유리를 주시하다 더욱 환한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그래서요? 유리 씨 생각엔... 누가 절 도와주는 것 같은데요?”“박한빈 씨요.”성유리의 말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유효정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녀의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생각이 든 성유리는 바로 뒤돌아 떠나려 했다.그러나 그때, 유효정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그 자산들이 다 가짜라고 해도 정우 씨가 그걸 위해 저랑 같이 잔 건 사실이에요.”“그때 정우 씨가 틀린 선택을 했다고 하셨죠? 이제 증명됐죠? 다시 한번 그런 일이 반복된다고 해도 정우 씨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시죠?”유효정은 또다시 옅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사실 전 성유리 씨를 싫어했어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질투라고 봐도 되죠.”“왜냐하면 성유리 씨는 제가 갖지 못한, 가질 수 없는 물건들을 다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에요.”“다른 건 다 둘째 치고 성유리 씨는 그 얼굴로 쉽게 가지고 싶은 물건을 다 차지하시잖아요. 정말 사람 미치게 하죠. 질투심에 눈이 멀게 하시고.”성유리는 유효정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유효정 씨도 전에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많잖아요.”이 말에 유효정은 잠시 멍해지더니 금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성유리 씨 말이 맞아요.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지금 저한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데.”“그렇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생전에 저한테 물려주신 인맥이 좀 남아있거든요. 그리고 해외 투자자들도 몇 있고요.”유효정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성유리를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그래서 이제는... 제가 아까 드린 충고가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성유리는 그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연정우 씨가 혹시 최근에 해외로 출장 간다고 말하지 않으셨나요?”“더 이상 성유리 씨를 속이지 않을게요. 정우 씨 저랑 함께 가요.”유효정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지금 정우 씨 회사 상황이 최악이란 거 저도 알아요. 그래서 전 아버지가 남겨두신 해외 자산들을 정우 씨에게 주기로 했고요. 대가는... 제가 뭘 요구했는지 짐작이 되시죠?”그녀의 말에 성유리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더니 바로 대답했다.“그럴 리 없어요.”“뭐가요?”“정우는 이미 전에도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젠 더는...”성유리는 아니라고 확신하며 말을 이어갔지만 유효정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그녀에게 보여줬다.사진 속에 담긴 사람은 다름 아닌 유효정과 연정우였다.하얀색 침대보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호텔 방 안이 틀림없었고 사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그리곤 반사적으로 하늘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는데 그녀의 행동에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잖아요? 전... 유리 씨가 절 잊은 줄 알았는데.”‘잊는다고?’성유리는 그날 끔찍했던 그 기억을 쉽게 잊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칼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던 유효정의 얼굴도, 느낌마저 생생했다.그때 성유리의 얼굴엔 꽤 큰 흉터까지 남았었지만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점점 옅어지더니 이젠 잘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유효정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보이자 성유리는 그 당시 느껴지던 고통과 두려움이 다시 떠올라 힘들었다.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고 유효정은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따님이 너무 귀엽더라고요.”유효정은 말하며 은근슬쩍 성유리 뒤에 숨어있는 하늘이를 쳐다봤고 자신의 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성유리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성유리는 항상 어정쩡하게 굽혀져 있던 어깨까지 쫙 편 채 유효정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치 새끼를 지키려는 암탉처럼 말이다.그 모습을 본 유효정은 깔깔거리며 크게 웃더니 조롱하듯 물었다.“아니, 지금 그게 무슨 표정이세요? 설마 제가 성유리 씨 딸까지 건드릴까 봐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요. 여긴 탁 트인 밖이고 보는 눈도 많으니까 그런 짓은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전 두 번 다신 지옥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대체 뭐 하시려는 거죠?”성유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유효정은 원래 하늘이를 주려고 꺼내 들었던 사탕 껍질을 까 자기 입에 넣더니 대답했다.“뭐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3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해서 그래요.”“보니까... 잘 살고 계시는 것 같은데.”“정우 씨랑 다시 만나신다고요? 진짜 뒤끝 없는 분이셨네요. 그 사람 때문에 성유리 씨가 죽을 뻔했는데 말이죠.”성유리는 대답이 없었고 유효정은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진
연정우는 성유리와 한 달 내로 장성 그룹 일을 다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었다.게다가 그는 미리 전부터 바다 위에 있는 놀이공원을 가고 싶다는 하늘이의 말에 표까지 다 예매해 둔 상태였다.하늘이는 너무도 기대가 되어 성유리에게 자신의 수영복을 사러 백화점에 가겠다고 부탁하기도 했다.하지만 약속일 이틀 전, 연정우는 갑자기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미안해.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은데.”“해외에 있는 투자자 쪽에서 나를 한 번 만나보겠다고 했어. 만약 얘기가 잘 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몰라. 그래서...”연정우의 목소리는 두 사람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죄책감이 그득히 담겨있었다.“괜찮아. 너 바쁘면 먼저 가서 일해야지. 나 혼자 하늘이랑 가도 돼.”성유리는 괜찮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연정우에게 대답해 줬다.“그럼 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까? 너랑 하늘이 데리고 같이 가라고? 너 혼자 애 데리고 가면 얼마나 힘들어.”“괜찮다니까. 언제는 뭐 안 이랬어?”성유리는 걱정하는 연정우를 안심시키듯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회사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거네?”기분이 좋은 듯 들뜬 말투로 묻는 성유리의 목소리를 들은 연정우는 그녀가 신경 쓰는 게 결코 돈이나 이익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성유리는 지금 진신으로 연정우의 일에 기뻐하고 그를 대신해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필경 연정우가 어떤 삶을 좋아한다고 한들 그가 장성 그룹을 위해 들였던 시간과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일이 어떻게 된다고 한 대도 장성 그룹의 막은 결코 이렇게 내려가면 안 되지 않은가?연정우는 성유리의 감정에 동기화된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아마도 그렇겠지? 근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그래도 괜찮지. 적어도 희망은 남아있는 거니까.”성유리가 물었다.“그래서 어디로 출장 갈 예정인데?”“강원국. 비행기 티켓도 다 끊어뒀어.”“응. 조심히 다녀와.”“그래. 올 때 너랑 하늘이 선물도 가져올까?”“성유리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
하지만 지금, 연정우는 주동적으로 유효정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유효정은 은근히 이 상황을 즐겼고 연정우는 어느새 그녀를 회사 안까지 데리고 들어섰다.사람이 그다지 없는 곳에 다다르자 연정우는 바로 유효정의 손을 놓더니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유효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연정우의 온기에 마음이 공허해졌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제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죠? 저 만기출소 했어요.”그녀의 대답에 연정우는 입술을 오므리며 다시 물었다.“제 말이 지금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그럼 무슨 뜻인데요?”유효정은 연정우의 의도를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계속 말했다.“설마... 저는 연정우 씨를 찾아오면 안 되는 사람인 거예요?”“그렇지만 잘 아시잖아요. 저희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고 옛 친구들도 저를 피해요. 아무도 저를 만나주지 않는다고요. 이 도시에서 전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죠.”“이런 상황에 연정우 씨를 찾아오지 않으면 제가 또 누구를 찾을 수 있겠어요?”유효정은 말하며 연정우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그러나 연정우는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흠칫 놀라더니 표정 또한 삽시간에 변했고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그는 마치 유효정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싫은 사람처럼 그녀를 피했고 심지어는 같이 서 있으려 하지도 않았다.연정우의 행동에 유효정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고 그 순간, 연정우가 말을 꺼냈다.“왜 감옥에 갇히셨는지 잊으셨습니까?”“저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유효정은 연정우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정우 씨가 절 신고했잖아요. 아니에요?”“그리고 나중에야 저도 생각 정리를 마쳤죠. 분명 제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로 제 앞에서 성유리 씨한테 얼마나 많은 감정이 남아있는지 드러냈잖아요.”“만약 정우 씨가 정말 진심으로 성유리 씨를 사랑했다면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유효정은 지금 자신이 그와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유효정은 에둘러 말하지 않기로 하고 바로 말하기 시작했다.“박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저희 집 재산이나 회사 다 뺏기고 제 부모님마저 세상을 뜨셨다는 사실을요.”“그래서 전 출소한대도 별 소용이 없었어요. 이 도시에 믿을 수 있는 사람 한 명 없기 때문이죠. 심지어 생계를 유지할 방법도 없고요.”“근데 요즘 박 대표님께서 골치가 아파하는 일이 하나 생겼다고 들었어요. 만약 제가 대표님 대신에 그 일을 해결해 주면 박 대표님께서 저한테 돈을 주실 수 있나 해서요.”박한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유효정을 쳐다보며 웃더니 물었다.“네?”“대표님께서 왜 연정우 씨를 벼랑 끝까지 내모는지 저도 잘 알아요. 성유리 때문이 아닌가요? 근데 아마 대표님은 모르실 거예요. 연정우 그 인간은... 자기 지위나 권력에는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 박 대표님이 하신 공격은 번지수를 잘못 짚으신 거죠.”“그리고 사실... 연정우 씨와 성유리 씨 사이를 갈라놓으려면 이렇게 번거롭게 하실 필요도 없어요.”박한빈은 말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저한테 기회를 주신다면 꼭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보장할게요. 그때가 되면 성유리 씨도 자연스레 대표님 곁으로 돌아올 거고요. 어때요?”유효정의 말은 아주 단순했다. 그녀는 지금 박한빈에게 모 아니면 도의 선택지를 던져주는 것이었다.박한빈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유효정에게 물었다.“무슨 뜻입니까? 뭘 어떻게 하실 셈이죠?”“제가 뭘 하든 그건 박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죠. 대표님께서는 그냥 제가 방금 제시한 조건에 대해... 답해주시면 돼요.”“많은 돈은 안 바라요. 100억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지금 대표님 몸값만 얼마나 되는지 잘 알아요. 이정도 돈은 박 대표님에게 있어 껌값 아닌가요? 껌값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되찾으면 좋은 거잖아요.”박한
“그리고 나도 믿어. 정말 하루아침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때가 와도 난 잘 살 수 있을 거야. 잘 살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거고. 특히 유리 너를 원망할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연정우의 대답에 긴장감에 바짝 굳어있던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서 오늘 종일 이것 때문에 걱정했어?”“응...”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도 어머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래도 사모님은 널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응. 안 그럴게.”연정우는 빠르게 대답했지만 성유리는 그의 대답이 성의 없어 보여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러자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아까 화난 건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그런 거야. 그렇지만 이제 보니 오해였던 것 같네.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어머니랑 안 싸울 테니까.”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그나마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너 지금 어딘데?”“회사. 근데 곧 집에 가려고.”“알겠어. 집에 가서 푹 쉬어.”“너도. 일찍 자.”연정우의 다정다감한 말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고 성유리는 간단한 대답만 마치고는 통화를 끝냈다.한편, 연정우도 회사를 떠나려고 주차장에 내려갔지만 평소와 달리 싸한 기분에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심호흡 한 번 하고는 바로 뒤돌아보았지만 텅 빈 주차장엔 아무도 없었다.연정우는 제 자리에서 한참 사방을 둘러보다 확실히 자기 빼고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요즘 너무 피곤해 환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겼다.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차 문을 닫고는 바로 시동을 걸어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하지만 연정우가 떠나자마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짧은 머리였고 모자까지 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절반쯤 드러난 얼굴에는 너무